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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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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익명 (미확인) | 수, 2018/02/07- 13:14

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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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살 오현주, 1938년. 임경석 제공

오현주(吳玄洲)는 신여성이었다.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그가 태어난 1892년 무렵은 여자가 교육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현주가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오인묵이 기독교를 믿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호서·호남 지방의 기독교 선교 기지라는 평판이 있는 전북 군산 구암교회의 첫 조선인 장로였다.

오현주는 13살 때 처음 구암교회의 미국인 목사 부위렴(윌리엄 F. 불l)의 부인에게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열성으로 다니는 조선인 신도들의 여느 딸들과 함께였다. 친언니 오현관(吳玄觀)도 같이 있었다. 소녀들은 주로 성경과 산수를 배웠다. 기독교 소양과 함께 가감승제의 기본 셈법을 익힌 것이다.

3·1운동이 뒤흔들어놓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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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교회 임원들과 찍은 사진, 1942년.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오현주다.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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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주의 오빠,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 자매가 신교육을 한 계기 가운데는 오빠 덕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긍선(吳兢善)은 오현주보다 14살이나 위였다. 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마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유학 중에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이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긍선은 1908년 귀국해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교장직을 21년간이나 했다.

소녀 오현주의 학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1906년 집안에 초빙된 한문 교사에게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것은 17살 되던 1908년이었다. 서울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 제2학년에 들어갔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이 학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 수준의 학교였다. 오현주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졸업했다. 그때 학교 문을 나선 제4회 졸업생은 22명인데 그중에는 오현주 자매를 포함해 김마리아, 유각경, 유영준, 우봉운 등 뒷날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①

교육 기간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약 6년이었다. 덕분에 오현주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가을부터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4년, 경남 진주 광림여학교에서 1년6개월, 서울 경신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었다.②

오현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각지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교회 출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기독교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결혼도 교회의 인연에 따랐다. YMCA 지도자이자 신간회 회장을 한 이상재가 중매를 섰다.

상대방은 2살 아래의 강낙원(姜樂遠)이었다. 두 사람은 1915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오현주가 24살 되던 해였다. 남편은 체육인이었다. 유도와 검도가 전공 분야였다. 결혼 이듬해에 유도 수련을 위해 일본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에 유학하러 도쿄에 건너갈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강낙원은 이후 서울에 무도관(武道館)이라는 유도 수련장을 세웠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사 창간 10주년 기념 각 방면 공로자 표창식에서 ‘체육계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③

3·1운동이 오현주의 삶의 궤적을 뒤흔들어놓았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풍미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은 혁명적 시기였다. 수백만 군중이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맡아

수감된 투사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 사정이 곤란한 수감자는 사식도 차입받지 못하는 것을 본 여성들이 나섰다. 오현주 자매도 그랬다. 은밀히 돈을 모으고 수감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활동의 구심체가 됐다. 4회 졸업생 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 참가했고, 6회 졸업생 장선희·이순길, 3~4회 후배인 이성완·김정숙 등이 가세했다. 전·현직 교사, 간호부 등 전문직 직업의 신여성들이었다. 활동 범위도 확대됐다. 격문과 지하신문를 은밀히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서 외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전달했다. 관련자와 활동 범위가 늘자 책임과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라는 여성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나이가 많은 오현관이 회장을 맡고 재무, 통신원, 지방 파견원 등의 직책을 두었다.

1919년 6월 조직이 확장됐다.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가진 두 비밀결사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중국 상하이 망명자들과 긴밀히 연계한 것이었다. 새 통합 단체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 직책을 맡았다. 단체의 덩치가 커졌고, 지부 조직까지 결성됐다.

그해 6월은 3·1운동의 한 전환점이었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가 타결됐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누구 눈에도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옅어졌음이 명백해졌다. 그뿐인가. 4월 중순 이후 만세시위운동이 잦아들었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눌린 탓이기도 했지만, 독립의 희망이 스러졌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듯이 간헐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다시 혁명적 정세가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애국부인회 활동도 점차 위축됐다. 특히 오현주 회장의 활동력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조직에 위기가 찾아왔다.

새 원동력이 나타났다.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김마리아가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김마리아는 쉼없이 활동을 재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의 퇴조에 실망한 구성원들을 독려해 조직을 강화했다. 10월19일이었다. 16명의 여성이 은밀히 모여 애국부인회를 재결성했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전임 회장인 오현주는 망명자들과 대외 연락을 맡는 교제부장 직위에 이름을 남겨두었다.

남편 강낙원이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로 나갔다가 9개월 만에 귀국한 것이다. 상하이, 만주, 연해주를 둘러보고서 되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국외로 나갔다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밀 활동 정보 넘기는 조건

강낙원은 비관적인 미래를 토로했다. 독립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비밀결사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비밀결사의 회장직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형을 면제받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한 남성을 집에 들여 며칠 묵게 했다. 유근수(劉根洙)였다. 그는 남편의 유도 사범이자 체육계 선배라고 했다. 또 진퇴양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권한을 가진 자라고 했다.

앞얘기는 사실이었다. 유근수는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④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대한학회 회원록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학교 설립 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도 신문에 기고했다. 체육은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근원이므로, 이를 급무로 생각하고 확장시키자는 주장이었다.⑤ 실제 1909~12년 서울 YMCA회관 내부에 유도·검도부를 운영했다. 유근수와 강낙원은 유도·검도계의 가까운 선후배였다. 강낙원은 유도와 검도를 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유근수가 경영하다 포기한 YMCA 유도·검도부도 인계해 1921~23년 경영했다.

뒷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근수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살릴 도리가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오현주의 배신을 유도하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본 경찰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현재 그는 대구경찰서 소속 형사였다.

오현주는 결국 남편과 형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의 비밀 문건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최고위급 수준의 보장이 필요했다. 유근수는 수완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했는지, 아카이케 아쓰시(당시 41) 경무국장 면담을 성사시켰다.

유근수는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자동차는 서울 남산 밑 왜성대 깊은 곳에 있는 경무국장 관사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경무국장은 일본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일본의 전형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오현주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 오현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짧은 회견이었지만 동료들의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⑥

일제 검거시 유일하게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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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 검찰관 이의식의 도장, 1949년. 임경석 제공

1919년 11월28일이었다. 애국부인회 구성원의 일제 검거가 개시됐다. 회장 김마리아를 필두로 전국에서 애국부인회 회원 70명이 체포됐다. 정신여학교 교사를 비롯해 관련 여성이 11명이었다. 16%를 차지했다. 피검된 사람의 53%는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관계자였다. 그들은 대개 간호부였다.⑦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부인회와 깊은 관련이 있던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도 10여 명 체포됐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서는 유근수가 소속된 경상북도 경찰부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들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렸다. 특히 김마리아 회장이 위중했다. 그는 코와 귀의 화농 증상이 심했고, 고문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에 달군 인두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는 야만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결사부장이자 부산지부장인 백신영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심각한 위장 손상을 입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삐쩍 말랐다. 거의 빈사 상태였다. 서울지부장 이정숙은 발에 동상을 입었다. 진물이 흐르고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애국부인회 사건의 피고인들은 조선총독부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 회장과 황애시덕 총무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의경 서기, 이정숙 적십자부장, 장선희 재무부장, 김영순 서기는 징역 2년형, 유인경 대구지부장, 이혜경 원산지부장, 신의경 경기도지부장, 백신영 부산지부장은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현주 부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오현주는 단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석방됐다. 남편 강낙원도 조사를 받았지만, 일주일 뒤 풀려났다.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기로는 언니 오현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이케 경무국장의 약속은 차질 없이 이행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혹여 진술이 필요할지 몰랐다. 대구에 5개월간 체류해야만 했다. 하지만 숙식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가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비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돈도 받았다. 3천원의 기밀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일당이 1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에 해당했다. 오현주 부부는 1922년 가을 이사를 갔다. 연지동 43번지 작은 가옥을 처분하고, 원서동 196번지 크고 넓은 집을 사서 옮겼다. 옛집의 판매대금은 1200원이었고, 새집의 구매대금은 4200원이었다. 새집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부는 수십 년간 그 집에서 눌러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불기소

오현주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중류’의 생활수준을 뒷받침했고, 아내는 아들딸 낳고서 집안을 잘 건사했다. 기독교 신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적을 두고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 교회 집사, 권사에 차례로 선임됐다. 중등부 여학생반을 지도하고,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위원회 재정부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대리석 현판도 자비로 제작해 기증했다.⑧

해방 뒤에도 순탄했다. 남편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 진영에 깊숙이 가담했다. 1948년에는 전국 규모의 극우 단일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을 때다. 1949년 3월16일 오현주 부부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오현주는 그해 5월4일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개월20일간의 짧은 구금과 조사를 거친 뒤 석방됐다. 남편은 약간 더 고생했을 뿐이다. 강낙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됐지만, 머잖아 보석 조치로 석방됐다. 마침내 그해 8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모든 반민족행위자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있게 됐다. 오현주는 1989년 병사했다. 향년 98살의 천수를 누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여교졸업, <황성신문> 1910년 6월19일
②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申亨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5∼17쪽, 1949년 3월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③ <동아일보> 1930년 4월2일치
④ ‘劉根洙’, <大韓帝國官員履歷書> 25책, 641쪽, 1972년
⑤ 劉根洙, ‘論體育說’,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5일치
⑥ 특별검찰관 李義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8∼23쪽, 1949년 4월14일
⑦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3쪽, 2003년
⑧ <안동교회 90년사>,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59쪽, 217쪽, 2001년

<2018-02-05> 한겨레21

☞기사원문: 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관련기사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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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07/2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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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대 위험없는 군사옵션, 과연 존재하는가?
(연합뉴스tv)

[앵커]
미국 매티스 국방장관이 서울을 중대한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대북 군사옵션 방안이 존재한다 이렇게 언급했는데요.

이외에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북한과 관련된 강경 발언들을 일삼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군사옵션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재선 정치안보 전문기자 연결합니다. 이재선 기자!

계속 강경발언이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자]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미중정상회담 직전에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올라와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핵실험, 미사일발사 때마다 강경발언들을 쏟아왔습니다.

지난 8월 “화염과 분노”, “가만두지 않을 것” 등의 발언들이 이어졌고 유엔 대북 제재안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검토한 옵션에는 전술핵배치·참수작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앵커]
과연 그러한 옵션이 가능할까요?

[기자]
이중 참수작전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과거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할 때 미군 특수부대가 들어갔죠.

네이비 실 팀이 들어갔는데 이런 특수부대가 평양에 들어가서 이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작년 아프간에서 탈레반 지도자 만수르를 제거할 때는 스텔스 무인기를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해서 참수작전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과연 서울은 어떻게 되겠는가가 문제입니다.

결국 공격형 무인기를 동원하는 군사옵션을 선택한다고 할 때 북한의 지도부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가 됩니다.

[앵커]
지금 한미 정보력이 그 정도까지 가능한가요?

[기자]
그것이 바로 킬체인 개념인데 북한의 지도부 움직임을 과연 포착할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앵커]
실패할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기자]
실패를 하게 될 경우 서울은 전면전을 피하기 힘듭니다. 전쟁 직후 8분안에 수만개의 북한 방사포가 서울을 날라옵니다. 8분안에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은 평소 대피훈련을 해온 주한미군 가족들과 외교관 등일 것입니다.

결국 참수작전이 조금이라도 실패하게 된다면 전면전이 벌어지고 10분안에 수도권 2300만명 중 절반이상에 위험에 노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앵커]
그런데 왜 참수작전을 언급하는 것인가요?

[기자]
일종의 북한에 대한 협박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문제는 이런 말들이 자주 언급될수록 북한의 미사일, 핵실험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발언들이 북한을 자극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발언들이 북한 뿐 아니라 한국 국민들에게도 불안감을 주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제로 트럼프가 9월 9일 북한 행사장을 폭격하겠다는 발언을 해서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었죠?

다행히 아무일이 없이 지나갔지만 이런 발언들이 자주 있게 될 경우 오히려 북한을 더 자극해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의 빈도를 높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발언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전쟁에 대한 불감증이 오히려 커져서 막상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누구도 대처할 수 없게 될 것이고요.

[앵커]
그렇군요. 이번 시간은 서울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대북군사옵션이 가능한지를 확인해보았습니다.

일, 2017/10/08-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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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환장한 미친 늙다리
악마 트럼프의 막말 모음

“한국은 미쳤다”
(2015년 10월 12일 정치단체 노라벨스가 트럼프를 초청한 자리에서)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더라”
(4월 19일 중국과의 정상회담 후)

“한국은 하나만 알아”
(9월 4일 트위터)

“한국, 대북 대화 구걸하는 거지 같다”
(9월 7일 아베 총리와의 통화에서)

“한국에 수십억달러 무기판매 승인”
(문재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한국, 은혜를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북한 9.9절 기념식장 공습하겠다”
(7월 31일 아베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북한 화염과 극심한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
(8월 9일 기자회의 대화)

“(북한) 산산조각낼 것”
(9월 15일 공군기지를 방문해서)

일, 2017/10/08-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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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구로 설치된 임시교육심의위원회의 한 장면. ‘문교의조선’ 1928년 9월호.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16년 7월 일제는 조선 문화유산의 조사와 보존을 심의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조사방법의 유형은 일반조사·특별조사·임시조사 등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고구려·백제·신라·한사군·임나와 관련된 지역이 집중 조사 대상으로 선정됐다. 이는 고적조사위원회의 실제 목적이 문화유산의 가치를 밝히기보다는 식민사학의 논리를 찾는 데 있었음을 방증한다. 1922년 12월 등장한 조선사편찬위원회와 이를 이어받은 조선사편수회가 철저하게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서를 발간하는 데 몰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1939년 2월에는 조선인의 만주 이민을 국책사업으로 간주하여 ‘이민위원회’를 설치했다. 만주 개척은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오랜 계획의 일부분이었고, 일본인의 이민이 사실상 실패하자 조선인이 적극 동원됐다. 그 해 8월 ‘개척민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한 위원회는 △농업·공업·광업 분야의 실제 기술자 파견 △청년의용대를 늘려 개척민 지도자로 활용 △강원도와 함경도의 화전민을 만주 삼림지대로 파견 등을 의결했다. 이처럼 조선인의 만주로의 이주는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통제되었다.

위의 두 사례는 일본이 조선 식민지배 과정에서 위원회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여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은 그동안 실체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조선총독부 산하의 140여개의 위원회에 관한 정보를 모두 담았다. 위원회는 식민지 조선이 당면한 현안에 대한 심의·조사·자문·징계·조정의 기능을 갖추고, 긴급한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위원회가 한시적으로 운영됐음에도 그 역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식민지 조선에서 모든 사안이 총독 1인의 제왕적 리더십에 따라 처리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위원회를 통해 많은 부분이 결정된 측면도 있다”며 “앞으로 연구를 통해 더 밝혀지겠지만 위원회는 식민통치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토지·농업·교육·상공업·세제·경제정책·노동·강제동원·재난대응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해 설치되었다. 이는 일본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 이상으로 세세하게 조선 사회를 파악하고 통제했음을 드러낸다. 이미 통감부나 총독부 산하에 관련 부서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별도로 위원회를 설치해 이중, 삼중의 통제 장치를 마련한 경우도 많았다. 치안유지법으로 처벌을 받은 사상범 중 비전향자를 구금하는 문제를 다룬 ‘예방구금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본격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일상 구석구석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예방구금제도는 일본보다 조선에서 먼저 시행되었는데, 전향하지 않는 사상범에 대해서는 무기한으로 구금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주택대책위원회’, ‘물가위원회’, ‘조선전염병 및 지방병조사위원회’, ‘조선중앙위생회’처럼 이른바 ‘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구들은 일제가 식민지인의 동요를 막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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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4월 28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조선학도동원 교별기준 관련 기사. 일제는 1944년 4월 조선 학생을 전쟁에 동원할 목적으로 학도동원본부를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번에 나온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사실상 상실한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한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 총 248개(통감부 26개, 조선총독부 222개)를 모두 포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박수현 실장은 “각각의 기구에 대해 개별적인 논문은 존재했지만,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의 관보 등 공식 문헌을 토대로 실증적인 자료를 만들어낸 것은 이 사전이 처음이다”고 밝혔다. 사전은 또한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둔 최고 권력기구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총론과 함께 연도별로 기구의 현황과 구조를 담은 부록, 각종 사진을 수록했다.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는 근대 법령 체계와 관료제를 기반으로 설치,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외형적으로는 근대국가의 요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통치구조에 종속적이었을 뿐 아니라, 조직체계나 기능의 측면에서 근대화보다는 식민지 경영에 주력하는 등 ‘근대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통치기구의 근대적 체계와 운용은 식민지 지배의 억압성과 수탈성을 은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상당수의 기구나 법령, 정책 규제 용어 등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곧바로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연구소는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맞아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일본군·국영기업·관변단체 편>의 발간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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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개척민지원자훈련소에서 일본 우치하라훈련소로 이동하는 장면. ‘통보’ 제120호(1942년 7월15일).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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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경향신문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무엇이 담겼나

※관련자료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펴내

목, 2017/09/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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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8/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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