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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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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익명 (미확인) | 토, 2018/02/0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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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일 <주간경향> 취재팀을 만난 원용범 할아버지가 우이동 계곡에서 자신의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주 선생 가족의 학살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우이동서…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최소 8구 이상 매립 확인돼

서울지역에서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가 최초로 확인됐다. 그동안 한강 이남 지역에서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이 확인되고 집단매장지 발굴이 이뤄졌지만 서울지역 존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희생자로 유력한 일가족의 신상에 관련한 증언도 나왔다. 행정안전부 등은 조사가 마무리되고 유해 안치작업이 끝나는 대로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 사실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에 확인된 민간인 학살 매장지는 서울 우이동 우이동신설선 북한산우이역 인근 등산로 입구다. 이 지역의 집단매장 소문은 간간이 있었다.(박스 참조) 확인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지난해 11월 16일, 하천 노후옹벽 정비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옹벽 패널을 빼니 옆 흙에 묻혀 있던 사람 뼈가 우연히 발견됐다. 공사인부들이 놀라 경찰에 신고했다.” 이창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조직발전특별위원장의 말이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시신상태 등을 검토해보니 ‘최근 사건이 아니라 한국전쟁 때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조사 나왔다.”

국방부 감식단의 육안감식 결과 수습된 유해는 최소 6명이고, 아직 현장에서 발굴·수습되지 않은 유해도 최소 2구 이상으로 판단됐다. 총 8구 이상의 존재가 최초 확인된 것이다. 유해의 주인공은 군인이 아니었다. 6세에서 60세까지 연령도 다양했고,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도 나왔다. 유류품에서도 은비녀, 틀니 등 군인과 무관한 물건들이 나왔다.

■ 비녀, 틀니… 학살 민간인 유해로 결론

<주간경향>이 단독으로 입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시신들 중 일부는 철사로 손목부위를 결박한 상태로 누워 있었고, 매장 방향과 자세가 비정형적이며, 허리부분에 고무줄을 착용한 유해가 다수 확인됐다. 고무신 착용 유해가 다수였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현장에서는 틀니나 은비녀 같은 ‘특이 유품’ 이외에 탄피와 탄두도 발견됐는데, M1·칼빈·45구경 권총 등이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아군 탄약류만 출토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이번에 발견된 유해들은 종전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더 특이한 부분은 이 유해들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증언도 나왔다는 점이다.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에 금무하던 음악교사 가족이라는 증언이다. 이 증언을 내놓은 이는 우이동 토박이로, 현재도 별장관리인으로 우이동에 거주하는 원용범씨(83)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원씨는 학살사건이 벌어질 당시의 ‘목격담’을 증언했다. “9·28 서울 수복이 된 뒤 10월 어느 날이었다. 한옥에 숨어서 먼발치에서 봤다. 지금은 경전철을 지으면서 축대를 쌓아 개울이 깊어졌는데, 당시는 얕은 개울이었고 개울 옆에 고운 모래가 쌓인 곳이었다. 군인 복장의 사람들이 트럭에서 일가족을 끌고 내려와 총으로 쐈다. 어른이 죽어 푹 꺼꾸러지니 아이들이 방방 뛰었는데 그 아이들까지 죽여버렸다.”

원씨는 학살된 가족이 한국전쟁 전 자신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 가족이라고 했다. 당초 국방부 등의 증언 청취과정에서는 교사의 성씨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1월 말 <주간경향>의 탐문과정에서는 “붉은 주(朱)인지 두루 주(周)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주씨 성을 가진 교사였으며,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해 우이분교 교사로 있던 분”이라며 “바이올린을 잘 켰으며 학교 다닐 때 ‘나의 살던 고향은’ ‘반달’ 등의 노래를 가르쳐주던 것이 기억난다”며 더 구체적인 기억을 내놨다. 주 교사는 골짜기 위쪽 일본 적산가옥에 장모와 처, 그리고 6∼7살가량의 남자아이들 둘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처형당하는 걸 먼발치에서 봐서 처음에는 주씨 가족인 줄 몰랐다. 트럭 뒤칸에 실려 가족들이 끌려왔으니 다른 데 있다가 잡혀온 것은 틀림없었다. 처형 뒤 시신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당시는 몰랐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 교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나, 일단 북이 싫어서 내려온 사람인데 자의적으로 좌익활동을 했겠는가. 설령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했더라도 어린아이들, 그리고 장모는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죽였던 건지….” 0203-6

■ “월남 음악교사 가족이다” 증언

이번에 발굴된 유해들은 주 교사 가족일까. 실제 <주간경향> 취재팀과 동행한 원씨가 지목한 장소는 하천과 작은 개울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번에 시신이 발굴된 장소에서 약 25m 떨어진 장소다. “원씨가 증언한 주 교사 가족과 별도로 또 다른 학살자 가족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창수 위원장의 말이다. 학살자 매몰의 일반적인 패턴은 보통 10여명의 ‘부역자’들을 한 구덩이에 묻고, 바로 인근에 또 구덩이를 파서 그렇게 매몰하는 식인데, 실제 이번 매몰지가 공사 중 우연히 발굴됐으므로 바로 인근에 또 다른 매장지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날 원씨와 동네 노인들은 또 다른 학살 매몰 장소도 증언했다. 발굴 현장에서 약 100m 떨어진 장소다. “당시 계곡을 중심으로 웃골과 아랫골로 나뉘었는데, 아랫골 쪽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을 죽여 묻었다. 한참 지나고 번동에 살던 유가족들이 수소문해서 유해를 찾으러 왔었는데, 총 여섯 구의 시신을 파낼 때까지 가족 시신이 안 나오다가 맨밑의 일곱 번째에서 가족을 찾아 수습해 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처형당한 것이다. 끄집어낸 여섯 구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구덩이에 다시 묻었을 것이다.” 원씨는 시신 매장 장소를 정확히 지적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1950∼70년대에 공사용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축대를 쌓고 성토한 구간이었다. 앞의 유해발굴지와 다르게 이곳은 현재는 작고한 두 사람 소유의 땅이었고, 원씨네 가족은 그 자리 인근에서 소작해 감자를 키웠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발굴된 시신들을 학살한 이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씨는 주씨 가족을 죽인 사람들은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와 탄두를 보면 통상적으로 M1은 군인이, 칼빈은 경찰이, 45구경 권총은 장교가 사용하던 것이다.

“6·25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당시 대통령령으로 만들어진 ‘비상사태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것이 소위 부역자 처벌의 근거였다. 1952년 위헌 판결을 받을 때까지 대통령령에 근거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검거와 체포·학살이 벌어졌다.” 진실화해조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김상숙 단국대 강사의 말이다. 김 전 조사관에 따르면 ‘부역자’나 ‘보도연맹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는 우익청년단체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치안대가 주도했다. 그는 “당시 치안대 사무실이 보통 경찰서나 국민학교 교실, 양곡창고에 있었는데 여기에 연행해 구금·조사하다가 경찰이 인솔해 국군이 사살하는 것이 통상적인 패턴”이라며 “이번 우이동 사건의 경우 유해에 골절이 다수 발굴되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국방부 감식보고서를 보면 유골들은 대퇴골(다리뼈), 두개골, 상완골(어깨뼈)이 골절되어 있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사망 무렵 골절이 관찰”이라고 적혀 있다. 척추부위에 탄두가 박힌 유해도 식별되었다. 김 전 조사관은 “다른 부역혐의자 학살지의 경우를 보면 총알을 아끼기 위해 때려 죽이거나, 부역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해놓고 굴비처럼 묶어 앞의 사람에게 총을 쏴 줄줄이 꼬꾸라지면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해감식을 맡고 있는 박선주 전 충북대 명예교수는 “골절이 살아있을 때 맞아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사후에 위에 흙 등이 쌓이면서 압력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약품처리가 끝나면 법의학적으로 엄밀히 검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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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이동 민간인 학살자 집단매장지에서 지난 1월 5일 희생자 원혼을 기리는 복토 추모제가 약식으로 열렸다. 발견 현장에는 아직도 미수습 유골(사진)이 남아있다. / 법인권사회연구소 남인우 연구위원 제공

■ 누가 이들을 학살했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동안 서울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자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한국전 개전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경우 대부분 한강 남쪽에서 보고·발굴된다.(표 참조) 서울시의 경우 북의 기습남침으로 점령돼 그대로 북한 치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 벌어진 부역자 처벌 및 처형은 다르다. 상당수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갔지만 점령기간 중 피난을 못가고 남아 어쩔 수 없이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얼마나 연행조사를 받았고, 그들 중 얼마나 처형되었는지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화 개발로 원형보존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민간사유지에서 건물을 올리려고 땅을 파면 유골이 발굴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그냥 묻어버리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시신을 발굴하고 수습하려면 땅주인과 협상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인 점도 일조한다. 발굴지 대부분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도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은 오지이거나, 개발이 안된 계곡들이었다. 여기에 농촌의 경우 보통 집성촌으로 그 지역 토박이 노인들이 생존해 증언할 사람이 있는 데 비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익명의 공간인 것도 일조한다. 김 전 조사관은 “과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보접수를 받을 때도 신고된 건수도 많지 않았고 서울지역 확인은 엄두도 못냈다”며 “서대문형무소 뒤쪽 일대, 한강변이나 서울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 강나루터 등이 학살매장지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이번 우이동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우이동 매장지의 경우,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유골들과 유해는 ‘황갈색 가는 모래층’에서 출토되었고, 그 위에는 1차와 2차에 걸쳐 생활쓰레기로 성토돼 있었다. 사살된 시신을 따로 묻은 것이 아니라 위로 흙을 덮어둔 채로 방치돼, 이후 유입된 계곡산장 등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발굴된 6구와 유해개체 수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 유해감식단이 청취한 구술증언과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는 주 교사 가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전부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보존조치를 취한 것은 관련해 법적 권한이나 발굴예산 같은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차제에 지난 2005년 한시적 기구로 만들어 2010년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법을 개정해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을 국가가 책임을 지고 계속 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회 행안위에 여러 진실화해위원회법 개정안이 상정되어 있지만, 법이 통과될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창수 특별위원장은 “이념을 놓고 말하게 되면 학살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국가가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며 “이제는 이념이 아닌 인권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제는 국가가 과거의 불행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해결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 학살당한 주 교사 가족, 신원 확인할 수 있을까

‘우이동 그린파크 계곡 학살’에 대한 증언이 없지 않다. 지난 2012년, KBS는 6·25전쟁을 다룬 특별기획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다큐 7부 ‘전쟁의 그늘(상)’편에 출연한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차승현씨는 이렇게 말한다. “국군이 진주해가지고 그 다음엔 경찰들이… 부역자라고 그랬지. 빨갱이 하던 사람들을 불러다가 때리고… 지금의 우이동 그린파크 옆에 가면 골짜기가 있어요. 거기다가 트럭으로 실어다가 죽이고… 그런 비극이 있었죠.” 차씨는 이번에 <주간경향>이 접촉한 우이동 거주자들과 함께 유력한 증언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시 서울 거주’ 이외에 다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차씨는 우이동 학살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의문은 의외의 방향에서 풀렸다.

‘혹시 6년 전 증언한 차승현씨를 아느냐’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원용범씨는 “우이동 계곡에 올라가면 ‘○○집’이라는 음식점이 나오는데 거기 주인이었다”고 말했다. 방송에 출연해 증언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원씨에 따르면 차씨는 암으로 오래 투병하다가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망했다.

주 교사 가족 학살사건을 증언해줄 다른 사람은 없을까. 6·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원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일단 원씨와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동창들을 문의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현재의 153번 종점 자리에 직사각형 기와집이 있었는데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였다. 거기서 4학년 과정까지 운영되고 5학년부터는 좀 더 떨어져 있는 숭인국민학교를 다녔다. 주 교사는 분교 교사였다. 원씨는 말한다. “장인 어른은 안 계시고, 장모를 모시고 살던 것이 기억난다. 부인은 키가 자그마한데 참 예뻤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들도 귀여웠고…. 세상에, 그 아들들까지 죽일 수 있느냐. 그 어린 아이들이 뭐를 안다고.”

주 교사의 인적사항을 학교 근무 교사명단을 통해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주간경향>의 확인 요청에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은 “일단 우이초등학교 교사 근무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1954년부터인데, 그 이전 기록은 멸실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남아있는 기록에도 주씨 성을 가진 교사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원씨를 만나 주 교사에 대한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원씨는 주 교사 가족이 살던 일본 적산가옥 위치를 알고 있었다. 현재 이 가옥은 헐려 터만 남아있다. 원씨의 기억에 따르면 1950년대에 집은 헐렸고, 그 뒤 절이 자리하다가 1962년께에 역시 헐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폐쇄등기부등본이나 호적 등에서 확인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앞으로 추가취재가 필요한 부분이다.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2018-02-03>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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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善友(증선우)

 

同生同死約(동생동사약)

盡信固愚痴(진신고우치)

四處盈奸黨(사처영간당)

君余被誕欺(군여피탄기)

 

착하고 어진 벗에게 지어 주다

 

함께 살다 같이 죽자 약속했음을

다 믿으니 정말 어리석고 못났소

온 사방 간사한 무리 가득한지라

그대도 또 나도 속임을 당하였소.

 

<時調로 改譯>

 

함께 살다 같이 죽자 그리 약속했음을

그대로 다 믿으니 참 어리석고 못났소

온 사방 奸黨인지라 둘 다 속임당했소.

 

*善友: 착하고  또 어진 벗  *同生: 함께 삶.  함께 남  *同死: 같이  죽음  *愚癡:

매우 어리석고  못남. ≒치욕(癡慾).  삼독(三毒)의 하나. 四相에 의혹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이름 *四處: 사방(四方) *奸黨:

간사한 무리. ≒간도(奸徒) *誕欺: 속임. 거짓말함.

 

<2017.7.15, 이우식 지음>

토, 2017/07/15-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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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어 논란이 뜨겁습니다. 

여기에 법원도 최근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는데요.
지난 9월 15일, 서울고등법원은 한국사 교과서 6종의 집필자 12명이 교육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수정명령 취소소송에서 교육부의 수정명령이 적법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과연 국가권력은 교육내용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우리 헌법이 교육에 대해 취하고 있는 정신은 무엇인지, 판결의 쟁점을 짚어보며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광장에 나온 판결]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수정명령 항소심 적법 판결  

수정명령,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는 마법

 

 

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 2015. 9. 15. 선고. 2015누41441 수정명령취소
판사 지대운(재판장) 강영훈 박창제 

 

 

김선휴 간사

김선휴 참여연대 시민감시팀 간사, 변호사

 

 

 

현재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용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가 아닌 검정교과서이다. 국정교과서는 교육부가 직접 또는 위탁하여 편찬하고 모든 학교가 이를 반드시 사용하여야 한다. 반면 검정교과서는 민간에서 집필한 도서에 대해 교육부장관이 일정한 절차를 거쳐 검정합격을 결정하면, 각 학교가 합격된 검정도서 중 해당 학교에서 사용할 도서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는 다양하고 탄력적인 내용의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정답을 찾아가고 다양한 사고방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며 교사와 학생의 교재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교육부장관이 검정에 합격한 6개 출판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하여 내용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를 들면, 국군의 거창양민학살을 서술한 부분에 대해 ‘균형 잡힌 서술을 위해 북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례도 제시하라’, 북한의 주체사상을 소개한 부분에 대해 ‘학생들이 잘못 이해할 수 있으므로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 노선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대내통합을 위한 체제유지전략이었음을 서술하라’, ‘피로 얼룩진 5.18 민주화 운동’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다’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다니’를 ‘극단으로 치닫는 강압정치’로 수정하라는 것 등이다. 

 

이에 위 교과서의 집필자들은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법적 근거가 없고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므로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적법하다고 인정하였고,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도 1심판결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면서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을 정당화해주었다.

 

이미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의 내용을 교육부장관이 수정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이 교육내용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또한 국가권력의 교육내용 개입에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면, 부당한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와 요건이 필요한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국가와 교육의 관계에 대해 규정한 헌법에서부터 찾아보자.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 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헌법 제31조 제4항)

 

헌법의 위 규정은 교육이 국가 백년대계의 기초인 만큼 외부세력의 부당한 간섭에 영향 받지 않도록 교육자나 교육전문가에 의하여 주도되고 관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교육행정권력에 의한 교육내용의 개입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요구 또한 위 헌법규정에서 도출된다. 그런 점에서 헌법재판소도 “국정교과서제도는 정부의 행정관료에 의하여 교과내용 및 교육내용이 영향을 받을 소지가 있어 교육의 자주성을 보장하는 위 헌법규정과 모순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헌재 1992. 11. 12. 89헌마88 결정).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를 나타내는 헌법이 교육에 대해 취하고 있는 이와 같은 기본 관점을 전제로, 이 사건 판결이 과연 이러한 헌법정신에 충실한 판결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쟁점 ① 법률유보원칙 : 검정 권한이 있다면 수정 명령을 내릴 권한도 있다?

 

첫 번째로 살펴볼 쟁점은 법률유보원칙 위반 여부, 즉 교육부장관의 이 사건 수정명령이 법률에 근거를 둔 것인지 여부이다.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 제26조 제1항은 교육부장관에게 검정도서의 ‘수정’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령의 근거가 되는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은 교과용도서의 ‘범위·저작·검정·인정·발행·공급·선정 및 가격 사정(査定)’에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에 위임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교과용 도서의 ‘수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때문에 교육부장관의 수정명령이 ‘법률’에 근거한 것인지 문제되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검정권한’에는 본질적으로 ‘그 내용을 교육목적에 적합하게 수정하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다. 쉽게 말해 ‘검정은 수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검정’의 근거규정인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이 ‘수정명령’의 근거조항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 사건 수정명령은 법률유보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표현상의 잘못이나 기술적 사항 또는 객관적 오류를 바로잡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미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수정명령권한까지도 검정권한에 포함된다는 해석은, 검정권한의 내용과 범위를 너무 확대해서 해석한 것은 아닐까. 검정교과서제도를 채택한 취지는 헌법이 천명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하고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다(대법원 2011두21485 판결 참조). 그렇다면 국가의 검정권한의 내용과 범위는 국가의 교육내용에 대한 개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방향(내용의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확대 해석하기보다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구현할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쟁점 ② 절차적 적법성: 검정절차의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였는가? 

 

행정부와 법원의 판단대로 내용의 실질적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도 교육부장관의 검정권한에 포함된 것이라면, 그와 같은 수정명령이 적법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인지, 이 사건 수정명령은 그와 같은 절차를 거친 것인지 여부가 두 번째 쟁점이다. 

내용의 실질적 변경을 가져오는 수정명령을 내리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에 대해서는 2013년 대법원에서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역시 검정을 마친 교과서에 대해 교육부장관이 내린 수정명령을 다툰 사안이었는데, “(수정명령이) 이미 검정을 거친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는 새로운 검정절차를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으므로 검정절차상의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에 ‘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판시하였던 것이다(대법원 2013. 2. 15. 선고 2011두21485 판결 참조). 
 

이 사건 수정명령을 내리기 위해 교육부장관은 새로운 검정절차를 다시 거치지는 않았고, 대신 ‘수정심의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하여 심의를 진행한 뒤 수정명령을 내렸다. 법원은 이 ‘수정심의위원회’의 위원 선정방식, 위원구성, 소집절차와 심의방식 등이 교과용도서심의회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라고 인정하였다. 심의기간이 비교적 단기간이라거나 수정심의회의 심의사항 및 수정심의회 위원의 인적사항이 비공개되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절차적 위법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만 판단한 것이다.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있어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는 것은 그 절차의 보장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위 2011두21485 판결에서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를 요구하는 이유가 “그렇지 않으면 행정청이 수정명령을 통하여 검정제도의 취지를 훼손하거나 잠탈할 수 있”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는 단순히 ‘형식적’으로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절차와 ‘유사한 외관’을 갖춘 절차를 거쳤다는 점만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검정절차를 둔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여야 한다. 따라서 법원은 단순히 수정심의회의 의사/의결정족수, 기초심사와 본심사의 분리운영, 위원의 분리구성 등이 교과용도서심의회와 거의 유사하게 이루어졌다는 외관의 판단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수정심의회 절차의 투명성, 수정심의회 구성원의 다양성, 교육행정권력으로부터의 일정한 독립성, 심의회 내에서의 충실한 토론과 의견 개진 및 이를 위한 충분한 기간 등이 확보된 절차였는지, 그래서 검정절차를 둔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절차였는지를 더욱 면밀하게 판단했어야 한다. 재판이 있기 전까지 수정심의회 및 그 사전절차에 대해 거의 공개되지 않았고, 재판과정에서도 그 절차의 부실함, 불투명성이 드러났음에도 절차적 적법성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은 지나치게 형식적인 판단에 그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쟁점 ③ 재량 일탈·남용: 검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들 수 있는 재량?

 

이 사건 판결의 마지막 쟁점은 재량의 일탈·남용 여부, 즉 이 사건 수정명령이 교육부장관에게 주어진 재량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판단이다. 

법원은 검정권한에 포함된 수정권한을 ‘그 내용을 교육목적에 적합하게 수정하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수정명령은 ‘교육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적합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는 범위에서만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법원은 이 사건 수정명령들이 “오해 또는 오인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없애거나 고치도록 한 것”, “중요한 사안에 대한 서술의 비중을 다른 쟁점과 균형이 맞는 수준으로 늘리기 위한 것”, “학생들에게 보다 완전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재량의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르면 법원은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적합성”을 갖추지 못해 검정도서로서 도저히 유지될 수 없는 정도라고 본 것은 아니다. 다만 법원이 보기에는 수정명령이 서술의 균형을 맞추고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향이기 때문에 수정명령대로 고쳐도 무방하다는 취지로 읽힌다. 사실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이 교육적합성을 갖추지 못한 정도라면 불과 3개월 전 더욱 엄격하게 진행된 검정절차에서 합격했을 리도 만무하다.

 

수정 전 교과서의 내용(A)과 수정명령의 내용(B)에 대한 선호나 가치평가를 떠나서, 만약 A와 B 모두 검정교과서로서 교육적합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면, A를 반드시 B로 바꾸도록 강제하는 수정명령은 ‘교육적합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A라는 내용의 교과서도, B라는 내용의 교과서도 검정교과서 제도 하에서 공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 강조하는 바와 같이 헌법정신과 검정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교육적합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서술의 순서나 분량, 자료의 취사선택, 세부적 표현 등은 역사학자이자 교육전문가인 저자들에게 맡겨진 자율의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명백하게 교육적합성을 상실한 것도 아닌 검정합격도서에 대해, 교육부가 지엽적인 서술 순서나 세부적인 표현까지 고치도록 명령하는 것을 재량의 이름으로 허용한다면, 이는 결국 검정교과서 제도를 수정명령을 통해 국정교과서와 같이 운영할 수 있는 재량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 

 

바람직한 해결을 기대하며 

 

사실 문제의 발단은 첫 번째 쟁점인 법률유보원칙 위반에 있다. 초·중등교육법 제29조 제2항이 교과서제도에 대해 법률단계에서 전혀 정하지 않은 채 포괄적으로 대통령령에 백지위임하고 있다 보니, 수정권한의 존부와 범위, 필요한 절차가 모두 해석에 맡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행정권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교과서제도의 중요한 내용들을 법률의 단계에 구체화시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와 같은 입법적 개선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면, 법원은 존재하는 법령을 최대한 헌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해석함으로써 행정권의 위헌적인 공권력 행사에 제동을 걸어야 할 책임이 있다. 대법원 상고심에서는 보다 현명한 판단이 내려지기를 기대해본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최근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 기본권과 인권보호에 기여하지 못한 판결, 또는 그와 반대로 인권수호기관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판결을 소재로 [판결비평]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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