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사징은 공동조사단이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희생자 유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공동조사단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공동조사단 공동대표, 아래 공동조사단)은 아산시와 함께 오는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9일 간 일정으로 아산 설화산(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에 묻혀 있는 민간인희생자에 대한 유해를 수습한다고 31일 밝혔다. 특히 아산시는 이번 유해발굴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본격 수습은 오는 2월 22일 개토제와 함께 시작할 예정이다.
이번에 수습 예정인 희생자 유해는 1951년 1월께 총살 당한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충남 아산시 배방리 산기슭 폐광터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공종조사단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해를 오는 22일 부터 본격 수습한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모두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공동조사단은 수습한 유해는 감식과 보존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 안치할 예정이다.
유해 수습과 발굴 과정에 참여나 참관을 원하는 사람은 공동조사단 측에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된다.
공동조사단 관계자는 “유해발굴과 수습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한발 다가가고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입법화 요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에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한국전쟁유족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인권재단사람, 장준하기념사업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포럼진실과정의 등 1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김동우 작가 사진 52점 전시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 독립운동 사적지 담겨…온라인 또는 전화로 사전 예약 후 관람 가능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강북구(구청장 박겸수)가 8월18일까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최한다.
근현대사기념관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사진전은 쿠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으며 김동우 작가가 촬영한 52점의 사진이 준비됐다.
김 작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해 왔다.
독립운동가들은 먼 타국의 땅에서 굶주림, 차별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한인교회, 한글학교 등을 세워 정체성을 유지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자금 모집 등 활동을 해 왔다.
전시회에서는 쿠바 마나티 항구와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등 한인 이주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와 3·1운동 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미국의 타운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의 묘적지 등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쿠바와 멕시코,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관람 희망자는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예약하거나 전화신청 후 이용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이번 전시회가 세계 곳곳에서 광복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했던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고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관심 있는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람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엔 부정적이었던 ‘친일파 처벌’
2004년 특별법 통과로 반민족행위 규명 재추진
1천5명 친일행위자 공개·토지 2천359필지 환수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은 어디까지?
■ 친일 잔재란
우리 역사는 1910년 8월29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 이른바 ‘일제강점기’라고 한다. 해방 직후에는 ‘왜정시대’라고 불렀으며 한때는 ‘일제 식민지’라고 했다.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과 친일 행위라는 길항 관계로 한 시기를 겪었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친일의 사전적 의미는 ‘일제강점기 일제와 야합해 그들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해 추종함’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정의하면 ‘일본에 관심을 가지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는 그렇게만 인식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우리 사회는 역사와 문화, 제도 등 많은 분야에서 왜곡되고 뒤틀렸다. 이른바 ‘동화(同化)’라는 식민정책으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내세우면서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했고, 학교에서는 우리 말과 글인 한글 사용을 금지하면서 한국인의 민족정신과 역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다 보니 비본질이 본질을 구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사회는 부정적인 잔재들이 남아 있다. 이를 ‘친일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친일 잔재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강점기 식민지배 과정에서 남겨진 유무형의 부정적 유산이다.
그렇다면 친일 잔재의 범주는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간략하게 구분하면 인적 잔재와 물적 잔재, 그리고 유형 잔재와 무형 잔재로 나눌 수 있다. 인적 잔재는 이른바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파를 일컬으며, 물적 잔재는 친일 행위를 통해 형성된 재산이다. 유형 잔재는 강점기 식민통치 기간 조성된 시설물이고 무형 잔재는 식민정책에 의해 왜곡된 역사와 문화이다.
■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노력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일차적으로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물들을 찾아 사회적으로 축출하고 식민잔재의 상징인 신사 등을 철폐했다. 친일 잔재 청산이 제도적으로 본격화된 것은 제헌국회가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헌법에 둔 이후였다. 이를 근거로 1948년 9월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됐으며, 10월2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조직돼 친일파 처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이었던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고 무력화시켰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한 친일파 청산은 무위로 끝났다.
이후 한동안 좌절됐던 친일 잔재 청산은 2004년 3월22일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다시 추진됐다. 특별법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당시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자들이 저지른 반민족행위에 관한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나 실질적인 조사가 미비했던 관계로 그동안 우리 사회의 정의가 흐려지고 왜곡된 역사가 시정되지 아니하는 등 많은 폐해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제라도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진상을 정부 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해 특별법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의 진상을 조사한 후 그 결과를 사료로 남겨둠으로써 왜곡된 역사와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이를 후세의 교훈으로 삼으려 한다”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이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고, 그 결과 1천5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공개했다. 이어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토지 2천359필지를 환수했다.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해 2009년 6월 4천77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수록한 ‘친일인명사’을 발행했다. 이외에도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시민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 3·1운동 100년과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 추진
1919년 3·1운동 100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으면서 친일 잔재 청산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경기도를 비롯한 충남과 광주 등 광역단체와 부천과 장흥 등 지자체, 경남 교육청 등 교육기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자체들은 이른바 ‘친일 잔재 청산 조례’를 제정해 일상에서 느끼는 잔재들을 청산해 나가고 있다.
경기도의회는 2019년 10월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발의했다.
결의안에 의하면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그 결실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기념비적인 해를 맞이했지만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사라지지 않은 친일 잔재가 있다”고 전제하고 “일본에 대해 무조건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습관을 버리고, 이성적 사유에 입각한 미래지향적 대응을 해야 하며 그 첫 번째가 친일 잔재의 청산이다. 말과 글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 깊숙이 침탈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만행을 온전히 파헤쳐 완벽히 청산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를 계기로 경기도 내 일본식 지명 및 명칭의 변경, 친일파가 만든 교가나 일제를 상징하는 조형물의 철거 등 도내 숨어 있는 친일 잔재 청산이 본격화됐다.
■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은 어디까지 왔나
앞서 언급했듯이, 경기도는 3·1운동 100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친일 잔재 청산을 적극 추진했다. 우선 경기도 내 친일 목적으로 제작된 유무형의 문화 잔재를 전수조사하기 위한 ‘경기도 친일 문화 잔재 조사 연구’라는 학술용역을 발주했다. 경기도 교육청도 새로운 학교문화를 조성하기 위하여 관내 학교를 대상으로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를 발굴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경기도가 친일 문화 잔재 조사 연구 용역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경기도 12개 시ㆍ군 행사 때마다 친일파가 작곡 또는 작사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지적에서였다. 이에 따라 경기도 문화예술 분야 친일 잔재 조사 및 청산 등 관리 필요성이 제기됐다. 일제 잔재 청산 학술 용역은 1905년부터 1945년 8월까지 경기도에서 향유 되는 친일 목적으로 제작된 유무형의 문화적 유산을 문헌조사와 현장답사,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시행됐다. 다만 그 결과를 비공개로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쉽다.
경기도교육청은 학교생활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인식을 분석ㆍ공유해 올바른 역사의식 및 정체성 확립, 민주적 학교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인식 분석 결과, 일제 잔재를 ‘일제강점기에 식민 지배와 수탈을 목적으로 우리 민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입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유형ㆍ무형의 모든 것’으로 다수가 인식하고 있었다.
학교생활 속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는 우리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확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도록 강요하면서 다수 존재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대표적인 잔재로는 반장, 부반장, 훈화, 간담회, 결석계, 사정회, 수학여행, 구령대 등 용어와 이흥렬, 현제명, 김동진 등 친일 작곡가가 만든 교가, 일본을 상징하는 교목과 교표 등이 확인되었다. 김포 대명초등학교와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는 욱일기를 연상하게 하는데 공모전을 통해 교표를 새로 선정했다. 친일파가 작곡 또는 작사한 교가는 89개 학교가 확인됐다.
■ 지속되는 일제 잔재 청산과 과제
경기도는 3·1운동 100년을 계기로 시작된 일제 잔재 청산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의회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9일 결과 보고서를 채택하고 1년6개월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경기도의회는 “특별위원회의 활동은 도민과 함께 실천 운동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앞으로도 일상생활 속에서 도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며 역사정의를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 후속 조치로 경기도의회는 일제 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를 지난달 29일 제351회 임시회 제4차 본회의에서 가결했다. 조례는 일본제국주의가 국권을 침탈한 후 경기도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조사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청산함으로써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주요 내용으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추진 계획과 사업, 예산 지원과 추진 부서, 일제잔재청산위원회 설치 및 운영, 협력체계 구축 등을 담고 있다.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더 이상 친일 잔재 청산을 미룰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친일 잔재 청산은 도민, 시민과 소통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친일 잔재 청산은 대부분 관(官) 주도로 이뤄졌다. 물론 민간단체, 시민단체에서 꾸준히 진행됐지만 시민들과는 괴리가 없지 않았다. 우리 일상에 남겨진 일제 잔재 문화를 스스로 찾고 청산하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일제 잔재어부터 청산해 보자.
▲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를 아시나요. 그곳에서 나온 유물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진주 옥봉고분군’이고, ‘일본 동경대학 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과 경남·경북·전북도가 가야시대 고분군(7개)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하고, 경남도의회에서 ‘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 촉구’를 결의한 가운데, ‘경남 기념물 제1호 진주옥봉고분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대상은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창녕 교동·송현동, 고성 송학동, 합천 옥전, 전북 남원 유곡·두락리,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다. 진주 옥봉은 들어 있지 않다.
가야 고분군 등재’를 위한 신청서는 올해 1월 유네스코에 최종 제출됐고, 3월 ‘완성도 검사’를 통과했으며,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경남도의회는 지난 20일 열린 임시회에서 ‘국외 소재 경남 문화재 환수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일제강점기 등에 반출돼 국외에 소재하는 문화재는 22개국 20만 4693점에 이르고, 일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경남지역에서 나온 문화재 가운데 국외 소재는 680여 점이다.
결의안은 “유네스코를 비롯한 관련 국제기구와의 논의 등을 통해 국외소재문화재 실태파악과 문화재 환수에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나가고, 국외소재문화재 환수를 위해 지원할 수 있는 특단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정부에 촉구한다”고 되어 있다.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던 표병호 의원은 “불행했던 과거사를 치유하고 인류문화 복원을 위해서 우리 문화재를 제자리에 되돌려놓는 시대적 소명을 실천할 때이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경남 기념물 제1호’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석영철 진보당 경남도당 지방자치위원장은 “역사를 잊고 헛된 꿈을 쫓지 마라고 했다. 가야사 공부를 하면서 섬뜩섬뜩 놀랄 때가 있다”며 “가야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좋지만, 일제가 약탈해 간 ‘경남 기념물 1호’에서 나온 유물부터 찾아오는 게 더 시급하다”고 했다.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은 “몇 해 전 일본에 갔을 때 동경대 박물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고, 진주 옥봉고분군 유물은 전시되어 있지 않았으며, 수장고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전했다.
▲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도굴에 가까운 발굴… 1974년 기념물 지정
진주 옥봉고분군은 가야국 지배세력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진주 옥봉과 수정봉에 걸쳐 있다. 옥봉·수정봉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모두 7기의 큰 무덤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3기 무덤만 남아 있고 그 중에 옥봉에 있는 1기가 ‘경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 있다. 기념물 지정은 1974년 2월 16일.
도시화로 옥봉·수정봉 정상부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다. 나머지 고분 가운데 일부는 주택 마당에 있기도 한다.
7기 가운데, 수정봉 2·3호와 옥봉 7호가 일제강점기 때 발굴 조사됐다. 일본인 학자(세키노타다시)가 1910년에 그야말로 도굴에 가까운 발굴조사를 했던 것이다.
당시 조사 내용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고, 간단한 실측도와 함께 유적, 유물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이 담겨 있다.
당시 이곳에서는 ‘철제 말갖춤’과 각종 토기류, 가락바퀴, 구슬, 철칼, 도끼, 재갈 등이 나왔다. 3기 가운데 2호분과 7호분의 출토 유물이 동경대에 있는 것이다.
이 무덤은 전형적인 가야의 돌방(석실) 무덤으로, 6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 학계에서는 이곳이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문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옥봉고분군의 유물의 반환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 전 진주에서 나오기도 했다. 1994년 진주시의회에서는 의원들이 몇 차례 질의하면서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진주시의원들은 옥봉·수정봉 고분군의 ‘석실 복원’ 등을 제기하기도 했고, 일본에 문화재 반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세계문화유산 등재 포함은?
현재 진주 옥봉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 포함과 일본에 있는 유물 반환 추진이 가능할까.
경남도 관계자는 “출토 문화재는 현재 동경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안다”며 “문화재 반환은 외교적 문제가 지자체 차원에서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간 영역에서 환수운동을 하면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관련 조례가 있어, 민간 영역에서 구체적인 운동이 일어나면 내년에 지원 계획을 세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 포함에 대해, 경남도 관계자는 “현재 진주 옥봉고분군은 포함돼 있지 않다. 등재 대상은 2012년~2013년부터 진행해서 여러 학술 연구조사가 이루어져 진행되고 있으며, 옥봉고분군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고 했다.
경남도 김수한 학예사는 “2019년 경남도에서 지원해 ‘비지정 가야 문화재 연구사업’ 했을 때 옥봉고분군은 정밀 지표 조사를 했고, 당시 7기 무덤의 위치를 확인했다”며 “고분 보존 정비를 위해서는 향후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인근 민가로 인해 전체 고분군이 훼손됐다. 민가가 없는 구역은 문화재 지정을 할 필요가 있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분 성격 규명과 가치를 알리기 위한 연구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분 명칭과 관련해 그는 “도 기념물 제1호는 ‘진주 옥봉고분군’으로만 되어 있다. 수정봉과 함께 명칭을 사용해 ‘진주 옥봉·수정봉고분군’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고분군”. ⓒ 윤성효
[앵커]
부천 향토문화재 후보군인
역곡의 한 고택을 두고
지역 사회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 소유주의
과거 친일 행적이 드러난데 이어
재개발 현안에 따른
보존 여부도 고민입니다.
이정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높은 돌담에 기와집 처마선.
부천 역곡동에 위치한
죽산 박씨 고택입니다.
1800년 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잘 보존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가옥입니다.
이 집은 다음 달
부천시 향토문화재 심의를 앞두고 있는데,
과거 이곳에 살았던
박제봉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박 씨는
일제 강점기 교육기관,
경학원의 책임자인 사성을 지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 조선총독부에
당시 서울 시내 집 한채 상당의 금액을
헌납한 기록이 발견된
대표적 친일파입니다.
지역 민간단체는
크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보존 가치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되더라도
과거 친일 행적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인터뷰: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
“이것이 일제 잔재니까 일제 잔재에 대한 내용을 꼭 넣어달라는 건데요. 표지석 하나 세워서 친일파 박제봉에 대한 행적을 기록한 단죄비를 넣어달라는 겁니다. 암울하고 어두웠던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는 거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택을 포함해
역곡 지역 일대 71만 제곱미터 부지는
공공 주택 개발이 예정된 지역.
이 때문에 고택이 아예 철거될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이곳은 백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택이지만
보존 방안을 비롯해
고택을 향한 시선들은
다양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옛 것을
지켜야 한다는 뜻과
[현장음: 지역 주민(음성변조)]
“보존했으면 좋겠는데요. 역곡지구 계획이 잡혀있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녹지가 제한돼 있고, 이쪽이나 대장동 쪽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다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아쉽죠.”
[현장음: 지역 주민(음성변조)]
“보존은 하는데 개방해서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죠. 지금은 개인 살림집이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왜 보존해야 하는지 모르죠.”
지역 재개발에 탄력이 붙으려면
철거는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현장음: 역곡 재개발 보상 관계자(음성변조)]
“(유리한 보상을 위해서는)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데 면적이 정해져 있어요. 그 부지만큼 떨어져 나가는 거죠. 그만큼 혜택을 못 받는다는 거죠. 탄원서, 서명서 이런 식으로 해서 주민들한테 다 받고 다녔어요. 써준 사람 없어요.”
친일 논란과 함께
근대 유산 보존, 지역민 개발 이익까지
다양한 여론이 잇따르고 있는 겁니다.
심의를 거쳐
이르면 다음달 이후에는
결과가 나올 예정입니다.
[인터뷰: 부천시 관계자]
“문화재의 가치가 있으면 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거죠. 6월 중에 위원회 구성해서 조사를 하고, 심의한 다음에 7월 초에 결과 공포할 예정입니다.”
역곡동 고택은
이미 지난해 11월 경기도 지정문화재
심의에 올랐지만 탈락한 가운데,
이번에는 부천 향토문화재
등재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헬로티비 뉴스 이정하입니다. (끝)
▲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 주인공 중 한 명인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이 젊은 시절 선교회 활동을 회고하면서 선교회 건물 철거를 막는데 힘을 모아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인천지역 민주화운동가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 시리즈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 출판기념회가 지난 29일 오후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건너편 쉼터에서 개최됐다.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주최하고 스페이스빔, 인천여성노동자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의 주인공인 김정택, 정명자, 조옥화, 이민우, 나지현 씨 등이 참석했다.
또한 전교조 출신인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을 비롯, 이우재 계승사업회 이사장과 원학운 고문, 오경종 민주화운동 센터장,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출신인 이총각 청솔의집 대표, 박종렬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가 자리를 함께 했다.
이세영 남북평화재단 공동대표, 정세일 생명평화포럼 상임대표, 인천여성노동자회장을 지낸 조성혜 시의원, 박인규 인천도시재생지원센터장 등 인천지역 노동계와 시민사회 활동가들도 현장에 나와 이날 출판기념회를 축하했다.
이 행사는 이우재 계승사업회 이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박종렬, 이총각 대표의 축사, 김도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기념관 대표의 헌사, 오경종 민주화운동센터장의 경과보고, 책 주인공들과의 인터뷰이 및 이야기 나눔, 노래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이우재 이사장은 “인천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물어린 희생을 바탕으로 6.25의 폐허를 딛고 유수의 공업도시로 발전했다”면서 “그 중심에 섰던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인천을 대한민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굳건한 한축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치하했다.
▲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이 인사말을 통해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역사와 노동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성과를 치하하고 있다.
도성훈 교육감은 “도시산업선교회의 헌신적인 활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진전에 커다란 밑거름이 됐고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민주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길도 열어줬다”면서 “자라나는 학생들이 선교회의 빛나는 헌신의 역사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형진 일반노조위원장이 사회를 맡은 주인공들과의 이야기 나눔 순서에서 이민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은 “가장 빛나는 젊은 시기에 선교회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면서 “어떤 때는 괴한들이 칼을 들고 들어와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며 회고했다.
이어 “여기에 있는 5명 이외에도 자리를 함께 해야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다”면서 “이 자리에 빠지면 안 될 조화순 목사께서 몸이 불편해 자리를 비우신 것에 대해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아쉬워했다.
이 위원장은 특히 “최근 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인 ‘미문의일꾼교회’가 화수·화평동 일대의 재개발 계획으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였다”면서 “다행히 뜻있는 시민들의 노력 덕분에 1-2달 뒤로 최종 결정을 미뤘으나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인천은 물론 대한민국 노동·인권운동의 산실인 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이 도시개발에 밀려 철거되는 일이 없도록 막아내야 한다”면서 “이 건물을 민주화 운동 자료관으로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장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 출판기념회 마지막 순서에서 가수 ‘졸리’가 ‘그날이 오면’ 등 노동자의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참가자 일행은 오후 3시부터 행사장을 출발해 옛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자리인 ‘미문의일꾼교회’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함께 걷기’를 진행했다.
일꾼교회에 도착한 일행은 오후 4시부터 동영상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을 관람하는 순서로 마지막으로 이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 내가 살아온 이야기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기획하고 펴낸 ‘내가 살아온 이야기’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편은 문종인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연구위원이 엮고 이형진 민주노총 일반노조위원장이 감수했다. 윤희태 파리8대학 영화과 석사와 성공회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연정, 송서경, 문건 씨 등이 힘을 보탰다.
이 책에는 정권의 탄압으로 교직에서 쫓겨나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간사로 활동했던 이민우 위원장 이외에도 △인천지역 의료 운동의 영역을 개척한 조옥화 선생, △산업선교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80년대 민중교회 운동을 이끈 김정택 목사, △동일방직 투쟁으로 출발해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에 헌신한 정명자 선생, △70년대 삼원섬유 노조활동과 80년대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한 김지선 선생, △산업선교회에서 노동상담으로 간사역할을 했던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남편은 산업선교회 간사를 역임한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일꾼교회 자료실을 운영하면서 노동자 교육에 힘쓴 산업선교회의 마지막 간사 나지현 위원장 등 7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61년 미국 감리교회 조지 오글 목사가 화수동 초가집을 매입해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의식과 인권을 함양하는 안식처이자 교육기관으로 가꿔나갔다.
“약한 것을 강하게”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오글 목사는 많은 노동자 동아리를 만들어 노동자로서 삶과 권리의식을 깨우치는데 힘을 쏟았다. 암울했던 70년대 유신독재 시절, 동일방직과 삼원섬유, 한국기계, 대성목재, 반도상사 등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설립해 민주적인 의식을 깨우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군사독재의 탄압을 받던 전 국민의 해방으로까지 그 폭을 넓혀 인천이 1970-80년대 대한민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오글 목사는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인민혁명당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양심수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가 강제 추방당했다.
이 교회 총무를 맡았던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 사건에 대한 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유신정권에 의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인천산업선교회에서 배출한 여성노동자들이 유신말기인 1978년 2월 사측의 사주를 받은 구사대에 의해 ‘똥물’을 뒤집어 쓴 사건은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주요 기록으로 남아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조 목사에게 ‘대한민국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오글 목사에게 ‘민주주의 발전 유공 포상’을 수여했다.
▲ 사진제공=인천도시산업선교회보존협의회
– 철거위기에 놓인 도시산업선교회
▲ 인천지역 11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인천시에 보낸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을 존치 요구 입장문
인천산업선교회가 자리한 인천 동구 화도진공원과 송현초등학교 사이 ‘화수·화평구역’이 2009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뒤, 2019년 시공사가 선정되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해 인천지역 11개 시민사회·노동단체는 지난 24일 인천시 도시계획위원회에 ‘선교회 건물’의 존치를 요구하는 입장문을 보냈다.
이들은 입장문을 통해 “선교회는 대한민국 민주화 유산이자 인천의 산업유산”이라며 “현 재개발조합도 존치하기로 설계한 ‘쌍우물’과 선교회는 불과 1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면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선교회를 쌍우물과 함께 존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촉구했다.
시 도시계획위원들은 소위원회를 구성해 도시산업선교회와 재개발 부지를 방문, 현장 확인을 벌인 뒤, ‘화수·화평구역’ 재개발 정비계획 승인 여부를 결정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원지역의 ‘최초 춘향영정 복위추진 시민연대’가 31일 남원시청 앞에서 최초 영정을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복위추진 시민연대 제공
전북 남원 광한루원의 춘향영정이 지난해 철거된 가운데, 새로 채울 영정을 놓고 남원지역 일부 단체가 반발하고 있다.
남원지역의 ‘최초 춘향영정 복위추진 시민연대’는 31일 남원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931년 제1회 춘향제 때 봉안됐던 최초의 영정이 박물관에 있는데도, 남원시는 그 영정을 봉안하지 않고 있다. 시민들의 설문조사도 새로 제작하기 위해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지금 추진하는 영정 관련 연구용역은 역사성·상징성을 뺀 채 미술사·복식사로 한정해 반쪽짜리 고증에 그치고 있다. 연구용역을 당장 중단하고, 박물관에 보관된 최초의 영정을 봉안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부터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남원시는 이에 대해 “일부에서 주장하는 춘향영정과 관련해 역사성이 부분적일 뿐이다. 철거과정의 절차와 새로 채울 영정에 대한 시민의견과 1920~30년대 복식에 대한 고증 등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위해 용역을 진행 중이다. 상당수 시민은 최초 영정 봉안에 찬성하지 않는 만큼, 용역 결과가 나오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1931년 제1회 춘향제에 사용했다는 최초 춘향영정(왼쪽)과 지난해 철거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작품.
앞서 남원시는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당에 걸려 있는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영정을 지난해 9월 제90회 춘향제를 앞두고 철거했다. 김 화가의 친일 이력으로 그동안 시민사회단체 등이 지속적인 교체를 요구해왔다. 철거한 춘향영정은 크기가 가로 80㎝, 세로 160㎝로 전신을 그린 미인도 형태의 초상화다.
최초의 춘향영정은 춘향사당이 세워졌던 1931년, 경남 진주 출신 강주수 화백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훼손됐지만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어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은호(1892~1979년)는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혔고,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작품을 심사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1945년 이후의 육군 지휘부를 출신별로 구분하면 크게 세 부류가 된다. 주로 만주국군과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1946년 1월 이후 남조선국방경비대(국군)에 들어가 지휘부를 형성한 1세대, 그해 5월부터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육사) 단기 과정을 이수한 뒤 지휘부에 들어간 2세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0월부터 4년제 육사에 입학한 3세대로 나눌 수 있다.
육군의 주도권이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간 때는 1961년 5·16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만주국군에 복무했다는 점에서는 1세대이지만, 해방 뒤 육사 2기로 입학했다는 점에서는 2세대였다. 쿠데타의 정점인 그는 1세대인지 2세대인지 모호하지만, 쿠데타의 주력은 육사 5기와 8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2세대가 주도권을 차지한 시점은 1961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2세대가 갖고 있던 주도권이 3세대로 넘어간 것은 1979년 12·12 쿠데타다.
1세대 군부 이끈 양대 파벌
5·16 쿠데타 이전에 1세대가 주도하던 군부를 이끈 양대 파벌이 있다. 여러 파벌 중에서도 함경도파와 평안도파가 가장 인상적인 족적을 남겼다. 그 두 파벌을 주도한 대표자가 함경도파 정일권과 평안도파 백선엽이다.
일제에 협력한 한국인 장교들은 주로 함경도·평안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해방 뒤 고향에 정착하기 힘들었다. 한편, 남한을 지배하게 된 미군정은 장교 출신 한국인들의 협력이 절실했다. 이런 요인들은 이북 출신들이 남한 군부를 주도하는 배경이 됐다.
그들이 남한 군대를 주도했다는 점은 5·16 직전까지도 이남 출신의 장군이 드물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훗날 국무부 차관이 되고 레이건 행정부의 중동특사가 될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관 참사관이 1962년 8월 17일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발신한 기밀 전문은 그런 실상을 잘 보여준다. 한국 군부 내의 파벌을 분석한 이 기밀 전문은 <신동아> 2010년 3월호 기사 ‘1962년 미 대사관 기밀 문건’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만주국에 (한반도) 북부 출신 인물이 많이 참여함에 따라, 한국군에서 북부 출신의 지도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1962년으로부터) 1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상황은 남부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육군 장성 자리에 오른 젊은 박정희에게 독특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북 출신들이 군부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박정희가 장군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이 점은 군부 지도부에 대항하는 쿠데타 세력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박정희는 경북 출신이고 김종필은 충남 출신이었다. 당시 군부의 비주류인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는 일차적으로는 권력욕과 정치 혼란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이북 출신들이 군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출신들이 그 정도로 우세했기 때문에, 이북 출신인 정일권과 백선엽이 이남에서 군부 파벌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비브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까지는 평안도파가 우세했고, 그 뒤로는 함경도파가 우세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같은 변화는 함경도파의 단결력에 기인했다. “정일권은 가장 응집력 있는 집단을 주도”했다고 그는 말한다.
정일권 앞지른 백선엽
▲ 박정희와 백선엽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 자료사진
1950년을 기점으로 무게 중심이 평안도파를 떠났지만, 두 리더에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양상은 정반대였다. 평안도파가 약해지는 이 시점에 그 리더 백선엽은 오히려 강해졌다. 백선엽이 정일권을 앞지르는 일도 이때 나타났다.
백선엽(1920년 생)은 정일권보다 나이(1917년 생)로는 3년 늦고 중앙육군훈련처(만주군관학교) 입학 연도로는 5년 느렸다. 1945년 해방 당일에 백선엽은 만주국군 중위였고, 정일권은 한 단계 위인 상위였다. 해방 이전의 군인 경력자를 친미 군인으로 탈바꿈시키는 기구였던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시점인 1946년 2월에도 백선엽은 한국군 중위, 정일권은 대위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도 이 구도는 유지됐다. 1950년 7월 1일에 정일권은 육군총참모장(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 달에 정일권은 육군 소장이 됐고 백선엽은 준장이 됐다.
이랬던 구도가 백선엽의 대장 승진으로 역전됐다. 정일권이 중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동안에 백선엽은 소장에서 중장으로, 다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53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1면 기사는 “육군총참모장 백선엽 중장은 31일부로 한국 최초의 육군대장에 승진·임명되었다”고 보도했다. 중장 진급 때까지만 해도 항상 앞섰던 함경도파 리더가 최초의 대장 진급이라는 영예를 평안도파 리더에게 내줬던 것이다.
정일권에게 뒤지던 백선엽이 한국전쟁 막판에 앞서나가게 된 것은 오늘날 지적되고 있듯이 그의 전공이 과장되게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전쟁 도중에 정일권이 주춤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일권 편은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이 문제가 되자 사임했다”고 서술한다. 국민방위군 보급품 횡령으로 수만 명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고 국군이 거창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정일권이 물러나게 됐고, 이는 전반적으로 함경도파가 우세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평안도파 리더가 함경도파 리더를 앞지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이 주도하던 함경도파와 평안도파의 각축 시대는 1961년 5·16 쿠데타와 그 후의 숙군 작업을 거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16 쿠데타를 뒤엎기 위한 역쿠데타가 자주 발생했지만 하나 같이 실패했고, 두 이북 파벌은 되살아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끈질긴 생명력
▲ 귀국 인사차 국회의장실을 방문한 김종필 국무총리를 맞이하는 정일권 국회의장. 1973.6.18 ⓒ 연합뉴스
그런데 두 리더만큼은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자기 파벌을 도태시킨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도 명성을 이어갔다. 정일권은 박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국무총리에 이어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했고, 백선엽은 주프랑스대사·주캐나다대사에 이어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백선엽의 경우에는, 행정부 공직에서는 정일권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자신의 신화를 지켜가는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자기 파벌을 무너트린 박 정권 하에서도 그의 과대 포장된 한국전쟁 전공은 까발려지지 않았다.
두 리더가 영예를 유지한 결정적 이유는 박정희와의 인연에서 찾을 수 있다. 1956년에 전역한 뒤 터키·프랑스·미국에서 대사로 근무하다가 5·16 당시 하버드대학에 있었던 정일권은 박정희가 미국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의 <친일인명사전>은 “하버드대학 유학 중이던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미국 조야를 다니며 군사정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말한다.
백선엽은 남로당원 신분이 들통 나서 영창에 갇힌 박정희를 구명해준 인연이 있었다. 박정희는 함경도파는 아니었지만 만주국군을 고리로 백선엽과 연결돼 있었다. 이것이 백선엽이 구명 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미군정의 지원에 힘입어 남한에 정착하기는 했지만 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던 이북 출신들은 경제력 축적을 위해 부정부패를 불사했다. 제1공화국 때 군부의 부패가 심각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이는 박정희·김종필 같은 이남 출신들이 군 수뇌부를 경멸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또 이북 출신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파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다. 하비브의 비밀 문건은 “정일권과 백선엽은 모두 자신들이 군사적·국가적 임무에 덧붙여서 자기 파벌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들은 자기 파벌의 성원들이 파벌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면 위법행위를 하더라도 이들을 보호하고 계속 활동하게 할 뿐 아니라 처벌을 받을 경우 복권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백선엽 입장에서 볼 때, 같은 만주국군 출신인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배반은 될 수 있어도 평안도파에 대한 배반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자파에 대한 반역만 아니라면 눈감아주고 비호해주던 평안도파의 행태가 백선엽의 박정희 구명을 낳은 측면도 있었다.
한 사람은 박정희를 공산당 연루 혐의로부터 건져주고, 한 사람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미국의 지지를 얻도록 도와줬다. 이 같은 박정희와의 인연은 백선엽과 정일권이 자파의 몰락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승승장구하는 비결이 됐다.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는 친일 반민족 장군들 중에서 이 둘이 특히 많이 알려진 것은 이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육군 파벌의 리더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와의 인연이 돈독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해방직후 친일파 처벌 특별법 제정 착수, 경기도 등 일제 잔재 청산 작업 이어져
군사·산업시설 관련도 상당 부분 존재해…‘철거 방법’ 가장 언급되지만 역사 잊혀져, 문화콘텐츠 등
활용 주민참여형 개발 필요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1944년께 동원된 어린 소녀들이 미쓰비시 중공업기숙사 사감으로부터 지시사항을듣고 있다. 경기일보DB
걷어내지 못한 친일파·기업… 기념·조형물도 곳곳 산재
■친일 인물 청산을 위한 노력
친일 잔재는 ‘일제강점기 남겨진 유산 중 부정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 볼 때 상당한 의미와 기준 등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유형들이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가장 많이 언급하고 청산하고자 하는 것이 이른바 친일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친일파’로 많이 알려졌다. 그동안 친일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이를 위해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 설치한 바 있으며, 2004년에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국가가 직접 친일 인물을 선정하였다.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친일 인물 청산을 주도하였다.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계기로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이를 계기로 경기도 등 광역 지자체에서 구체적인 일제 잔재 청산이 진행됐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지자체에서도 일제 잔재 청산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친일 잔재의 유형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동안 친일 잔재 청산은 ‘친일 인물’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는 친일 인물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친일 잔재의 유형은 친일 인물 외에 상당한 잔재들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친일 잔재는 우선 인적 잔재와 물적 잔재로 구분할 수 있다. 인적 잔재는 구한말 일제의 침략과 강점기 식민 지배통치에 부역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라 할 수 있으며, 물적 잔재는 반민족 행위로 인해 얻은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를 흔히 ‘친일 인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옹호하는 세력을 ‘친일파’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일파는 가장 먼저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적, 물적 친일 잔재 외에도 유형 잔재와 무형의 친일 잔재로도 구분할 수 있다. 유형 친일 잔재는 일제가 침략전쟁과 식민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물 등 선전 조형물이다. 여기에는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물, 상업과 산업시설, 군사시설, 기념탑 및 기념비, 종교시설, 전쟁 기념물, 찬양조형물, 일본식 가옥 등이 포함된다.
무형 친일 잔재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 시기에 역사와 문화 등 주로 정신적으로 왜곡된 잔재들이다. 여기에는 언어 등 생활문화를 비롯하여 법과 행정제도, 관습과 의식, 교육, 문화예술, 역사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친일 인물과 건축물을 제외한 유형의 친일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고, 청산되었는가 살펴보자. 그리고 이를 위한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군사 관련 친일 잔재의 현황
친일 잔재 시설물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조선 왕궁의 맥을 끊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한편에서는 해방 후 이른바 ‘중앙청’이라 불리며 정부 건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보존하자는 여론도 있었지만 결국 해체돼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이처럼 식민 지배와 관련된 건축물은 대부분 철거되거나 일부에서는 리모델링하여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사시설은 아직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 상당 부분에 이르고 있다. 군사시설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기에 주로 형성됐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 동원하여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이를 전쟁유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비행장, 격납고, 연병장, 대피호, 동굴 진지, 방공호, 지하호 등이 있다. 국내에서 조사된 바로는 군사 관련 잔재는 전국적으로 1천300여곳이 산재한다. 경기도의 경우 비행장 건설이 적지 않았는데 수원, 오산, 시흥, 평택, 고양 등이 해당된다. 군사시설물 구축과 관련된 곳으로는 시흥, 양주, 평택, 포천 등이 있다. 이외에도 평택 함정리의 방공호, 평택 안정리의 해군시설대 보급기지, 의정부와 수원, 김포 등지에는 군부대가 있었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 현황
일제강점기 산업시설과 관련한 친일 잔재도 상당 부분 존재한다.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공장을 비롯하여 탄광이나 광산, 철도, 도로, 토건, 하역 수송 등이 해당된다. 이 가운데 철도와 항만은 산업 관련 잔재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 식민통치 잔재이기도 하다. 산업 관련 잔재는 탄광과 광산이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다.
일제는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석탄 외에 금, 은, 구리 등 일반 광물과 텅스텐, 석면, 몰디브덴 등 특수 광물까지 채광하였다. 광산과 탄광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경기도는 320여개가 있었다. 철도와 도로는 교통의 편리함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 물적 자원을 수탈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산업 관련 잔재는 대부분 일제 지배를 지원하거나 적극 후원하는 일본 기업들이었다. 현재도 널리 알려진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아소(麻生), 스미모토(住友), 일본제철(日本製鐵) 등 대기업 등이 있다. 이들 대기업 외에도 가네보(鐘紡), 다이니치보(大日紡), 도요보(東洋紡) 등 방적공장도 있었다.
경기도의 산업 관련 친일 잔재는 앞서 언급했듯이, 광산과 탄광이 가장 많았다. 해당 지역을 살펴보면 가평 12곳, 고양 3곳, 광주 6곳, 김포 1곳, 부천 26곳, 수원 9곳, 시흥 9곳, 평택 1곳, 안성 35곳 등 각지에 산재하고 있었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미쓰비시 줄사택’. 경기일보DB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
유형의 친일 잔재 중 가장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은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과 조형물이다. 기념물과 송덕비, 찬양비 등 비석류가 해당된다. 어느 지역에 답사를 간 적이 있는데, 일제 말기 지역에서 면장을 한 분의 기념비가 있었다. 면장은 친일 인명에는 빠져 있지만, 전시체제기 최말단에서 식민 지배에 협력한 직책으로 지역에서는 부일협력과 관련하여 가장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지역과 관련된 부일협력을 한 면장을 비롯하여 반민족 행위를 한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은 친일 잔재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에 산재한 친일 인물 관련기념 시설은 160여개다. 이중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120여개, 확인 불가능한 것이 26개, 망실되거나 매몰된 것이 2개 정도였다. 지역별로 보면 안성 57개, 화성 18개, 평택 13개, 용인 10개, 이천 9개, 광주와 양주 8개, 여주 7개, 포천 4개, 의정부 3개, 파주 3개, 연천 2개, 남양주 2개 등으로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돼 있다. 이들 기념시설은 대부분 강점기 군수나 읍장, 면장 등 공직을 맡았던 인물과 부일협력을 한 인물의 송덕비 또는 기념비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안성의 경우 읍내면장, 공도면장, 금광면장, 소초면장, 미양면장, 보개면장, 원곡면장 등 면장으로 활동한 인물들의 송덕비이다. 평택은 서면장(진위), 현덕면장 등의 송덕비가 있다.
이외에 친일 인물과 관련된 기념시설로 기념탑과 동상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수원 서둔동의 옛 농촌진흥청 구내에는 ‘혼다 코스케(本田幸介) 권업모범장장 흉상 좌대’, 안성농업학교 교정에 세워졌다가 금속물 회수에 헌납 제공된 ‘박필병(松井英治) 중추원 참의 동상’, 현재 현재 용인문화원에서 보관 중인 ‘팔굉일우비(八紘一宇碑)’ 등이 있다.
■식민 잔재 청산 방안과 앞으로의 과제
친일 잔재의 청산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철거이다. 그렇다고 철거가 청산의 진정한 방법은 아니다. 철거를 하면 이후 잊힌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킨다. 역사를 언급할 때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자랑스럽고 기억할만한 것은 기록하지만, 역사에 부정적인 것은 대부분 없애거나 지우려고 한다. 그러면 잊힌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도 남겨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유형의 친일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잔재의 아카이브 구축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이후 망실된다 하여도 역사적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자료집을 편찬하여 연구와 교육 자료로 활용돼야 한다.
또한 기존의 친일 잔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친일 잔재가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졌으며, 관련된 인물의 친일 행적에 대해 최소한의 기록을 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친일 잔재 기념시설물은 송독이나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다. 기존의 기념시설물과 함께 부일협력을 기록함으로써 인물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은 관련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화콘텐츠는 ▲교육프로그램 운영 ▲웹 또는 모바일 콘텐츠 개발 및 활용 ▲교육형 테마파크 활용 ▲기억의 공간 활용 ▲다크 투어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관이 주도할 것이 아니라 주민참여형으로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패소한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강제노역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왼쪽)씨와 일제강제노역피해자회 장덕환 사무총장, 강길 변호사가 판결이 내려진 뒤 법원을 나서면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7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가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한 것은 일제의 불법 행위에 책임을 못 묻는다는 내용뿐 아니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거슬렀다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특히 일본 기업들에 강제집행이 이뤄지면 일본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도 훼손될 수 있다며 매우 이례적인 ‘사법 외적’ 판단까지 밝혀, 법조계 일각에서 비상식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다른 비슷한 소송들처럼 이번에도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전범기업들의 책임이 해소됐느냐가 쟁점이 됐다. 재판부는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협정 문구를 근거로 개인 청구권도 사라졌다는 쪽에 섰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판관 7 대 6 의견으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결한 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당시 대법원은 일본제철이 한국인 피해자 4명에게 1억원씩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 사건 판단은)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 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며, 당시 개인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판단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의 소수 의견을 따랐다. 나아가 전원합의체의 결론(다수 의견)에 대해 “국내 최고재판소 판결이지만,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어, 이러한 판결은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 “일본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을 인정한 자료가 없다”고까지 했다. 대법원 판단을 폄하한 듯한 표현이다.
다른 강제동원 사건에서 피해자 쪽을 대리한 임재성 변호사는 “전원합의체 판결과 다른 하급심 판결이 있을 수는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등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라며 “(이번 판단은) 전원합의체 소수 의견과 동일한 것으로, 법리가 앙상하다”고 했다.
게다가 재판부는 원고들이 이겨 강제집행까지 가면 심지어 대미 관계가 악화돼 안보가 불안해진다는, 사건 쟁점과 무관한 주장까지 판결문에 담았다. 재판부는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가 있다며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판결문은 “분단국의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 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리 침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지 따지는 사법 절차에서 쟁점과 상관없는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까지 끌어들여 판단 배경으로 제시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청구권협정으로 지급된 3억달러는 과소하므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포함됐다고 볼 수 없다’는 원고들 주장에 “당시 낙후한 후진국 지위에 있던 대한민국과 이미 경제대국에 진입한 일본국 사이에 이뤄진 과거의 청구권협정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라고 반박했다. 이어 “당시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며, 일본의 ‘기여’를 강조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15개 단체는 성명을 내어 “(재판부가) 비본질적·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며 “법관으로서의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했다. 민사소송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 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의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원고들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장덕환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 회장은 “재판 결과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정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재판부가 선고기일을 갑자기 바꾼 것도 원고들의 비난을 샀다. 선고는 원래 10일로 잡혔으나 7일 오전 재판부가 갑자기 이날 오후로 변경해 혼란이 발생했다. 그래서 지방에 사는 피해자 다수는 법정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고려해 기일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고령의 원고가 다수 모이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해명했다.
– 일시 : 2021년 6월 10일(목) 10시
– 장소 : 서울중앙지법 앞(교대역 법원 삼거리)
– 주최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 취지
1.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지난 7일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등 85명이 일본 전범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하였습니다.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문제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 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한미동맹으로 안보와 직결된 미국과의 관계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근거를 들어 판결하였습니다.
2. 이번 판결은 2018년 대법원전원합의체가 내린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전면 배치되며, 침략국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가해자(일본) 중심 국제정치 논리와 외교 편향의 자의적 잣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원통한 세월을 두 번 짓밟는 것으로 매우 충격적인 판결입니다.
3.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은 가해가 일본의 입장이며, 외교관계를 문제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인권을 희생하는 사법부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법부인지 의심마저 들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원통함을 해결하지 않는 한일관계는 정의로울 수도 없으며, 미래지향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난 100년 한일관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4. 이에 이번 강제동원 소송 판결의 문제점을 강력히 규탄하며, 판결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귀사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를 바랍니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반역사적이며 반헌법적인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으며 기나긴 소송투쟁 끝에 대법원 판결을 쟁취한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유린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만을 그대로 답습한 재판부는 인권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의 사명을 내팽개쳤다.
재판부는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선언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장벽을 뛰어 넘어 피해자 개인의 인권 보호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2018년 대법원 판결을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 재판부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더반선언’ 2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국제사회는 지난 세기에 강대국들이 저지른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역사청산을 요구하며 식민지주의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일 시민사회가 수십 년 동안 끈질긴 투쟁으로 일궈낸 소중한 성과이다. 법관은 헌법정신을 지키며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의 정신이 아니라 법관 개인의 왜곡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판결하여 주권자인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모욕했다. 이 판결은 사법농단의 가해자들이 단죄되지 않고 있는 오늘의 참담한 현실과 지금 왜 사법개혁이 필요한가 그 이유를 스스로 입증했다.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와 극우의 논리를 따르는 역사부정론의 그림자가 법원에까지 드리운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연대하여 투쟁할 것이다.
2021년 6월 10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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