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사징은 공동조사단이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희생자 유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공동조사단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공동조사단 공동대표, 아래 공동조사단)은 아산시와 함께 오는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9일 간 일정으로 아산 설화산(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에 묻혀 있는 민간인희생자에 대한 유해를 수습한다고 31일 밝혔다. 특히 아산시는 이번 유해발굴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본격 수습은 오는 2월 22일 개토제와 함께 시작할 예정이다.
이번에 수습 예정인 희생자 유해는 1951년 1월께 총살 당한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충남 아산시 배방리 산기슭 폐광터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공종조사단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해를 오는 22일 부터 본격 수습한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모두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공동조사단은 수습한 유해는 감식과 보존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 안치할 예정이다.
유해 수습과 발굴 과정에 참여나 참관을 원하는 사람은 공동조사단 측에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된다.
공동조사단 관계자는 “유해발굴과 수습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한발 다가가고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입법화 요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에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한국전쟁유족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인권재단사람, 장준하기념사업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포럼진실과정의 등 1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KBS는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사료 발굴을 기초로 한 탐사보도를 꾸준히 해왔고,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시의성이 있을 때마다 단독 보도를 계속해 왔다. 이번 자료 역시 이런 꾸준한 추적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KBS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 일본 외무성(우리나라 외교부에 해당) 산하 자료실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과 관련된 고문서 다수를 복사해왔다.
이후 전문가들과 함께 해당 문서들에 대한 번역과 검토 작업이 꾸준히 이뤄졌고, 지난해 가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자료를 추려낼 수 있었다. 정확히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일제가 이들의 공적을 결재한 문서였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추가 취재에 돌입했고, 본격적인 분석 작업을 통해 3.1절에 맞춰 보도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수록된 조선인 경찰관 9명. 순사 우경태, 구봉서, 김종섭, 백창돈, 김배인, 장국환, 김영후, 성빈, 서상순은 종군기장(일제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 경찰 등에 수여하는 상훈 중 하나)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 KBS 발굴 자료에 보훈처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
보도 이후 남은 과제는 크게 2가지다. ▲문서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고위 경찰관들의 친일 이력을 병기할 것인가다.
먼저 한국인 경찰관들로부터 체포를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심사하는 문제다. 이번에 발굴한 문서에는 간도참변 과정에서 체포된 한국인이 17명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유공을 인정받고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KBS 보도 이후 국가보훈처는 해당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KBS에 요청했고 취재진은 이에 협조했다. 보훈처는 “자료를 분석해 그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강우범 선생(이명: 강구우)의 추가 독립운동 행적을 추정할 만한 내용이 자료에 등장한 것과 관련해서도, 보훈처는 “인적사항 및 활동내용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해 동일인이 확인될 경우 공훈록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경찰, 역대 기관장 친일 이력 전수조사…”왜 이리 소극적인지”
또 다른 과제는 친일 이력이 있는 고위 경찰관들의 이력 처리 문제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린 역대 청장과 서장 70여 명(중복 포함)을 확인해 보도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친일 이력에 대한 병기 또는 언급 없이 재직 사실만 기재돼 있었다.
KBS의 보도 이후 경찰은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역대 경찰 기관장 명단 간 대조 작업에 착수했다.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와 관련해 경찰은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 기준에 따라 공통 적용할 사안”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기도는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이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 사실을 병기하고 있다.
경찰은 또 1949년 6월 6일 경찰이 친일파 조사를 위한 헌법기구였던 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과 관련해서도 “지난해 말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경찰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찰의 입장에 대해 역사단체들은 대체로 아쉽다는 반응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강점기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고, 그 당시 조선인 친인 경찰은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며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이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 데 왜 이렇게 소극적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청사 안에 세우며 과거사 청산 의지를 다졌다.
이후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 다시 말해 자신들의 ‘그늘’에 대해선 뚜렷한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고 청산 작업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최근 제주 4.3 사건 73주년을 앞두고 제주 4.3 사건 당시 체포돼 육지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실종된 335명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왜곡된 역사 하나를 바로잡는 순간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는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도 서려 있다. 기자는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4.3길’을 걸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되돌아본 바 있다. 이때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국립서울현충원 ‘4.3길’을 보충하는 뜻도 담아 두 명의 장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장군 제1묘역에는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인사로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소개한 ‘제주의 의인’ 김익열 장군(관련 기사: 제주와 대화한 군인, 민간인을 짓밟은 군인)말고도 사건 당시 경찰과 군인 간부로 가해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 넷의 묘가 더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경찰서 서장이었던 문용채(1916~1976, 제1장군-72)와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 경무부 공안국장이었던 김정호(1909~1970, 제1장군-39), 이승만 정부의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1910~1950)과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이었던 최석용(1903~1974, 제1장군-60)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경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문용채와 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최석용의 묘비명엔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만주국군 출신의 문용채
▲ 문용채의 묘 문용채는 만주국군 헌병 상위에 오른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는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 경찰간부였다. ⓒ 김학규
문용채는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했다. 김백일(김찬규), 김석범, 김홍준, 송석하, 신현준(신봉균) 등 5명의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그의 동기다. 문용채는 만주국군 헌병 소위로 임관한 후 일제 말 헌병 상위로 진급해 평천헌병대 대대장까지 지냈다.
문용채가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에서 제외된 이유는 위 5명의 동료와 달리 간도특설대에 입대하지 않고 헌병으로 진로가 잡힌 덕분이었다.
경찰 간부로서 제주 4.3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문용채
문용채는 해방 이후 경찰이 돼 제주감찰청 수사과장을 거쳐 1947년 9월부터는 제1구경찰서장이 됐다. 문용채는 경찰 간부로 제주에 부임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4.3 사건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문용채가 경찰이 된 사연은 해방 직후 우리의 실상을 반영한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만주에서 서둘러 귀국한 문용채는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남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지만, 경비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사표를 내고 경찰로 전직했다.
문용채와 마찬가지로 만주국군 헌병 상위였다가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에 따르면 문용채는 청주 7연대의 A중대장과 춘천 8연대의 A중대장에 연이어 임명됐으나, 두 차례 연속으로 먼저 온 장교들이 중대편성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고수하고 있어 부임하지 못했다고 한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문용채는 사표를 내고 경찰로 전직했다고 한다. 정일권은 이를 “초창기 인사관리의 허점”으로 설명했다.
문용채가 제1구경찰서장에 취임한 직후 “경민 협조로 민주경찰 건설에 노력”하겠다면서 밝힌 아래와 같은 포부는 그가 제주 4.3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접근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도민 여러분은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하야 항거의 태도를 취하지 말고 이해 깊은 협조만이 민주경찰을 완성시키는 근본적 요소인 만큼 도민 각자는 안심하야 직장 봉공에 노력하야 주기를 바란다. 끝으로 본도 경찰관들이 애국심에 불타는 정열과 책임감 그리고 날로 증진되어 가는 태도율(態度率)에 대하야 깊은 감명을 느끼고 마지않는 바이다.”(<제주신보>, ‘경민 협조로 민주경찰 건설 노력-1구서장 문용채씨 신임 포부담’, 1947. 10. 10.)
문용채는 민주경찰의 완성을 위해 제주도민들에게 ‘무조건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한 반면,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응원군까지 동원해 탄압을 강화해온 경찰에 대해선 감명을 느낀다며 되레 응원했다.
문용채는 4.3 봉기 초기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열과 4.3 봉기를 이끈 남로당의 김달삼 간에 이뤄진 4.28 평화협상안의 실현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봉기군이 벌인 방화와 학살극으로 알려졌지만,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평화협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다.
문용채는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경찰 트럭에 동승해 취재를 허가받은 <동아일보>의 정선수 기자에게 “만약을 위하여…”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권총을 빌려주면서까지 사건이 경찰의 의도에 맞게 언론에 보도되기를 희망했다. <동아일보>는 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해 백여 명의 폭도가 “무고한 노동자 농민을 몰아세우고 노동자 농민 자신들의 집을 불살라 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하고 노동자 농민의 가정을 파괴한 것”이라고 하여 경찰의 희망을 충실히 따르는 보도로 응답했다(<동아일보>, ‘제주도폭동현지답사 – 정선수 본사특파원 발’, 1948. 5. 9.)
경찰의 방해공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오라리 방화사건이 있은 지 이틀 후인 5월 3일 무장해제한 ‘귀순자’를 미군 병사와 9연대가 함께 수용소로 호송하던 중, 무장경찰 50여 명이 기습적으로 총을 난사하여 ‘귀순자’ 일부가 사망하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 간에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맨스필드 군정장관은 제주경찰서장을 군정본부로 소환하여 문책했는데, 김익열은 이때 문용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문용채 서장은 도망하여온 부하들에게 들어서 사건의 진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조사하여 내일 보고하겠다고 하고 부상자와 중기관총을 인수하여 돌아갔다.”(김익열, 실록유고 <4.3의 진실>, 1988)
물론 이 사건으로 문용채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문용채는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재입교해 특별임관한 후 1952년 경남병사구사령관을 지낸 뒤 1959년 군대 안에서 정군 바람이 불 때 준장으로 예편당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것은 자유?
▲ 문용채의 묘비명 문묭채의 묘비명은 친일파 문용채가 마치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김학규
장군 제1묘역에 있는 문용채의 묘비명을 보면 그가 경찰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했던 이력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문용채의 묘비명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장군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중국에 망명하여 봉천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셨고 해방 후에는 창군에 공헌 군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셨다.”
문용채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친일파가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일을 돕는 ‘세탁소’쯤으로 여겼던 걸까? 문용채가 자신의 만주 ‘진출’을 중국에 ‘망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자. 그렇더라도 문용채가 졸업한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를 존재하지도 않았던 봉천육군사관학교라고 과장한 것도 모자라, 만주국군 헌병 장교로 근무한 것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다고 새겨 넣은 것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짓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일이 이렇듯 쉽게 이뤄지고 있었던 것.
최석용이 한검추(최주봉)이었을 줄이야!
– 독립운동가에서 변절자로, 그리고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학살자로!
▲ 최석용의 묘 최석용은 한 때 조선혁명군의 1사 사령을 맡기도 하는 등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한검추(최주봉)였다. 하지만 그는 1936년 말 일제에 투항하여 변절한 이래 항일무장투쟁 대오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 김학규
‘신분 세탁’이 성공한 탓일까? 장군 제1묘역에 안장돼 있는 최석용(1903~1974, 제1장군-60)은 정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긴커녕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다.
최석용은 1928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 만주에서 맹위를 떨친 조선혁명군(총사령 양세봉)의 1군 사령까지 맡았던 유명한 한검추(최주봉)였다. 이는 최석용의 묘비 앞면 아래에 새겨진 묘비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검추는 1935년 중-한 항일동맹회를 결성해 대일 공동전선을 펼칠 때 총사령을 맡기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자 1936년 말 조선혁명군 대오 70여 명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이후 변절해 정빈, 윤하태와 더불어 동북항일연군 파괴에 앞장섰다. 중국의 전설적인 항일혁명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장 양정위와 그를 지키던 조선혁명군 출신 최윤구를 전사케 하면서 동북항일연군을 사실상 궤멸시키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최석용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최석용은 1947년 1월 김창룡, 문상길, 김지회, 홍순석 등과 함께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3기)에 입학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부터는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으로 서북청년회를 지휘하면서 초토화 작전의 선두에 서서 제주도민 학살에 앞장섰다.
최석용의 ‘신분 세탁’을 도운 국립서울현충원
그런데 최석용의 묘비명을 찬찬히 살펴보면 심각한 역사왜곡과 함께 최석용의 신분 세탁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뤄졌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묘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3년 1월 28일 평북 벽동에서 태어나 19세의 어린나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중국일대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바치기 시작하였나이다. 이국만리 타국땅에서 집도 한칸없이 한검추 최주봉 등 이름으로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하였나이다.
1947년 육사 3기생으로 창군에 선봉이 되여 봉사하기를 도한 10여성상 주요 부대의 창설과 육성을 하시며 많은 공훈을 남기시고 도라가셨나이다.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쓰던 고귀하신 유지 후세에 영원토록 빛날것이오니 안심하시고 잠드시옵소서.”
묘비명에서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했다고 한 부분은 최석용이 1936년 말 일제에 투항해 변절한 이후 일제에 협조한 사실을 교묘하게 숨기는 역할을 한다.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쓰던 고귀하신 유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 대목 역시 국립서울현충원이 친일인사들의 ‘신분 세탁’을 돕는 공간 역할을 해왔음을 고발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을 뿐이다.
▲ 최석용의 묘비명 최석용의 묘비명은 일제에 변절한 최석용의 역사를 철저히 숨기는 신분 세탁을 성공적으로 일구어내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하여 최석용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 김학규
국립서울현충원, 문용채·최석용 묘비명이라도 교체해야
장군 제1묘역의 문용채와 최석용의 사례는 일제강점기 자신들이 한 친일행위를 철저히 숨기는 방식으로 역사왜곡을 한 다른 인물들과 다르다. 이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했다거나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했다면서 국립묘지에서 독립운동가로의 신분 세탁을 과감하게 벌였다. 대단히 충격적이다.
이러한 묘비명이 어떻게 국가기관인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새겨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해 보인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비문 전면의 ‘독립광복을 위하여 투쟁’ 내용 등은 당시 유족이 신청한 내용을 근거로 설치했다”면서 “동 기록의 정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가족과의 협의 및 자문 등을 통해 수정 보완 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 서울 용산역 광장에 자리한 강제징용 노동자상 모습 ⓒ 김종훈▲ 서울 용산역 광장에 자리한 강제징용 노동자상 모습 ⓒ 김종훈
“정말로 우리 사회가 역사정의를 온전히 실천하고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바란다면 일본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확실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사법부가 이번 소송에서 역사정의에 입각한 판단을 내려주기를 기대한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만든 김운성씨가 <오마이뉴스>를 만나 한 말이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2017년 8월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세워졌다. 일본에 끌려가 노역을 살다 쓰러진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기 위해 민주노동과 한국노총이 기금을 모아 건립했다. 제작은 ‘평화의 소녀상’ 작가로 알려진 김운성·김서경 부부가 맡았다.
문제는 <반일종족주의>의 공동저자로 알려진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인터넷 언론 ‘제3의길’과 자신의 SNS를 활용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은 역사왜곡”이라면서 “강제징용노동자상의 모델은 1926년 일본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벌어졌다.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대표, 김소연 전 광역시의원 등 역시 SNS와 인터넷뉴스, 보도자료 등을 통해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이 때문에 김 작가는 부인 김서경 작가와 함께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주동식 제3의 길 대표,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대표, 김소연 전 광역시의원 등 4인에 대해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민사소송 결과가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이미 김 작가 부부는 2019년 말 이 연구위원 등 4인을 상대로 허위사실 등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해 10월 이들에 대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지난 11일 오후 <오마이뉴스>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설치된 용산역 과장에서 김운성 작사를 만나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들었다. 아래는 김운성 작가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옛날 사진 속 일본인이 모델? 노동자상과 완전히 다르다”
▲ 서울 용산역 광장에 자리한 강제징용 노동자상 모습 ⓒ 김종훈▲ 김운성 작가가 직접 비교해서 정리한 강제징용 노동자상과 1920년대 일본 노동자 모습 ⓒ 김종훈
– 명예훼손 형사 소송에 이어 손해배상 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할 때도 그랬지만 강제징용 노동자상도 특정한 인물을 모델로 삼지 않았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노동자가 100만 명 이상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특정한 인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우연 연구위원을 비롯해 일부 인사들은 ‘노동자상의 모델이 1926년에 사진에 나온 일본인’이라고 왜곡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이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노동자상과 관련된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 이우연 위원의 주장이 왜 잘못됐나.
“사실이 아니다. 당장 해당 사진과 비교해도 차이를 알 수 있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표현해 낸 작품이다. 얼굴과 시선부터 하늘을 향하고 있다. 탄광을 막 빠져나와 뜨거운 햇살에 눈이 부셔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모습이다. 오른손엔 곡괭이를 들었고, 바지는 허름한 반바지 차림이다. 동상 하단부엔 석탄더미와 이름 없이 사라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묘비를 세워 둥글게 모아 놓았다.
반면 이 위원이 제시한 인물은 근심이 가득한 사내의 모습이다. 시선도 눈을 거의 감은 채 아래로 향하고 있다. 손은 부상을 당했는지 천을 두른 채 오른손으로 왼손을 받치고 있다. 양발 역시 온전하게 나와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물을 조각하려면 정면과 좌측면, 우측면, 후면 등 사진이 모두 필요한데 이 단편적인 사진으론 구체적인 표현이 어렵다. 어떻게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에 대해 모든 과정을 무시하고 허위사실을 주장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처음 세워진 곳이 일본 교토라고 들었다.
“그렇다. 일본 교토에 단바망간기념관이 있다. 그곳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처음 설치됐다. 조선인 노동자 고 이정호 선생이 평생을 모은 재산을 쏟아 부어 광산을 사들였고 그곳에 기념관이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은 아들 이용식 관장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2016년 여름 제막식 날, 이용식 관장이 작품을 보자마자 ‘아버지와 노동자상이 너무 똑같이 닮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무슨 뜻이겠나? 진폐증을 앓다 47kg 몸무게로 돌아가신 이정호 선생이나 당시 탄광에 끌려간 광부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는 거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바닷물과 메탄가스를 뒤집어쓴 채 섭씨 40도가 넘는 지하 1000미터 탄광 속에서 석탄과 광물을 캐다 진폐증을 앓고 떠났다. 젊은 나이에 키도 크고 덩치도 컸던 분들은 다들 갈비뼈와 광대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됐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처음 만들 때 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런데 일본인이 모델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왜 이 위원을 비롯해 반일동상 공대위가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고 보나.
“갈등을 부추겨 노동자상이 문제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 최종적으로는 동상을 없애고자 하는 의도가 아닐까 의심된다. 특별한 논리나 근거도 없다. 그저 사진 한 장 들고 나타나 노동자상이 일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놓치지 말아할 것은 이 위원은 2019년 UN인권이사회 정기회의에 참석해 ‘한국인 노무자들의 임금은 높았고, 전쟁 기간 자유롭고 편한 삶을 살았다’는 망언을 한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친일 옹호 인사들에게 금전적인 책임 물어야”
▲ 강제징용 노동자상 및 평화의 소녀상을 부인 김서경 작가와 함께 제작한 김운성 작가 ⓒ 김종훈
– 그럼에도 형사소송에서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이 위원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익 때문이다. 돈이 되니까 자꾸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며 공격하고 논란을 조장하고 있다. 실제로 하버드 램지어 교수는 일본에서 유년을 보내고 일본 최고 훈장을 받았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지원을 받아 일본 우익의 주장을 그대로 강조하는 연구활동을 이어왔다. 이우연 위원 역시 일본 극우단체의 지원을 받아 UN에서 ‘강제동원이 없었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의 왜곡된 주장이 통용되면서 심지어 일본의 전쟁범죄가 없었다는 발언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이들의 발언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이 한국 내부에서부터 먼저 강조되고 퍼지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나. 그래서 나는 지금이라도 친일청산법(친일찬양금지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무책임한 발언과 행동에 대해 우리 사회가 온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친일찬양금지법은 ‘국민 통합을 저해한다’라는 이유로 제정이 요원한 상태다.
“솔직히 국내에서 소녀상이나 노동자상을 건립한다고 하면 지역 정치인과 언론이 나서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 때문에 경제가 막히면 어떡하냐’라는 말부터 꺼낸다. 차라리 해외에선 일본 정부에 대항해 싸우면 되는데 국내는 더 많은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친일청산법안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잘못된 주장을 하는 이들의 이익을 차단할 수 있다. 이번에 광복회에서 독립운동가와 후손을 비하한 웹툰작가 윤서인씨에 대해 민사 소송을 취한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다. 금전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
– 민사소송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까?
“허위사실에 대한 증거를 모았고 작가로서의 의견서도 제출했다. 재판부가 사실에 근거해 정의로운 측면에서 판단하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결과가 기대와 달리 나오게 되면, 반일동상 공대위는 더욱 큰 목소리로 ‘평화의 소녀상과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반일을 조장한다면서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할 거라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이 확산되면 종국에는 전 세계에 있는 소녀상과 노동자상 역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일본인을 모티브로 한 노동자상을 어떻게 용인하겠나? 소녀상과 노동자상이 철거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지극히 바라왔던 목표이기도 하다.”
김 작가가 이우연 위원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선고는 오는 4월 7일로 예정됐다.
‘한국인 BC급 전범’ 피해자 고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2013년 11월 모습. 뒷쪽 사진 맨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전범’ 수감 시절의 이 회장이다. 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17살 때 ‘콰이강의 다리’ 포로감시원
일제 패망뒤 연합군 재판 ‘사형선고’
전후 일본 국적 박탈해 보훈도 제외
55년 70여명 동진회 결성 ‘보상’ 요구
65년 ‘한·일협정’ 구실로 ‘창구’ 닫아
91년부터 법정 투쟁 99년 최종 패소
지난해까지 의회 상대로 ‘입법’ 촉구
“슬픈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마지막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짤막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이 집단 거주하는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샛바람 문고’를 운영하는 후지이 고노스케는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 회장이 이날 오후 숨졌다고 밝혔다. 향년 96.
“이학래상이 지난 26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치료의 보람도 없이 28일 오후 2시10분 숨졌습니다. 학래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먼저 숨진 동료들을 생각하고 (비시급 전범들을 구제하기 위한) 입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베 신조 정권이 힘으로 입법화를 가로막았습니다.”
후지이의 설명대로, 조선인 비시급 전범 이학래의 일생은 부당한 일본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3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그는 1942년 봄 면장에게서 갑작스런 호출을 받았다.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데, 자네가 가소!” 근무 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고 했다. 17살 소년은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머잖아 시행될 징집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1942년 8월19일 부산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연합국 포로를 학대한 죄로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고통스런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파죽지세의 승리를 거듭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십만명에 이르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 청년들(3012명)을 동원했다. 이학래가 배치된 타이에서 일본군은 충분한 식량·의약품·의복도 지급하지 않은 채 포로들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로 유명해진 태면철도(타이~미안마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철로를 내는 난공사가 이어진 탓에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감시원 이학래는 일본군 공병대가 요구하는 노역 인원을 맞추려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관 어네스트 던롭 중령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범’이란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히게 된 이유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최말단에서 그처럼 ‘도구’로 사용됐던 조선인 포로감시원 129명은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14명은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가까스로 감형된 탓에 죽음을 면했지만, 곧바로 사회의 냉혹한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조국은 이들을 ‘친일파’라 매도했고, 일본은 ‘전범’이라 멸시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 국적이 박탈되자, 일본 정부는 이들을 원호법·은급법 등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 과정에서 허영(1955년)·양월성(1956년) 등 두 명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조선인 비시급 전범 70여명은 1955년 4월 자치 모임인 동진회를 결성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5년 6월 한-일 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한-일 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됐다며 대화 창구를 닫아버리고 만다. 이 회장은 “전범일 땐 일본인이고, 보상할 땐 조선인이라 하느냐”며 가슴을 쳤다.
이 회장과 동료들은 법정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91년 11월12일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은 무려 5년을 끌었다. 1996년 9월9일 판결에서 재판부는 보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는 국가의 입법 정책에 속하는 문제”라며 원고들의 소를 기각했다. 이 기조는 고등재판소 판결(1998년 7월13일)과 최고재판소 판결(1999년 12월20일)까지 이어졌다. 좌절이 이어질 때마다 이 회장은 “같은 어려움을 당했던 동무들은 모두 죽었다. 가장 젊은 나만 살아 남았다”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짧게나마 문제 해결의 빛이 보인 것은 야당이던 일본 민주당이 2008년 5월 피해자 한 사람당 3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만든 뒤였다. 사실 택시업으로 성공한 이 회장에게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법안은 대다수 의원들의 무관심 탓에 폐기됐고, 여당이 된 민주당은 이들의 고통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고 이학래 회장이 2013년 11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1951년 촬영 아우트램 형무소 구금 전범 사진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 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한-일 국교정상화 50돌을 맞은 2015년 4월 일본 국회에서 만난 기자에게 구순의 이 회장은 “올해엔 꼭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듯 말했다. 2017년에는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 회고록를 통해 “일본 정부는 자신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입법을 촉구하는 사법부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입법 조치를 조속히 강구”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2월 도쿄도 니시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해 다시금 입법을 촉구했지만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정기국회에 관련 법안이 제출되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일 관계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되며 허무하게 세월은 흘렀고, 그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광주=뉴시스]=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는 이상호 화백이 1년여에 걸쳐 완성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 1일부터 5월9일까지 광주비엔날레관 3전시실에서 펼쳐진다고 29일 밝혔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광주=뉴시스] 류형근 기자 = 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상호 화백이 제작한 ‘일제는 빛낸 사람들’ 작품이 13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는 이상호 화백이 1년여에 걸쳐 완성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 1일부터 5월9일까지 광주비엔날레관 3전시실에서 펼쳐진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작품을 비롯해 전쟁을 반대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뜻이 담긴 작품 총 7점이 전시된다.
이 중 ‘일제를 빛낸 사람들’ 작품은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 92명을 선정해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에 묶어 단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은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제작됐으며 417㎝×245㎝ 크기다.
이 밖에도 이번 전시에서는 이라크 전쟁, 권력해부도, 통일염원도, 지옥도 등 반전과 통일 등의 염원이 담긴 다양한 작품이 관객을 만난다.
또 작품 전시에 앞서 31일 오후 전시실에서 특별관람회가 펼쳐지며, 광주시립미술관 강당으로 이동해 토크콘서트도 열린다.
민중미술 작가인 이상호 화가는 조선대학교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군사정권 시절인 1987년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새날이여’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출소 후에도 이 화가는 ‘한국민중판화 모음전’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전국순회전, 망월동 걸개그림전 등을 개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관계자는 “이상호 화가는 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예술인이다”며 “이번 작품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중 미술에 전념한 40년의 활동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는 역작이다”고 평가했다.
▲ 김지철 충남도교육감이 학교 내 일제 잔재를 걷어내기 위해 ‘일제 잔재 청산위원회’를 구성하고 2기 사업의 시작을 선언했다. 사진은 지난 해 충남 일선 학교현장에서 확인된 독재정권 유산인 건물 머릿돌. ⓒ 충남도교육청
충남도교육청(교육감 김지철)이 ‘일제 잔재 청산위원회'(아래 청산위원회)를 구성하고 학교 내 일제 잔제 청산 2기 사업의 시작을 선언했다. 다른 지역 일부 도교육청에서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청산위원회를 구성하고 청산 범위를 확대한 곳은 충남교육청이 처음이다.
충남도교육청은 29일 오후 3시 도교육청 1층 회의실에서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위원회 협의회’ 위원 위촉식과 1차 협의회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서 청산위원회는 충남도 학교 내 일본풍 음계 교가 파악, 일본식 기념비 시설물 조사, 친일 반독재 경력자(설립자, 이사장) 파악과 더불어, 학교에서 기리는 친일 반독재 인물을 조사하기로 의결했다. 조사범위도 일선 학교에서 산하기관까지로 확대하기로 했다.
충남교육청의 일제 잔재 청산 활동은 지난 2018년부터 김 충남교육감의 강한 의지로 본격 추진됐다. 일본인 학교장 사진 게시, 교가, 교표(학교를 상징하는 무늬를 새긴 휘장), 교훈, 학생징계규정 등 일제 잔재를 조사했다. 지난해에는 도교육청과 민족문제연구소충남지부 간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이를 통해 많은 성과를 남겼다. 충남도교육청은 지난해까지 일본인 교장 사진 29개를 철거했다. 또 친일행위 경력자가 작사, 작곡한 교가를 둔 24곳을 찾아냈다. 이 중 4곳이 교가를 변경했다. 일본이 원산지인 58곳에 있는 가이즈 향나무를 교체했고, 머릿돌도 4개 철거했다. 충남도의회에서는 이에 호응해 ‘일제잔재청산특위’를 구성했다.
이번 청산위원회는 그동안 조사에서 누락된 내용을 추가 조사하고, 이를 교육공동체의 합의로 폐기 또는 개정 등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학교별로 일제잔재청산임시위원회를 조직해 의견을 모으고 교실에서는 자료 조사에 학생 참여를 유도하는 등 수업과 연계한 청산 교과를 운영할 예정이다.
▲ 충남도교육청이 학교 내 일제 잔재를 걷어내기 위해 ‘일제 잔재 청산위원회’를 구성하고 2기 사업의 시작을 선언했다. ⓒ 심규상
김지철 충남교육감은 이날 위원 위촉장 수여식에서 “지금까지의 활동이 자료조사에 중점을 두었다면 위원회를 구성한 2기는 교육공동체와 협의를 통한 공감대를 형성해, 더디 가더라도 공동체와 힘으로 일제 잔재를 하나씩 걷어내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2기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에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순국선열에 해당하는 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된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 심사위원들은 이 법률에 의거하여 독립유공자를 심사하지 않고 있다.
을미년(1895년)에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싸운 인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갑오년(1894년)에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제거하기 위해 거병한 인사는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을미의병 참여자는 1962년부터 독립유공 서훈을 시작하여 2020년까지 총 120명을 포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너무도 잘한 일이었다. 1962년 안승우(1865∼1896)에게 독립장을, 1963년에 이춘영(1868∼1896)·서상렬(1856∼1896)·홍사구(1888∼1896)에게 각각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8년에 김진림(1838∼1900, 63세)·윤병의(1822∼1899, 78세)·이강하(1873∼1940, 68세)에게 각각 대통령표창을, 2020년에 이면수(1833∼1898, 66세)·류인목(1839∼1900, 62세)에게 각각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의 총 120명은 을미의병 참여만으로 서훈을 받은 분들이다. 을미의병 참여와 이후의 의병 참여로 서훈을 받은 분은 58명으로 확인되었다.
이로써 1962년에 이병도와 신석호(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가 정한 독립유공 내규 즉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내규에 의거하여 심사하고 있음이 분명히 확인됐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거병한 2차 동학농민혁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인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항일 투쟁의 총사령관이 전봉준이었고, 최고 지도자가 최시형이었다. 전봉준·최시형과 함께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나 싸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항거하였고, 그 반대와 항거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같은 시기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순국한 을미의병(1895)·을사의병(1905)·병오의병(1906)·정미의병(1907) 참여자들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부터 독립유공 서훈을 받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2,682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 순국 직전의 최시형 선생 모습 최시형 선생 ⓒ 박용규
이에 반해,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항일 농민(전봉준 등)은 지금까지 단 한명도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8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한 항일 구국 투쟁 즉 독립운동으로 기술하고 있다. ‘2차 동학농민운동이 항일 구국투쟁’이라는 기술은 1980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2021년 현재까지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수많은 학술 논문과 저서에서 2차 동학농민운동이 항일투쟁 즉 독립운동이라고 논증하였다.
현재 갑오의병(1894년 8월)과 을미의병(1895년)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 서훈대상에 들어가 있다. 너무도 지당한 결정이다. 갑오의병의 의병장인 서상철에 대해 서훈심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갑오의병과 을미의병의 사이에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1894년 9월)은 국가보훈처가 서훈대상에서 지금까지 누락시키고 있다. 위의 세 운동은 똑같이 국권을 침탈한 일본군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2차 동학농민혁명만 서훈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 국가보훈처 팻말 세종시 소재 국가보훈처 ⓒ 박용규
아직도 대한민국은 양반의 나라인가. 독립유공 서훈에서 항일 농민은 차별 받고 있다. 이런 불공평과 모순은 즉각 시정되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에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 특별법에 의거하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를 회복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국가보훈처는 참여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책무가 부여되어 있다.
독립유공 업무를 주관하고 있는 황기철 국가보훈처 장관과 이남우 차관, 그리고 독립유공 공적심사위원장은 ‘독립유공 서훈 대상 개정위원회’를 만들어,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인사들에 대해 서훈을 하는 조치를 단행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통권43호, 2021년 봄호)의 「녹두칼럼」으로 게재된 것으로, 일부 고침.
[현장] 충남천안 ‘독립운동’ 주도하다 죽은 김구응 열사, 그의 모 최정철 열사 ‘추모비 제막식’
▲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안에 있는 만세운동 동상 속의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 중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진 아들을 끓어 안고 일본 순사를 호통치다 어머니도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 이윤옥
지난 1일 찾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의 모자(母子) 무덤에서는 102년 전, 아우내장터의 만세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천안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동자인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이었다. 뜻깊은 날을 기려, 무덤 주변에서는 과거 천안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철(1995, 애국장), 김구응(1991, 애국장) 열사 모자의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흔히 아우내 만세운동이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102년 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순사의 총검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의 길을 걸은 모자(母子)가 있다. 바로 어머니(최정철, 당시 66세)와 아들(김구응, 당시 32세)이 그분들이다.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모자는 가전리 산 8-6번지에 묻힌 채, 지난 100여 년간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과거 어떤 일 벌어졌나 보니… ‘독립선언’ 하려 모인 6400명, 일본군과 맞서다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일경)이 조선인의 기수(旗手, 행사 때 대열의 앞에 서서 기를 드는 일을 맡은 사람, 곧 조선인들)를 해치고자 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 헌병의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 헌병은 사지(四肢)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최정철 지사)가 일본 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죽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김병조 지음, 1920.6, 국한문혼용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번역함, 76쪽.)
이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김병조 선생이 상해에서 펴낸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병조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관여하면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6월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을 지었다.
▲ 추모비 제막식에 앞선 고유제 천안, 가전리 최정철 열사 무덤에서 유족들이 추모비 제막식에 앞서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 ⓒ 이윤옥
한편, 이 책과 같은 해에 나온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상해)에서도 천안 아우내장터의 주모자(主謀者)를 김구응(金九應) 의사로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따끈따끈한 기록이 이 두 역사책이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에서는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조명하고자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제2회째로 아우내 문화제를 열었다. 지난 1일 열린 ‘최정철·김구응 추모비 제막식’은, 이런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의 한 고리로 추진된 것이다.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는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성공회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유족회 주최로 열린 행사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아우내 4.1혁명의길 걷기를 시작으로 오후 2시에는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최정철·김구응 열사 별세 성찬 추모 미사가 열렸다
▲ 성공회 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천안 아우내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열린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미사 모습 ⓒ 이윤옥
성공회 병천교회는 당시 진명여학교를 만들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곳으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한 교회다. 이 학교 교사였던 김구응(32세) 열사는 4월 1일, 교인들과 지역유지, 젊은 청년, 학생들을 이끌고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어머니 최정철(66세) 열사 역시 성공회 병천교회 신자로서 여성들이 대거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끈 인물이다.
“사실 성공회 병천교회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천안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와서 보니 이 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여학교가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구응 열사께서 활약하신 무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를 통해 일제 만행을 기억하며 선조들의 독립정신이 큰나무 가지가 되어 뻗어 나가길 빕니다.”
이는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병천교회 관할 사제 장동윤(미카엘) 신부의 설교의 한 대목이다. 추모 미사를 마치고 오후 4시부터는 병천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최정철·김구응 무덤에서 추모비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오후 4시, 가전리 산 8-6번지,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에는 추모비 개막식을 알리는 주홍빛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최정철 열사의 무덤은 윗자리에, 아드님 김구응 열사의 무덤은 아랫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번에 조성한 추모비는 김구응 열사 무덤 옆에 세웠다.
“오늘 이렇게 증조할머님(최정철 열사), 할아버님(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을 맞아 시비 제막식에 찾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 말씀 올립니다. 두 분께서 목숨 바쳐 순국으로 지켜오신 나라를 위해 앞으로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김운식(73세, 최정철·김운식 열사의 유족대표) 선생은 목이 멘 듯 말했다.
“부끄럽게도 아우내에 오래 살고 있었지만 이 두 분의 존재를 잘 몰랐기에 더욱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앞으로 자랑스러운 아우내의 독립운동가 최정철·김구응 열사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해 손자들에게 들려주겠습니다. 아우내 시내에 내걸린 펼침막을 보고 추모 미사에 참석하였고, 무덤까지 와 보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 추모비에 새겨진 시는 기자가 쓴 것이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여 헌시(獻詩)를 쓰고 그 일생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몇 해 전, 여성독립운동가 최정철 열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취재 과정에서 이들이 아우내장터의 주동자였다는 사실과 이 지역에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열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안타깝게 느낀 것은 바로 최정철·김구응 열사 같은 분들처럼 역사의 조명에서 비껴간 인물들이다. 일제 침략기에 목숨까지 던지면서 순국의 길을 걸었지만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슬프고 쓸쓸하고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제(4월 1일), 무덤가에서 기자는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모였던 사람들 역시 그랬으리라. 참석자들은 추모비 제막을 마치고, 최정철·김구응 열사의 이름을 부르며 만세를 불렀다. 102년 만에 가전리 무덤가에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에 아마 최정철·김구응 열사께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한 만세 추모비 제막식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아우내만세운동 주동자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해 만세를 불렀다 ⓒ 이윤옥
유난히 붉어 보였던, 활짝 핀 진달래 꽃잎 속에 어머님(최정철)과 아드님(김구응) 열사의 화사한 미소가 겹쳐 보였다. 기쁜 날이었다.
“한인사회당은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나 이동휘가 이 당을 만든 것은 단순히 한국 독립 후원자를 얻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이동휘란 사람은 원래 구한국군의 정령(正領) 출신으로 열렬한 반일민족운동자이지, 사회주의 이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초기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짐짓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는데 볼셰비키 집단이 이들을 항일운동에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동휘는 도량이 넓고 활동력이 큰 독립운동가였다.”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 성재 이동휘 한인사회당은 1918년 4월 28일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자 사회주의 정당이다. 이동휘는 항일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볼셰비키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8개 지부를 설치했다. 한인사회당 최초 중앙위원에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오와실리, 군사부장 유동열, 선전부장 김립, 김알렉산드라가 뽑혔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한인사회당은 조선인 최초 사회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이다. 1918년 출범한 한인사회당은 1921년과 1922년 각각 창설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보다 더 빨리 탄생했다.
성재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을 기반으로 연해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를 만들고, 군사학교를 세웠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韓人赤衛隊)도 구성했다. 한인적위대가 참여한 우수리 전투는 러시아 한인이 참여한 첫 무장투쟁이었다. 한때 개신교도였던 이동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이 틀림없다.”(A true Christian must be a socialist and a real socialist must be a Christian)
칼 바르트(Karl Barth)의 말처럼, ‘개신교도’였던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종교이자 이념이었던 ‘독립’
▲ 윤석남이 그린 김알렉산드라 1885년 김알렉산드라(본명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했다. 191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그녀는 조선인 최초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동휘를 구명 활동으로 석방한 그녀는 한인사회당 창당 5개월 만에 백군에게 체포됐다. 1918년 9월 16일에 처형당했다.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회에서 촬영. ⓒ 백창민
‘무인’이었던 이동휘가 ‘혁명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여운형은 “이동휘는 공산주의의 ABC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지만, 성재는 종교와 이념도 독립을 위한 ‘도구’로 여겼다. 이동휘에게 ‘독립’은 종교이자 이념이었다. 실제로 1919년 12월 25일 <혁신공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1919년 3.1 운동 전후 조선에는 한성정부가, 중국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러시아에는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각각 활동하던 세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1919년 11월 3일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초창기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였다. 세 사람이 주도했기 때문에 ‘삼각정부’ 또는 ‘삼각내각’이라 불렸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세 지도자의 독립운동 노선은 달랐다. 우남 이승만은 ‘친미외교론’을, 도산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성재 이동휘는 ‘무장투쟁론’을 펼쳤다. 성재는 오직 무기와 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혈주의'(鐵血主義)를 표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이동휘와 그의 동지 1919년 8월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한인사회당 소속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냈다. 모스크바로부터 지원받은 거액의 자금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자금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백범 김구는 내각 비서장 김립을 암살했다. 일제는 “반일 조선인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제일류의 인물”로 김립을 꼽았다. 그런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가 죽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진 앞줄 오른쪽 끝이 김립이다. 김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이극로, 김철수, 계봉우, 신원미상이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1920년 여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며 조선인 무장투쟁이 큰 성과를 거뒀다. 그 보복으로 일제는 만주 간도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조선인 동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자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다.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논쟁도 터져 나왔다. 이동휘는 급진론에 근거해 임시정부의 전면 개혁을 요구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여기에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유용 시비가 맞물려 일어났다. 성재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을 때 한인사회당은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약속받은 바 있다. 임시정부 개혁이 실패하자 성재는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하이 임정을 탈퇴했다.
총리 사임 후 성재는 북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5월 20일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에서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이동휘는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11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과 회담을 했다.
이 무렵 러시아 극동에서 한인 공산주의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대립했다. 여기에 ‘자유시 참변’까지 터지면서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1923년부터 이동휘는 새롭게 출범한 코민테른 꼬르뷰로(Korbureau 고려국)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외 독립운동 무대가 된 ‘도서관’
▲ 대한간호협회 광고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캠페인을 벌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34인의 간호사와 간호 학생을 기억하자는 내용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윤익선, 이범승, 이긍종, 이묘묵 같은 ‘친일 도서관인’ 외에 ‘독립운동을 벌인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 대한간호협회
1924년 2월 꼬르뷰로가 해산하자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고려도서관’에서 관장으로 일했다. 신한촌은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 말 그대로 한인이 꾸린 새로운 마을이었다. 고려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조선 땅에서 해외 동포 위문을 목적으로 보내온 백과사전과 책을 바탕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교육구국운동을 펼친 성재가 도서관을 통해 그 행보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 신한촌에서는 1910년대부터 ‘도서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대동공보>가 발행금지를 당하자 한글 신문 <대양보> 발간을 준비했다. 신개척리에 <대양보> 발행소를 새로 지으려 한 최재형은 건물 일부를 ‘도서관’으로 계획했다.
러시아 연해주뿐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사례가 있다. 송재 서재필과 성엄 김의한, 김영숙(난영)은 해외 도서관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초까지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짓지 않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펼쳤다. 이동휘가 신한촌에서 도서관을 운영할 무렵, 조선 땅에 도서관은 흔치 않았다.
타국을 정처 없이 떠돈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흔적이라 이동휘의 사례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를 ‘도서관인’으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학교와 도서관을 기반으로 펼친 성재의 구국운동은 ‘해외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조선인의 ‘해외 도서관 운동사’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할 대목이다.
‘도서관인’으로 스스로 인식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던 그들에게 정규 도서관 교육을 받았는지, 도서관인으로 자각했는지 묻는 것은 사치스러운 질문 아닐까? 도서관인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도서관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무대’요, 또 다른 ‘무기’였다.
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학교는 제법 알려졌지만 도서관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 문헌정보학은 우리 땅에 명멸한 도서관 위주로 관심을 가져왔지만,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한 도서관 역사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에서 ‘속인주의'(屬人主義)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은 한국 도서관사 연구의 과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인 34인을 기념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 독립운동 전선에서 빛나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데 이어 신문광고를 했다. ‘독립운동가 간호사들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러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도서관을 무대로 펼쳐진 독립운동’은 없었을까? 이동휘 사례처럼 도서관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
▲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시절 이동휘 이동휘는 원동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MOPR) 위원으로 활동했다. 모플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해 모금과 선전 활동을 펼쳤다. 원동변강 모플위원회는 이동휘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모플 열성자대회에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사진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동휘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고려도서관을 운영하던 성재는 1928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했다. 1929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서 코민테른과 연락을 담당하는 총지휘자가 되었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다.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던 이동휘는 1935년 1월 31일 심한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숨졌다. 작가 김성동이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이라 칭했던 이동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로 분투했으나 그는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보지 못했다.
62세로 숨진 이동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성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성재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조국이 해방된 지 50년 만이었다. 권업회 사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이동휘의 신한촌 집도 이젠 사라졌다. 그 자리엔 아파트와 상점이 들어섰다. 성재가 관장으로 일한 도서관은 이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동휘 집안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성재의 부친 이승교는 3.1 운동에 가담했다. 큰딸 이인순은 길동여학교 교사로, 둘째 딸 이의순은 명동여학교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두 딸뿐 아니라 성재의 사위들 역시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성재의 아버지 이승교는 독립장을, 이동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그의 큰딸과 둘째 딸은 애족장을 받았다. 첫째 사위 정창빈은 대통령표창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으로 활동한 둘째 사위 오영선은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 중심에 이동휘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늘 성재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아명이 ‘독립'(獨立)이었던 성재는 이름처럼 ‘독립’에 몸 바친 삶을 살았다.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외교가 아닌, 오직 무장투쟁과 최후 혈전을 통해서만 영원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주창한 그는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렸다.
이동휘가 활약한 신한촌에는 3개의 기둥으로 만든 기념비가 서 있다. 3개의 기둥은 각각 조선에 있던 한성정부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해외동포를 의미한다.
그의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은 조선인이 집단 거주했던 곳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북방, 개척리의 정북방에 있다. 신한촌에는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같은 독립운동 단체가 활동했다. 연해주 신한촌은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추 기지였다. 1999년 사단법인 국외 한민족연구소는 3.1 독립운동 80주년을 맞이하여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26A에 있다. ⓒ flickr
해방된 조국은 결국 갈라졌고, 해외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남도 북도 아닌 러시아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오랫동안 살아야 했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이 바라던 해방 조국이 ‘분열’된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1913년 권업회에서 이동휘는 이렇게 연설했다.
“나누면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늘날은 살부살형(殺父殺兄)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여 서로 나누지 말자.”
남북이 둘로 나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를 것을 성재는 알았던 걸까? 살부살형의 원수라도 진정한 해방을 위해 서로 나뉘지 말자고 역설했던 그의 말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적 일갈이었다. 성재가 강화도에 처음 세운 근대학교 이름도 ‘합일학교'(合一學敎)다.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한다’라며 ‘단합’도 아닌 ‘영원단합’을 강조한 성재는 죽어서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에 세운 세 기둥이 하나 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성재의 ‘혁명’과 그의 진정한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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