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사징은 공동조사단이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희생자 유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공동조사단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공동조사단 공동대표, 아래 공동조사단)은 아산시와 함께 오는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9일 간 일정으로 아산 설화산(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에 묻혀 있는 민간인희생자에 대한 유해를 수습한다고 31일 밝혔다. 특히 아산시는 이번 유해발굴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본격 수습은 오는 2월 22일 개토제와 함께 시작할 예정이다.
이번에 수습 예정인 희생자 유해는 1951년 1월께 총살 당한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충남 아산시 배방리 산기슭 폐광터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공종조사단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해를 오는 22일 부터 본격 수습한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모두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공동조사단은 수습한 유해는 감식과 보존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 안치할 예정이다.
유해 수습과 발굴 과정에 참여나 참관을 원하는 사람은 공동조사단 측에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된다.
공동조사단 관계자는 “유해발굴과 수습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한발 다가가고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입법화 요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에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한국전쟁유족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인권재단사람, 장준하기념사업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포럼진실과정의 등 1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잡던 이와 독립운동가가 같은 묘역에? 친일파 묘, 최소한 친일 행적 푯말이라도 세워야 친일귀족 이해승 변호사, 사법농단 주역 대법관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MHz (18:25~20:00)
■ 방송일 : 2020년 8월 14일 (금요일)
■ 진 행 : 정관용(국민대 특임교수)
■ 출연자 : 이준식(독립기념관장)
◇ 정관용> 내일이 15일 광복 75주년 되는 날입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 심각한 상황이죠. 그래서 이 광복절 맞아 특별한 분을 모셨어요. 친일파 재산 환수에서도 활약을 하셨고 지금 독립기념관장을 맡고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준식> 네.
◇ 정관용> 관람객들 코로나 때문에 혹시 차단된 거 아닌가요, 독립기념관.
◆ 이준식> 저희도 한참 코로나19가 극성일 때는 한 70일 동안 휴가냈다가요. 6월 초부터 다시 문을 열었고 지금 현재로는 예년의 날짜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한 70~80%에서 아니면 40~50% 이렇게 예년의 관람객을 회복한 상태입니다.
◇ 정관용> 물론 인원 제한은 하겠죠.
◆ 이준식> 전시관은 인원 제한을 합니다.
◇ 정관용> 거리두기도 하고. 내일 광복절 기념식 혹시 여기서 여기세 하나요.
◆ 이준식> 충청남도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경축식을 갖습니다.
◇ 정관용> 정부기념식을 지난해에는 독립기념관이.
◆ 이준식> 지난해에는 정부 경축식을 가졌는데 올해는 정부 경축식을 서울에서 갖는 걸로 알고 있고요.
◇ 정관용> 다 축소해야 되니까 그렇죠.
◆ 이준식> 그래도 이번 경축식은 독립기념관하고 충청남도도 규모를 200명 정도로 할 예정입니다.
◇ 정관용> 그래야죠. 독립기념관으로서 75주년의 광복절 어떤 의미가 제일 크다고 보십니까?
◆ 이준식> 해마다 광복절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데요. 특히 5월 광복절은 우리가 의미가 더 각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작년 광복절만 하더라도 일본의 경제침략 때문에 굉장히 좀 시끌시끌했는데 그때 일부에서는 우리가 일본한테 무릎을 꿇는 게 차라리 낫다 그게 우리가 살길이다. 우리는 일본하고 맞서서 이길 방법이 없다.
◇ 정관용> 일부 언론에서 그런 목소리를.
◆ 이준식> 그런 목소리를 냈죠. 거기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1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보면 그런 얘기가 모두 헛소리가 됐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위기가, 경제위기도 잘 극복하고. 특히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국과 일본의 국격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게 입증이 됐습니다. 저희 세대나 아니면 저희 윗세대만 하더라도 일본을 따라잡아야 된다 또는 일본을 이겨야 된다는 것이 일종의 꿈 같은 얘기였는데 지금은 그 꿈이 현실이 돼서 사실상 일본을 따라잡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을 뛰어 넘었다. 그 길이라는 말이 정말 통하는 그런 2020년이 됐다 그래서 올 광복절은 특히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우리가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일본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어떤 해보다 의미 있는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일본의 경제보복, 경제침략 그로 인한 우리 경제의 피해 별로 없다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 경제의 소재 부품 장비 산업에 있어서의 경쟁력은 더 커졌다는 겁니다.
◆ 이준식>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됐다라고 이렇게 평가를 하더라고요.
◇ 정관용> 반면 일본 경제에 미친 악영향은 더 크다.
◆ 이준식> 일본은 오히려 관련 산업 분야가 오히려 침체되고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고요.
◇ 정관용> 그리고 지금 현재도 현안이 있지 않습니까?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이제 일본 측 자산에 대한 압류 이런 것들을 가고 있고 공시송달 좀 어려운 얘기입니다마는 거기까지 이루어졌단 말이에요. 공시송달이 이뤄졌다는 얘기는 상대 측이 서류를 수령하지 않더라도 법률상.
◆ 이준식> 효력을 갖는 거죠.
◇ 정관용> 서류를 받은 걸로 간주하겠다. 이제부터는 시기적으로 그쪽에서 다시 항소를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현금화할 수 있는 과정이 다 담겨지고 있는 거잖아요.
◆ 이준식> 그러니까 강제집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거죠.◇ 정관용> 그렇죠. 그런데 그거를 하게 되면 일본 정부는 가만히 안 있겠다는 상황인데 이준식 관장 보시기에 어떻게 합니까? 법대로 그냥 가야 돼요? 아니면 뭔가 지금 협상을 통해서 풀어보려고 했는데 협상이 안 되죠, 지금.
◆ 이준식> 제일 좋은 건 협상을 통해서 푸는 거죠. 그런데 워낙 일본 측의 태도가 완강하기 때문에 지금 일본 측이 협상을 안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고 사실상 선언을 한 셈이어서 지금 협상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는 그런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이후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배 하거나 점령했을 때 그리고 식민지배나 점령이 끝났을 때 그런 잘못된 과거 역사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죄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 정관용> 당연하죠.
◆ 이준식> 그런데 일본은.
◇ 정관용> 독일이 대표적이고요.
◆ 이준식> 일본은 유일하게 반성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반성하고 사죄하라고 하라면 우리가 뭐를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사죄하라고 하느냐. 우리는 반성할 것도 없고 사죄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노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거죠.
◇ 정관용>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일본은 응하지 않고 그러면 법률적으로 강제집행 단계로 가야 되는 게 옳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준식> 원칙적으로는 이게 결국 어쨌거나 삼권분립이 이뤄진 나라인데요. 법원에서 그렇게 판단했는데 정부나 또는 시민사회가 그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건 또 이것도 이상합니다.
◇ 정관용> 말이 안 되죠.
◆ 이준식>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사법부의 판단은 아무 의미는 없는 걸로 되는데 적어도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는 나라라고 한다면 사법부의 판단은 또 사법부의 판단대로 존중을 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극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가 잘 타협점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굳이 타협점을 찾기가 힘들다면 한국으로서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관용>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어찌 보면.
◆ 이준식> 달리 방법이 없는 거죠.
◇ 정관용> 지금 일본 내에서는 아베 정권은 이제 곧 무너진다, 정권이 바뀔 거다. 이런 얘기가 많잖아요.
◆ 이준식> 지금 아마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렇게 되면 혹시 새로운 어떤 계기를 맞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점은 어떻게 보세요?
◆ 이준식> 지금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 중의 1명은 한국과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의원이라 그러니까 만약 그 사람이 차기 총리가 된다면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거겠죠.
◇ 정관용> 대화를 통한 해법. 한번 미리 가상적으로 해 본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이준식> 저는 가장 중요한 게 기본적인 출발점은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진솔하게 사죄하고 우리가 그다음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책임을 지겠다라는 입장을 보이는 게 한국과 일본 사이의 실타래처럼 꼬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거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그걸 안 하니까.
◆ 이준식> 그거를 안 해서 문제인 거죠.
◇ 정관용> 인졍, 사죄, 반성 이걸 안 하니까 다른 편법들이 거론되는 거 아니에요.
◆ 이준식> 우리가 거창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니거든요. 기본은 반성하라. 반성의 바탕에서 사죄하라. 그리고 사죄한 다음에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라. 그거인데 일단 반성을 안 하니까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일본, 지금 아베 정부가 있는 한은 그냥 냉각기가 계속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도. 일본 내부의 정권의 변화 이런 것들과 맞물려서 조금 새로운 대화의 물꼬를 터야 되겠다 그 정도 말씀 듣고. 우리 내부에서의 친일청산 관련돼서는 지금 두 가지의 화두가 떠올라 있습니다. 하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재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돼 있는지 그 문제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이제 국립묘지법 개정 관련된 논란이 또 하나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짧게짧게 하나하나 짚어보면 우리 이준식 관장께서 바로 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하셨잖아요. 어디까지 활동이 됐었죠, 그때. 2006년에 출범해서 2010년에 문을 닫았는데요. 4년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 법에 정한 특별법에 정한 친일반민족행위가 남긴 재산. 그 후손이 상속한 재산을 찾아서 재산이라고 그러면 주로 부동산입니다.
◇ 정관용> 토지죠, 토지.
◆ 이준식> 토지하고 임야입니다. 토지하고 임야를 찾아서 국가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했고요.
◇ 정관용> 몇 권이나 했습니까, 그때.
◆ 이준식> 당시에 시가로 한 3000억 원 정도 했습니다.
◇ 정관용> 모두 합해서 3000억 원?
◆ 이준식> 시가로요.
◇ 정관용>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 이준식> 많지 않죠. 왜냐하면 해방 직후에 했으면 그 규모가 덕 컸을 텐데 해방되고 난 다음에 거의 60년 이상 지난 시점에 했기 때문에. 그리고 특별법을 만들면서 국회에서 친일파가 남긴 재산을 국가 귀속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거래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도 중요하다. 했습니다. 거래 안정이 뭐냐 하면 지난 시간 동안 이미 거래가 이루어진 친일파는 친일재산이 아닌 거라고 본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친일파의 후손이 그 재산을 처분해서 다른 형태로 재산을 변화시켰다고 하더라도 그 변형 재산에 대해서는 친일재산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특별법에 규정을 해 놨기 때문에 거기 친일파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 3000억 원 정도 규모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친일 후손 명의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런 거죠.
◆ 이준식> 네.
◇ 정관용> 그런데 국가귀속 조치에 불복해서 소송들을 하더라고요.
◆ 이준식> 거의 대부분 소송을 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 소송에서의 정부가 대부분 이기죠? 이기기는.
◆ 이준식> 거의 대부분 이겼습니다.
◇ 정관용> 이 특별법에 의해서 우리가 되니까. 법적 근거가 있으니까. 그런데 지난해인가 친일파 이해승 유산반환소송은 정부가 패소했다면서요?
◆ 이준식> 원래 친일재산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시 1심에서는 국가가 승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친일재산이 맞다. 국가 귀속이 옳은 결정이다라고 했는데 친일재산조사위원회 활동이 끝난 다음에 2심에서 이게 뒤집어졌습니다. 뒤집어진 이유는 이해승이 친일파라고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이해승이 소유한 재산도 친일 재산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게 뭐냐 하면 특별법에 병합의 공으로 귀속 작위를 받은 자를 친일파로 규정한다고 돼 있었습니다. 한일 병합의 공을 세워서 귀족 작위를 받은 자는.
◇ 정관용>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 이준식> 귀족 작위를 받은 자는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친일파다 이렇게 규정을 해 놨는데. 2심 재판부가 그걸 교묘하게 비틀어서 해석을 했습니다.
◇ 정관용> 어떻게요?
◆ 이준식> 귀족 중에는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작위를 받은 자도 있다. 그러니까.
◇ 정관용> 그냥 작위를 왜 줘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사진=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유튜브 라이브 캡쳐)
◆ 이준식> 그러니까요. 그래서 이걸 나중에 이제 입법 부. 전문 법조계에서는 입법 부작위라고 하더라고요. 국회에서 법을 만들 때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으로 귀족 작위를 받은 자는 다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거라는 의미로 집어넣었는데 법원에서 그거를 그러면 작위를 받은 자 중에는 병합의 은공으로 받은 자도 있고 그렇지 않게 작위를 받은 자도 있다. 그리고 이해승은 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본 겁니다.◇ 정관용> 그쪽 변호인이 제출한 무슨 근거가 있을 거 아니에요?
◆ 이준식> 그런 논리를 편 거죠.
◇ 정관용> 병합에 공 세운 바 없다. 그냥 작위를 주더라.
◆ 이준식> 그냥. 그러니까 그냥 작위를 받은 거다.
◇ 정관용> 왜요? 그냥 왜요?
◆ 이준식> 그러니까 전주 이씨 종친이라고 그냥 작위를 받은 거다.
◇ 정관용> 그냥 그 논리를.
◆ 이준식> 그 논리를 법원이 그냥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중에 국회에서 문제가 되니까.
◇ 정관용> 법 개정했죠, 그래서?
◆ 이준식> 법을 개정했죠. 그래서 병합의 공이라는 표현을 삭제했습니다. 그러면 개정된 법에 의해서 다시 국가 귀속 조치를 하기 위해서 다시 소송을 제기했는데 국회에서의 법을 개정하면서 이상한 부칙 조항을 집어넣었습니다.
◇ 정관용> 또 뭐예요?
◆ 이준식> 확정 판결이 난 건에 대해서는 이 특별법의 개정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
◇ 정관용> 그거 뭐 딱 이해승 소송을 염두에 둔.
◆ 이준식> 봐주기, 봐주기, 봐주기 부칙조항이죠.
◇ 정관용> 그런 부칙이네요.
◆ 이준식> 그러니까 다른 건은 거의 다 국가가 승소했고요. 이해승 건만 패배했는데 결국은 이해승 건을 봐주기 위해서 그걸 집어넣은 거로밖에 해석이 안 되는 거죠.
◇ 정관용> 어떤 사람이에요, 이해승?
◆ 이준식> 이해승은 전주 이씨 종친이고요. 후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귀족 가운데서도 굉장히 높은 작위를 받았고요. 상당히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조선귀족회라고 귀족들의 단체 회장도 하고. 친일 행적을 한 건 맞습니다. 법원이 뭐라고 변명을 했느냐 하면 귀족 작위를 받고 난 다음에 친일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공으로 귀족 작위를 받은 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취득한 게 친일의 대가로 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
◇ 정관용> 이제 그런데 그 논리를 대법원도 인정했어요?
◆ 이준식> 대법원에서는 이상한 결정을 했습니다. 1심에서는 국가 결정이 맞고 2심에서는 국가 결정이 잘못됐다고 하면 판결이 엇갈린 거 아닙니까? 그럼 대법원에서 판단을 해야 되는데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위라는 거를 결정했습니다.
◇ 정관용> 무슨 말이죠?
◆ 이준식> 심리불속행위라는 건 뭐냐 하면 쉽게 얘기해서 2심 판결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대법원에서 따질 필요도 없다. 그래서 저희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래서 몇몇 법조계분들한테 물어봤더니 말이 안 된다. 1심하고 2심 판결이 엇갈리면 대법원에서 판단을 해야지. 2심 결정이 났다고 해서 2심 결정이 났다고 해서 2심 결정이 맞다고 하면 대법원이 왜 존재하느냐, 이런.
◇ 정관용> 대부분의 소송에서는 국가 정부가 이겼는데 유독 이 재판만 이렇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세요?
◆ 이준식> 저는 그 이해승 후손이 아주 좋은 변호사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제일 실력 있는 변호사들을 써서. 2심 재판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2심 재판부의 재판장이 나중에 사법비리.
◇ 정관용> 사법농단.
◆ 이준식> 사법농단의 주역으로 꼽힌 박병대 대법관입니다. 그러니까 2심 판결에서 이해승 후손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한 다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법관이 됐죠.
◇ 정관용> 변호인들은 어디 어느 로펌이었어요.
◆ 이준식>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로펌입니다.
◇ 정관용> 김앤장. 심지어는 일본 기업까지 대리하시는 데니까 뭐. 이제 이해승의 후손이 무슨 호텔을 갖고 있다.
◆ 이준식> 예전에 스위스 그랜드호텔이라고 불렀던. 상당히 큰 호텔이죠. 이해승 후손은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미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고요. 그 토지를 처분해서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다음 국립묘지법 개정 논의가 지금 나오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부 공식기구에서 친일 행적 조사가 다 끝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립묘지에 묘역 옆에 친일 행적을 푯말이든 뭐든 이렇게 표시하든지 그게 싫으면 파가든지. 이렇게 하자라는 법 개정안이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준식> 예전에는 파묘를 주장했죠. 그러다가 요즘은 파묘도 한 방법이지만 정 후손들이 파묘를 못하겠다고 하면 그 옆에다가 친일행적을 적어놓는 판을 따로 세우자. 부끄러워서라도 이장을 하지 않겠느냐. 그러던 이 문제가 이제 국회에서 법 개정 논의로 막 불붙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제 사망을 했고 그러면서 백선엽 장군을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이 맞느냐.
◇ 정관용> 논란이 퍼졌죠.
◆ 이준식> 커졌죠. 그런데 동작동 현충원도 그렇고 대전현충원도 그렇고 장군 묘역과 애국지사 묘역이 같이 있습니다. 현충원에는 장군 묘역만 있는 게 아니라 애국지사 묘역도 있습니다. 적어도 애국지사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국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결정한 사람과 같이 묻히는 게 굉장히 억울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외할아버지는 동작동 현충원에 어머니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계시는데요. 후손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가슴이 아픕니다. 독립운동 하신 분들이 하늘나라에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내가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같이 같은 곳에 묻혀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한번 그런 고민을 하면 답은 쉽게 나올 것 같은데요.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 그런 얘기까지 했습니다. 정 백선엽을 현충원에 모시려면 애국지사 묘역을 차라리 옮겨라.
◇ 정관용> 네, 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 하다 돌아가신 분하고 그 독립하던 분을 잡으러 다니던 분하고 같은 묘역에 있다는.
아직도 끝 못 맺은 일본인 명의 토지환수 문제의 역사 역대 정부 과거사 문제 무관심과 행정력 부족도 한몫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원남동 종묘 담장 옆에 위치한 일본인 토지 일부. 해당 토지는 현재 국유화 작업을 거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일제에 침탈됐던 국권을 되찾은 지 75년이 흐른 2020년. 그러나 여전히 대한민국은 이 강토에 36년 일제강점기가 남긴 토지수탈의 흔적들을 완벽하게 털어내지 못했다.
광복 75주년을 맞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영토 곳곳의 등기부등본이나 토지대장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땅을 보유했던 일본인들이 버젓이 소유주로 기재돼 있다. 광복 이후 토지 문제를 정리할 때 국유화됐어야 마땅했던 ‘일본인 명의 토지’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14일 조달청과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해방 후 수백만㎡에 달하는 일본인 명의 토지가 대한민국 정부의 재산으로 환수되지 못했다. 2012년부터 조달청이 이 작업을 전담하면서 8년간 본격적인 국유화 작업이 진행됐음에도, 현재까지 환수되지 못한 일본인 명의 토지는 총 3,052필지에 달한다.
역대 정부 일본인 토지환수에 무관심
전문가들은 일본인 명의 토지를 75년 동안이나 제대로 환수하지 못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대대적으로 이뤄진 창씨개명 때문에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분하기 어려웠고 △해방 직후에도 이런 정교한 작업을 추진할 행정력이 부족했으며 △역대 정부가 일제 잔재 청산 등 과거사 정리 문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인 토지 환수 작업을 근본적으로 꼬이게 만든 배경은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모든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려 한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다. 1940년부터 시행된 창씨개명의 결과, 1941년 기준으로 한반도 전체 호적 428만 2,754호 중 322만 694호(81.5%)가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이 결과 부동산 공적 장부에도 일본 이름이 쓰이게 돼, 광복 이후에도 장부만 봐서는 토지의 소유주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를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군정과 초기 한국 정부는 일본식 이름으로 된 공적장부상 실소유주를 추적해 한국인과 일본인을 분리해야 했다. 한국인의 것은 한국인에게 돌려주고, 창씨개명하기 전의 이름으로 대장에 기록해야 했다. 일본인의 것은 국가에 귀속시켜야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정치적 환경에서 이런 세밀한 작업은 불가능했고, 역대 정부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었다.
친일행위에 대한 청산이 부진했던 것도 이유가 됐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연구한 조미은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승만 정부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 탓에 친일재산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일본인 명의 재산은 관심사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돈 문제도 있었다. 조달청 관계자는 “정부 수립 초기 국가가 재정마련을 목적으로 공적장부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하게 귀속 재산을 처분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 일본기업, 일본기관이 소유한 토지들은 광복 후 미군정법 등에 따라 한국에 귀속됐는데, 이 때 귀속 재산은 남한 국가 재산의 80%를 차지했다. 이 귀속 재산의 일부는 농지 개혁에 분배되거나 기업에 판매됐다.
친일재산조사위 해체되며 동력 떨어져
물론 이후 정부에서도 일본인 명의 재산을 국유화하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정부는 1985년 ‘1차 국유재산 권리보전조치’를 시작으로 누락된 일본인 명의 재산을 추적해 국유화했지만, 당시 조치는 일본인 명의 재산만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 아니어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2006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는 이전 정부 조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과거 조사에서는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4글자 이름만이 포함됐는데, 재산조사위는 3글자 이름 중 일부도 조사 대상에 포함했다.
여기에 더해 재산조사위는 ‘일제강점기 재조선 일본인명 데이터베이스(DB)’를 만들며, 일본인 재산 조사를 위한 핵심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일제시대 자료 1,028건을 통해 일본인 이름 26만9,595개를 파악함에 따라,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확인 절차가 명확한 근거에 따라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재산조사위는 활동기간 연장이 불허되면서, 이 조사는 4년 만에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홍경선 전 재산조사위 전문위원은 “아직 일본인명 DB 제작을 위해 확인해야 했던 자료가 남아있는 등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활동이 중단돼 아쉬움이 컸다”고 말했다. 이후 일본인 명의 재산 추적은 2012년부터 기획재정부의 위임을 받은 조달청이 전담하게 되면서 다시 시작됐다.
전문가들 “범정부차원 조사기구 필요”
현재 조사에도 한계는 있다. 지난해 5월 감사원은 특별감사를 통해 조달청이 △일본인명DB 검색프로그램을 활용하지 않았고 △과거 재산조사위가 일본인 명의 재산으로 확정한 3,520필지를 조사하지 않고 방치했으며 △소유권 반환소송이 필요한 은닉의심재산 34필지에 대해 검토조차 하지 않고 소송을 보류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 일을 특정 정부기관에만 맡길 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포함된 범정부 차원의 조사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위원은 “법률적 기술적 문제들이 많은데 이번 기회에 체계적으로 팀을 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연구원도 “공적장부 일본 이름 지우기 사업을 하기 위해서도 일제강점기 당시 자료를 분석하는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며 “과거사 문제는 정권을 떠나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할 문제인 만큼 민관이 합동으로 구성된 상설 기구가 필수”라고 말했다.
[광복절 75주년 기획 – 공유지 위에 선 친일파 ②] 서정주 집과 시비, 관악구 예산으로 관리
김성수, 서정주, 조택원, 김기수, 함화진, 주요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및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동상 및 시비, 기념관 등이 공유지에 수십 년째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광복 75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현장에서 이를 직접 확인했다. [편집자말]
▲ 사당역 6번 출구 뒤쪽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미당이 살던 집이 있다. ⓒ 김종훈▲ 사당역 6번 출구 뒤쪽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미당이 살던 집이 관광명소가 돼 운영 중이다. ⓒ 김종훈▲ 사당역 6번 출구 뒤쪽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미당이 살던 집이 관광명소가 돼 운영 중이다. ⓒ 김종훈
“서울미래유산 서정주 가옥”
서울지하철 사당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서정주의 집’ 대문 옆쪽에 붙은 표지석 내용이다. 2013년 서울시는 서정주의 집을 “시작(詩作)의 산실로 시인의 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소”라면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발표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서울을 대표하는 유산 중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유무형 자산을 보전하기 위해 서울시가 마련한 프로젝트다.
관악구 역시 이에 발맞춰 서정주의 집을 “시인의 숨결과 생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미당의 주요 유품들과 저서들을 전시하고 있다”면서 관악구 홈페이지에 ‘인기명소’로 소개했다. 현재 이곳은 관악구청 재산으로 등록돼 관리 운영되고 있다.
2003년 서울시는 서정주의 집을 매입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미당 서정주의 집이 한 건축업자에 매각될 상황에 놓이자 시비 7억 5000만 원을 들여 매입했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매입은 했지만 공사비를 확보하지 못해 서정주 집은 빈집으로 방치됐다. 2009년 오세훈 서울시장 재임 당시 서울시는 시비 10억 원, 구비 2억 5000만 원을 추가로 투입해 서정주의 집에 대한 개보수를 진행했다. 대문 우측 마당에 ‘미당 서정주의 집’이라는 파란색 간판까지 올려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서정주의 집’은 2011년 정식 개관했다. 이후 기념관 형태로 서정주의 유품과 시집, 사진 등이 전시돼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앞서 서정주는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시를 통해 학병과 지원병, 징병을 선전하고 선동했고, 산문을 통해 문인으로서의 ‘문필보국’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바 있다.
관악구 곳곳에 남은 서정주 흔적
▲ 사당역 6번 출구에 세워진 미당 서정주의 시비 ⓒ 김종훈
서정주는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말년 30년을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관악구에는 ‘서정주의 집’을 포함해 서정주와 관련된 기념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서울 지하철 사당역 6번 출구 남현예술정원 입구에 세워진 서정주의 시비도 이 중 하나다. 지난해 1월 기존의 수경공원을 철거하고 새롭게 개장한 남현예술정원에는 서정주의 시 <신부>가 시비로 설치돼 있다. 미당의 시비 맞은편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원수의 시비 <겨울나무> 역시 설치돼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정주의 집과 더불어 관악구 인기명소로 등재된 관악산호수공원에도 서정주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1997년 12월에 조성된 관악산호수공원은 서울대학교 정문 우측, 관악산 진입로에 자리한 도시자연공원이다. 관악구는 시비 앞쪽 안내판에 “우리구에 거주하며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미당 서정주님의 관악사랑 정신을 담은 시비를 세워 애향심을 표상으로 했다”라는 설명을 기재했다.
‘서정주의 집’을 포함해 시비 등을 직접 관리하는 관악구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서정주 시인에 대한 시민들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면서 “서울시에서 (서정주의) 집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고 이에 따라 (관악)구에서는 최소한의 예산을 투입해 운영·관리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관악구는 “절충안을 찾고 있다”면서 “협의를 거쳐 서정주의 (친일 관련 내용을 포함하는) 안내판 등을 설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정주의 집 등 기념물을 폐기하거나 용도변경을 할 계획이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서 “민원 역시 상대적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서정주가 친일파인데 친일행위를 한 사람을 기릴 필요가 무엇이냐’라고 말하지만, 다른 쪽에선 ‘시인을 시인으로 평가해야 한다’면서 미당 서정주라는 사람의 업적에 대해 말한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안내판에 미당의 친일행적 부분을 기록하면 열람하는 시민들이 판단하지 않겠냐”라고 밝혔다.
미온적인 관악구… 춘천·부천 등 2019년 서정주 시비 철거
▲ 서정주의 집에 전시된 미당 서정주 생전 모습. 전시물을 재촬영했다. ⓒ 김종훈
관악구는 서정주의 기념물 철거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서정주의 시비 등을 보유했던 일부 지자체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19년 5월 춘천시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춘천문학공원 내 자리한 서정주, 최남선 등의 시비를 철거해 땅에 묻었다. 춘천시는 시비가 있던 자리에 “이곳, 춘천문학공원에 불손하게 들어앉은 일제강점기 친일 문인들의 흔적을 이곳에 묻는다. 슬픈 역사도 버릴 수 없는 우리의 것이나 민족의 아픔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까닭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을 세웠다.
사례는 또 있다. 2019년 8월 부천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관내 서정주의 시비 3개를 포함해 주요한, 노천명 등 국가공인 친일파로 등재된 인물들의 시비를 철거했다. 당시 부천시는 “시민들로부터 친일파의 시비를 철거해 달라는 민원이 꾸준히 제기됐다”면서 “문화예술분야에서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친일파 시비를 철거했다”라고 밝혔다. 철거된 빈자리에는 정지용의 시 ‘향수’를 담은 시비를 설치했다.
2019년 11월, 충남 태안군 주민들은 서정주의 시비를 세우려던 군의 건립계획을 집단적으로 반대해 취소시켰다. 당시 건립추진위원회는 서정주가 1956년 학암포를 찾아 ‘학’이란 시를 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군비 2000만 원을 들여 학암포해수욕장 인근에 높이 2m, 폭 1m 크기의 서정주 시비 건립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태안참여연대 등 지역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돼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진행했고, 그 결과 시비 건립은 전면적으로 취소됐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은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서정주 기념물 철거는 결국 단체장의 의지 문제”라면서 “이미 서정주의 시비를 철거한 지자체가 존재한다, 당장의 철거 등이 제한된다면 객관적인 사실을 담은 안내판이라도 바로 설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관악구에 자리한 서정주의 집을 비롯해 사당역과 관악산에 세워진 시비에는 그의 친일행적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광복절 축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작곡가 안익태를 꼬집어 “민족 반역자”라고 지칭하면서 이들에 관한 친일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날 축사에서 최근 광복회가 독일 정부로부터 안익태의 친일ㆍ친(親)나치 관련 자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회를 지휘하는 영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며 작심 비판했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이어 친나치 행적은 최근 들어 새롭게 제기된 논란이다. 지난해 책 ‘안익태 케이스’를 낸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자료를 바탕으로 안익태의 친나치 행적을 고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안익태는 1942년 9월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지휘했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를 상징하는 식민지 유형의 하나다. 이때 연주된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가 바로 애국가다.
이 교수는 이어 일본 정보기관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가 안익태의 실질적 후견인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1943년 안익태가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독일로부터 발부받은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 ‘정치적으로 아무 하자 없음’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음에 주목했다. 나치가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인증한 셈으로, 안익태의 유럽 활동이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와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고 홍보하는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안익태는 일왕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드는 등 친일 이력이 드라나면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다.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안익태 선생의 친일은 근거 없는 억지”라며 “만주환상곡 작곡과 지휘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일제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제국 음악원 회원증도 독일에서 지휘자 겸 작곡가로 일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15일 광복절 기념축사 발언을 두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김원웅 회장은 축사에서 “이승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폭력적으로 해체시키고 친일파와 결탁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독부 이승만 평전’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17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반민특위를 습격해서 없애버린 것”이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된 국가치고 반민족 행위자를 처리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김 회장의 발언을 일부 지지했다.
김 전 관장은 그러면서 “진보 보수, 좌파 우파 논리를 떠나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3ㆍ1운동과 4ㆍ19 민주정신을 잇는다고 명시돼 있는데, 이를 국론 분열이라고 몰고 가는 일부 정치권의 인식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며 김 회장의 발언을 비판한 일부 야당 인사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러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친일파와 ‘결탁했다’는 김 회장의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이 일부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사실이나 친일파와 결탁해 반민특위를 무력화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친일 청산을 잘 했다는 주장도 있다. 보수 역사학자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두루 기용해야 했기 때문에 행정 분야에 친일파가 포함되는 것은 불가피했다”며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상황에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려 했고, 불가피하게 죄악이 심한 사람들만 처벌하는 온건한 정책을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의 발언을 두고 정치권과 학계에서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중권 전 교수는 16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백선엽처럼 친일을 했으나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 김원봉처럼 독립운동을 했으나 북한정권 출범에 도움을 준 이들처럼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명과 암의 이중 규정을 받는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역사와 보훈의 문제를 소모적인 이념논쟁으로 만드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논의는 역사학계에 맡겨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 출신에 광주학살의 원흉들에게 부역한 전력이 있는 분이 어떻게 ‘광복회장’을 할 수가 있나”라며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친일파들은 물론이고 군부독재, 학살정권의 부역자들도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고 김 회장을 공격하기도 했다.
지난 7월 23일은 분단 현실을 녹여낸 명작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선생(1936~2018년)의 2주기였다. 기일을 며칠 앞둔 7월 8일 선생의 아들 음악 칼럼니스트 최윤구 씨 부부와 연극배우 박정자 씨가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했다. 2주기를 맞아 최인훈의 문학세계를 널리 알리고자 단편 「달과 소년병」을 오디오북으로 만들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독립전쟁 100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독립군을 소재로 한 이번 오디오북 제작은 더욱 의미가 깊다. 박정자 씨는 최인훈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 주연을 맡은 이래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으며 재능기부로 흔쾌히 낭독을 맡아 주었다. 녹음은 민족문제연구소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한편 문학과지성사는 7월 23일 「달과 소년병」(1983)을 표제작으로, 등단작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1959)와 「구운몽」(1962) 등 9편의 중단편을 엮어 ‘문지작가선’ 1권으로 펴냈다.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문학과지성사가 새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을 펴냈다.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저자 : 최인훈 ㅣ분야 : 문학 ㅣ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l 출간일 : 2019-07-23 l 판형 / 정가 : 130*207mm (597p) / 17,000원
가장 먼저 소설가 최인훈(1936~2018)이 독자를 만난다. 1주기(7월23일)를 맞아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이 나왔다.
등단작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1959)와 ‘최인훈 전집’에 미수록됐던 표제작 ‘달과 소년병'(1983),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온 중편 ‘구운몽'(1962), 작가 개인 이야기가 담긴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작 제1장'(1970) 등 9편이 실렸다.
“오후 망보기를 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진지를 다 끝내고 쉬고 있다. 야산에 자란 잡목 그늘에 누워도 있고, 천막 안에도 있고, 서너 명이 학교 쪽으로 걸어간다. 소년은 긴장한다. 왜병들이 울타리도 없는 운동장에 들어가서 선다. 구경을 한다. 그러더니 줄다리기에 두 편으로 갈라서 끼어들어 어울린다. 흰 이가 드러나는 왜병들과 아이들 영차영차 소리, 사람들이 와르르 흔들린다. 망원경을 잡은 손이 제 손 같지 않게 흔들리는 것이다.”(‘달과 소년병’ 중)
“여자들한테 그런 멋대로의 풀이를 붙인다는 건 남자들한테도 안 좋아요. 이쪽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변히 굴겠어요. 제가 말씀해드리지요. 여자는 남자와 꼭 같이 사람입니다.”(‘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중) 597쪽, 1만7000원
김성수, 서정주, 조택원, 김기수, 함화진, 주요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및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동상 및 시비, 기념관 등이 공유지에 수십 년째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광복 75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현장에서 이를 직접 확인했다. [편집자말]
▲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 위치한 주요한 시비와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 친일과 항일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기념물이 같은 공간에 세워져 있다. ⓒ 김종훈
“한글을 지킨 분들을 위해 세워진 기념탑이야.”
5일 오후 초등학교 자녀들과 함께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옆 세종로공원을 찾은 김은혜(43)씨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희생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는 기념탑 앞쪽에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투쟁기’라고 명명된 안내문을 자세히 살핀 뒤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한글을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면서 “제대로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라고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한글연구를 한 학자들이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는 이유로 탄압받고 투옥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에서 불과 20m 떨어진 장소에는 전혀 다른 기념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국가공인 친일파 주요한의 시 <빗소리>가 새겨진 시비다.
주요한은 일제강점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전향했고, 이후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 전선에 보낼 징병과 학병을 뽑기 위한 연설과 강연도 매진했다. 무엇보다 조선문인협회 간사이자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활동하며 최전선에서 일본어 보급운동에 앞장섰다.
주요한의 시비 뒤쪽에는 그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한 그는 언론사 사장과 국회의원,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70년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됐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안중근기념사업회 등에서도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1979년 11월 27일 사망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비 어디에도 친일행적에 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는 세종로공원 주요한의 시비는 1993년 세워졌다.
주요한 뿐 아니다… 국립극장 입구 조택원 춤비
▲ 서울 중구 국립극장 앞에는 국가공인 친일파 조택원의 춤비가 세워져 있다. ⓒ 김종훈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주요한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발표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주요한 시비에는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주요한의 시비 뿐 아니다. 서울시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친일파들의 기념물이 ‘과거 이력’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자유롭게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기념물이 서울 중구 국립극장 입구에 세워진 국가공인 친일파 조택원의 춤비다. 일제강점기 지원병과 학병 출진 축하 모임에서 공연을 한 조택원은 내선일체 주제의 무용 <부여회상곡>을 연출한 인물이다. 이런 이력 때문에 2009년 정부는 조택원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발표했다.
그러나 조택원의 춤비 하단 석판에는 “우리 근대무용의 선각자이며 불멸의 춤작품을 남기신 무용가”라는 내용의 음각만 새겨졌을 뿐 그 어디에도 그의 친일과 관련된 행적이 기록돼 있지 않다.
광복 후 조택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금족령이 내려지자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을 돌며 공연을 이어갔다. 이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물러난 이후 한국에 돌아와 한국무용협회 이사장과 고문, 한국민속무용단과 한국민속예술단 단장을 지냈다. 1974년 10월 무용가 최초로 금관훈장을 받았다. 국립극장 앞 춤비는 1996년 3월에 세워졌다.
국립국악원의 김기진·함화진 동상의 경우… 그나마 친일 안내문
▲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는 친일파 김기수와 함화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 이들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안내문도 마련돼 있다. ⓒ 김종훈▲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는 친일파 김기수와 함화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 이들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안내문도 마련돼 있다. ⓒ 김종훈
주요한, 조택원과 달리 서울시에 존재하는 친일파 기념물 중에는 친일 행적을 함께 표기한 사례도 있다.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 설치된 김기수, 함화진 동상이다. 1994년과 1998년에 각각 세워진 두 동상은 건립될 당시엔 친일행적이 기재되지 않았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두 사람이 모두 이름을 올린 후에야 긴 논의 끝에 친일행적을 포함하는 안내문이 설치됐다.
과정이 매끄럽진 않았다. 2015년 5월 국립국악원이 국악원과 우면산과의 경계지점에 원로 국악인을 기리는 ‘동상공원’을 새롭게 조성할 때 친일행적으로 논란이 된 김기수, 함화진의 동상을 포함시켰다. 두 사람의 동상이 포함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논란이 일었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까지 나서서 관련 문제를 논의했다.
결국 국립국악원은 자체적으로 동상심의위원회를 열어 이 사안을 논의했다. 2015년 6월 국립국악원은 김기수 함화진 동상 옆에 두 사람의 구체적인 친일행적을 적시한 안내문을 설치했다.
서울시 “친일파 기념물 처리기준 필요”… 김원웅 광복회장 “법안 마련할 것”
서울시는 6일 <오마이뉴스>에 “(친일파 기념물 철거 등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면서 “기준을 마련할 확실한 법안이 필요하다, 법안에 맞춰 제도적으로 이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친일파 동상을 포함하는 기념물에 관한 법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김원웅 광복회장은 6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결국 관련법이 부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이어지는 것 아니겠냐”면서 “2020년 광복절 75주년을 맞아 광복회가 관련 사안을 정리해 공식적으로 서울시에 문제제기를 하겠다, 21대 국회에서 친일찬양금지법을 포함해 관련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 중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는 동상 및 시비는 총 4개다. 김성수, 주요한 이외에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에 마련된 김동인 문학비,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에 마련된 노천명의 ‘사슴’ 시비 등이 있다. 전국으로 확대하면 친일파의 동상과 시비, 기념관 등 숫자는 더욱 크게 늘어난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2015년에 발간한 ‘국정감사 정책자료’에 따르면 공유지를 포함해 학교 및 군부대, 공원 등 공공시설에 설치된 국가공인 친일파 관련 기념물은 전국 22개 자치구에 34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 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이 집권하여 국군을 창설하던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무려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75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열린 기념식에 광복회원들이 사용하도록 보낸 기념사 중 일부다. 기념사에선 “이들 민족 반역자들은 국무총리, 국회의장, 장관, 국회의원, 국영 기업체 사장, 해외 공관 대사 등 국가 요직을 맡아 한평생 떵떵거리고 살았다”면서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나라,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명시됐다. 김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정부 주관 행사에서는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같은날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광복회 회원이 대독한 광복회장 기념사를 들은 원희룡 제주지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면서 “김일성 공산군대가 대한민국을 공산화 시키려고 왔을 때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던 군인과 국민들이 있다. 그분들 중에는 일본 군대에 복무했던 분들도 있다. 공과 과를 겸허하게 봐야한다”라고 반박했다.
재향군인회도 18일 성명을 내고 “광복회장이 지나치게 편향된 역사관을 가졌다”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애국자에게 친일 프레임을 씌워 토착 왜구로 몰아 국론을 쪼개는 데 앞장서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김원웅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 중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라는 발언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확실히 맞고, 반은 친일파 범주에 따라 논의가 좀더 필요하다. (기사 하단 도표 참고)
1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부터 10대 육군참모총장 백선엽까지는 명징하게 친일행보를 보인 인물들이다. 국가에서도 공인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들이 다수다. 그러나 11대 송요찬부터 21대 이세호까지는 ‘친일파’로 규정한 공인기록이 없다. 다만 다수가 일본군 및 만주군 하급 간부로 활약하거나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인물들이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이 국군에 뿌린 ‘친일의 씨앗’
▲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의 묘에서 내려다 본 임시정부 요인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 김종훈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은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무려 30여 년을 복무한 인사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조선 출신임에도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우리 군의 중추가 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인사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요직을 차지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미군정과 긴밀히 접촉한 이응준은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으로 위촉됐다. 이후 김백일, 백선엽, 채병덕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미군정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했다.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이들은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국군의 핵심이 된다. 이응준은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 때문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위치한 장군2묘역에 묻힌 이응준의 묘에는 ‘군의 아버지’라는 글이 새겨졌다.
하지만 이응준은 일제강점기 내내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41년 일본군 육군 대좌로 승진한 이응준은 후방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며 여러 차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응준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공식보고서에 올렸다. 같은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응준의 이름은 등재됐다.
[2~10대] 침략전쟁에 공헌한 국가공인 친일파 참모총장 신태영, 이종찬, 백선엽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이응준 묘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과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이 잠든 묘역. 바로 아래쪽에 애국지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 조성됐다. ⓒ 김종훈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과 6대 이종찬, 7대 및 10대 백선엽 역시 모두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인한 친일파이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인물들이다.
신태영은 아들 신응균과 함께 부자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를 나와 시베리아 간섭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일제 부역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조선청년의 꿈은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야스쿠니신사에 묻혀 신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주인공이 바로 신태영이다. 그는 3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4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묘 역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있다.
6대 참모총장 이종찬은 할아버지 이하영, 아버지 이규원과 함께 3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상하이 방면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중 최초로 최고등급인 금치훈장을 이종찬에게 수여했다. 당시 중일전쟁의 여파로 중국 상하이, 항저우, 난징 등 지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총검을 피해 중국 내륙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해방 후 이종찬 역시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서울현충원 장군3묘역 최상단에 그의 묘가 있다.
지난 7월 10일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 역시 정부에서 공인한 친일파다.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공식보고서에는 백선엽이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했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됐다.
이외에도 2대 참모총장 채병덕과 5대 정일권, 9대 이형근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만주 전선과 후방에서 일군과 만군에 소속돼 직간접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역할을 한 일본군 장교들이었다.
[11~21대]일본군 하급간부 출신 다수… 독립군 토벌 기록은 없어
▲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바로 뒤쪽에는 친일파 김홍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 김종훈
대한민국 11대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 오장(부사관)으로 복무한 인물이다. 일본군으로 복무 당시 그는 전선에 나가는 대신 훈련소에서 조교 등으로 복무하며 조선 출신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 일조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했다. 송요찬은 제주4.3 진압군 지휘관으로 군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2대 최영희, 14대 장도영, 15대 김종오, 16대 민기식, 17대 김용배, 18대 김계원, 19대 서종철 등은 모두 학병 출신으로 1944년~1945년 태평양전쟁 후반부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전선에 나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13대 최경록은 11대 송요찬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자원입대한 인물이다. 하사관후보생을 거쳐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육사 입학을 위해 대기하던 중 부상을 당해 일본군 장교가 되지 못했다. 21대 이세호 역시 1944년 일본 육군항공대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해 일본에서 교육을 받던 중 종전을 맞았다. 이 때문에 전선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20대 육군참모총장 출신 노재현은 일제강점기 후반부 행적이 다소 묘연한 상태다. 일부 언론에서 ‘일본군 경력이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지만, 일본 육사를 거쳐 일본군 소위를 역임했다는 기록 역시 발견되고 있다. 다만 전선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는 상태다.
광복회 관계자는 19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1대부터 21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들은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돼 활약한 인물들”이라면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과 만주군의 존재 목적은 일왕에 충성 맹세를 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맞서서 명백하게 침략전쟁을 수행했던 군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친일파라는 범주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본군과 만주군에 부역한 친일행적에 대해서 만큼은 1대부터 21대까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족벌언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 100년을 맞았습니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독재정권 하의 부역에 대한 단 한마디의 반성도 없이 민족·민주언론으로 자신들을 포장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해방 후 마땅히 청산되어야 했을 부역언론이 미군정기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주류 언론으로 자리잡고 무소불위의 성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때 역사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후과가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죄과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한 조선·동아의 행태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가 ‘민족지’임을 자부하는 두 신문의 죄적을 실증적으로 고발함으로써 그 진면목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1942년 9월 18일 저녁 7시 무렵 나치가 통치하고 있던 독일 베를린. 일본이 세운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성대한 음악회가 열립니다. 여기서 ‘에키타이 안(Ekitai Ahn)’은 본인이 작곡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작사한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혼성 합창단을 위한 교향 환상곡 <만주국(Mandschoukuo)>을 직접 지휘합니다.
‘에키타이 안’은 애국가 작곡가로 알려진 안익태. 일본식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주국>의 합창 부분을 작사한 에하라 고이치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영사관의 참사관이었습니다. 주독 일본 첩보기관의 총책으로 활동한 정황이 담긴 기록도 남아있는데, 안익태는 바로 이 에하라 고이치와 함께 거주하며 <만주국>을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날 음악의 합창 부분은 일본어로 불렸습니다. 가사 일부를 보면 만주국과 일본,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까지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었네. 이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과도 같이,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네, 독일이여, 또한 이탈리아여. 힘을 냅시다.”
만주국 10주년 축하공연 영상 앞부분에 작곡가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소개된 안익태
■ <한국환상곡>과 <만주국>, 안익태와 에키타이 안
유럽에서 활동한 안익태가 처음부터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고 본인 이름을 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1930년대 후반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익태 안(Eak Tai Ahn)’이라는 표기로 남아있습니다. 발음으로 볼 때 일본식 발음표기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익태의 음악 역시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는 다릅니다. 안익태는 우리가 아는 애국가의 곡조를 1935년에 작곡했고, 애국가 선율이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라는 곡을 만들어 1938년 초연합니다. 이 당시 안익태가 인터뷰했거나 직접 기고한 글을 보면 독립, 동포, 민족운동, 애국정신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에 들어서 안익태는 주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등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싸웠던 나라들이 형성한 국제 동맹을 가리키는 말)과 추축국의 점령국들을 순회하며 공연하는데 이 시기에는 <코리아 판타지>를 변형한 <만주국>을 주로 연주했습니다.
<안익태 케이스>라는 책을 쓴 이해영 한신대학교 교수 등 연구자들에 따르면, 안익태는 애국가와 일부 곡조를 공유하는 <코리아 판타지>, 즉 <한국환상곡>을 여러 차례 변형해 공연했는데 최소 7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에는 <만주국>으로 변형된 판본도 있습니다.
즉, 안익태의 작곡 과정에서 애국가와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환상곡>이 특정 시기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만주국>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다시 <한국환상곡>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가사는 한반도, 우리나라에 대한 가사로 바뀌었습니다.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중 안익태가 〈만주국〉을 지휘한 영상. 광복회가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에서 받은 것으로, 전체 7분 40초 영상 가운데 언론에 3분 47초 분량이 제공됐습니다. (영상제공: 광복회)
■ 애국가 논란 재점화
광복회와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은 어제(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가운데 안익태가 <만주국>을 지휘한 부분 7분 20초가량의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독일 정부 협조를 받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원본을 확보한 겁니다.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지휘한 사실이 이번에 처음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2006년에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송병욱이 영상을 발굴해 안익태 친일 연구에 불을 붙였습니다. 영상은 당시 KBS 뉴스에서도 다뤄졌습니다. (<안익태 ‘친일 논란’ 음악회 지휘봉> 2006년 8월 15일 KBS 뉴스광장)
2006년 이후에도 몇몇 연구자에 의해 해당 영상 일부가 공개됐지만, 선명한 화질의 무삭제 원본 전체를 확보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광복회와 국가만들기시민모임 측은 설명했습니다.
안익태는 이미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인물로, 특정 시기 친일 활동을 했다는 데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어제(20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광복회-국가만들기시민모임 공동 기자회견. 안익태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을 공개하고 국가 교체를 주장했습니다.
광복회와 국가만들기시민모임은 “친일·친나치 인물인 ‘에키타이 안’이 작곡한 애국가가 국가의 지위를 누리는 일은 당장 멈춰야 한다”며,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모두 반영한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어떤 분들은 국가를 바꿀 수 있느냐, 안타깝지 않느냐고 하지만 세계 대부분 나라가 시대에 맞게 국가를 교체한다”며, “미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포함해 제가 확인한 바로는 108개 이상 나라가 국가를 바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애국가 옹호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애국가를 처음 작곡할 당시 안익태는 친일로 변절하기 전이고 민족과 애국을 강조했다며, 초기 안익태와 이후의 안익태를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안익태의 친일 문제를 떠나 우리가 이미 오랜 세월 애국가를 국가로 불러온 만큼 애국가에 새로운 역사성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교체는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국가(國歌), 바꿔야 할까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명확히 정한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관습상 국가로 인정해 태극기나 무궁화 등과 함께 나라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설명입니다.
행정안전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한 ‘대한민국 국가상징’ 홍보 책자. 태극기는 근거 법령이 명시돼있는 반면 애국가는 ‘관습상 국가로 인정’이라는 문구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국민의례 절차를 정해놓은 대통령 훈령이나 국회법 시행령 등에 ‘애국가’라는 표현이 포함돼 사실상의 국가로 간접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대통령 훈령 368호 ‘국민의례 규정’ 제4조 국민의례의 절차 및 시행방법을 보면, 국민의례의 정식절차 중 하나로 ‘애국가 제창’이 포함돼 있고 “1절부터 4절까지 모두 제창하거나 1절만 제창하라”고 돼 있습니다. 같은 훈령 6조에서는 애국가를 제창하는 법을 정하고 있는데 “애국가는 선 자세로 힘차게 제창하되, 곡조를 변경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해, 우리가 아는 안익태의 그 곡조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 국가를 법으로 규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간 여러 차례 애국가에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는 법을 만들거나 반대로 애국가가 아닌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국가로 만들자는 시도가 국회 안팎에서 있었지만 모두 무산됐습니다.
지금도 애국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정해 아예 확고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자, 즉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대한민국 국기법’처럼 ‘대한민국 국가법’을 통해 국가로 정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애국가를 바꾸자는 의견, 즉 애국가를 안익태가 작곡했다는 이유로 국가를 바꾸자는 주장 외에도 곡조를 보다 한국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사를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애국가 논쟁’이 국회로 본격 수렴되지는 않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미래통합당은 김원웅 광복회장 개인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 역시 김 회장의 발언은 옹호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광복회가 독일 정부로부터 안익태 관련 자료 수십 권 분량을 더 받기로 했다고 밝히면서 다가오는 가을 ‘애국가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일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태식, 홍난유 비석 방치 논란 친일 인물 알고도 쉬쉬한 문화원…친일잔재 청산에 소극적인 당진시 “제대로 된 전수조사로 독립운동가들이 예우받는 사회 만들어야”
사진 왼쪽부터 1. 당진 남산공원 석궁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 자연보호헌장비 옆에 인태식 씨의 공적비가 세워져있다. 2.당진문화원에서 당진문화예술학교로 올라가는 도로 오른쪽에 홍난유의 선정비를 비롯한 당진에 덕을 쌓은 인물의 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당진신문=지나영 기자] 당진 남산공원에는 당진 출신의 관료·정치인 출신 인태식 씨의 공적비가, 그리고 당진문화원에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당진군수로 재직한 홍난유 씨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된 친일 인물이다.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에 세워진 두 인물의 비석에는 그들의 공만 적혀 있을 뿐, 친일 행적에 대한 설명은 없다. 특히 인태식 씨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되면서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홍난유 씨는 당진시에서 파악조차 못했다. 친일 인물에 대한 전수조사를 지자체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작년 당진문화원에서 동학농민 관련 특강이 있어 방문했다가, 문화원을 둘러보던 중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홍난유 씨의 비석을 발견했다”며 “특강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홍난유 씨가 친일 인물이라고 말했더니, 이미 문화원 관계자는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진시는 홍난유 씨가 친일 인물이라는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며 “친일 잔재 청산에 지자체와 관계자들이 적극적이지 않다”고 꼬집었다.
친일 인물 알고도 쉬쉬한 당진문화원
당진문화원 홈페이지에는 홍난유 씨의 이력 및 활동사항의 마지막에 “전남광주군수를 역임하면서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수록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당진문화원 관계자는 “2년 전에 기존 남산 스포츠센터 인근에 있던 홍난유 씨의 송정비가 당진문화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안내 표지판을 만들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며 “수집한 자료에서 홍난유 씨의 친일인명수록을 확인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진문화원은 홍난유 씨가 친일 인물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송정비에 대한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당진시민단체는 물론 당진시, 심지어 당진문화원장조차도 본지가 취재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
당진문화원 유장식 원장은 “오래전부터 당진에서 덕을 쌓았다는 분들에 대한 비석을 해 놓은 것으로 홍난유 씨의 비석을 두고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사회를 통해 처리 방안을 논의 했을 것”이라며 “문화원은 당진시로부터 예산을 받아 운영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비석을 문화원이 자체적으로 치우거나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추후 문화원 이사회가 열리고, 회의에서 비석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모아지면 시에 처리방안을 두고 논의를 요청하겠다”고 전했다.
당진시 문화관광과 정영환 과장은 “한 사람의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결정 내서 비석을 세우기는 어렵다”며 “그런 점에서 홍난유 씨의 비석에 대한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정보 수집을 통해 당진문화원과 논의를 거치는 과정을 거쳐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친일 잔재 청산은 공론화가 우선”
의병 진압과 강제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홍난유 선정비는 광주공원에도 있다. 이에 광주광역시는 전수조사를 통해 지난해 선정비를 뽑아 옮기고 그 앞에 단죄문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광주광역시에서 설치해 놓은 홍난유 단죄문
하지만 당진시는 그동안 친일 인물의 공적비에 대한 처리 및 단죄비 설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 2007년 공론화 됐던 인태식 씨의 공적비 문제와 홍난유 씨에 대해서 정확한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한 시의 추진사업 계획도, 친일 잔재물 청산에 관련한 부서도 따로 없다.
당진시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은 “친일잔재를 대한민국에서 청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친일의 자손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지자체에서 가장 먼저 앞장서서 친일 잔재 청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진에서 친일 인물의 잔재물 청산이 되지 않은 것으로 남산에 있는 인태식 씨의 송정비를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인태식 씨의 송정비는 지난 2007년 당진참여연대가 문제를 제기하고, 단죄비를 설치해야 한다며 공론화가 됐었다.
당시 당진군은 인태식 씨의 송정비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논란이 됐고, 결국 당진참여연대는 단죄비 사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까지 인태식 씨의 친일 행적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단죄비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당시 당진참여연대 부회장을 맡았던 당진시의회 조상연 의원은 “당시 인태식 씨의 공적비 앞에 영세불망비를 세우는 것을 추진했고,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었지만 끝내 할 수 없었다”며 “공적비에는 인태식 씨의 좋은 내용만 적혀 있고 친일 행위에 대한 내용은 전혀 적혀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상연 의원은 “친일 잔재물을 청산하고 단죄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역 내 시민단체에서 먼저 앞장서야 할 것”이라며 “친일 잔재 청산은 시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부담이 가고, 여러 사업을 추진하는 만큼 당장 먼저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당진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친일 인물 공적비 처리 방안 및 친일 잔재물 청산을 위해서는 여론이 우선 모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일반 시민들은 모르는 일제 잔재물이 분명 있는데,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이든 언론에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본지의 취재 과정을 통해 홍난유 씨의 선정비 문제를 알게 됐다는 김학로 소장은 “홍난유 씨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에 대해 나도 알지 못했던 만큼 시민들은 친일 인물 및 잔재물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더 없을 것”이라며 “그동안 친일파가 주류를 이끌어오면서 친일 잔재 청산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지자체에서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당진시는 당장 친일 잔재물 청산에 대한 추진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지역 내 시민단체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며 “제대로 된 전수조사를 거쳐 잔재물을 청산해 독립운동가들이 예우받는 사회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일인명사전
인태식
1930년 조선총독부 재무국 세무과속으로 근무 이후 1938년 경성세무감독국 홍천세무서 속(서장)으로 근무했다. 경성세무감독국 강경세무서 서무과장과 홍천세무서 서장 등으로 재직할 때 중일전쟁과 관련한 특별세 및 임시이득세 등의 징수, 임시조세 조치 사무, 중일전쟁에 종군한 군인·군속에 대한 조세면제와 징수유예 사무, 중일전쟁과 관련한 각종 세금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강화 등 전시 사무를 수행한 공로로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 후 1953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당진에서 출마, 당선됐다.
홍난유
1904년 2월 충청남도관찰부 당진군수에 임명됐던 홍난유 씨는 1905년 11월부터 전라남도관찰부 광주군수를 지냈다. 홍난유 씨의 선정비는 청렴한 덕으로 정치를 잘 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05년 세워졌다. 하지만 광주군수로 재직중이던 1908년 의병 진압을 목적으로 관내 각 면을 순회하면서 연설했고, 1909년 9월 일본군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대토벌작전’을 실시하자 관내 각면을 순회하면서 관민들을 설득했다. 합병 후 1910년 10월 전라남도 광주군수(고등관 6등)에 유임되면서, 재직중이던 1913년 1월 사망했다.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에하라 고이치등 일본인이 실제 애국가 작사자 8대 혐의 기시와 에하라, 상상 그 이상 긴밀한 관계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20일 김원웅 광복회장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를 통해 확보한 안익태 작곡가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지휘 동영상’을 공개했다.
김 회장은 “(애국가는) 저와 부모님도 불렀던 노래지만 저희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면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를 시대에 맞게 교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은 이미 두 번 교체했고 독일은 세 번 교체했다. 오스트리아는 다섯 번, 프랑스는 일곱 번 국가(國歌)를 교체했다”며 “108개 이상 나라가 국가를 지금 시대에 맞게 교체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국가를 교체하지 않은 극소수 나라 중엔 일본이 있다”면서 “(국가를 시대에 맞게) 고치지 않은 것도 일본을 따라가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안익태 작곡가의 친일·친나치 행각과 애국가 표절의혹에 대해 “이미 음악계에는 역사적 상식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친일 반민족 권력이 장악해온 시대를 조문하는 게 우리가 해야할 역사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및 친나치 행적은 기존에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노동은, 송병욱, 이경분, 이해영 선행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제기해왔으며 많은 연구 성과도 있었다. 필자는 선행 연구 업적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안익태의 보스이자 일제 고위 간첩인 에하라 고이치(江原耕一, 1897~1969년, 이하 ‘에하라’로 약칭)를 중심으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7~1987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이하 ‘기시’로 약칭), 박정희(1917~1979년, 창씨개명: 다카기 마사오, 오카모도 미노루, 만주인맥, 멘토:기시), 윤치호(1866~1945년, 창씨개명: 이토지코, 무궁화 도입자, 애국가 작사자, 후원자: 이토히로부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년, 윤치호의 후견인),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 ,1924~1991년, 아베 총리의 부친), 장징후이(张景惠, 1871~1971년, 만주 괴뢰국 총리, 만주국 국가 명의상 작사자) 등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톺아보았다.
[자료=강효백 교수]
에하라 고이치등 일본인이 실제 애국가 작사자(?) 8대 혐의
첫째, 에하라 고이치가 작시한 것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한국환상곡>이 현재 애국가의 모태가 된 <만주환상곡>이다. 안익태가 중국의 멜로디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코치를 받아 편곡하고, 에하라가 지은 가사를 <만주환상곡>의 피날레에 코러스를 삽입했다. 에하라가 지은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둘째, 안익태는 1941년 루마니아 음악연주회에서 에하라를 만나고 일·독 협회가 안익태를 후원하도록 주선했다. 에하라는 안익태의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였고 안익태는 1941~1944년 4월까지 에하라의 베를린 공사참사관 관저(Gustav-Freytag-Straße 15 in Berlin-Grunewald)에서 기거하며 숙식을 같이했다. 시문에 조예가 깊은 에하라가 작사 또는 개사하면 안익태는 <에텐라쿠(月天樂)>와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지휘했다. 안익태는 만주국환상곡을 매국의 도구로 활용하다가 시대가 바뀌니까, 그것을 다시 애국의 이름으로 재활용해 한국환상곡(Sinfonie Fantastique Korea)으로 바꾸었는데 여기에 애국가 선율이 들어있다. 1948년도 이승만 정부가 탄생하면서 이를 애국가로 지정했다.
셋째, 애국가 가사가 아무리 종일매국노라도 일본 본토인이 아니라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네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의 철갑 두른 소나무(鎧卦松요로이가께마쓰)는 한국의 정이품송같은 일본의 특정 소나무다. 일본의 핵심인사만이 알 수 있다. ② 바다와 물이 산보다 먼저 나온다. 이건 거의 해양국가 일본인의 무의식 본능 차원이다. ③ 작사자가 아무리 종일매국노라해도 자기 나라를 ‘해’ 아닌 ‘달’로 비유할 수 없다고 본다. ④ 공활? 구한말 이전과 이후에도 쓰지 않았던 한국인 최고 지식인도 잘 알 수 없는 일본식 난해어이다.
넷째, 만주국 국가 가사 작사자는 명의상 중국인 총리가, 실제 작사자는 일본인이다. 또한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만주국 가사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은 가사가 한 사람이 쓴 듯 매우 흡사하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다섯째, 에하라는 일본 기독교협회 발간 <찬미가> 1931년 1954년 가사 방역자(번역을 도와준 자)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도 1907년 <찬미가> 가사 방역자로서 제14장 애국가 가사를 방역했다 에하라가 윤치호의 찬미가 속의 가사를 한국의 애국가로 날조 작업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섯째, 1942년 3월 윤치호는 만주 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창춘)을 방문해 제2차 만주국가 명의상 작사자 장징후이 총리와 면담했다. 만주와 조선이 하나가 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서적을 교환했다. 장징후이가 1937년 서울 방문시 윤치호를 만난 적 있다.
일곱째, 1942년 9월 5일 장징후이 명의, 일본인 작사, 야마타 고사쿠(안익태의 지기이자 경쟁자) 작곡인 대만주국 국가를 발표했다. 13일 후 1942년 9월 18일 안익태 작곡 에헤라 고이치 작사 한국환상곡 (만주환상곡 피날레)이 베를린에서 연주됐다.
끝으로 여덟째, 에하라 고이치는 일제강점기 만주인맥의 핵심인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원한 멘토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의 외조부) 총리의 초·중·고등학교 대학 동문이자 최측근 인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 일본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의 고등학교와 대학 대선배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애국가를 계속 유지하고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으로 놔둔 속사정은 이런 끈끈한 관계가 아닐까 추정된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기시와 에하라, 상상 그 이상 긴밀한 관계
필자가 추적해본 바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와 안익태의 후견인 겸 보스인 에하라 고이치의 관계는 상상 그 이상의 긴밀한 관계다. 다음 열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기시와 에하라는 같은 해 같은 달 이틀 사이로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다. 노부스케는 1896년 11월 13일 야마구치(山口)현에서 태어났고 바로 이틀 후인 15일 에하라는 오카야마(岡山)현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나 오카야마나 둘 다 혼슈 서부 쥬코쿠(中國) 지방이다.둘째, 기시와 에하라는 오카야마 초·중학교 동창이다. 기시는 당시 쥬코쿠 지역 최고의 교육도시 오카야마시 우치야마시타(内山下) 소학교와 오카야마 중학교를 진학했다. 기시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던 숙부 오카야마 전문학교 교수가 폐렴으로 죽자 3학년 1학기때 야마구치 중학교로 전학했다. 후일 도쿄의 구제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왼쪽) 안익태와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에하라도 기시와 같은 오카야마시 우치야마시타 소학교와 오카야마 중학교를 나와 당시 일본최고 명문고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오카야마 6고는 국수주의 경향의 교풍 아래 정·재계와 법조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와 미야자와 유타카(宮澤裕, 중의원 의원 전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의 아들) 역시 오카야마 6고 출신이다. 기시의 숙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둘은 고등학교까지도 동문이었을 수 있다.
(앞줄 왼쪽 첫째부터) 731부대장 시로 이시이, 그의 직속상관 만주 국무원 총무차장 기시 노부스케, 에하라 고이치 하얼빈 특별시 부시장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셋째, 둘 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전공 3년 선후배 사이다. 기시는 1917학번이고 에하라는 1920학번이다. 둘 다 대입시험을 독일의 필기시험만으로 손쉽게 통과했으며 도쿄대 법대에서 독일 법학을 전공했다. 둘 다 독일어에 능통하고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에 매료됐다. 둘 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천황주권론을 주장하는 우에스기 신기치(上杉愼吉)의 학설을 추종했다
넷째, 둘 다 도쿄법대 졸업 후 정부 관료의 길을 걸었다. 기시는 묘하게도 당시 엘리트들이 간다는 외무성이나 대장성을 가지 않고 2류 부서로 취급받던 농상무성에 들어갔다. 에하라 역시 주코쿠 지역 세관에서 일했다고 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으나, 구체적 근무지역과 기간은 알 수 없다. 1937년 창설된 내각정보국(CIRO)의 전신인 비밀 정보기관에서 중견 공작관 에이전트 핸들러(Agent Handler)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악명 높은 만주국 하얼빈 교외에 근거한 생체실험 731부대의 양대 수뇌다. 아사히신문 1937년 6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기구개혁을 수반한 만주국 내각 개조를 단행해 만주국 양대 요직인 산업부 차장에 기시 노부스케를, 하얼빈 특별시 부시장에 에하라 고이치를 임명했다.
여섯째, 둘 다 만주가 출세 근거지였다. 기시는 1936년 7월부터 만주괴뢰국에서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39년 3월 총무청 차장으로 영전해 만주국 「산업 개발5개년 계획」을 입안, 만주경영의 핵심 실권자가 됐다. 1941년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면서 귀국해 도조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취임하고 1942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당선돼 국회로도 진출했다.
에하라는 주 독일 만주 참사관으로 발령받아 1938년 10월 2일 고베를 출항해 독일 함부르크로 떠난다. 그리고 나찌 독일이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를 점령하자 만주국 공사참사관을 지냈다.
만주국의 특별시 하얼빈의 최고 실세 부시장은 차관급으로 그가 명의상 맡은 주 독일 만주 공사참사관은 외관상 강등이다. 사실 그는 유럽과 만주를 종횡망라하는 거물 에이전트 핸들러로서 안익태 등 수많은 에이전트를 육성, 문화 예술 사상 부분의 침투를 총괄 관장했다.
에하라는 “베를린에서 가장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약 300명의 요원”을 관리했다. 독일인과 한국인, 심지어 일부 학자와 예술가들까지 다양한 국적의 에이전트였다. 유럽 여러 나라 수도를 종횡무진 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성장급(차관급) 최고위 관료 출신 에이전트 핸들러였다.
일곱째, 둘 다 패전 이후 구속됐다가 석방됐다. 기시는 패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로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도조히테기 등 A급 전범 7명 교수형 집행 다음날 1948년 12월 24일 석방됐다. 에하라는 1945년 4월 5일, 히틀러 자살에 이은 독일의 항복 선언으로 소련군에 의해 신병이 인수되어 만주로 귀임했으나 소련군 전범 수용소에서 1년여 수형 생활후 1946년 12월 25일에 귀국 조치된다.
여덟째, 석방후 승승장구했다. 기시는 석방 후 총리가 됐으며, 자기 동생도 총리, 외손자 아베도 총리, 박정희 등 한국의 종일매국자를 직·간접적으로 조정했다. 에하라는 일본 우익변호사협회 청우회 간부로 거액의 수임료를 챙기며 노후를 즐겼다.
아홉째, 둘 다 한국의 애국가와 나라 꽃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7년 만주국 공업부 차관, 1939년 3월 총무부 장관으로 영전과 승진을 거듭하는 중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총설계했다. 만주은행에서 만주은행권을 발행했지만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만주국의 유통화폐 대부분은 무궁화 문양이 크고 뚜렷하게 인쇄된 조선은행권 발행 지폐들이 차지했다. 이 무궁화 문양 조선은행권이 무궁화 군락지 야마구치 출신 기시의 핵심 동력원이었다. 재임 중 기시는 도쿄 근교에 일본 최대의 식물원 진다이(神代) 식물공원과 그 공원내 별도로 대규모 무궁화 화원을 조성해 1961년 10월 개장했다
에하라는 기독교 신자로서 애국가가 수록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1908년)에 영향을 끼친 일본기독교연합 『찬미가』(1903)년 판 증보 개정판 『찬미가』(1953년판)를 방역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급 전범, 731부대장, 난징대학살 시체 처리반장)를 총애하여 상공부 요직 과장에 발탁하였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 총리다.
열째, 기시와 에하라는 한국의 국익으로 볼 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들이다. 이 둘과 애국가, 무궁화에 관련한 사건은 지나간 역사 문제가 전혀 아니고 현재진행형 국가위신과 국가기강, 헌정질서와 직결된 문제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참고문헌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삼인, 2019.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2)」, 민족문제연구소, 2009. Hoffmann, Frank, 『Berlin Koreans and Pictured Koreans』(2015) (PDF). Koreans and Central Europeans: Informal Contacts up to 1950, vol. 1. Vienna: Praes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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