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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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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익명 (미확인) | 월, 2018/01/29- 16:01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2018년>

2017년은 북의 핵무력의 완성과 트럼프 정권의 온갖 난폭한 만행으로 특징지어지는 한 해 였으며, 한국사회에서는 친미보수세력이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 격변의 한 해였다.

중장거리 탄도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발사와 핵시험으로 완성된 북의 핵무장력은 화성 12, 14 그리고 15형의 완성으로 미국이 핵타격 범위 내에 들어왔음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이에 맞서 트럼프는 분노와 화염이라는 극단적인 수사를 동원하며 전쟁으로 위협하기도 하고 중국을 겁박해서 북에 대한 극단적인 제재와 압박 정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무능하고 부패한 박근혜 정권과 친미보수세력이 수백만의 촛불항쟁으로 붕괴되면서 개혁정권이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 격동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이처럼 격동적이며 발빠르게 전개된 정국의 변화는 북미대결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으며 이제 2018년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에서 정국이 펼쳐지려 하고 있다.

1. 미국은 북미대결에서 이제 완전한 피동으로 몰렸으며 세계 정세, 경제 현황에서도 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17년 6월에 이미 미국의 정보기관은 북이 핵탄두의 소형화 기술, 미국 전역을 범위로 하는 탄도미사일 기술, 탄도재진입 기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최근에 북의 핵기술 완성은 앞으로 2~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여론을 내돌리더니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북의 핵기술에 대해서 엄밀한 평가가 필요하며 최종적인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애매한 말을 해대고 있다.
작년에 이루어진 북의 각종 미사일 시험은 사실 핵무력의 완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의 영향력을 축소하거나 자신들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여론을 피하기 위해서 (혹자는 트럼프의 전쟁의지를 제어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도 한다.) 온갖 거짓여론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북의 핵무력은 완성되었으며 미국이 본토의 핵참화를 피할 수 있는 대북군사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 정세의 본질이다.

여기에 맞서는 미국은 피동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며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낙인찍힌 트럼프의 행동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북의 핵무력 완성에 맞서 자기는 더 크고 작동하는 단추를 가지고 있다는 유아적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전개되자 처음에는 비핵화 없는 대화는 필요없다느니 하다가 이제는 지켜보자고 하며 말 그대로 갈팡질팡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국회의원이나 정신과 전문의들이 트럼프의 정신을 진단해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트럼프 때문에 미국민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북과 핵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니 아마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안보위기 상황이 아니겠는가 한다. 하와이에서 있었던 실전 미사일 대피에 대한 경보발령의 오작동에 의한 일대 대혼란과 공포는 그 일단에 불과하다.

미국 경제의 성장 동력도 갈수록 꺼져가고 있다. 세일 가스, 4차 산업 혁명, 투기광풍을 일일으키고 있는 가상전자화폐들이 지금 미국 실물경제의 취약한 나상을 가리고 있지만 오랜 경험을 가진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의 실업률과 산업생산 가동률, 화폐 유통률 등이 정상범위에서 벗어나 조만간 경제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가상전자화폐와 같이 정부 보증도 없는 화폐에 많은 자본들이 몰리고 있다는 것은 정부에 대한 경제적 신뢰가 밑바닥을 치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는 부분이다.

미국은 그 세계적 위상에 있어서도 결정적 분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17년 북의 핵무장력 완성 앞에 미국은 온갖 험악한 발언을 일삼고 군사적 압박을 최고조로, 광란적으로 가했지만 어떤 것도 북의 핵무장 완성을 막지 못하였다. 이로써 전 세계 앞에 미국이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북의 괌포위사격 선언이 이제는 미본토 포위타격 선언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중국을 동원한 강력한 제재만을 외치는 미국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유럽에서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의 정부들(영국도 국민들은 트럼프를 극렬 반대, 혐오하고 있음이 여러 계기들에 드러남)이 미국의 일방적 독주에 반대하거나 경계하고 있으며 중동 지역에서 미국은 결정적 패퇴 국면에 처해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간과 이라크전을 일으키고 중동의 리비아를 붕괴시켰으며 시리아를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나아가 미국은 이스라엘이라는 든든한 동맹국가와 석유거래를 기반으로 형성된 사우디 왕족과의 유대에 기초해서 중동의 반미국가들을 거세하고 친미 친이스라엘 연합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라크에는 친이란 정권이 들어서고 시리아에서는 서방과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의 연합 작전에도 아사드 정권은 건재하고 오히려 이란과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점차 반군을 제압해 가고 있다. 이는 시리아, 이란-러시아 연합을 태동시키고 있으며 예멘 전쟁과 저유가로 심각한 재정적자를 맞이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위기의식을 키우고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사우디 왕가의 난(현 국방장관이 나머지 사우디 왕자들을 위협해서 재산을 갈취한 사건으로 사우디는 이들 왕가의 재산이 1500조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도 이런 심각한 정치, 재정위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지난해는 또한 미국이 무시해 오고 업신여겨 온 러시아가 북미대결의 중재자로 나서면서 중국을 통한 북한 압박이라는 미국의 전통적인 대북정책에 큰 파열구가 생겼다. 최근 러시아는 크림공화국 병합과 시리아에 대한 군사적 지원, 북미핵대결의 중재자 역할로 미국의 패권에 파열구를 내는 하나의 세력이 되고 있으며, 최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신형 전차로 무장한 강력한 국방력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 자체를 급속도로 허물고 있다.

2. 북한은 이제 핵보유국으로 그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동북아 정세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가련한  처지에 반해서 북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핵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7년에는 연속된 탄도미사일과 수소탄등 신형 무기 시험 및 완성으로 인하여 북한은 이제 동북아 지역에서 군사강국, 실질적인 핵무력을 확보한 국가로 그 세계적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특히 작년 북한의 국무위원장 성명 이후 전 세계에 트럼프의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몰골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세계 각국에서 북한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대북 적대시 정책을 펴왔던 온갖 황색언론들이 북의 핵능력이 문제가 있네 어떻네 하는 험담 자체를 일순간 늘어놓지 못하게 되었다.

자강자력을 기치로 내달려 온 북한은 최근 온 사회가 공사현장이고 도시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북한의 도시 건설은 단조롭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도시와 거리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과거와 다르게 교통량이 늘어나 교통체증이라는 것을 느꼈고 수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핵무력을 증강하는 것은 사회적 자원을 비생상적인 부문으로 집중하는 것이기에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북한은 핵무력과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국가 노선으로 채택하였고 국무위원장이 직접 과수원과 가방공장, 신발공장 등을 현지 지도하며 핵무력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경제 건설에 집중할 수 있다, 아직도 멀었다, 더 큰 복을 민중들에게 차려주자고 나서고 있다.

최근에 미대사로 지명된 빅터 차라는 인물은 구 소련은 어느 날 갑자기 붕괴되었다, 북도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국가에 불과하다며 지금 대화니 압박이니 이런 것보다 북한의 붕괴를 대비한 대책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북한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자립자강이며 지도자와 모든 민중이 하나의 대가족이 되어 전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지금 중국을 통한 고립, 압박에 무슨 기대를 거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중국이 북한과의 거래를 끊으면 동북3성의 경제가 심각하게 후퇴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중국도 이제는 북한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변명을 해대고 있는 형국이다.

북한의 경제발전은 철저히 자신들의 원료와 연료, 과학기술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다. 핵무장을 완성할 수준의 경제력, 과학기술력이 북한의 경제 발전을 더 강력히 추동해 나갈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북한 스스로도 강력한 핵 억제력을 통해서 경제발전을 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한다.

또한 북한은 확고한 정세 변화의 축이 되고 있다. 2017년 국무위원장 성명 이후 세계 각국이 북한에 대한 험담을 함부로 해대지 못하였고 지금 평창 올림픽을 두고 형성된 남북화해 기류도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년 중반 이후 심심찮게 러시아가 북미관계를 중재하겠다, 남북관계를 중재하겠다는 발언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이나 한국정부도 관심을 가지고 러시아와 대화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동안 동북아에서 변방 취급을 받았던 러시아가 6자회담을 비롯한 동북아 다자 대화의 전면에 나서 왔던 중국보다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은 다음 아닌 북한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을 통해서 국제 무대에 목소리를 내면 중국이, 러시아를 통해서 목소리를 내면 러시아가 그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정세 형국이다.

동북아 정세의 주도권은 이미 북한에게 와 있고 동북아의 주요 국가들은 이제 북한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갈수록 활로를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3. 한국사회에서 친미보수세력은 대중들로부터 버림받는 사멸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폐세력, 국정농단의 후손들로 낙인찍힌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친미보수세력들은 이제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상위권에서 밀려나는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번 6월 지자체 선거에서 과연 전국정당으로 생존이 가능할지, 영남에서도 지지 기반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 그들의 신세다.

한마디로 지금 국민들은 친미보수세력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를 못하고 있다. 그동안 부패하고 무능한 모습에 진저리를 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국민들의 인식이 친미보수세력들의 활로 자체를 막아 나서고 있다.

자유한국당에서 떨어져 나온 소위 ‘합리적 보수’라고 표방한 바른 정당과 철새 정치인으로 낙인찍힌 안철수가 최근에 합당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합당이 중도 개혁 정당의 복원이라며 색깔론과 무능부패로 낙인찍힌 자유한국당의 색깔에서 탈피한다고 대대적인 정치쇼를 벌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바른정당에서 초등학생이 그린 통일염원 그림에 무슨 국기 시비를 건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며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홍보하는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국민들이 친미보수세력들에게 등을 돌린 이유는 보수가 안보와 경제는 잘한다는 환상이 철저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친미보수세력의 전망을 매우 어둡게 하고 있다. 친재벌 정책의 폐해로 한국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져 가고 있으며 북한 비핵화를 내걸고 대북압박을 강화한다, 대북붕괴전략으로 나간다고 떠들어대지만 기실 친미보수정권이 집권한 기간에 가장 빈번한 핵시험과 탄도미사일 시험이 있었다는 것을 국민들을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친미보수세력들은 자신들이 한국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를 튼튼히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고 결국 몰락의 길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문재인 정권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재인 정권 역시 친미보수적이고 트럼프와 찰떡궁합이라는 어찌보면 한심한 한미동맹 광대짓을 하고 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앞으로 닥쳐올 남북 화해와 협력의 대 파고 앞에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 우려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문재인 정권이 남북 화해와 협력의 흐름에 몸을 싣는다면 활로가 열리겠지만, 이에 맞서 나서며 친미반북적 행각에 경도된다면 결국에 심각한 타격을 면치 못할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은 평화와 민족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문재인 정권은 이에 호응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개선의 기운이 계속 확산되도록 하여야 한다.

*

새해를 맞이한 지금 우리는 세계 지평의 변화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1, 2월의 남북관계의 대진전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 진전 앞에 한미군사훈련이 연기되고 트럼프 역시 감히 맞서지 못하고 있다. 새해부터 시작된 모든 정세 변화의 중심에는 북한이 있으며 그 역할은 더욱더 배가되고 앞으로 세계 정세 전반을 이끌어 갈 것이다. (끝)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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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9-5

▲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한 어린이가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역사에만 초점을 맞춘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에서 문을 열었다. 2011년 2월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출범한 지 약 8년 만의 개관으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기부와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민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등 시민단체와 학계 등이 중심이 돼 민간 차원에서 추진돼 왔다.

송기인 초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이 재직 2년간 받은 급여 2억원을 전액 기탁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건립이 추진됐다. 이후 초등학생들부터 학계, 시민사회 인사들까지 1만여명의 시민이 건립운동에 참여해 16억5000만원의 건립 기금을 조성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자료와 기금을 보내는 등 건립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의 과거사 관련 시민단체들과 학계 인사들 역시 1억원이 넘는 기금을 보냈다.

박물관에 전시된 상당수 자료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등 시민들이 기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선생이 68차례에 걸쳐 6000점이 넘는 자료를 보내 왔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한이 서려있는 유품을 박물관에 보냈다.

박물관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축적한 자료 등을 포함해 총 7만여점의 자료와 5만여권의 도서가 수집됐다. 이 중 엄선한 일부가 박물관에 전시되고 나머지는 보관해 관리한다.

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부터 식민 통치와 수탈, 친일파와 항일 운동,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역사를 담은 총 4부의 전시로 구성됐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을사오적 등 친일파의 훈장과 유품 등 희귀한 자료가 전시됐다. 박물관은 향후 소장자료를 활용해 전시는 물론 교육교재와 역사문화 강좌, 답사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박물관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세워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남산과 용산 일대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본산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독립운동 선열의 묘역이 효창원에 들어섰다”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역사문화벨트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이화 박물관 건립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이날 개관식에서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건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자발적인 역사문화운동을 통해 박물관이 개관했다”며 “단순한 자료 전시에만 집착하지 않고 시민과 청소년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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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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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선명수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경향신문

☞기사원문: 시민과 독립운동가 후손이 만든 ‘아픈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에 개관

※관련기사

☞연합뉴스: ‘아픈 역사 한눈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경술국치일 맞춰 개관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 열어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8월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 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정확히 기록한 사료와 전시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자리잡은 박물관의 규모는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연면적 1500여㎡에 이른다. 박물관에는 기획전시실과 상설전시실, 서고와 수장고, 연구실 등을 갖췄다.

전시실에 보관된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증언하는 사료들 중 일부를 모아본다.

1. 순종황제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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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이 국권을 넘긴다고 밝힌 칙유로 석판 인쇄된 원본이다. “국권을 내가 믿고 의지하는 이웃 나라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조선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하면서 시정방침을 밝힌 포고문에는 “전 한국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그 통치권 양여를 수락한다”고 쓰여 있어 조약 체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김정효 기자

2. 을사오적 권중현이 받은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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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오적 중 1인인 권중현이 한국 병합을 기념해 받은 메달과 증서이다. 권중현은 1907년 1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힌 고종황제의 친서가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직후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한 나인영 오기호 등에게 저격당했으나 목숨은 잃지 않았다. 강제병합 뒤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20년까지 10년간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김정효 기자

3 조선총독부 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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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문관들이 착용하는 칼. 직급과 상관없이 모두 제복에 칼을 착용하도록 하여 조선인들에게 총독부 관리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칼자루와 칼집에 ‘오동 문양’이 한 개씩 새겨진 것으로 보아 ‘주임관’이 사용한 폐검이다. 손잡이는 상어 가죽을 입혔다. 김정효 기자

4. 천인침과 군 위문품 속조끼

0829-11

▲ 천인침은 참전한 사람이 무사하기를 빌며 1미터 정도 길이의 흰 천에 붉은 실로 여성 천 명이 한 땀씩 꿰매어 만든 일종의 부적이다. 천인침은 부적과 같이 배에 두르거나 모자에 꿰메어 다녔다. 아래 속조끼는 부산공립고등여학교 2학년생 야마구치 사치코가 ‘무운장구’라고 쓴 미나미 조선총덕의 글씨와 일종의 호신부로 조선신궁의 도장을 찍은 천을 덧대어 만든 속조끼이다. 조선군사후원연맹이 학생들이 만든 것을 모아 군인에게 위문품으로 보냈다. 김정효 기자

5. 궁성요배

0829-12

▲ 아침마다 ‘천황’ 있는 동쪽을 향해 의무적으로 절(궁성요배)을 해야 했던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이다. 김정효 기자

6.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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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바 부대보병 제6사단 등이 1937년 7월에서 1938년 11월까지의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이다. 히노마루 안에 난징과 한커우를 점령한 날짜가 정확히 적혀 있다. 남경대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정이 눈에 띈다. 김정효 기자

7. 특별지원병 이은휘의 장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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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행기는 청년들이 죽으러 나갈 때 앞세운 깃발이라고 해서 ‘청춘만장’이라고 불렸다. 이 깃발에는 “축 육군병지원자훈련소입소 궁분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초면 제남부락 연맹”이라고 쓰여있다. 이은휘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사실상 강제로 지원병으로 끌려갔다.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아내를 두고 그는 결국 1944년 7월 11일 남태평양 파푸아뉴기니 라바울에서 전사했다. 아래는 당시 일본군 육군 병사가 사용한 군복과 철모 수통 등 군장이다. 김정효 기자

김정효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한겨레

☞기사원문: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수, 2018/08/2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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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13화 1부 – “뉴라이트 역사 쿠데타 7편 – 박정희 신화의 허구 ④”

팟빵 링크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7/09/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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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에 댓글 달기 기능은

일부러 뺀 것입니까?

일부러 뺐을 리는 없겠지요?

연구소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후원하는 회원이나 시민들에게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을테니까요

저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 1만여 회원들만의 연구소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훌쩍 커버렸고 또 정말 어려울 때 3000원 5000원 후원했으며, 혹 금전적 후원을 못해도 마음으로 성원하고 사랑하며 지지한 많은 국민 또는 시민들의 연구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홈페이지에 회원들을 위한 열린게시판에서 게시된 사안과 의견에 대하여 당연히 읽은 이의 의견을 달거나 의문점을 물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홈페이지는 댓글 다는 기능이 없습니다.

아니면 실수로 빠뜨린 것입니까?

자칭? 완벽에 가깝다는 연구소가

어느 연구소보다 능력이 뛰어난

그리고 헌신적인 전문 상근 담당자들이 홈페이지를 새로 개편하면서

실수로 빠뜨렸다고 하면 삼척동자도 웃겠지요?

이 글을 읽는 즉시 빼야만 했던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던지 아니면 기능을 추가해 주세요

그리고

1만여명이 넘는 회원들이 찾아와서

전 국민이 찾아와서

각자 연구소에 대한 칭찬도 격려도 비판도 생각도 말하고 공유하는 연구소가 되고 회원들이 되기를 바란다면 한시바삐 댓글달기 기능을 살려 주세요

수, 2018/04/2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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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없는 일본인 약장수를 몽둥이로 패고 강도살인을 저지르고도 그
것도 모잘라 사체유기까지 하고 나중에는 그 죽이고 돈까지 빼앗은
일본인 약장수를 민비를 죽인 일본군 장교로 둔갑시켜 싸우다가 죽
인걸로 조센진들을 속인 김구를 위인으로써의 지휘를 박탈하고 그
자손들의 독립유공자로써의 특혜를 박탈하라. 
 


미개한 조선을 위대한 대일본의 영도아래 이끌어 미개한 조선을 근
대화로 만드는데 공헌한 이완용 공작각하 반자이!!!!!!!!!!!!!!!!!!!!!!

 
이완용 공작각하의 자손들이야 말로 지금 조선에서 특혜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위대한 대일본의 통치이후 미개한 조선에 반공사상을 강화
하야 남조센인 한국이 북괴 빨갱이거지새끼들처럼 안되게 해주신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세!!!!!!!!!!!!!!!!!!!!!!!!!!!!!!!!!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기용하신 최정예 일본군 헌병 출신이자 일
본 경찰 출신인 김창룡 장군과 노덕술 총경 같은 분들이 친일청산
이나 외치던 빨갱이놈년들을 잡아다가 전기로 지지고 물통에 머리
통 처박고 하셨기에 이 남조센이 북괴 빨갱이거지새끼들처럼 안되
게 된게다. 


그리고 안두희 장군도 만세!!!!!!!!!!!!!!!!!!!!!!!!!!!!!!!!!!!!!!!!!!!!!!!!!!
일, 2019/02/0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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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8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3

옛 연합군포로수용소 터에 들어선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의 현재 모습. 사진의 한가운데 보이는 벽돌형 건물이 원래 포로수용소 막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24

『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자에 전면 보도된 ‘싱가포르 함락’ 관련 내용이다. 이 당시 무조건 항복에 따라 다수의 영국군과 호주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선통사(善通寺, 젠츠우지) 포로수용소를 개설하여 적국 고위장교 위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홍콩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조선, 대만(臺灣, 타이완), 태(泰, 타이), 마래(馬來, 말레이), 비도(比島, 필리핀), 과와(瓜哇,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도 속속 포로수용소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선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타이라(高橋坦, 육군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2년 3월 23일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가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장)에게 보낸 ‘조선군부로수용계획(朝鮮軍俘虜收容計畫)’ 제하의 전문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설치목적이 노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미영인 부로(米英人 俘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 함과 동시에 의연히 조선인 대부분이 내심 갖고 있는 구미숭배관념(歐美崇拜觀念)을 불식하기 위한 사상선전공작의 재료로 제공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25

육군성(陸軍省)에서 1942년 7월 5일부로 조선부로수용소가 경성부 청엽정 3정목(청파동 3가) 100번지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일본제국관보』 1942년 11월 4일자 휘보(彙報)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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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옮겨온 연합군 포로들이 ‘조선부로수용소 본소’인 옛 이와무라제사소 공장터에 당도하는 장면을 담은 보도사진. (『통보』 제126호, 1942년 10월 15일자)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복해환(福海丸, 후쿠카이마루)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설정된 곳은 원래 이와무라제사소(岩村製絲所)의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의 신학교 건물과 같은 곳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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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로수용소 출신 호주군 병사 존 윌킨슨(John D. Wilkinson)이 남긴 『조선포로수용소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a POW in Korea)』 (1945)에 수록된 ‘경성 캠프 약도’. 포로수용소 막사로 사용된 4층짜리 벽돌건물은 이와무라제사소의 공장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지난 2011년 1월까지 잔존하였으나, 학교 건물신축공사 관계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편찬하고 조선공업협회가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라는 자료를 취합하면, 이 자리가 제사공장으로 사용된 것은 1930년에 가베상회(可部商會, 1927년 1월 창립)가 처음인 듯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경영난으로 이내 부도 처리되면서 1932년 이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계열의 동양제사 경성지장(東洋製絲 京城支場)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이와무라제사소(1934년 10월 창립)로 탈바꿈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함북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遊仙炭鑛)의 주인 이와무라 쵸이치(岩村長市)인데, 이러한 탓인지 이 공간은 토목건축청부업과 목재제재업 등을 영위하는 이와무라구미(岩村組)의 경성출장소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이와무라제사소는 1940년 1월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벗어나 원재료(누에고치) 조달이 용이한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이 자리는 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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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던 이와무라제사공장이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풍부하게 확보되는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눈여겨 볼 대목은 포로수용소의 입지여건이다. 보통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다수의 군중과 격리된 오지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도시의 외곽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포로수용소는 이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지 인접지역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연합군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더라”는 식의 관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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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함락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군사령부가 영국군 포로장교들을 강제동원하여 벌인 좌담회 내용이 『매일신보』 1943년 2월 15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황군(일본군)의 기동력이 빠른 데에 놀랐다”거나 “신속 과감한 기습에는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발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이들 연합군포로들이 노역의 대상자로 적극 활용된 사례는 1943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이 이곳에 재배치된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었고, 이 인원은 추후 보충되어 총계 350명으로 증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니는 연합군 포로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29호(1942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현지보고(12) 조선부로수용소」라는 제목의 탐방기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2쪽)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단벌옷의 나그네 차림으로, 풀이 죽어 정신없이 일동(一同)이 조선으로 보내져 온 것은 가을이 아직은 옅은 9월말이었다. 그리고 이곳 경성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의 ‘조선부로수용소’에서 그들의 제2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부 남방(南方) ○○작전에서 살아남아,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포위철환(包圍鐵環) 아래 온갖 계책이 소진되어 죽음의 문턱을 앞두고 항복에 따라 목숨을 유지하게 된 광영의 ― 그 광영은 이미 낡고 또한 공허한 것이지만 ― 영국군인, 호주군인이다. 그로부터 2개월, 그 가을도 급격히 떨어져 저물어 어느 새 그 사이에는 흰 눈이 온 것을 보았다.
(23쪽) 그 면면은 영국병사, 호주병사 외에 프랑스병사, 카나다병사도 각 1명씩이 섞여 있고, 최고령은 카쥬 중좌(中佐)의 58세부터 최연소는 20세까지이다. 점심에는 빵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일본식(日本食)인데, 이미 미소시루(味噌汁, 된장국)와 다꽝(澤庵, 단무지)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소내(所內)는 장교를 제하고 10개 반으로 나뉘어져, 아침에는 7시에 기상하고 취침은 9시, 정연한 규율생활을 한다. 2개월 사이에 아침저녁 점호의 인원보고만큼은 완전히 일본어로 할 수 있게끔 되었다.
(24쪽) 아침 8시반, 그들은 희희낙락하게 대오를 갖춰, 교대로 황국총후(皇國銃後)의 생산작업에 참가하고자 수용소를 출발한다. 경성에는 시내 수개 소에 그들의 작업장이 있다. 각 곳의 작업장에서 그들은 묵묵히 작업에 힘쓰고 있다.
(25쪽)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 반도 동포가 부로황화(俘虜皇化)의 최일선에 있다. 이곳 작업장에는, 이날, 지난 6월에 모집에 응했던 임헌직(林憲直, 충남), 기본진원(杞本鎭月, 충남), 이부창인(李阜昌仁, 전남 제주도)의 세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지도와 감시로서 정전(征戰)의 고귀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제국이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에 수록된 「반도인 청년의 광영, 미영인 포로감시원에 대량 채용」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반도인으로 하여금 명실이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고자 명후년부터 징병제도를 실시한다는 발표에 조선산천이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때 22일에도 다시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남방 각지에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 영국 사람을 감시하는 무거운 임무를 조선 청년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다는 공표가 있어 반도청년의 기쁨을 절정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육군당국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반도청년에가 맡기게 된 것은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조선의 큰 영예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포로를 감시한다는 것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알지 않든 미국과 영국 사람을 지킨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실로 그들로 하여금 반도인의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여 마음으로부터 일본제국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데 있는 만큼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하략)

 

30

『매일신보』 1943년 3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에 온 부로(포로)」 개봉안내 광고문. 안석영(安夕影)이 감독 편집한(조선군사령부 지도, 조선영화 제작 배급) 이 영화는 연합군 포로와 더불어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활약을 담고 있는데, “귀축미영의 초라해진 패잔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는 선전문구만으로도 제작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1

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에 관한 구라시게 조선군 보도부장의 담화를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

 

이와 함께 이 당시 포로감시원의 채용대상으로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국민학교 졸업자로 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두 달 가량의 훈련과 더불어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다만, 이때 함경남북과 평안남북을 포함하는 서북선 지방 거주자는 인력동원대상에서 특별히 배제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하자원개발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많은 사람이 소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는 “특히 특별지원병을 지망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은 자나 장래의 비약을 기하여 구미인(歐米人)을 연구하려는 열의를 가진 청년은 절호한 이 기회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라는 취지로 포로감시원 지원 모집을 부추긴 바 있었다. 이때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로감시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 일대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애꿎게도’ 일본의 패망 이후 포로학대와 가혹행위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거나 징역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금, 2018/09/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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