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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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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익명 (미확인) | 금, 2018/01/26- 17:16

“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시민들에게 계속 다가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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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그 사이 해방을 맞이하고도 반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건국 시점과 친일 등 근대사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말 중국 방문 중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보수 진영에서 “1948년 정부수립이 건국”이라고 문 대통령의 발언에 반발하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 있었던 ‘건국절’ 논란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처럼 역사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12월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 신임 관장이 취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미래와 직결돼 있다”고 말한다.

이 관장은 16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진행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며 “또 다른 하나는 해방된 다음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이어 “임시정부가 만든 임시헌장 서문에 보면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으로 규정했지만, 오랫동안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구상이 실현되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이 관장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그냥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건 기본적인 거고 그 이상이 있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잘 녹여내서 보는 사람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전시 공간을 구성하는 게 중요한 문제”라며 “독립운동이 지금 우리의 삶과도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로 전시를 더 강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질문: 독립기념관은 건립 30년을 넘겼다. 독립된 지도 70년이 훌쩍 넘었는데 젊은이들이 이를 되새기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답변: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됐다고 말한다. 지금은 해방보다 독립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해방이라고 더 많이 표현했다.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다음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 어떤 나라를 만들까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헌법을 개정한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라고 하는데 서문에 보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를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 해방 뒤 이런 구상이 제대로 실현 안 됐다. 일단 일제 식민지배 이후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려고 했는데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38선이 그어져서 민족이 분단됐다. 완전한 자주 독립하고 거리가 멀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상도 오랫동안 실현 못 됐다.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과거 역사,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 독립운동역사는 과거에 흘러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 미래와도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질문: 독립기념관을 과학전시관과 비교한다면 좀 어렵고 오래된 이야기라는 느낌도 든다. 영상과 모바일에 익숙한 젊은 층과 어린이 세대를 위한 시설이나 행사는 어떤 것이 있나?

답변: 몇 해 전부터 독립 기념관에서 어린친구들을 위함 체험학습관을 꾸준히 운영해 왔고 교육프로그램 중에서도 어린이들이 흥미를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왔다.

겨레의 집을 리모델링 중인데 그 중 일부는 ‘펀(Fun)체험관’이라고 해서 특히 어린 관람객이 뛰어 놀면서 독립운동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미려고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놀이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강화하려고 한다.

질문: 눈썰매장이나 캠핑장 등 가족들을 위한 시설이나 시기별 행사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데 소개를 한다면?

답변: 독립기념관이 가진 강점 중 하나는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의 전시관은 역사지만 동시에 독립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좋은 자연이 있다. 점점 가족단위 관람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자연과 접하면서 레크레이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기념관 전시관을 방문하거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역사를 접하는 좋은 기회를 독립기념관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천안 지역사회와도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1월1일에 해맞이 행사를 했는데 7~8천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독립기념관을 생활 속의 일부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시민에게 다가가겠다. 천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지역사회 주민과 계속 호흡을 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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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여름 야영장ⓒ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그간 많은 전시, 행사, 교육을 수행했지만 이를 이용할 시민들에게는 좀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직전에 강북구청 근현대사기념관장도 역임했는데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문제에 대해 구상하고 있다면?

답변: 근현대사기념관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기념관이든 박물관이든 근현대사를 다루는 시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시민들과 결합하는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기념관은 아마 죽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은 시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기념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 욕구가 뭔지 잘 파악하게 된 것이다.

독립기념관은 상대적으로 규모도 크고 대규모 전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는 묘역 같은 현장감 있는 공간이 독립기념관에 없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문: 최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대중서도 발간했는데 어떤 내용의 책자이고, 발간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식민지근대화론이 처음 등장한 거는 벌써 20년 정도 된다. 우리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어서 오랫동안 학계에서 밀려있었는데 10여년 전부터 식민지근대화론이 힘을 얻어서 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논란이 됐다. 지금도 일부 언론에서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논조를 펴기도 하고, 일부인사들이 주장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도 식민지근대화론은 살아있다.

독립기념관의 기본적인 입장은 독립운동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인데 독립운동에 반대되는 식민지 지배 때문에 오늘날이 가능했다고 하는 설명은 독립기념관의 설립취지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고 실제로 쉽게 풀어 쓴 책이 나왔다.

경제사학계에서 오랫동안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앞장섰던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가 집필했다. 허수열 교수가 경제사를 전공하셔서 경제사학회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맹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 국정 역사교과서 같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일제 강점기에 벌어졌던 독립운동 역사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독립기념관의 역할이 있다.

독립 운동가들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이루려는 독립에는 나라의 독립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 젊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 운동이 민주주의 문제와도 연결돼 있고 독립운동이 지금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하고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통일문제 관련해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이후 분단이 됐을 때 분단이 곧 민족상잔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정신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한 측면도 있는데 그런 면을 강조함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중국을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현지시각) 중국 충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관람을 마치고 독립유공자 후손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7.12.16ⓒ제공 : 뉴시스

질문: 내년에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 일부 보수층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경 임시정부 청사 방문이나 건국 100주년이라고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적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답변: 역사적으로 이야기하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의 과정이자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는 임시헌법을 재정한다. 임시헌법 제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규정이다. 그 규정이 현재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출범과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에서 공표한 제헌헌법 전문에 보면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돼 있다. 그리고 ‘이 헌법을 제정함으로서 민주공화국가를 제건한다’고 돼 있다. 재건의 핵심적인 과정은 임시정부 대신 정식 정부를 세우는 거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데도 거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다.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 자료가 보여주는 바대로 해석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앞으로 이런 논란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문: 독립기념관도 건국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 준비할 일도 많을 듯하다. 어떤 점을 중요하게 준비해나갈 것인가?

답변: 문재인 대통령이 한 명의 독립 운동가라도 찾아내서 포상을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2019년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발굴이 중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향후 몇 년 동안 새로운 독립 유공자를 발굴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올해 범정부차원으로 100주년 기념 민간 사업회가 출범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독립기념관도 그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 같다.

또 독립기념관의 주요사업 중 하나가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내는 것인데 중간보고 겸 100주년인 2019년에는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특별편을 내려고 한다. 특별판은 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분들을 대상으로 해서 100명 남짓의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할 것 같다. 그것과 병행해서 독립운동가 1000명 정도로 웹 전시관도 내려고 한다.

독립운동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문제,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사업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질문: 박근혜 정부 당시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정부가 잘못됐다는 점을 사과하고 후속조치를 마련 중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강하게 반발해 난항이 예상된다. 독립기념관장인 동시에 근현대사를 연구한 학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답변: 전제는 ‘일본군 위안부’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일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를 하는 게 마땅한데 그걸 오랫동안 안하고 미뤄오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하면서 더 이상 과거 일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다 끝냈다고 그동안 주장했고, 이게 한일 관계를 정상화 하는 데 장애가 되니까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국민 정서상 잘못된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독립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정 재정 당시 제9조를 보면 사형제 폐지, 공창제 폐지가 명시돼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한다는 데 대해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독립운동단체 강령 가운데서도 남녀평등 조항이 빠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군 위안부도 식민지 공창제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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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시관ⓒ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단절됐던 남북 간 대화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해빙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은 남과 북이 공유하는 민족사이고, 그 완결점인 통일국가 건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교류협력이 진전되면 남북의 독립운동 유적이나 기념이 교류 등이 가능할까?

답변: 여건이 허락한다면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는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역사학계 차원의 교류도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이나 일본에 강제동원과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서로 공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실제로 일정부분 성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경색이 되면서 오랫동안 진행된 이런 사업이 중단됐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해빙된다면 다시 한번 이런 사업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굉장히 아쉬운 것은 내년에 3.1운동 100주년인데 3.1만세 시기는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북한 지역에서도 굉장히 많은 시위가 일어났는데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그래서 100주년을 맞이하기 전에 북한 자료도 입수해서 남북 간 공동사업도 할 수 있을텐데 앞으로 남은 시간에 가능할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질문: 이번에 취임 소식과 함께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라는 점이 다시 한번 알려졌다. 성장과정에서 집안의 내력이 영향을 끼친 점이 있나?

답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중‧고등학교때 무조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들은 독립운동이야기가 많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실 얼마 전까지 주위에 누구 외손자라는 이야기를 안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독립운동은 살기위해서 삼시세끼 밥 먹는 일이나 숨 쉬는 것이나 같은 일이지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예전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던 외할아버지 묘소를 가거나, 외삼촌이 계시는 현충원을 가면 어머니에게 ‘여기에 계신 분들은 이름 석자를 남겨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고, 현충원이라는 좋은 데서 쉬고 계시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당한 분들이 훨씬 많다. 그런 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 이름을 남기신 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높은 뜻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제가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가진 개인적인 꿈은 아주 번듯한 무명 독립투사 기념시설물을 하주 좋은 곳에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동상 같이 길을 가면서도 들릴 수 있는 그런 곳에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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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질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신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립기념관장이 되면서 시민단체 활동이 도움 되는 점과 또 달라지는 점이 있을 것 같다.

답변: 저에게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굉장히 득이 됐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처럼 읊조리는 말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라는 이야기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게 역사라고 이야기 많이 하는데, 그야말로 책에서나 듣는 이야기지 실제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 치열한 문제 인식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부족한 게 많다.

다행스럽게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그게 누가 써놓은 멋있는 문구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 연구가 지향해야 할 바라는 것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친일파 청산도 관여했고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등 현안에 대해서도 관여했다. 시민단체에서 얻은 경험, 시민들의 역사 인식을 독립기념관을 운영하는데 최대한 반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아마 독립기념관 관장이라는 공직을 맡아서 과거와 같이 자유롭게 시민단체 활동을 할 수 없겠지만 시민단체에서 활동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다.

질문: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도 꽤 많이 하셨는데, 독립기념관장으로서 젊은이들에게 꼭 남겨주고 싶은 교훈이나 정신은 무엇인가?

답변: 지금 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 갖는 게 일자리라고 한다.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하니까 ‘살기 팍팍하다’, ‘기성세대에 비해 우리가 많이 힘든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돌이켜보면 내가 젊은 때도 그런 것 같다. 아버지 세대보다 우리세대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고 우리 자식 세대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나라를 잃었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록을 봤더니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 가운데 10~20% 사람들이 해외로 나갔다. 그렇다고 번듯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 가서 노동자로, 만주에 가서 소작농하면서 힘들게 살줄 뻔히 알면서도 해외로 나갈 정도로 일제강점기 상황이 나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나간 동포도 다 독립과 해방의 꿈을 잃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도 만주에서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에 회고록을 남기셨는데 그중에 인상 깊은 것은 어린 시절 해마다 8월 29일 국치일이 돌아오면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하루 세끼를 굶었다고 한다. 단순히 나라 잃은 설움 때문만은 아니라 설움을 승화시켜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려고 한 것이다. 그런 의지들이 모여서 결국은 독립을 이뤘다.

젊은 세대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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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친일이 가장 큰 적폐’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친일청산 작업을 했던 분으로서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저는 개인적으로 적폐의 출발점은 친일청산을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다른 민족의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에서 해방 뒤에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지 않은 사례는 한국밖에 없다. 그러니까 반민족 행위라는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청산되지 않는데 웬만한 잘못은 그냥 청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풍조가 만들어 진거다. 그래서 친일청산을 실패한 게 그 이후 쌓인 여러 적폐의 출발이라 생각한다.

질문: 젊은 층에게는 친일 청산 이야기가 그저 과거 이야기일 수 있다. 최근에는 유명 배우의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어 젊은 층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답변: 친일청산도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연좌제를 금지하는 것이다. 친일파 후손이라고 낙인을 찍고 멍에를 씌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때도 친일파 후손을 공개하는 것을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친일파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대신 반성하고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정당했던 것처럼, 그래서 친일청산이 잘못된 것처럼 이야기할 때는 후손 이름을 공개하면서 잘못됐다고 이야기한다.

친일 이야기가 나오면 젊은 사람들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냐’, ‘뭐하려고 다시 꺼내냐’라고 하는데 지금의 잘못된 역사는 친일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서 친일은 잘못된 일이었고 독립운동은 우리가 제대로 기려야 할 일이었다는 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질문: 끝으로 독립기념관 관장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답변: 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이다. 시민들이 찾아와서 편안하게 이용했으면 좋겠다. 시작도 시민들이 낸 성금으로 출발했고 지금도 시민들의 관심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독립기념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딱딱하게 느낄 수 있는데 독립기념관은 단순히 역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도 있다는 것에 많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자연과 역사를 아울러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김백겸 기자 [email protected]

<2018-01-21>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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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국민의 힘으로 세워졌습니다.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먼저 나서서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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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8/3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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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백년전쟁’ⓒ민족문제연구소

역사가 법정에 섰다.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재판이었다. 역사의 문법과 법의 문법은 다르기 때문이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일례로 2004년 반민족처벌법 제정 당시를 설명한다.

“역사학자들은 처벌 대상을 ‘한일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로 정하며, 작위 자체가 병합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률가들은 병합이 되면서 그들이 무슨 공을 세웠는지 증명하라고 하더라.”

역사와 법의 영역은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역사를 법 앞에 세운 이는 다름 아닌 정치였다.

이승만 명예훼손 혐의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제작진 김지영 감독과 최진아 PD는 법정에 섰다. 2012년에 나온 ‘백년전쟁’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독립운동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전쟁으로 보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어두운 과오를 다뤘다.

‘백년전쟁’은 뉴라이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제작됐다. 1995년경부터 시작된 이승만 바로세우기 운동에 이어 2000년 뉴라이트가 친일 인사 찬양 운동을 시작했다.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백년전쟁’은 건국의 아버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승만의 친일행적과 비위행위를 드러냄으로써 그를 역사의 법정에 세웠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 합계 200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에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 등 유족들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3년 제작진을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은 이승만의 미국 박사학위 취득 과정, 친일 활동과 독립성금 전용 의혹 등에 대해서는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영상에서 이승만이 192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맨 법(Mann Act·성매매, 음란행위 기타 부도덕한 목적으로 가족이 아닌 여성과 주 경계를 넘는 행위를 처벌하던 1900년대 미국 법률)’ 위반으로 체포, 기소됐다는 부분이 문제가 됐다. 제작진은 해당 사례로 이승만이 하와이 주민들이 힘들게 모은 독립성금을 낭비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허위사실로 보고 기소를 결정했다.

피고인들은 국민참여재판을 선택했다. 지난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김태업) 심리로 해당 사건 2회 공판 겸 선고기일이 진행됐다. 이날 재판은 증인신문, 피고인 신문, 검찰·변호인 최종 의견진술, 배심원 판결, 재판부 선고 순으로 진행됐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재판이 다음 날 새벽 2시에 끝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치 재판의 서막

검사는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번 재판은 이승만을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허위 사실을 찾기 위함이라고 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던가. 재판 내용은 아닐지라도 김 감독과 최 PD가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되기까지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2013년 3월 청와대 오찬에서 조부의 친일을 옹호한 이인호 전 KBS 이사장이 “‘백년전쟁’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말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잘 살펴보겠다”고 화답했다.

박 전 대통령의 이 한 마디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보수 언론들은 해당 영상물에 ‘좌파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교육부에 ‘백년전쟁 대응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국정원은 전경련을 통해 이승만 찬양 영상 제작비를 지원했다. 김 감독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인수씨의 고소로 검찰에 사건이 접수되자 사건의 정치적 양상은 더욱 빛을 발했다. 서울중앙지검은 해당 사건을 형사1부에 배정해 조사하던 중 공안1부로 재배당했다. 검찰이 통상 형사부에서 다뤄지는 명예훼손 사건을 간첩을 조사하는 공안부로 넘겼다는 사실은 이 사건을 이념적 문제로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사건을 4년 넘게 끌던 검찰은 이례적으로 공소시효를 10여 일 남기고 기소했다.

법정에서 역사를 논하다

오후 증인신문 과정은 근현대사 수업시간을 방불케 했다. 이승만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하는 두 교수가 양측 증인으로 나왔다. 오후 4시 종료 예정이던 증인신문이 저녁 7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막상 사료를 따지고 들면 역사는 수학만큼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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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전 대통령ⓒ뉴시스

이번 재판의 쟁점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맨법(성매매나 음란행위 등 부도덕한 목적으로 여성과 주 경계를 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한 법) 위반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었다.

증인으로 나온 두 교수는 재판장에서 1900년대 초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 강연을 펼쳤다.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는 “미주지역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알력 다툼 속에서 경쟁 세력이 이 전 대통령을 음해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반면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이승만과 김노디의 부적절한 관계는 많이 알려졌다. 여러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 같은 감독의 해석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반되는 두 교수도 동일하게 인정한 부분이 있었다. 역사학계에는 이승만과 김노디의 당시 행적에 관한 연구가 없다는 것이다.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을 연구하는 것을 꺼려하는 학풍 때문이라고 말했다. 학계 다수가 인정하는 정설이 없다는 뜻이었다.

검찰과 변호인은 증인 신문 과정 틈틈이 배심원단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했다.

검찰은 영상 속 “1920년 6월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맨법 위반 혐의로 붙잡혔다. 이승만은 이민국에서 집중조사를 받고 기소됐다. 그로 인해 21일로 예정된 주민 환영회가 취소됐다.이승만은 하와이로 가서 재판 받게 해달라고 사정했고 하와이에서 기각 결정을 받았다”는 내용이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해당 내용이 나오는 2분 30초 분량의 영상을 컷, 자막, 이미지 등을 모두 분류해 사실 여부를 물었다. 어느 사료를 보고 이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했는지 증명하라고 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상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수사·재판을 받았다는 직접 증거는 구할 수 없었지만 로버트 장이 집필한 저서 ‘하와이의 한인들’과 김노디의 이민국 진술서, 이승만의 해명서, 당시 미국 형사절차법의 특성 등이 정황 증거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사 측도 변호인 측도 100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단언할 수는 없었다. 역사는 띄엄띄엄 남아있는 사료에 역사학자의 해석이 가해지면서 완성된다.

검찰은 신문 과정에서 역사의 ‘객관성’을 강조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의 부정적인 측면만 조명했고 긍정적인 측면은 담지 않았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이민국 문서 같이 공문서만이 객관적인 자료라고 인정했다. 공인된 사실일 때만 그를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년전쟁’은 역사적 사료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상물이다. 제작진은 영상을 통해 이승만의 비위 행위를 드러내기 위해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은, 내용들을 대중에 알렸다.

오전 증인신문에 출석했던 강성률 광운대 교수는 다큐멘터리라도 객관적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사실을 카메라로 잡을 것인가 선택하는 것부터 감독의 주관이 들어간다. 카메라 거리, 앵글 등 촬영부터 객관적일 수 없다”며 “결국 감독의 주관을 객관으로 최대한 포장해서 보여지는 것이 다큐멘터리다”라고 설명했다.

역사, 국민이 심판하다

재판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국민 배심원들은 3시간에 걸쳐 토론했다. 평소 1시간 반이면 만장일치로 결정이 모아진다고 하던데. 배심원들은 판결의 무거움을 안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국민이 판단의 주체가 된 법정은 친절한 공간으로 변했다. 국민참여재판의 분위기는 평소 재판과는 확연히 달랐다. 방청객들이 있긴 하지만 평소 재판은 판사, 검사, 변호사 그들만의 세상이다. 앞에 놓여 진 마이크는 장식품일 뿐. 그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법률 용어를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피해자, 피고인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하지만 국민참여재판에서는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국민 배심원을 이해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법률 용어의 의미부터 법률 해석의 배경까지 쉽고 천천히 설명했다.

모든 재판들이 이렇게 진행되면 얼마나 좋을까? 쉬운 설명을 통해 국민 누구나 재판과정을 이해하고 결과를 판단할 수 있게끔 말이다. 사법부에겐 ‘우리가 이렇게 기소하고 이렇게 선고했으니 너네는 받아들이기만 해’와 같은 권위적인 태도가 아니라 국민들을 설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음 날 새벽 1시 55분 국민 배심원 9명은 김 감독에 대해 1명이 유죄, 8명이 무죄 판결을, 최 PD에 대해 2명이 유죄, 7명이 무죄 평결을 내렸다. 재판부 역시 이들의 결론을 참작해 무죄를 선고했다.

<2018-08-30>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법정르포] 역사가 법정 위에 섰다··· 배심원들이 외면한 이승만의 ‘명예’

※관련기사

☞뉴시스: 이승만 다큐 ‘백년전쟁’ 감독·PD, 명예훼손 혐의 ‘무죄’

☞한겨레: 이승만 비판 다큐 ‘백년전쟁’ 제작진 명예훼손 혐의 무죄

☞법률뉴스: [판결] ‘이승만 명예훼손 혐의’ 백년전쟁 감독·프로듀서, 국민참여재판서 “무죄”

☞아시아경제: 이승만 비판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감독·PD 국민참여재판 1심 “무죄”

☞헤럴드경제: ‘백년전쟁’ 감독ㆍ프로듀서 ‘이승만 명예훼손’ 혐의 무죄

☞투데이신문: 이승만 비판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진, 국민참여재판서 명예훼손 무죄

☞금강일보: 백년전쟁 무죄…이승만 사생활·친일행적 다뤄

목, 2018/08/3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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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서 다운로드

학술·문화          □ 언론·사회 

금, 2018/08/3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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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인사이드, 오늘은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과 함께합니다.

1. 오늘은 8월 15일 제73주년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돼 가는데 광복절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2.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어떤 활동을 하나요?

3. 광복 73년이 지나도록 국가로부터 서훈을 못 받는 독립유공자가 많고, 받은 사람들도 서훈의 등급이 부당한 게 많다고 하는데요.

4. 잘못된 역사 교육과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5.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제의 잔재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 생활 속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6. 지난해부터 광주 곳곳에 있는 친일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광주 친일 잔재 청산 특별팀’을 꾸렸었는데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7. 몇 차례 회의는 진행됐지만, 여전히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모습이 보인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8. 당연한 질문 같지만,‘광주 친일 잔재 청산’의 가장 큰 목적은 뭔가요?

9. 광복절만 되면 건국절 논쟁이 시작되는데요. 올해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10. 앞으로의 계획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2018-08-15> KBC광주방송 

☞기사원문: 모닝730 피플인사이드>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금, 2018/08/1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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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全斗煥氏

 

夫妻回顧錄(부처회고록)

憤鬱又長歎(분울우장탄)

不恥焉如此(불치언여차)

衆言罰未完(중언벌미완)

 

전두환 씨에게 묻소

 

두 夫妻가 함께 회고록을 펴내니

분하고 답답한 맘 또 장탄식하네

부끄러워 않음 어찌 이와 같은가

罰이 미완성이라 많은 이 말하네.

 

<時調로 改譯>

 

夫妻의 회고록에 憤鬱하여 또 장탄식

부끄러워하지 않음 어찌 이와 같은가

罰함이 미완성이라 많은 사람 말하네.

 

*夫妻: 부부(夫婦)  *回顧錄: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적은 기록 *憤鬱:

분한 마음이 일어나 답답함 *長歎: 긴 한숨을 지으며 깊이 탄식하는 일. 장탄

식(長歎息)  *如此: 이러함  *衆言: 많은  사람의  *未完: 未完成. 아직 덜 됨.

 

<이우식 지음>

일, 2018/09/0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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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年國恥日

 

恥辱皆忘久(치욕개망구)

邦亡百八年(방망백팔년)

無量分斷苦(무량분단고)

鐵壁孰能穿(철벽숙능천)

 

戊戌年의 國恥日에

 

수치와 모욕 다 잊음도 오래

나라 망한 지 어느덧 百八年

헤아릴 수 없는 분단의 괴롬

견고한 벽을 뉘 능히 뚫으랴.

 

<時調로 改譯>

 

치욕을 잊음도 오래 亡國 어언 百八年

헤아릴 수도 없는 둘로 갈라진 괴로움

남북의 견고한 벽을 누가 능히 뚫으랴.

 

*國恥日: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흔히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國權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 *恥辱: 수치와 모욕 *無量: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 *鐵壁: 쇠로 것처럼 견고한 벽. 쇠로 벽이란 뜻으로, 잘 무너지거나 깨뜨

려지지 않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방비가 매우 튼튼함을 비유적으로 이름.

 

<이우식 지음>

일, 2018/09/0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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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대 기동대 지원 자격]

 

안전놀이터 기본 조건

 

1.신체 등급 1~2등급 현역대상자

2.신장 175cm 이상

3.시력(나안) 0.8 이상

4.2종소형면허 혹은 원동기 자격증 소유

 

2종소형면허와 원동기 자격증이 필수인 이유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헌병 기동대에서는

배기량이 1,500cc 인 모터사이클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급이기 때문에 함부로 탔다가는 위험합니다.

 

안전공원 우대 조건

 

1.자동차 운전면허 를 취득한 사람을 우대

(원동기 자격증 포함)

2.태권도, 합기도, 유도, 특공무술, 검도, 킥복싱 등

무도 1단 이상자를 우대

3.자동차정비기능사 이상 자격 취득자를 우대

 

☆선발 형식: 100% 모병제 선발

 

멋지고 품위있는 헌병 기동대에 한번 지원해보세요!-

 

그리고 헌병 기동대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복무하고

계신 국군 장병 여러분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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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9/03-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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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정교과서 지지 홍아무개 교수… 교육부 “학회 보고 결정,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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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부,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공개 교육부가 지난 2016년 공개한 국정교과서 (중학교 “역사 ①, ②”, 고등학교 “한국사”) 현장검토본. ⓒ 유성호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지난 6월 8일 ‘국정화진상조사 백서’를 공개하면서 다음처럼 말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권력의 횡포이자, 시대착오적인 역사교육 농단이었다. 국정화가 교육부를 중심으로 추진됐던 게 사실이며, 정부의 과오에 대해 국민들께 깊은 사과를 드린다.”

하지만 이 발언이 나온 지 한 달 뒤인 지난 7월, 교육부와 경기도교육청이 국정교과서의 ‘핵심 설계자’를 자처한 인사에게 국가교육과정 연구책임자를 맡긴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대국민 사과를 내놓고도 관련 인사를 ‘교육과정 작업’에 투입한 것이다. 이 연구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김상곤 ‘국정화 사과’ 뒤 한 달, 교육부의 황당 행동

2일 교육부 관계자 증언과 기자가 입수한 문서 내용에 따르면,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7월 홍아무개 교수(고려대)를 연구책임자로 하는 ‘국가교육과정 전문가포럼’ 계약을 맺었다.

이 사업은 경기도교육청이 실무를 맡고 있지만, 교육부가 특별교부금 6000만 원을 지원하는 등 사실상 교육부가 계획, 주도해온 교육과정 사업이다. 홍 교수에 따르면 홍 교수를 책임자로 한 이 연구엔 한국교육과정학회 인사 등 1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 학회 유효회원은 100명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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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 교수가 주도하는 “국가교육과정 전문가 포럼” 안내문. ⓒ 윤근혁

지난 8월 24일, 홍 교수는 해당 연구사업 일환으로 ‘2018년 제1차 국가교육과정 전문가포럼’을 열기도 했다. 고려대에서 열린 이 포럼의 주제는 ‘학교교육과정 자율화를 위한 국가교육과정 개선 방안 모색’이었다. 이 자리엔 교육부 교육과정 담당 관리들을 포함해 230여 명이 참여했다.

눈길을 끈 건 개회사를 한 뒤 발표에 나선 홍 교수의 기조 발제 내용이었다. 주제는 ‘학교 교육과정 학생 선택권 확대 방안’. 박근혜 정부 당시 ‘교육과정 자율화와 학생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역사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주요하게 목소리를 낸 인사가 문재인 정부에서 ‘교육과정 자율화와 학생 선택권 확대’를 말한 것이다.

국정교과서 보고서를 보낸 교수에게 연구책임을?

홍 교수가 과거 교육부에 건넨 ‘정통 한국사교과서의 확보를 위한 방안과 과제'(2014. 12.) 보고서를 보면, 그는 당시 검정교과서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한 뒤 국정교과서 발간을 제안했다. 지난달 28일 만난 홍 교수는 기자에게 이 문건이 “국정교과서 핵심플랜을 제시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홍 교수는 이 보고서에서 “현재 (역사)교과서들은 북한 역사교과서를 표절했다고 할 정도로 역사관이 많이 닮아 있다”면서 “북한식 사관을 가진 재야 사학자들에게 (검정교과서 집필을) 맡겨둔다면 공교육을 책임진 교육부는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홍 교수는 “교과목의 적용 범위가 필수일 경우 국정(교과서)이 맞다”면서 “한국사의 경우 검정과 국사편찬위 발행 정통 한국사 공존→정통 한국사의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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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 교수가 교육부에 2014년에 보낸 이른바 “정통 한국사교과서의 확보를 위한 방안과 과제” ⓒ 제보자

또 홍 교수는 지난 2014년 8월 교육부가 연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토론회’ 자리에서나, 이 보고서 등을 통해 유관순 열사가 기존 고교 검정 <한국사>교과서에서 빠졌다는 사실을 공식 지적했다. 이후 교육부는 이 사실을 TV광고로 활용하는 등 국정교과서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 대해 홍 교수는 “내가 먼저 교육부에 제안한 것”이라면서 “원고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 보고서 제출 전에 진행된 위 토론회에 나와 ‘교과서 발행 구분 준거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기자가 입수한 ‘올바른 역사교과서 지지 확보 방안'(2016. 9.)이라는 교육부 내부 문서를 보면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은 ‘국정교과서 지지교수’로 전국에서 홍 교수 등 5명을 지목한 뒤 “10월, 차관 면담”이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교육부 “학회 보고 연구 맡겨”… 홍 교수 “국정교과서 지금도 지지”

현직 고교역사 교사인 김육훈 전 역사교육연구소장(전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은 지난 1일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권 당시 역사교과서 국정화 주장을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사람이 교육과정 연구의 책임자이며 나아가 ‘학생선택권 신장 방안’을 연구한다는 것이 참 어처구니없다”면서 “교육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도 진행한 일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교육과정 관련 부서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홍 교수를 보고 정책연구를 맡긴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학회를 보고 맡긴 것”이라면서도 “홍 교수가 교육과정학회장이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꼼꼼하게 못 살펴본 점은 불찰”이라고 해명했다. 홍 교수는 올해 1월부터 학회장을 맡아왔다.

홍 교수도 기자와 직접 만나 “교육부가 나한테 연구를 준 게 아니라 내가 학회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임자) 일을 하는 것”이라면서 “내가 국정교과서를 지금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번 교육과정 포럼 참여도 일관적 애국의 측면”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홍 교수는 “진영논리에 따라 나를 배제하라는 것은 ‘왜 블랙리스트를 작동 안 시키느냐’라는 논리와 똑같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자칭 국정교과서 ‘핵심 설계자’에게 국가교육과정 연구책임 맡긴 교육부

월, 2018/09/0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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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9/0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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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김희원의 거짓말에 대한 김점구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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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김희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를 제기하는 나(독도수호대 대표)를 음해하기 위해 독도수호대 회원을 사칭하며, ‘독도수호대가 정관 공개를 거부했다’는 허위의 주장을 하며, 독도수호대와 나에  대한 명예훼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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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은 9월2일자 내 페이스북에 “회원에게 정관 공개를 거부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왜 회원에게 공개 안하시나요”라는 허위의 글을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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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희원은 독도수호대 회원이 아니다.
독도수호대와 인연은 독도탐방행사에 참가자로 동행했던 것이 유일하다.
8월 17일 가입신청을 했으나 현재 미승인 상태이고, 첫회 회비 미납상태다. 회비가 납부되면 정식 회원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회비를 납부하기도 전에 독도수호대에 대한 허위의 주장을 한 것을 볼때 정상적인 회원 가입이라 볼수 없고, 해당 행위를 했으므로 가입을 보류할 수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독도탐방 행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회원이라고 주장한다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도한 시민역사관 건립에 참여안 발기인, 기부자 모두는 회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을 회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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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김희원은 독도수호대에 정관 공개를 요청한 사실이 없다. 당연히 거부한 사실도 없다.
김희원이 해수부에 공개청구했으나 해수부는 자체 판단으로 비공개했고, 독도수호대에 공개여부를 물은 사실(정보공개법에서 정한 제3자 의견 조회)이 없다. 당연히 “정관 공개 거부”도 성립할 수 없다.
김희원은 ‘독도수호대가 공개 거부’라는 주장만 할 뿐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거부한 사실이 없으므로 증명은 불가능하다.
이로써 민족문제연구소 부위원장 김희원의 거짓말은 명명백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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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희원은 왜 독도수호대 회원을 사칭하며 ‘정관 공개 거부’라는 거짓말로 독도수호대와 나를 음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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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문제를 제기하는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민족문제연구소 문제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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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이미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를 제기하는 전 운영위원장을 제명했고, 현 간부는 서울 소재 지부장을, 자칭 지부장은 전남 소재 지부장을 각각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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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은 1만 3천여 회원이 속해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이고, 김희원의 허위 주장은 일개 개인의 의견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김희원의 허위 주장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독도수호대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를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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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설립 초기부터 회원이다.
자기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만천하에 고발한 임종국 선생의 진실을 향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민족문제연구소의 정신이라고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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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민족문제연구소 상근자와 운영위원은 어떠한가?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거짓말을 일삼고 일부 운영위원은 작당한 듯이 문제를 제기하는 회원을 중상모략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미 내가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때가 되면 밝힌다)라며 허위 주장을 한 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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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구한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김희원 부위장은 독도수호대와 나를 상대로 하는 허위주장에 대해 공개사과하고, 그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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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과를 하지 않고 원상회복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명예회복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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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4

화, 2018/09/0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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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告人君(봉고인군)

 

一國興亡路(일국흥망로)

人君左右之(인군좌우지)

難題南北解(난제남북해)

最重不相欺(최중불상기)

 

삼가 나라님께 아뢰오

 

한 나라가 흥하고 또한 망하는 길

나라님이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남과 북 함께 풀되

서로 안 속이는 게 가장 重합니다.

 

<時調로 改譯>

 

한 나라의 흥망은 人君께 달렸습니다

어려운 문제일랑 남북이 더불어 풀되

속이지 아니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奉告: 받들어  고함. 또는  삼가  아룀  *人君: 나라님.  임금  *左右之: 좌지우지(左之

右之).  이리저리  제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다룸  *興亡: 잘되어  일어남과  못되어

어짐 *難題: 難問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나 사건 *最重: 가장 귀하고 중요함.

 

<2018.9.4, 이우식 지음>

화, 2018/09/0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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敢問人君敎育部長官任命

 

四方多傑物(사방다걸물)

擢擧豈如斯(탁거기여사)

衆歎號回撤(중탄호회철)

祈望再考思(기망재고사)

 

교육부 장관 임명에 대해 감히 나라님께 여쭙소

 

사방에 뛰어난 인물 많기도 하건만

발탁해 重用함 어찌 이와 같습니까

많은 이 탄식하며 撤回 부르짖으니

거듭 考慮하기를 빌고 또 바랍니다.

 

<時調로 改譯>

 

사방 傑物 많건만 擢擧 왜 이러합니까

많은 이 탄식하며 임명 撤回를 외치니

거듭해 고려해 보길 빌고 또 바랍니다.

 

*敢問: 쉽게  대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거북함이나  두려움을  무릅쓰고 물음. 또는

그 물음  *人君: 임금.  나라님  *傑物: 뛰어난  물건.  뛰어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擢擧: 발탁(拔擢)하여 중용(重用)함 *如斯: 이러함 *回撤:

철회(撤回). 이미 제출(提出)하였던 것이나 주장(主張)하였던 것을 다시 회수(回

收)하거나 번복(飜覆)함 *祈望: 빌고 바람 *考思: 고려(考慮). 생각하고 헤아려 봄.

 

<2018.9.4, 이우식 지음>

화, 2018/09/0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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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명칭 직권변경 위해 변경안내 공고… 대체 도로명으로 ‘고려대로’ 등 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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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구청장 이승로)가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인촌로’의 도로명 변경을 추진한다.

인촌은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의 호로, 그는 일제의 징병·학병을 지지하는 글을 싣는 등 친일 행각을 벌여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이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은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결했고, 정부는 지난 2월 국무회의를 통해 그가 1962년에 받은 건국 공로훈장을 취소했다. 인촌로 명칭 변경은 그동안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다.

성북구는 “대법원 판결과 정부의 훈장 취소에 따른 조치이자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등의 부적합한 도로명 변경에 대한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것”이라며 “정부는 훈장 취소 및 생가와 동상 등 5곳의 현충시설 해체를 진행한 바 있다, 성북구도 시민사회의 요구 등을 반영해 인촌로 변경을 본격적으로 추진, 친 일 적폐 청산에 기여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인촌로는 6호선 보문-고대병원-안암-고대앞사거리 구간(폭 25m, 길이 약 1.2km)의 도로로 종속도로 190개, 건물번호는 1527개가 해당 도로에 포함돼 있다. 2010년 정부의 도로명 및 건물번호 기준의 주소체계 시행에 따라 해당 도로에 인촌로란 이름이 붙었다.

성북구는 “명칭 직권변경을 위한 첫 단추로 9월 초 도로명 변경안내문을 공고하고 주민의견을 수렴하겠다”라며 “이후 도로명주소위원회 심의를 거쳐 주소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면동의를 받을 계획이다, 추후 도로명부여 세부기준의 검토과정이 남아 있으나 우선은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 ‘고려대로’ 등이 대체 도로명으로 거론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인촌로를 사용하는 건물의 지역주민, 외국인, 사업자 등을 포함한 주소사용자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다”며 “도로명 변경의 타당성을 알리고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도로명 인촌로 변경추진 기획팀(T/F)도 운영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일대에 거주하며 성북구는 항일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라며 “단순히 도로명 변경의 의미를 넘어 엄혹한 일제치하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광주 서구는 친일 장교출신인 김백일의 이름에서 유래한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변경한 바 있다(관련기사 : 친일 인사 이름 딴 광주 ‘백일로’ 사라진다).

<2018-09-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 도로명’ 인촌로, 8년 만에 이름 바뀌나

화, 2018/09/0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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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답사 동행기]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용산은 오랜 시간 ‘남의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리고 지난 6월, ‘전 주인’이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비로소 용산은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이전과 함께 용산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도 일고 있다. 최근 국가보훈처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 효창공원을 독립기념공원으로 만들자는 방안을 밝혔다. 지난 8월 29일에는 숙명여대를 사이에 두고 효창공원 건너편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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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통치의 흔적이 남겨진 용산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 ⓒ 김경준

지난 1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 후 첫 행보로 용산에 얽힌 일제 침략의 역사를 시민들과 함께 짚어보는 ‘특별답사’를 진행했다. 답사에는 3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뜻 깊은 이번 답사에 기자도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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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특별답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 김경준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가 된 용산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용산에는 제20사단 제39여단 보병 제78연대·기병 제28연대·야포병 제26연대·제40여단 보병 제79연대 등 일본군 4개 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1908년 10월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됐다.

▲ 용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벌이는 일본군대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후 상주군 편제로 바뀌면서 1918년 6월부터는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조선군 사령관은 한반도 전역에 배치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조선총독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조선군 사령관 출신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9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의 용산우체국 옆으로 200미터가량 곧게 뻗은 도로의 끝에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레 청사가 멸실됐다고 한다. 청사는 없어졌어도 당시의 흔적을 증명하는 콘크리트 벙커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태라 단단한 출입문으로 막혀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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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 있던 조선군사령부 청사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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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던 자리엔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지난 6월,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했지만 아직 이곳의 출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 김경준

코앞에 그 흔적이 있지만,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현장해설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실망하는 답사단원들에게 “그래도 과거에는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이 근처도 못 오게 했었다”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조선군사령부 건너편에는 조선총독관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총독 관저하면 남산 왜성대 부근에 있었던 통감 관저나 조선총독부 뒤편 경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용산에도 또 다른 총독 관저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역대 조선총독 그 누구도 집무 혹은 거주공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시내와 멀리 떨어져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연회를 위한 공간 혹은 일본 황족 및 서양 귀빈을 위한 숙소로 드문드문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총독 관저는 한국전쟁 당시 반파되면서 철거됐다. 총독 관저가 있던 터 역시 미군기지 안에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쇼핑객·여행객으로 분주한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사연

답사단이 용산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주말을 맞아 쇼핑객과 관광객 그리고 먼 길 떠나는 열차 승객들로 북적였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공간이지만, 이곳 역시 알고 보면 한 많고 사연 많은 공간이다.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 병력들이 모두 이곳에서 출정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들 역시 이곳에서 그리운 고국 땅, 가족과 눈물의 작별을 해야만 했다. 최소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용산역 광장에 모여 열차를 타고 군함도,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해 8월에는 용산역 광장 한 켠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답사단 일행이 노동자상을 둘러싸고 광장에 얽힌 구슬픈 사연을 듣는 동안, 지나가는 시민들도 관심 갖고 노동자상 옆의 안내 문구를 읽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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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8월에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 노동자상”.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역 광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기 위해 집결했던 장소였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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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단원들의 모습 ⓒ 김경준

철도노동 순직자들을 위한 위령제의 진실

철도 건설과 함께 용산을 철도 행정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일제는 용산역을 중심으로 철도관리국, 철도병원, 철도구락부, 철도원양성소 등 철도 관련 시설을 대거 조성했다.

용산역 맞은 편에 있는 낡은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용산 철도병원’이다. 철도공사 도중 다친 노동자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지어진 이 병원은 해방 후 중앙대학교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중앙대병원이 흑석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건물로 남게 됐다. 답사에 참여한 한 시민의 입에서 “만날 지나다니면서 도대체 무슨 건물일까 궁금했었는데…” 하는 읊조림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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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에 세워진 “용산철도병원”. 해방 후 중앙대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현재는 주인 없는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 ⓒ 김경준

이순우 연구원은 “이 건물은 2008년에 등록문화재로 등재됐으니 철거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계속 빈 건물로 방치할 수는 없을 테고, 옛 서울역사 건물처럼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정부 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용산역에서 이촌역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는 철도선형과 서빙고로 도로가 만들어낸 원뿔 모양의 지형이 나타난다. 과거 이곳엔 ‘용산철도공원’이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철도공원 안에 철도순직자조혼비(鐵道殉職者弔魂碑)를 세우고 매년 순직한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조혼제(위령제)를 지냈다.

현재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지만, 위령제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 연구원은 “유족들 입장에서야 가족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위령제를 지내는 전통이 일제 때부터 시작돼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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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철도공원이 있었던 자리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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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철도공원이 있던 자리에서 “철도순직자조혼비” 사진을 소개하는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김경준

개성에 있던 비석은 왜 용산으로 왔을까

용산역 뒤편에 있는 철도회관 입구에는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비석이 있다.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건립된 연복사 오층불탑의 건립 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본래 이 비석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성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일제에 의해 용산의 철도구락부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이 비석은 한동안 학계에서 소재불명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12년 우연히 길을 가다 이 비석을 발견한 한 시민이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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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역사 뒷편 철도회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연복사탑중창비” ⓒ 김경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비석이 긴 세월 동안 소재불명이었다는 사실도 우습지만,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 엉뚱한 곳에서 방치돼야만 했던 비석의 신세도 처량하기만 했다. 일제에 의한 우리 문화재 수난사의 한 대목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생태공원보다는 역사공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올해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과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곳은 11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비로소 온전히 우리 땅이 된 서울의 심장부, 용산”이라며 경축식을 용산에서 거행하는 까닭을 밝혔다. 그리고 미군이 떠나간 자리에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라고 천명했다.

미군기지 자리에 도심 속 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에 이견을 제시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용산을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메시지가 없었던 점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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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 용산지사 뒷편에 위치한 서울교 원불교당. 일제강점기 당시 이 자리엔 용광서(龍光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죽은 전몰장병의 유골을 안치했던 사찰이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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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삼거리 앞에 위치한 구 경룡관(京龍館) 터. 1921년에 세워진 경룡관은 일본인 전용극장이었다. 일제 말기에 성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해방 이후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03년에 폐관했다. ⓒ 김경준

용산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생태공원 조성에 앞서 용산에 깃든 치욕의 역사를 기념하는 역사공원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짐하는 뜻에서 미군이 떠나간 바로 그 자리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건 어떨까. 식민통치의 본산이나 다름 없던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세운 이유가 그렇듯이 말이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붐비는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한맺힌 사실

화, 2018/09/0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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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9/0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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