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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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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익명 (미확인) | 금, 2018/01/26- 17:16

“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시민들에게 계속 다가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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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그 사이 해방을 맞이하고도 반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건국 시점과 친일 등 근대사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말 중국 방문 중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보수 진영에서 “1948년 정부수립이 건국”이라고 문 대통령의 발언에 반발하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 있었던 ‘건국절’ 논란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처럼 역사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12월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 신임 관장이 취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미래와 직결돼 있다”고 말한다.

이 관장은 16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진행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며 “또 다른 하나는 해방된 다음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이어 “임시정부가 만든 임시헌장 서문에 보면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으로 규정했지만, 오랫동안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구상이 실현되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이 관장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그냥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건 기본적인 거고 그 이상이 있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잘 녹여내서 보는 사람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전시 공간을 구성하는 게 중요한 문제”라며 “독립운동이 지금 우리의 삶과도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로 전시를 더 강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질문: 독립기념관은 건립 30년을 넘겼다. 독립된 지도 70년이 훌쩍 넘었는데 젊은이들이 이를 되새기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답변: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됐다고 말한다. 지금은 해방보다 독립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해방이라고 더 많이 표현했다.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다음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 어떤 나라를 만들까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헌법을 개정한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라고 하는데 서문에 보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를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 해방 뒤 이런 구상이 제대로 실현 안 됐다. 일단 일제 식민지배 이후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려고 했는데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38선이 그어져서 민족이 분단됐다. 완전한 자주 독립하고 거리가 멀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상도 오랫동안 실현 못 됐다.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과거 역사,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 독립운동역사는 과거에 흘러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 미래와도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질문: 독립기념관을 과학전시관과 비교한다면 좀 어렵고 오래된 이야기라는 느낌도 든다. 영상과 모바일에 익숙한 젊은 층과 어린이 세대를 위한 시설이나 행사는 어떤 것이 있나?

답변: 몇 해 전부터 독립 기념관에서 어린친구들을 위함 체험학습관을 꾸준히 운영해 왔고 교육프로그램 중에서도 어린이들이 흥미를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왔다.

겨레의 집을 리모델링 중인데 그 중 일부는 ‘펀(Fun)체험관’이라고 해서 특히 어린 관람객이 뛰어 놀면서 독립운동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미려고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놀이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강화하려고 한다.

질문: 눈썰매장이나 캠핑장 등 가족들을 위한 시설이나 시기별 행사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데 소개를 한다면?

답변: 독립기념관이 가진 강점 중 하나는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의 전시관은 역사지만 동시에 독립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좋은 자연이 있다. 점점 가족단위 관람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자연과 접하면서 레크레이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기념관 전시관을 방문하거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역사를 접하는 좋은 기회를 독립기념관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천안 지역사회와도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1월1일에 해맞이 행사를 했는데 7~8천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독립기념관을 생활 속의 일부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시민에게 다가가겠다. 천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지역사회 주민과 계속 호흡을 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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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여름 야영장ⓒ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그간 많은 전시, 행사, 교육을 수행했지만 이를 이용할 시민들에게는 좀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직전에 강북구청 근현대사기념관장도 역임했는데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문제에 대해 구상하고 있다면?

답변: 근현대사기념관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기념관이든 박물관이든 근현대사를 다루는 시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시민들과 결합하는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기념관은 아마 죽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은 시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기념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 욕구가 뭔지 잘 파악하게 된 것이다.

독립기념관은 상대적으로 규모도 크고 대규모 전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는 묘역 같은 현장감 있는 공간이 독립기념관에 없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문: 최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대중서도 발간했는데 어떤 내용의 책자이고, 발간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식민지근대화론이 처음 등장한 거는 벌써 20년 정도 된다. 우리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어서 오랫동안 학계에서 밀려있었는데 10여년 전부터 식민지근대화론이 힘을 얻어서 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논란이 됐다. 지금도 일부 언론에서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논조를 펴기도 하고, 일부인사들이 주장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도 식민지근대화론은 살아있다.

독립기념관의 기본적인 입장은 독립운동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인데 독립운동에 반대되는 식민지 지배 때문에 오늘날이 가능했다고 하는 설명은 독립기념관의 설립취지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고 실제로 쉽게 풀어 쓴 책이 나왔다.

경제사학계에서 오랫동안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앞장섰던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가 집필했다. 허수열 교수가 경제사를 전공하셔서 경제사학회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맹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 국정 역사교과서 같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일제 강점기에 벌어졌던 독립운동 역사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독립기념관의 역할이 있다.

독립 운동가들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이루려는 독립에는 나라의 독립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 젊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 운동이 민주주의 문제와도 연결돼 있고 독립운동이 지금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하고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통일문제 관련해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이후 분단이 됐을 때 분단이 곧 민족상잔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정신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한 측면도 있는데 그런 면을 강조함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중국을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현지시각) 중국 충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관람을 마치고 독립유공자 후손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7.12.16ⓒ제공 : 뉴시스

질문: 내년에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 일부 보수층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경 임시정부 청사 방문이나 건국 100주년이라고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적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답변: 역사적으로 이야기하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의 과정이자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는 임시헌법을 재정한다. 임시헌법 제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규정이다. 그 규정이 현재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출범과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에서 공표한 제헌헌법 전문에 보면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돼 있다. 그리고 ‘이 헌법을 제정함으로서 민주공화국가를 제건한다’고 돼 있다. 재건의 핵심적인 과정은 임시정부 대신 정식 정부를 세우는 거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데도 거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다.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 자료가 보여주는 바대로 해석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앞으로 이런 논란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문: 독립기념관도 건국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 준비할 일도 많을 듯하다. 어떤 점을 중요하게 준비해나갈 것인가?

답변: 문재인 대통령이 한 명의 독립 운동가라도 찾아내서 포상을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2019년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발굴이 중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향후 몇 년 동안 새로운 독립 유공자를 발굴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올해 범정부차원으로 100주년 기념 민간 사업회가 출범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독립기념관도 그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 같다.

또 독립기념관의 주요사업 중 하나가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내는 것인데 중간보고 겸 100주년인 2019년에는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특별편을 내려고 한다. 특별판은 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분들을 대상으로 해서 100명 남짓의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할 것 같다. 그것과 병행해서 독립운동가 1000명 정도로 웹 전시관도 내려고 한다.

독립운동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문제,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사업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질문: 박근혜 정부 당시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정부가 잘못됐다는 점을 사과하고 후속조치를 마련 중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강하게 반발해 난항이 예상된다. 독립기념관장인 동시에 근현대사를 연구한 학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답변: 전제는 ‘일본군 위안부’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일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를 하는 게 마땅한데 그걸 오랫동안 안하고 미뤄오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하면서 더 이상 과거 일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다 끝냈다고 그동안 주장했고, 이게 한일 관계를 정상화 하는 데 장애가 되니까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국민 정서상 잘못된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독립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정 재정 당시 제9조를 보면 사형제 폐지, 공창제 폐지가 명시돼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한다는 데 대해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독립운동단체 강령 가운데서도 남녀평등 조항이 빠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군 위안부도 식민지 공창제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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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시관ⓒ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단절됐던 남북 간 대화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해빙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은 남과 북이 공유하는 민족사이고, 그 완결점인 통일국가 건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교류협력이 진전되면 남북의 독립운동 유적이나 기념이 교류 등이 가능할까?

답변: 여건이 허락한다면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는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역사학계 차원의 교류도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이나 일본에 강제동원과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서로 공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실제로 일정부분 성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경색이 되면서 오랫동안 진행된 이런 사업이 중단됐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해빙된다면 다시 한번 이런 사업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굉장히 아쉬운 것은 내년에 3.1운동 100주년인데 3.1만세 시기는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북한 지역에서도 굉장히 많은 시위가 일어났는데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그래서 100주년을 맞이하기 전에 북한 자료도 입수해서 남북 간 공동사업도 할 수 있을텐데 앞으로 남은 시간에 가능할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질문: 이번에 취임 소식과 함께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라는 점이 다시 한번 알려졌다. 성장과정에서 집안의 내력이 영향을 끼친 점이 있나?

답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중‧고등학교때 무조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들은 독립운동이야기가 많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실 얼마 전까지 주위에 누구 외손자라는 이야기를 안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독립운동은 살기위해서 삼시세끼 밥 먹는 일이나 숨 쉬는 것이나 같은 일이지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예전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던 외할아버지 묘소를 가거나, 외삼촌이 계시는 현충원을 가면 어머니에게 ‘여기에 계신 분들은 이름 석자를 남겨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고, 현충원이라는 좋은 데서 쉬고 계시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당한 분들이 훨씬 많다. 그런 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 이름을 남기신 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높은 뜻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제가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가진 개인적인 꿈은 아주 번듯한 무명 독립투사 기념시설물을 하주 좋은 곳에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동상 같이 길을 가면서도 들릴 수 있는 그런 곳에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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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질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신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립기념관장이 되면서 시민단체 활동이 도움 되는 점과 또 달라지는 점이 있을 것 같다.

답변: 저에게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굉장히 득이 됐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처럼 읊조리는 말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라는 이야기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게 역사라고 이야기 많이 하는데, 그야말로 책에서나 듣는 이야기지 실제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 치열한 문제 인식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부족한 게 많다.

다행스럽게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그게 누가 써놓은 멋있는 문구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 연구가 지향해야 할 바라는 것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친일파 청산도 관여했고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등 현안에 대해서도 관여했다. 시민단체에서 얻은 경험, 시민들의 역사 인식을 독립기념관을 운영하는데 최대한 반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아마 독립기념관 관장이라는 공직을 맡아서 과거와 같이 자유롭게 시민단체 활동을 할 수 없겠지만 시민단체에서 활동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다.

질문: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도 꽤 많이 하셨는데, 독립기념관장으로서 젊은이들에게 꼭 남겨주고 싶은 교훈이나 정신은 무엇인가?

답변: 지금 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 갖는 게 일자리라고 한다.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하니까 ‘살기 팍팍하다’, ‘기성세대에 비해 우리가 많이 힘든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돌이켜보면 내가 젊은 때도 그런 것 같다. 아버지 세대보다 우리세대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고 우리 자식 세대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나라를 잃었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록을 봤더니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 가운데 10~20% 사람들이 해외로 나갔다. 그렇다고 번듯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 가서 노동자로, 만주에 가서 소작농하면서 힘들게 살줄 뻔히 알면서도 해외로 나갈 정도로 일제강점기 상황이 나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나간 동포도 다 독립과 해방의 꿈을 잃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도 만주에서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에 회고록을 남기셨는데 그중에 인상 깊은 것은 어린 시절 해마다 8월 29일 국치일이 돌아오면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하루 세끼를 굶었다고 한다. 단순히 나라 잃은 설움 때문만은 아니라 설움을 승화시켜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려고 한 것이다. 그런 의지들이 모여서 결국은 독립을 이뤘다.

젊은 세대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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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친일이 가장 큰 적폐’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친일청산 작업을 했던 분으로서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저는 개인적으로 적폐의 출발점은 친일청산을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다른 민족의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에서 해방 뒤에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지 않은 사례는 한국밖에 없다. 그러니까 반민족 행위라는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청산되지 않는데 웬만한 잘못은 그냥 청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풍조가 만들어 진거다. 그래서 친일청산을 실패한 게 그 이후 쌓인 여러 적폐의 출발이라 생각한다.

질문: 젊은 층에게는 친일 청산 이야기가 그저 과거 이야기일 수 있다. 최근에는 유명 배우의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어 젊은 층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답변: 친일청산도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연좌제를 금지하는 것이다. 친일파 후손이라고 낙인을 찍고 멍에를 씌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때도 친일파 후손을 공개하는 것을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친일파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대신 반성하고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정당했던 것처럼, 그래서 친일청산이 잘못된 것처럼 이야기할 때는 후손 이름을 공개하면서 잘못됐다고 이야기한다.

친일 이야기가 나오면 젊은 사람들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냐’, ‘뭐하려고 다시 꺼내냐’라고 하는데 지금의 잘못된 역사는 친일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서 친일은 잘못된 일이었고 독립운동은 우리가 제대로 기려야 할 일이었다는 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질문: 끝으로 독립기념관 관장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답변: 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이다. 시민들이 찾아와서 편안하게 이용했으면 좋겠다. 시작도 시민들이 낸 성금으로 출발했고 지금도 시민들의 관심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독립기념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딱딱하게 느낄 수 있는데 독립기념관은 단순히 역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도 있다는 것에 많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자연과 역사를 아울러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김백겸 기자 [email protected]

<2018-01-21>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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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유족회 등이 지난 2일 경기도의회 소녀상 앞에서 램자이어 하버드 로스쿨 교수의 논문 폐기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홍용덕 기자 [email protected]
정병호 | 교수

정병호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미국 하버드대의 램자이어가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라고 주장해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후원으로 석좌교수가 된 그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 논문을 반박하느라 애쓰고 있는 해외 학자들이 있다. 군사독재 시대부터 촛불혁명까지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지원하며 국제사회의 병풍이 되어준 70~80대 원로 교수들도 참여했다.

그런 해외 학자들에게 “외부인은 논할 자격이 없다”고 경고한 이른바 ‘친일’ 한국 학자들이 있다. 도대체 누가 ‘외부인’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나치의 강제노동 같은 인류에 대한 범죄는 시효도 국경도 없는 것이다. 인류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편과 가해자 편이 있을 뿐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가해권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다. 수많은 희생 위에 겨우 자리 잡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모독이다. “권력에 맞서서 싸워보지도 못한 것들이!” 돌아가신 리영희 교수의 추상같은 일갈이 그립다.

국적을 가지고 자격을 논하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1910년 ‘한일합방’에 앞장서서 일제의 귀족 작위와 토지를 받은 ‘매국노’를 완곡하게 표현해서 ‘친일파’라고 했다. 1965년 ‘한일협정’도 대한민국 정부가 한 일이다. 일본군 출신 독재자가 시민들의 반대를 군사계엄령으로 누르고 조약을 체결하면서 받은 돈을 피해자들 모르게 돌려썼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도 그의 딸이 대통령이었던 대한민국 정부가 했다. 10만명 이상의 피해 여성의 피눈물을 단돈 백억원으로 갈음하고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친일’의 면면한 계보는 이어져왔다. 제국주의 권력과 그 조력자들이 맺은 사기성 농후한 협약도 국제간의 약속이라고 존중해야 하나?

‘친일’은 역사가 아니라 늘 현실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유린하며 시위를 하는 그들에게서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야유하던 모습과 비슷한 역겨운 가학성이 보인다. 미국과 일본으로 다니며 ‘위안부는 가짜다,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그들. 왜 그렇게 집요하게 피해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가?

최근 나는 해방 후 스스로 가해권력이 된 ‘친일파’ 역사의 한 단면을 되짚어볼 기회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오키나와 전투를 준비하면서 무기를 나르고 참호를 파는 인력으로 긴급하게 조선의 장정들을 끌고 갔다. 주로 경상북도 각 마을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동원됐다. 일본인 대신 조선인 순사와 면서기, 군청 직원, 지역 유지들이 이들을 잡아서 훈시하고 격려하면서 전장으로 보냈다. 도망치고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은 가족들 때문에 억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군부들은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며 전장에 내몰려 죽고 처형까지 당했다. 패전 후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일본 군인의 이름을 마지막 한명까지 찾아 기리면서 희생된 조선인은 몇천, 몇만명인지 규모조차 밝히지 않았다. 어느 마을 누구까지 지목해서 끌고 갔던 일본은 조선인 강제연행 기록을 은폐하고 피해자들의 진술은 부정하고 있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해방된 지 1년이 지나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참혹한 전장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친일 경찰과 관리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 편에 서서 새로운 권력이 된 그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강제연행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탄압했다.

일제의 반인도적 범죄 피해자들을 숨죽이고 살게 했던 대한민국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처세와 출세를 위해 ‘친일’했던 사람들은 해방 후 보신을 위해 ‘반공’에 앞장서며 가해 행위를 정당화했다. 냉전 대립과 전쟁을 겪으며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군사독재 권력이 됐다. 국가를 대표해서 식민피해 보상금을 협상하고 그 돈을 전용한 그들은 또다시 피해자들을 침묵시키는 가해자가 됐다.

일제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친일’은 냉전 이념의 그늘에 가려진 회복되지 않은 정의의 문제다. 수십년 전 역사상 저질러진 폭력에 직접 책임이 없다고 해도 그 행위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누리는 경우 간접적으로 과거 범죄에 연루된 ‘사후종범’이다.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와 눈물 위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와 특권의 근원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가해 역사를 덮기 위해 지금도 가학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는 친일파는 현재진행형 가해자다. 죄과를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2021-03-03> 한겨레

☞기사원문: [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친일파, 현재진행형 가해자

목, 2021/03/0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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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1/03/0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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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발간한 가볍고도 무거운 역사책 ‘한 시대 다른 삶’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이 두 권의 책에 등장하는 스무 명의 인물 중에 태어나 처음 들어본 이름이 무려 네 명이나 된다. 명색이 20년 넘게 아이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온 현직 교사로서 면구하기 짝이 없다.

학교에서도 근현대사를 주로 가르쳐왔고, ‘현대사 전문가’라는 상찬까지 들으며 십수 년 동안 여기저기 대중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도 수강생들도 그런 나를 현대사와 관련된 박사 학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줄로 안다.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가령, 신석구와 한형석. 신석구 선생은 3.1 운동 당시 기독교를 대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시고, 한형석 선생은 1940년대 광복군 선전대에서 활약한 항일 음악가다. 해방 후 친일 청산 노력이 물거품 되면서 지금껏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친일파들이야 그렇다 해도, 독립운동가의 생애는커녕 이름조차 낯설어하는 내가 과연 한국사 교사 맞나 반성하게 된다.

솔직히 일독을 권유받았을 때, 마치 감수자라도 되는 양 스스로 거들먹거렸다. 수업 교재나 교양 도서로서 어디 하자는 없는지 찾아 훈수를 두려는 거만한 태도로 책을 폈다. 내용을 살펴보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그래서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다 아는 내용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거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두툼한 세 권의 <친일인명사전>보다 불과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이 두 권의 책이 친일 청산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친일인명사전>을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이 책을 먼저 읽은 한 아이의 소감이다. 이심전심. 스스로 박학다식하다고 능력 있는 교사는 아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동기부여하는 데 능숙한 이라야 제대로 된 교사다. 책이라고 다를까.

언제까지 친일청산 타령? 이 책으로 답합니다

▲ <한 시대 다른 삶> 1, 2권의 표지와 목차 ⓒ 서부원

이 책은 ‘웹툰 북’, 곧 만화책이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얹자면, 만화책이라고 우습게 보다간 큰코다칠 수도 있다. 앞서 고백한 대로, 한국사 교사조차 부끄럽게 만든 책이다. 형식은 가볍지만 내용은 묵직하다. 가독성이 뛰어난 데다 교훈적이기까지 하단 이야기다.

말 그대로 술술 읽힌다. 역사 공부에 젬병인 아이들조차 단숨에 읽어낼 만큼 쉽고 재미있다. 한 아이는 주말 아침 식사 후 읽기 시작해 점심 먹기 전에 두 권을 다 읽었단다. 시험에 출제된다면야 이름과 생몰년, 업적, 저서 등을 암기하느라 페이지를 넘기는 게 만만치 않겠지만, 그럴 부담이 없어 다 읽고 나면 고스란히 ‘엑기스’가 남는 책이다.

역사에 흥미가 없는 이라도 일단 첫 장을 넘기게 되면 끝까지 읽게 되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내용이야 일관된 주제지만, 만화를 그린 화가가 여럿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곧, 만화를 감상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이 책은 두 권이 아니라 열 권을 읽는 셈이 된다.

그림도, 글씨체도, 배치도 각각 다르다 보니, 읽는 데 지루할 틈이 없다. 만화와 캐리커처에 관심이 많다는 한 아이는 책을 읽다가 메모장을 꺼내 그림을 따라 그려봤다고 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이 ‘만화의 교본’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책의 미덕은 단연 ‘대조’에 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면면을 시대순이나 가나다순으로 단순히 나열한 책은 이미 차고도 넘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런 책들은 독서를 통한 교육적 효과도 미미할 뿐더러 굳이 따로 공들여 제작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한 시대 다른 삶,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 이 책의 표제다.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서로 가는 길이 극명하게 달랐던 두 인물의 생애를 넘나들며 비교하려는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책의 제목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학교의 수업에서든, 학교 밖 대중 강연에서든, 인물의 ‘대조’는 일제강점기를 설명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이다. 친일파의 행적만 나열하게 되면, 설령 천인공노할 만행일지라도 이내 지루해 한다. 그러고는 몇몇은 심드렁한 얼굴로 전가의 보도처럼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먹고 살려면 친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위대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건 맞지만, 당시 친일 행위를 두고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단죄와 응징 운운하는 건 지나치다고 봐요.”

거칠게 말해서, 이 질문의 요지는 두 가지다. 당시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굴복한 이들은 친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과, 대체 언제까지 친일을 우려먹을 것이냐는 비판이다. 전형적인 물타기이자 ‘물귀신’ 전략이지만, 일일이 대응하기가 여간 힘든 지점이기도 하다.

반론하다 보면 자칫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정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고 하면, 당장 선정 기준을 문제 삼거나 좌우 이념 대립의 결과물이라며 논점을 흐리고, 정치적 흥정의 산물로 폄훼하기 일쑤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김일성과 박정희, 현재 북한과 남한의 경제력 등을 비교하는 지경에 이르고, ‘빨갱이’와 친일파 중에 누가 더 나쁘냐는 황당무계한 질문에 답하라며 생떼를 쓴다. 이는 비단 어르신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요즘엔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싫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알다시피, 해방 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6.25 전쟁을 겪었으며, 친일파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수십 년 동안 친일 청산은 입에 담지조차 못했다. 이는 나 몰라라 하고 아직도 친일 청산 타령이냐고 묻는 건 파렴치한 짓이다. 그들은 입만 열면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떠들어댄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어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사건 직후 유가족과 시민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수년 동안 묵살해놓고선,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이냐며 욕지거리해대는 이들과 친일파들의 행태는 빼다 박은 듯 닮았다. 그들을 상대하노라면,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이럴 때 들어맞는 표현인 듯싶을 때가 많다.

친일파의 후손들이나 그들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이 이 책을 읽을 리는 만무하다. 다만,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포획된 청소년들과 장삼이사들에겐 이 책이 그들의 물타기식 질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답변이 될 것이다. 일일이 반론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책을 소개하기만 하면 된다.

두루 읽히고 싶은 책

▲ 2권 말미, 독립운동가 한형석과 친일 음악가 현제명의 삶을 대조한 부분. ⓒ 서부원

책의 구성을 잠깐 소개한다. 각 권당 220여 쪽 분량으로, 본문 뒤에 책에 등장하는 친일파들이 참여한 일제 협력단체들을 덧붙여놓은 것이 독특하다. 이는 그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본문은 두 권을 합해 열 꼭지다. 종교와 교육, 역사, 언론, 군사, 문학, 음악 등 분야별로 엇갈린 삶을 산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그려내고 있다. 친일파의 비루한 삶이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삶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대조’의 힘이다.

가장 인상적인 두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독자라면 대부분 공감할 테지만, 2권의 ‘광야의 지사’ 이육사와 ‘해바라기 시인’ 서정주를 비교하는 꼭지일 것이다. 30쪽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인 데다 역사적 사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울림은 자못 크다.

이내 울림은 분노로, 분노는 다짐으로 승화된다. 11년 터울인 두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거물’이다. 시 <청포도>와 <국화 옆에서>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의 생애는 위대함과 비루함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서정주는 채 마흔 해를 넘기지 못한 이육사의 두 배도 넘게 살았다. 그것도 여든다섯의 삶 내내 부와 권력, 명예를 누렸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권력자가 숱하게 바뀌는 와중에도 그는 권력의 주변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굴종과 아부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에 대한 비난을 이렇게 다섯 글자로 반박했다. 시대에 무모하게 맞서기보다 현실에 체념하며 살아간 것일 뿐이라는 의미다. 달리 말한다면, 비록 존경받을 깜냥은 못 돼도 그렇다고 민족반역자라며 치도곤당할 일도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렇게 그는 <이승만 전기>를 썼고, 베트남 파병을 옹호하는 시를 박정희 정권에 상납했으며, 광주 학살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에 빌붙어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인물’이라며 그의 ’56회 탄신일’에 축시를 바쳤다. 그런데도 그가 사망했을 때, 유력 정치인과 문화계 인사 등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친일 청산이 백년하청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육사의 위대한 삶은 말하기 전에 옷깃부터 여미게 만든다.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으로서 그의 삶은 서정주와 함께 거론되는 것 자체가 송구할 따름이다. 그의 시신과 유품을 거둔 아내 이병희 지사와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의 신산했던 삶은, 친일 청산은커녕 망각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서운 죽비다.

이육사가 딸의 이름을 옥비(沃非)로 지은 연유는 슬프다 못해 서럽다. 부귀영화를 꿈꾸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는 것.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에서 그의 아내도 딸도 이육사의 이름을 함부로 내세울 수 없었으니, 이름은 그대로 예언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서정주의 두 아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의사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지난 겨울방학 때 올해 수업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역사 달력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서둘다 보니 오탈자와 잘못된 내용이 많았는데, 이 책이 모자란 부분을 훌륭히 메워줄 듯하다.

일단 도서관에 비치해 돌려 읽게 할 계획이다. 아울러, 원작이 웹툰이니만큼 주소를 링크해 수시로 읽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코로나가 물러난다면, 국립 현충원과 독립운동가의 생가, 유적지 등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답사하고 싶다.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일 성싶다.

끝으로, 책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와 전국시사만화협회 회원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온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비매품이지만 어떻게든 보급이 되어, 특히 청소년들에게 두루 읽혔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지금껏 이렇게 ‘가볍고도 무거운’ 역사책은 보질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https://minjok21.kr)

사족. 기획부터 출판까지 짧은 시간에 해낸 탓인지, 오타가 몇 개 보이는 게 ‘옥에 티’다. 대개 맞춤법이 틀렸거나 한자의 음이 잘못된 것이다. 1권의 38쪽과 127쪽에 각각 하나씩 있고, 2권의 72쪽에도 보인다. 또, 웹툰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군데군데 글씨가 작아 어르신들의 경우라면 돋보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민족문제연구소의 정기 간행물인 <민족사랑>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서부원(ernesto)

<2021-03-09>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한국사 교사조차 부끄럽게 만든 책, 추천합니다

수, 2021/03/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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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전주]

[앵커]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기획보도, 세 번째 순서입니다.

친일인사의 부끄러운 행적을 사실대로 밝히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인데요.

여전히 그들을 미화하거나 역사를 왜곡한 사례가 적지 않아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안승길 기자입니다.

[리포트]

일등비행사로 이름을 떨치고, 조선 최초 항공사와 해방 후 첫 민간항공사를 세운 신용욱.

일본군에 비행기를 납품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두 차례나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고향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고, 고창군 블로그에는 찬양 일색의 글이 실렸는데, 이번 친일잔재 보고서에 역사 왜곡 사례로 지적되자 해당 글은 삭제됐습니다.

명실을 다 같이 추호도 다름이 없는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일제의 기세가 치솟던 1942년, 채만식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은 글입니다.

해방 후 소설 ‘민족의 죄인’을 통한 참회에도 씻을 수 없는 친일 행적.

보고서는 지난해 군산시가 블로그에 실은 채만식 관련 글은 역사 왜곡과 축소 사례로 지적했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과 도서관, 또 다른 친일 작가인 서정주의 호를 딴 고창의 미당시문학관 등의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했습니다.

[군산시 관계자/음성변조 : “이 자료를 받은지 얼마 안 되서요. 구체적 논의는 아직 안 된 상태인데. 포럼이나 워크샵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려 노력하고 있었고요.”]

보고서에 미처 실리지 않은 친일인사도 적지 않습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로 제헌의회 국회의원까지 지낸 배헌 선생.

윤치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친일단체 배영동지회 이리 부회장을 맡았고, 전쟁 협력 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일제의 식민통치 하부 조직으로 운영된 이리 읍회의원을 10년 넘게 지낸 사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재호/민족문제연구소 : “있는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 해방 이후 친일과 독재로 점철되며 그들이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했잖아요.”]

왜곡과 미화를 걷어내고 부끄러운 역사의 민낯을 마주하는 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첫걸음입니다.

KBS 뉴스 안승길입니다.

촬영기자:신재복

<2021-03-10> KBS 

☞기사원문: [친일잔재 청산 기획]③ 왜곡과 미화로…숨겨진 부역의 조각들 

※관련기사 

KBS: [친일잔재 청산 기획]② 청산 언제쯤?…일상 곳곳에 ‘일제 흔적’  

KBS: [친일잔재 청산 기획]① 전북 첫 친일잔재 전수조사..친일파 118명의 ‘굴레’

목, 2021/03/1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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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자문으로 YTN 라디오와 경기도가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올해 10편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꾸준히 제작, 방송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우원식 국회의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심산 김창숙 손녀 김 주)

☞ 10편 : 광복군아리랑(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장병화)

☞ 9편 : 앞으로행진곡(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정남기)

☞ 5편 : 격검가(동암 차리석 아들 차영조)

☞ 4편 : 압록강행진곡(광복군 김영관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석주 이상룡 증손자 이항증)

☞ 2편 : 안중근옥중가(함세웅신부)

☞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3/11-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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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28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여옥사 거울방에서 일제에 저항하다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서로를 비추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제에 맞서는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없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직접 군인이 되거나, 남편과 자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이 있었다. 국가는 이들의 헌신을 평가해 남편 뿐만 아니라 아내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몇몇 부부가 함께 안장돼 있다. 그러나 서울현충원의 홈페이지와 묘비에는 오직 남편의 공훈만 적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이 주목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공훈을 기리고 되새기는 작업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달과 이달 두 차례에 걸쳐 서울현충원을 방문해 독립유공자 묘역을 살펴보고,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공훈록 등재 현황과 비교했다. 그 결과, 부부가 함께 안장된 경우 아내의 공훈 기록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와 묘비에서 누락돼 있었다.

서울현충원은 묘역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홈페이지에서 추모할 수 있는 사이버참배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독립유공자의 이름을 검색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공훈록 보기’ 코너가 있다. 그런데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김학규-오광심’, ‘오광선-정정산(정현숙)’, ‘신건식-오건해’, ‘신송식-오희영’, ‘이회영-이은숙’ 부부의 경우 남편은 공훈록에 공훈이 등재돼있지만, 아내는 등재돼 있지 않았다. 같은 시기 독립운동을 함께 했는데도 아내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묘비도 마찬가지다. 통상 묘비의 뒷면과 측면에 안장된 사람의 이력을 기재한다. 현충원을 방문하는 시민들은 묘비를 보고 독립운동가의 이력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의 묘비 중에는 이력 기재가 빠진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내의 묘비는 상당수가 빠져있었다. 묘역 앞쪽엔 공훈의 내용을 발췌해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팻말이 세워져있는데, 공훈이 등재돼있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이곳에도 소개될 수 없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엔 김학규-오광심 부부의 묘소가 있다(오른쪽). 하지만 남편인 김학규 지사와 달리 아내인 오광심 지사의 공훈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 공훈록에 등재돼 있지 않다. 이혜리 기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역 앞엔 공훈의 내용을 발췌해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팻말이 있지만, 공훈이 등재돼있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이곳에도 소개될 수 없다. 묘역 앞에 비치된 안내서에도 일부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이혜리 기자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엄연히 공훈과 관련해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물들이다.

오광심 지사는 1934년 조선혁명군 대표인 남편과 함께 만주에서 난징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 1940년 여군복을 입고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했다. 광복군 간부로서 오 지사는 선전활동과 함께 사병이 될 여성 청년을 모집했다.

“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 오 지사가 쓴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정정산 지사는 ‘독립군의 어머니’, ‘만주의 어머니’로 불린다. 1918년쯤 무장독립단체인 서로군정서 별동대장 및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남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35년 이후 난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원했고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 일원으로 투쟁했다.

정 지사의 딸인 오희영 지사도 1940년 한국광복군에 여군으로 입대해 제3지대 간부로 활동했다. 오건해 지사는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자녀들을 보살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은숙 지사는 1910년 일제강점기 초기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남편 이회영을 직간접적으로 도우며 투신한 공적으로 훈장을 받았다.

이상은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볼 수 있는 정보들이지만,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공훈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산하 기관이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2019년 6월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유치원생들이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고 애국지사 묘역을 걸어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밖에 임시정부 요인 묘역 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이었던 이상룡 선생의 아내 김우락 지사와,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자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의 부인인 윤용자 지사의 공훈이 공훈록과 묘역 안내서에서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을 포함해 일부 여성 독립운동가는 정부가 최근에서야 발굴해 훈장을 줬지만, 일부는 유공자로 인정된 지 수십년 된 사례도 있다.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국가유공자인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박사도 공훈록에서 검색이 되지 않았다. 반면 남편인 정일형 박사는 공훈록에서 검색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차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재조명을 강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 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며 “(그럼에도) 여성의 독립운동은 깊숙이 묻혀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낼 것”이라고 했다.

한국 근현대사가 응축돼있는 서울현충원은 추모의 공간이면서도 교육의 공간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 묘소를 중심으로 ‘여성길’을 만들어 시민교육에 활용하고 있는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애국이라는 것이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데 현충원이 거의 남성들로 채워져있고, 여성들은 별로 없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운영돼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애초에 아내의 경우엔 독립운동의 한 주체로 국가가 인정을 잘 하지 않았고 남편이 인정되면 딸려서 함께 안장되는 형태였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뒤늦게 발굴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되는 사례가 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훈록이나 묘비에 이력이 정확히 안내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3월 현재 기준 독립유공자 총 1만6685명 중 여성은 526명(3.15%)이다. 서울현충원 측은 “지적한 부분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이혜리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0> 경향신문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부부 함께 안장됐는데, 공훈록·묘비에서 사라진 ‘여성의 공로’ 

목, 2021/03/11-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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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발악에 총알받이로 죽거나 굶어 죽거나

▲ 일제에 강제동원돼 고향을 떠나는 조선인 청년과 그를 배웅하기 위해 동원된 마을 주민들.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 1945년 4월19일 2대의 일본 가미카제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부분 파손된 항공모함 프랭클린 호 모습./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1945년 3월경 오키나와 전투 중, 미해병이 숨어 있던 굴에서 일본군이 나오자 동료에게 사격을 중지하라는 손짓을 보내고 있다./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장윤만(1917-1963)씨는 일제강점기 1944년 6월10일 경북 상주에서 강제동원 되어 7월12일 일본군 경성사단사령부 군부(인부)로 소속됐다. 그리고 경북에서 같이 징발된 6000여명의 조선인 군부들과 함께 태평양전쟁, 그 지옥의 ‘오키나와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 최전선에 끌려갔다. 그는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의 아카도(阿嘉島)에 주재했던 일본군 특설수상근무부대 제103중대에 배속되었고, 1945년 봄엔 자마미도(座間味島)로 이동했다.

그는 방어진지와 방공호구축, 굴파기, 탄약·식량·어뢰정·폭뢰 등의 운반과 설치 작업에 동원됐다.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작업을 강요당해, 많은 조선인 동료들이 옆에서 죽어 나갔다.

장씨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보트인 ‘신요’를 아카도와 자마미도의 해안가 굴에 숨기거나, 굴에서 꺼내 출동을 지원하는 작업도 하게 됐다. 야간에 굴에서 보트를 꺼내는 특공보트 지원 작업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총탄을 맞고 죽었다.

또한 일본군은 조선인 인부들을 20~25명씩 길이 5m의 작은 땅굴 속에 가두어 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지켰다. 숨도 쉬기 어려운 지하 땅굴 속에서 물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기도 했다. 풀이라도 뜯어 먹으려고 굴을 기어 나왔던 조선인들은 일본군들에게 발각돼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 장윤만씨가 1948년에 쓴 ‘태평양실기집’을 70여년간 보관해 온 장윤만씨의 딸 장현자씨가 부친의 생전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제공=류재형 작가
▲ 태평양전쟁 실기집 본문 가운데 ‘하루는 출석을 부르는데 조선인 동포 한 사람이 답이 없어 툭 쳐보니 배고파 굶어 죽어 있다’는 부분.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장윤만씨가 있던 오키나와는 일본 측이 ‘옥쇄(玉碎)’라 미화하는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일제의 잔혹성과 인권 유린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일본은 “살아있으면서 미군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차라리 자결하라”는 식의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시키며, 원주민과 조선인들에게도 집단자살을 강요했다. “미군이 점령하면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을 믿은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적에게 건네줄 수 없다. 그래서 죽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다”라고 생각하고 집단자살을 선택했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칼과 낫으로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는 9만5000명의 원주민들이 이렇게 집단자살했다. 일본군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연합군에 항복할 때까지 이 같은 ‘미친 짓’을 이어갔다. 이미 광란의 일본군들은 이보다 7~8년 전인 1937년 중국 난징에서 30만여명을 학살하고 8만여명을 강간한 경험이 있었다. 난징의 시민과 포로들은 생체실험실로도 보내졌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함께 ‘태평양전쟁실기집’을 감수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학과)는 “태평양전쟁실기집은 장윤만씨가 상주군 공성면사무소에 집결한 이후 상주-대구-부산-일본항(불명)을 거쳐 군속으로 복무했던 아카도, 자마미도에서 미군에 체포되기까지 전 과정을 두루마리에 몰래 적어와 다시 정리한 희귀한 자료”라며 “특히 일본군이 집단자살을 강요하거나, 한국인 군속들의 투항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와 감금, 만행, 학대, 살육 등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태평양 전쟁 실기집’의 주요 부분이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0>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2

※관련기사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목, 2021/03/11-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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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등과 간담… 사업진행 방안 논의

김영권 충남도의원이 지난 9일 민족문화연구소와 간담회를 갖고 도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방안등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충남도의회 제공)

[충청신문=내포] 홍석원 기자 = 충남도의회 김영권 의원(아산1·더불어민주당)이 도내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조례 제정 이후 추진계획을 논의했다.

김 의원은 지난 9일 도의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등과 간담회를 갖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근거가 마련된 만큼 실무적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김 의원은 11대 도의회 입문 이래 친일 작가가 그린 지역 위인의 표준영정 지정 철회 요구를 시작으로 ‘친일 잔재 청산 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해 왔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지자체 주관 사업이나 행사 등에서 친일 상징물을 설치하거나 게시하는 행위를 제한한 ‘충청남도 친일 관련 상징물의 공공사용 제한 조례’가 제정됐다.

특히 김 의원이 1년여 간 연구모임과 의정토론회 등 의정활동을 통해 발의한 ‘충청남도 친일 잔재 조사 및 연구 활동 지원 조례’가 지난해 말 제정됨에 따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연구 활동 추진 근거를 갖춘 상황이다.

김 의원은 “도내 친일잔재 청산은 지금이 가장 적기”라며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를 시작으로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집행부에서 적극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충남도 이길주 과장은 “관련 규정이 마련된 만큼 관련계획을 조속히 마련해 실질적인 사업이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홍석원 기자 / [email protected]

<2021-03-10> 충청신문

☞기사원문: “김영권 충남도의원 “도내 친일잔재 전수조사 해야”

※관련기사 

뉴스충청인: 충남도의회 김영권 의원, “충남도 친일잔재 청산 속도내야”

중도일보: 김영권 의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충남 친일 공공사용 제한 조례 계획논의

목, 2021/03/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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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종교, 교육, 학계, 협동조합 등 각계 참여 갈수록 늘어

간토학살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을 바라는 시민연대 성명

최근 램지어 논문 사태로 야기된 간토학살역사를 수정하려는 시도에 전 세계 양심들의 지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1923년 간토학살사건에 군관민이 총체적으로 조선(한)인을 학살한 범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사실화하려 했던 일본 정부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논문 자체를 폐기하지 않고 단지 몇 줄을 수정한다한들 연구자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점과 민족차별의식에 바탕한 세계 보편적인 인권의식의 결여까지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간토학살사건의 공식조사 결과를 공개하라.

간토학살 역사의 진실은 일본 정부가 당시 조사한 결과를 그대로 공개하는 데에서 밝혀질 것이다. 일본 정부는 간토 학살사건 발생 후 열린 1923년 12월 제국의회에서 두 명의 의원(다부치 토요키치, 나가이 류타로)이 ‘조선(한국)인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지금 조사 중”에 있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일본정부는 그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만일 일본 정부가 계속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램지어와 같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독성 강한 쓰레기 논문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 낼 것이고,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간토 학살 당시의 유언비어들이 또다시 제노사이드를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되어 혐한 시위와 증오범죄를 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인권적이고 몰역사적인 상황을 만들어간 모든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에 관한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를 낱낱이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 정부는 학살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을 위로하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하여 역대 어느 정부도 일본 정부에게 관련 자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한 일도 없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추도식 역시 개최된 바 없으며, 한국과 일본 시민, 그리고 재일동포들이 개최하는 추도 행사에 대통령과 총리의 추도 메시지를 보낸 일조차 없다. 재일동포들을 재외 국민으로 존중한다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학살당한 동포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학살자들에 대한 책임추궁과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조차 없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문재인 정부는 올해부터라도 간토 학살피해자 추도식을 개최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학살당한 수천의 피해자들을 위령하고, 일본 정부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책임을 추궁하고 관련된 모든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라.

사건 발생 100년이 되기 전에 [간토학살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

2014년 4월 7일에 제19대 국회에서 유기홍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여야 103명이 찬성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본 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폐안이 되었다. 21대 국회는 이 법안을 다시 상정하여 회기 내 특별법이 제정되어 사건 발생 100년이 되는 2023년 이전까지 간토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의 주장

– 일본정부는 간토 학살사건 조사 결과를 즉각 공개하라
– 문재인 정부는 간토 학살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을 위로하라
– 21대 국회는 [간토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

2021. 2. 25

호소단체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기억과 평화를위한 1923역사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

연대단체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겨레하나, 광주외국인노동자센터, 구지옛생활연구소, 기독교대한감리회 갈릴리교회, 기독여성살림문화원, 기본소득충남도, 기억과평화를위한1923역사관,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남북상생통일충남연대,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당진돌봄사회서비스센터, 당진문화연구소, 당진참여연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모둥잇돌교회, 미래를위한역사패널전시,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민주노총천안시위원회, 법인권사회연구소, 보령시민참여연대, 보령평통사, 부안금암교회, 부울경5.18민주유공자회, 사회적협동조합기억과평화, 생명평화교회, 서울KYC, 소비자교육중앙회당진시지회, 식민지역사박물관, 아리아리협동조합, 아산시민연대, 아힘나운동본부, 원폭2세환우 쉼터합천평화의집, 신시민운동연합,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우키시마호폭침사건진상규명회,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 일하는예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선학교와함께하는사람들 몽당연필,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지구촌동포연대KIN, 천도교청년회, 천안젠더모임, 천안녹색소비자연대, 천안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청년시대여행, 청양시민연대, 촛불혁명완성책불연대, 충남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충남청소년인권문화네트워크, 평택원폭피해자2세회, 평화디딤돌, 포럼 진실과 정의, 태안참여자치시민연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합천 평화의집, 흥사단,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한국기독교장로회1923진실규명위원회, 생명선교연대, 기청동지회, 나눔교회, 늘푸른교회, 하늘평화교회, 한울교회, 한일역사문제학회, 협동조합아우내공동체

호소인 : 1923 제노사이드 연구소 ,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한일민족문제학회

연대단체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겨레하나, 광주외국인노동자센터, 구지옛생활연구소, 기독교대한감리회 갈릴리교회, 기독여성살림문화원, 기본소득충남도, 기억과평화를위한1923역사관,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남북상생통일충남연대,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당진돌봄사회서비스센터, 당진문화연구소, 당진참여연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동아시아근현대역사문제연구소,모둥잇돌교회, 미래를위한역사패널전시,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민주노총천안시위원회, 법인권사회연구소, 보령시민참여연대, 보령평통사, 부안금암교회, 부울경5.18민주유공자회, 사회적협동조합기억과평화, 생명평화교회, 서울KYC, 소비자교육중앙회당진시지회, 식민지역사박물관, 아리아리협동조합, 아산시민연대, 아힘나운동본부, 원폭2세환우 쉼터합천평화의집, 신시민운동연합,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우키시마호폭침사건진상규명회,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 일하는예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선학교와함께하는사람들 몽당연필,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지구촌동포연대KIN, 천도교청년회, 천안젠더모임, 천안녹색소비자연대, 천안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청년시대여행, 청양시민연대, 촛불혁명완성책불연대, 충남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충남청소년인권문화네트워크, 평택원폭피해자2세회, 평화디딤돌, 포럼 진실과 정의, 태안참여자치시민연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합천 평화의집, 흥사단,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한국기독교장로회1923진실규명위원회, 생명선교연대, 기청동지회, 나눔교회, 늘푸른교회, 하늘평화교회, 한울교회, 한일역사문제학회, 협동조합아우내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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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령,미야우치 아키오,마츠카와미키,박경서,강찬,윤성준,이진수,류은경,하라가 유우,오은정,강대석,김기중 ,김윤철,이규순,이한복,김희봉,진성범,권오춘,이상선,최영민,조헌정,김형수,주두선,황찬익,박창호,강익재,문병옥,조갑식,문태관,신순영,김영석,이현준,소재두,유연상,김환일,최승만,홍순오,배병덕,이종섭,맹붕재 ,이종섭,표건표 ,이광훈,전형금,서유식,신호균,진혜숙,최용진,이운종,김운식,김종호,박노진,권중원,오정애,남일현,김지은,한광희,김혜경,황환철,김영권,이태근,정환희,신승식,김봉희,이인호,임춘근,강일구,진성범 ,이명우,이덕기,김도석,박향서,오현주,이선영,박영규,김금자,이상현,이준섭,홍기후,고의주,조중연,김종명,이중호,조재돈,정현섭,최성규 ,이지나,반의경,김진선,정호영,조진희,김태응,원경희,신영교,류덕희,이나영,이용찬,정의환,김지연,박근식,김은수,임영상,이상원,김순하,김현철,전한겸,이건희,이다연,한지연,장백회,최재완,강희권,남승미,송유니게,박현희,김상균,정종관,김영진,유기덕,강대니얼,김기상,안세환,김수영,전기호,정종옥,문연규,김윤자,원종수,박지용,이광묵,장석림,김세환,최우길,방학진,민병창,장백회,김경아,조재형,최석신,김나현,엄윤정,오미숙,이화영,꼬 비,이영준,이은희,최병문,김미라,임재현,유미란,강신숙,이윤수,유승기,동이,이진희,서명희,임선명,이정학,황의중,홍태영,김승은,김민수,이경완,이성욱,이선숙,윤소희,홍순관,유정원,김귀옥,전지현,구성현,홍성민,오은진,윤경원,정재훈,안윤희,박진석,김기재,김동한,가순홍,신중순,신중순,이명규,양영미,양미강,김경숙,박성필,권혁찬,차선아,조인숙,박성원,황태연,최민경,박명우,김기종,한광희,김덕연,김덕연,권영진,홍경지,박규상,김도호,전훈진,한상화,임두빈,미카미쇼코,김수산나,배진만,류순권,권영순,김익,김동길,김금옥,윤미로,이신철,박성율,남상만,이은로,변혜숙,김민응,윤선진,김관석,홍성근,이상희,김도희,윤병호,전재진,양재성,김채하,박승규,박연숙,박경미,전승예,최기영,장동윤,조헌정,이정연,문경호,이준규,김도규,조미수,이득우,이광능,황의한,이가영,추종오,김레베카,조한성,김호석,이해청,유영재,주영준,박종필,김진영,한철호,심우근,강대석,최은민,최명철,박재화,최의팔,김진선,송송,유성희,전형금,김정화,손동찬,정희준,이원용,홍성표,제주빌레하우스,지은희,이강준

(2021. 2. 27 오후 5시까지)

https://www.youtube.com/watch?v=qu5BN1spfgk…

조정현 기자

<2021-02-24> 미디어기평 

☞기사원문: 간토학살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을 바라는 시민연대 성명 줄이어

목, 2021/03/1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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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검찰보다 훨씬 센 무소불위 한국 검찰
조선총독부 검사의 권한은 일본 본토 검사보다 훨씬 컸다
1940~1941년 조선인 판검사의 수가 0인 까닭
조선인 판검사 모두 창씨개명, 일본인으로 귀화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일본 검찰보다 훨씬 센 무소불위 한국 검찰

지난 한 달여간 필자는 열람 가능한 유엔 회원국 193개국의 검찰 제도와 조선총독부 사법제도를 살펴봤다. 그 결과 우리 검찰과 같은 수사권과 수사종결권, 기소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기소재량권, 자기들 치부는 은폐하거나 대충 넘어갈 수 있게끔 검사만이 공소 제기할 수 있는 기소독점권까지 싹쓸이하듯 장악하고 있는 나라를 찾지 못했다.

일본도 70여년 전에 철거한 제왕적 검찰 구조(1)*를 가진 국가는 지구상에 대한민국밖에 없다.

일본은 형사소송법상 경찰은 1차적 수사 기관이고, 검찰은 2차적 보충적 수사기관이며,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규정되어 있음에도 양자는 상하 수직관계가 아닌 협력 수평 관계다.

경찰은 대부분의 형사 사건을 도맡아 수사하고, 검사는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경찰이 사건을 송치하기 전까지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일본은 패전 후 수사는 경찰이 하고, 검사는 법률전문가로서 경찰의 수사권 남용을 통제하며 기소와 공소유지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검·경 간 권한 분산을 했다.

◆조선총독부 사법체계의 꽃은 검사국

식민지 조선의 사법체계는 판검사를 비롯한 사법관리 모두 조선총독부 관리로서 총독의 지휘하에 있었다. 1912년 3월 18일 제령 제4호인 <조선총독부 재판소령>에 따르면 총독부재판소는 총독부 직속으로 총독의 감독을 받았으며 법원의 행정사무에 대한 감독권도 총독에게 있었다.

그리고 법원은 고등법원 → 복심법원 → 지방법원의 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여기에 검사국을 병치하도록 했다. 고등법원 검사국에는 검사장을 두었고, 고등법원 검사장은 총독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검사국 사무를 맡고 하급 검사국을 지휘감독하게 됐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사법관시보제도를 신설했다. 사법관시보는 고등관인 주임관 대우를 받으며 1년 6개월의 실무수습을 마치고 실무시험을 거친 후 조선총독부 판검사, 즉 사법관으로 임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부터 1944년까지 651명의 사법관시보(일본인 359명, 조선인 102명)를 채용해 사법관의 공급원으로 삼았다. 조선인 사법관 시보 출신 대다수는 판검사로 오래 재직하지 못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일제는 1934년부터는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에서 판검사를 임용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일단 고급관료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판검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법관시보 원서를 제출한다. 그럼 조선총독부가 후보자의 이력서, 사법관시험합격증사본, 호적등본, 신원증명서, 가정현상서, 건강진단서 등을 심사했다.

특히 판사와 달리 검사의 선발기준은 사상경력(시위 전력 등)으로, 일제가 인정한 완벽한 친일 사상자, 일본인보다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한국 검찰청의 원류인 조선총독부 검사국은 총독 직속의 최핵심 친위조직으로 경찰사법감독기관겸 정보사찰감찰 특무총괄국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즉, 조선총독부 사법체계의 꽃은 검사국이었다.

◆조선총독부 검사의 권한은 일본 본토 검사보다 훨씬 컸다.

조선총독부의 형사 절차는 대부분 일본의 형사소송법과 형법등을 그대로 따랐지만, 검사가 누리는 권한은 같은 시기 일본 본토의 검사가 가진 권한보다 몇 배나 컸다.

조선의 검사는 일본의 검사가 갖지 못한 강제처분권을 갖고 있었다. 즉, 검사는 형사소송법에 규정한 경우 외에 사건이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며 빠른 처분을 요한다고 생각할 때는 공소 제기 전에 압수, 수색, 검증, 구인, 피의자 또는 증인심문, 감정, 통역 또는 번역표를 처분할 수 있었다. 또 검사는 위의 규정에 따라 10일간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체포구속장소 감찰권, 사법경찰 징계요구권, 긴급체포사후 승인제도, 체포구속 피의자 석방지휘권, 압수물 처분시지휘권, 사법경찰의 관할외 수사시 보고 징구권, 고소 고발사건 송치전 지휘권, 고소고발사건 수사연장지휘권등 조선총독부 검사는 일본 본토의 검사의 가지지 못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법령에서 인정되는 수사기관의 권한보다 훨씬 강력한 것으로 식민지를 더욱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비롯된 제도였다.(2)*

요컨대 현재 한국 검사의 권한은 조선총독부 검사의 권한과 거의 같고 한국 검사와 조선총독부 검사 이 둘의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 검사의 권한보다 훨씬 강하다.

◆1940~1941년 조선인 판검사의 수가 0인 까닭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대일본제국’의 조선·대만·만주 등 식민지와 괴뢰국의 사법관리 인력배분 대원칙은 경찰 간부는 일본인, 경찰 보조 인력은 현지인을 상당수 고용하고, 판사의 7~8할은 일본인, 2~3할은 현지인을, 검사의 9할은 일본인, 1할은 현지인을 임용한다.

조선 총독부의 사법관리 민족별 배분 구성도 이와 비슷하다. 판사의 경우, 일본인 대 조선인 비율은 100명대 25명, 검사는 100명대 11명 수준이었다. 1937년만 해도 조선총독부 판검사중 조선인 판사는 45명, 검사는 11명이 있었다.

그런데 1940년~1944년 조선총독부 판검사는 모두 일본인이고 조선인 판검사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이 갑자기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조선인 판검사 전원이 자진해서 창씨개명(創氏改名)하여 일본인으로 귀화했기 때문이다.

◆조선인 판검사 모두 창씨개명, 일본인으로 귀화

백범 김구의 친일매국노 263명 살생부 명단 앞 자리에는 애국가 작사자겸 무궁화 도입자 ‘윤치호’가 있다. 백범은 이토지코(伊東治昊)(3)*로 앞장서 창씨개명한 그를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으로 규정했다. 창씨개명은 곧 일본인으로 귀화함을 의미했다.

흔히들 창씨개명(1940년 2월 11일~1945년 8월 15일 시행)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 모두에게 강제한 제도로 알고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인식이다.

미나미 조선총독이 1939년 창씨개명방침을 발표하자 일본인들이 창씨개명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 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다. 총독부 내부에서도 창씨개명에 반발했는데, 특히 조선총독부 검사국과 경찰은 조선인이 똑같이 일본 씨와 성을 쓰게 되면, 그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했으며, 내지측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우려가 높았다.

1940년 2월 11일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공고문에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자 윤치호와 이광수 등 골수 매국노들은 앞을 다퉈 창씨개명을 선도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을 따랐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일부 친일파 인사도 있었다. 비록 자신은 친일매국노이지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성씨만은 절대로 바꾸지 못하겠다는 마지막 양심과 민족 자존감은 지켰다.

◆검찰 개혁은 일제 잔재 척결 차원에서 실천돼야

독일과 달리 과거 침략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태도의 원천은 일본 국교 신토(神道)의 양대핵심정신 ‘반성불요론’과 ‘무궁확장론'(天壤無窮 천황영토의 무궁한 확장)에서 나온다.

법원과 경찰은 물론 국가정보원까지 여러 차례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했으나 검찰만은 오불관언, 적반하장, 본말전도, 안하무인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 검찰 행태 중 가장 일본특색적인 대목이다. 어쩌면 이런 것까지 일본 극우세력과 닮았는지, 몸이 떨린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오빤 강남스타일”은 괜찮지만 “검찰은 일본 제국주의 스타일”만은 안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일제 군국주의 시대의 형사법 체계를 온전히 고수하고 있는 상황은 국치일의 연속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경악스러운 대목은 일제강점기 조선 검사가 일본 검사의 권한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과 또 이러한 일제 군국주의 시대 제왕적 검찰 권한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현 상황이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법이다. 과거의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만큼 센 공포의 권력기관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검찰은 ‘나는 비행기도 멈추게 한다’라고 해도 과장이라는 생각이 들을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따라서 검찰 개혁은 일제 잔재 척결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검찰 내부가 아닌, 국민에 의한 개혁과 그 실천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검찰의 기소권과 수사권을 분리, 견제하는 기관의 설치가 절실하다.

◆◇◆◇◆◇각주

(1)*법무부 장관 휘하의 1개 외청장의 직명을 생뚱맞게 검찰‘총장’이라고 하는 까닭은 일본 검찰의 수장을 검사‘총장’이라고 하기에 덩달아 부르는 건 아닐까? 일본 검찰청법 제3조 検察官は、検事総長、次長検事、検事長、検事及び副検事とする

(2)*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1)』, 2009, 31~33쪽

(3)*<윤치호 영문일기> 1940년(경진년) 6월 17일 월요일. 흐렸다 개었다 오락가락.
창씨개명을 하다. 서울 집. 오늘 오후 경성부청 인구조사과에 가서 우리 식구들의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변경서를 제출했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이동치호(伊東致昊), 곧 이토 지코다.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2021-03-11> 아주경제 

☞기사원문:[강효백의 신경세유표-48] 한국 검사∙일본 검사∙조선총독부 검사

토, 2021/03/1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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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1910·이석영 광장’ 26일 개관…친일파 법정·감옥 설치

(남양주=연합뉴스) 김도윤 기자 =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전시·체험시설이 경기 남양주시에 건립됐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보탠 이석영 선생을 기리를 광장도 조성됐다.

남양주시는 26일 역사체험관 ‘리멤버(REMEMBER) 1910’과 ‘이석영 광장’ 개관식을 연다고 14일 밝혔다.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기 되는 날이다. 1910년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상실하고 이석영 선생이 형제들과 중국으로 망명한 해이다.

‘리멤버 1910’과 이석영 광장은 금곡동 홍릉 앞에 들어섰다.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조선왕릉이다.

당초 이곳에는 옛 예식장 건물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홍릉을 가렸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2019년 3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일대 1만4천㎡에 역사문화공원과 역사체험관을 착공했다.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 배치도 [남양주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역사체험관은 지하 2층, 지상 1층, 전체면적 3천900㎡ 규모로 신축됐다.

내부에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 친일파를 단죄하는 법정과 감옥, 이석영 선생 형제와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료 전시 공간 등이 설치됐다.

다목적홀과 카페 등도 조성돼 매월 1회 인문학 강좌와 영화감상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주말마다 문화 공연도 열린다.

이석영 광장은 올해 말 공사가 마무리된다.

이곳에는 표지석과 6개의 돌이 설치됐는데, 이석영 선생과 5명의 형제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석영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0년 1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면서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일대 땅을 모두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등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당시 땅을 판 돈은 현재 가치로 2조원에 달한다고 남양주시는 설명했다.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 내 친일파 단죄 법정 [남양주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개관식에서는 뮤지컬 ‘안중근 누가 죄인인가’가 공연되고 일제 만행 관련 영상이 상영된다. 1910년 고난의 망명길을 의미하는 수묵화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역사 법정에서는 피고인 이완용에 대한 가상 재판이 열리고 친일파 감옥에 수감되는 장면도 연출된다.

남양주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개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유튜브로 생중계할 예정이다.

개관을 기념한 주말 행사도 열린다.

조 시장은 27일 ‘역사·문화도시 남양주’를 주제로 인문학 콘서트를 연다.

또 28일까지 이틀간 독립운동 관련 영화 ‘암살’과 ‘밀정’이 상영된다.

김도윤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일제 국권 강탈 아픈 역사 잊지 않아요”…남양주시 체험관 건립

화, 2021/03/1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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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고 이이화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오는 18일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가 추모글을 보내왔다.

경황 중에 선생을 떠나보낸 지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 19 감염증이 번지고 있던 어수선한 형편에 제대로 추모의 뜻을 모을 겨를도 없이 놓아드려야만 했다. 고인을 따르던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많은 후진이 안타깝게 여겼지만, 격식을 싫어했던 생전의 선생을 떠올리면 간소하면서도 진정이 담긴 장례가 오히려 어울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시대의 반항아이자 학계의 이단아였다. 한국사 전 분야에 두루 해박했으나 그가 집중했던 관심사는 동학농민혁명, 일제의 전쟁범죄와 친일문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등 민중의 역사, 약자의 역사였다. 남들이 쉬이 발 담그지 않는 분야를 기꺼이 전문으로 삼았다. 그의 풍모는 그냥 학자라기보다는 세상을 바꾸고자 한 투사에 가까웠다. ‘역사학계의 녹두장군’이란 헌사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삶이었다.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성과를 남긴 만큼 선생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1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는 그의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전 22권에 달하는 한국통사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학술서적으로서는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기록함으로써, ‘강단의 역사’에서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신기원을 열었다.

전 22권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 지평 넓혀
동학혁명 농민군 위상 자리매김도
‘만화 한국사’ 내고 아이들 스타로
선생의 길 따라가야 할 책무 남아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의 위상을 제대로 자리매김한 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을 간행하여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는 한편, ‘전국 순회강연’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특별법 제정에 진력하여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를 통한 진실규명과 유족의 명예회복에 커다란 진전을 이뤄냈으며 이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종로의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은 수십 년간에 걸친 선생의 노고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응답이기도 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친일인명사전> 편찬,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한일 과거사 청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와 촛불혁명 등 당대 역사문화운동의 맨 앞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엄동설한의 거리에서 사자후를 터뜨리며 역사를 변조하려는 무리를 꾸짖던 선생의 기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학술연구와 현실참여를 온몸으로 일치시킨 시대의 참스승이었다.

살아생전 선생께서 가장 좋아했던 별호는 ‘역사 할아버지’였다. <만화 한국사 이야기>가 나온 뒤 선생은 어린이들 사이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어디에서든 만나면 “역사 할아버지다!”라고 환호했다.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쉬운 글쓰기와 신선한 시각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이화의 최대 업적은 역사학의 대중화와 사회화”라고 입을 모은다.

선생은 역사학계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많은 후학에게는 인자한 어른이자 다정한 벗이었다. 그는 문벌 학벌 직위 연배 등 이른바 족벌과 서열문화를 배격했다. ‘꼰대’스러움을 철저히 혐오했다. 그래서 항상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 술잔을 나누며 격의 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 분과 함께 했던 나날들, 유쾌했던 그 자리가 무척이나 그립다.

선생의 후광이 빛나는 만큼 남긴 자취 또한 선연하다. 그의 부재가 던져주는 상실감도 실감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뚜렷한 ‘역사의 이정표’를 남겨 놓았다. 우리에게는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따라가야 할 책무만 남아있을 뿐이다.

<2021-03-16> 한겨레

☞기사원문: “아이들에겐 ‘역사 할아버지’ 후학에겐 ‘인자한 벗’이셨죠”

수, 2021/03/1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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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다수 의회, 예산 2200만원 삭감…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 노력 물거품

▲ 우억만 지사 증손주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 ⓒ 김종훈

“이런 모습 보려고 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했나 싶더라고요.”

경상북도 영덕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우억만 지사의 증손주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이 ‘친일잔재 및 항일유적 전수조사 예산 2200만 원이 서울시 금천구 의회에서 전액 삭감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은 뒤 <오마이뉴스>를 만나 울분을 토하며 한 말이다.

2020년 12월 금천구의회는 광복회 금천구지회가 올린 ‘친일잔재청산 기초실태 조사를 위한 지방보조금’을 예산심사위 투표를 통해 전액 삭감 조치했다.

그는 “금천구의회는 10명 의원 중 6명이 민주당 소속”이라면서 “지역 내 친일잔재와 항일유적을 전수조사하자는 광복회 제안에 대해 관망하더니 나중에는 반대해 부결시켰다. 개중에는 ‘금천지역이 시골처럼 작고, 구민들이 오래 살아서 서로 고개 돌리면 다 안다. 잘못하면 분란이 생긴다’라는 핑계를 댄 사람도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금천구의회 소속 민주당 의원 A씨는 16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전수조사 예산이 0원이 된 이유’를 묻자 “여기(금천구)는 오래된 동네”라면서 “소위 시골 동네라고 할 정도로, 이웃 간 얽힌 것이 많다. 그래서 (광복회 제안에 대해) 거부한 의원들도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고국에서 “너희 나라로 꺼져라”라는 말 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 우억만 지사 증손주 우용준 광복회 금천구 지회장 ⓒ 김종훈

1962년생인 우용준 지회장은 중국 연변에서 태어났다. 초중고를 모두 조선족 학교에서 나온 뒤 연변대학을 거쳐 공무원이 됐다.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생활했지만 우 지회장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 우억만 지사 때문이다.

“할아버지 우억만 지사는 경북 영덕에서 유명한 지주였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도 자기 땅을 다 밟지 못할 정도로 큰 부자였어요. 그런데 나이 사십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형제들과 함께 군중을 동원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이 일로 옥고를 치렀죠. 이후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해져 만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곤 이름을 바꿔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1942년 눈을 감았습니다. 남은 자식들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고요. 계속 돌아오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죠.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지 70여 년이 된 지난 2003년에야 제가 유해를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우 지회장은 우억만 지사를 대전현충원에 모신 뒤 2005년 자신 역시 특별귀화 형태로 가족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그리곤 서울시 금천구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금천구가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쌌던 것’이 주된 이유가 됐다. 그러나 힘겹게 시작한 한국생활은 기대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할 수 있는 게 막노동뿐이었습니다. 중국 경력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했고요. 말투에서 연변사투리가 있다 보니 어딜가도 낮춰보더라고요. 대놓고 차별하고.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너희 나라로 꺼져라’라고 하더라고요. ‘내 조국이 한국인데, 할아버지가 모든 가산 털어 독립운동한 나라인데, 꺼지라니…’ 억울했죠. 생활에 치여 살다 2015년 광복회 회원이 되고 나서야 할아버지와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19년 우 지회장은 서울시 금천구 내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결합해 광복회 금천구지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지역 내 친일잔재 및 항일유적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동네 공원에 국가공인 친일파 서정주의 시비가 자리한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됐다.

“금천구에 ‘은행나무로’라는 유명한 길이 있어요. 수백 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길 가운데 친일파 서정주의 ‘금천예찬’이라는 시비가 있더라고요.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습니다. ‘당장 없애야 한다’라는 생각과 함께 ‘금천에 친일잔재가 이것뿐일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제대로 찾아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우 지회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역 내 항일유적을 찾기 위한 준비도 병행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시흥군에 위치했던 시흥공립보통학교(현 시흥초등학교) 학생 120여 명은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를 전개한 역사가 있어요. 학생 시위가 바탕이 돼 시흥군 내 3.1운동은 4월 초까지 이어졌죠. 하지만 현재 관련 내용은 시흥초등학교를 비롯해 금천구 어디에서도 남아있지를 않아요. 흔한 안내판조차 없습니다.”

2020년 말 우 지회장이 금천구의회에 “일제잔재 시설 및 지명, 문화유산 등에 대한 전수조사를 거쳐 목록화를 이루고 이와 관련된 기록관리 및 책자발간을 진행한다”라고 적힌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이유다.

이에 대해 민주당 소속 B의원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을 비롯해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반대해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 “솔직히 말하면 부끄럽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의원들의 인식이 부족했고, 평소 이 사안에 대해 관심이 적어서 이런 결정이 나온 것 같다. 다시 한번 뜻을 모아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경기, 전북, 광주, 제주 등 친일 전수조사 자체 시행”

▲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김해강 단죄비. ⓒ 박주현

금천구 지역 내 친일과 항일에 관한 전수조사가 의회에서부터 막힌 것과 달리 경기와 전북, 광주, 제주 등에서는 지역 의회를 통과해 관련 조사가 수차례 진행된 바 있다.

전북의 경우 2020년 광복 75주년을 맞아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전북지역 친일파 118명과 친일잔재 131건을 확인했다. 현재는 후속조치를 진행 중에 있다.

광주광역시 역시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실시한 전수조사에서 친일인사의 비석과 현판 등 일제 잔재물 65개를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역 내 광주공원 사적비군과 광주공원 계단 등 25곳에 친일잔재 단죄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지난 2월 ‘친일찬양금지법’과 ‘친일인사의 국립현충원 묘지정리에 관한 국립묘지법·상훈법’ 등을 포함하는 ‘친일청산 3법’에 대해 여야 5당에 “당론으로 채택하라”라고 요구한 바 있다. 민주당은 지난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친일 청산’을 화두로 관련법안 5개를 발의했을 뿐 당론으로 채택하거나 특별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관련 법은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계류된 상태다.


김종훈(moviekjh)

<2021-03-18>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친일조사예산 0원 만든 금천구의회… 독립운동 후손의 울분

금, 2021/03/19-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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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가득한 전장의 참상 낱낱이 기록하다

<태평양실기집>을 남긴 고 장윤만씨.
만화사우곡’ 마지막 부분.

◇ 오키나와 전투, 전범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

오키나와 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전범인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전투다.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오키나와에서 인간신경이 무너지는 원인은 광적인 적과의 끝없는 근접전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광적인 근접전이란 “덴노 헤이카 반자이” 라며 달려드는 자살돌격을 의미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온 국민을 세뇌시켰다. 일본인들은 ‘천황=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사후엔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다고 믿게 됐다. 이렇게 평범한 일본인들은 살인마로 둔갑됐다. 이미 수년전, 일본군은 1937년 난징 대학살에서 ‘100인 참수경쟁’을 벌였고, 이 사실을 신문에까지 냈다. 일본군은 1945년 패망 직전에도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며, 할복자살·자살돌격의 광란을 이어갔다.

1945년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6월 상반기 동안 하루 평균 1,000명 이었다. 하반기엔 6월19일 2,000명, 20일 3,000명, 6월21일 4,000명 이상이었다”며 6월19일 이후엔 대부분 자살한 일본군 사상자수를 보고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원주민들에게도 ‘미군이 강간하고 잔인하게 죽일 것’이란 거짓말로 겁을 줘, 적어도 9만5000여명의 집단자살을 유도했다. 미군측 추산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7,166명이었다. 미군 14,009명이 전사했고 영국군도 82명이 전사했다.

1945년 4월 게라마 제도에서 미 제77사단에 나포된 자살공격보트. 섬 전체에 잘 흩어져 위장된 은신처에서 350척 이상이 발견됐다. /사진제공=USA-P-Okinawa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해병대와 동굴 등에서 나온 오키나와의 주민과 어린이.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에서 미군포로가 된 장윤만씨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를 앞두고 3월 26일 오키나와 24㎞ 서쪽 섬인 게라마 제도의 자마미도, 아카도에 우선 상륙했다. 미군은 이 섬들에 있던 350척의 자살특공보트(신요)를 제거했다. 게라마의 주요진지는 5일 만에 미군이 점령했다. 게라마 도카시키도의 산 속에 숨은 일본군 사령관과 패잔병 등 300명은 미군의 식량지원을 받으며 종전(9월) 까지 3개월간 무혈대치만 했다.

게라마 제도에는 ‘아리랑 비’가 세 군데나 있다. 도카시키도에는 故배봉기 할머니 등 조선인 위안부 7명이 끌려와 있었고, 오키나와 전체에는 60여개 위안소에 600여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끌려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사·발표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김민영 군산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아카도에서 도망가다 잡힌 조선인 12명을 총살했다. 총살 장면을 목격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총살되기 직전에 쌀밥 한 공기씩을 받아들자 정신없이 밥을 퍼먹고는 자신의 키 길이만큼의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서면 일본군이 총을 쏘아 구덩이로 떨어졌다. 아직 죽지 않아 구덩이에 덮은 흙이 움직이면 일본도로 몇 차례나 찔러서 죽였다고 한다.

장윤만씨는 1945년 6월8일 자마미도의 산에서 미군에 체포 됐다. 오키나와 제1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1월20일 그리운 경북 상주의 집으로 귀환 했다.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조선인 노동자(군속)들.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며 2005년 5월 오키나와현 요미탄촌에 건립한 ‘부조’와 ‘한의 비석’.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 태평양실기집 징용거귀고생기 완성

귀환 후 장씨는 1948년 2월 ‘대동아전쟁 실기집’을 완성했다. 본문의 첫제목을 ‘왜정시대징용거귀고생기(倭政時代徵用去歸苦生記)’로 했다. ‘대동아전쟁실기집’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면서 ‘태평양전쟁실기집’으로 변경됐다.

이 실기집을 감수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학과)는 ▲세남매의 아버지인 장윤만님이 거주지인 공성면 사무소에 징발·집결한 이후 오키나와에서 포로가 되기 까지의 전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희귀 자료다 ▲오키나와 현지로 수송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 한인·일본인 관리들과 군인들의 말과 행위, 노예선을 방불케 하는 수송선의 이송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자살특공보트의 준비와 계획, 조선인에 대한 감금·만행· 학대·살육 등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만화사우곡>은 죽은 동료에게 쓴 글의 형식을 빌어, 고국산천과 동료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점에서 특별한 문학적 가치가 있다. 드라마·영화·그림 등 문화 예술의 소재로서 활용가치가 높다고 분석했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7>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3

※관련기사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2

금, 2021/03/19-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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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홍콩대학교에서 인턴이 찾아왔습니다.
이 영상은 인턴들이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브이로그 영상입니다.

토, 2021/03/20-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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