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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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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7:15

기고

청량리 떠나던 날, 청파에서 가꿀 새 꿈을 꾸다

김승은 자료실장

연구소가 드디어 청량리에서 청파동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2000년 3월부터 청량리 떡전교 사거리 금은빌딩에 터를 잡았으니 거의 18년 만에 새 둥지로의 이사였다. 그 사이 10명에 불과했던 상근자가 4배 가까이 늘었고, 3층 한켠만 겨우 차지하던 살림살이는 5층과 지하, 2층 일부까지 다 채울 정도로 커졌으니 이번 이사에 만만치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 사무실 이사 전문 업체를 선정하고 체계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전해 갈 서현빌딩의 안전진단과 시설점검을 진행했다. 2006년에 준공한 건물치고는 관리가 비교적 잘 된 편이었지만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꼼꼼한 건물 점검과 필요한 보수공사는 최규필 회원이 전적으로 맡아 도와주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청파동에 찾아가 건물을 둘러보고 관리 상태를 돌아보는가 하면, 공사이력을 알아내고 가장 저렴하게 보수공사를 할 수 있도록 주변 지인들을 총동원해 주었다. 그 사이 곳곳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장고에 보관했던 유물과 고도서들은 직접 확인하고 포장해야 해서 이사 두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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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유물과 고도서를 포장하는 상근자들 3 포장된 유물상자로 가득 찬 청량리 사무실 임시전시실

상근자들은 보관・활용할 사무집기와 폐기물품을 점검하고, 이전하는 새 공간의 활용과 공간 배치 등 모든 이전 업무에 각자의 힘과 지혜를 모았다. 사무실 집기들을 점검하다 보니 갖가지 모양의 책상과 책장, 의자들이 수두룩했다. 문 닫는 사무실만 생기면 가서 주어다 모았기 때문에 통일감이란 ‘1’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짝 안 맞는 낡은 집기들이 우리 연구소가 걸어온 땀과 눈물의 험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손때 묻은 책장과 책상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거의 다 짊어지고 왔다. 서현빌딩에도 이전 건물주가 사용하던 붙박이장과 수납장이 많았지만, 예전 책장과 사무집기들은 우리가 새로 쓸모를 찾기도 하고, 필요한 단체가 있으면 기증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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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체 이사 계획과 일정을 점검하는 상근자회의 2사무집기 점검과 배치를 담당했던 ‘떡전용역팀’ 회의

 

서현빌딩에서도 새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 정비가 진행되었다. 이례적인 한파가 시작된 12월 1일부터 5층 내부 공사, 옥상 철거와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4층에는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동식 서가(모빌랙)를 설치했다. 각 층 전구는 모두 LED로 교체했다. 신용준 회원이 통 크게 후원해 주었고, 직접 시공까지 맡았다.
이삿날이 가까워 올수록 기온은 더 내려갔다. 이사 전에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해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제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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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의실 공사를 맡아 준 디자인 쏨니엄 관계자들과 회의 4옥상에 방치된 시설물 철거 공사 5강의실 내부 공사 6새로 설치된 이동식 서가 7신용준 회원이 건물 전체 조명을 LED로 교체하고 시공까지 맡아주었다.

 

쏜살같이 이삿날은 다가왔고 아직도 정리가 덜 된 짐이 산더미였다. 이사를 하루를 앞두고 4일간 이어질 이사 일정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21스프레이 테러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구소 현판도 챙기고, 먼지 쌓인 연구소의 옛 추억들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는지 이사업체는 지하서고에 자동 밴딩 기계까지 설치하고 이틀 전부터 포장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무실은 일상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이사 전날 새벽까지 개인 짐을 싸는 상근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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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사 이틀 전부터 책 포장에 들어간 지하서고 2연구소 소장자료 이전 준비를 마치고 이사 전날 늦게까지 개인 짐을 싸는 자료실 상근자 3통합 재단 운영 방침을 둘러싸고 새벽1시를 넘겨 이어진 실무회의. 왼쪽은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신용옥 상임이사, 맞은 편은 조세열 사무총장

 

드디어 12월 15일. 본격적인 이사를 시작했다. 하필 이사 첫날은 71년 만에 가장 빨리 한강이 얼었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추위도 큰 난관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지하 서고였다. 꺼내고 꺼내어도 책은 여전히 서가에 가득했다. 다른 층 이전이 줄줄이 늦어졌다. 3층에 쌓인 짐을 건물 밖으로 실어내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금은빌딩에서 완전히 짐을 비우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렸다. 게다가 이사 마지막 날이었던 12월 18일에는 대설경보가 나올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이사는 또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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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월 12일, 박물관 건립 모금에 초석을 놓아 주신 송기인 신부님 등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전 위원장님들이 서현빌딩을 방문해 격려해 주셨다. 53층 사무실 이전을 돕는 이용창 편찬실장과 유은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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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은빌딩 옛 사무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꽉 찬 새 사무실 2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사에 지친 신다희 사무국원 3서현빌딩에서 다시 시작된 책 정리 4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든 팔 걷고 나서는 김병구 회원팀장

 

장장 일주일이 넘게 걸린 이사는 12월 20일에야 마무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산실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회원들과 가장 많이 만났던 3층 연구편찬실과 사무국,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2층 교육홍보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품고 도전했던 5층 역사자료관과 연구소 숨은 보물창고인 지하 서고까지 깨끗이 비웠다. 상근자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신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 배달원 분들, 늘 급하게 주문해도 신속히 작업해 주시던 복사집, 인쇄소 분들께도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청량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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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탁구대 설치를 고민할 정도로 넓게만 느껴졌다던 금은빌딩 3층 6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의 산실 2층 교육홍보실 7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시범 공간이었던 5층 임시전시실

 

사무실 이전 와중에도 워싱턴·뉴욕·LA 등 미주지부 창립을 위한 순회 강연집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와 음악회,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 친일문학상 반대 집회, 서울시민대학 강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아산 유해 발굴 시굴조사, 팟캐스트 시즌2 녹화 등 다양한 사업을 이어갔다. 덕분에 상근자들이 돌아가며 몸살과 독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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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부 철거공사 후 마지막 짐을 내리는 금은빌딩 2듬직한 어깨, 친절한 미소로 이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해 주신 ‘일사천리’ 직원분들 310년 넘게 야스쿠니재판을 지원해 온 일본 변호인들이 금은빌딩의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새 건물로 이사를 가니 챙길 일도 참 많았다. 고장난 문고리나 전선 공사는 물론 변기 커버도 직접 갈고 쓰레기 분리수거, 출입문 보안까지 모든 것을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동파에 터진 수도 배관을 보며 속 태우는 사무국이나, 자동 개폐식 출입문에 아직 적응 못하는 상근자들, 꽂고 꽂아도 산적한 책들에 허리가 휘는 자료실 인턴들, 1, 2층이 아직 공실이라 고스란히 올라오는 냉기에 발을 동동거리는 3층 연구원들 모두가 아직은 이 공간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회원들의 성원과 지지로 만들어진 새 둥지이니 그 안에서 새로 품은 꿈만큼은 창대하다. 연구소는 우리 사회의 비상식・부정의와 싸워 온 지난 25년을 발판삼아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역사운동의 든든한 터전을 이곳 용산 청파동에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내일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길에 회원 여러분들이 늘 함께 해 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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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철·후지코시·미쓰비시·코크스 4곳
피해자 “인간에 자유 있어도 한계 있어”
민변 “더 이상 늦출 수 없어 소송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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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옥성구 기자 =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운데)와 김용화 할아버지(오른쪽) 등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 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일제강제동원 사건 추가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9.04.0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옥성구 기자 = 일본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추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하기 전 기자들 앞에 선 김한수(101) 할아버지는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사건 추가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피해 당사자인 김 할아버지 등 생존 피해자 4명과 사망 피해자 6명의 유족 27명은 일본 기업 일본제철(신일철주금)·후지코시·미쓰비시중공업·코크스공업 4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소장을 접수했다. 손해배상 금액은 개인당 1억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할아버지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서 사람이 아닌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며 “당시 같은 식당에서 일본 사람은 하얀 쌀밥을 먹고, 한국 사람은 기름짜고 남은 것에 쌀을 넣어 먹는데 그것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그런 세월이 흘러갔다”고 말했다.

이어 “이것이 과연 참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사과를 받고 손을 싹싹 비는 모습을 봐야 하는지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면서 “그들이 생각할 때 한국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인간에 자유가 있다고 해도 자유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할아버지는 지난 1944년 8월께 목재를 실어 나른다는 설명을 듣고 회사 트럭을 타고 갔다가 집에 연락도 하지 못하고 청년 200여명과 함께 미쓰비시조선소에서 강제징용을 당했다. 김 할아버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압적인 규율을 받으며 생활했고, 작업 중에 사고를 당했지만 병가를 받지 못해 다음날에도 출근해 일했다.

이후 1945년 8월9일에 공장에서 작업 중에 나가사키 원폭투하로 피폭을 당했지만 목숨을 건지고, 같은해 10월20일께 동료들과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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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옥성구 기자 = 일본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일제강제동원 사건 추가소송 제기’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 등은 이날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19.04.04. [email protected]

이날 함께 소송을 제기한 김용화(90) 할아버지도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를 보호해줘야 하는데 일본은 악용해서 노예화했다”며 “일본은 마땅히 보상해야 하고, 보상 이전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김용화 할아버지도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에서 강제징용을 당했다.

민변 측은 “대법원 판결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정당성을 다시금 확인했다”면서 “일제강점기 시대 이 땅에서 자행됐던 강제동원은 인권의 관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러나 강제동원에 책임 있는 어떤 주체도 사과나 배상에 나서지 않는 현실은 여전하고, 가해 기업들은 대법원 판결 후에도 손해배상채무의 임의 변제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피해자 다수는 피해 회복을 받지 못한 채 눈감고, 기록되지 못한 역사도 사라지고 있어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해 소 제기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10월30일 이춘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각 1억원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며 강제징용은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므로 1965년 한·일 정부 간 청구권협정이 있었더라도 개인별 위자료를 요구할 수 있다고 봤다.

한편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판사 설범식)는 이날 고(故) 홍모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14명과 그 가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2차 변론을 열었다.

홍씨 등의 대리인은 “대법원 판결도 나오고 해서 가급적 포괄적 화해를 하려고 한다”며 조정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미쓰비시 측 대리인은 “일본에서 부정적 답변이 왔다”고 조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했다.

재판부는 “더 이상 사실관계나 법리 문제에 주장할 것이 없으면 사건을 종결하겠다”며 “미쓰비시 측이 조정 의사가 있으면 중간에 조정기일을 잡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선고는 오는 6월27일 진행될 예정이다.

[email protected]

<2019-04-04> 뉴시스 

☞기사원문: 강제징용 피해자들 추가 손배소…”日, 짐승 취급했다” 

※관련기사 

☞경향신문: “개·돼지 대우도 못 받고 살았다” 강제징용 피해자들, 전범기업 상대 추가 소송 제기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전범기업들 상대 또 소송 

☞뉴스1: 일제징용 피해자들 日 전범기업에 추가 소송…”짐승처럼 부려” 

☞SBS: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전범 기업들 상대 또 소송

목, 2019/04/0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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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융화의 상징으로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최초 외교관으로 발탁

일제가 어떻게 친일파를 양성했으며, 지식인은 어떤 과정으로

친일파가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유툽과 팟빵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월, 2019/04/1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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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희’와 ‘철수’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작은 출판사의 꿈 – 출판사 <철수와 영희> 박정훈 대표

 

지난 10월 11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판사 <철수와 영희> 박정훈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월간 <작은책>, <보리 출판사>등에서 10여 년 동안 근무하다 2006년 사회과학 출판사 <철수와 영희>를 차렸다. 2013년에 도서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김삼웅 엮음)을 제작하며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여 지금껏 후원하고 있다. 매달 연구소에 박 대표가 출판한 책을 한 권씩 기증한다.


 

문 :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어떤 책을 만드는 출판사인가요.

답 : <철수와 영희>는 어린이 ‘영희’와 ‘철수’, 어른 ‘철수’와 ‘영희’가 건강하게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움이 되는 책을 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6년 8월 15일 출판사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130여 종의 어린이, 청소년, 성인을 위한 인문, 사회, 생태 도서를 펴냈습니다. 대표 도서로는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최종규 저),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노정임 저),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이철수, 하종강, 배경내, 송승훈 저), <10대와 통하는 동물 권리 이야기>(이유미 저) 등이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어린이, 청소년 도서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에게 사회과학책은 생각을 강화할 뿐 바꾸기는 어려운데 어린이와 청소년은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시기라 책의 영향력이 더욱 큽니다. 그래서 저희 출판사의 청소년 책들은 한국의 청소년들이 꼭 알아야 할 정치, 역사, 사회, 종교, 환경 등의 주제로 여러 시리즈를 펴내고 있으며 모두 국내 저자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을 잘 담기 위해서는 국내 저자가 집필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문 :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요. 2014년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었습니다. 현재 출판계 상황이 어떤가요.

답 :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교과과정과 연계한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의무적으로 한 학기에 책한 권을 읽도록 권장합니다. 성인의 독서량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초중고생의 독서량이 없는 편은 아닙니다.
또 저희 출판사는 도서정가제의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서정가제 이전에 어린이 책 같은 경우 보통 책 가격의 절반을 유통 도매상에서 떼어갔는데요. 이밖에 학부모회 같은 곳에 도서 가격의 몇 프로를 기부하거나, 학교 같은 곳에서 도서를 할인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어요. 소비자는 가능하면 책을 싸게 구매하려고 하죠. 그럼 자연스럽게 업체들 사이에서는 할인율 싸움이 생기는 거예요. 이 할인율 싸움에서 유리한 건 대형출판사입니다. 대형출판사는 책을 많이 찍는 만큼 권당 제작비가 적게 들어요. 작은 출판사가 대형출판사를 가격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서 할인 폭을 규제하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가격 경쟁에서 한층 자유로워져 서적 공급가를 높일 수 있어요. 서점에게 할인하지 않으니 수익률이 높아지고, 공급가를 높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죠. 이렇게 가격보다 책의 질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서 저희 출판사는 오히려 혜택을 보았습니다.

문 : 출판업계에 더 필요한 제도가 있을까요

답 : 아직 도서 유통 도매상에서는 어음을 지급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처음 출판사를 시작 하시는 분들이 도매상과 거래하면 어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공급가를 낮춰서 현금으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렵죠. 각 지역으로 분산된 모든 서점과 직접 거래할 수 없기에 도매상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출판사가 도매상에게 어음을 받으면 저자분들과 기타 거래처에 돈을 지급할 수 없어요. 게다가 어음으로 거래하면 다른 책을 새로 제작하는데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 가치를 두며 책을 만들고 있는데 이 어음 관행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더는 어음을 받지 않습니다. 도매상에게 거래 정지를 당하고 정상화되는 등의 과정을 견디며 중간 협상을 했
습니다.
다른 하나는 도서관을 늘리고 사서를 정규직화 하는 것입니다. 괜찮은 책을 만들면 도서관에 납품
됩니다. 도서관 콘텐츠는 그곳 사서가 고르고요. 특히 어린이 책은 아이가 스스로 책을 사지 않고, 가이드가 필요해서 학교나 도서관에서 선정한 책을 부모가 구매합니다. 도서관 선정 도서의 중요성이 큰데
사서는 비정규직이 많습니다. 사서가 정규직이 되면 양질의 도서를 판단하고 도서관 구성 콘텐츠를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나아집니다. 그러면 출판사는 책의 질로 경쟁하게 되어 도서 질이 높아지고 도서관은 좋은 책을 소장할 수 있어 서로가 좋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문 : 출판사를 운영하며 어려운 상황도 있었나요

답 : 저희 책들이 좌편향 불온도서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13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던 때 조선일보에서 사회면 전체를 할애해 “어린이 역사책도 좌편향 심각”이라는 타이틀로 대문짝만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우리 출판사 책과 함께 9종의 어린이 역사책을 소개하며 어린이 역사서 상당수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폄하했다는 등의 이유로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좌편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판매 부수와 관련한 출판사 인터뷰를 인용해 이렇게 많이 팔린 책들이 좌편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도 이 기사는 큰 반향이 없었어요. 2015년 상황이 더욱 심각했죠.
2015년 문화일보에서 우리 도서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이야기>(이임하 저)에 대한 기사를 실었어요. 이 도서는 부산시 교육청이 지정한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있었는데 문화일보에서 책의 좌편향이 의심된다고 보도하자 청소년 추천도서 선정이 취소되었어요. 그게 문제를 더 촉발해서 문화일보 3회, 조선일보 3회, 동아일보 2회, 중앙일보 1회, 세계일보 1회 등 일주일 동안 수십 건의 기사가 신문과 방송에 나왔습니다.
문화일보는 우리 책이 6.25가 남침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남침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본문에서 세 차례나 나옵니다. 이들 언론은 사실과 다르거나 앞뒤 문맥을 자르고 짜깁기하는 등의 왜곡 보도를 했습니다.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문화일보에서는 저자인 이임화 선생의 교수직에 의문을 품는 기사까지 썼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자를 위협하는 일까지 생길 것 같아 반박 자료를 만들어 한겨레와 경향에 들고 갔어요. 왜곡 보도를 계속하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기사를 내면서 상황이 조금 누그러들었죠.

그해에 다시 ‘스토리케이’라는 보수단체가 우리 출판사 책 3종을 또 좌편향으로 규정하여 역시 조선, 동아, 문화일보 등에 의해 기사화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 책이 좌편향으로 분류된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이 삽화로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TV 등을 통해 전 국민이 보았던 장면이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사진으로 실려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쨌든 언론 보도에 놀란 경기도교육청은 관내 초, 중, 고등학교에 공문을 보내 관련 도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학교별로 폐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실제 관련 도서들이 경기도 관내 도서관에서 폐기되고 빠지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후 도서관 사서들과 독서운동단체의 문제 제기로 다행히 이 공문은 철회되었습니다.

문 : 국정화 교과서 논란 속에서 고비가 많았군요. 이들 논란은 종식되었지만, 현재 출판사에서 ‘국방부
불온서적’ 관련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답 : 2008년 국방부가 23종의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했던 사건이 유명했습니다. 국방부는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라는 이유를 들어 21군데 출판사의 23종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군내 반입을 금지했는데, 이것이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 파문을 불러왔었죠. 결국 해당 도서를 펴낸 출판사 중 11군데 출판사와 11명의 저자가 2008년 10월 국방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는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정태인, 하종강, 이임하 저)가 불온서적 리스트에 들어있었고 소송에 참여했습니다. 이 소송은 1심과 2심에서 “국방부장관의 불온서적 지정이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패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1, 2심까지 패소한 후 4군데의 출판사가 상고를 포기해 대법원까지 상고한 출판사는 이제 7군데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자 한 분이 돌아가셔서 10명의 저자가 상고한 상태입니다. 지난해 대법원에서는 원심법원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서울고등법원으로 사건을 환송했습니다. 기나긴 법정 싸움이 여전히진행 중입니다.

 

문 : 2008년의 불온서적 재판이 여태껏 종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책을 내
고 계시고 출판사는 안정적으로 운영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답 : 같은 지향점을 가진 분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업하여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철수와영희>에서 책 출간 아이템을 정하고 책을 만드는 과정은 끊임없이 편집자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과정입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것을 책을 만드는 과정마다 배우게 됩니다. 신인 저자들을 발굴해 여러가지 기획을 하는 과정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10대와 통하는 성과 사랑>(노을이 저)과 <10대와 통하는 음식이야기>(박성규 저)는 신인 작가인 부부의 책입니다. 노을이 씨가 먼저 쓰시고 반응이 좋아 남편분인 박성규 씨께도 집필을 부탁드려 다음 책이 나오는 데 4년 걸렸습니다. 신인 저자들은 느리더라도 부분 부분을 주의 깊게 제작합니다. 이런 책들을 더 많이 내고 싶어요.
처음 출판사를 차렸을 때 10년 이상 가는 책을 2, 3권이라도 건지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소망이 몇 배 이상 이루어졌어요. 모두 <철수와영희>를 성원해준 독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펴내는 책들도 10년 이상 갈 수 있도록 더 새롭고 참신한 기획으로 책을 펴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 출판사 책을 믿고 격려해주시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화, 2019/10/2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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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1 ]

철도순직자조혼비, 조선철도 1천리 돌파가 남긴 기념물
해마다 용산철도공원에서 벌어진 철도순직자조혼제의 풍경

이순우 책임연구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도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편찬한 <신자전(新字典) >(1915)의 말미를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색달라졌거나 새로 창안되어 일본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여러 한자어들을 따로 묶어 수록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달러(dollar)를 불(弗)로 쓴다거나 센트(cent)를 선(仙)으로 표기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서양식 미터법의 도입에 따라 미터(m)는 미(米)로, 그램(g)은 와(瓦) 또는 극(克)으로, 리터(ℓ)는 입(立)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령 천(粁)과 같은 글자인데, 미터(米)가 천(千)개 모여 있는 모양이므로 이는 곧 ‘킬로미터’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천(瓩)이라는 글자 역시 그램(瓦)이 천(千)개이므로 ‘킬로그램’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어에도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촌(寸, 치)이나 척(尺, 자)과 같은 재래식 단위표기의 개념을 결합 활용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는데, 예를들어 촌(吋)은 인치(inch)이며, 척(呎)은 피트(feet)이며, 마(碼)는 야드(yard)이며, 리(哩)는 마일(mile)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영국(英國)에서 건너온 단위이므로 대개 촌(吋)은 영촌(英寸)이라 하고, 척(呎)과 리(哩)는 각각 영척(英尺)과 영리(英里)라고 적어도 상관이 없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식 표기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영역의 하나가 바로 철도 관련 분야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철도라고 하면 종주국이라고 하는 영국의 영향이 월등히 큰 측면이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유달리 미터법보다는 야드 파운드법이 선호되는 경향이 우세했다. 따라서 정거장 사이의 거리라든가 철도선로의 총연장은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몇 마일로 기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5년 7월 23일자의 제1면 상단에는 ‘조선철도 일천리 개통기념(朝鮮鐵道 一千哩 開通記念) 철도대경주(鐵道大競走)’ 행사를 예고하는 안내 문안이 큼직하게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1천 리’는 ‘1천 마일’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는 곧 ‘1,609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호남선(湖南線, 1914년 1월)과 경원선(京元線, 1914년 8월)이 잇따라 개통된 데에 이어 1914년 10월부터 착공한 함경선(咸鏡線)의 원산 문천 구간 12.5마일이 1915년 8월 1일에 부분 개통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관의 철도영업이정(鐵道營業哩程)은 마침내 1,000마일을 돌파하여 총누계 1,006마일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개 산업의 개발과 문화의 보급이 교통운수의 진보에 의지하는 바가 크고, 특히 지방에서는 교통의 발달이 개진(開進) 방법의 최대요건이라 일컬어진다는 뜻에 따라 철도영업거리가 1천 마일을 돌파한 것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종관선(朝鮮縱貫線)은 부산의 해륙연락설비와 압록강의 대가교(大架橋)를 통해 유라시아 대교통로 간선철도(歐亞 大交通路 幹線鐵道)의 일부로서 지대한 가치를 지닌다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의 이면에는 “조선의 재력(財力)과 부력(富力)의 정도에 비하면 1천 마일의 철도를 가진 것 자체가 조선통치 5년간의 치적에 있어서 가히 자랑거리의 하나가 됨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자화자찬식의 인식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큰 경사이니만큼 때마침 총독정치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에서 거행되는 시정오년기념(始政五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 맞춰 성대한 축하회와 더불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려는 계획이 진즉부터 추진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한창 공진회가 진행중이던 1915년 10월 3일에는 일본 황족 칸인노미야(閑院宮)와 이른바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순종)’, 그리고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 등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일제히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철도 1천리 기념축하식이 거행되고, 경회루에서는 축하연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튿날인 10월 4일 오후 2시에는 철도국 소관 용산철도정원(龍山鐵道庭園, 나중의 용산철도공원)에 건립된 조혼비(弔魂碑) 앞에서 제막식을 겸해 철도순직자조혼제(鐵道殉職者弔魂祭)가 열렸고, 곧이어 이웃하는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로 자리를 옮겨 국원공적표창식(局員功績表彰式)이 진행되었다.

이때 제막된 ‘조혼비’는 추풍령(秋風嶺)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총 높이가 41.6 척(尺; 12.6미터)에 달했으며, 비면의 글씨는 데라우치 총독이 쓴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총독부 철도국 장관 오야 곤페이(大屋權平, 1862~1924)가 지은 비문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비석의 앞면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백작의 휘호이다. 조선철도는 경인선으로 효시를 삼는다. 이윽고 경부철도의 부설계획이 있었는데, 이때 일로(日露,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國交)가 장차 위태로워지려 하매 우리 정부(일본정부)는 곧 보조 공비를 내어 이를 서둘러 완성하려했다. 오래지 않아 간과(干戈, 방패와 창)가 충돌하여 향도(餉道, 군량을 나르는길)가 긴급을 요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다시 육군으로 하여금 경의, 마산 양 철도의 속성을 서둘러 동사자(董事者)는 밤낮으로 병마(兵馬)를 바삐 분주하게 한 사이에 3선은 모두 완성되었다. 평화극복 후에 여러 선로는 국유(國有)로 귀속되고 통감부를 거쳐 총독부 관리로 옮겨졌다. 기설선로가 개수되었고, 압록강 갑교(閘橋)가 가설됨으로써 유라시아대륙과 연락이 되고 국제철도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남, 호남, 경원 3선로가 완성되고 다시 함경선의 기공으로 나아갔다. 이 사이에 봉공순직(奉公殉職)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은 절개를 어찌 백전무공(百戰武功)이라 하지 않으리. 이에 철도 일천리의 가신(佳辰, 경사)을 맞이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동도지은(同道之恩)을 오래도록 기록하노라.
대정 4년(1915년) 10월 조선총독부철도국장관 공학박사 오야 곤페이 짓고 쓰다.

 

이로부터 해마다 10월 4일에는 이곳에서 철도종사자로서 철도건설이나 유지보수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운수업무에 종사하다가 순직한 이들에 대한 조혼위령제가 꼬박꼬박 거행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만, 1937년에 총독부 철도국이 경인철도 시절에 노량진 제물포 구간을 처음 운행한 날인 9월 18일을 택하여 ‘철도기념일(鐵道記念日)’을 새로 제정한 것에 영향을 받아 1940년 이후로는 바로 이 날짜에 조혼제가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로 해마다 증가하는 철도순직자의 추이를 따로 집계할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1940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 숫자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현상만큼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2년에 누적 순직자는 2,790명(전년대비 +146명)이었던 것이 1939년에는 4,137명(+296명)으로, 다시 1943년에는 조혼제의 합사자(合祀者)가 6,132명(+593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절대 규모면에서 1915년 최초의 조혼제 당시 철도순직자의 총수가 635명이었다는 점과도 크게 대비가 된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조선경찰협회와 조선소방협회의 주관으로 해마다 경복궁 근정전 용상에
제단을 설치하고 행사를 치른 순직경찰관 경방직원초혼제(警防職員招魂祭)의 경우, 1944년 10월 현재 순직경찰관이 403명에 순직소방수가 55명으로 이를 모두 합쳐도 458명 정도의 규모였다. 이러한 사실과 비교하면, 철도순직자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실감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곳 조혼비가 자리한 용산철도공원 일대(지금의 ‘한강로 3가 65번지’ 철우아파트및 용산세무서가 자리한 위치)는 야구대회나 자전거경주 등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풀장이 마련되어 이곳에서 수영대회가 열리거나 근처의 연못에서 아이스하키 대회가 거행된 시절도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자에 연재된 「10주년 기념 조선야구사(朝鮮野球史), (10) 조선 최초의 야구대회」 제하의 기사를 보면, 1915년 6월 13일에 조선공론사(朝鮮公論社)가 전조선야구대회(全朝鮮野球大會)를 최초로 이곳 용산철도공원, 속칭 ‘구(舊) 그라운드’에서 개최하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때 참가단체로는 철도구락부청년단, 체신구락부, 조선은행군, 경성중학, 경성실업구락부군, 철도구락부소년단 등 여섯 팀 이외에 조선인 단체로 오성친목회군(五星親睦會軍)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이곳은 용산 병영지의 인접지역에 자리한 탓에 이곳에 일본군 병력이 집결한 흔적도 곧잘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16년 4월 15일자에는 신설되는 제19사단 병력과 종전의 조선주차 제9사단 병력이 교대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환송 및 환영을 위한 대원유회(大園遊會)가 용산철도공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30년 10월에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란 대규모 군사훈련이 거행될 당시에는 이 일대에서 고사포대(高射砲隊)가 진지를 펼친 한편 훈련참가부대의 강평회(講評會)와 야연(野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시기에 이르러 일제가 용산철도공원에 조성했던 철도순직자조혼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별도의 순직비가 조성되고 순직철도종사원에 대한 합동추도식이 해마다 재연된 흔적이 완연히 포착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향신문> 1955년 9월 18일자에 수록된 「합동위령제 엄수, 철도사고 순직자」 제하의 기사는 어떠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에 대한 위령제가 재개된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교통부에서는 1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에 있는 동부(同部) 후정에서 제3차(회) 순직자합동위령제(殉職者合同慰靈祭)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금번 위령제는 (단기) 84년(1951년) 9월 1일 이래 철도운수사업에 종사하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141주(柱)의 영령을 추도하기 위한 것으로 위령제가 끝난 후 유가족들에게는 광목(廣木) 반 통과 기타 물품이 증정되었으며, 특히 동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내 극장에 안내하고 이들에게 위안의 하루를 보내게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교통부(交通部)의 후정(後庭)이라고 하는 곳은 ‘한강로 3가 63번지 구역’에 자리한 교통고등학교 구역을 가리킨다. 1953년 7월 부산에 피난중이던 정부가 환도(還都)할 적에 오갈 데가 없어진 교통부가 용산의 교통학교 교재전시장(敎材展示場)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을 새로운 청사로 삼아 터를 잡았고, 그 후 1963년 9월 1일에는 철도청(鐵道廳)이 발족하면서 교통부 청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위령제가 벌어지는 공간은 시기에 따라 교통부 후정이나 철도청 뒷마당으로 표기되었고, 또 어떤 때는 순직비의 소재지가 철도고등학교 교정(校庭)이라거나 교통공무원교육원 뒤뜰로 표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기가 실제로 다수의 철도순직자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일제의 유습(遺習)이 분명했던 철도순직자 조혼제의 관행은 그 유래를 따질 겨를도 없이 불과 7, 8년 사이에 고스란히 부활하는 상황이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 2019/10/30-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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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가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입니다. 이를 철회하려고 하남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친일부역자의 생가터와 추모비를 철회시키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주실 수 있는 분들은 힘이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 2019/04/0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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