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일본공사관원의 눈에 비친 근대 조선의 모습,

지역

일본공사관원의 눈에 비친 근대 조선의 모습,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5:53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9

01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교제관시보이던 하야시 부이치의 유고 사진집 <조선국진경> (1892)의 표지

 

02

1882년 재동에 설치된 ‘외아문’의 대문 모습. 대문 기둥에 걸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또렷하다.

03

‘기보포정사’라는 편액이 내걸린 경기감영 대문의 모습

 

04

서울 남산에 있던 일본공사관 구역 안에서 외아문 독판 민종묵(한복 차림)과 서울주재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청국주차조선총리 위안스카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선국진경>을 남긴 일본공사관원 하야시다.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그가 평소 여가를 활용하여 담아낸 120여 장의 조선 관련 사진자료 가운데 이를 선별하여 그의 처 하야시 카메코(林龜子)가 유고 사진첩으로 묶어낸 것이 바로 ????조선국진경????이었다.
이 사진첩에 수록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서울 도성의 각 성문을 비롯하여 경복궁 광화문과 창경궁 홍화문, 그리고 동묘 남묘 세검정 영은문 남한산성 등과 같은 여러 문화유적의 옛 모습이 담겨 있다. 대개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그의 조선주재 시기에 비춰 촬영시점이 명확하게 파악되므로 이들 유적의 원형고증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정동 일대에 포진한 각국 공사관의 전경은 물론이고 용산과 마포 일대의 강변풍경과 부산, 인천, 강화 등지를 포함하여 저 멀리 거문도와 제주도의 풍광까지도 두루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남산 부엉바위약수터의 모습이라든가 초가집에 파묻힌 원각사탑(지금의 탑골공원 자리)과 조대비(익종비)의 장의행렬과 같은 이색적인 장면도 담고 있다.
또한 이 사진첩의 강점은 여느 사진자료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공간들의 모습을 다수 채록해두고 있다는 점인데, 예를 들어 훈련원 청사와 하도감의 전경, 그리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든가 경기감영의 대문 사진 등이 그것이다.
흔히 ‘외아문(外衙門)’으로 불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개항기의 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882년 12월에 재동에 있는 민영익의 집터(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치한 중앙행정기구이다.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외무아문(外務衙門)’으로 고쳤다가 다시 1895년 7부 편제로 전환할 때 ‘외부(外部)’로 개칭되며, 그러다가 1896년 6월에 이르러 광화문 앞 옛 이조 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요컨대 ‘외아문’은 세계열강과의 교섭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이들을 상대로 한 외교업무를 전담했던 주요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기관에 관한 사진자료는 퍼시벌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에 수록된 단 한 장의 사진을 빼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바로 하야시가 남긴 이 사진첩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는 외아문의 대문 모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진의 희소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것 말고도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라고 새긴 편액이 달린 경기감영의 대문 모습도 크게 눈길을 끄는 사진자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보’는 경기도를 가리키며, ‘포정사’는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으뜸 관아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따지고 보면 ‘경교장’이라는 명칭의 어원도 바로 이곳 경기감영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이곳의 옛 모습은 대개 1902년 한성부 청사가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의 것만 더러 남아 있을 뿐 명실상부하게 경기감영 시절의 것은 제대로 구경해 보질 못했다.
일본공사관원이던 하야시가 짬짬이 채록한 이러한 사진자료들은 애당초 점차 자기네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고 있는 ‘잠재적 식민지’ 조선에 대한 충실한 정보보고의 용도로 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땅의 옛 모습을 사진자료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 셈이다. 마치 일제가 문화침탈을 위해 제작 배포한 ????조선고적도보????가 오늘날 유적지 복원의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근대 사진첩의 양면성은 대개 그러한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출처: 김정육 구술/서혜원 기록,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헌법 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0401-4

▲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자제인 김정육 선생

연좌제는 1981년 3월 25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연좌제는 개인의 범죄를 가족·친지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형벌이다. 조선시대 삼족을 멸하던 악독한 형벌은 한차례 폐지된 적 있으나 그것이 가진 성격만치 끈질겼던 터라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연장해나갔다. 그리고 1950년대 무렵, 처음으로 내가 연좌제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등고시를 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신원증명서를 발급받을 때였다. 담당자는 한참이 지나도 발급을 못하고 갸웃거렸다. ‘신원조회 불가능.’ 고시를 치기도 전에 자격을 박탈당했다.

왜 시험을 치지 않느냐는 친구들에게 속사정을 말하지 못했다. 연좌제에 걸려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면 혹여 다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연좌제에 걸린 이는 호적부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빨간 줄을 가진 채로는 여행은커녕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국내를 돌아다닐 때는 승인을 받아야 했다. 친일 경찰들이 빨갱이를 소탕하러 활개치던 시대였다. 그들은 마음대로 남의 가정집을 들쑤시며 시찰을 돌았다. 나라 팔아먹은 자들이 나라 지키던 분의 후손을 검문했다. 수상한 시절이었다.

아, 되짚을 말이 생겼다. 내게도 꼬리표가 있었구나. 시찰 대상이라는 꼬리표. 아버지에게도 비슷한 게 달려있었는데 좀 더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살생 대상이라는 꼬리표. 남한 정부가 수립된 뒤 아버지는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갑작스레 집에 방문했다. “친일 군경들을 건들지 말아라.” “장관 자리를 줄 테니 하지 말아라.”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는 이 대통령의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 이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반민특위 사무실이 습격당했다. 수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전국에서 온 친일행위 고발문은 불태워졌다. 아버지는 테러리스트의 살생부에 올랐다. 아버지는 결국 위원장 자리에 사표를 냈다. 아버지의 살생 딱지는 그 자취를 감추기에는 억울해 나에게까지도 미약하게 이어졌나 보다.

한때 대학에 입학한 적이 있다. 어릴 적 나는 김구, 신익희 등 알만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랐다. 한문이든 법이든 정치든 대단한 분들을 보고 터득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물려받아 법학도를 꿈꿨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대학 등록금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밥걱정에 시달려온 내가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막내가 영양실조로 굶어죽은 뒤 근사한 밥을 먹었던 기억은 한 번뿐이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우리 남매를 고아원에 위탁하기 전, 누나와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맛있게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독립운동가가 자식을 삼시세끼 먹일 수 있는 선택은 그뿐이었다. 따뜻한 밥이라니 얼마나 생소한 말인지. 결국 대학을 관둬야 했다. 밥벌이가 시급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은 공사판이었다. 신원증명서 없이 일을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고마운 직장이었다.

“중동에 가면 떼부자로 돌아온다.” 말단으로 들어가 현장소장으로 오른 내게 중동 공사 참가 제의가 들어왔다. “글쎄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딴 사람을 보내시죠.”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욕심이 없는 척 묵묵히 일했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어떻게 속상하지 않았을까. 결혼했고 안정된 가정을 원하던 처지였다. 하지만 중동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조금 지나 건설현장의 예산제도가 바뀌면서 일한 만큼 돈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성내동에 13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약 40년 동안 꿈에만 그리던 내 집이었다. 뒤늦게 자식도 보았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내가 쓰러졌다. 급성 신부전증이었다.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는 계속 공사판 일을 할 수 없었다. 멀리 떠나지 않고 오후에 아내 곁에 머물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신문지 돌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돈을 더 벌고 싶어 신문 속지를 끼우는 작업을 추가로 맡았다. 이 작업을 하면 70만 원 정도가 들어왔다. 대신 속지작업이 끝나는 대로 새벽 배달을 나가야 하니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힘든 티를 낼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아들이 새벽에 내 뒤를 몰래 따라와 일을 훔쳐보고 있었다. 결국에는 아버지를 돕는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속지작업을 도왔다. 돈을 그렇게 어찌어찌 벌었다. 아내에게 신장을 이식해 줄 은인도 나타났다. 무명의 천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민주당 총재의 부인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구제하라.”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 아내의 신장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역시 길지 않았다. 아내는 2005년 10월 18일 13시 32분 세상을 떠났다. 이따금 아내가 눈을 감은 날짜를 소리내서 읊어본다. “이천오년 시월 십팔일 십삼시 삼십이분.”

그전에 아버지 얘기를 빠뜨렸다. 아버지는 1990년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받았다’는 말은 어쩐지 순순하게 들리니 ‘받아냈다’고 쓰겠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에 있던 자료를 전부 보훈처로 보냈다. 얼마 기다리자 보훈처에서 심의중이라는 우편이 날라왔다. 그리고 그해 4월, 드디어 아버지의 국민장 서훈이 결정 났다. 국민장은 3급짜리 훈장이다. 뭐 이런 급수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별세한 5·16 쿠데타의 중심인물인 김종필 국무총리는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김 총리가 가담한 일과 아버지가 해온 일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하튼 나는 살아왔다. 올해 85세가 되었다. 사실 내 호적은 몇 번이나 장난질 쳐져 실제와는 다르지만 호적상 여든 다섯이다. 이 나이를 먹어서야 몇몇 사람들이 찾아온다. 내가 살아온 시절을 듣고 싶다고 한다. 구전동화 읊듯이 이야기를 한다. 으레 사람들은 마지막 질문으로 이런 말을 한다. “정부에게 원하는 것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연좌제에 묶여 산 세월을 보상받으셔야죠.” “명예회복이 필요하지 않나요.” 고래를 가로젓는다. “내 평생 요즘처럼 정부에서 오는 공문이 친절한 적이 없어요.” 이전 세월 내가 정부에 탄원을 낼 때마다 답변을 받고는 화가 치밀지 않은 적이 없다. 아버지와 나를 짐짝처럼 처리하던 이들이 그래도 요즘은 같은 말일지언정 돌려가며 이야기한다. 더 바랄 것도 없다. 나이 여든을 넘겼다. 그저 고민은 내년 만기되는 아내의 무료 묘자리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것이다. 한 푼 두 푼 모으면 아내를 편안한 안식처로 모실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나를 남겨두고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린다. 배급소에서 아비를 돕던 착한 아들. 그가 남긴 어여쁜 손녀 손자. 김예일리와 김선리. 녀석들에게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아직 어린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모를 이야기를 내 손으로 모두 적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나는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

0401-6

▲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정육 선생의 아버지는 김상덕 지사(1891~1956. 경북 고령 출신)이다. 김 지사는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 대표 11인 중 한 명이었다. 2·8독립선언으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의 최고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윤봉길 의사의 폭파 의거 후 한중 연합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장을 지냈다. 해방 후 고향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친일 척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러다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평양 교외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제308호, 2019.3.25.)

월, 2019/04/01- 14:26
22
0

寄友人(기우인)

 

草屋梅花發(초옥매화발)

南窓寄友人(남창기우인)

君吾爲李杜(군오위이두)

共醉詠芳春(공취영방춘)

 

벗님에게 띄우는 글

 

草屋에도 고운 매화 활짝 피니

남쪽 窓에서 벗님께 글 띄우네

그대와 나 李白과 杜甫가 되어

함께 취해 아름다운 봄을 읊세.

 

<時調로 改譯>

 

草屋에도 매화 피니 南窓에서 글 띄우네

그대는 李白이 되고 나는야 杜甫가 되어

둘이서 함께 취하여 아름다운 봄을 읊세.

 

*友人: 벗 *南窓: 남쪽으로 난 窓 *李杜: 李白과 杜甫 *芳春: 꽃 피는 아름다운 봄.

 

<2019.4.1, 이우식 지음>

월, 2019/04/01- 11:56
6
0
0206-4

)

홍용덕
전국2팀 선임기자

인천공항에서 중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이면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에 닿을 수 있다. 125년 전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친 청일전쟁(1894~1895·중국은 갑오전쟁, 일본은 일청전쟁으로 부름)의 승패가 결정된 곳이다. 일본군이 랴오둥반도에 이어 청나라 해군의 주력기지인 이곳 웨이하이의 류궁다오(유공도)를 점령하자, 청은 실권자인 리훙장(이홍장)을 일본에 보내 강화에 나선다.

류궁다오는 웨이하이에서 배로 15분 거리다. 중국은 1985년 이 섬에 청일전쟁을 기억하는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을 지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크기로 청일전쟁 관련 유물 1천여점을 전시하는데, 패전기념관치고는 규모가 상당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잠자는 중국의 천년 꿈을 깨운 것은 갑오전쟁”이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청의 사상가 량치차오(양계초)의 글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입해 인조를 무릎 꿇게 한 청의 기세등등함이 이 박물관에는 없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평양과 황해에서의 패전, 뤼순(여순)대학살, 청일전쟁 패배 이후 열강의 반식민지가 된 늙은 제국의 고통만이 손에 닿을 듯 펼쳐진다.

21세기 미-중 패권경쟁에 나선 중국이 왜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을까. 궁금함이 풀린 것은 기념관 출구에 적힌 ‘물망국치 원몽중화’란 글을 보면서다. ‘국가의 치욕을 기억해 중국의 꿈을 이루자’는 그 말은 애국주의를 선동하는 이른바 ‘국뽕’ 냄새가 다분하지만, 국가의 수치를 미래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간절함만은 전해진다.

일본으로 건너간 리훙장이 도착한 곳은 부산 맞은쪽의 시모노세키다. 이곳에서 육순의 노인은 랴오둥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내주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고, 일본은 당시 협상장이던 산기슭에 ‘일청강화기념관’을 세웠다.

0401-11

▲ 중국갑오전쟁박물관.

무심코 지나쳤다 찾은 단층 건물의 전시실에는 1895년 조약 협상이 이뤄진 협상장이 복원돼 있다. 패자의 웅대한 박물관에 견줘, 승자의 기념관은 내용이나 규모에서 초라하다.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고 15년 뒤 한반도를 강제병합하며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출발점이 청일전쟁이었음을 감추고 싶은 속내가 보이는 듯도 하다.

부끄러운 역사를 치열하게 되새김하는 중국, 이를 축소하고 숨기는 일본 사이에 낀 우리는 어떤가.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골목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지난해 8월 문을 연 국내 유일의 일제 침략과 독립운동사를 보여주는 전문 박물관이다. 5층 건물 중 2층 상설전시장에는 400여점의 자료가 전시 중인데 ‘친일과 항일’의 흔적을 담기에는 그 공간(240㎡)이 비좁아 보인다. 수장고에는 10만여점의 자료가 묻혀 있다.

0401-11

▲ 친일인명사전. 한겨레

이 작은 공간 하나를 여는 데도 긴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11년 시민 모금에 나섰고 박물관 건립에 7년이 걸렸다. 시민의 힘으로 세운 이 박물관은 방문객을 위한 주차 공간은 고사하고 건물을 사느라 빌린 20억여원의 이자를 다달이 내는 일도 버겁다.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려는 시민들만의 노력은 여전히 힘겹다. 국가의 친일청산 노력은 또 어떤가.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이 출범하며 사라졌다. 정부가 처음으로 반민족행위자 1007명을 선정했으나, 추가조사는 물론 당시 확인된 반민족행위조차 국민에게 교육하고 알리는 일도 흐지부지됐다. 반민족적 행위로 얻은 재산을 조사할 친일재산조사위원회도 사라졌다. 국가의 친일청산 시계는 10년 전에 멈춰 서 있다.

오는 11일이면 상하이(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돌이다. 중국 대륙 수만리 피난길에서도 독립된 나라, 정의로운 나라를 꿈꾼 선열들의 바람과 달리, 우리는 지금도 제1야당 원내대표가 “(친일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다”고 버젓이 말하는 ‘망언의 시대’를 살고 있다. 멈춰 선 시계를 다시 돌려야 할 때다. [email protected]

<2019-03-31> 한겨레 

☞기사원문: [한겨레 프리즘] 멈춰선 시계를 돌리자 / 홍용덕

월, 2019/04/01- 20:52
21
0

懇請北韓諸人民軍隊總蹶起

 

正恩家運盡(정은가운진)

不可逆天心(불가역천심)

極限人民苦(극한인민고)

哀哉淚滿襟(애재루만금)

 

북한의 모든 인민 군대에게 총궐기할 것을 간청함

 

김정은의 집안 運 이제 다했으니

하늘의 마음은 거스를 수 없다네

인민의 괴롬 궁극 한계에 이르러

슬프다!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時調로 改譯>

 

김정은 運 다했으니 저 하늘 뜻이라네

인민들의 그 괴롬 궁극 한계에 이르러

슬프다! 눈물이 흘러 옷깃에 가득하네.

 

*懇請: 간절히  청함. 또는  그런 청(請) *總蹶起: 모두 참여해 힘차게 일어남. 또는

그런  행위  *家運: 집안  운수  *不可逆: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 상태로 돌아

수 없는  일.  비가역(非可逆)  *天心: 하늘의  뜻.  천의(天意). 눈에 뵈는 하늘 한가운

  *極限: 궁극의 한계. 사물이 진행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나 지점을 이름.

 

<2019.4.1, 이우식 지음>

월, 2019/04/01- 20:11
17
0

告朝家(고조가)

 

自派無高傑(자파무고걸)

非人作長官(비인작장관)

民心離叛甚(민심이반심)

未久味辛酸(미구미신산)

 

朝廷에 告함

 

자기 쪽의 系派에는 인물 없으니

사람답지 못한 者도 長官이 되네

백성들 마음 떠나 배반함 심하니

未久에 괴로움, 쓰라림 맛보리라.

 

<時調로 改譯>

 

自派엔 無高傑이니 폐인도 長官 되네

백성들의 마음 떠나 배반함이 심하니

未久에 괴롬과 쓰림 맛보게끔 되리라.

 

*朝家: 조정(朝廷). 조당(朝堂).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

곳.  또는  그런  기구 *自派:  자기  쪽의 계파(系派)나  유파(流派)  *高傑: 고상하고

걸출 인물 *非人: 사람답지 못한 사람. 폐인(廢人) *民心: 백성의 마음. 민정(民情)

*離叛:  人心  떠나서  배반함  *辛酸: 맵고  심.  괴로움과  쓰라림.  고생. 고초(苦楚).

 

<2019.4.2, 이우식 지음>

화, 2019/04/02- 10:21
12
0

화, 2019/04/02- 17:39
8
0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가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입니다. 이를 철회하려고 하남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거절을 당했습니다. 친일부역자의 생가터와 추모비를 철회시키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주실 수 있는 분들은 힘이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 2019/04/02- 15:39
5
0

회원의 한사람으로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촉망받을 만한 인물이던데

왜 여기에서 미꾸라지 행태를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지요

시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정치에 입문

잘 안되니 다시 시민운동가로 변신

이제 촛불시민의 대표자로 둔갑하여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고 있더군요

촛불혁명 때 무엇을 했는지요 ㅎㅎ

정치나 하시고 이제  회원직도 내려 놓으심이 좋을 듯 합니다

여인철씨

 

화, 2019/04/02- 23:07
20
0

경기도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진오의 생가터와 추모비입니다.
이를 철회하기 위해서 도와달라도 민족문제 연구서
자유게시판에 올렸더니 연락이 오셔서
근시일내에 만나뵙고 조언을 듣고 도움도 받기로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남시SNS시민기자단장  심윤석

수, 2019/04/03- 10:53
14
0

答問(답문)

 

問難吾豈答(문난오기답)

未免白頭童(미면백두동)

半識無爲道(반식무위도)

時時或可通(시시혹가통)

 

물음에 답하다

 

어려운 걸 물으니 내 어찌 답하랴

머리 허연 어린애 아직 못 면했소

저 無爲의 道에 대해 반쯤 아는데

때때로 혹 가히 통할 수도 있다오.

 

<時調로 改譯>

 

難問題 어찌 답하랴 白頭童 못 면했소

無爲의 道에 대하여 내 반쯤은 아는데

때때로 어쩌면 가히 통할 수도 있다오.

 

*答問: 물음에 대답함 *問難: 어려운 것을 물음 *白頭: 백수(白首). 허옇게 센 머리.

 

<2019.4.3, 이우식 지음>

수, 2019/04/03- 07:26
6
0

贈大富牧師

 

惡者蒙仁化(악자몽인화)

焉無欲報恩(언무욕보은)

餘錢方喜捨(여전방희사)

亦救我靈魂(역구아영혼)

 

큰 富者 목사에게 지어 주다

 

악인이 어진 德의 감화를 입었는데

어찌 은혜 갚고자 함이 없겠습니까

남은 돈 바야흐로 기꺼이 내놓으

또한 저의 영혼도 구하여 주옵소서.

 

<時調로 改譯>

 

仁化를 입었는데 왜 報恩 없겠습니까

남은 돈 바야흐로 기꺼이 내놓사오니

원컨대 저의 영혼도 구하여 주옵소서.

 

*大富: 큰 富者 *惡者: 악한 사람 *仁化: 인덕(仁德)의 감화 *報恩: 은혜를 갚음. 수은

(酬恩) *餘錢: 쓰고 남은 *喜捨: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

 

<2019.4.3, 이우식 지음>

수, 2019/04/03- 21:04
12
0

謹次成三問先生絶命詩韻

 

僅僅新生國(근근신생국)

何爲殆半(하위태반사)

北狂南腐爛(북광남부란)

難復本來(난복본래가)

 

삼가 成三問 선생의 絶命詩에 次韻하다

 

겨우 독립해 새로 생긴 나라인데

어찌하여 거의 반쯤 기울게 됐나

北은 미쳤고 南은 썩어 버렸으니

본래 집 회복하기 쉽지 않으리라.

 

<時調로 改譯>

 

겨우 생긴 나라인데 왜 반쯤 기울었나

北은 미쳐 버렸고 南은 썩어 버렸으니

본래 집 회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

 

*次韻: 남이 지은 詩의 운자(韻字)를 따서 詩를 지음.  또는 그런 방법  *成三問:  조선

세종 때의 文臣(1418~1456). 字는 근보(謹甫). 號는 매죽헌(梅竹軒). 집현전 학사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세조 元年에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처형됨. 저서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僅僅:

겨우  *新生國: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  독립한  국가  *腐爛:  썩어서  문드러짐.

 

<2019.4.4, 이우식 지음>

목, 2019/04/04- 07:34
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