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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공사관원의 눈에 비친 근대 조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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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공사관원의 눈에 비친 근대 조선의 모습,

익명 (미확인) | 목, 2018/01/25- 15:53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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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교제관시보이던 하야시 부이치의 유고 사진집 <조선국진경> (1892)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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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재동에 설치된 ‘외아문’의 대문 모습. 대문 기둥에 걸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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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포정사’라는 편액이 내걸린 경기감영 대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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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던 일본공사관 구역 안에서 외아문 독판 민종묵(한복 차림)과 서울주재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청국주차조선총리 위안스카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선국진경>을 남긴 일본공사관원 하야시다.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그가 평소 여가를 활용하여 담아낸 120여 장의 조선 관련 사진자료 가운데 이를 선별하여 그의 처 하야시 카메코(林龜子)가 유고 사진첩으로 묶어낸 것이 바로 ????조선국진경????이었다.
이 사진첩에 수록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서울 도성의 각 성문을 비롯하여 경복궁 광화문과 창경궁 홍화문, 그리고 동묘 남묘 세검정 영은문 남한산성 등과 같은 여러 문화유적의 옛 모습이 담겨 있다. 대개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그의 조선주재 시기에 비춰 촬영시점이 명확하게 파악되므로 이들 유적의 원형고증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정동 일대에 포진한 각국 공사관의 전경은 물론이고 용산과 마포 일대의 강변풍경과 부산, 인천, 강화 등지를 포함하여 저 멀리 거문도와 제주도의 풍광까지도 두루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남산 부엉바위약수터의 모습이라든가 초가집에 파묻힌 원각사탑(지금의 탑골공원 자리)과 조대비(익종비)의 장의행렬과 같은 이색적인 장면도 담고 있다.
또한 이 사진첩의 강점은 여느 사진자료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공간들의 모습을 다수 채록해두고 있다는 점인데, 예를 들어 훈련원 청사와 하도감의 전경, 그리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든가 경기감영의 대문 사진 등이 그것이다.
흔히 ‘외아문(外衙門)’으로 불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개항기의 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882년 12월에 재동에 있는 민영익의 집터(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치한 중앙행정기구이다.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외무아문(外務衙門)’으로 고쳤다가 다시 1895년 7부 편제로 전환할 때 ‘외부(外部)’로 개칭되며, 그러다가 1896년 6월에 이르러 광화문 앞 옛 이조 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요컨대 ‘외아문’은 세계열강과의 교섭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이들을 상대로 한 외교업무를 전담했던 주요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기관에 관한 사진자료는 퍼시벌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에 수록된 단 한 장의 사진을 빼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바로 하야시가 남긴 이 사진첩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는 외아문의 대문 모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진의 희소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것 말고도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라고 새긴 편액이 달린 경기감영의 대문 모습도 크게 눈길을 끄는 사진자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보’는 경기도를 가리키며, ‘포정사’는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으뜸 관아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따지고 보면 ‘경교장’이라는 명칭의 어원도 바로 이곳 경기감영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이곳의 옛 모습은 대개 1902년 한성부 청사가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의 것만 더러 남아 있을 뿐 명실상부하게 경기감영 시절의 것은 제대로 구경해 보질 못했다.
일본공사관원이던 하야시가 짬짬이 채록한 이러한 사진자료들은 애당초 점차 자기네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고 있는 ‘잠재적 식민지’ 조선에 대한 충실한 정보보고의 용도로 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땅의 옛 모습을 사진자료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 셈이다. 마치 일제가 문화침탈을 위해 제작 배포한 ????조선고적도보????가 오늘날 유적지 복원의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근대 사진첩의 양면성은 대개 그러한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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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7]

조선의 통치자들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 – 은뢰恩賴

 

조선신궁어진좌10주년기념 <은뢰> 표지

 

<은뢰>, 발음부터 어렵다. 뜻은 ‘천황’의 위엄한 자태 또는 존엄한 ‘천황’이 내려와 온 세상에 가득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목부터 이 책자의 편찬 방침이 ‘천황의 은혜’가 곳곳에 미쳐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시각적이고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은뢰>는 1937년 11월 조선신궁봉찬회에서 조선신궁 건립 1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사진첩이다. 따라서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신궁의 모습을 중심으로 조선의 자연, 문명, 모성, 의례 등 350여 점의 사진 이미지 삽입, 총 338쪽으로 구성하였다. 책자의 크기는 가로 26cm, 세로 36.5cm
이며 재질이 좋은 종이를 사용하여 고급스러움을 추구했다. 비매품인데도 불구하고 발행년도를 달리하여 여러 쇄를 찍었는데 배포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조선을 통치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증정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은뢰>의 소장처는 독립기념관과 연세대 등 몇몇 대학도서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인쇄 수량에 비해 발견된 것은 많지 않다. 연구소는 수집본과 기증본(즈시 미노루) 총 2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 1940년 판본이다.
<은뢰>는 총설편, 제1편~제5편,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편에서는 신궁의 창립 유래와 진좌제 등 조선신궁을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내선융화’의 정서를 시각화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제1편~제5편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1년을 11개의 장, 5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각 장마다 해당 년에 일어난 사건과 각종 의례 등을 기록해 연보적 성격을 보여 주는데 각 지역의 신사와 명승고적 및 메이지 ‘천황’의 제사를 고르게 배치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실체는 사진첩에 나타내지 않고 있다. 대신 인간의 모습이 아닌 신성한 자연으로 표상된다. 나무, 해, 구름, 빛 등 자연의 모습을 신비로운 광경으로 이미지화하였다. 또 경성 전역의 야경 사진과 제신의 신체를 싣고 달리는 기차 등의 이미지를 통해 ‘천황’은 조선에 문명을 가져온 상징으로 표상되었다. 이러한 상징 기법은 “조선의 산천 가득히 생생한 발전모습이야말로 진실한 신광(神光)의 현현(顯現)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호도 ‘은뢰’ 즉 ‘천황의 은혜’”이며 “조선 전역 곳곳에 부는 신풍(神風)”과 함께 “내선동근(內鮮同根)의 사상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몽환적 분위기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은뢰>는 기념사진집의 성격과 함께 식민통치의 이념을 정서적 차원에 호소하는 선전물이다. 식민통치권력이 ‘사진’이라는 시각매체를 통해 식민통치의 역사를 기록하고 스스로 어떠한 판타지를 꿈꾸며 그것을 선전하려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강제병합을 하자마자 대한제국의 국가제례를 폐지하고 일본의 국가신도로 대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신궁 건립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천황’과 일본 황실의 선조로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제신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조선신궁은 국가신도의 제사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주요 시정과 행사를 알리는 의례 공간이 되었고 공식행사에는 반드시 이왕가를 참여시켰다. 또한 조선신궁은 조선 및 경성 관광 코스의 하나로 반드시 포함시켰으며 황국신민화정책이 전면화되면서 모든 학교와 단체의 공식적인 신사참배가 이뤄지는 내선일체의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이들에 대한 참배는 결국 일본 황실의 조상을 섬기고 일제의 조선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었다. 신사 참배는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하려는 상징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 이후 민중이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바로 조선신궁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20/07/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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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8]

‘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 「한국병합기념화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오사카신보大阪新報>가 제7666호 부록으로 제작한 「한국병합기념화보」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한 달 후인 1910년 9월 28일에 발행된 화보로 일본 내각의 주요 인물과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천황’ 무쓰히토의 사진을 중앙 상단에 배치하였는데 ‘메이지明治’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성스러운 천황의 이름’이라 표기하지 않고 비워 둔 것이다. 바로 밑에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다. 태황제인 고종을 ‘이태왕’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표기했다. 이는 일본이 병합과 동시에 한국의 황제·황족을 왕족·공족으로 전락시키고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왕조를 패망시켰음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표기한 것이다.
메이지 사진 양측에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주요 인물들과 병합의 공로가 있는 조선의 인물을 배치하였다. 우측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필두로 ‘소야만국小野蠻國’이라며 조선을 멸시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정한론의 중심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명성황후를 살해하고도 무죄를 확신한 극악무도한 범죄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의병 대탄압을 지휘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등 32명의 인물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좌측에는 을사늑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이익선 보호’라며 조선 침략을 주창한 일본 군부 세력의 거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강제병합을 자랑하고 무단통치를 감행한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금융지배를 확립하고 ‘한국병합기념장’ 수여받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와 ‘일본의 보호정치는 한국의 이권’이라고 주장한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실려 있다.
이들 사진 밑에 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조선왕실 종친들,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이지용 등 주요 관리들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렇게 하여 강제병합과 관련된 일본의 주요 인물 57명, 유일한 외국인 스티븐스, 조선인 주요인물 17명 등 총 75명의 강제병합 주역들이 화보 상단을 채우고 있다. 화보의 하단에는 조선 13도를 그린 지도를 싣고 있는데 금, 은, 동, 철 등 조선의 지하자원 분포와 담배, 면화, 목화 등 재배 식물과 철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의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와 함께 ‘일한연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내용이 기가 막히다. 한일관계를 ‘숭신천황 65년 7월, 임나국任那國의 소나카시치蘇那曷叱知가 조공을 받치면서 시작되었다.
’고 하면서 ‘신공황후가 여러 제국에 명하여 배를 타고 삼한 정벌’을 감행한 결과로 기술하고 있다. 주
로 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하거나 조공을 바쳐온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데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고 강화도 개항의 시초인 운요호 사건, 청일·러일전쟁으로 맺은 각종 조약의 과정들을 기술하였다. 연표의 마지막은 ‘명치 43년 8월 29일 한국병합을 달성하여 관보 호외에 발표’한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는데 연표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에 1909년 12월 말 통계조사에 따른 ‘조선국세일람’으로 조선의 면적, 인구, 재정 현황, 중요 생산액 등의 정보를 실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를 발행한 <오사카신보>는 오사카에서 발행된 3대 신문 중 하나로 1900년 9월 15일에 결성된 입헌정우회의 기관지이다. 입헌정우회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재를 맡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당으로 한때 3·1운동 탄압을 총지휘한 하라 타카시原敬가 사장이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에도 등장하는 하라 타카시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이번 사건을 국내외에 극히 가벼운 문제로 알리되 실제로는 엄중한 처치를 취하고 재발방지를 기하라’는 훈령을 내린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었다.
202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지 11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징용문제, 일본군 성노예문제 등 아베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은 「한국병합기념화보」에 실려 있는 침략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파렴치한 저들의 행보를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후 75년이 지나도 지속되고 있는 저들의 가해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1910년 8월 29일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 강동민 자료팀장

수, 2020/08/2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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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9]

식민지 지배의 선전물, 관제엽서

– 「조선체신사업연혁사 朝鮮遞信事業沿革史」

 

체신국의 사진엽서는 초기에 통감의 취임 기념엽서가 주를 이루었다가 1910년 강제병합 이후는 ‘시정’기념엽서, 통신사업기념엽서 등 조선총독부의 ‘근대화’에 관한 사진엽서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930년 이후에는 비행기, 전투 전략과 같은 전쟁 관련 이미지가 인쇄된 사진엽서가 발행되었다.

 

<조선체신사업연혁사>에 수록된 사진은 철도와 수로 등 근대화된 교통시설, 개선된 사업 환경, 신식 시설물 등이다. 관제엽서를 정치적 선전의 수단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38년 2월 10일, 우편·전신·전화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조선체신사업연혁사>이다. 1914년에 발간한 <조선통신사업연혁소사(朝鮮通信事業沿革小史)>를 증보, 개정하여 1935년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기념’ 및 ‘조선체신의 날’ 제정 기념사업의 하나로 엮은 책자이다.
<연혁사>는 먼저 체신국장 야마다 츄지(山田忠次)의 머리말과 역대 체신국장, 체신훈(遞信訓), 조선체신가와 조선체신행진곡을 시작으로 본문은 3부로 구분할 수 있다.
1부는 대한제국시대의 우표 5쪽 37매와 기념우편그림엽서 20쪽 65매, 기념특수통신 날짜도장(記念特殊通信日附印) 9쪽 96종, 명소(名所)의 스탬프 12쪽 87종, 체신국 건물 사진을 시작으로 30쪽에 걸친 우편통신관계의 건물·인물·사진 수백 매를 수록하고 있다.
2부는 체신사업의 현황과 연혁을 서술한 부분으로 제1편 사업의 연혁을 시작으로 체신기관, 통신사업 시설, 통신업무 상황, 우편위체(郵便爲替) 저금사업, 조선 간이생명보험사업, 항공사업, 해운사업, 전기사업, 와사사업(瓦斯事業), 체신사업의 선전, 사업의 경리, 토지와 건물 등 472쪽에 걸쳐 조선체신사업연혁사를 정리해 놓았다.
3부는 각종 체신사업의 성과를 22매의 화려한 통계표와 그래프로 보여준다. 19l0년에서 1934년까지의 통신기관 및 체신종업원수, 우편물수, 전보통수, 전화도수 및 가입자 수, 당시 조선의 통 신현황, 라디오 청취자수, 우편위체금액, 우편저금 액수, 우편진체저금 액수, 조선 간이생명보험도별 계약건수 분포도, 전기사업, 전등전력 수요, 항로 표지, 등록 선박 수 등을 수록하고 있다.
<연혁사>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관제엽서이다. 일본은 메이지시대부터 사진을 이용하여 각종 시각 매체를 통해 통치정책을 홍보하였는데 관제엽서 또한 그중 하나였다. 사진그림엽서가 정보전달 매체의 역할을 넘어 팽창하는 일본제국주의를 선전하기 가장 좋은 매체로서 활용도가 높았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가 시작됨을 경축하는 시정(始政) 기념엽서를 발행해 ‘조선병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동시에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엽서는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성상 선전 효과가 크고 ‘엽서’라는 실용적 용도에 힘입어 보다 은밀하게 제국의 정책을 선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조선총독부 관제엽서의 주요 사진은 식민통치에 의한 근대화를 홍보하거나, 진구황후와 ‘삼한정벌’설과 일선동조론, 내선융화 등 동화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 대부분의 관제엽서가 식민통치의 치적을 입증하는 사진을 선별하여 구성했는데, 이는 조선 민중의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거센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전략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즉, 일제의 관제엽서는 ‘실용성’이라는 특성을 이용해 대중들에게 손쉽게 다가갔고, 식민정책 현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을 이용함으로써 그 효과를 증대시켰다.
그러나 ‘근대화’를 표상한 엽서들은 역설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수탈’, ‘강제동원’ 등을 나타내는 기록물이다.
‘시정’을 홍보하기 위한 관제엽서는 식민지 통치 전과 후의 조선을 보여주는데, 정비된 설비 및 공장의 모습, 체계화된 유통 환경의 이미지는 조선총독부의 법령에 따라 시행되었던 조선 개발 사업의 근대화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수탈적 행위를 은폐하고 일제에 의한 조선의 경제성장을 보여줌으로써 식민지배의 합리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또한 1930년대부터 발행된 침략전쟁 관련 관제엽서는 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에게 ‘황국신민’으로 전쟁에 나서라고 강제하고 있다.
이렇듯 관제엽서 속의 이미지는 대중성을 가진 엽서라는 통신 매체와 결합하여 권력의 의도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재현의 도구이자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목, 2020/09/24-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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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사진첩> 속표지

 

1906년 12월 특파대사 이지용 일행이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 내외와 기념촬영을 한 모습. 이토 한국통감은 ‘을사늑약’을 체결 이후 ‘우호선린’이란 미명 아래 한국인처럼 갓을 쓴 한복 차림새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일본근대역사’의 한 장면으로 <사진첩>에 게재되었다. 

 

‘故 이등공’과 ‘흉행자(兇行者)’가 된 안중근 의사. <일본역사사진첩>에서 이토의 사진이 여러 장 등장하는데 ‘일본근대역사’에서 이토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한국민과 안중근에게는 암살할 이유가 15가지나 되는 침략의 원흉일 뿐이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대정 원년(1912년) 10월 4일 동광원(東光園)에서 발행한 <일본역사사진첩>이다. 연구소 소장본은 한 차례 증보를 거쳐 대정 2년(1913년) 6월 8일에 발행한 정가 6원의 제3판본이다. 불과 10개월 만에 세 번째 인쇄를 한 것으로 보아 판매량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진첩>은 총 284쪽에 걸쳐 근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전후부터 1912년까지 일본 역사의 여러 사진 자료를 보여준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 속에 일어난 사건, ‘천황’과 가문의 인물들, 정치·군사 분야의 주요 인물, 일본과 밀접한 관계인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요인물 사진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일본의 팽창을 보여주는 침략전쟁의 현장 등이 사진으로 게재되어 있는데 주요 사진들은 일본 근대사에서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로 기록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관련된 이미지이다.
일본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대한제국과의 관계인데 <사진첩>에서도 ‘강제병합’까지의 과정을 사진으로 간략하게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의 서북순행, 요시히토 황태자의 한국방문, 조선민중에게 주어진 태형(笞刑)의 모습 등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조선의 모습이다.
<사진첩> 본문 160쪽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는 1906년 12월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 특파대사로 도쿄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민족사랑 2017년 10월호 참조) 무엇보다 눈에 띄는 사진은 본문 162쪽에 등장하는 사진들이다. 훈장을 패용한 예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이토가 하얼빈역에 내리기 전에 병사들이 플랫폼에 도열해 있는 모습, 저격 당하기 1분 전에 기차에서 내려 모자를 벗는 이토 히로부미, 포승줄에 묶인 안중근 의사, 의거에 사용되었던 권총과 탄환 등이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회의에서 「한국병합에 관한 방침」이 통과되었고 절차상 남은 것은 병합시기와 국제사회의 양해뿐이었다.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와 조선 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협상하기 위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그 순간 이토를 죽음에 이르게 한 총성 뒤에 “한국, 만세”라는 외침이 있었다. 이토는 1905년 ‘천황’의 특명전권대사로서 ‘을사조약’을 강요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으며,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내던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킨 주권침탈의 주범이었다. 안중근은 이토를 암살한 15가지 이유를 말하며,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중근은 한국인에게 침략의 원흉을 총살한 영웅이지만, <사진첩>에서 보듯이 일본인에게는 근대화의 원훈(元勳)을 암살한 ‘흉행자(兇行者) 안중근’으로 각인되었다. <사진첩>의 마지막에는 14쪽에 걸쳐 ‘일본역사사진첩 대조일반(對照一斑)’이라는 56개의 항목이 적혀 있다.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과 연관된 역사를 구분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53번째 항목인 ‘한국병합’에서는 강제로 맺은 ‘병합’을 ‘전례가 없는 위대한 업적(曠古の偉業)’ 으로 조선민중은 영원히 ‘천황의 은혜(聖澤)’를 받는 경사스러운 사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하여 사라지고 ‘일본역사사진첩’에 박제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수, 2020/11/11-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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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22]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에 걸려 있는 77번 벽화 「일한합방」의 내용을 담은 그림엽서이다. 이 그림은 츠지 히사시(辻永)가 그렸으며, 조선총독부가 헌납하는 형태로 1927년에 제작 완성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도쿄부 양정관 국사회화관에 걸려 있는 70번 벽화 「한국병합」의 내용을 담은 그림도판이다. 이 그림은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가 그렸으며, 1942년에 제작 완성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경술국치와 관련한 전시도록에 곧잘 등장하는 것으로 ‘경성 남대문’의 모습을 그려놓은 한장의 그림엽서가 있다. 여기에는 석축(石築)에 담쟁이덩굴이 제법 달라붙어 있는 남대문의 전경과 그 뒤로 흘러내리는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여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린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천황의 은덕이 가져다 준 평화를 기뻐하고 있는 양 거리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엽서의 위쪽에는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 벽화(明治神宮 外苑 聖德記念繪畫館壁畫)”라는 표시가 있고, 아래쪽에는 다시 “[77] 일한합방(日韓合邦), 츠지 히사시 필(辻永 筆), 조선각도 봉납(朝鮮各道 奉納), 명치(明治) 43년 8월 29일, 경성 남대문”이라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만 본다면 필시 1910년 8월 29일의 상황인 듯이 오해하기 십상이나 그 시절에는 담쟁이덩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야 맞고, 실제로 이 그림의 초안이 그려진 것은 1925년의 일로 확인된다.
성덕기념회화관(1919.3.5일 착공, 1926.10.22일 준공)은 1912년 명치천황의 장례가 치러진 일본 도쿄 아오야마연병장(靑山練兵場) 장장전(葬場殿)이 있던 자리에 건설된 미술관으로, 죽은 천황과 황후의 유덕(遺德)을 연대순으로 묘사한 그림 80점(일본화 40점, 서양화 40점)이 이곳에 전시되었다. 그림의 제작은 당시의 화족(華族), 국가기관, 지방공공단체, 민간기업 등이 봉납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이 가운데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 1882~1946)가 그린 ‘66번 서양화’ 「일영동맹(日英同盟, 1932년 완성)」은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츠지 히사시(辻永, 1884~1974)가 그린 ‘77번 서양화’ 「일한합방(日韓合邦, 1927년 완성)」은 조선총독부가 각각 헌납한 것이었다.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일한병합(日韓倂合)의 대벽화(大壁畫)를 그리다, 총독부(總督府)로부터의 위촉(委囑)으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 어젯밤 입성(入城)」 제하의 기사에는 이 그림의 제작과정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그가 사방 9척(尺)에 달하는 벽화의 화재(畵材)를 찾기 위해 평양, 인천, 기타 지방에 돌아다녔으며, 파성관(巴城館, 본정 2정목 93번지)에 터를 잡고 이곳에 화실(畵室)을 꾸민 다음 약 1개월가량 머물며 타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 1877~1943)의 도움을 받아 하도(下圖, 밑그림)를 완성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채록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 그림의 초안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는지 ????조선신문???? 1925년 5월 20일자에 수록된 「남대문(南大門) 앞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벽화(壁畫)를 찾아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의 분투, 쉽지 않습니다 …… 라고」 제하의 기사는 작품의 제작 상황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명치신궁의 대벽화의 화제(畵題)를 구하기 위해 체경중(滯京中)인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은 파성관(巴城館, 하죠칸)에 투숙하고 이에 10일 정도는 매일 오전 5시경부터 본사(本社, 조선신문사) 앞의 그린에 캔버스를 세우고 파레트를 한 팔에 열심히 브러쉬를 잡고 있었는데, 벌써 19일의 아침에는 캔버스의 한 면에 남대문을 전경(前景)으로 하여 짙푸른 남산(南山)이 등장하고 있었다. 츠지 히사시 화백은 브러쉬를 놓고 말한다. 
“벽화는 바야흐로 남대문 이것으로 결정하고, 10일 남짓 매일 오전 5시부터 스케치를 나와 있습니다만 이 원화(原畵)의 50배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일단 완성되었지만 그 위에 부분 부분의 스케치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깐 한숨 돌리고 20일부터 4일간 정도는 미나미 군(南君)과 함께 평양에 다녀옵니다. 평소는 늦잠꾸러기라서 5시부터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소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나미 군’은 나중에 도쿄미술학교의 교수를 지내는 미나미 쿤조(南薰造, 1883~1950)를 가리킨다. 미나미는 이 당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선전) 심사원(제2부 서양화 및 조각)으로 초빙되어 경성에 체류하던 상태였으며, 때마침 츠지도 경성에 머무는 김에 선전의 심사원으로 함께 위촉되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일한병합’의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츠지 히사시가 경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의 보도 내용이다.

 

츠지 히사시가 한 달 가량을 체류하면서 ‘일한병합’의 벽화 원도를 구상할 때에 자신의 화실로 사용했던 ‘파성관(巴城館) 호텔’의 광고문안이다.

 

그런데 명치천황의 위업으로 치장된 ‘한국병합’ 관련 벽화그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도쿄부 양정관(東京府 養正館)에 설치된 국사회화(國史繪畵)에도 이와 동일한 종류의 벽화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3년 12월 23일에 황태자(皇太子, 나중의 아키히토 천황)가 탄생하자 이를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부에서는 “국사(國史)를 통해 웅대한 조국정신(肇國精神)을 체득하고 일본정신(日本精神)을 연성시키고자” 청소년수양도장의 창건을 기획하였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1937년 12월에 준공된 ‘도쿄부 양정관’이었다. 이곳의 본관에는 회화진열실이 마련되어 일본사에서 77개의 화제(畵題)를 선정하여 이를 일본화 45점과 서양화 32점으로 제작한 벽화가 상설 전시되었다.
이 가운데 70번째 그림이 바로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 1873~1942)가 그린 「한국병합(韓國倂合)」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전경과 저 너머로 백악산과 북한산 자락에 그려져 있고, 시가지에 그득한 기와집들마다 일장기가 나부끼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갓 쓴 조선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과 함께 조선인 소녀와 일본인 소년이 나란히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일장기를 잡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1942년 12월에 벽화가 완성되자 ????도쿄부 양정관 국사벽화집(東京府 養正館 國史壁畵集)????에도 수록되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더구나 1943년 5월 29일에는 자신의 탄생 기념공간으로 만들어진 이곳 양정관에 일본 황태자가 직접 들러 벽화를 하나씩 세세히 관람하고 간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듣자 하니 양정관에 걸려 있는 벽화 그림들은 1955년에 이르러 이세신궁 징고관(伊勢神宮徵古館)으로 이관되어 이곳에서 관리 진열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래저래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서는 영광스런 역사의 한 장면으로 치장이 되어 반영구적으로 그 흔적을 남기게 될 모양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 2020/12/3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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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조선총독부의 모범생
– 김성수(金性洙) 장례식 풍경

강동민 자료팀장

동아일보에 실린 인촌 김성수 부고와 장례 안내

해방공간을 거세게 휘몰아치던 ‘친일파 청산’ 구호는 친일세력과 손잡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자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친일파는 오히려 ‘건국의 주역’, ‘반공투사’로 둔갑하여 한국 사회의 지배층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제 부역
언론인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다.
김성수는 중일전쟁(1937년) 직후 전국시국강연회의 강사로 나선 것을 시작으로,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전쟁협력을 독려하는 수많은 기고문과 연설을 남겼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다’면서 ‘천황’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라고 몰아세웠다. 그의 친일활동은 전시체제기 내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후,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과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하고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51년 6월에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었다.

 


김성수는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에 사망했다(①). 빈소는 서울시 계동 132번지 김성수자택에 마련되었는데(②) 김성수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꾸기 위한 ‘금속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등 약 2백관(750kg)을 떼어 해군무관부에 헌납한 바로 그 집이다(③). 김성수 사망 바로 다음 날인 2월 19일 오전, 빈소에 이승만이 방문(④)하고 이날 국무회의에서 김성수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동아일보는 2월 20일자 지면을 통해 ‘일생을 국가, 민족을 위해 바친 인촌 선생이 「펭끼」(페인트)조차 벗겨진 초라한 자택에서 만민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고 김성수의 사망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육당 최남선은 김성수를 애도하는 시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⑤).

2월 24일 오전 8시에 명동성당에서 연미사(위령미사) 거행(⑥)후 서울운동장에서 장례식을 진행하였는데(⑦) 이때 김성수의 약력보고를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이 맡았다(⑧). 서울운동장에서 장례식 후 장의 행렬은 동아일보 사옥을 지나(⑨) 이화여대 부속병원 앞을 통해서(⑩) 장지인 안암동의 고려대 뒷산에 도착하여 하관하였다(⑪). 김성수의 묘는 1987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거두 김성수는 이렇게 땅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후손과 추종자들은 무덤에서 그를 살려냈다. 식민지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몰아 처단해야 할 친일파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까지 하던 김성수가 반공을 내세운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채 말이다

목, 2021/03/2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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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5]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 강동민 자료팀장

 

 

<애국 제10 조선호> 엽서, 14.1×9.1 식민지 조선에서 ‘국방헌납운동’으로 전개한 모금으로 일본에 최초로 헌납한 비행기. 기종은 주로 사격관측과 연락에 사용하는 정찰기(偵察機)다.

 

‘애국 제10 [조선]호’ 명명식 장면, 매일신보 1932년 4월 18일자 2면 1932년 4월 17일 오전 11시, 애국기 헌납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우가키 조선총독을 비롯해 총독부 주요 관료, 군사령부 수뇌부와 함께 한상룡, 윤치호 등 친일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애국기와 보국기 목록, <방공독본>, 1933 ‘제10호 조선’과 ‘제20, 21호 조선’이 표기되어 있는 <방공독본>. 번호와 기종, 헌납자(지역)가 기재되어 있다. 일본은 물론 조선과 타이완 등 식민지에서 비행기가 헌납될 때마다 순서대로 호수와 이름을 붙였다.

‘애국 제10 조선호’, <한국백년>, 동아일보사
‘1936년 5월 15일’은 오기다. 다만 1932년 5월 15일 오전 10시, ‘제20, 21호 조선호’의 명명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거행되었고 기념엽서에도 이 날짜의 엽서인(印)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참고하여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애국 제10 조선호’, <한국사>,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에 잘못 기재된 사례. ‘애국 헌납기 1444호’는 지역명이 붙여진 ‘경기시흥’호이다.

‘애국 제1444(경기시흥)호’ 전투기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왼쪽) ‘애국 제133(경성제1)호’ 소형연락기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오른쪽)

‘애국 제10, 제20, 제21 조선호’의 모습을 담은 엽서, 14.1×9.1

‘보국 제73(문명기)호’(文明琦號), <시정25년사>, 1935 일본인 유력자들과 행정기관장을 중심으로 시작된 애국기 헌납운동은 문명기가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하면서 조선인의 애국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는 1934년 자신이 경영하던 금광을 일제의 주선으로 미쓰코시三越 재벌에게 12만 엔에 인계하는 대신 1935년에 육군기(애국기)와 해군기(보국기) 각각 한 대씩을 헌납하는 비용인 10만 엔의 국방헌금을 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친일 부호들이 경쟁적으로 국방 헌납에 참여했다.

(광고)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조일신문(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와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이 비행기 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당시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와 사업부장,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과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로 재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사히신문에 기명 광고를 게재해 비행기 헌납을 선동하기도 했다.

 

“여러분의 적성으로 된 애국 제10호기 조선호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여러
분께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 <매일신보>, 1932년 4월 15일자 2면

1932년 4월 14일 정오 무렵, 경성 하늘에 이와 같은 오색(五色) 선전문을 뿌리는 비행기 한 대
가 나타났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헌납기’ 조선호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호는 경성 상
공을 한 번 돌더니 조선군사령부 수뇌부와 체신국 간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도 비행장에 곧
착륙을 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한편, 부
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헌납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가
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국기 헌납’이다.
‘애국기’는 지역민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를 일컫
는데 육군용은 애국기(愛國機),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불렀다.
‘애국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는 기종에 따라 1대에 최저 6만 원(현재 약 6억 원)에서 2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필요했다. 따
라서 부호 몇 명의 힘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 조직과 단체를 동원한 모금운동
이 조선 전 지역에 벌어졌다.
일본인 유력자와 행정기관장이 나서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시작한 후 ‘1군(郡) 1기(機) 헌납
운동’을 주도한 문명기를 필두로 조선인 헌납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애국기 헌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연수, 문명기, 최창학, 김용주 등 조선인 부호들을
비롯해 부·도·군민 등의 지방단위, 학교나 종교단체, 전쟁협력을 위해 조직된 관변·동원단체 등
다양한 개인과 단체가 애국기 헌납운동에 참여했다.
전쟁이 확대될수록 일제는 물자공급과 항공전 수행을 위해 더 많은 비행기 헌납을 요구했다.
일반인은 물론 초·중등학생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애국부인회를 이용하여 국방헌금을 위한 바자
회를 개최했으며 심지어 기생들의 화대까지 ‘애국기 헌금’에 동원되었다. 일제는 연일 ‘미담사례’
를 홍보하고 헌금액과 헌금자의 명단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일본의 패배로 끝난 1945년까지 식민
지 조선인의 피와 땀의 강요로 헌납한 ‘애국기’는 수백 대에 달했다.

목, 2021/04/29-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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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6]

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전시체제기 금속류 공출

강동민 자료팀장

 

애국부인회의 금속류 공출 장면, 사진주보 <싸우는 조선(戰ふ朝鮮)>, 1945

 

 

금속류 공출식 사진, 국민총력 개정면 연맹, 15.2×10.6‘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결전 아래 금속류 공출을 앞장서서 실행하자’는 표어가 창에 붙어 있다.

 

‘보전 김교장의 수범’, 매일신보 1943년 4월 2일자 김성수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우기 위한 ‘금속
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등 약 2백관(750kg)을 떼어 해군무관부에 헌납했다는 기사

 

놋그릇 공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2, 동아일보사, 1978

 

공출유기 대용 그릇, 지름 14.6×높이 8.3 일본은 온갖 놋그릇을 빼앗아가고 일부는 대용품으로 사기그릇을 주었다. 공출로 나라에 보답하자라는 뜻의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故 송병준 백(伯)의 동상 헌납’, 매일신보 1943년 8월 8일자 ‘한일병합’의 훈공이 컸던 백작 송병준의 동상 2개를 송병준의 손자 노다(野田太郞)가 ‘금속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유기금속과 함께 헌납하였는데 수많은 일반인이 이를 보고 유기그릇을 헌납하였다는 기사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될수록 식민지조선은 더욱 황폐해갔다. 강제병합 후 식민지조선의 ‘땅’과 함께 ‘쌀’의 수탈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중일전쟁 이후에는 한반도 곳곳의 지하자원과 해양자원 그리고 삼림까지 통제해 전쟁자원으로 동원했다. 흔히 ‘공출’이라고 하면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곡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쟁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쌀 이외의 전시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기생산을 위해 전쟁 직전인 1941년 9월 <금속류회수령>을 공포하여 조선에 남아 있는 온갖 쇠붙이를 약탈해 갔다.
식기, 제기와 같은 그릇은 물론이고 농기구를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절의 불상까지 빼앗아 무기로 만들었다.
특히 구리는 해군함정 중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재료로 막대한 수량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놋그릇을 식기로 사용하고 청동화로를 난방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그냥 두고 보고있을 침략자들이 아니다.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의 각 가정에 엄청나게 사용되는 놋그릇과 청동화로 같은 구리제품 공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인 애국반 등에 의해 금속류의 공출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에서 수입하던 설철(屑鐵:쇠 부스러기)마저 단절되자 무기생산에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전국에서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긁어모았다. 구리로 제작한 동상(銅像)이나 쇠 난간, 철제 가로등을 비롯해 가마솥까지 공출됐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 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던 식민지조선의 민중은 이제 일제가 나누어주는 소량의 배급품으로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수, 2021/06/0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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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7]

청춘만장

– 침략전쟁의 총알받이가 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

 

• 강동민 자료팀장

 

 장행기壯行旗, 170X56
“축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입소 궁본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촌면 제남부락연맹”
지원병 출정 깃발인 장행기는 ‘장렬하게 떠난다’는 뜻이지만 조선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깃발과 같다고 해서 ‘청춘만장靑春輓章’이라고 불렀다. 깃발 상단에는 금치훈장金鵄勳章을 중심으로
뒤에 일장기와 일군기를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깃봉에 금치金鵄가 앉았는데 마치 훈장 위에 앉은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넣었다.

 

 

 금치훈장이 새겨진 엽서, 9.1X14.1
1890년에 제정된 일본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일본제국의 육군과 해군을 대상으로 수여하였다. 금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건국의 상징새로 전쟁 승리의 대명사로 표현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다양
한 디자인으로 활용되었다.

 

 훈련소 시절 이은휘, 5.9X8.6, 1942년
한 집안의 가장으로 부모를 모시는 아들이며 신혼을 시작한 남편이자 갓 태어난 아들의 아버지였던 이은휘는 일본제국의 총알받이가 되어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 만주사변기념일 스모대회에 출전해 우등상을 수상한 뒤 기념촬영, 15.7X11.5, 1941.9.12.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모든 자원의 효과적 동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조선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무기’를 쥐어주게 된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게 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소한 청년, 이은휘가 남긴 유품인 장행기다. 장행기는 지원병으로 차출되어 가는 청년들을 환송하기 위해 면에서 만들어 준 깃발이다. 이은휘는 1921년 9월 9일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입석리 606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옆마을인 월촌면 복죽리의 처녀 정복례(당시 19세)와 결혼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이은휘는 부인과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림을 꾸리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리농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지원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하필 이때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지방 관청들이 경쟁적으로 지원병 수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던 시기였다. 말이 ‘지원’이지 사실상 강제였다. 이은휘가 일본군으로 강제동원된 것은 ‘특별지원병’이라는 형식이었다.
당시 임신 8개월인 아내를 두고 이은휘는 1941년 6월 특별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훈련생 때 휴가를 받고 집에 와서 막 태어난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부인과 눈물을 흘리던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갓난아기와 사랑스런 신혼의 아내를 두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은휘는 특별지원병이 아니라 특별희생자였던 것이다.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가족들에게 결국 ‘전장에서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어 전사’했다는 소식만 돌아왔다. 유골도 유품도 아무것도 없었다. 유수명부에 따르면 이은휘는 남방군 제8방면군 제20사단에서 보병으로 근무하다 1944년 7월 11일 전사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제는 유족들의 의향에 관계없이 이은휘를 침략전쟁의 신으로 만들어 야스쿠니신사에 무단 합사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이은휘는 해방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채 영혼마저 야스쿠니신사에 유폐되어 있다.

금, 2021/06/25-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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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8]

다색판화로 보는 청일전쟁

 

• 강동민 자료팀장

1. 대일본해륙군조선상륙도 大日本海陸軍朝鮮上陸之圖
일본군 제1진 해군 육전대가 전함에서 상륙정으로 갈아타고 인천에 상륙한 모습을 묘사한 다색판화.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국이 파병 하자 일본은 텐진조약을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2. 조선경성 오오토리 공사 대원군을 호위하다 朝鮮京城 大鳥公使大 院君ヲ護衛ス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묵살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개입할 것을 결 정하고 경복궁을 점거한 뒤 친일내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 과 전투를 벌이며 말을 탄 대원군을 호위하는 오오토리 공사가 경복 궁에 입성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3. 조선풍도근해 격전 일군함대 대승리도 朝鮮豊島近海激戰日軍艦隊 大勝利の圖
7월 25일에 일본군은 아산만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기습 공 격, 청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청나라의 순양함 제원(濟遠)과 광을 (廣乙)이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순양함 요시노(吉野)와 나 니아(浪速) 함대 사이에 포격을 벌이다 도주하였다. 일본함대가 도주하는 청나라 함대를 쫓아갔는데 광을은 결국 좌초하고 제원은 일본 에 노획되었다.

 

4. 육군사단대만세 陸軍師團大萬歲
1894년 7월 29일 아산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전투에서 패한 청국 군을 끝까지 쫓아가는 대규모 일본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쓰러 져 있는 군인들은 청국 병사뿐이며 쫓기듯 도망가는 청국병사들은 작 게, 쫓아가는 일본 병사들은 압도적으로 표현했다.

 

5. 조선평양대격전 朝鮮平壤大激戰
1894년 9월 15일 평양 전투를 묘사한 다색판화.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 격하여 파죽지세로 청국군을 무찌르고 있다.

 

6. 아국대승리 적진 군기를 빼앗다 我軍大勝利 敵陣ニ軍旗ヲ奪ス
말을 탄 일본 장교가 청국기를 빼앗고, 이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청 국 병사의 모습을 그린 다색판화. 일본의 군대가 적군인 청국의 깃발 을 빼앗으면서 전쟁의 마지막을 가늠하게 해준다.

 

더위가 한창이던 1894년 7월, 한반도는 무더위를 집어 삼키는 화염에 휩싸였다. 국토의 곳곳이 불타고 무너지고 시체가 뒹구는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던,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가 한창이던 2018년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가즈히꼬(高橋和彦) 씨가 족자 2점을 기증했다. 바로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두루마리 형태의 다색판화(錦繪, 니시키에) 33점을 2개의 족자로 분할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이번 자료는 바로 다카하시 씨가 기증한 청일전쟁 판화 중 몇 점을 소개한다. 니시키에는 당대의 풍속을 서민 감각으로 그려낸 근세 일본의 회화로 목판화 방식을 채용한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제로 전쟁 상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화가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일반 민중은 청일전쟁의 동향을 니시키에를 통해 사실처럼 알게 되었다. 특히 시중에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청일전쟁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니시키에 속에 조선인을 소재로 한 그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이미 니시키에 화가들의 상상력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멸시의 대상은 일본군에게 패주하는 오합지졸 청국 병사들에게 옮겨갔다. 꽁무니 빼는 청나라 병사들을 멸시적인 비속어로 매도하고 조롱하며 청일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거의 모든 그림이 근대적인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하는 늠름하고 용감한 일본군의 모습을 묘사했다. 반면 청국 병사는 재래식 무기인 창과 칼을 지닌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화, 2021/07/2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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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39

국치國恥 식민지조선 방방곡곡에 펄럭이는 일장기

• 강동민 자료팀장

조선군사령부 정문에 걸려 있는 일장기,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1

제19사단사령부 정문, <조선사진화보>, 1916

1880년 일본공사관이 개설되자 공사관 수비를 위해 한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했다. 1910 년 강제병합 후 조선주차군으로 재편한 후 독립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하였으며 1918년 한반도에 상주하는 병력을 배치하여 제19, 20사단을 통할 하는 조선군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기원 2600년 기념일에 겸이포에서 열린 축하행사에 동원되어 일장기를 흔들고 있는 수많은 조선인들, <광영록>, 1941

조선총독부에서 진행된 기원 2600년 기념식에 걸린 일장기, <광영록>, 1941

 

 

일장기가 새겨진 국기함
전라남도 함평남공립소학교에서 교내에 봉안전 (奉安殿)을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 작한 것이다.

 

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양반유생에 대한 은사금 수여식이 이뤄 지고 있는 광경, <애뉴얼리포트>, 1911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역사사진> 33호, 1915

경술국치의 상징처럼 사용되는 ‘근정전 일장기’ 사진은 1915년 물산공진회 당시 촬영된 것이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2021년 8월, 도쿄 상공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2020 도쿄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린 보상이었다. 100여 년 전 일본의 힘에 짓눌려 굴욕적인 강제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하늘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순종의 칙유를 통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온갖 시련에도 꿋꿋하게 버텨낸 우리 민족이 마침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35년간의 뼈아픈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일장기’다. 이 나라에 가장 먼저 온갖 살육을 저지른 일본군사령부를 시작으로, 조선의 궁궐, 행정기관인 관공서,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 학교, ‘천황의 신민’이 된 가정 등 주변 어디에서든 일장기가 펄럭이게 되었다.
온갖 행사에 동원되어 수많은 일장기를 흔드는 조선 민중들의 모습과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천황’에 예를 올리는 장면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식민지기 동안 계속된 치욕적인 이 광경은 1945년 8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나라를 뺏긴 지 111년이 되는 해이자 해방을 맞은 지 76년, 기나긴 시간이 주어졌건만 반성과 화해의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모진 상흔은 계속 남아 있다. 일본정부는 피해 당사자가 빠진 잘못된 ‘위안부’ 합의와 일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거부,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 시설물에서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관련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 등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망명 독립지사와 동포들이 끼니를 거르면서 가슴에 새기고자 했던 치욕의 망국일인 ‘8월 29일’을 모든 달력에 ‘국치일’로 새겨야 한다. 그리고 조기(弔旗)를 게양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하자, 피눈물을 흘리던 1910년의 8월을,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1945년의 8월을, 가슴 벅찬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2021년 8월을.

금, 2021/08/27-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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