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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방터시장으로 남은 홍제외리 조선보병대 사격장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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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방터시장으로 남은 홍제외리 조선보병대 사격장의 흔적

익명 (미확인) | 화, 2018/01/09- 11:30

[식민지비망록 31] 포방터시장으로 남은 홍제외리 조선보병대 사격장의 흔적 – 헌병보조원 출신 항일의병의 총살 장소로도 사용된 공간 

이순우 책임연구원

서울 서쪽 무악재 고개 너머에 있는 홍제원(弘濟院)은 조선시대에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賑恤)하는 곳인 동시에 서울을 오가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전송할 때 주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지금의 홍제동은 의당 이 홍제원에서 파생된 지명이다. 옛 지명자료를 살펴봤더니 홍제천 곧 ‘모래내’를 사이에 두고 홍제원내동(弘濟院內洞)과 홍제원외동(弘濟院外洞)이 나란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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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운영하던 경성목장(京城牧場)으로 변한 옛 홍제원 터 일대의 전경 사진. (<경성부사>제2권,1936)

 

이 동네들은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질 때 고양군 은평면에 속한 ‘홍제내리(弘濟內里)’와 ‘홍제외리(弘濟外里)’가 되는데, 이 가운데 홍제내리는 다시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홍제외리의 홍제천 이남 구역과 합쳐 홍제정(弘濟町)으로 전환된다. 홍제외리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 1949년 8월에 이르러 은평면 일대가 서울시로 일괄 편입됨에 따라 1950년 3월 15일에 ‘홍은동(弘恩洞, 홍제외리와 은평면의 앞 글자를 따서 조합한 지명)’으로 동명이 개정되었다.
원래 홍은동이라고 하면 하천변을 따라 황량한 산비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곳에 집단이주촌이 건설되면서 동네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1930년대 중반 서울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토막민(土幕民, 움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거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시키면서 새로운 주거단지가 형성되었는데, 홍제외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동아일보>1936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밀려난토막민(土幕民)순방기(巡訪記)(2)이름은좋다 환희촌(歡喜村), 서부 홍제외리 새 두옥촌(斗屋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변화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그려놓고 있다.

 

(전략) 주택지로서는 인연이 먼 이 험한 돌산, 영양도 부족한 이 여윈 토막민들의 피땀을 얼마나 흘리게 하고 있는가? 국유림을 토막민 구제라는 미영 아래 불하한 경성부(京城府)는 그의 경영관리를 일개 사회사업단체에 일임한 채 오불상관. 더구나 터 닦는 것쯤이야 알은 체나 하랴? …… 무성의한 경성부 태도에 다시금 흥분되며 동리의 홍제천을 끼고 동남으로 휘돌아드니 이 동리로는 중앙 동본원사(東本願寺) 향상대(向上臺) 사무소가 있고 그 아래로 ‘향상대염매소(向上臺廉賣所)’라는 큰 간판이 붙어 있는 큰 집이 새로 건설되는 이 마을의 한 이채이다. 동명은 홍제외리(弘濟外里)라 하나 구역을 따라 환희촌(歡喜村), 보은촌(報恩村), 지혜촌(智慧村), 청정촌(淸淨村), 정신촌(正信村), 신락촌(信樂村), 무량촌(無量村), 해탈촌(解脫村)으로 나뉘어 있다. 환희촌을 찾아 그들의 기쁨을 나누자 함도 아니요 보은촌을 찾아 보은의 뜻을 알자 함도 아니요 해탈촌을 찾아 속세를 떠나자 함은 아니나 동구에 들어놓은 발길은 자연 이곳저곳으로.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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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6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일본불교 ‘향상회관’이 위탁 운영하던 홍제외리 토막민 이주촌(향상대)의 탐방기사.

 

여기에 나오는 ‘향상대’라는 표현은 일본 불교의 한 갈래인 대곡파 본원사 경성별원(大谷派 本願寺 京城別院; 남산 동본원사)에 속한 향상회관(向上會館)이 운영하는 주택단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22년 8월에 설립된 향상회관(지금의 천연동 동명여중 자리)은 포교와 더불어 수산(授産; 빈곤자나 무직자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 일종의 사회교화단체였다.
바로 이들에게 홍제외리 집단이주촌의 운영이 위탁된 까닭에 ‘보은’이니 ‘무량’이니 ‘해탈’이니 불교색채가 농후한 것들이 마을이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에야 이 일대가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바뀌었지만, 풍림아파트 후면에 자리한 ‘실락어린이공원’이라든가 홍은벽산아파트 앞쪽에 있는 ‘보은소공원’과 같은 것들은 이를테면 향상대 시절의 유산인 셈이다. 실락은 본디 ‘신락’이 와전된 말일 텐데, 그 내력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사이에 잘못된 발음 그대로 버젓이 공원의 이름을 차지하게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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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보병대 사격장 자리에 들어선 홍은동 포방터 시장의 입구 전경

그런데 홍은동 지역에는 이곳 말고도 또 다른 근대시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약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물줄기가 크게 굽이치는 지점에 포진한 ‘포방터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포방(砲放)이라 함은 글자 그대로 ‘포를 놓는다’는 뜻이므로, 포방터는 곧 사격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언제부터 어떻게 사격장이 들어선 것일까? 어떤 자료에는 조선시대 이래로 이곳에서 군사들이 사격훈련을 했다고 서술한 경우도 있지만, 거기에 구체적인 근거자료가 함께 제시된 사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이곳에 관한 근대시기의 자료 가운데 비교적 빠른 용례로 확인되는 것은 ????독립신문????1899년5월12일자에수록된 「대포시험」 제하의 기사이다.

 

포병대 참령 이민섭 씨가 칙령을 봉승하여 재작일에 회선포 이문(二門)과 극로백(克魯伯) 이문을 가지고 창의문밖 수마동에 나가서 시험차로 방포하였다더라.

 

위의 기사에 나오는 회선포(回旋砲)는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이고 ‘극로백’은 ‘크루프(Krupp) 야포’를 말하며, 수마동(水磨洞)은 지금의 홍은동 포방터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이밖에 ????황성신문????1907년6월24일자에수록된기사에따르면,그 당시일본육군대신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만주지역시찰을 겸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가 경운궁 돈덕전 앞에서 한국 황제에게 헌상한 기관포(機關砲)에 대한 시험발사가 이뤄진 곳이 수마동의 포방터였다.
약간 특이한 기록으로는 <대한제국관보>1909년 7월 3일자에 “작란죄인(作亂罪人)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강재녕(姜在寧)에 대한 포형(砲刑, 총살형)이 6월 30일에 홍제원 수마동에서 집행되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2일자에는“장단고랑포파주소(高浪浦派駐所) 헌병보조원 강기동(姜基東)이 의병에 투입(投入)하다가 체포되어 재작일에 신문외 수마동에서 포살되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다르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강기동은 양주 고안헌병분견소에 소속된 헌병보조원 출신으로 1911년에 순국할 때까지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별개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기사에서 말하는 강기동은 강재녕의 표기오류가 아닌가 여겨진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이곳이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의 사격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에 관해서는 여러 신문자료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1921년8월 22일자에 수록된 「은평면민(恩平面民)의 탄원서(歎願書), 육군사적장(陸軍射的場)이 있어 교통에 불편하니 옮겨달라고 탄원」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곳 사격장은 구 한국시대에 건설한 것인 바 …… 운운”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동아일보> 1921년 10월 27일자에 실린 서대문경찰서원의 사격연습 관련 기사에는 이곳의 명칭이 ‘홍제원 조선보병대사격장’으로 표시한 것이 눈에 띈다.27

<매일신보> 1931년 4월 9일자에 수록된 조선보병대해산식광경

 

조선보병대라고 하는 것은 1907년 군대해산 당시 황궁(皇宮)의 의장(儀仗)과 수위(守衛)를 전담할 목적으로 유일하게 남겨진 1개 대대 규모의 ‘근위보병대’가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 소속으로 전환된 이후의 명칭이다. 이때 1개 중대 규모의 ‘근위기병대’도 함께 남겨졌으나, 조선기병대(朝鮮騎兵隊)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1913년 4월에 이르러 진즉에 폐지되고 말았다. 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있던 조선보병대는 애당초 ‘무용지물’에 가까운 군대로 취급되다가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경비절감문제가 불거지면서 1931년 4월 8일에 이르러 완전히 해산되는 수순을 밟았다.
조선보병대가 사라진 이후에 이곳은 서대문경찰서 사격장으로 전환되었는데, <동아일보> 1932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경관무장(警官武裝)시킬방탄(防彈)조끼시험(試驗)」 제하의 기사에는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30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홍제외리 서대문경찰서사격장에서 방탄조끼 성능시험이 진행되는 광경이다. (<매일신보> 1932년 5월 21일자)

 

일상 기거에 갑주를 입어야 할 만큼 험난한 세상이 되어 일본서는 방금 방탄복(防彈服) 연구열이 대단하다. 조선에도 이전과 달라 총기를 사용하는 ‘테로’행동이 자주 발생하므로 경무국에서는 경관에게 방탄족기를 입히고 강철투구를 씌우려고 이전부터 각 방면으로 연구중이라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경무국분실에서 그간 연구를 거듭한 결과 실용에 적당한 물건을 만들어놓고 19일 오후 독립문(獨立門) 밖에 고양군 은평면, 이전 조선보병대 사격장에서 성능시험을 행하였다.
센다이(仙臺)동북제국대학 혼다(本多) 박사가 연구한 니켈, 크롬과 탄소의 특수합금으로 만든 전중량 4백 량중의 조끼를 개량한 실용품을 사진과 같이 나무막대기에 입혀놓고 모젤식 권총으로 20메돌(미터)의 거리로부터 15메돌, 10메돌까지 단축하며 쏘았으되 자리가 움푹하게 날 뿐이지 관통되지는 않아 이만하면 된다고 합격되었다. (하략)

 

1933년에 발행된 <경성종로경찰서기념사진첩>을 보면, 종로경찰서원들이 실탄사격연습을 하는 장면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뒤쪽에 드러나 있는 북한산 봉우리와 사대(射臺)로 사용하는 언덕 주변에 심어진 포플러 나무의 배열 모습을 보아하니, 이곳이 홍제외리의 옛 조선보병대 사격장이란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곳은 서대문경찰서의 전용공간이 아니라 종로경찰서를 비롯한 여타 경찰서에 속한 일제 경찰관들의 함께 사용했던 곳이었던 모양이었다.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이후 <매일신보> 1940년 11월 17일자에 보도된 내용에는 “경성사단 관하의 각부대가 용산사격장과 홍제원외리 사격장에서 사격경기대회를 가진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 사격장과 관련한 막바지의 기록이다. 이곳이 언제까지 사격장으로 운영된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나, 그래도 이 주변에는 도로명주소로 ‘포방터길’이 두루 사용되고 있으며, 포방터시장으로 건너가는 홍제천 다리의 이름도 ‘포방교’로 작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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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외리 사격장에서 종로경찰서 서원들이 실탄사격연습을 하는 모습. (<경성종로경찰서기념사진첩>,1933)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주변 그 어디에도 포방터의 정확한 내력과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안내시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곳이 일제의 허수아비 군대인 조선보병대는 물론이고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선봉이 섰던 일제 경찰들이 사격 훈련을 했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은 이제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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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정관개정에 관해서도 설명했고

운영위원회 입장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저의 주장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충분히, 더 잘 설명 못한 것은 저의 한계일 수는 있습니다.

그동안의 대화로 충분히 판단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연구소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

 

월, 2018/04/3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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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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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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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8월 25일 김승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民族日報>(1990) 1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9/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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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던 임종국 선생의 아버지가 선생에게 한 말이다.
선생은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실었고,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임문호”를 실었다.
 
“….1937년 4월 이후에는 청년당 당두로서 천도교중앙종리원 관정(觀正)에 선출되어…….일제 침략전쟁과 황민화 정책을 적극 후원하고 지원할 것을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낸 아들

진실을 밝힘에 있어 그 어떤 이해관계(비록 아버지일지라도..)도 철저히 배척하는 원칙주의자가 임종국 선생이다.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써 내려갔던 그 날
임종국 선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토, 2018/06/0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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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께

사기꾼 김성훈은 감옥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수많은 피해자들은 할게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합니다

한순간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이러한 고통 속에 빠졌고 어찌하든 정당한 방법으로 이고통을 끝내려하는데 어찌된 법인지 사기꾼에게는 할것이 많고 피해자들은 그저 탄원서 진정서밖에 쓸게 없네요

변호사님 사기꾼 김성훈을 도우면 안되십니다 김성훈은 정말 온갖 방법으로 사기에 사기로 피해자들을 우롱하고 있어요

끝까지 김성훈이 이땅에서 피해자들에게 법에 의해 심판받도록 파산만은 말아주세요

파산이 어떤 의미인지 변호사님이 더 잘 아실것입니다

부디 이런 정당하지 못한 일에 앞장서지 말아주세요

화, 2017/12/0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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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 피해자입니다

이번 사기사건으로 저는 건강에 문제가 생길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있습니다. 정말 김성훈이 피해자들을 기만하며 변제한다 떠들기만 할뿐 실제 1원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김성훈은 피해자들에게 파산을 하면 돈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며 편지글을써서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정의가 살아있나 싶을정도로 사기범이 자기 파산하니 찬성해달라하니.. 어느 사람이 이해하며 받아들일까요

 

정만순 변호사님께서 만일 제 입장이시라면 파산 좋으니 동참하세요 하실수 있으실까요? 민족문제연구를 이번에 처음알고 친일파를 바로 잡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좋은 일을 하는 곳이란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성훈의 파산을 도와 1만가정의 결제를 파탄내는 일을 도우신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정만순 변호사님

1만명의 목소리와 피맺힘이 들리시는지요?

김성훈에게 파산이라니.. 이걸 채권자라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돕고 있으니 정말 1만명의 피해자 대표도 아닌 그들이 나서서 김성훈을 돕는 것을 볼수가 없습니다

제발 !! 올바른 길이 무엇일까 생각해주십시요. 저는 김성훈의 파산을 절대 받아들일수가 없습니다. 부디 파산을 막아주십시요

목, 2017/12/0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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