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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대우하고 기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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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대우하고 기념해야

익명 (미확인) | 화, 2018/01/09- 10:10

–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던 김경천 장군 증손녀 김올가 씨

 

독립투사의 후손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랑스러운 선조를 갖는다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 역사가 독립투사를 제대로 대우했던 역사가 아니라, 제대로 기억하지 않고 제대로 기념하지 않은 역사였기에 더욱 그렇다.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김경천 장군의 증손녀 김올가 씨를 만나 인터뷰를 나눴다.09

문 : 연구소 회원들을 위해 김경천 장군이 어떤 분인지 소개해주세요.

답 : 증조할아버지인 김경천 장군은 ‘백마 탄 김장군’이라는 전설로 유명한 독립투사예요. 본명은 김광서였는데 무관가문 출신이었어요. 아버지 김정우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고위 장교로 대한제국 군대의 병참 분야 최고 직위인 군기창감을 지내셨어요. 형 김성은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공병대장을 지내셨구요.
아버지는 공업을 배우라고 권하는데 나폴레옹 전기를 탐독하던 할아버지가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하셨대요. 1904년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셨어요. 일본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셨어요. 말 타고 싸우는 기병장교로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다가 3·1운동 후인 1919년 6월 만주로 탈출해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셨어요. 할아버지는 일본육군사관학교 후배인 이청천 장군, 중국 사관학교를 나온 이범석 장군과 함께 청년들을 가르치셨어요.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가셔서 독립군 대장이 되셨어요. 동포들을 괴롭히는 마적들을 소탕하셨고, 러시아 내전에 출병한 일본군과도 싸우셨어요. 그렇게 평생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셨어요.
한국이 독립된 뒤 할아버지의 동지인 이범석 장군님은 국무총리가 되시고 이청천 장군님도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셨는데 할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불행하게 돌아가셨어요.

문 : 1919년 6월이면 3·1운동 직후로군요. 일본군 장교로 복무 중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건데,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답 : 조국을 빼앗겼는데 당연히 되찾아야 된다고 생각하셨죠. 할아버지는 일본육사 생도 시절에 3년 후배인 홍사익, 이청천, 이응준과 함께 요코하마에 가서 맹세하셨다고 해요. 조국이 부르면 독립전쟁에 투신하자고 말이에요.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 맹세를 지키기가 쉽지 않게 되었어요. 육사 졸업 후 일본군 장교가 되기도 했고요. 결국 홍사익과 이응준은 망명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와 육사 후배인 이청천 두 분만 모든 걸 내던지고 독립투쟁에 나섰어요. 자기 같은 군사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었겠죠.
그리고 가장 큰 계기는 삼일만세였어요. 증조할아버지는 당시 종로의 만세시위 현장에 있었고 시위대 속으로 들어갔었어요. 이후 1919년 6월에 이청천과 탈출해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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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 시절 김경천 장군과 부인 유정화

 

문 : 김경천 장군은 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셨어요. 연해주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답 : 증조할아버지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셨어요. 그곳에서 교관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매진하셨구요. 여기서 구한국무관학교 출신인 신팔균 장군도 만나셨대요. 그래서 증조할아버지와 이청천, 신팔균 이렇게 세 분이 하늘 천(天)이 들어가는 별호를 나눠 가지셨는데, 증조할아버지는 경천(驚天), 지대형(이청천 장군의 본명)은 청천(靑天), 신팔균 장군은 동천(東天)이라고 했대요. 세 분을 일컬어 남만주 3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는 이청천 장군과 의논해서 이청천 장군은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증조할아버지는 연해주로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셨어요. 연해주는 혁명전쟁(러시아내전) 중이었지만, 15만여 명에 달하는 한인 공동체가 있고, 소비에트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문 : 러시아 연해주에서 김경천 장군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 활약상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답 :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인데 일단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스찬[水淸. 지금의 빨치산스크] 지역에서 동포들을 괴롭혔던 마적단 300여 명을 전멸시키고 말 300여 필과 소총 300여 정을 노획한 적도 있고요. 증조할아버지는 마적 퇴치 투쟁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이때부터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그 후 증조할아버지는 이 지역에서 군정을 펼쳐 동포들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1922년에는 이만에서 러시아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의 활약상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전투 중에 적군(赤軍)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증조할아버지는 자신이 지휘하는 스찬의병대와 함께 적군 잔여 병력도 함께 지휘하며 백군을 물리치고 이만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연해주 혁명사에 길이 남을 큰 승리였어요. 당시 일본은 이 지역에 최대 병력을 출병시켜 백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승리라 할 수 있어요.

문 : 그런데 김경천 장군은 1930년대 이후 소련 정부의 탄압을 받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런 건가요?

답 : 증조할아버지에게 일본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체포한 거예요. 이것은 스탈린의 대숙청과 한인 강제이주 정책 등과 맞물려 벌어졌어요. 대숙청 과정에서 한인 공산당 간부들이 대거 숙청됐고, 증조할아버지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고 일본육사를 나왔으니 소련의 관점으로는 나쁜 성분이었어요. 게다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공산당원도 아니었어요. 이 무렵 한인 독립운동 지도자들, 오랫동안 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체포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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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증조할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체포되셨다고 해요. 1936년 9월 체포되셔서 3년형을 받으셨고 2년 반 정도 복역한 후 1939년 2월 석방되셨어요.
이후 가족들이 있는 카자흐공화국으로 이동하셨는데, 거기서 다시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교정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히게 되셨어요. 1941년에는 시베리아로 이감되셨고, 1942년에는 꼬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유배되셨는데, 거기서 결국 숨을 거두셨어요. 안타깝게도 스탈린독재의 횡포에 희생되신 거죠. 증조할아버지는 스탈린 사후인 1959년 2월 복권되셨어요. 증조할아버지 유해를 찾아 고향으로 모시려는 소망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어느 나라든 간에 자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증조할아버지 같은 분들을 제대로 대우하면서 기념해야 하지요.

문 :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흔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가족들의 생활은 어떠했나요? 특히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신 후의 삶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답 : 가장 많이 고생하신 분은 증조할머니인 유정화 할머니예요. 선비 가문에서 출생해서 고생을 모르고 곱게 자란 규수였는데 독립투사의 아내가 되어 힘든 삶을 사셨어요. 카자흐스탄에서의 삶은 유형지로 간 죄수의 아내로서 특히 힘드셨지요. 그 당시 청소 같은 궂은일을 했어야 되는 상황이었고 고생이 심했죠. 하지만 그런 일도 귀족처럼 꿋꿋이 하셨다고 합니다.

문 : 김올가 씨는 지금 전남대 대학원에 재학중이시죠? 전공은 무엇인가요?

답 : 전남대 대학원 디아스포라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최근 수료했고요. 현재는 박사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논문 주제는 국내 거주 동포의 지역 수용에 관련한 연구입니다. 주로 안산과 광주에 있는 고려마을을 비교하여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실 부담이 좀 돼요. 전공 자체가 저와 저의 가족들, 더 나아가 고려인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고, 제가 이런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다는 것은 저 혼자의 논문이라기보다는 고려인을 대표하여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 : 김올가 씨는 연구소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특히 광주지부와 밀접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답 : 네. 한국에 온 지 약 4년 됐는데, 처음엔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데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어요. 카자흐스탄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왔으나 전남대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것이 문화와 언어 기타 문제나 그런 것 때문에 부담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학효 선생님을 통해서 광주대학교 김순흥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교수님을 통해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구요. 한국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김순흥 교수님과 광주지부 식구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싶어요.

문 : 최근 서울 사직동에 김경천 장군의 생가 표지석을 세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행 과정에서 어려움 같은 건 없었나요?

답 : 카자흐스탄에 있을 때부터 몇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직동 집터에 증조할아버지의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었어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신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손자인 이종찬 선생님과 우당기념관 상임이사인 황원섭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서 다행히 표지석을 세울 수 있었어요. 근데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일 것 같지 않더라구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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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마지막으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답 : 방금 카자흐스탄에 있을 때부터 몇 가지 소망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몇 가지가 더 있어요.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본격적인 전기를 출간하는 일, 백마를 탄 형상의 증조할아버지 동상을 세우는 일,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는 일,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기념관을 세우는 일, 증조할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일이 그것입니다. 사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유해를 찾는 일이지만 이것은 DNA검사 등 복잡한 작업이 필요하고 필수적으로 한국 정부와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일이어서 가장 힘든 일이에요. 하지만 실현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구요.
다행스러운 건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정말 좋은 일을 많이 하셨었나 봐요. 하늘도 할아버지 편을 드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증조할아버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설가 이원규 선생님이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평전을 쓰고 있어요. 거의 탈고 단계이구요, 늦어도 내년 내에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구소 회원분들도 김경천 장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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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을 위한 제안

 

독립운동하신 분들과 후손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실정에 대하여 안타깝다 못해 국가의 정통성마저 의구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독립운동 후손분들에 대한 예우는 더욱 존중하고 높여야 하여야 한다는 등의 말장난은 그만하고 친일파에 대한 재산몰수라든지 물리적인 처단이 어렵다면 역사의 평가와 응징을 통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겨야합니다.

 

하여 제나름대로 제언을 한다면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분석과 정리를 통하여 역사로서 응징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파들은 즉시 파묘하고 거기에 친일행위자가 묻혔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그 자의 무릅 꿇은 청동상을 세운다.

광화문광장, 독립기념관 광장등에 독립과 친일역사거리를 만들어 친일매국노들의 이름과 행적을 새긴 청동으로 깔고 그 내용이 선명하게 보일수 있도록 강화유리로 처리하여 사람들이 밝고 다니게한다.

그 앞에는 가장 존경받는 모습으로 독립운동가의 청동상을 만들고 앞에는 무릅 꿇은 친일파 조각상을 만들어 역사로서 응징한다.

친일파가 태어난 곳에는 그 지역을 상징하는 장소에 위와 같은 것을 지역규모에 맞게 설치한다

3.1절과 광복절에는 독립기념관과 광화문광장에 친일파상징물을 만들어 상징물을 밟는 친일밟기(지신밟기)놀이로 승화시켜 문화로 발전시킨다.

친일후손들에게는 일정기간 기준을 설정하여 공직은 철저히 배제한다.

중국의 남송 악왕묘(악의) 옆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간신 진회부부의 무릎꿇은 간신조각상이 있고 사람들이 침을 많이 뱉어 형식적으로 침을 밷지 마세요란 표지도 해 놓았다고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방법이라도 강구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였으면 합니다

 

 

 

수, 2018/10/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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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映畵俳優周潤發氏全財産寄附

 

錢蟲盈四海(전충영사해)

快擲此誰何(쾌척차수하)

衆語眞英傑(중어진영걸)

村儒詠讚歌(촌유영찬가)

 

홍콩의 영화배우 주윤발 씨의 전 재산 기부

 

온 세상이 돈벌레들로 가득한데

시원스레 내던지니 이 누구인가

뭇사람이 진짜 英傑이라 말하니

시골의 선비도 찬가를 읊는다네.

 

<時調로 改譯>

 

돈벌레 세상인데 쾌척하니 이 뉘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英傑이라 하니

시골에 사는 선비도 찬가를 읊는다네.

 

*香港: 홍콩  *四海: 온  세상.  사방의  바다  *快擲: 금품을  마땅히 쓸 자리에 시원

스럽게 내놓음 *誰何: 누구 *英傑: 영웅호걸(英雄豪傑) *村儒: 시골에 사는 선비.

 

<2018.10.18, 이우식 지음>

목, 2018/10/1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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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ihsH/2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0명? 1만3천명?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

2018년 3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2,959명입니다.

실제 회비를 내는 회원은 월 평균 9,818명입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 자료집 7~8P)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1만3천여 명이 아니라 고작 10명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임원이 5명입니다.

결국, 임원을 제외하면 회원은 고작 5명입니다.

■ 2017년 12월 ~ 2018년 3월 신입회원
민족문제연구소는 회보 『민족사랑』에 매월 신입회원과 신입회원 인사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17년 12월 신입회원만 27명이고, 2018년 1월 40명, 2018년 2월 69명입니다.
2018년도 정기총회가 열린 3월에는 46명이었습니다.
3월달 신입회원도 안되는 10명을 대상으로 총회를 소집하고, 의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2017년 12월 신입회원 27명

◎ 2018년 1월 신입회원 40명

 

◎ 2018년 2월 신입회원 69명

 

◎ 2018년 3월 신입회원 46명

■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

2018년 3월 24일.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가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수 백여 명의 회원이 참석했습니다.

(2018.10.12. 숙명여대에서 좌석수는 360석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알림/화보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0명!!!!!!!!!!
민족문제연구소는 3월 8일에 정기총회를 열었다며 서울시교육청에 의사록을 신고했고, 4월 24일에 임시총회를 열었다며 의사록을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회원이 참석한 3월 24일자 2018년도 정기총회 의사록은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3월 8일자 정기총회와 4월 24일자 임시총회는 도대체 누가 열었고, 누가 허위로 의사록을 작성했을까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시교육청에 신고한 총회의사록을 보겠습니다.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 정기총회 회의록 

1. 회의 일시 : 2018년 3월 8일 17:00~19:00

2. 회의 장소 : 민족문제연구소 3층

3. 회원 총수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4. 임원 총수 :   5명(함○○, 임○○, 윤○○, 조○○, 신○○)

5. 출석 회원 :   9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방○○, 이○○)

6. 출석 감사 :   2명(임○○, 최○○)

7. 회의 안건 : 2017년 결산 승인(안)

8. 회의 내용 

                     정관 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알린 후 개회를 선언하고, 사전에 통지한 사항인 다음의 의안을 부의하고 심의를 구하다.

[의안 상정] : 2017년도 결산 승인(안)

이하 생략…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 임시총회 회의록

1. 회의 일시 : 2018년 4월 24일 18:00~19:00

2. 회의 장소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청파동2가, 서현빌딩 3층) 소재 당 법인의 사무소

3. 회원 총수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4. 임원 총수 :   5명(함○○, 임○○, 윤○○, 조○○, 신○○)

5. 출석 회원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6. 회의 안건 : 2017년 결산 승인(안)

7. 회의 내용 

                     정관 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알린 후 개회를 선언하고, 사전에 통지한 사항인 다음의 의안을 부의하고 심의를 구하다.

[의안 상정] : 감사 선임

                 감사 최○○

위 피선자는 즉석에서 그 취임을 승낙하다. …

■ 언제부터 회원이 10명이 되었나?
○ 1997년 106명, 1999년~2000년 100명, 2002년 30명, 2003년 3월에 10명, 11월에 20명, 2004년 2월에 20명입니다.
2000년 초반 부터 회원이 많이 늘었는데 오히려 줄고 있습니다.
*년도별 총회의사록의 총 회원수는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jWTQ/6

◎ 1997년 6월 15일 정기총회 106명

2004년 4월 17일자 임시총회부터 전체 회원은 10명이 됩니다.
2008년 7월 15일자 임시총회에서 9명으로 줄고, 2009년 2월 21일자 정기총회에서 다시 10명이 됩니다.
이때 부터 2018년 4월까지 10명이 유지됩니다.

전체적으로 볼때 2004년부터 2018년까지 14년 동안 신규 회원이 한 명도 늘지 않고 10명을 유지합니다.

◎ 2004년 4월 17일 정기총회 10명


의사록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8년까지 회원이 단 한명도 증가하지 않습니다.


■ 1만3천여 회원은 어디로 갔습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3월 24일 숙명여대에서 개최한 총회는 무엇입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언제 10명에게 1만3천여 회원의 권리를 대신하라고 했습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언제 10명이 감사를 선출하고, 결산 승인을 대신하라고 했습니다?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개최한 총회에서 선출한 임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총회에서 승인안 결산승인, 예산승인, 사업승인은 무엇입니까?

목, 2018/10/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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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牧師輩與僧徒

 

病者焉嘲藥(병자언조약)

飢人捨食糧(기인사식량)

耶蘇同佛淚(야소동불루)

盜賊數無量(도적수무량)

 

목사들과 중들에게 告함

 

病者가 어찌 藥을 조롱하겠으며

굶주린 이가 양식을 버리겠는가

예수와 부처 눈물을 흘리시나니

도둑놈 숫자 헤아리지 못하겠다.

 

<時調로 改譯>

 

병든 이가 어찌하여 藥을 조롱하겠으며

잔뜩 굶주린 사람이 양식을 버리겠는가

예수와 부처가 우니 도둑놈이 無量하다.

 

*僧徒: 수행하는 중의 무리 *飢人: 기자(飢者). 굶주린 사람 *食糧: 양식 *耶蘇:

‘예수’의 음역어(音譯語) *盜賊: 도둑 *無量: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

 

<2018.10.19, 이우식 지음>

금, 2018/10/19-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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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을 기다리는 이름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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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그라퍼 김효룡 작가님이 참가자들에게 예쁜 글씨를 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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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 3팀으로 나누어 마곡사를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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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시 문화해설사분이 마곡사 답사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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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답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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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와에 놓인 돌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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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양주 김재광 회원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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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의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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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백범당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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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지’를 집필한 지수걸 연구소 이사(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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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대광보전 안에 시주자 명단에 ‘조병갑’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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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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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운동가 주하주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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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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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준찬 최수련 부부의 우리가락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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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공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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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공주시장과 공주지회 회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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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의인 고 안병하 치안감님의 아들 안호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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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까지 이어진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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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숙소를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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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숙소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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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세종회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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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에서 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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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치 전적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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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우 운영위원장의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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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을 기약하며 ‘친일파 청산!’

금, 2018/10/1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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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內外政勢

 

狡猫摩鼠子(교묘마서자)

餓虎舐羔羊(아호지고양)

兩者云仁愛(양자운인애)

歎聲滿四方(탄성만사방)

 

나라 안팎의 政勢

 

교활한 고양이가 쥐를 쓰다듬고

굶주린 호랑이가 어린羊을 핥네

兩者가 어짊과 사랑을 운운하니

감탄의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네.

 

<時調로 改譯>

 

狡猫가 쥐 어르고 餓虎가 어린羊 핥네

어짊과 또 사랑 따위 兩者가 운운하니

오호라! 감탄의 소리 사방에 가득하네.

 

*國內外: 나라 안팎 *鼠子: 쥐 *餓虎: 굶주린 범이는 뜻으로, 매우 위험하거나

무서운 대상을 이르는 말 *羔羊: 어린羊. 또는 염소와 羊 *仁愛: 어진 마음으로 

사랑함.  그 사랑  *歎聲: 몹시  감탄하는  소리. 몹시  한탄하거나  탄식하는 소리.

 

<2018.10.21, 이우식 지음>

일, 2018/10/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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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隣村老巨富入獄

 

錢財無限慾(전재무한욕)

末路果如何(말로과여하)

我樂貧窮道(아락빈궁도)

蝸廬又醉哦(와려우취아)

 

이웃 마을 늙은 巨富가 감옥에 갇힘을 보며

 

돈에 대한 욕심이 무한하더니

마지막 무렵이 과연 어떠한가

나는야 빈궁함의 道를 즐기며

오두막에서 또 취하여 읊는다.

 

<時調로 改譯>

 

錢財慾 끝없더니 末路 과연 어떠한가

나는야 가난함과 궁색의 道를 즐기며

초라한 오두막에서 또 취하여 읊는다.

 

*隣村: 이웃  마을 *巨富: 대단히  많은  재산.  富者  중에서도 특히 큰 富者 *入獄:

감옥에  들어감. 또는  감옥에 갇힘. ≒입뢰(入牢) *錢財: 돈 *末路: 사람의 일생

가운데에서  마지막 무렵. 또는 망해 가는 마지막 무렵의 모습 *貧窮: 가난하고

궁색  *蝸廬: 달팽이의  집이라는  뜻으로, 작고  초라한  집을 비유으로 이르

. 와사(蝸舍). 와실(蝸室). 와옥(蝸屋). 또는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2018.10.22, 이우식 지음>

월, 2018/10/2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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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합 뉴스에서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식민지 역사 박물관에

백범 김구 선생님을 암살한 안두희를 죽인 몽둥이 “정의봉”을 식민지 역사 박물관에 전시하도록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에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백범 김구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어렸을 때에 선친께서 읽어주시던 백범 일지를 기억합니다.

또한 고인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하신 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두희는 분명히 일제가 아닌 대한민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법의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판결문에도 진범으로 되어 있고 수사 기록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법의 심판이 충분했냐와는 별개로 그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현대 사회와 대한민국에서 모든 심판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테러가 성행하고, 법을 무시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내가 억울하다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이 추앙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까요?

대한민국에는 준법 정신과 법과 원칙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안두희를 때려죽인 사람은 살인범이며, 우리 사회의 법치를 어지럽힌 범죄자입니다.

이 결정을 민주 시민의 입장에서 재고 부탁 드립니다.

 

월, 2018/10/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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