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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민족음악의 수호자’ 노동은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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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민족음악의 수호자’ 노동은 선생을 기리며

익명 (미확인) | 화, 2018/01/0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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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 민족음악의 스승이셨던 노동은 교수님!
선생님께서 2016년 12월 2일 국민적인 애도 속에 우리 곁을 떠나실 무렵,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은 촛불시민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촛불은 마치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민족음악의 역사적 실현이란 과업을 이룩하고자 노심초사하시던 열망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족적인 소망은 결실을 맺고 전기를 맞이하였으나, 선생님은 그 국민적인 승리의 합창을 듣지 못한 채 기어이 소천하시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의 깃발 아래서 보다 자유롭고 넉넉하게 선생님께서 탐구해 오셨던 민족음악의 세계를 구축하실 수 있게 된 새로운 세상을 향유하시지 못한 채 떠나버린 선생님이시기에 저희들은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던 노동은 교수님이시여!
선생님은 일찍이 음악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조직화된 소리”라고 정의하여, 음악을 전문 음악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인간이 함께 즐겨 듣고 감동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풀이해 주었습니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며, 베토벤이 너무나도 좋아 그의 머리를 흉내 내려고 미장원엘 다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베토벤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예술을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적인 만족감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국경이 없이 모든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로하고자 음악활동을 했다는 베토벤의 예술적 투지는 바로 노동은 선생님의 예술적 투혼이기도 합니다.
국경이 없다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굳이 민족음악을 강조하시며 일생을 민족음악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바로 고통 받는 민족을 위로하고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찍이 이강숙, 이건용 선생님과 함께 ‘민족음악 연구자 3총사’로 맹활약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참다운 민족음악의 얼을 찾고자 작곡가 김순남과 정율성 등과 같은 격변기의 민족해방투사의 음악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남긴 폐해에도 주목하여 친일음악과 왜색가요의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결혼행진곡’의 작곡자가 나치가 숭앙했던 바그너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곡은 물론이고 바그너 음악 전체를 연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면 끝까지 추적하여 벌한다고 알려준 것도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결코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피아노와 풍물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문화 속에 이미 널리 스며든 뽕짝 같은 왜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것조차도 우리 문화의 일부이므로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켜 역수출을 해야 한다”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와 강의를 겸하시던 그 열강을 이제 우리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음악사에 길이 남을 ????항일음악 330곡집????을 남겨 주셨습니다.
노동은 선생님! 선생님을 잃은 저희들이 슬픔을 딛고 그나마 위안을 삼는 점은 선생님의 유업들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명진 사모님과 아드님 노관우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 그리고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힘을 합해 선생님께서 터 잡은 민족음악의 고귀한 과업을 이어 가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이제 모든 염려 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삼가명복을 빕니다.

2017. 12. 9. 임헌영 올림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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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_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0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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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_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기획 제작 등: PD 김세호,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8/04/0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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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기,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 당시의 제도와 문화를 생동감있게 풀어내고 오늘 우리의 모습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추적합니다.

‘내역사’ 시즌2 – 1회 미식가 “식목일의 기원”

출연 : 이순우, 김영환, 강동민

연출 : 임선화

월, 2018/04/0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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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가 봄개편을 했습니다.

‘내역사’ 시즌2 – 역전다방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월, 2018/04/0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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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2018년도 정기총회가 4월 6일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열렸다. 총회개회와 인사 (공동대표 이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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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 개회와 인사말 (공동대표 이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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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계, 업무 감사보고 (감사 박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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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사업보고 (공동대표 이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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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2018년도 정기총회가 4월 6일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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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원소개 (운영위원장 최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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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원소개(부회장 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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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원소개 (부회장 박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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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합사쳘폐소송 보고 (민족문제연구소 대회협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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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합사철폐소송 보고 (원고 이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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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감사 임명 (감사 이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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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팔순 축하

월, 2018/04/0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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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8/04/1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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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2회 임시정부와 3.1혁명 2편 – 3.1혁명의 이름없는 영웅들”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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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8/04/10-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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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내역사’ 시즌2 – 비하인드히스토리 “경희대학교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 YouTube

근현대역사 100년 동안 켜켜이 쌓인 역사적폐의 현장을 찾아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적폐청산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목, 2018/04/1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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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4/16-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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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경희대학교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2회 임시정부와 3.1혁명 2편 – 3.1혁명의 이름없는 영웅들”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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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월, 2018/04/1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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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3회 임시정부와 3.1혁명 3편 – 임시정부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나?”

☞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경희대학교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2회 임시정부와 3.1혁명 2편 – 3.1혁명의 이름없는 영웅들”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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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8/04/1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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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자. 해태상(해치상)이 원래의 위치인 광화문 앞에서 경복궁 안쪽 구석에 옮겨져 거적때기에 둘러쌓인채 방치되고 있다는 기사다.

“오백년 옛 대궐 경복궁 앞에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해태(해치)를 보았으리라… 무슨 죄 있어 다리를 동이고 허리를 매어… 궁궐 한편 모퉁이에 결박 당하고 거적 쓴 채로 참혹하게 드러누웠더라.” 광화문 월대 앞에서 경복궁을 지키고 서있던 해치가 궁궐 한편에 쳐박혀있는 몰골을 전한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 기사다.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광화문 앞의 해치가 철거·이전된 것이다. 거적때기에 쌓여 궁궐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초라한 몰골은 식민지 조선의 딱한 처지를 웅변해주었다.

궁궐의 입출구를 구분짓는 월대 앞에 놓인 해치는 일종의 하마비 역할도 했다. 지금부터 궁궐권역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였다. “1870년(고종 7년)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로 삼았고…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 말을 탈 수 없다”(<고종실록>)는 기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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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발표한 광화문 앞 공간 복원 계획도. 월대와 해치를 복원한 역사광장과 시민들의 공간인 시민광장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공간 사이에 ㄷ 형태의 도로가 예정돼있다.

1924년 10월 조선총독부 정동 분실에서 일어난 불의 원인이 ‘해치상을 치워버린 탓’이라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찜찜했던지 일제는 쳐박아두었던 해치상을 조선총독부(중앙청) 뜰 앞에 옮겨놓았다. 지금 광화문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로 서있는 옹색한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 때 재이전한 것이다. 물론 제자리가 아니다. 광화문 해치는 흔히 ‘불(火)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궁문 앞에 세워놓은 흰돌의 물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규경(1788~?)이 “해치는 화수(火獸), 즉 불을 먹고 사는 짐승”(<오주연문장전산고>)이라 한데서 유래한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해치는 또 예부터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수(神獸)로 알려져 왔다. 후한의 왕충(27~97?)은 “해치는 옥사를 다스릴 때 죄가 있는 사람을 골라 들이받는 속성이 있다”(<논형>)고 기록했다.

역시 후한의 양부가 지은 <이물지>는 “외뿔 짐승인 해치는 싸움이 일어날 때 부정직한 자를 들이받고, 바르지 않는 자를 깨물었다”면서 “전국시대 초나라 법관들은 해치관을 법복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후 동양에서 법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해치관(冠)이나 해치문양의 관복을 의무적으로 입었다.

요즘의 검찰·감사원에 해당되는 조선시대 사헌부 관리들은 마찬가지였다.

“1796년(정조 20년)사헌부 지평(정 5품)이 해치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직됐다”(<정조실록>)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다.

해치를 궁궐 앞에 세워둔 까닭은 자명하다. 출퇴근하는 관리들은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 속 먼지를 털어내고 공명정대한 정사를 다짐하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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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07년 사이 촬영된 광화문 앞. 해치상과 월대가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10일 맺은 광화문 역사광장 조성 업무협약의 주요내용이 바로 ‘광화문 앞 월대와 해치상의 제자리 찾기’이다.

물론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의 언급처럼 역사광장(월대·해치)과 시민광장이 ㄷ자형 도로로 양분되는 등의 새로운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광화문 앞 공간을 반드시 광장으로 꾸며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나온다. 깊이있는 토론과 의견 수렴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책이라면 시대마다, 정권마다 제각각의 복원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두 일리있는 지적이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월대와 해치는 제자리에서 제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해치의 꼬리를 매만지면서 스스로 마음을 단속하고 시비곡직을 다짐하는 통과의례가 요즘처럼 절실한 때가 또 어디 있는가.<참고자료>

이순우, <광화문 육조 앞길-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하늘재, 2012
<테라우치, 조선의 꽃이 되다>, 하늘재, 2004
김언종, ‘해태고’, <한국한문학연구> 제42권 42호, 한국한문학회, 2008
이성준, ‘경복궁 근정전 월대 난간석주상 연구’, <미술사학연구> 272호, 한국미술사학회, 2011

<2018-04-12> 경향신문

☞기사원문: [여적]광화문 해치의 제자리찾기

목, 2018/04/1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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