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초등성평등연구회’에 이돈명인권상

지역

‘초등성평등연구회’에 이돈명인권상

익명 (미확인) | 금, 2018/01/05- 20:44
0105-10

▲ 2017년에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SNS 해시태그 운동을 펼쳐 큰 호응을 얻은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제7회 이돈명인권상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 초등성평등연구회 페이스북)

초등학교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해 온 교사 모임이 이돈명인권상을 받는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초등학교 교사 13명이 모인 ‘초등성평등연구회’를 제7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1월 4일 밝혔다.

이에 대해 초등성평등연구회 서한솔 회원은 “2017년은 이룬 것이 없는 굉장히 고생스러웠던 해였는데, 이돈명인권상 수상은 유일하게 들려온 좋은 소식”이라면서 “여성 인권, 모든 인간의 삶에 관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교육의 역할로 조금 더 나아지게 노력하겠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창립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SNS에서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으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소개했다.

또한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활발한 활동, 자체 연구 제작한 교안의 완성도와 수업 활용도, 향후 활동에 대한 기대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실질적 성평등 과제를 초등학교까지 넓혀 사회적 확산효과가 크다”고 시상 이유를 설명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교과서의 성불평등을 분석하고 재구성하기, 학생들이 접하는 미디어를 젠더(성, Gender)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기 등을 수업에 적용해 왔고,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성편견 인식과 생리에 관한 수업, 독서교육을 통한 양성평등 수업 등 다양한 페미니즘 교육을 하고 있다.

이돈명 변호사(1922-2011)는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 사건 변호를 맡는 등 민주화와 천주교 사회운동에 기여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이 변호사를 추모하고 인권의 가치에 대한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11년 인권상을 만들었다. 2017년 이돈명인권상은 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이 받았다.

시상식은 1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gt;

<2018-01-05> 가톨릭뉴스 

☞기사원문: ‘초등성평등연구회’에 이돈명인권상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항일투쟁의 숭고한 불꽃을 피운 안성의 정신 계승

6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안성 공도중학교(교장 한지숙)는 친일잔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사업으로 친일 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를 교체 완료했다고 지난 20일 발표하였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음악 단체인 ‘대화악단’과 ‘후생악단’에서 활동한 인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음악가로 등재됐다.

학교는 지난해 대토론회를 통해 도출된 다양한 학내 일제 잔재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청산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이번 교가 개정도 그 작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공도중학교는 학교 교육공동체 구성원들과 심도 있는 협의 끝에 지난 7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여, 재학생과 학부모, 교직원, 동문 등 전문가 및 시민들을 대상으로 30일간의 가사를 공모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응모한 79편의 작품 중 예심을 통과한 9편을 대상으로 치열한 논의를 거쳐 학생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서정적인 가사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음악 교사의 주도로 다양한 스타일의 작곡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그중에서 참신하고 아름다우며 부르기 쉬운 미래지향적인 곡이 학생들의 전폭적인 선택을 받아 새로운 교가로 결정되었다. 새로운 교가를 들은 학생들은 기상과 정기를 강조했던 특색이 없고 획일적인 군가식 교가와는 달리, 다양한 선율과 아름다운 가사로 오래 간직하고 싶은 교가라며 입을 모아 자랑하고 있다.

한지숙 교장은 “친일 작곡가의 곡이 교가로 불렸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교가 교체 작업에 함께한 공도 교육 가족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새로운 교가는 참신하고 부르기 좋아서 행사곡에 머물지 않고 평소에도 즐겨 부르며 애교심은 물론 학생 스스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도전 의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안성/서태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0-11-23> 수도권일보 

☞기사원문: 안성 공도중학교. 친일 음악가 작곡 교가 교체

수, 2020/11/25- 07:47
4
0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현장 ‘긴급’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이유

제 고향은 대전입니다. 가끔 내려가서 야구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빵집을 갑니다. 11년간 했던 일이죠. 그러나 이번에 내려간 고향은 달랐습니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 학살 현장, ‘대전 산내 골령골’입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대전 학살의 현장에 간 이유는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의 기사 때문입니다. 15일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상임대표 박규용)는 긴급 공지를 통해 “공동조사단에서 긴급히 일손을 찾고 있다”고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긴급’과 ‘호소’라는 단어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관련 기사] “16일 대전 유해 발굴 현장보존 자원봉사자 찾아요” http://omn.kr/1qir2)

아버지의 금니

▲ 유족 박귀덕 할머니 ⓒ 홍승주

16일 낮 12시,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30분을 가서 ‘동구 낭월동 13번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단풍이 물든 평범하고 낮은 산입니다. 내리자마자 새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말하자 할머니 한 분이 사탕을 주며 꼭 안아줬습니다.

“아따, 고맙소잉. 돈 있으면 맛난 거 사주고 싶소잉. 젊은이들이 참 순해서 좋소. 내년에도 보소. 오메~ 참말로 이런 가슴 찢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대전에서 들은 광주 사투리였습니다. 박귀덕 할머니의 아버지는 민간인 학살 당시 광주에서 대전까지 끌려와 희생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광주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자주 대전에 방문해 위령패 옆 꽃을 바꿔놓습니다.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박귀덕 할머니의 손에는 ‘치아 유골’이 있었습니다. 치아의 금니를 만지며 ‘자신의 아버지도 금니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할머니의 말에 제가 어디 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금니가 달린 치아는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유골을 말리고 있습니다. ⓒ 홍승주

“교회 문 열지 마세요”

“자원봉사에 오신 분들에게는 현장 설명을 먼저 합니다. 하지만 현장 설명보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뼈더미를 보면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충격에 직면하죠.” (공동조사단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팀장)

도착하자마자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발굴지에서 나온 유골들은 세척 작업 후 아세톤이 가득 든 통에 담가둡니다.

저는 유골들을 아세톤 통에서 꺼내 건조 쟁반에 놓아두는 일을 했습니다. 길고 속이 빈 다리뼈를 통에서 들어 올리니 찬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세톤 냄새도 훅 덮쳐왔습니다. 쟁반이 부족할 정도로 유골이 많았습니다. 거리를 약간만 떼어 두고 번호가 붙여진 쟁반에 최대한 많은 유골을 배치했습니다.

쟁반이 다 차면 햇볕 좋은 곳으로 옮깁니다. 70년 만에 햇빛을 보는 희생자의 유골은 정말 많았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려 모아 놓은 장작 나무 같던 다리뼈, 두개골 뼈, 잘 부서지는 잔뼈, 그리고 단추, 신발 밑창, 옥색의 탄피, 탄피들.

▲ 건조 중인 뼈들 ⓒ 홍승주

함께 작업하던 박정순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국장이 말합니다.

“제가 간호학과를 나왔는데, 그곳에서 보던 것보다 이곳에서 훨씬 많은 뼈를 봤어요.”

임마누엘 교회에 딸린 화장실을 쓰면 된다는 안내를 받고 교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보게 된 광경입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임마누엘 교회 안 뼈 사진 ⓒ 홍승주

모래주머니를 나르는 개미들

“성미산학교, 지역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단체 등 많은 분이 자원봉사로 다녀갔어요. 발굴장에 사오십 명이 바글바글할 때도 있죠. 공동 발굴단은 멤버가 딱 정해져 있지는 않아요. 하루를 와서 조사해도 공동 조사단의 일원입니다.” (공동조사단 총괄 담당 안경호 4.9 평화재단 사무국장)

저는 올해 발굴작업이 다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골령골로 갔습니다. 유해 발굴은 겨울 동안 잠시 멈췄다가 2021년에 다시 시작합니다. 봉사자들은 내년에 있을 추가 유해발굴을 위해 파헤친 구덩이를 보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뼈가 있는 부분은 천으로 단단히 감쌌습니다. 큰 비닐 포장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붙잡고 구덩이 바닥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비닐 포장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모래주머니를 포장 이것 저곳에 올려놓았습니다.

▲ 구덩이 보존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 홍승주

서울에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제가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모래주머니를 날랐습니다. 집에 와서야 중노동의 현장이었다는 걸 쑤신 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휴우’ 소리 한마디가 사치스러운 곳이었지요.

공동 발굴단은 호흡이 척척 맞았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짐을 지고 나르는 개미처럼 힘을 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여기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발굴단을 이끄는 안경호 사무국장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파스를 붙이는 사람이 많아요.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해야 하니깐요. 흙벽을 깎고 나르는 일이 상당히 고됩니다.”

저는 사람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발굴 현장에 참여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임재근 팀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희생된 분들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겠다는 부채감과 책임감이 큽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재발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나와 내 가족들도 그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공동조사단 모두는 자신의 가족 유골을 추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산속이라 오후 4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많기에 누구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걱정도 미뤘나 봅니다. 유골을 꺼낼 때 마다 묻혀있던 아픔이 고스란히 제 마음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죽은 이로부터 배우는 인권

▲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 홍승주

해가 완전히 졌음에도, 조사단은 작은 불빛에 의지해 세척, 분류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발굴 현장 한구석에 마련된 오두막에서 감식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도 있었습니다.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유가족을 찾아주는 게 문제 해결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유골이 집단으로 섞였기 때문에 디엔에이 검사할 필요도 없고 나오지도 않아요. 유족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검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각기 다른 정치 이념을 갖고 있던 남북한이 한국전쟁을 하며 발생했죠. (…) 유해발굴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인권을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70년 전 골령골에서 벌어진 일

1950년 골령골에서 특별경비대원으로 학살 현장에 있었던 김아무개씨는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나와 당시 지휘관이었던 심용현 중위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심 중위의 명령에 따라 경찰과 헌병이 각각 10명씩 조를 짜서 재소자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 헌병지휘관이 청년방위대에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

▲ 1950년대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현장입니다. 미국 장교 애버트 소령이 찍고, NARA가 발굴했습니다. ⓒ 미국립문서보관소

오후 7시. 공동조사단 숙소로 돌아가는 조사 단원 한 명과 함께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갈 기회다 싶었죠.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주용성 사진기자에게 조사단 전원의 넘치는 열정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한 번 오면 계속 오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몸 힘든 것만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2021년에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한 번 더 오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달리는 택시 창문으로 보이는 산속 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로등 천국 서울에 사는 저는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0년 전, 오늘 제가 만진 유골의 주인들도 이런 어둠 속에 있었겠지요. 구덩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던, 그리고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던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공포와 억울함, 그리고 한. 지난 70년이 흐르는 동안 골령골의 어둠 속에는 영혼의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

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를 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남한 정부는 보도연맹을 적으로 판단합니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승만 정부의 군인과 경찰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한 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했습니다.

희생자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단일지역 민간인 피해 최대 규모입니다. 그들은 무참히 학살되어 암매장되었습니다.

학살 후에도 남겨진 가족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연좌제 때문입니다. 유가족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아픔은 계속되었습니다. ‘죽인 자’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들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50여 년 간 이 사실을 덮었고, 진실은 2007년이 되어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희생자들은 어두운 땅속에 묻혀 있다가, 70년 만에 유해발굴을 통해 볕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월 8일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학살이 이뤄진 대전 골령골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처음으로 발굴됐습니다.

올해 40여 일간 진행된 유해발굴은 마무리되었고 2021년에 추가 유해발굴이 진행됩니다. 2022년부터 이곳 산내 골령골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평화역사공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공동발굴단이 될 기회는 1년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그때 <오마이뉴스>를 통해 한 번 더 알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사단원 선배들이 남긴 편지를 소개합니다.

“이 순간에 함께 한 증인으로서 앞으로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하겠습니다.” – 성미산 학교 학생들

▲ 성미산 학교 학생들의 편지 ⓒ 홍승주

홍승주(hongsam3503)

<2020-11-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할머니가 손에 쥔 치아 유골… “교회 문 열지 마세요”

수, 2020/11/25- 08:10
0
0

기억의 법제화와 법을 통한 친일청산

민족문제연구소가 많은 어려움을 딛고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 그해 11월8일 국민보고대회를 열었다. 대회 참석자들이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로 향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토지부 등재를 ‘사정 추정’ 판결
등기명의자인 국가 물리치고
친일 후손이 토지 찾는 일 빈번
‘친일재산 포함이 타당’ 반론도

외국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이 해방되었을 때 많건 적건 외세에 부역한 사람들을 단죄하려고 한다. 청산의 폭과 성격은 기억을 동원하는 양상과 방식에 좌우되는데 기억의 동원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체계에서 그 민족이 차지하는 지위 그리고 외세와 그 민족의 국제정치적 관계 등 거시적 조건이 과거청산을 둘러싼 정치적 여건과 함께 기억의 내용과 강도를 결정하는 데 크게 작용한다. 과거청산에는 민중의 일상적 기억이 중요하지만 정치적 지도세력의 기억, 그에 의해 정치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취하는 역사에 대한 정의가 결정적이다.

한국은 국제평화레짐이 형성되어간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주권국가로 인정되어 근대 국제법질서에 참여했다. 따라서 항일운동은 주권회복을 표방했고, 외세에 불법점탈된 영토를 회복한 주권국가의 부역자 처벌과 유사한 논리로 인적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동력을 생산해냈다. “친일”은 의연히 존재하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며, 근대화에 기여했음을 내세워 반역을 정당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외세의 지배가 3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계속됐고 상당한 동화가 진행됐다는 현실이 있었다. 반역을 단죄하려 할 때 단죄의 근거가 되는 과거의 유효한 법질서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은 반역에 대한 처벌에 저항하는 힘과 논리를 만들어냈다. 반제국주의적 성찰성을 결여한 또 다른 외세의 개입, 분단, 공산체제와의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인적 청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프랑스처럼 부역자를 숙청하는 법과 재판소를 만들어 운영한 나라를 보고 그 나라의 엄정한 기강을 칭찬하곤 한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숙청은 민간에서 벌어지는 초법적 징벌을 종식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제도화된 숙청은 제도화되지 않은 폭력에 재촉되는 한편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미군정의 철저한 폭력관리로 인해 초법적 징벌이 어려웠기 때문에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재촉하는 동력이 제한되었다. 1947년 조선과도입법의원의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가 좌초되고 1949년 제헌의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무력화된 것은 반공을 구실로 한 조직적 방해를 넘어설 만큼 민간의 보복 동력이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일제의 폭력기구에 종사하면서 탄압의 기법을 체득한 공안세력에 의해 공산폭도로 몰리기 십상인 상황에서 불만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응보를 위한 민간의 열기에 뒷받침되지 못한 채 단 한 명도 단죄하지 못하고 종료된 반민특위의 경험은 대한민국을 만성적인 정당성 결핍에 빠지게 했다. 반공과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가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동원되었지만 경제성장이 민주화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자 오히려 과거청산의 요구가 더욱 강렬히 분출되었다.

역사기억은 구조적 동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활동가”들의 실천을 통해 동원된다. 권위주의시대, 재야에서 널리 읽힌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하면서 “친일과거청산”은 시민운동으로 발전했다. 기억을 동원하는 행위는 계보를 달리하는 사건들에 매개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간다. 그 과정에서 역설적 상황도 발생한다. 지방자치의 발전은 친일행위자를 기념하는 행사들 또한 활성화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친일과거를 공론화했고, 기념대상자의 행적조사가 민족문제연구소의 기능을 강화해주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2003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자 했는데 예산 지원을 당시 한나라당이 거부하자 대중의 비난이 일었다. 이것이 이미 발의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연료를 제공했다. 이 법안을 발의한 154인의 국회의원 중 49인이 한나라당 소속이었음에서 보듯이 친일과거청산의 명분은 거역할 수 없었다. 이 법안은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외세 지배 길어져 상당한 동화
반역 단죄 유효한 법질서 부재
‘반민족행위처벌법’도 무력화
“대한제국 형법대전 있었는데…”

기억활동가 덕분 시민운동 번져
반민족행위규명법 등 제정돼
친일행위자 기념 행사 활성화
되레 친일과거 공론화 불붙여

반민족행위규명법은 18개의 “친일반민족행위” 유형을 열거하고 위원회를 설치해 조사대상자를 선정해 조사한 후 그 결과를 공표하도록 했다. 2004년 말 법률이 개정되어 행위 유형이 20개로 늘어났으나, 일본 귀족원 또는 중의원 의원 및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 외에는 직책을 중심으로 행위를 규정하지 않았으며 “탄압에 앞장선” “집행을 주도한”과 같은 용어로 행위 요건을 강화했다.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5년 5월부터 4년반 동안 가동하여 1006명에 대해 반민족행위 결정을 내렸다.

반민족행위규명법과 자매관계에 있는 법률이 2005년 12월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다. 사실 친일재산귀속법은 다른 배경에서, 더 일찍 논의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친일파”의 땅 찾기가 발단이었다. 법원은 원래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따라 사정(査定)을 받은 토지는 그 사실을 입증하면 등기명의와 무관하게 소유권을 인정했는데, 1986년 대법원은 토지조사부에 등재되었다면 사정이 추정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친일파”의 후손이 등기명의자인 국가를 물리치고 토지를 찾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1995년부터는 지적전산화에 힘입어 행정자치부와 지자체가 “조상 땅 찾기”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그런 일이 더욱 쉬워졌다. “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1990년대 전반기에 대두한 것은 이를 배경으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재산귀속법은 친일파의 공격적 땅 찾기에 대항하는 방어적 성격을 갖는다는 평가도 있다.

이 법률은 반민족행위규명법이 열거하는 행위 가운데 정도가 중한 것을 추출해 그것을 범한 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의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러일전쟁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를 받은 재산”을 취득의 원인행위 때로 소급하여 국가에 귀속하도록 했다. 이 기간에 취득한 재산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했기에 귀속결정은 비교적 용이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4년간 활동해 168명이 남긴 2359필지(1113만9645㎡, 시가 2107억원 상당)의 국가귀속을 결정했다.

반민족행위 결정과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은 많은 쟁송을 야기했다. 결정을 취소하라는 행정소송과 국가귀속에 대항해 소유권이전등기말소소송이 제기되었고, 반대로 친일재산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 또는 제3자에게 매각한 경우 매매대금의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하는 국가의 소송도 있었다. 반민족행위규명법은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행위를 규정했는데, 한일합병의 공으로 수작(受爵)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면서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이 성공을 거두자 2011년 국회가 법을 개정해 한일합병의 공과 무관하게 작위를 받은 것 자체를 반민족행위로 규정한 것도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확정판결이 있는 경우 새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개정법률 부칙은 “한일합병의 공”으로 수작한 것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은 사람의 재산을 국가귀속으로부터 보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유권이전등기를 청구한 국가가 하급심에서 패소해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사건도 있다. 이 사건 항소심에서는 광복회가 보조참가를 시도해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쟁송에서 사법부는 반민족행위 결정 및 재산귀속을 옹호했다. 헌법재판소도 개정 전후에 걸쳐 두 법률의 합헌성을 확인했다. 헌재는 사자(死者)와 유족의 인격권 침해가 과잉금지에 해당하지 않고,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환수도 헌법이 표현하는 역사적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예상할 수 있었으며 달성되는 공익이 중대하므로 허용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반론도 적지 않다. 토지조사사업에 따라 사정을 받은 토지를 친일재산에 포함시키는 것의 타당성은 한말·일제하 토지소유에 대한 역사 연구에 비추어 검토해봄직하다.

한 헌법재판관의 의견은 다수의견은 아니지만 친일청산을 위한 역사적 기억과 그것을 법제화할 때의 난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를 대한제국기의 형법대전(刑法大全)이 처벌한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반역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환수하는 것의 정당성을 그로부터 찾았다. 동시에 일제에 의해 토지·임야사정부가 작성되기 이전에는 토지소유권에 대한 대세적 공시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달리 증명할 방법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사정을 친일재산임이 추정되는 재산 취득에 포함시킨다면 위헌이 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해방 후 60년 넘게 지나 법을 통해 과거를 청산하려는 시도는 친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일제 지배의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현실 및 그에 터 잡아 쌓인 법원의 기관기억(institutional memory) 사이의 모순을 노출한다.

이철우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0-11-24> 경향신문

☞기사원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24)일제 토지조사 때 받은 땅, 친일 후손 소유권 인정 ‘법과 기억의 모순’

수, 2020/11/25- 07:31
2
0

0403-4

[팟빵-바로듣기] [다운로드] 

☞ (11.24) ‘내역사’ 시즌 5: 사북항쟁 40주년 특집 방송 “1980년 4월 21일~24일까지의 기록”

☞ (11.17) ‘내역사’ 시즌 5: 19화 “해방 후 3년” _그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_박헌영편

☞ (11.10) ‘내역사’ 시즌 5: 18화 “해방 후 3년” _그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_여운형편

☞ (10.27) ‘내역사’ 시즌 5: 17화 2부 “해방후 우리군은 숙군과정을 통해 어떻게 정치군인이 되었는가?

☞ (10.20) ‘내역사’ 시즌 5: 17화 1부: “해방후 우리군은 어떻게 창설되었나?

☞ (10.13) ‘내역사’ 시즌 5: 16화: 선출되지 않는 권력, 대한민국 판검사의 뿌리는? 2부

☞ (10.09)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_한글날 특집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 지켰나?’

☞ (10.06) ‘내역사’ 시즌 5: 16화: 선출되지 않는 권력, 대한민국 판검사의 뿌리는? 1부

☞ (7.28) ‘내역사’ 시즌 5: 15화: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서승교수와 함께 2부

☞ (7.21) ‘내역사’ 시즌 5: 15화: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서승교수와 함께 1부

☞ (7.14)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2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7.07)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1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6.30) ‘내역사’ 시즌 5: 13화: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대표적인 7곡을 소개합니다”

☞ (6.25)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2부

☞ (6.23) ‘내역사’ 시즌 5: 12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옹진의 민간인 학살과 동키부대”

☞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1부

☞ (6.16)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수, 2020/11/25- 07:32
0
0

[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금, 2020/11/27- 00:46
0
0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소속 작가들이 친일 문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동인문학상 폐지 촉구 작가행동은 오늘(27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식민지 지배를 겪고 강대국의 침략을 받은 세계의 수많은 국가 중에서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범죄자, 역사 반역자, 민족 반역자들을 두둔하고 그들을 기리는 기념상을 만들어 찬양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작가행동은 “누구보다도 올바른 양심을 지키고 문학적 자존감을 지녀야 할 작가들이 이 같은 공모에 영혼을 팔고 있다.”며 “조선일보에서 주는 친일 문인 기념상의 대표격인 ‘동인문학상’을 한국의 소설가들은 그렇게도 받고 싶은가”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들은 김동인이 자발적으로 황군을 위문하는 문단의 사절로 활동했고,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 작가 간담회에 출석해 ‘내선일체’를 선동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 일제에 협력하는 글을 썼고, 친일 소설과 산문도 여러 편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작가행동은 “동인문학상은 이제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역사의 문제이자 문단 적폐 청산의 중대한 과제”라면서 “동인문학상을 주관하는 조선일보사는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고 더는 동인문학상을 운영하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어 “우리말을 가르치고 우리글을 쓰는 평론가, 대학교수, 소설가들은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친일 문인 기념 동인문학상 심사와 수상을 당장 거부할 것을 촉구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일보에 친일문학에 관해 토론할 의사가 있으면 언제든지 토론의 장으로 나오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김석 기자 ([email protected])

<2020-11-28> KBS 

☞기사원문: 작가행동 “친일 문인 기리는 ‘동인문학상’ 폐지해야”

토, 2020/11/28- 11:11
1
0

0403-4

[팟빵-바로듣기] [다운로드] 

☞ (12.01) ‘내역사’ 시즌 5: 20화 “해방 후 3년” 그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송진우와 한민당

☞ (11.24) ‘내역사’ 시즌 5: 사북항쟁 40주년 특집 방송 “1980년 4월 21일~24일까지의 기록”

☞ (11.17) ‘내역사’ 시즌 5: 19화 “해방 후 3년” 그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박헌영편

☞ (11.10) ‘내역사’ 시즌 5: 18화 “해방 후 3년” 그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여운형편

☞ (10.27) ‘내역사’ 시즌 5: 17화 2부 “해방후 우리군은 숙군과정을 통해 어떻게 정치군인이 되었는가?

☞ (10.20) ‘내역사’ 시즌 5: 17화 1부: “해방후 우리군은 어떻게 창설되었나?

☞ (10.13) ‘내역사’ 시즌 5: 16화: 선출되지 않는 권력, 대한민국 판검사의 뿌리는? 2부

☞ (10.09)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한글날 특집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 지켰나?’

☞ (10.06) ‘내역사’ 시즌 5: 16화: 선출되지 않는 권력, 대한민국 판검사의 뿌리는? 1부

☞ (7.28) ‘내역사’ 시즌 5: 15화: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서승교수와 함께 2부

☞ (7.21) ‘내역사’ 시즌 5: 15화: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서승교수와 함께 1부

☞ (7.14)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2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7.07)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1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6.30) ‘내역사’ 시즌 5: 13화: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대표적인 7곡을 소개합니다”

☞ (6.25)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2부

☞ (6.23) ‘내역사’ 시즌 5: 12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옹진의 민간인 학살과 동키부대”

☞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1부

☞ (6.16)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목, 2020/12/03- 01:48
1
0

리영희 10주기: 다시 돌아보는 삶과 정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인터뷰

“간결하고 정곡 찌르는 냉철한 글
지금의 언론인·학자들에 필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문학평론가 임헌영(79)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리영희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저작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에 대화 상대자로 나왔다. 1960년대 말부터 리영희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40여년 동안 가족 말고는 가장 가까이서, 가장 자주 지켜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임 소장은 리영희 선생을 “우리 사회과학을 ‘식민학문’에서 주체적인 학문으로 바꾸어낸 학자”로 기억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했다.

―가까이서 지켜본 리영희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

“대단히 냉철한 지식인인데, 냉철한 가운데 인간미가 있는 분이었다. 휴머니즘을 마음 바탕에 깔고 있었고, 사람에 대한 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할 줄 아는 분이었다.”

―어떤 계기로 리영희 선생과 가까워졌나?

“1960년대 말에 내가 잠깐 <주간경향> 기자를 했는데, 그때 <조선일보>에 계시던 리영희 선생을 찾아가서 만났다. 그분이 쓴 글이 존경스러워서 직접 뵙고 싶었다. 1970년 월간 <다리>가 창간되자 거기서 일하면서 리 선생을 자주 뵀다. 그러다 리 선생이 필화사건으로 1977년 감옥에 가고, 나도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통에 1983년에 출소한 뒤에야 다시 선생을 만났다. 1980년대 후반에 한길사에서 <사회와 사상>이라는 월간지를 냈는데, 리영희·강만길·박현채·김진균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편집위원을 맡았다. 잡지를 내야 하니까 수시로 만났고, 좌담회도 자주 열었다. 이 월간지에 리 선생이 ‘남북한 전쟁 능력 비교연구’를 비롯해 당시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한반도 관련 글을 발표했다.”

―리 선생은 언론인이고 학자였는데, 학자로서 리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나는 함석헌과 리영희를 분단시대의 두 지성으로 꼽는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함석헌, 70년대와 80년대는 리영희가 우리 지성사를 주도했다. 특히 리 선생은 사회과학 영역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리영희야말로 국제정치학을 주체적 학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베트남 전쟁과 현대 중국 연구도 우리 현실을 비판하고 타개하려는 궁극적 목적 아래서 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전혀 주체적이지 못했다.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고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좌우하고 있는데,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국내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리 선생은 ‘한국 교수들 대다수가 미국 유학을 통해 거의 자기를 상실할 정도로 미국 숭배자가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식민지 시대의 학문 태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깨뜨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사회과학을 다시 세운 분이 리 선생이다.”

―문학평론가로서 ‘리영희 글쓰기’를 어떻게 보는가?

“리 선생은 9매짜리 신문 칼럼을 쓰기 위해 그 열 배에 이르는 자료를 메모해 줄여나가는 식으로 철저하고 꼼꼼하게 작업했다. 그런데 그렇게 쓴 글들은 이해하기 쉽고 명쾌했다. 특히 리 선생이 모범으로 삼은 사람이 중국 작가 루쉰이었다. 루쉰의 모든 작품을 깊이 읽었고,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글을 쓸 것인가’ 하는 글쓰기의 자세와 방법을 루쉰에게서 배웠다. 억압하는 강자들에게서 억압받는 약자를 해방하려는 루쉰의 태도와 정신에 늘 감명을 받았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르면서도 은유·풍자·유머·기지가 있는 문체가 거기서 나왔다. 사회과학적 글쓰기에서는 보기 드문 문체다.”

―리영희의 삶에서 후배들이 배울 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리 선생은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세워 지켜 가려고 분투했다. 그런 자세를 지금 언론인들이나 학자들이 배워야 한다. 리영희의 기자정신이 지금 젊은 기자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하다. 리 선생이 기자 시절 수많은 특종을 했지만 누군가에게 얻어듣고 쓴 것은 거의 없고, 스스로 해당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완전히 파악한 뒤 취재를 통해 확인하는 방식으로 쓴 것들이었다. 그런 정신에서 나온 것이 리 선생의 책들이다. 리영희의 책들은 지금도 한반도 상황이나 미국의 본질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글 고명섭 선임기자, 사진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2020-12-03> 한겨레

☞기사원문: “식민학문 깨뜨린 학자이자 약자 향한 애정 담아낸 언론인”

금, 2020/12/04- 00:01
0
0

여성 독립항쟁가도 볼 수 있기를
애국지사 사당은 ‘독립지사 사당’

김영진 경남도의원

창원시가 전국 최초로 창원지역사랑상품권인 ‘누비전’에 지역 독립항쟁가를 새기기로 했다. 2021년 새해에는 바라만 보아도 가슴 뭉클한 창원의 대표적 독립항쟁가 얼굴이 새겨진 누비전이 시장과 동네가게를 찾는 창원시민들의 손에 들려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처음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지난여름 도의회에서 열린 ‘대일항쟁기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토론회’에서였다. 발제 중 이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경남도에서 ‘도내 인물조형물 설치 내역’을 요구해 받아봤더니 도내 33개 동상 중 독립항쟁가는 불과 3개였다. 국가에서 훈·포장, 표창을 받은 도내 독립유공자 수만 해도 1039명이다. 입증할 서류가 없어서 서훈되지 못했으나 대내외로 인정받는 독립항쟁가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상당하다. 경남에 기릴 만한 독립항쟁가가 단 3명뿐이던가, 한탄하던 즈음이었다.

결국, 나는 지난 10월 지역사랑상품권에 독립항쟁가를 새기자는 5분 발언을 했고, 여기에 창원시가 제일 먼저 화답했다. 창원시에 큰 박수를 보낸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치열한 독립항쟁사를 가진 나라지만 화폐 속 인물에 독립항쟁가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그런 일을 창원시가 해냈다.

그런데 여기에 딱 두 가지만 보태려고 한다. ‘누비전’ 시안을 보면 경남의 여성독립항쟁가가 없다. 남녀 기계적인 형평성을 맞추자는 게 아니다. 여성 독립항쟁가는 잊히고 묻혔을 뿐 남성 독립항쟁가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시대를 생각해보라. 여성은 운신 범위가 결코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남은 많은 여성독립항쟁가를 배출했다.

김조이(金祚伊·1904∼?)는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사법살인의 희생자 조봉암 선생의 동지이자 아내로, 여성·민족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청년단체를 조직해 항일항쟁을 하다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으나 그나마 2008년 건국포장 수훈으로 국가의 위로를 받았다. 진해구 성내동 출신인 김조이는 조선왕조 마지막 진해(웅천)군수의 손녀였다.

김명시(金命時·1907~1949)는 마산합포구 오동동에서 태어나 19살 마산을 떠난 후 26년 동안 중국과 만주벌판에서 빛나게 암약했다. 일제에 붙들려 7년간 옥살이 후에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 입대, 총을 들고 무장독립투쟁의 최전선을 누볐다.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수식어는 김명시란 인물에 호기심을 갖게 하는 작은 기제일 뿐이다.

대표적으로 이 두 분을 언급했으나 경남의 여성독립 항쟁사가 유구하니 경남의 남녀 독립항쟁가 여러분이 누비전에 나란히 있는 모습은 의미가 클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현재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있는 애국지사 사당의 명칭이다. 애국지사는 법적 용어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항쟁으로 서거한 분은 순국선열, 생존한 분은 애국지사로 나뉘어 예우가 달라진다. 그러나 현재 애국지사 사당에는 순국선열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유족이 만든 기념비 등에서 용어를 혼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공공기관이 만든 사당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애국지사 사당 대신 ‘독립지사 사당’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김영진 경남도의원 ([email protected])

<2020-12-02> 경남도민일보 

☞기사원문: 독립항쟁가 새긴 ‘누비전’에 박수를 보내며 

※관련기사 

☞노컷뉴스: 창원의 독립운동가, 누비전에 새긴다…내년 2월 발행

☞경남도민일보: 창원 독립운동가 5명, 누비전에 새긴다

화, 2020/12/08- 08:49
0
0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의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네 번째 행사에 참가한 답사단 일행이 인천일보에서 진행된 사전강의를 마친 뒤 사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지난 6일 오후 ‘인천지역의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 현장‘을 돌아 보는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네 번째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1, 2부로 나눠 ‘인천지역의 근대 노동운동 역사 돌아보기’와 ‘노동문학 현장 탐방’ 순으로 진행됐다. 1부 해설은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2부는 장회숙 인천도시디자인연구소장이 각각 맡았다.

답사단은 인천일보 강당에서 열린 사전 강의에 이어 중구청-최초의 노동쟁의 현장인 야적장-인천역-송월동 일대의 공장지대-노동문학의 현장 외국인 묘지-동일방직-인천도시산업선교회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이 교수는 사전 강의를 통해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된 도시지만 수도 서울의 관문 항구로 어느 지역보다 일찍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통권 83호)에 실린 윤진호 인하대 교수의 특별기고 ‘개항기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인용, “인천은 한국 노동운동이 처음 발화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 논문은 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이 인천항에서 설립됐고 이 조합에 의해 1892년 이전에 이미 노동쟁의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교수는 “만약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노동운동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898년 함경남도 성진부두조합이 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이고, 같은 해 목포에서 발생한 부두노동자의 쟁의가 최초의 근대적 노사분쟁’으로 알려져 왔다.

이어 ▲정미업 선미여공들의 투쟁 ▲인천 성냥공장의 원조인 ‘조선인촌 주식회사 여공들의 지난한 파업 투쟁 ▲일본육군조병창 등을 사례를 들며 “인천은 식민지체제에 저항한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이며 일제 강제동원의 현장이자, 징용노동자의 귀국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식민지시대 인천에서 전개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인천노동총동맹을 이끌었던 노동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면서 “해방 이후 노동운동의 분화와 분단과정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 인천 노동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인천일보 강당에서 진행된 사전 강의에서 ‘인천지역의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상훈 기자 [email protected]

2부 현장 답사 진행을 맡은 장회숙 소장은 “인천 최초의 산업지대가 형성된 항동과 북성동 일대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었고, 북성포구를 중심으로 이태준의 ‘밤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현덕의 ‘남생이’ 등의 작품이 탄생했다”고 소개했다.

강경애의 ‘인간 문제의 무대인 동일방직과 월미도는 수많은 사연이 켜켜이 쌓여있다.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은 한 때 우리나라 방직업의 메카이자 여성노동운동의 현장으로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었다.

1934년 강경애가 동양방직에 근무하는 조선인의 고단한 삶을 그린 ‘인간문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공장에서 살인적 노동을 강요당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생생한 필체로 그려냈다.

이 공장에서 1978년 발생한 ‘오물 투척사건’은 한국노동 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여성 집행부를 상대로,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 통에 ‘오물’을 담아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뿌려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구사대의 똥물 사례를 받은 1백 명의 여성 노조원들이 해고를 무릅쓰고 민주노조를 사수하려고 분투했지만 끝내 신군부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장 소장은 1961년 이후 인천의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온 화수동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답사단을 이끌었다. 70-80년대 군사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온몸을 던져 온 산업선교회 지도자들의 고난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설명했다.

1972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조승혁 목사, 1974년 미국으로 추방된 이 교회 설립자 조지 오글 목사, “도산이 침투하면 회사가 도산한다, 때려잡자 조화순”이라는 중앙정보부와 전두환 신군부의 용공 선전공세의 주인공 조화순 목사의 사연 등을 상세히 풀어나갔다.

▲장회숙 인천도시디자인연구소장이 ‘노동문학 현장 탐방‘ 해설 순서에서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인천지역 노동운동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욕의 중심지였던 화수동은 이제 화수부두가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고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낡은 집과 노인들만 남아 재개발을 기다리는 쓸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 소장은 “산업선교회 교회 건물이 민주화 기념지로 남겨져 학생들의 방문교육의 현장으로 쓰인다면 더 바랄게 없다”는 김도진 목사의 바람을 탐사단에게 전하는 것으로, 이날 행사의 현장 해설을 마무리했다.

/정찬흥 인천일보 논설위원 겸 평화연구원 준비위원 [email protected]

<2020-12-07> 인천일보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현장 답사 진행

화, 2020/12/08- 03:47
3
0

(향단연 제공) © 뉴스1

25개 독립운동가 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항단연)은 8일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친일행적을 규명해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향단연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에게 안익태의 친일행적을 규명해 서훈을 박탈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향단연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고 친일, 친나치 이력의 증거자료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정부가 모호한 입장으로 수수방관고 있다”면서 “그 사이 안익태의 후손이 광복회장을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어처구니없는 갈등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향단연은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안익태의 친일행적을 철저히 검증해 서훈을 박탈할 것을 관련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안익태 선생은 1955년 ‘문화포장’과 1965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안익태 선생은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축전곡을 의뢰받아 4개 악장으로 구성된 ‘만주환상곡’을 완성했다.

또 그해 베를린필하모니 연주홀에서 열린 기념음악회에서 ‘만주환상곡’을 지휘했다.

[email protected]

<2020-12-08>뉴스1

☞기사원문: 독립운동단체 “애국가 작곡 안익태 서훈 박탈해야”

수, 2020/12/09- 00:42
0
0

대전서 특강…”친일교과서 만든 이명박·박근혜 정부, 범죄 정권” 비난

10일 오후 대전서 특강하는 김원웅 광복회장 [촬영 이재림 기자]

(대전=연합뉴스) 이재림 기자 = 김원웅 광복회장은 10일 “친일 미청산은 대한민국의 기저질환인 만큼 (청산을 막아온) 친일 비호세력 명단을 작성해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날 오후 대전 중구 기독교연합봉사회관 2층 컨벤션홀에서 열린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대전충남겨레하나·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 힘 주최 특강에서 “친일청산 없이 국민 통합하자는 얘기는 일본 강점기에 천황폐하 모시자는 것과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1∼21대 육군 참모총장 모두 독립군 토벌하던 인물’이라는 지난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일부분을 다시 언급하기도 한 그는 호국영령에 대해 묵념을 하라고 하면 회의감이 든다고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 회장은 “서울현충원 명당자리에는 일제 천황폐하를 칭송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묻히는 게 꿈이라고 말한 이들이 있을 정도”라며 “(이런 상황에서) 애국심이 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친일 반민족 세력은 친북좌파 빨갱이라고 몰아간다”며 “언젠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겨 명단으로 작성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친일·독재 미화 논란을 빚기도 한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그들은) 범죄 정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친일 반민족 집단으로부터 친북좌파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며 “(저도) 빨갱이란 말로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자랑스럽고 하나도 움츠러들지 않게 된다”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

<2020-12-10> 연합뉴스

☞기사원문: 김원웅 “친일 미청산은 기저질환…친일비호 명단 비석 세울 것”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 광복회 ‘역사정의실천인상’ 수상

금, 2020/12/11- 09:25
0
0

[기고] 이육사·김동인 기리는 문학상, 친일과 민족의 자존 사이 고민해야…
박몽구 시인, 순천향대 객원교수

결실의 가을이 저물어가고 있다. 농부들은 한해의 결실을 들에서 과수원에서 거둬들이고, 강가에 선 은행나무들은 샛노란 결실을 길손들에게 나눠주며 긴 겨울을 넘길 채비를 하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들 역시 한해의 결실에 바쁜 모습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잡지사 우편함에 쌓이는 시집들을 보면, 제아무리 코로나19가 음험한 병마로 위협한다 하더라도 시인들의 살아있는 정신을 억누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시인, 소설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펴내는 작품집과 함께 문단의 큰 결실 가운데 하나는 가을 들어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종 문학상 수상 소식일 것이다. 축하하는 마음과 부러움이 뒤섞인 반응들이 SNS 등을 통하여 퍼지는 걸 보면, 새삼 한 해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인다.

그런데 올해에는 각종 문학상 주변을 놓고 설왕설래하는 걸 보면서 왠지 축하와 부러움에 머물러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각종 문학상 만들기에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상이 그 본질과는 관계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문학상을 만들어 시행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문학상 제정의 원점이 되는 문인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 문학상의 제정 시행이 손쉽고도 비용이 적게 드는 지역 홍보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상 급증 촉발한 지자체들

요즈음은 지자체마다 도서관 등을 건립하는 데 수백억 원씩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정작 거기에 비치할 도서 구입 예산은 조족지혈로 편성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심지어 우수문학 도서의 경우에도, 지역 도서관들에서 수준 높은 이론서나 어려운 시집보다 누구나 읽기 쉬운 수필류의 책을 선호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리고 출판사마다 각지의 도서관에서 도서 기증을 요청하는 편지들이 쇄도하기도 한다는데, 다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지자체들이 문학상 제정을 손쉽게 생각하고 그 시행에 신중을 기하지 않는 것도 이 같은 잘못된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게 아닌가 한다. 실제로 남쪽의 한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그 지역 출신의 모 시인이 생전에 그를 내세운 문학상을 제정 시행하더니, 불과 3회째 시상을 한 후 지역 문인들로부터 각종 민원이 끊이지 않자 급기야 상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에는 그 지자체의 섣부른 행정도 문제지만, 해당 지역 출신 문인들이 자신들에게는 상이 돌아오지 않고 외지인들에게만 돌아간다며 민원을 제기한 것이 큰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문인들의 속 좁은 처신도 문학상의 건전한 발전에 한 저해 요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면 한국 문학이 수백 개의 문학상을 제정하여 시행할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며, 그 기반이 탄탄한가 자문해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이 훨씬 더 많을 것은 자명하다. 상은 그것이 표방하는 바와 내용이 얼마나 일치하는가가 가장 큰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모 출판사에서 제정한 ‘만해 문학상’의 첫 수상자 배출 경위는 눈여겨볼 만하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아마 1974년인가 이 상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에서 이 상에 값할 만한 수상자들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정 이후 몇 년 동안 수상자를 내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엄혹한 시절 만해의 정신에 부끄럽지 않게 문학 행위를 하고 있는 문인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경우지만, 1964년 장 폴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그는 1964년 수상자로 선정되자 모든 공적인 훈장과 명예를 거부한다는 원칙을 밝히며 수상을 거절했다. 작가는 어떤 기관이나 제도에 편입되면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킨 것이었다. 아울러 “이런 상은 억압받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해 온 파블로 네루다나 러시아의 솔로호프에게 먼저 돌아가야 한다”라고 천명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문학적 명성이 전 지구촌에 퍼짐은 물론 요즘 화폐 가치로 13억 원에 달하는 상금이 걸린 상을 거부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는 당시 스웨덴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 상태에서 노벨상은 객관적으로 서방 블럭 작가나 동방의 반역자들을 위한 영예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벨상이 중남미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인 ‘파블르 네루다’나 충분한 자격이 있는 ‘루이 아라공’에게 주어지지 않음이 그 예다. 또 노벨문학상이 솔로호프에게 수여되기 전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소련 작품으로서 노벨상을 탄 것은 단지 해외에서 출판되고 소련에서는 금지된 작품인 <닥터 지바고>뿐이었는데 이는 균형이 잡히지 못한 시상 방법이었다.”

모름지기 깨어 있는 작가라면, 모든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멀리할뿐더러 자신 말고도 더 문학적 사명과 작품의 진정성에 충만한 사람을 돌아보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이만한 기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표리부동한 문학상의 속출

모두에 밝힌 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은 수백 개에 달한다. 이 같은 상을 주관하는 측은 하나같이 때로는 숭고하고 거창한 상의 제정 취지를 내걸고 있지만, 문제는 그 제정 취지와 어긋나는 상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이런 양상은 상의 제정에 따르는 재정 여건이 열악한 문학 전문지 등이 제정한 문학상보다 예산 여건이 충분한 지자체나 대형 언론사에서 제정한 상들 쪽에서 빈번하게 드러나고 있다.

올해 들어 문단 내외에서 적잖은 물의를 일으킨 ‘이육사 시문학상’은 일그러진 문학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에서 나온 성명서에 따르면 ‘2020년 제17회 이육사 시문학상은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인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한 문학평론가가 심사위원이었고, 대표적인 친일문학상인 미당문학상 후보를 두 차례나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전두환 취임 때 찬양시를 쓴 시인을 기리는 편운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어 수상하였다. 주최 측은 좋은 시를 쓴 시인을 선정하여 시상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과연 그 같은 반응은 변명인가 아니면 괴변인가.

이 상 제정의 정신적 근간이 되고 있는 이육사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이 아닌가. 경북 안동(安東) 출생인 그는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하였지만, 일제의 폭압 정치로 고향에서 살 수 없어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벌이다 절명한 사람이다. 그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1937년 윤곤강(尹崑崗)·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한 일제하 가장 실천적인 삶을 꾸린 지사가 아닌가. 그런 분을 기리는 문학상에 친일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들이 심사위원을 하고, 미당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이름을 올린 사람이 기왕의 여러 차례 수상에 이어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아 또다시 상을 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육사 시문학상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자, “‘이육사 문학관’ 측은 ‘이육사 시문학상’ 운영의 주체가 아니다. 상의 운영은 ‘이육사 시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며, 제1회부터 제17회에 이르는 지금까지, 이 위원회는 ‘이육사시문학상’ 시행 기관인 ‘TBC문화재단’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이육사 시문학상’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은 이 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회의 고유한 권한이다”라고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항일 투사 시인 이육사의 정신을 기리는 이육사 문학관이 시상식 공간을 제공하고, 상의 운영에 대하여 바른말을 아꼈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성명서는 “그동안 일부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자나 심사자들의 면면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들의 상당수가 미당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였거나 심사자였다. 친일문학상 후보자도 상당했고, 박정희를 찬양한 시인도 있었다. 그 이름을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심각하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문학상 수상자나 심사자가 ‘이육사 시문학상’뿐만 아니라 이육사문학관에서 시행하는 각종 행사에도 대거 초대되었다. 학술토론회, 낭독회, 문학학교, 문학강연회 등의 행사에 초대되어 어린 학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상을 제정한 지방의 유력 언론사에만 책임을 돌릴 게 아니라, 작게는 한국 문단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이육사’라는 거대한 정신의 거봉을 앞에 내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친일과 민족의 자존 사이에서

최근 언론에 두 문학상의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두 문학상의 수상자는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다. 보도에 따르면, 김숨 작가는 장편소설 <떠도는 땅>으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제51회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이어 <부산일보>가 선정하는 제37회 요산 김정한문학상 수상자에도 이름을 올려 문단 내외에 물의를 일으켰다.

김동인은 일제가 패망하던 날 아침에도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 구성을 자신에게 일임해 주면, 일왕에게 백배의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는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주장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고 일제의 징병에 조선 청년들이 자원할 것을 독려하는 글도 실었다. 그는 창씨개명과 함께 ‘황군 위문 작가단’ 활동도 한 대표적인 훼절 친일지식인이다. 반면에 요산 김정한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도 일체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승만에서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이르는 시절 불굴의 정신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부산을 올곧게 지킨 지사형 작가가 아닌가. 특히 김정한 선생의 작품들 곳곳에는 일제에 항거한 기층 민중의 뼈아픈 삶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친일의 거두를 기리는 상을 받은 사람이 다시 비교도 하기 어려운 상을 수상하다니 문인 정신이라곤 털끝도 찾아볼 수 없는 치졸한 처신이다.

두 상의 수상자 소설가 김숨은 여성을 유린한 반인륜적 범죄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작품화한 보기 드문 작가라는 점에서 납득이 어렵다. 김숨은 <조선일보> 수상 인터뷰에서 <떠도는 땅>의 집필 동기에 대해 “역사에 대한 특별한 의무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작가로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위안부 할머니나 강제이주열차를 탄 우리 동포 모두 일제의 가증스러운 탄압으로 떠도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피나는 역사를 놓치지 않는 김 작가의 주목에 놀라면서도, 그가 그 작품으로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수상을 수락했다는 점에 우리는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인 문학상은 보수 진영에 선 대표적인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시상하는 상이면서, 거액의 상금을 내 거는 등 자칭 가장 권위 있는 상임을 자부한다고 한다. 일제 하 <조선일보>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연재하고 민족지의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이 신문사는 하루 빨리 친일의 거두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 폐지에 나서야 할 것이다. 문인들 또한 언론의 영향력과 상금의 유혹에서 벗어나 올곧은 비판 정신을 되찾아야 마땅하다.

몇 해 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의 현현을 내건 ‘5.18문학상’에 그 정신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시작 활동을 해온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가, 문단은 물론 사회 각계에서 비판 여론이 크게 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수상자로 선정된 사람이 망설임 없이 수상을 포기하면서 겨우 봉합된 적이 있다. 이 상의 경우에는 그 뒤에도 뚜렷한 궤적을 긋지 못한 채 작품성을 평가받은 이들이 수상자로 선정 시상되고 있다. 하지만 모두에 밝혔듯 만해나 5.18의 경우에는 그 이름에 값하는 문학 행위를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따라서 지자체나 유력 단체 및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상을 만들고 뚜렷한 궤적을 그리지 못한 채 실망을 안겨주기보다,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그 취지를 살리는 길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해온 대표적인 시인 가운데 하나인 조태일 선생을 기리는 문학상의 경우에도, 상의 취지와 어긋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최근 우리 문단에서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있는 문인들을 두고도 뜻있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어떤 문인은 불과 몇 년 사이에 10여 개의 문학상을 거머쥐는 등 양식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다. 특히 수상자로 선정된 상 사이에 제정 취지나 정신의 공통성을 찾기 어려운 마당에, 이른바 유명세에 편승하여 특정 문인들에게 상이 계속 주어지고 있고 해당 문인들 또한 아무런 자기 정제나 작품성의 향상 없이 상을 연거푸 받는 풍토는 매우 큰 문제이다.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이 국제 무대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가히 전성시대라 할 만큼 범람하고 있는 문학상의 남발도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차제에 한 문학상을 수상한 이들이 다음 상에 도전하려면 객관적으로 인정할 만한 작품성의 향상 등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묵시적 약속도 필요하리라 본다. 나아가 제도적으로 문학상을 탄 문인들에게는 적어도 5년 이내에 다른 상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약속도 필요한 시점이다.

아무튼 문학상이 개인의 영예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한국 문단 전체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하면서 우리 문학을 한 단계 비약시키는 지렛대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정 취지에 맞게 문학상이 운영됨은 물론, 작품성과 공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문인 정신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 박몽구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7년 <월간 대화> 등단. 시집 <황학동 키드의 환생>, <단단한 허공> 등 있음. 순천향대, 추계예술대 객원교수.

<2020-12-10> 프레시안 

☞기사원문: 난무하는 문학상, 영예의 이름인가 검은 수렁인가

금, 2020/12/11- 04:42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