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에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SNS 해시태그 운동을 펼쳐 큰 호응을 얻은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제7회 이돈명인권상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 초등성평등연구회 페이스북)
초등학교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해 온 교사 모임이 이돈명인권상을 받는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초등학교 교사 13명이 모인 ‘초등성평등연구회’를 제7회 이돈명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1월 4일 밝혔다.
이에 대해 초등성평등연구회 서한솔 회원은 “2017년은 이룬 것이 없는 굉장히 고생스러웠던 해였는데, 이돈명인권상 수상은 유일하게 들려온 좋은 소식”이라면서 “여성 인권, 모든 인간의 삶에 관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교육의 역할로 조금 더 나아지게 노력하겠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창립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SNS에서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으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소개했다.
또한 천주교인권위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활발한 활동, 자체 연구 제작한 교안의 완성도와 수업 활용도, 향후 활동에 대한 기대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실질적 성평등 과제를 초등학교까지 넓혀 사회적 확산효과가 크다”고 시상 이유를 설명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교과서의 성불평등을 분석하고 재구성하기, 학생들이 접하는 미디어를 젠더(성, Gender)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기 등을 수업에 적용해 왔고,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성편견 인식과 생리에 관한 수업, 독서교육을 통한 양성평등 수업 등 다양한 페미니즘 교육을 하고 있다.
이돈명 변호사(1922-2011)는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 사건 변호를 맡는 등 민주화와 천주교 사회운동에 기여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이 변호사를 추모하고 인권의 가치에 대한 고인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11년 인권상을 만들었다. 2017년 이돈명인권상은 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이 받았다.
▲ 철거전김정태흉상 김정태 흉상 철거를 위해 사전에 경계석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 ⓒ 국가보훈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2019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전남교육청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다. 지난해로 9회째를 맞았다. 지난해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다. 도내 중·고교 70여 개 팀이 참가했다.
‘친일파’ 흉상이 있다는 사실 알게된 학생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다.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광주군수·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했다. 중추원 의원 시절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에 대해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 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됐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민원 제기 학생의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 제곱미터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2020년 4월 28일, 흉상 철거되다
▲ 김정태 흉상 제거 영상 김정태의 흉상이 기단부에서 분리되고 있다. ⓒ 국가보훈처
▲ 철거중흉상 김정태의 흉상이 철거되는 모습을 후손과 관계자가 바라보고 있다. ⓒ 임승관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다. 결국 후손들은 지난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됐지만, 필자는 그날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 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사례로 의미가 크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 성과를 이룬 보훈처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자 원로 비평가인 임헌영(79) 선생의 이미지는 불가피하게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선명하게 각인된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인한 투옥과 시련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로 상징되는 사회운동에의 투신이 한 축의 면모라면, 다른 한 축은 치밀한 자료 섭렵을 통해 한국 근현대문학의 실증적·사상적 연구를 축적해 온 면모로 귀납된다. 그 가운데 연구소에서 오랜 열정과 공력을 다해 펴낸 ‘친일인명사전’(2009)의 성과는 우리 근대사의 어둑한 순간들을 현재로 소환해 반성적 자료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 권 분량에 4300여명을 수록한 이 책의 성과는 두고두고 임헌영 선생의 생애를 집약하는 표지가 돼 줄 것이다.
▲ 임헌영 선생이 최근 출간한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와 ‘엄헌영의 유럽문학기행’.
· 알리고 밝히고 세워 가야 할 역사
친일 행적을 밝히는 게 쉬울 리 없다. 당시 작업에 대한 폄하와 공격도 상당했다. 선생이 연구자들에게 강조한 점은 이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조상 다루듯 하라.’ “많이 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뺄 수 없을 경우에만 넣도록 하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창의적 교육관이 아니라 단순히 수동적 집행에 머물렀던 교육자 같은 이들은 모두 빠졌죠.”
민족사적 관점에서 반성적 자료가 되기에 족한 이들, 제국주의 협력의 자의식을 가진 이들만 추린 모종의 정예화 결과인 셈이다.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한쪽에서는 당사자인데도 이러한 과정을 흔연하게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분들이 준 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을 내 임 소장(왼쪽부터), 윤경로 편찬위원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대표로 백범 영전에 봉정했다. 원로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임 소장은 참여문학, 민중문학으로서 국내외 문학을 탐독했다.
“파인 김동환의 자제 김영식 선생은 전집에 아버지가 쓴 친일 문건을 다 실었어요. 아버지가 사죄할 기회가 없었는데 자신이 대신 사죄한다면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큰 힘을 줬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어쨌든 인명사전 출간 후 친일 청산에 대한 긍정적 지지자는 많이 늘어났고, 다수 여론조사에서 친일 청산 여론이 70%가 넘는다고 했다.
“우리 연구소는 시민단체 가운데 가장 역사의식이 투철한 구성원들로 이뤄진 것 같아요. 이제 저희 과제는 오늘도 여전히 일본이 옳았다고 하면서 학문이나 예술이나 경제 논리로 포장하는 이들과의 싸움에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도 일본의 새로운 파시스트들과의 싸움이 중요하지요.”
최근 연구소는 각고의 노력으로 서울 청파동에 새 건물을 마련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튜디오를 만들어 팟캐스트를 찍고 그걸 유튜브에 공개해 일반 시민들과 연구소 성과를 공유하고 있다. 일본 파시즘 지지 세력과 우리 쪽 일부 세력이 보여 주는 정치적 화음에 주목할 때 아직도 연구소가 알리고 밝히고 세워 가야 할 역사의 흐름이 만만치 않은 듯했다. 물론 일본에도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우경화 반대를 외치는 이들이 있고, 우리 쪽에도 민족 경험을 훼손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현재형을 돌파해 제대로 된 민족사를 쓰기 위해 선생의 헌신과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 프랑스 파리 위고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친일 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설립된 연구소가 펼치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과거사 청산 작업 역시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 국내외를 망라한 작가들의 정치의식 탐색
사실 인터뷰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는 선생이 오랜만에 두 권의 역저를 잇달아 낸 데 있었다.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역사비평사, 2019),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소명출판, 2020)가 그것이다. 두 책은 대조적 속성을 띠고 있다. 앞의 것이 광폭의 발품과 해박한 독서력을 기반으로 해외에 눈을 돌렸다면, 뒤의 것은 한국소설의 맹장들에 대한 정치적 관점에서의 독법이 담겼다. 먼저 유럽문학 기행은 어떤 의미였을까?
“감옥에서 나와 여행을 못 다닌 게 원통했어요. 문화센터 같은 데서 강의하다가 외국 문인들의 박물관 방문 프로그램을 계획했는데 모집이 잘돼 제 뜻대로 계획도 짜고 진행도 했어요. 성공적이었지요. 이 책에서 다룬 분들은 모두 평화, 반전, 반제국주의의 작가들이에요. 민중적 정치의식을 가진 분들의 문학을 테마로 한 결과이지요.”
책은 영독불러의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다. 푸시킨, 톨스토이, 고리키, 스탕달, 위고, 괴테, 횔덜린, 헤세, 바이런, 로런스 등이 선생의 열정적인 답파(踏破)와 재구성에 의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에세이풍으로 써 가는 선생의 친절하고도 에두름 없는 문장들이 책의 가독성을 한결 높여 준다. 위대한 작가들의 사생활, 특별히 외도 경험 같은 어둑
한 측면까지 훤칠하게 재현했다.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는 어떠할까?
“우리가 위대한 시민혁명을 했는데도 여전히 발전된 정치의식이 빈곤하다는 것을 최근 절감했어요. 늘 흔들리고 위태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소설가들을 통해 역사를 올바로 보는 눈, 정치를 제대로 하는 힘을 빌리자고 생각했지요. 이왕이면 독자가 많은 작가들을 골랐어요. 되도록 각주를 빼고 연애소설 읽듯이 쉽게 풀어 갔습니다.”
책에는 장용학, 이호철, 최인훈, 박완서, 이병주, 남정현, 황석영, 손석춘, 조정래, 박화성, 한무숙 등이 담겼는데, 문학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병주가 다가올 것 같고, 문학의 자의식이 큰 분들에게는 최인훈과 남정현이 매우 유의미하게 다가올 것 같다.
“정치사 비판의 현장 중계는 이병주 선생이 최고봉이에요. 어떤 정치평론가도 못 따라가요. 최인훈 선생은 우리 문단의 고질병인 파벌을 넘어선 범례로 다루면 좋겠고요. 그 지성의 날카로움과 처연함이 단연 빛나지요.”
아직도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말을 향한 기대와 혐오의 엇갈림이 있다. 그러나 정치야말로 가장 첨예한 예술이 아니던가. 책 서문에 인용된 나폴레옹의 말처럼 모든 공동체에서는 “정치가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이 책은 선생의 사회적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비평가 임헌영’의 두께를 한 뼘 늘려 줄 것이다.
· 고단하고도 외로운 길
▲ 독일 고전문학의 도시 바이마르에서 찍은 사진.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와 실러 동상 앞에 권성우 평론가(왼쪽부터), 백시종 작가, 임 소장,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서 있다.
선생은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그 후 카프(KAPF)나 해방기에 대한 자료를 누구보다도 선구적으로 모았고 자료집을 냈으며 그 논리와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진력했다. 선생은 1980년대 이후 우리 지성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 시리즈에서도 단골 필자였다. 이쪽을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등단하기 전부터 카프에 대한 애정을 가졌어요. 해금 전부터 납월북 작가에게 관심이 많았고요. 그때는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카메라로 직접 찍었어요. 해독이 잘 안 되면 살아 계신 분들께 전화로 직접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을 걸었지요.”
임헌영 비평은 참여문학, 민족문학, 리얼리즘, 민중문학에 이르는 패러다임을 모두 품고 있다. 안으로는 동학농민혁명, 4·19혁명, 광주민중항쟁, 6월항쟁과 관련한 문학에 대해 꾸준한 비평을 해 왔고, 밖으로는 글로벌 시대의 해외동포문학에 대한 탐구도 줄기차게 수행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혀 갔다. 이처럼 선생은 근현대 민족 수난사와 함께하면서 디아스포라 문제에도 눈을 떴다. 물론 선생은 서정적이고 예술적인 언어도 세상에 많이 내놓았다. 이 점, 선생을 설명하는 데 퍽 중요한 균형추가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구소 곁 숙명여대에서 재직하는 권성우 교수가 동석을 해 줬는데, 권 교수가 선생께 ‘앞으로 어떤 책을 내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북한문학 한번 정리해야 하고요. 해외동포문학도 중요합니다. 해외동포 쪽은 제가 제일 먼저 손대지 않았나 싶어요. 문학사회사, 특별히 필화사에 애정이 가요. 아마도 필화사가 제일 먼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이후로 두 분의 치열한 대화가 오갔다. 재일조선인문학, 특히 김석범과 김시종과 서경식에 대한 경험적 대화는, 비록 즉각적이었지만 임헌영 선생의 경험과 사유가 어디까지 뻗어 나가 있는지를 실물적으로 알려 줬다.
“젊은 작가들의 세계를 평하기에는 이제 제 비평의 틀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변해도 문학의 원칙은 그대로라고 생각해요. 그걸 훼손하면 안 됩니다. 원래 문학은 문학 하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어요. 교양의 정점에서 문사철을 모두 이끌어 갔습니다. 손끝으로 하는 문학 말고 가슴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학을 지금도 옹호하고 또 대망하고자 합니다.”
굵직한 의제들을 버리고 쇄말주의에 빠진 우리 문학에 대한 원로다운 문제 제기인 셈이다. 선생의 말씀처럼 근본적 문학의 위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되 변하지 않을 문학을 위해, 여전히 현재형 의제인 민족사 복원을 위해, 선생이 걷는 고단하고도 외로운 길은 아직도 가파르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 길은 누군가는 걸어 우리에게 비춰야 했던 오랜 지남(指南)으로 남을 것이다.
[책소개]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해당 도서는 제목과 같이 정치 권력을 ‘몹시 꾸짖는’ 주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질곡을 그들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일제 식민지와 6·25동란, 분단 현실과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우리 시대 문학은 무엇을 보고 어디에 펜촉을 향하고 있는가 저자는 준엄하게 묻는다.
6·25 ‘구국영웅’이자 항일세력 토벌 ‘반민족행위자’…명암 선명 자서전서 만주군 간도특설대 활동 인정했지만 명확한 반성은 없어
6·25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주형 기자 = 6·25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예비역 대장)이 2019년 6월10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군사 편찬연구 자문위원장실에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만나기에 앞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2019.6.10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김예림 인턴기자 = 올해로 만 100세를 맞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최근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진 가운데, 그가 사망할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 전력 때문이다.
한국전쟁 초기 전세를 역전하는 계기가 된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훈 등으로 2차례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백 전 장군은 사망 후 국립묘지법 5조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이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을 갖춘 상태다.
이외에 ‘평양전투’와 ‘중공군 춘계공세 저지’ 등 한국전쟁 중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을 만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다.
이에 따라 보훈처는 백 전 장군이 사망하면 여분의 장군묘역 자리가 없는 서울현충원 대신 대전현충원에 묘역을 조성한다는 입장이다.
논란은 최근 여권 일각에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불거졌다. 이 내용대로 법 개정이 이뤄지면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백 전 장군과 같은 인물도 국립묘지에 더는 안장될 수 없게 될 수 있다.
‘구국의 영웅’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는 두 수식어가 병존하는 백 전 장군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데 대해 찬반 양론이 맞서면서 그의 친일행적도 재조명받고 있다.
그는 2차대전 당시 조선인 독립군 토벌로 악명 높은 만주군 육군 휘하 ‘간도특설대’에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장교로 복무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백 전 장군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백 전 장군은 1944년 봄, 팔로군(八路軍·1937∼1945년 일본군에 맞선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중 하나) 토벌 작전에 참가해 정보수집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여단장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독립군과 싸운 적 없다고 했지만 간도특설대 자체는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일제 방침에 따라 조직된 특수부대였다.
특히 간도특설대는 백 전 장군이 몸담기 전인 1939년 천보산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과 교전을 벌인 후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고문·살해한 부대로 알려져 있다.
친일·반민족 행위를 조사·연구하는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백 전 장군 관련 기술은 다음과 같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중앙육군훈련처에 1940년 3월 입학해서 1942년 12월 졸업하고,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지금의 허베이·랴오닝성 및 네이멍구자치구의 경계지점에 위치했던 옛 중국 행정구역)에서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이어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세력을 탄압’했다는 이유로 백 전 장군을 포함했다.
당시 백 전 장군은 “직접 독립군 토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위원회는 근거 자료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구국영웅’과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명암이 존재하는 백 전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 논란이 불거진 상황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그가 과거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자서전에서 어떻게 기술했는지와, 사죄 및 반성을 표명했는지 여부다.
백 전 장군은 국내에서 출간한 두 권의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복무 사실을 서술했지만, 이를 명확히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그는 1990년 국내서 출간한 자서전 ‘군과 나’에서 간도특설대에서 3년 동안 복무하다 소련군에 진압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책에는 “봉천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1942년 봄 임관하여 자므스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 특설부대 한인부대로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적었다.
또 1992년 국내서 출간한 자서전 ‘실록 지리산’에는 만주군 시절 익혔던 바를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에 활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책에는 “일제 말기 만군에 잠시 몸을 담았던 시절 나는 ‘죽이지 말라, 태우지 말라, 능욕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때 이후 나는 게릴라 토벌은 민심을 얻어야만 성공한다는 점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고 적었다.
간도특설대 복무 사실을 간단히 언급한 정도에 그쳤던 국내 출간 자서전과 달리 일본에서 출간한 책에선 간도특설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기록했다. 198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對)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선 간도특설대 활동이 반민족 행위였음을 시인하는 뉘앙스와 함께 합리화 시도로 여겨질 수 있는 기술도 담았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백 전 장군은 이 책의 한 장인 ‘간도특설대의 비밀’ 본문에서 “장래를 위한 군사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자각하고, 유일한 한국인 무장집단에 근무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썼다.
이어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백 전 장군은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서술했다.
한편, ‘직접 독립군과 싸운 적은 없다’는 백 전 장군 주장과 관련, 일단 간도특설대는 1941년 동북항일연군이 사실상 궤멸한 뒤로는 독립군과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43년 12월 중국 러허성으로 부대가 이동해 주로 중국 팔로군과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단, 백 전 장군 복무시절인 1944년 7월과 9월, 11월 간도특설대가 무고한 조선인 등을 살해하거나 식량을 강탈했다는 등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 소개돼 있다.
[책소개]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이번 편은 영상촬영을 하지 못해 오디오만 올립니다.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젊은 세대에게 그날의 뜨거움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시리즈를 출간했다. 김홍모, 윤태호, 마영신, 유승하 네 작가가 참여해 제주4·3,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렸다. 네 작품 모두 의미가 깊은 사건들을 새롭게 발견하며 역사적 의미와 만화적 재미를 고루 담았다.이 중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아무리 얘기해도’ 의 마영신작가와 6.10민주항쟁을 다룬 ‘1987 그날’ 의 유승하 작가를 초대해 작가가 직접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독자들과 공감하고 싶었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논란]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 논란에 부쳐… ‘프랑스 국부’는 왜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나
▲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로 입성하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백선엽 당시 1사단장. ⓒ 다부동 전적기념관 야외 전시 사진
최근 한국전쟁의 ‘영웅’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한 백선엽(1920~ ) 예비역 대장 관련 뉴스가 뜨겁다. 언론이 올해 100세가 된 백 대장을 불러낸 것은 그가 사망하게 되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기 때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한국전쟁 영웅’ 사이
한국전쟁 초기 전세를 뒤집은 ‘낙동강 다부동 전투(1950)’를 비롯하여 ‘평양전투(1950)’와 ‘중공군 춘계공세(1951) 저지’ 등 여러 차례 승전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백선엽에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은 충분하다. 그가 이명박 정부 때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원수’로 추대될 뻔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백 전 장군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설립된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이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이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한 이유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국가유공자 자격으로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서울현충원에 7명, 대전현충원에 4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는 서울현충원에 37명, 대전현충원에 28명 등 모두 65명이나 된다.
최근 여권 일부에서 국립현충원 안장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다른 데로 이장해야 한다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백 전 장군도 국립묘지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무려 35년이나 식민지 압제를 받아놓고도 반민족행위자를 국립묘지에 묻고 기리는 독립국이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이 엄청난 모순의 근원은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왜곡되고 굴절된 우리 현대사에 있다. 해방 공간에서 ‘반민특위가 좌절되지 않았더라면’ 하는 역사적 가정을 두고두고 곱씹지 않을 수 없는 회한의 역사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이들의 반민족행위를 국가에서 용인해 버린 결과 때문에 우리는 민족 정체성의 훼손이라는 비용을 오래도록 치르고 있다.
백선엽에 어른거리는 페탱의 그림자
백선엽을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 페탱 원수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전쟁 영웅 백선엽 위에, 1951년 대독 협력, 이른바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의 주역 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페탱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육군을 패퇴시킨 베르됭(Verdun)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은 이다. 1916년 303일간,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의 육군 사이에 벌어져 양측 전사자가 70만 명이 넘는, ‘인류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된 베르됭 전투에서 페탱은 프랑스를 구해낸 것이다.
베르됭의 구원자로 1918년 프랑스군 원수로 승진한 페탱은 1940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부총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패전이 자명해진 상황에서 휴전협정을 주장한 페탱은 신임 총리가 되어 새 내각을 구성하고 독일에 정식으로 휴전협정을 요구했다. 그는 전쟁보다는 항복이 낫다고 판단했다.
▲ 휴전협정 후 히틀러와 만난 비시정부 수반 페텡 총리(왼쪽) ⓒ 위키백과
그가 맺은 휴전협정은 사실상 항복조약이었다. 협정에 따라 독일 강점기에 페탱이 이끈 비시 정부(1940.6.16~1944.8.25)는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Vichy France)임을 주장하며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협력 정책을 수행한’ 비시 정부는 독일이 노동력 징발을 요구하자 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을 강제 징발할 수 있도록 한 ‘의무노동제’로 기꺼이 협력했다.
베르됭의 구원자, 페탱의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
비시 정부는 또 ‘나치 독일의 적들을 체포·처벌·제거’하는 방식으로 독일에 협력했다. ‘적’은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이었다. 비시 정부는 기존의 법 절차와 무관하게 레지스탕스를 탄압할 수 있는 사법기구로 ‘특별재판부’를 설치했고,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군 당국이 처형할 프랑스인 인질 명단을 작성하는 일도 맡았다.
특히 1942년 여름의 협력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비시의 경찰은 프랑스 주둔 독일 친위대와 협약을 맺고 대대적 유대인 검거에 나섰다. 이때 프랑스 경찰에게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7만6000여 명의 프랑스 거주 유대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은 단 3%에 불과했다.
1944년 8월 25일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자유 프랑스 정부의 드골(de Gaulle) 장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들에 대한 드골의 방침은 확고했다. 드골이 규정한 민족 반역자란,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이끈 비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나치의 승리를 위해 협력한 프랑스인들이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 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전 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나치 협력자에 대한 단호한 단죄에 나선 드골은 대다수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문제는 개개인의 과오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재확립, 군국주의자들과 그 공범자들 및 그 사상의 청산, 그리고 민족 반역자 청산 문제라고 보았다.
프랑스의 정의 : 부역자는 단호하게 단죄한다
사법적 숙청으로 약 35만 명의 대독 협력 혐의자 가운데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넘겨졌다. 그중 약 3만8000명이 유·무기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았다. 부역자재판소에서 모두 6000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규 법정 밖에서 약식 처형된 이가 9000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 형만 선고받은 이도 약 5만여 명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대독 협력을 벌였던 언론인과 문인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중형이 선고되었다.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오른 것은 이들이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였으므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그중 7명이 처형될 정도였다.
숙청의 하이라이트는 비시 정부의 핵심지도자였던 국가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Laval)에 대한 처리였다. 국가적 대독 협력의 주역이었던 라발과 레지스탕스 탄압에 앞장선 민병대 총수 다르낭(Darnand)은 총살되었다.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은 법정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던 시기에 소집된 대표들을 통하여 내게 권력을 준 것은 프랑스 국민이었소. 나는 전 생애를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으며 권력을 합법적으로 승계한 셈이오. 4년 동안 프랑스를 지켰으며 프랑스는 가장 비극적인 시기에 내게 의지한 셈입니다. 나는 결코 그것을 일부러 추구한 것이 아니오! 국민적인 열망으로 정부의 수반을 맡게 된 겁니다!
당신들은…… 그러한 시기의 어려움을 알기나 하는 겁니까? 난 매일 나치의 요구에 고민해야 했습니다. 훗날 역사는 나를 올바로 평가할 것이오! 어떠한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국가원수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치부되어 구속되거나 형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을 재판하고 있소!”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형법 75조(국가반역죄)와 87조(외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한 간첩죄) 위반으로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배심원들은 반대에 13표, 찬성에 14표를 던졌고 한 표 차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페탱의 사형을 즉시 집행할지, 유예할지는 17대 13으로 유예가 결정되었다. 드골은 사형 결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페탱은 1945년 11월 대서양 되섬의 감옥에 이송되었다. 그는 거기서 5년 8개월간 복역하다가 1951년 7월 23일, 아흔다섯 살을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페탱은 프랑스의 위인들을 안장하는 팡테옹(Panthéon)도, 유명 장군들이 묻히는 앵발리드(Invalides)도 아닌, 현지에 묻혔다.
독일의 직접 지배 대신 꼭두각시 비시 정부가 프랑스를 통치한 기간은 50개월이었다. 고작 4년 남짓한 콜라보라시옹에 대한 단죄는 35년의 식민지배에도 친일부역자 청산을 포기한 한국의 그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아흔 살이 넘은 노인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 게 잔인무도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수도 있다.
▲ 페텡은 대서양 연안의 되섬의 요새 감옥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사망했고, 거기 묻혔다. ⓒ 위키백과
순서만 다른 ‘부역’과 ‘구국’
앞서 말했듯, 괴뢰정부 수반으로 대독 협력의 총책임자였던 페탱과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 만주국의 초급 장교였던 백선엽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페텡은 독일에 간접적으로 협력한 데 그쳤지만, 백선엽은 스스로 만주군 장교가 되는 길을 택했고 중국의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함으로써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의 ‘부역’과 ‘구국’은 순서만 다를 뿐이다. 1차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해낸 페탱은 2차대전에서 국가반역을 저질렀다. 구국의 공적으로도 단죄는 모면할 수 없었다. 2018년, 페탱을 1차대전 승전 100주년 기념식의 추모 대상에 포함했던 프랑스 정부는 논란이 일자 방침을 철회해야 했다. 적어도 프랑스는 국가반역자를 기리는 것도 용인하지 않은 것이었다.
▲ 백선엽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1년 4월 다부리 주민들이 세웠던 백선엽 장군 호국구민비.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옮겨져 있다. ⓒ 장호철▲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적기념비. 최근 현충원 안장이 논란이 되자, 백 장군 가족들은 장지로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검토했으나 최근 본인의 뜻대로 대전현충원 안장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 장호철
백선엽이 친일부역을 끝낸 것은 일본의 패망 덕분이었다. 일본이 패전국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친일부역은 더 크고 깊어질 수도 있었다. 독립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제복만 갈아입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구국의 전쟁 영웅’으로 등극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이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것은 1941년이었다. 5년 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한국군 소위로 재임관한 그는 서른 살이 되던 1950년, 별을 달고 장군이 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예편한 그는 뒷날 ‘명예 원수’로 추대될 뻔했다. 적의 군인이 되어 조국을 겨누었던 백선엽은 조국에 돌아와서도 군인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과연 백선엽 전 대장은 ‘한국전쟁 영웅’의 이름으로, 11명에서 65명에 이르는 친일부역자들이 묻힌 국립현충원에 잠들 수 있을까? 아니면 비록 지연되긴 했지만, 과거사 청산으로 현충원에서 지워지는 친일부역자들과 함께 잊힌 이름이 될까? 분명한 것은, 친일부역자의 현충원 안장을 두고 ‘역사 바로 세우기’와 ‘부관참시’로 팽팽하게 맞선 이 해묵은 논의가 어떻게 귀결되는가는 우리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늠자가 되리라는 사실이다.
친일 청산의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올해 만 100세인 친일파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안장을 놓고 논란이 생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제국 2중대인 만주국 중위였던 백선엽이 사망할 경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래통합당에서 나오고 있다.
이번 논란이 촉발된 배경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현충원을 차지한 친일파 무덤들의 이장과 관련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친일파 백선엽의 거동이 최근 불편해진 상태에서, 국가보훈처 직원이 지난 13일 백선엽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면서 ‘묘역이 꽉 찬 서울현충원 대신 대전현충원에 모셔지게 되겠지만, 국립묘지법이 개정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백선엽은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0년(20세)에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일명 봉천군관학교)에 입학,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민족반역의 길이었다. 그의 나라는 만주국, 더 나아가 대일본제국이었다.
백선엽의 나라, 백선엽의 활동
1945년(25세) 8월 15일, ‘백선엽의 나라’는 패망했다. 당시 그는 중위였다. 이때까지 장교로 복무한 기간이 2년 4개월이고 나이도 많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친일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가 매우 진한 방법으로 친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가 복무한 부대 중 하나는 간도특설대다. 한국인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쟁군에 맞서 싸우는 부대였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이 부대는 한국인을 이용해 한국인을 억압할 목적으로 등장했다. 한국인 군인들을 앞세워 만주 지역 한국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를 위한 부대였다.
2008년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한인을 이용하여 한인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방식은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방식으로 간도특설대 역시 이 범주 안에 있다”며 “간도특설대는 1938년 설립 이후 약 5년간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거나 항일 무장단체를 탄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설명한다.
간도특설대는 명칭상으로는 만주 지역으로 활동이 국한됐지만, 이들의 활동은 중국 내륙으로도 광범위하게 확장됐다. 베이징 주변 지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힌 이 부대는 잔인한 한국인 이미지를 현지인들에게 심어주었다. 한국인이 주축이라고 알려진 이 부대가 항일부대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했던 것. 그러니 현지인들이 한민족을 어떻게 인식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간도특설대는 설립부터 대민 활동에 주력하였다. 직접 마을로 가서 선전 활동을 전개하거나 그것이 미진할 때는 그 마을을 소탕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간도특설대가 그 활동 영역을 열하성과 하북성으로 옮기면서 그들의 대민 활동은 정점에 달하였다.
특히 한인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활약을 펼쳤다.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한 예는 한인들로 하여금 일제가 간도특설대를 설립한 목적에도 부합하는 행동들이었다. 가장 악랄한 방법은 한인들이 쓴다는 것을 일반인에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논란의 중심, 미래통합당
항일 부대와의 전투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른 간도특설대. 이 부대에서 백선엽은 장교였다. 현충원 안장은커녕 뒤늦게라도 책임을 단단히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를 동작동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논란의 중심에 미래통합당이 있다. 이들은 백선엽을 친일파가 아닌 민족 원로로 받들려 하고 있다. 그가 사망할 경우 그를 동작동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지난 5월 28일 보훈처를 직접 찾아 압박을 가했다. 이 자리에서 주호영 원내대표는 “6·25 전쟁 영웅의 공적에 걸맞은 예우에 부족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며 “여당 눈치를 본다든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주장 때문에 명예가 손상되지 않게 예우에 신경 써달라”고 압박했다.
하태경 의원도 같은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영웅을 현충원 안장 못 하게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지키다가 산화한 모든 군인들, 현충원 자격 없다는 것과 같다”며 “지금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호국영령을 모두 파묘하자는 주장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그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백선엽 장군을 서울현충원에 모실 수 없다는 문재인 정부 국가보훈처의 넋 나간 조치는 당장 취소되어야 마땅”하다며 “서울현충원에 자리가 부족해도, 없는 자리를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모시는 게 나라다운 책무이고 예의이고 품격”이라고 주장했다.
백선엽과 민간인 학살
▲ 2019년 7월 3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원들이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김진호 회장의 사퇴와 백선엽 장군의 훈장박탈 등을 주장하고 있다. ⓒ 이희훈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평안도로 귀향한 백선엽은 그해 12월 38선을 넘은 뒤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친미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6년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뒤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숙군 작업을 벌였다. 분단반대나 친일 청산 같은 민족주의적 흐름을 좌익이나 빨갱이로 규정하고 이를 육군에서 배제하는 작업을 지휘한 것이다.
1949년 7월 제5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4월 소장 진급과 함께 제1군단장 취임에 성공했다. 1952년 1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9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취임했다.
1953년 1월에는 국군 최초로 대장 진급에도 성공했다. 이처럼 해방 뒤의 백선엽은 눈부신 ‘성공’의 길을 걸어나갔다.
미래통합당과 보수세력은 백선엽이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대한민국을 지켰다고 하려면 대한민국 국민을 지켰어야 한다. 그런데 백선엽은 오히려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했다.
백선엽은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었다. 이 부대는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범죄 집단이었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에서 민간인을 약탈하고 특히 여성들에게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국민들을 겁주는 역할을 맡은 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는 육본 정보국의 지휘를 받았다. 백선엽이 정보국장일 때 이 부대의 만행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한국전쟁 중에도 있었다. 백선엽이 이끄는 특수부대인 백야사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 역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이 아무나 마구 죽였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 거둔 ‘전과’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4000명의 빨치산을 상대로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사살한 이들은 총 6600명이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이 몸담은 간도특설대는 항일 군대를 잡겠다며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런 행동 패턴이 백선엽의 해방 이후 행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소신 없는 기회주의자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지 않은 사람이 대한민국 땅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면, 그 전공은 대체 어떤 전공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을 전쟁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서울현충원에 꼭 모셔달라고 당부하는 미래통합당의 역사 인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파이면서 민간인 학살 주범인 백선엽. 그를 현충원에 안장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더 있다. 그는 소신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백선엽은 신속했다. 해방 다음 달 신속히 귀향한 그는 곧바로 여운형이 세운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에 가담,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 합세했다. 여기서 그는 치안대장 활동을 했다. 또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러다가 조만식이 김일성에게 밀리자 38선을 넘어 친미 군인의 길에 합세했다. 그런 뒤 이승만 정권에 가담해 민족분단 및 친일 청산을 훼방하는 대열에 함께했다.
이런 인물을 서울현충원에 모시는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 것을 권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전현충원에 안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가 존경받으며 편안히 누워 있을 곳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패망 몇 개월 전부터 우리의 독립투쟁 단체들은 해방을 예감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던 미국의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체들은 머지않아 맞이할 해방과 함께 추진해야 될 거사인 신생조국 건설의 설계도를 짰다. 그것이 바로 ‘건국 강령’ 이었다. 그 독립투쟁 단체들을 대별하면 넷이었다. 김구 세력, 이승만 세력, 박헌영 세력, 김일성 세력. 그런데 이승만을 제외한 세 단체의 건국 강령에는 신기한 우연 일치가 생겼다. 각기 멀리 떨어져 의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강령의 첫번째, 두번째가 꼭 거짓말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첫째, 모든 친일파를 처단한다. 둘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런 우연 일치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두 가지는 새 시대를 맞이하는 민족적 열망이었고, 전 국민적 요구였던 것이다. 그 열망과 요구에 명확한 응답을 하지 않고는 새 조국의 정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우연 일치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분단상황의 불행 속에서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당연한 순서로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그 역사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민족정기의 샘이고, 민족 미래의 등불인 반민특위는 친일경찰들이 휘두른 폭력 난동으로 처참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대통령 이승만은 그 폭거를 방조했다. 그는 유일하게 건국 강령을 제시하지 않았고, 그의 정권은 각 분야 친일파들의 옹위와 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때부터 친일파들은 맘껏 득세하며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이 땅은 비양심과 무질서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다시 곱씹어야 한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 참된 민주주의 세상을 원한다면 부정과 불의의 뿌리를 깨끗이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확실한 길은 이제라도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명기된 죄상에 따라 냉철하게 단죄해야 한다. 또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프랑스와 독일과 이스라엘의 냉엄함을 보라. 우리가 얼마나 직무유기를 해왔는지 반민족적 범죄에 공소시효란 없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아들 김정륙씨, 경찰청장 사과 요구 “이승만 대통령, 1949년 5월 담판 뒤 물리력 행사 결심” “반민특위 해체로 친일청산 좌절…민족의 비극” “경찰, 70년 지난 이제라도 스스로 치욕의 역사 청산해야” 유족들, 6일 오후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인간 띠잇기’ 행사
반민특위 본부 전경.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9년 5월 말쯤이었나. 반민특위 관사로 전화가 한 통 왔어요. ‘저녁에 내가 갈 거니까 그리 알아라’. 이승만 박사였어요.”
김정륙(85)씨는 71년 전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담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식구들을 전부 부르더니 ‘나오라고 말할 때까지는 각자 방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더군요. 잠시 후 경무대 경호팀 수십명이 집을 둘러싸더니 집 구석구석을 뒤지고 겁을 주는데….”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씨는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반민특위 해체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제헌헌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948년 10월 국회가 설치한 ‘친일 청산’ 조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재판권까지 가진 특별 헌법기구였다. 초기에는 박흥식, 이광수 등 1천여명의 친일 인사를 조사하며 성과를 올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탄압으로 1년 만인 이듬해 10월 완전히 해체됐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이 쓰던 도장.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씨의 부친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이(승만) 박사가 반민특위 활동은 살살 적당히 하고, 위원회 임기가 끝나면 내각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더군요.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무엇이든 얘기하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요. 그렇게 화가 난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김씨가 떠올린 담판은 이 대통령의 ‘최후통첩’이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처음부터 못마땅해했다. 당시 정부 곳곳의 요직을 차지했던 친일파 청산 활동을 시시때때로 방해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을 당시 내무장관이 자신의 집에 직접 숨길 정도로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김씨는 “부친과의 담판에 실패한 이 대통령이 회유에서 무력행사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담판 일주일 뒤인 1949년 6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장을 중심으로 한 경찰 수십명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했다. 당시 경찰은 모든 조사 서류를 압수했고, 30명이 넘는 특위 위원을 현장에서 때리고 끌고 가 고문까지 했다.
사실상 특위를 강제 해산한 ‘6·6 특위 습격 사건’에 앞서 반민특위를 지지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0여명이 연달아 구속되는 ‘프락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두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치명상을 입고 내부 갈등까지 생겼다. 반민법의 공소시효가 1950년 6월 20일에서 그해(1949년) 8월 31일로 줄어드는 법까지 개정되자 특위는 완전한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씨는 당시 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경찰이 70여년이 흐른 지금이라도 공식적으로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경찰이 반민특위 사건을 그냥 넘기면 치욕스러운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남게될 것”이라면서 “경찰청장이 직접 사과함으로써 스스로 마무리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반민특위 초기부터 탄압한 이승만, 정권 차원 테러까지 시도
이 대통령은 친일 인사 청산을 앞장서서 반대하며 특위 활동을 초기부터 억눌렀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되기도 전인 그해 9월 3일, 이 대통령은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다.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본격적으로 친일파 조사와 체포가 시작됐고 친일경찰 노덕술, 김태석 등 주요 인물의 체포도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특별조사위원회 행동이 지나쳐 국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 “경찰 기술로 지하공작과 반란 음모를 예방해야 하는데 (특위) 조사위원들은 이런 생각이 꿈에도 없다” 등 여러 차례 특위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급기야 특위 요원을 상대로 한 암살 시도까지 벌어졌다. 수도경찰청 총감이던 노덕술과 서울시경 최난수, 중부서장 박경림 등은 테러 전문가 백민태를 고용해 범행 자금을 건네고 경찰의 권총, 실탄, 수류탄까지 줬다. 자금은 반민특위 ‘체포 1호’였던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이 댔다.
하지만 ‘백색 테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민태가 평소 존경하던 인물이 테러 대상에 포함된 것을 보고 당시 국회 중진이던 조헌영·김준연 의원에게 전말을 다 털어놓은 것이다. 사건을 꾸민 자들은 1949년 2월 기소됐지만, 법원은 실제 테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련자들을 풀어줬다.
노덕술(오른쪽 등만 보임), 김연수, 이풍한 등이 법정에 끌려온 모습.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씨는 당시 반민특위 내부에 스파이까지 침투했다고 증언했다. 친일 청산에 대한 정권 차원의 탄압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위 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결정한 내용이 일선에 지시가 이뤄지기도 전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귀에 먼저 들어갔어요. 친일파들을 잡으러 가면 이미 다 숨어버린 경우가 허다했어요. 친일자 누구 하나 손쉽게 체포한 적이 없었어요.”
동료들을 배신하도록 한 것은 결국 권력욕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그들은 유독 장관 등 감투에 집착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지목한 A 의원은 반민특위 해산 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광복회 “올해 반드시 경찰청장 사과해야”…국회도 사과 요구 목소리 보태
독립운동가 단체인 광복회는 올해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에 대한 경찰청장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71년을 맞는 6일 오후에는 광복회 회원과 당시 특위 관계자 유족들이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 모여 ‘인간 띠 잇기’ 행사를 연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충일인 6월 6일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날이다”라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했던 잘못에 대해 경찰청장이 국민과 역사, 독립유공자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민특위 터 기념비.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반민특위가 제헌 국회의 특별기구였던 점을 고려하면, 국회는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할 직접적인 당사자이기도 하다.
경찰 출신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은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백주에 국가기관이 테러 수준의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일을 계기로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됐다”며 “이것은 명백한 경찰의 과오다. 경찰이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취지의 입장 발표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광복회와 독립 유공자들의 사과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김창룡 묘에서 파묘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6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 친일군인 김창룡의 묘 앞에서 1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삽 모형을 든 일부 시민은 욱일기를 김창룡의 묘를 덮은 뒤 묘를 파헤치는 ‘파묘 퍼포먼스’도 펼쳤다. 그러고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고 쓰인 빨간 풍선을 묘비에 매달았다. 이 곳을 찾는 모든 시민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충청5.1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시민대회에는 주최 단체 회원들 외에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아산지부, 평화재향군인회 회원 등이 참석해 당초 예상보다 많은 100여 명이 참석했다.
기자회견장 뒤에는 이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30명과 국가폭력 관련자 16명, 군사반란 가담자 20명 등 66명의 명단이 내걸렸다. 이들은 이러한 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및 군사반란 가담자들의 묘를 현충원에서 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20여 년째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대로 현충원에 묻혀 있다면서 최근 무르익고 있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가장 먼저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이 발언에 나섰다. 박 지부장은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김창룡과 같은 친일반민족 행위자들과 반인륜적 행위자들이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과 함께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는 이 황당하고 참담함에 묘 이장을 줄기차게 외쳐왔다”며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적폐청산이 절대적 과업이 된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분통만 터트리고 있다.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넘겨주어서는 안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며 “21대 국회에서 관련법 제·개정을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현충원에서 이장시키고, 친일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세력들도 법으로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윤석경 광복회 대전지부장이 나섰다. 그는 “국립묘지는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분들이 돌아가신 후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모시는 영예로운 곳이고 민족의 성지로 모셔져야 한다”라며 “그런데 이곳 대전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장군 묘역과 독립유공자 묘역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가장 악질적인 밀정이 어떻게 독립운동가 옆에 누워있을 수 있느냐”고 개탄했다.
김회신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사회공공특별위원장도 발언에 나섰다. 그는 “민족의 얼이 서린 이곳, 이 땅의 민중들이 그 뜻을 본받고 좆아야할 혼들이 잠들어야 할 이곳 현충원에 독립지사를 잡아 죽이고, 민중을 수탈하고 억압했던 일제 앞잡이들, 민주주의를 짓밟고 민중을 학살했던 망령들이 안장되어 있다”며 “우리 아이들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너무 너무 늦었다. 민족의 화합, 평화와 통일, 인류공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반민족·반민중·반민주 망령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역사의 발목을 잡는 망령들과 그 망령에 기생하는 껍데기들을 쓸어내야 한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이곳 현충원에서 몰아내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족의 얼을 바르게 하는 상징적 출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대식 대전민중의힘 상임대표도 “이곳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적폐체제의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애국자와 매국노가 국립묘지에 같이 누워있다는 것은 마치 사람과 짐승을 한 무덤에 두는 것이나 다름없는 치욕스러운 일이며, 애국자들을 모욕하는 매국적 행위”라면서 “우리는 4.15총선을 친일청산과 제2의 촛불항쟁으로 규정하고 친일파들을 심판했다. 그런 의미에서 21대 국회는 애국 국회, 친일청산 국회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기자회견장 뒤에 걸린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30명 명단” ⓒ 오마이뉴스 장재완▲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기자회견장 뒤에 걸린 현수막으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국가폭력 관련자 16명 및 군사반란 가담자 20 명 명단. ⓒ 오마이뉴스 장재완
이들은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군사반란 가담자 등 부적절한 안장자의 묘를 국립묘지 밖으로 당장 이장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현충원은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호국영령들을 모셔야 하는 곳”이라며 “그런데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이며, 한국전쟁 전후로 1백만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김창룡이란 자가 대전 시민들도 모르게 1998년 2월 13일 새벽에 숨어들어와 안식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어디 그뿐인가, 쓰레기만도 못한 친일반민족 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군사반란 가담자 등 이곳에서 안식을 취하기엔 너무도 부적절한 자 66명이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의 탈을 쓰고 이곳에서 국가의 보호 아래 잠들어 있다”면서 “대전 시민들은 이와 같은 부적절한 자들을 이장할 수 있도록 국립묘지법을 개정하라는 요구를 지난 2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촉구하였으나 정부와 국회는 우리의 외침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들에게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붓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또 “더구나 대전현충원을 관리하는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군을 토벌하고 인근 주민들을 학살, 고문, 강간 등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반인륜적 행동을 하였던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이 사후에 이곳에 안장할 수 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면서 “이에 우리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등 국립묘지에 있어서는 안 될 부적절한 자들의 묘를 당장 이전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김창룡, 소준열, 안현태 등 유족들을 향해 “진정 고인을 위한다면 하루빨리 현충원에서 그 묘를 이장하라”고 촉구하고, 정부와 국회를 향해서는 “하루속히 국립묘지법을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친일군인 김창룡의 묘 앞에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는 표지판을 세우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12.12쿠데타 주역이면서 5.18진압 책임자인 유학성의 묘에서 시민들이 파묘 퍼모먼스를 하고 있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행사를 모두 마치고 애국지사 묘역의 곽낙원 지사(김구 선생의 모친) 묘를 찾아 묵념을 하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기자회견을 마친 이들은 장군1묘역 가장 높은 단에 위치한 유학성(12·12쿠데타 주역, 5.18 광주민주항쟁 때 진압군 측 주요 책임자)의 묘로 이동했다. 묘지에 도착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한 회원은 “우리 광주시민들을 죽인 자다. 이런 자가 국가유공자라는 탈을 쓰고 뻔뻔하게 현충원에 누워있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묘지 앞에 놓은 조화를 걷어찼다. 또한 일부 시민들은 묘지를 발로 밟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들은 또 한 단 아래에 있는 김창룡(친일군인이며 민간인학살의 주범, 김구 선생 암살범의 배후로 지목됨)의 묘로 이동했다. 한 시민은 “이 자한테 우리 할아버지가 죽었다. 독립운동 했다는 이유로…”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시민들은 김창룡의 묘에 ‘반민족행위자 김창룡의 묘를 현충원에서 이장하라’고 쓰인 현수막을 김창룡의 묘에 씌웠다. 또한 ‘욱일기’를 덮은 뒤 “김창룡의 국적이 회복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커다란 삽모형을 들고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묘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쓰인 빨간 풍선을 매달았다. 묘비 앞에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알리는 표지판도 세웠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시지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부, 진정한광복을바라는시민의모임 등은 6일 성명서를 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친일파 청산을 위해 ‘6·6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주한 친일경찰 40여명이 친일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해 반민특위 위원을 무차별 연행 및 폭행한 사건이다.
이 일로 반민특위는 급격히 와해돼 1949년 9월 해체 수순을 밟았고 친일 인물을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하고 1949년 말에 활동을 종료하게 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처단은 유야무야됐다. 14일후인 그해 6월20일부터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체포되면서 의회민주주의는 시련에 부딪혔다. 26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자나깨나 민족통일을 열망하던 백범 김구선생이 육군 장교에 의해 백주에 살해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친일청산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결정적인 날이 6월6일이다.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민족정기를 짓밟고 폭란을 일으킨 지 71년이 지난 지금. 이제부터라도 친일파 청산을 못한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광복회가 6일 오후 3시 6·6폭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를 적극 지지하며 연대를 표명한다”고 덧붙였다.
▲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습격 폭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사진 광복회 제공)
[시사뉴스 강민재 기자]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습격 폭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주요내빈 소개에 이어 식전행사로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 리본달기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국민의례,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등 시민단체장의 연대사, 광복회 대학생 서포터즈의 구호제창, 폐회 순으로 마무리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원웅 광복회장과 임우철 애국지사(102세), 김정육 광복회 사무총장(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장남)을 포함한 반민특위 유족들, 송영길 국회의원, 장영달 광복회 복지증진위원장을 비롯하여 오장섭 전 건설부장관,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 양조훈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송승문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 이요상 동학실천 상임대표, 정원양 4·19민주혁명회 회장, 최형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서울시지부장, 김연경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박용현 한국전쟁유족회 회장, 반민특위 상기 산작약꽃 배지 재능기부자 김운성· 김서경 부부 작가 등이 참여했다.
김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이어 “경찰에게 총칼을 준 것은 국민을 지키라고 준 것이지만, 경찰은 민족반역자의 더러운 탐욕을 지킨 폭란의 범죄 집단이 되었다”고 분노하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되었던 잘못에 대하여, 경찰청장은 국민과 역사,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에게 사과하길 요구한다”고 경찰청장의 공개사과를 촉구했다.
이날 송영길 의원은 “오늘 열리는 인간띠잇기 행사로 정의가 바로서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 바쳐 싸운 선열들의 투쟁을 잊지 않고 우리 후세대에 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장영달 광복회 복지증진위원장(전 국회 국방위원장)은 “독립운동가의 DNA를 물려받은 광복회가 국가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친일청산에 앞장서는데 대해 힘찬 박수를 보낸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이날 모든 참석자들이 추모리본과 함께 패용한 산작약꽃 배지는 광복회가 반민특위 습격일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분노와 슬픔’의 꽃말을 지닌 6월에 깊은 산속에 피는 하얀 산작약 꽃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했다.
한편 올해 첫 번째 반민특위 습격일 상기하는 행사를 개최한 광복회는 앞으로 매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박경석(88) 장군(육군 예비역 준장)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백선엽(101) 장군(육군 예비역 대장)의 사후 현충원 안장과 관련된 논란에 “현행법이 그러니 (현충원에 안장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후과가 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9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라며 “일본군대 출신이라고 해서 다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순 없지 않겠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가 백선엽 가족이라면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겠다”라며 “그게 백선엽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낫다. 이후 벌어질 사태를 어떻게 견디겠나”라고 덧붙였다. 민주당 일각의 국립묘지법 개정 움직임과 관련해선 “법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라며 “아무리 후사에 공적을 세웠더라도 조국을 배반한 것이 입증되면 프랑스에선 극형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백 장군을 이순신·홍범도 장군에 비유한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향해선 다소 거친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미친X들이다. 무식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어떻게 대한민국 독립을 막으려던 사람을 (일본과 싸운) 이순신·홍범도와 비교할 수 있나. 기가 막히다. 우파든 좌파든 명백한 진실을 봐야 한다.”
박 장군은 이른바 ‘육사생도 2기’ 출신이다. 육사생도 2기는 1950년 육사 입학 후 한 달도 안 돼 6.25전쟁이 터져, 임관도 하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된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한동안 육사에서 정식 기수로 취급되지 못했다. 육사생도 2기 상당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박 장군도 전투 중 수류탄 파편에 맞아 몸의 왼편을 크게 다쳤다. 그때 왼쪽 귀의 고막을 잃기도 했다.
1980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이었던 박 장군은 당시엔 ‘광주사태’로 불렸던 5.18민주화운동 직후 무공훈장 심사를 거부했다가 결국 군복을 벗었다. 전역 후 한국군사평론가협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긴 시간 활동했다.
박 장군은 이명박(MB) 정부에서 추진했던 ‘백선엽 초대 명예원수 추대’를 강력히 비판해 결국 이를 무산시킨 이력도 갖고 있다. 그는 “(백 장군이) 아무리 나의 옛 상사라 하더라도 그를 국가보다 우위에 둘 순 없다”라며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사람이 초대 명예원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아래는 박 장군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내용이다.
MB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초대 명예원수 막은 이유
▲ 박경석 육군 예비역 준장. (자료사진) ⓒ 권우성
– 최근 백선엽 장군의 사후 현충원 안장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일본어판 자서전에서도)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6.25전쟁의 4대 영웅도 아니다. 현재 법대로라면 대전현충원에 묻히게 될 건데, 현행법이 그러니 그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후과가 클 것이다. 제가 백선엽 가족이라면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고, 동생 백인엽이 묻혀 있는 가족묘에 안장하겠다. 그게 백선엽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낫다. 이후 벌어질 사태를 어떻게 견디겠나.”
– 백 장군이 6.25전쟁 4대 영웅이 아니란 건 어떤 의미인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이 이후 군과 선배들을 기린다며 6.25전쟁 4대 영웅을 선정한 바 있다. 한국에선 김홍일 소장과 김정우 대령, 미국에선 맥아더와 워커가 4대 영웅으로 선정됐다. 이미 1984~85년도의 일이다. 김 소장은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 최초 장군으로 임관한 인물이다. 6.25전쟁 초기 흩어진 병력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사흘 동안 인민군이 못 내려오도록 막았는데, 그때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참전을 결정했다. 그때의 지연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김 대령은 6.25 전쟁 때 38선 4개 사단 중 춘천에서 1개 사단을 맡고 있었다. 이때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 그들이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들었다. 인민군은 춘천에서 수원으로 이동해 국군을 포위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김 대령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됐다. 김 소장과 김 대령이 양쪽 날개에서 버텼기 때문에 물밀 듯이 밀려오던 인민군의 남하를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4대 영웅에 선정된 것이었다. 근데 나중에 이상하게 백선엽과 김동석 대령이 끼어들었다. 이들은 미국과 매우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미국 정부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정전협정 50주기 기념사업을 진행하며 6.25전쟁 4대 영웅을 선정한 바 있다. 이때 선정된 인물이 한국의 백선엽과 김동석, 미국의 맥아더와 리지웨이다. 박 장군은 훨씬 이전인 1984~85년 한국 정부에 의해 맥아더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6.25전쟁 4대 영웅으로 선정됐다고 주장한다 – 기자 주)
– MB정부에서 백 장군을 초대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했을 때 강하게 반발했다.
“(백 장군이) 아무리 나의 옛 상사라고 하더라도 그를 국가보다 우위에 둘 순 없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사람이 초대 명예원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완전히 대한민국을 죽이는 길이다. 그때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대한민국의 정의감 넘치는 장군들이 백 장군의 초대 명예원수 추대를 막아줬다. 그때도 <조선일보>가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에) 앞장을 섰다.
제가 노골적으로 비판하니까 청와대에서도 연락이 왔다. 전화를 했던 비서관이 (MB를 칭하며) ‘각하’라고 하더라. ‘장군님, 각하가 결정하시려는데 왜 반대하십니까’ 그러기에 내가 ‘야 이 XX야, 대한민국이 어떻게 생긴 나라인데 독립군 잡으러 다닌 사람을 대한민국 초대 명예원수로 세울 수 있냐’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백선엽이 초대 명예원수가 된다면 우리의 건국이념은 말소되고 만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결국 국방부에서 육군 소장인 인사복지실장과 육군 대령인 담당 과장이 집으로 찾아왔더라. 그래서 내가 이런저런 자료를 보여줬다. 결국 명예원수 추대가 무산됐다.”
– 당시 생존해 있던 채명신 장군은 어떤 반응이었다.
“나 혼자로선 힘이 부족해 채명신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역 그릴’에서 점심을 먹고 백선엽에 대해 이야기했다. 채 장군도 (백 장군의 공적이 부풀려져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를 통해 백선엽이 우리나라를 혼자 다 구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 낙동강 전선이 240km였고 여기에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그렇게 8개 사단이 합심해서 지킨 것이다. 백선엽은 그 중 1/8의 역할을 한 것이다.”
– 2013년 세상을 떠난 채 장군은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돼 있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부인에게, 그리고 저에게 항상 ‘8평 장군묘 말고 월남전 전우들이 있는 1평 사병묘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 왔다. 꼭 채 장군이 아니더라도 다른 예비역 장군의 모습과 백선엽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최근 원희룡 제주도자시가 백 장군을 이순신 장군에 비유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그를 홍범도 장군과 비교했다.
“미친X들이다. 무식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어떻게 대한민국 독립을 막으려던 사람을 (일본과 싸운) 이순신·홍범도와 비교할 수 있나. 기가 막히다. 우파든 좌파든 명백한 진실을 봐야 한다.”
– 최근 국립묘지법 개정을 통해 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친일 인사의 묘를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파내야 한다. 법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 백선엽이 주장하는 6.25전쟁 당시 공적을 행여 다 인정하더라도, 프랑스였으면 그의 행동은 극형감이다. 아무리 후사에 공적을 세웠더라도 조국을 배반한 것이 입증되면 프랑스에선 극형이다. 일본군대 출신이라고 해서 다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인물들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순 없지 않겠나.”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