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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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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익명 (미확인) | 토, 2017/12/16- 16:54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하사물이 아니다”

미국이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이다. 정조 임금이 즉위한 그해 4월 27일(음력 3월 10일)로부터 68일 뒤다. 그날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식민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된 해는 1789년이다.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정부가 모습을 갖췄다. 건국된 날, 그러니까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23년 만이었다. 미국 헌법 제7조는 1789년이 아니라 1776년을 독립 원년, 미국 1년으로 계산한다. 미국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정부가 갖춰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선언한 해에 미국이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에서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하는 데는 숨은 동기가 있다. 지난 7일 서울특별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이 태화복지재단 강당에서 주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보수세력이 1919년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동기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태화복지재단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위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는지 규명하고자 열린 학술대회다.

왜 보수세력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을 미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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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패널들 ⓒ 인디엔피 제공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부분이다. 제1조 제1항은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머리에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었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적 의지를 집대성한 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이란 명의의 임시헌법 제1조 제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기조발언을 맡은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헌법 문서에서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것은 임시헌장이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면서 “서구에서도 우리보다 늦은 1920년에야 비로소 체코와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헌법에 명기했다”라고 설명했다.

임시헌장 속의 ‘민주공화제’는 단순히 국민이 주인 되는 체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민주’뿐 아니라 공화(共和)에도 방점이 찍혀 있었다. 공화는 공존과 상생을 전제로 한다. 그 속에는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담겨 있었다.

강정인 교수는 “조소앙은 삼균주의의 핵심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이라고 선언했다”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로 … 주장했다”라고 말한 뒤 “삼균주의가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공화’는 한마디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런 이념이 조소앙을 비롯해 1919년에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의식을 지배했으며 그 의식이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투영된 것이다. 삼균주의가 담긴 공화 이념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으로도 표현됐다.

‘민주공화정’의 역사, 유구하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물러가라”나 외쳤지, 사회적 균등까지 요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다. 2016~2017년 촛불집회에서도 참가자 대부분은 ‘박근혜 하야’나 ‘박근혜 탄핵’ 같은 단순한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게 촛불집회의 이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배척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자는 게 촛불집회를 지배한 이념이었다.

3·1운동 때도 마찬가지다. 외형상의 구호는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식민통치와 불공평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또 백성이 주인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규정이 임시헌장 제1조 제1항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1919년부터 본격화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헌법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왕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전까지는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주공화정과 상반된 환경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우리 민족이 민주공화정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다는 게 얼른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심포지엄 맨 마지막에 발언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대체 언제 시작된 것일까?”라고 질문한 뒤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민주공화정이란 게 3·1운동이 일어나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일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투쟁이 예전부터 있었기에, 3·1운동 때 그것이 민족적 이념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조발언에 이어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한국 민주공화제의 기원과 사력(史歷)’이란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프리만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하여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을 우리나라의 3·1혁명과 민주공화주의 발전 과정에 대입하면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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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전 관장 ⓒ 인디엔피 제공

민주공화정에 대한 꿈이 3·1운동 때 갑자기 표현된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표현됐다는 것이다. 김삼웅 전 관장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대중의 자각이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동학혁명이 민주공화정이란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동학 정신이 민주공화정의 취지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김 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래에서 ‘시천주’는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고, ‘인시천’은 인내천과 동의어다.

“조선 후기 일반 백성들에게 근대적 주권의식을 일깨운 것은 최재우가 창도한 동학이었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시천(人是天)의 교리를 내세우며 사람 중심, 만인평등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동학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사람 중심 세상에 대한 열망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같은 혁신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3·1운동과 임시정부로 응집된 뒤 1948년 헌법을 향해 흘러갔다고 강조했다.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 무려 1898년 이야기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동학혁명 직후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민주공화정 운동에 기여한 역할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추구한 게 의회 설립 운동이었다면서 “수만의 서울 시민들이 (1898년) 12월 6일부터 23일까지 18일 동안 철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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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익 교수 ⓒ 인디엔피 제공

1898년에 한양 시내에서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했다면, 2016~2017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집회에서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면, 민주공화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그 당시에도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토양이 있었기에 1919년 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가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이래로 민주공화국을 열렬히 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했기에 1948년 헌법에 그 이념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3·1운동과 임시정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무책임과 좌우의 분열로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배태한 1919년 당시의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열망까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열망이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진 것이건만, 보수세력은 1919년과 1948년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수세력이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숨은 동기를 심포지엄 학술 토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동학혁명 및 만민공동회에서 표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3·1운동으로 집약되고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발표들이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 밟은 보수세력

동학혁명과 만민공동회의 본질은 촛불혁명과 다르지 않다. 동학혁명·만민공동회는 낡은 세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들은 보수파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동학운동은 일본군뿐 아니라 보수파에 의해서도 진압됐다. 보수파는 민병대를 만들어 동학 진압에 기여했다. 만민공동회 역시 보수파에 의해 진압됐다.

동학과 만민공동회를 진압한 보수파는 1910년 국권 침탈 때도 살아남았다. 일본이 조선 백성들을 손쉽게 지배할 목적으로 그들과 손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919년 3·1운동 때도 끄떡하지 않았다. 대중이 식민지배에 항거할 때 그들은 시위군중을 무지몽매한 자들로 폄하했다. 신문을 통해 경고문을 발표한 이완용의 글에서도 그런 인식이 드러났다. 이완용을 비롯한 보수파의 태도는, 촛불혁명에 맞서 태극기집회를 벌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수파의 후예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할 때도 살아남았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미군정이 그들을 파트너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후예들은 1960년 4·19 혁명 때도 살아남았다. 이듬해 발생한 박정희 쿠데타가 미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진보적 사회개혁이 차단된 덕분이었다. 그 후예들은 1987년 6월항쟁 때도 살아남았다.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 숨을 유지하고 있다. 2016~2017년 촛불혁명으로 한 방 더 맞았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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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청중들 ⓒ 인디엔피 제공

1919년 건국,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동학혁명 때부터 3·1운동 때까지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도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국 보수파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동학혁명 이래의 이념을 집약한 3·1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한민국 출발점을 3·1운동에 두는 헌법 전문이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미군정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위에서 소개한 역사 덕분이다.

심포지엄에서 서해성 총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이 미군정 체제의 하사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형익 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다. “민주공화정으로서의 대한민국이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민중적 각성과 내적 발전의 결과였음을 (…) 드러내고자 한다.”

미국 정부는 1789년에 세워졌는데도 미국인들과 미국 헌법은 미국이 1776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됐다고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삼웅 전 관장이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말에서 ‘살피게 한다’를 문맥에 맞춰 ‘알 수 있다’로, ‘관학자들’을 ‘관변 학자들’로 대체했다.

“이명박·박근혜 중심의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인, 관변 학자들이 1948년 8·15 정부수립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반헌법적인가를 알 수 있다.”

<2017-12-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관련기사

경향신문: “임정의 민주공화제 기반은 삼균주의”

경향신문: “민주 이어 공화 정신 살려야”…3.1운동 100년 준비하며 다시 짚어보는 민주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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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1/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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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서 유족 유수예씨 최후진술
도쿄지방재판소, 2차 야스쿠니 소송 내달 중순 선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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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서 진술한 유족 유수예씨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2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에서 열린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 결심공판에서 진술한 유수예(74)씨. 유씨의 아버지는 유씨가 태어나기 바로 전날 전쟁터로 끌려간 뒤 숨져 일본에 의해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무단으로 합사(合祀)됐다. [사진제공 민족문제연구소] [email protected]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들이 보고 싶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달라. 며칠만 늦게 왔어도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 왔을 텐데….”

22일 오후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의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 103호 법정.

증인석에 서서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합사된 아버지의 명부를 빼라고 요구하는 유수예(74)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한마디 한마디 힘이 실렸다.

유 씨는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合祀)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이다. 유씨를 비롯한 유족 27명은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무단합사의 철회와 사죄, 유골 봉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열린 결심 공판에서 유씨는 원고측 최후 진술자로 나섰다.

그는 전장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소개하면서 사죄해야 할 일본이 아버지를 멋대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다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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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익들의 해방구 日야스쿠니신사…군복 입은 사람들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 제국주의시절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246만6천여명이 합사된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다. 2018.8.15 [email protected]

유 씨의 아버지 유봉학 씨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1월 아들 수예 씨가 태어나기 하루 전에 일제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갔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아버지는 만삭 때 헤어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의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끝내 사진으로라도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했다.

아버지는 해방을 겨우 보름여 앞둔 그해 7월 28일 일본 남부 가고시마(鹿兒島)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뒀다.

일본 정부는 전장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죽어서도 괴롭혔다. 멋대로 ‘일본과 천왕(일왕)을 지킨 신(神)’이라고 ‘추앙’하며 일제의 전쟁범죄자들과 함께 그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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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신사 합사자 명부
[고쿠가쿠인대학 웹사이트 캡처]

야스쿠니신사에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한 246만6천여명이 합사돼 있다. 실제로 위패와 유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합사자 명부가 있다. 합사자 중에 유봉학 씨 같은 조선인이 2만1천181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수예 씨는 아버지가 숨진 뒤 사실상 고아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할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두 달 만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재혼한 뒤 자신을 돌봐주던 이모가 결혼하면서 그는 껌팔이와 구두닦이, 신문팔이를 하면서 어렵게 성장했다.

유년기를 힘들게 버텼던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된 뒤였다.

유 씨는 법정에서 “아버지가 있었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웠다”며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내가 죽으면 대가 끊긴다는 생각에 죽지도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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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야스쿠니(靖國) 신사 합사 취소 소송 공판이 열린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원고들이 변호사, 일본내 지원단체 관계자 등과 함께 유족의 사진과 항의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유씨는 “일본 측 기록에는 아버지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줬다고 적혀 있었지만, 가족들은 전사 통지서도, 유골도 받지 못했다”며 “그런데도 일본이 가족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야스쿠니에 마음대로 합사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나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이다”라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강력하게 요구한다. 야스쿠니에서 아버지를 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씨 등이 원고로 제소한 재판은 한국이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에서 진행 중인 두 번째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이다.

유족들은 지난 2001년 처음 합사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1차)을 제기했고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이후 더 많은 유족이 모여 지난 2013년 10월 도쿄지방재판소에 2차 소송을 제기했고, 한국과 일본 시민들과 변호사들이 이들을 돕고 있다. 2차 소송의 선고 공판은 다음 달 중순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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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지방재판소, 도쿄고등재판소, 도쿄간이재판소가 입주한 재판소 합동청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9-01-23>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로 전쟁터 끌려가 죽은 아버지, 왜 야스쿠니에 가두나” 

※관련기사 

☞한겨레: “내가 태어나기 하루 전날 끌려간 아버지는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수, 2019/01/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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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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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수, 2019/01/2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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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수, 2019/01/2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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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전엔 후지코시 강제동원 2심 피해자 승소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 재확인…”1억원 지급”

【서울=뉴시스】심동준 기자 =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를 동원한 후지코시의 피해자에 대한 위자료 지급 책임을 2심 법원이 다시 인정했다.

이는 지난 2017년 4월5일 항소 접수 이후 658일 만에 나온 판단이다. 또 지난 18일 이 회사의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자 측의 2심 승소 이후 5일 만에 같은 취지의 하급심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1부(부장판사 박미리)는 23일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이춘면씨가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유지했다. 원심인 1심은 후지코시가 이씨에게 위자료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씨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에서 노동력을 동원하던 시기인 1944년 일본 도야마의 후지코시 공장에서의 노역에 동원됐다.

당시 이씨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교장으로부터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 가면 중학교와 전문학교도 다닐 수 있다’는 취지의 통지서 등을 보고 일본에 넘어가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는 공장에서 선반과 같은 큰 기계를 이용해 철을 깎거나 자르는 위험한 작업을 해야 했으며,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생활해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근무 환경 또한 부상을 당하더라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시 현장으로 내몰리는 등 열악했으며, 처음에 들었던 학교 교육은 물론 임금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이씨는 1945년 7월 공장 증설 계획에 따라 한반도에 들어왔고, 같은 해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그는 2015년 5월22일 한국 법원에 후지코시를 상대로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은 “후지코시의 이씨에 대한 행위는 당시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며 손해배상 청구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는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라고 봤다.

또 “이씨에게는 이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면서 이 사건 소송이 권리행사 장애사유가 해소된 이후 상당한 기간 내에 제기된 것으로 보고 후지코시에게 위자료 1억원 등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email protected]

<2019-01-23> 뉴시스 

☞기사원문 :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또 승소…청구권 재확인 

※관련기사 

☞연합뉴스 : 근로정신대 피해자 日후지코시 상대 손배 2심도 배상 판결 

☞서울신문 : ‘근로정신대’ 피해자, 일본 전범기업 상대 2심도 배상 판결 

수, 2019/01/2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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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인터뷰 조한성 출판팀장

 

독립운동가의 삶을 새롭게 발굴하고 알리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작업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제대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역사 속에 잊혀져버린 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작업의 주체가 역사가냐 아니냐의 여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잊혀진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충남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박경철 회원은 농업·농촌·농민문제, 즉 3농문제 전문가이지만, 한인애국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 참여해 큰 역할을 하셨던 이화림 지사의 회고록을 발굴하여 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삶을 복원하였다.
충남연구원에 찾아가 이화림 지사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번역해 <이화림 회고록>으로 펴낸 박경철 회원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임무성 교육위원도 함께 했다.

문 : 어떻게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셨나요?
답 : 중국 베이징대학 유학 당시 한국유학생 연구생회 활동을 하면서 타이항산 역사탐방을 추진해서 4차례 정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학 가기 전부터 윤세주 열사나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옌안 지역은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BS 특집 다큐멘터리 10부작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를 본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연구생회에서 뜻이 잘 맞았던 후배 정원식과 함께 역사탐방을 추진했는데요. 당시 베이징대학에 방문학자로 와 있던 서울시립대학 염인호 교수의 소개로 윤세주 열사의 후손과 연락이 닿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 ‘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와 연결되었습니다. 또 개인사업을 하시면서 기념사업회 일도 도와주시던 김영민 선생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영민 선생이 윤세주 열사와 함께 활동하신 분 중에 이화림이라는 분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면서, 이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서전을 남기셨다고 하는데, 윤세주 열사의 외종손인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다
는 거예요. 이 얘기를 듣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자서전을 찾아봤습니다. 제가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던 때인데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중고서점에 들어갔다가 이화림 선생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발견하였습니다. 얼른 그 책을 주문해서 받았는데 그때 온몸에 흘렀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왜 이 책이 나에게 오게 되었을까.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문 : 번역은 언제 시작하신 건가요?
답 : 그때는 먼저 천천히 정독했구요. 박사논문을 다 쓰고 학위를 받아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도중에 번역을 좀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 생겼어요. 이 책이 번역되기를 기다리시는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의 연세도 너무 고령이셔서 마음도 급했구요. 그래서 타이항산 탐방을 같이 했던 김선경 후배와 함께 번역해서 <이화림 회고록>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문 : 회고록을 보면 이화림 지사나 가족이 3·1운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것 같아요?
답 : 네. 맞습니다. 먼저 3·1운동 당시 이화림 지사의 오빠들이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어요.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전단지를 인쇄해서 뿌리기도 했구요. 그 과정에서 소학교 학생이던 이화림 지사도 오빠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1995년 8월 요녕민족출판사가 출간한 <정도>와 한글 번역판 <이화림 회고록>

이화림 지사나 오빠들이 3·1운동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 듯 해요.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숭현소학교에서 일하셨는데, 상당히 민족의식이 강하셨어요. 구들장에 태극기를 숨겨놓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잊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요.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경찰들의 압박이 심해졌다는 거구요. 오빠들은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만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독립군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후론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는 언제 중국으로 망명하셨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당시 나이도 어렸고 공부도 계속해야 해서 어머니와 함께 국내에 남았어요.

1938년 중경 시절의 이화림 지사

 

이화림 지사는 숭현소학교와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역사문학연구회’라는 독서클럽에 가입했어요. 그곳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저서들을 처음 접합니다. 그후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는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얼마 후 이화림 지사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오빠들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북지역으로 떠나는데 오빠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문국의 소개로 김두봉 선생을 찾
아 상해로 갑니다.
그런데 김두봉 선생이 말하길, 독립운동은 김구 선생에게 가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김두봉 선생의 소개를 통해 김구 선생을 찾아갔는데 김구 선생이 이렇게 물어요.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 이화림 지사는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구 선생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의 비서 역할을 하며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활동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 거사하러 갈 때 폭탄을 넣어갈 속옷 고쟁이에 주머니를 만드는 일도 했구요. 윤봉길 의사의 거사 때에는 윤봉길 의사와 일본인 부부로 위장해 홍커우공원을 미리 정탐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화림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활동한 바로 이것이 이화림 지사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독립운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화림 지사가 이렇게까지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김구기념사업회나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쪽에서는 이화림 지사의 한인애국단 활동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 같아요. 이화림 회고록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역사학계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연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문 : 이후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과 헤어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서 일하게 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답 : 이화림 지사가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되는 과정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에요.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화림 지사도 그 과정에서 자연히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된 거죠. 이화림 지사는 광저우로 피신하는데 거기서 유학생이었던 김창국이라는 분을 만나 결혼하고 아들도 낳게 되요. 그런데 이때 조선민족혁명당의 지도자 윤세주가 광저우에 와서 유학생들에게 연설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나서달라는 것이었죠. 이화림 지사는 그
연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반성도 하게 된 것 같아요.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경을 넘어놓고 지금은 유학생과 결혼해서 애기를 낳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리려고 했으니까요. 이화림 지사는 고민 끝에 남편과 아들을 남겨두고 민족혁명당이 있는 난징으로 떠납니다. 이화림 지사는 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지사와 함께 열심히 활동하게 됩니다.
사실 윤세주의 후손 분들이 생전에 이화림 지사에게 연락하고, 자서전을 찾으려고 노력한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윤세주 열사 때문에 이화림 지사가 개인의 행복한 삶을 버리고 힘든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됐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윤세주 열사의 마음의 빚을 그 후손 분들이 나누고 계신 거지요.
1942년 5월 일본군 수십만이 팔로군을 섬멸하기 위해 타이항산지구로 쳐들어왔던 유명한 타이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팔로군 주력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윤세주, 진광화 열사가 전사하게 되는데요. 이 전투에서 이화림 지사는 중산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배워왔던 의술을 발휘해서 부상자 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화림지사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시절 가장 빛나는 활약은 바로 이것이
라고 할 수 있죠.

문 : 이화림 지사의 해방 후 활동은 어떠했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서 해방을 맞습니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북진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중국 내전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이화림 지사는 당시 무정 장군의 권유로 옌안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무정 장군이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 남아서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줍니다. 이화림 지사는 1947년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옌볜에 있는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에서 근무합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이화림 지사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해 북한으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의무병으로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구요.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를 다쳐 다시 랴오닝성 선양으로 복귀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부상 치료 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 그 후 이화림 지사는 중국에서 의사로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1955년에는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했고, 옌볜조선족자치주 위생국 부국장, 국장, 옌볜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 당대표 등을 역임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1984년 퇴직하는데, 그동안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 1만 2천 위안을 옌볜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놓고 왔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아동단체에 대한 기부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문 :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셨는데, 해방 후 활동이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고 있군요.
답 : 네. 그렇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의 독립운동, 사회주의자의 독립운동에 대한 서훈을 어디까지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요. 이화림 지사의 서훈이 이 문제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 같아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하더라도 이분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다는 점에서 좀 더 전향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MBC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와 관련해 이화림 지사를 취재해 갔는데요. 그런 관심이 좀 더 널리 퍼져서 서훈 문제도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에 대해 여쭙느라고 정작 선생님에 대한 질문은 못했습니다. 현재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소개해주시고, 올해의 계획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 :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농민수당, 농민기본소득에 관해 연구해서 전국에 알리고 중앙정부부터 지방까지 이 정책이 채택되고 추진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농민기본소득이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자는 것 인데요. 현재 농민들의 소득은 도시 농촌 간에도 차이가 크지만 농민 간에도 소득차가 큰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농사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농민에게 농민기본소득을 보장해주자는 주장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공론화되어 현재 해남, 강진, 부여 등지에서 농민수당을 도입한 상태이구요. 조만간 경기도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는 전국적으로 30여 차례 농민기본소득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요. 올해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그 외에 농촌의 사회문제, 복지, 개발문제도 연구하고 충청남도와 중국과의 교류 활성화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올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아름다운 공주의 풍경을 뒤로 하고 박경철 회원과 인터뷰를 마쳤다. 역사가 왜 연구와 실천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목, 2019/01/2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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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

지난 2018년 12월 15일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 한
국학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좌담 <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열렸습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대학 교수가 참여했고,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았습니다. 좌담회 전날인 1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나의 인생과 역사학>을 주제로 강만길 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강만길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 연구를 통해 일제시기 반식민사학의 변혁적 전통을 복원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전망을 담아내지 못한 채 사용되던 ‘해방 후 시대’를 분단시대라 역사적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복원하고,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을 분단시대 극복사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매진해 왔습니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고, 통일문제 강연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히토쓰바시대학 교정에는 이 대학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동판이 있습니다. 후쿠다 도쿠조는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입론한 일본 제국주의시대 경제사학자였는데, 조선사회는 19세기 후반 일본의 강요로 문호가 개방될 때까지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중세사회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백남운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해 우리 역사에도 중세사회가 있었다고 논증했는데, 자신의 도쿄상과대학 선생인 후쿠다 도쿠조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입니다.
14일의 강연에서 강만길 교수는 후쿠다 도쿠조와 백남운의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습니다.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4살 때인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다닐 때에는 한국전쟁에 반대하고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사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당시 일본 역사학자들이 사용하지도 않았던 ????통상휘찬???? ????통상휘편???? 같은 자료를 이용하여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와 함께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조선경제사를 연구했습니다. 또한 관동대지진 대학살에 관한 자료집을 펴내고,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中公新書, 1975)라는 책을 발간해 당시에 5만부 가량 팔리면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두 강 교수가 역사연구의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해 본 이번 좌담은 여러모로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두 강 교수는 연배도 1살 차이로 비슷한데, 식민지와 해방, 분단, 6.25전쟁, 냉전, 반공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분단과 전쟁은 남한에서 반공독재를 낳고 고착화했으며, 일본에서는 분단된 재일조선인사회에 민족 차별이 더해졌습니다. 두 강 교수는 자기 존재의 모순을 사회 모순으로 전화시키며 실천적연구를 통해 인간해방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역사학자이기 이전에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한 지식인입니다.
두 강 교수는 오래 전부터 교유를 이어 왔는데, 여러모로 닮은 점도 많습니다. 자본주의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경제사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그렇고, 경제사를 연구하다가 사회운동사로 연구를 확대해 간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학자로서 추구해온 역사인식에 공감하고 지식인으로서 추구해 온 삶의 가치와 지향에 공감하기 때문에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5일의 좌담에서도 강덕상 교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최근에는 소농사회론, 유교적인 동아시아 근대이행론 등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 좌담회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보다는 그 역사인식 문제를 주로 다루었는데, 향후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 연구에 참조되었으면 합니다.
강덕상 교수는 ????여운형 평전???? 완성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1권과 2권은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4권이 2019년 2월에 발간될 것이라 했습니다. 강덕상 교수는 1986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강만길 교수와 함께 여운형 묘소를 둘러보았는데, 현대사에 자리하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에 비하면 묘소가 너무 초라해 씁쓸했다고 합니다.
????여운형 평전????이 4권까지 완간되면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었지만 재일조선인도 많았습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서로 주고받은 정담이 지금도 애틋합니다. 강덕상 선생님이 사석에서 필자에게 건넨 한마디가 마음 한구석에 애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겪는 처지가 온전한 하나의 반쪽이라면 재일조선인은 그 반의 반쪽이라고.

병중에 계신 강덕상 선생님이 오랜 친구 강만길 선생님을 만나러 나오셔서 저녁 식사 자리도 마련해 주시고 좌담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두 분의 애틋한 정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강덕상 선생님의 완쾌를 바랍니다.

목, 2019/01/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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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 12월 8일, 김일동 작가가 전시품 ‘보상하라展’을 기증했다. 독립운동가 5인(김구, 김좌진, 안중
근, 이봉창, 유관순)의 희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팝아트로 작가의 작품해설은 다음과 같다.
(작품 해설 :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등장하고 그들이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착용하고 현대 문화
기본매체인 영상과 사운드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위해 힘
들게 활약을 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노고 끝에 이렇게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 대중문화·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를 작품으로 표현해 보았다.)

• 12월 7일, 야스쿠니재판지원회, 재일조선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화련 씨가 소장하고 있던 생활자료를 기증했다. 1934년(소화 9년)에 제작된 보자기로 ‘수복
강녕壽福康寧’이라고 쓰여 있다.

• 12월 10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김재용 교수(원광대)가 故 임종국 선생의 서신을 기증했
다. 서신은 임종국 선생과 <친일문학론>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오무라 교수가(2018년 7월 민
족사랑 참고) 주고받았던 것으로 <친일문학론>이 번역된 1976년 이전이 14점, 출판 이후가
30점, 총 44점이다.

• 12월 14일, 수원지부 소속으로 25년째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서용희 회원이 소장자료 4점
을 기증했다. 기증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법령관계 자료집으로 <모범조선호적기재례
전집>(1935), <조선호적예규>(1933) 등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9/01/2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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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는 12월 26일 오후 2시, 옛 남영동 대공분실 마당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운영과 관리를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넘기는 이관식을 열었다.
1970~1980년대 대표적인 고문기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의 요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과거군사독재 시절 박종철 열사 등 수많은 민주화 인사를 고문했던 장소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최근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됐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10민주항쟁 31주년 국가기념식에서 이 자리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이관되어 민주인권기념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이날 이관식에는 고문피해자, 고문피해자 가족 및 유가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그리고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민갑룡 경찰청장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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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활동 백서> 출판기념회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상임대표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 주최로 12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에서 열렸다. 역사학자 이이화 이사는 축사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역사라도 기록해야 기억되며, 나쁜 놈은 나쁜 놈으로,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기록해 후배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말했다. 1권 751쪽, 2권 894쪽, 3권 667쪽 등 모두 2312쪽에 달하는 백서는 1권에서는 활동가 소회 등 활동 평가와 일지·좌담회·언론 보도·논평, 2권에서는 교과서 분석·집필 거부·교육부 공문서, 3권에서는 법적 대응 자료와 국제기구 활동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송두환 민변 전 회장(전 헌법재판관)은 축사에서 “2018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민변이 제기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 위헌 헌법소원심판청구’를 각하했다”며 “국정화 고시와 같은 불순하고 위헌적인 시도의 재현 위험성을 보다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재의 명시적 위헌 선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본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한경 부천 중원고 교사(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는 같은 자리에서 “박근혜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추진된 것처럼, 다음 문재인 대통령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폐기됐다”며 “앞으로 누구도 국정교과서를 꿈꾸지 못하는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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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명예이사장)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学) 초청으로 12월 12일~16일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한국학 연구센터 설립 2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초청 방문으로 신용옥, 조세열 상임이사가 수행하였다. 일정은 12일 출국, 13일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 자택 방문, 14일 강연회, 15일 강덕상 교수와의 좌담회, 16일 귀국 순으로 이루어졌다. 강덕상 교수는 재일사학자로서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과 일제의 조선인 학병동원 등을 연구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초창기부터 지도위원을 맡은 인연이 있다.
강 교수는 12월 14일 히토쓰바시대학 국제연구관에 열린 ‘나의 인생과 역사학-분단시대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로’ 강연회에서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주장한 후쿠다 도쿠조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백남운의 사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강만길 교수와 강덕상 교수의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역사연구의 과거·현재·미래’ 좌담회가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강덕상 교수는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두 강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관련한 역사인식 문제와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참석했는데, 한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 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질의가 있었는데 그 가슴 뭉클한 사연이 청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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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회참여 운동 1세대 원로이며 연구소 3대 이사장인 김병상(86·필립보) 신부의 삶과 신앙을 기록한 회고록 〈따뜻한 동행〉 헌정 미사와 출판기념회가 12월 15일 인천시 심곡동 국제성모병원 3층 마리아홀에서 열렸다. 이 책에는 선후배 동료 사제들이 김 신부를 소개한 글과 더불어 김 신부의 구술·인터뷰·일기를 비롯해 지인들의 증언까지 충실히 정리해 놓았다. 1974년 유신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되자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김 신부는 천주교와 인천지역 민주화운동계의 상징이 됐다. 1977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고, 1976년~1980년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 8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에 임명되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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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함세웅 이사장

 

2019년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 한 해 우리 연구소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고 격려해주신 은인 회원들과 구성원 모든 분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남북 정상은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 평화와 통일의 문을 여는 새로운 100년을 남북 8천만 겨레가 함께하자는 취지로 남북공동행사를 약속했습니다.
남북공동행사의 성공을 위해 지난 역사에 대한 해석과 그 안에 남아있는 차이를 우리는 함께 극복해야 합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는 평화공존과 일치를 위한 약속과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민족공동체는 일제의 침략과 그 후유증인 이념과 정파 때문에 갈등과 분열 속에서 서로 헐뜯고 살았습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이 모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3년 동안 서로 비판하고 심지어 경멸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부끄럽고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남북 분단과 증오였습니다. 이에 친일 매국노와 반공 분단 권력이 손잡고 독버섯이 되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올해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선조들이 품었던 그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3·1혁명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바로 구체적 표징입니다.
해방 정국 3년, 곧 미군정 시기가 미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였다는 분명한 역사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 인식이 미국을 넘어 남북이 함께 손잡고 확인해야 할 평화공존의 민족적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북이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한 어머니의 자손이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어머니가 같은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가족이 함께 만나고 살아가는 것은 인륜이며 하늘이 주신 천륜입니다.
이에 새해 우리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남북 8천만 겨레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는 일에 앞장서도록 노력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잔재 청산은 물론 모든 비인간적 요소를 척결해 온 인류가 하나되는 평화공존의 보편적, 우주적 ‘민족문제연구소’로 승화하기 바라며 기도합니다.
새해 회원 여러분과 연구소 임직원 각자의 소망과 꿈이 실현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 2019/01/2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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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주관한 국제학술회의가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를 말한다-조사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덕성여대에서 열렸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 등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일어난 인적 피해 문제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국가와 시민사회 차원에서 달성한 진상규명 현황과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심화되고 발전된 진상규명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방법, 자료 발굴 등이 필요한지를 함께 모색하고자 마련되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김승은 책임연구원이 ‘한반도 내 인명피해 조사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성균관대 박사과정의 김강산 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발표하였으며, 재한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모임의 이치바 준코 대표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강제동원을 주제로 한 발표는 김민철 책임연구원,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 관장, 고바야시 도모코 유골봉환종교인시민연락회의 공동대표가 맡아 한국과 일본에서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의 현황에 관해 각각 발표하였다. 이어서 조시현 연구위원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는데, 류준범(국사편찬위원회), 이상의(인천대), 히다 유이치(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고바야시 히사토모(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량대륭(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씨 등이 한국, 일본, 자이니치의 입장에서 연구 성과와 활동 등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깊이 있는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번 회의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현장에서 연구와 실천을 거듭해 온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띤 논의를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함께 모색한 뜻 깊은 자리였다. 또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이 부각되고 있는 지금, 국가를 뛰어넘은 양국 시민들의 연대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19/01/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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