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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언론투쟁 현장에서 임장원 회원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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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언론투쟁 현장에서 임장원 회원을 만났습니다.

익명 (미확인) | 목, 2017/12/07- 18:17

임장원 회원 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이번 회원 인터뷰는 1994년 KBS 기자로 입사해 아나운서, 앵커, 특파원 등을 거치며 20년 넘게 언론인으로 활약하시다 지금은 KBS 파업에 참여하며 언론 정상화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계시는 임장원 회원님을 만났습니다.

 

방송국이 총파업 하면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결방하는 것부터 생각해 아쉬워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또 파업하나보다 했지요. 하지만 최근 이명박, 박근혜 정권시절 권력과 결합되었던 국영방송의 파행이 드러나면서 언론적폐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KBS, MBC 언론인과 방송국 노동자들이 청와대 외압으로 민중의 눈과 귀를 멀게 한 KBS 고대영 사장, MBC 김장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긴 시간 파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투쟁하고 있는 언론인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임장원 회원님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 지난 11월 8일 여의도 KBS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파업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파업의 목표는 고대영 사장의 퇴진입니다. KBS의 주인인 시청자들이, 또 내부 구성원이 공영방송에 기대하는 저널리즘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집권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우호적인 보도를 해왔고,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저항하는 제작진에게는 인사상의 보복이나 징계를 일삼아왔습니다. 그 결과로 조직의 토론 문화가 죽었고, 건강한 저널리즘은 실종됐습니다. KBS 뉴스는 ‘땡북’ 뉴스(북한 관련 뉴스가 많다는)라는 비아냥을 받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는 종편 채널들의 연이은 특종을 쳐다보기만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KBS 취재진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의 야유를 받고, 쫓겨나고, 매체 신뢰도는 떨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은 보수정권이 집권한 지난 9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져왔고, 특히 현 고대영 사장 체제에서 극에 달했다는 게 다수 KBS 구성원들의 평가입니다.

 

 

공범자들 영화를 보거나 투쟁하시는 과정들을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분들은 말 못할 아픔과 어려움이 많을 거라 예상됩니다. 파업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이세요?

 

파업이 두 달을 넘기면서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도 고통입니다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점은 KBS의 존재감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KBS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공영방송 파업이 국민들의 관심사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방송 매체가 워낙 많다보니 시청자들이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아요, 수신료를 JTBC에 주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KBS 뉴스에 대한 기대 자체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 나오는 양비론적 인식도 안타깝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코드 안 맞는 공영방송 사장은 어차피 쫓아내는 것 아니냐, 보수나 진보나 다 똑같다, 이런 거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수 KBS 구성원들이 월급 못 받는 파업을 하면서 고대영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는 결코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고 사장이 저널리즘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해왔다면, 고 사장이 ‘보수 색채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현 정권이 쫓아내려는 시도를 할 경우 KBS 구성원들은 오히려 정권에 맞서 사장의 임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할 것입니다.

 

방송문화진흥회가 고영주 이사장 불신임건을 가결하면서 MBC 사태는 해결될 실마리가 보여 희망적인데, KBS는 전망이 밝지 않다는 언론기사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지난 9년간의 MBC는 워낙 ‘막장’으로 망가져왔기 때문에, 해직 언론인도 여럿 나왔구요, 정상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열망이 높았고, 그게 반영된 결과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도, MBC의 정상화가 더욱 시급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만, 상대적으로 KBS가 관심을 덜 받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KBS는 전망이 밝지 않다는 기사가 나오는 배경은 이런 겁니다. KBS와 MBC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거대 야당이 ‘정권의 방송 장악’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붙이다 보니 현 정권 입장에서는 비록 그것이 공영방송 언론인 다수와 국민들이 바라는 개혁이라 해도 일사천리로 진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KBS의 경우 사장 임기가 1년 남아서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교체를 서두를 큰 실익(?)도 없으니, 내년 지방선거 등을 감안하면 야당의 ‘방송 장악’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는 정도로 발을 빼고 싶은 셈법도 나올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파업 투쟁 중인 다수 KBS 구성원들은 공영방송 정상화에 대한 정권의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냐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관건은 시민사회의 관심과 성원입니다. 정말 KBS는 이렇게 1년을 더 가도 좋은 것인지, 정치적 셈법으로 주판알을 두드리는 정치권에 KBS의 운명을 맡겨놔도 되는 것인지… 수신료를 내는 시민들이 더 큰 관심을 갖고 ‘다음은 KBS 정상화다’를 크게 외쳐주셔야 KBS 개혁이 앞당겨질 거라고 봅니다.

 

▲ 임장원 회원은 투쟁의 최종 목표는 고대영 사장의 퇴진이 아니라 KBS가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수신료를 내고 싶은 공영방송’으로 다시 정상화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파업 이후의 방향과 투쟁계획 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제가 노조 집행부가 아니라서 투쟁 계획은 드릴 말씀이 없구요,^^;; 중요한 건 고대영 사장의 퇴진이 투쟁의 최종 목표가 아니란 겁니다. 투쟁의 최종 목표는 리셋 KBS, 수신료를 내고 싶어하는 공영방송의 건설이구요, 리더십 교체는 그 수단이자, 디딤돌일 뿐입니다. 제가 기자이기 때문에 보도부문에 대해서만 말씀드린다면, 공짜로 볼 수 있는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 10대부터 노령층까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접하는 시대에 우리는 왜 수신료를 내고 KBS 뉴스를 봐야 하는가에 대해 답이 되는 뉴스를 생산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공공부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필요하지만 시장(민간부문)에 맡겨놓으면 나오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죠. 언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뉴스가 넘쳐나지만 검색을 해보면 쟁점이 되는 사안을 양비론적으로 늘어놓는 뉴스만 나옵니다. 양쪽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검증하거나 의혹이 생기면 끝까지 파고드는 뉴스는 가물에 콩 나듯 볼 수 있어요. 민영 언론사들은 기자들에게 기사 한 건을 오랫동안 취재할 시간을 줄 여력이 없고, 광고주들이 싫어할 만한 내용을 끝까지 파고 들게 할 수도 없거든요. 수신료가 중요 재원인 KBS는 구조적으로 ‘끝장 기사쓰기’가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언론사입니다.

 

기자님은 방송기자인데, 최근에는 온라인에 주로 삼성 관련 심층기사를 써서 반향을 일으키곤 하지 않았나요?

 

현 고대영 사장 체제가 출범한 직후인 2015년 12월에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를 9시뉴스에서 다뤄달라는 기자협회장의 호소를 보도본부 간부들이 부당한 압력이자 편집권 침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낸 적이 있었죠. 저는 당시 경인방송센터장으로 부장급 간부였는데, 마지못해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성명 참여를 철회하고 보직을 사퇴해버렸어요. 그 이후 인천지국에 평기자로 발령받아 ‘유배’ 생활을 하다가 디지털뉴스부로 옮겼죠. 디지털뉴스부도 일종의 유배지라 ‘진보 성향’ 기자들이 모여 있는데, 온라인 쪽은 수뇌부가 별로 신경쓰지 않으니 오히려 자기가 쓰고 싶은 기사를 마감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었죠. 그래서 제도권 언론이 잘 안 쓰는 기사, 겉핥기만 하는 기사, 검증이 부족한 이슈를 들여다보고 1주일에 하나 정도만 심층적으로 썼습니다. 건수로는 40여 개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이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나 섹션별 주요 뉴스 코너에 노출되며 격려와 제보 메일을 많이 받는 등 개인적으로는 뉴스 앵커 시절보다 더 뜨거운 성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특출해서가 아니라 기자에게 시간과 자유를 주면 더 깊은 기사, 더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있음을 확인한 셈이죠. KBS 기자 수백 명을 시청률과 제작 경쟁에서 풀어주고 성역을 없애주고 시간과 자유를 주면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거라 확신합니다.

 

이번 사태를 공영방송 이사회 선출 방식 구조가 문제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당 추천 이사들이 방송국 사장을 뽑고 중요 안건을 처리할 수 있는 지금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구조적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맞은 말입니다. 당연하고, 그래서 또 오랫동안 지배구조 개편 문제가 제기돼왔지만, 정치권이 야당일 때와 여당일 때 입장이 달라서 여지껏 성사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배구조 개선이야 말로 공영방송 독립을 위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젭니다.

현재 KBS 이사진은 여당이 7명, 야당이 4명을 추천하고 MBC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진은 여당에서 6명, 야당에서 3명을 추천하지요. 현 여당이 야당일 때 제출한 방송법 개정안은 이사 수를 각각 13명으로 늘리고 여당과 야당의 추천 이사 수를 각각 7대6으로 해 불균형을 최대한 축소하고, 이사 3분의2 이상이 찬성해야 사장을 선임할 수 있게 하는 ‘특별다수제’를 도입해서 사실상 야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했을 때의 문제점은 여야 타협의 산물로 무색무취한 사람이 공영방송 수장으로 선임되기 쉽다는 겁니다. 여야 모두가 ‘오케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여야 모두의 눈치를 보고 어느 쪽에도 날을 세우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사실 중립성, 공정성이라는 게 무색무취를 의미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아예 정치권의 영향력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개편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이사들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시민들을 포함해 대규모 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천위원의 2/3가 찬성하는 후보자를 사장으로 선임하는 등의 방법이 대안이 될 수 있겠죠.

 

▲ 임장원 회원님은 수신료를 내는 시민들이 더 큰 관심을 갖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외쳐주길 당부했습니다.

 

회원 인터뷰인만큼 2006년부터 경실련 회원으로 지금까지 계속 큰 힘이 되어주시고 계신데, 경실련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경실련은 창립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87학번이에요. 6월 민주화항쟁 세대라고도 하는데, 제가 대학 다닐 때는 학교 출석하는 게 죄스럽고 출석하는 것보다 거리에 나가는 게 익숙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3학년 때 경실련이 생겼고, 군대 다녀와서 복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실련 활동들을 알게 됐는데요,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경실련 간사를 꿈꿨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동조했지만 운동권에 참여하지는 않고 변두리에 있었는데, 어쨌든 사회변혁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어요. 노동운동이라든가 야학에 참여할 용기는 못 내고 있는데, 마침 시민사회단체라는 공간이 좋아보였어요. 그런데 거기서 또 주저하게 된 거죠. 저희 집이 가난해요. 경실련 가면 가난할 거 같은데 솔직히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찾은 게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월급받는 게 뭘까 했을 때 ‘언론’일을 하게 됐어요. 실제 기자 생활 하면서도 시민단체 지향과 언론의 지향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사회변혁과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하는 역할들을 한다는 면에서 비슷하다고 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언론이 조금 더 제도권에 있고 안정된 생활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겠죠. 그래서 비겁하게 조금 더 안정된 기반이 있는 곳으로 전향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시민단체 활동가들 늘 존경합니다.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언론활동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반성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경실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경실련이 해 온 여러 가지 활동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아파트값 문제…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전문성을 가지고 경제정의 실천이라고 하는 설립 취지에 걸맞게 많은 사회적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을 하고 지금처럼 기조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단, 이제 경실련은 시민사회단체지만 갑입니다.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같은 권위있는 시민단체의 행동이나 발언 하나하나는 이미 언론보다 더 사람들의 신뢰를 받거든요. 조선일보가 말하면 안 믿어도 경실련이나 참여연대가 말하면 믿는다는 거죠. 그래서 그 책임과 신중함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올 초에도 경실련 보도자료 관련해서 오류인가 의도적 과장인가 확인해보고 싶어 담당자와 한번 통화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볼 때는 분명 논리적으로 과장된 부분들도 보였거든요. 사실 이런 부분들은 진보언론에서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내세우는 주장이라고 해서 정치(精緻)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특히 시민사회단체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전문가들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제기자로서 한 말씀 드려봤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책을 편집하는 과정 중에 방송문화진흥회가 임시이사회에서 김장겸 MBC 사장 해임안을 가결했습니다. MBC 파업 71일만입니다. 임장원 회원님 말처럼 사장 해임이 최종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해 진실을 은폐하며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한 왜곡되고 망가진 것들을 다시 세워 정상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언론을 통해 여러 소식을 접합니다.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해야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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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경실련 30주년을 준비하며 경실련이 세 번째로 만난 분은 강철규 前공동대표님입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부패방지위원장을 역임하시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셔서 많이 알려지셨는데 경실련 창립 멤버이십니다. 경실련 창립 당시의 이야기와 경제정의연구소를 설립 이야기 등 30년 가까이 지난 오래 전 이야기지만 창립 초기 활동들을 생생하게 나눠주셨습니다. 경실련 창립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교육자, 공직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 재벌개혁을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할 역할 등에 대해서도 고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1. 경실련 창립 당시 부동산 문제가 심각해서 전문가, 학자, 종교인 등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조그만 연구실에서 책상 놓고 시작한 모임이 경실련으로 발전했다고 들었습니다. 창립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89년 6월 발기인대회를 했는데, 그 이전에 3-4개월 전부터 뜻있는 분들이 나라 경제가 이래선 안 되겠다고 모였어요. 8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인 3저 호황(저금리•저환율•저유가)으로 한국경제도 성장세를 탔어요. 87년 6•10 항쟁 이후 88년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 무렵부터 부동산 투기가 폭발적이었어요. ‘전 국토가 투기장화되고 전 국민이 투기꾼’이 된다는 말이 일상화 될 정도였지요. 너나 할 거 없이 전국을 누비며 땅 살 데 없나 집 살 데 없나 하고 돌아 다녔으니까. 노태우 정부가 선거공약으로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및 신도시 개발 등의 공약을 남발한 덕이지요.

그 과정에서 실제로 넓은 땅을 많이 산 건 재벌들인데 거기에 편승해서 일반 국민도 근로해 돈 벌려는 노력보다 땅 투기해서 일확천금 해보려고 했지요.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학자들, 종교인들, 시민운동가, 전문가들이 몇 사람씩 모이기 시작하다가 공감자가 크게 늘어났어요. 우리가 뭘 해야 되나? 이 나라가 일한만큼 대접받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경제정의를 실천하는 시민연대를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3-4개월시민운동조직을 위한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1989년 6월 3일 드디어 발기인대회를 YWCA회관에서 했어요.

발기인대회 끝나자마자 당시 경제정의 실현을 위하여 땅 투기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으로 7-8명 교수들이 숭실대학교 이진순 교수 방에서 매주 두 번씩 모여서 토론을 했어요. 여러 사람이 참여했지요. 경제학자, 부동산업자, 시민운동가 등등. 그렇게 모여 공부한 걸 종합 정리해서 8월 중순에 여의도 백인회관에서 최고의 공개세미나를 했어요. 내가 대표로 발제를 하였고 경실련 최초의 세미나에서 내세운 3가지 해결책이 토지공개념 3법이었어요.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를 제도화해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경실련이 비판만 하는 단체가 아니라 대안을 내는 시민단체라는 것을 보여준 첫 세미나였고 첫 주장이었지요. 아직 창립총회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기대 이상으로 세미나 내용을 대서 특필하였지요.

경실련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떴다 알려지면서 경실련에 참여의사를 밝힌 회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인 1989년 11월 3일에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경실련이 생겼다고 볼 수 있지요.

 

2. 창립 이후 초기에는 어떤 활동들을 했나요?

경실련문고라는 책을 냈어요. 89년에 김태동 교수의 『땅, 투기의 대상인가 삶의 터전인가』라는 책이 처음 나왔고, 91년에 나하고 최정표, 장지상 교수가 공저해서 『재벌,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라는 책을 냈는데 많이 팔렸어요.

재벌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대토론회가 열렸어요. 재벌문제를 주제로 전경련에서 세 사람, 경실련에서 세 사람이 나와서 하루 종일 대토론회를 개최 했어요. 책을 쓴 다음이니까 자료가 많았어요. 전경련은 전경련대로 재벌을 옹호 대변하면서 경실련의 재벌개혁 주장에 대항하는 식으로 열띤 토론을 했죠. 당일 여러 중계방송차가 토론을 생중계하였을 뿐 아니라 이튿날 모든 신문 방송에서 대서특필로 나갔고, 경실련이 많이 유명해졌어요.

재벌 다음에 했던 게 금융실명제인데, 사회적으로 찬반 논쟁이 많았어요. 경실련의 주요 전문가들은 찬반토론회 나가서 금융실명제를 즉시 도입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전경련에서는 금융실명제 하면 나라 망한다고 난리가 났었죠. 우리나라는 도장문화인데 실명으로 하면 투자가 안돼서 경제가 쇠퇴한다는 억지 주장을 하였지요.

93년 8월 15일 전격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도입을 발표했죠. 아마 사진 찾아보면 있을텐데 경실련 사무실에서 축배를 들며 축하를 하였지요.

 

3. 경제정의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연구소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부동산 투기를 막아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니까 땅을 가진 땅 부자들이 경실련을 좌파 정도가 아니라 빨갱이 단체라고 매도하기도 하였지요. 토지소유를 공개념하고 시장경제를 부정하며 기업을 비판한다는 게 이유였어요. 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지요. 우리가 무조건 기업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제정의에 기여하는 기업은 상을 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죠. 이를 위해 경제정의연구소를 설립하고 경제정의 지표를 만들고 상장기업들을 평가하여 가장 우수한 기업들에게 상을 주기 시작했어요.

당시 미국에서 갓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경제정의기업상 기준 모델을 만들었어요. 김평기 원광대 교수, 홍길표 백석대 교수 등이 주축이 되었고, 김홍권 선생과 전병화 연구소 연구부장 등이 함께 노력을 했지요. 그 모델에 상장기업 데이터를 전부 넣어서 결과를 내본 결과 한국유리가 선정되었는데, 주위 평판도 검증하고 이사회에서 재차 확인해서 제1차 경제정의기업상 수장자로 상을 줬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4. 대표님은 어떻게 경실련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지요. 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단식투쟁, 75년 민청학련 사건과 서울의대 사건 등에 연루되었던 서울의대 법대 상대 후배들이 나를 배후자라고 하는 바람에 잡혀서 1년 서대문에 가 있기도 했어요. 이들 세 친구가 나한테 사회주의 경제와 남북문제에 대해 배웠다고 한 거예요. 관련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가서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간 겁니다. 당시 한국은행 다녔었는데 재판받고 하느라 그만두고 나중에 뒤늦게 유학 가서 공부한 후 학계로 가게 됐죠.

87년 이후는 민주화가 한 단계 성공, 도약을 했다고 봤어요. 근데 소위 학생운동 시민운동은 전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이었어요. 반정부투쟁, 비합법적인투쟁은 독재시절 정권을 타도하는데 적합한 민주화 운동이었지요. 87년 헌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가결돼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직접 뽑는 87년 체제가 시작된 거잖아요. 시민들이 다 나와서 넥타이부대까지 나와서 이룩한 6•10항쟁의 결과인데 그 법을 일단 지켜야지. 그래서 이제부터는 시민운동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야 하겠다. 앞으로 현실문제를 가지고 대안 있는 시민운동을 하고 법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경실련 운동에 함께한 것입니다.

비판도 있었어요. 사이비 시민단체 아니냐. 저항도 하고 투쟁도 하고 그래야지 무슨 법 테두리 안에서 한다는 거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판이 사라지고 참여연대가 95년에 나오고 같은 방식으로 운동하는 단체들이 계속 나왔죠. 경실련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시민운동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지요.

 

 

5. 참여정부 시절에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경제력집중 해소를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95년인가 경실련 안에 시민공정거래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시민이 공정거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감시도 하고 비판도 하자 해서 변형윤 선생님이 대표하실 때 생겼죠. 그 때 시민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 했었던 인연이 하나 있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2003년 3월에 공정거래위원장이 됐어요.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되는 일은 시장경쟁을 보호하는 거예요. 시장의 경쟁자인 어느 기업을 보호하는 게 아니고 경쟁체제를 보호하는 것이 공정위에요. 공정거래법 1조에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는 역할의 키워드가 다 나와 있어요.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소비자를 보호하는 게 목적이에요. 공정, 자유, 경쟁, 그리고 소비자 보호.

경제적 자유가 중요해요. 존 스튜어트 밀의 ‘타자 위해의 원칙’이 시장에서도 적용돼야 해요. 나의 생명, 재산, 사상,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유지만 단 하나 조건이 있는데 타자를 해치지 않아야 해요. 시장에서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되 남에게 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재벌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중소기업이 어떤 분야에 들어오려고 하는 걸 못 들어오게 한다, 일감 몰아주기를 해서 시장에서 쫓아낸다든가, 특허권을 다 구입해서 박살 내버린다든가, 무슨 부품 공급을 못하게 한다든가 등등 이런 것들이 전부 타자위해의 원칙에 위배되는 거라는 거죠.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를 적발해서 지키게 만들어주는 게 공정위의 역할이지요.

또 하나는 공정성을 지켜야 해요. 수많은 불공정 사례들이 있지요. 이들을 적발하여 시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재벌이 위법했을 경우는 법무팀 변호사들이 수백 명 있으니까 쉽게 빠져나가요. 가난뱅이 중소기업은 걸려놓으면 재판비용을 못 대거나 유명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서 여지없이 감옥에 간단 말이에요. 이런 게 소위 불공정한 거예요. 법률장벽을 어떤 사람은 뛰어 넘고 어떤 사람은 못 뛰어 넘는 거죠. 시장이 자유의 원칙을 지키고, 공정성을 지켜서 결국 소비자 후생을 증가시키도록 하는 것이 공정위가 할 일이에요.

 

6. 공정위 하실 때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하시는 것?

공정거래 역사상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간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직원들이 퇴임식을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직원들이 스탠딩으로 강당에 서서 차도 마시면서 스크린을 내려서 강 위원장 3년 재임 중 10대 업적을 10위부터 하나씩 소개하는 특별한 방식이었어요. 저도 1위가 뭘까 궁금했지요.

아마도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마이크로소프트사 사건 아닐까 했는데, 그건 2위더라고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위법 판정하고 과징금 부과하고 시정명령 내린 사건입니다. EU에 이어 우리가 두 번째 한 거니까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었죠. 이 덕분에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세계 G7에 들어갈 정도였지요.

그럼 1위는 뭘까 했는데, 소비자원을 경제기획원에서 공정위로 이관시킨 것이더라고요. 소비자보호원이 경제기획원(재경부) 소속이었는데 제 재임기간에 공정위 소속으로 가져와서 산하기구가 됐거든요. 공정위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소비자나 기업의 피해를 보상해주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소비자호보원이 들어오면 후생을 증대하고 보상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공정위업무가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는데 안 되다가 가져온 거죠. 공무원들한테는 그게 제일 좋았나 봐요.

또 하나는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을 세워서 로드맵을 만든 거예요. 금융계열사 의결권제한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2004년에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는데, 그런 내용을 포함해서 시장개혁 3개년 계획 만들어서 실천했었어요.

 

7. 언론에서 김상조 위원장이 ‘제2의 강철규’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하는데,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앞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소위 갑질제거 라고 하는 재벌이 아니라도 가맹사업자라든가 유통업자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 즉시 처벌하고 발견하고 시정하고 하는 일은 일정수준 성과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소비자 권익을 보호한다는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제도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데 아직 준비하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아직은 미완성이라고 봐요.

그 제도개혁의 핵심이 될 만한 것들이 뭐냐면 독과점(기득권자) 경제권력 재벌들이 쳐놓은 진입장벽이 있어요. 시장 안에 못 들어오게 만들고 있는 기업 배척해서 밀어내고 자기들이 독과점하면서 중소기업이 할 영역까지 해 나가고 있거든요. 각종 불공정행위와 더불어 이 진입장벽을 제거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되는데 앞으로 지켜봐야지요.

 

8. 한편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사회는 재벌개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계속 문제를 제기해야 된다고 봐요. 경제적 자유가 억압되고 있는 사례가 뭐가 있는지 시민사회가 그걸 찾아내는 거죠.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여 고발하고, 해결책은 시민단체가 대안을 내면 더 좋지만, 못 하더라도 정부가 해라, 학계가 해라 제시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이 고발을 자꾸 하는 게 중요해요. 구체적 사례를 많이 발굴하라고 하고 싶어요. 그게 힘이 있어요.

경제정의,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뭐가 잘못돼 있는지 그걸 찾아내서 계속 지적해야죠. 원칙적인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9. 마지막으로 30주년을 맞는 경실련 회원과 임원, 상근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30년이면 긴 시간이에요. 경실련 회원들, 활동하는 상근자, 임원들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원조 시민단체라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중요해요. 소위 민주화 투쟁 이후 시민운동 개념이 바뀌었잖아요. 새 시대에 맞는 시민운동의 맏형 즉 원조라는 걸 잊어버리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어요.

한꺼번에 엄청난 획기적인 걸 한다는 거보다도 그간의 축적된 활동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서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어떤 제도개혁이 필요한지 관심을 갖고 그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 벽돌을 하나씩 쌓아간다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성과를 낸다면 앞으로 또 30년을 내다보면서 힘 있게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화, 2018/07/3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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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을 바라보다]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통일협회 고문, 前이사장)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경실련 30주년을 준비하며 그동안 경실련에서 활동하시며 시민운동을 빛내주신 분들, 또는 우리사회에서 존경받는 사회적 명사들을 찾아뵙고 삶의 혜안과 시대정신을 담은 소중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김성훈 前공동대표님에 이어 두 번째로 경실련이 만난 분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셨고,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중이신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님입니다.

박 회장님은 WCC 아시아 국장, 초대 UN 인권대사를 지내시며 평화, 통일, 인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작년 8월에는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여기신다는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하셨는데요, 적십자 활동 소개와 판문점 선언에 대한 평가 및 전망 등을 진솔하게 나눠주셨습니다. 

 

 

1.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습니다. 4.27 정상회담의 성과와 이번 회담이 동북아와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1년 만에 이뤄졌던 4.27 남북정상회담은 지금까지 72년 7.4 공동선언, 노태우 대통령의 91년 12월 13일 고위급 합의문서,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의 연속성에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한 비핵화가 있고, 둘째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라는 준전시상태를 완전히 평화협정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선언이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지금까지 73년 동안 대치를 극대화 했었던 군사대치 국면을 해소시키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죠. 이 세 가지의 큰 틀에서 선언의 전문과 3항 13개조 원칙들이 발현된 거라고 봅니다. 과거의 선언들보다 남과 북의 양 정상이 세계를 향해서 한 선언이기 때문에 진정성 면에서 세계의 큰 반응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난 73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해 민족 분단으로 발생된 남과 북의 인도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본격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서 감사하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써보게 되었습니다. 6자 회담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평화 번영 통일을 위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남북이 협의해서 세계평화에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이 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 남북이 종전선언을 하고,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의 의미와 평화체제에 대해 조금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된다는 얘기는 73년 동안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있었던 상황을 완전히 180도로 바꾸는 거예요. 군사적 대치라는 것은 이제 없을 거고, 다만 평화체제를 지키는 평화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군대는 있겠지요. 내가 살았던 스위스마저도 중립국가지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군대라는 게 원래 남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의 안보를 지키려고 있는 거니까 자기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군대를 향한 대치국면이 완전히 해소가 될 것이고, 이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비자를 받고 서로 왕래하되 두 개의 체제가 평화스럽게 공존하기 때문에 서로 상호 존경을 하고 상호 인정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3.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구호활동부터 시작해 헌혈, 병원복지사업, 남북교류활동 등 정말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 회장으로 취임하시면서 가장 중점을 두시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한적십자사 소개와 현재 활동도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한 지 약 9개월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참 빨라요. 대단한 조직입니다. 적십자정신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봉사원 12만 명, 청소년적십자 단원 19만 명, 직원 3,700명 큰 예산을 가지고 움직이는 113년의 역사를 가진 기관입니다. 1905년 고종황제 칙령으로 설립되었어요.

지난해 터키 안탈리아에서 개최된 국제적십자사연맹 총회에서 191개국의 대표격인 관리이사회 이사국을 뽑는데 대한적십자사가 당선이 됐습니다. 취임사에서 언급했지만 대한적십자사를 `선진국형 적십자사`로 만들고 싶어요. 스위스나 독일에서는 적십자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참 좋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 각각 18년과 7년씩 아이들을 키우며 느낀 건 그 나라들은 어린아이 때부터 적십자를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관으로 교육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한적십자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타 공공기구 정도로 인식돼 있다 보니 각종 감사의 대상이 되고, 봉사정신과 관련이 없는 외부인들이 적십자 활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지난해 8월 취임 후 ‘동북아시아/한반도 인도주의 공동체 건설’이라는 새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대한적십자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포괄적인 접근법으로 제 3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요. IFRC, ICRC, UN 등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지금의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기관 운영에 있어서도 비효율적이고 관행적인 운영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대내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적십자사를 구현하는 데 주력하려고 해요. 이를 위해, 대한적십자사는 국내 비영리단체 최초로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했고, 기부금의 모금, 집행 과정은 물론 기관 운영과 관련한 재무 프로세스를 대폭 개선함으로써 조직 전반의 투명성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교류 활동에 대한 계획은 판문점 선언 이후 8.15 전후해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거예요. 이와 관련하여 6월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6월 북미회담 끝나면 평양에 가서 북한 적십자사하고 가서 이산가족 상봉 준비와 인도주의 원조 등에 대해 논의하고 싶습니다. 특히 인도주의적 지원에 있어 보건 지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북의 건강이 남의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의 기초건강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것 등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어떻게 튼튼하게 평화 공존을 통한 핵과 전쟁이 없는 한반도 인도주의 공동체 건설을 할 수 있을지 북과 마주 앉아 프로그램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상호 인정과 존중으로 남이 50%, 북이 50% 서로 양보해서 만들어 가야해요.

 

 

4. 경실련도 1994년부터 통일협회를 창립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통일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2006년~2009년까지 이사장도 역임하시고 같이 활동하셨는데, 경실련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고, 통일협회 활동하시던 때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경실련 통일협회가 참 일찍부터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내가 고문으로 있지요. 특히 이번 적폐청산 촛불 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고 큰일을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유엔은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평화, 지속가능한 발전, 여성, 아동, 청소년 NGO 단체를 먼저 불러서 의견을 청취합니다. 그런 건전한 NGO 중 하나가 경실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실련에 대한 굉장한 경의를 가지고 있어요.

경실련 활동은 내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인권대사 할 때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경실련통일협회에서 특강을 했던 게 계기가 됐어요. 인권대사를 그만두려고 하니까 경실련에서 이사장을 해주십시오 해서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때 이사장할 때 나를 도왔던 게 김근식 교수, 전 통일부 장관 홍영표 등 젊은 석학들이 나를 많이 도와서 참 좋은 추억도 많습니다. 저도 경실련의 한 식구에요.

30주년이 내년이라고 해서 기념행사에는 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모금도 쉽지 않은데 어렵게 일하는 경실련 직원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경실련이 지금까지 해왔던 큰일은 우리 민족의 선진화를 이뤄냈어요. 특히 판문점 4.27 선언 이후 국민의 계몽문제라든지 아직도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냉전 논리에서 있는 국민들을 잘 설득하는 일들도 경실련 통일협회가 잘 해가면 멋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5. 경실련이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습니다. 경실련에 바라는 점, 혹은 한국 시민사회에 바라는 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내가 관여하는 한국의 시민사회 전부가 정부의 보조금을 안 받아요. 촛불 정부 시대에는 경실련 등 시민사회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다 여러분의 세금이기 때문이에요. 한국 시민사회가 그동안은 ‘권위주의적 정부와 대치하면서 시민운동을 한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의 돈을 받을 수 없었지만, 지금 촛불 대통령은 다시 독재로 갈 일이 없으니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보조금을 받는다고 정부에게 싫은 소리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서양에서는 전부 정부 돈으로 움직이는데 더 소리치고 다녀요. 왜냐하면 “너희들이 준 돈이 우리 세금이다”라는 생각가지고 하는 거라서 그래요.

지금까지도 잘했지만 이제 정말 역사를 다시 쓰는 데 있어 끝까지 순수하게 국민의 편에 서서 건전한 NGO로 큰일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6.  ‘통일, 평화, 인권’하면 박경서 회장님이 떠오르는데,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언제입니까?

늘 이야기하는데 분단이라는 것이 모든 우리나라의 부조리의 원천입니다.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는 절름발이식 발전일 뿐입니다. 분단이라는 것이 우리 5천만, 북의 2,300만 7,300만의 목을 조이고 있는 한 모든 부조리가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용납이 돼버리는 시대를 산거에요. 우리를 옥죄고 모든 우리의 악의 세력들이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죄를 다 저지른 것을 이제는 과감하게 털어버린다는 그 가능성을 판문점 선언이 해줬기 때문에 판문점 선언의 의의가 크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여수순천 사건이 터졌어요. 사흘 동안 무릎 끓고 아스팔트에 나가있었습니다. 무고하고 순수한 민간인 4만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나라 전쟁이 터져서 외할머니 집에 피난 갔는데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조카 셋이 내 눈 앞에서 빨치산에게 대창으로 죽는 것을 봤어요. 그런 것을 보고 어렸을 때부터 전쟁이나 폭력은 안 된다. 평화, 인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제네바 18년 세월 동안에 르완다, 미얀마 학살, 북한의 굶주림 현장을 내 눈으로 보면서 인권, 평화, 지속가능한 발전, 개인의 안전 등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생각합니다.

 

7. 마지막으로, 초대 UN인권대사,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국장, 대한적십자사 회장까지 다양한 이력과 경험을 쌓아오시며 이제 우리시대의 어른이기도 하시고, 사회적 명사가 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요. 내가 조금 오래 살면 내가 그렸던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실현이 되는 구나. 시베리아를 거쳐 북한을 가는 날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는데 조금만 더 오래 살면 정말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1986년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국장을 할 때 그리온 남북교회 모임을 통해 남한과 북한 목사님들의 대화를 추진했었습니다. 88년 그리온 2차, 90년 그리온 3차, 4차는 92년 남북교회지도자 모임을 했어요. 89년 모스크바 남북 평화선언 그런 인연으로 인권대사를 하게 된 거죠. 그런 인연으로 7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를 여러 사람과 같이 만들고, 지금 대한적십자사 회장까지 왔습니다. 내 꿈은 결국 분단을 극복해서 어깨동무하는 정직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동체를 남과 북이 만드는 것입니다.

 

금, 2018/06/0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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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슬프다

 

박지호 사회정책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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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들어왔던 게이트로 다시 나가면서 끝까지 감정을 정리한다. 압도당한다. 아니 표현이 부족하다. 환하게 슬프다. 아직도 부족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슬프다. 그러나 아름답다.

 

유럽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좋지 않다. 가능하면 가고 싶지 않을 정도.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유로 자의반 타의반 유럽으로 떠났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풍차. 튤립. 운하.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에서 그들이 함께 떠난 그곳. 이게 내가 네덜란드에 대해 알고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전부이다. 하지만 이번에 만나게 된 한 공간이 아니 인물이 네덜란드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 30. ~ 1890. 7. 29.) 그를 전혀 모르진 않다. 과거 다른 공간에서 그의 작품 다수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도 그의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의 우울이 슬픔이 좋았다. 한국에서도 수년전 그의 작품을 다수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프랑스스럽다(?). 한국에서 만난 전시도 그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당시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전시했다. 그래서일까. 그와 네덜란드를 쉽게 연결 짓지 못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죽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 프랑스에 치우쳐 있는 건 내가 그의 죽음에 더욱 더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드렸기 때문일까.

 

▲1973년에 개관한 반 고흐 미술관은 그의 작품 약 7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입장권마저 아름답다.

 

 

Sunflower

▲출처 :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 (https://www.vangoghmuseum.nl/)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그림이다. 고흐는 생전에 총 12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1889년에 그린 15송이의 해바라기를 보고 있으니 처음엔 당당함이 전해졌다.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노력을 여실히 느껴진다. 꽃병에 쓰여진 “Vincent”는 단순히 작가의 서명이 아니라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그때 함께 한 친구가 말한다. 슬프다고. “자신의 안에는 그림 속 여러 해바라기의 모습처럼 다양한 면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괴팍하고 우울한) 단면만 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라고 이야기한다. 친구의 이야길 듣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니 당당해 보던 그의 서명이 슬퍼지고 당당해보이던 해바라기마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일부러 바로 서 있는 빈센트 반 고흐로 보인다.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던 그의 감정이 스며든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서 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모든 작품을 다 보고 다시 한 번 해바라기를 찾았다. 그의 슬픔을 온 마음에 새기며.

 

Almond Blossom

▲출처 : 반고흐미술관 홈페이지 (https://www.vangoghmuseum.nl/)

 

1층부터 감정이 쭉 끌어올려져 해바라기를 건너 이 그림 앞에서 쾅하고 터진다. 마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같다. 환희다. 마지막 층에서 만난 Almond Blossom은 1890에 그려졌다. 정신병원에서 힘들게 지내던 날들 속에서 그는 아름답고 생명이 피어나는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조카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출생이라는 기쁨의 시간을 함께하고 싶지만 그는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더군다나 장거리 여행은 허락되지 않는다. 동생 테오는 “아기가 언제나 형처럼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어”라며 아이의 이름을 형의 이름으로 짓는다. 빈센트 반 고흐는 조카가 자신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삶을 살까봐 우려하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사실 매우 기뻤다. 조카의 출생과 자신의 이름을 따라 짓는다는 소식은 그에게 삶의 희망을 가져다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슬픔과 똑같이 빈센트 반 고흐의 행복과 웃음이 온전히 전해진다. 슬픔이 가득했던 마음속에 한 송이의 아몬드 나무 꽃이 피어난다. 아몬드 나무의 꽃은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으로 알려진다. 구름 가득한 가을 속의 네덜란드인데 갑자기 봄이 된다. 하늘색이라는 단어로 저 하늘을 표현하기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그림 속 하늘이 진짜 하늘이다. 봄이다. 슬픔 이후 봄. 또 다시 감정이 폭발한다.

 

러빙 빈센트

네덜란드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난 시간들은 가장 강력한 추억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제 누군가에게 네덜란드를 이야기할 시간이 있다면 난 자연스레 이야기 할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의 나라라고..

 

2017년 11월 9일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제작기간 10년, 영화 1초를 표현하기 위해 10일을 그렸다는 홍보 문구보다 영화 속 한 대사가 날 영화관으로 자연스레 인도한다. “당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알죠” 빈센트 반 고흐의 우울과 죽음만 알고 있던 나에게 던지는 물음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계절은 겨울로 가겠지만 나에겐 다시 봄이 시작될 것 같다. 글을 쓰며 그날의 사진을 다시 돌아보며 그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니 금방 봄이 눈앞에 와 있는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는 나에게 정말 아름답게 슬프다. 추운 봄이다.

목, 2017/12/0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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