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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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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익명 (미확인) | 월, 2017/11/20- 19:35

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라고 말했다.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흥구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놓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이에 ‘말 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고조되는 긴장에 비해 해법은 아직도 묘연하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펴낸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역사학자다. 작고한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대표적 원로 지성으로 꼽힌다. 유신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4년 동안 대학 강단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상지대 총장(2001~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2005~2007년)을 지낸 뒤 강원도 양양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고 있다. 지난 7월 말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던 문재인 대통령이 강 명예교수를 초청해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팔순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왕성한 집필 활동과 강연 등으로 역사의 진보를 설파하는 그를 양양에서 만났다.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북핵 문제가 제일 시급한데, 내가 보기에는 과거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핵 개발 중에도 북·미 관계가 좋을 때는 협상을 통해 북한이 핵 시설을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클린턴 정부 때 북·미 수교, 고이즈미 내각 때 북·일 수교를 놓고 협상할 때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 아니겠는가.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

현재 북한은 수교를 하더라도 핵 보유를 인정받겠다는 입장 아닌가?

북·미나 북·일 수교를 하게 되면 핵은 포기하라든지 하는 조건이 붙을 것이다. 지금까지 북·미가 수교를 하지 않고 해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벌이니까 결국 핵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하며 북한 상륙작전까지 연습하니까 북한이 핵무기로 무장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평화주의 견지에서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옳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상대가 있으니까 협상에 달렸다. 세계가 평화를 지향해가고 있는 시대이므로 북·미 평화협정, 북·일 수교를 통한 평화 관계도 마땅히 이룰 수 있다.

광복 72주년에 재현된 건국절 논란을 어떻게 보는가?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 이런 문제인데, 광복절이란 우리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기념일로서 이것은 민족주의적 견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건국절 주장은 국가주의적 견해이다. 결국 건국절 논란은 어떤 역사인식을 가질 거냐 하는 문제다. 계속 분단국가주의적 틀 속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통일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역사의식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1945년 광복 당시 건국 개념은 무엇이었나?

1919년 상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이 가까워질수록 좌우 합작 정부로 변모했다. 독립운동 내부에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는데 광복 후 이들이 합쳐야 하니까 임시정부가 사실상 좌우 합작이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주석이고 김규식 선생이 부주석인데 거기에는 아나키스트, 유림 등 모든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광복이 되면 두 개의 국가가 생길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백범 김구로 말하자면 우익 중의 우익인데 좌우 합작 정부의 주석이었고 분단 이후에는 평양에 가지 않았나. 그것이 우리의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그걸 갈라놓은 게 이승만 정권이고. 오늘날 건국절 운운하는 것은 이승만의 분단주의 연장이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 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는데 남은 일제 잔재 청산 과제는?

최근 <친일인명사전>까지 나오긴 했지만 문제는 광복된 지 72년이나 됐는데 친일파 연구가 학문적으로 제대로 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로 자료가 전혀 모아지지 않다가 노무현 정부 때 비로소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를 가지고 친일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해 제대로 반성해야 한다.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이 화두다. 역사적으로 적폐가 누적된 근본 원인을 뭐라고 보나?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업적을 세웠다는 걸 내세워 독재 체제를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이승만 정권의 제일 큰 오점이자 문제점은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민족사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1965년 잘못 맺은 한·일 협정이다. 협정 당시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합법적으로 지배했느냐, 침략적으로 강점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협정 당시 일본의 주장을 따르면 일제 36년이 합법적인 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합법적인 지배에 저항한 잘못된 행동이 된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 합방조약을 1910년 8월29일 한·일 합방이 된 그날부터 무효라고 인식하겠다 하고 아무런 대응 없이 넘어갔다. 역사적으로 큰 과오를 남긴 이 문제가 아직까지 제대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한·일 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를 놓고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다’라 주장했고, 일본은 ‘1948년 대한민국 성립 때까지는 유효했다’고 해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은 한·일 병탄조약을 어떻게 보았나?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이 청일전쟁 끝에 빼앗은 타이완은 중국에 돌아갔다.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땅도 소련에 넘어갔다. 한·일 합방조약이 합법적이라고 연합군이 인정했다면 한반도를 일본의 지배에서 빼낼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걸 침략 행위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일본 영토에서 한반도를 벗어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1965년 한·일 협정 때는 그게 전혀 반영이 안 됐다.

학계에서 그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았나?

한·일 합방 100주년이던 2010년 한·일 양국의 양심세력이 성명서를 냈다. ‘1910년에 체결된 한·일 합방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다’라는 공동성명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 해봐야 법적 효력이 있나. 한·일 양국 정부가 하도록 촉구하는 의미였는데 이후 별다른 노력이 없었다. 이제라도 역사학계의 지적을 정부가 귀담아 듣고 일본 정부와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한·일 협정을 통한 청구권 자금이 우리 경제성장의 종잣돈이 되었다며 박정희 정권의 긍정적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들도 많은데?

박정희 정권의 업적으로 경제성장을 자꾸 말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복구 과정에서 경제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일본도 그렇고 독일도 그랬다. 심지어 북한도 1970년대까지는 남한보다 경제 사정이 나았지 않나. 경제성장이라는 게 어느 한 정권 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으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논거로 삼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못되었다.

▲ 2005년 5월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앞줄 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접견실로 향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일본과는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역사교육 문제 등이 있는데 독도 문제는 이미 해결된 거라고 본다. 우리가 우리 영토로 점유하며 증명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잘못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사자들이 뭘 어떻게 원하느냐를 듣고 일본과 교섭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가 일방적으로 해치웠다. 그러니까 피해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합의할 때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없었다. 당사자들이 아직 상당수 살아 있다. 그분들 의견이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야 일본도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역사교육 문제는 일본의 지성들이 해결해야 한다. 아베 정권 이전까지 일본 역사학계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내일 더 잘하기 위해 어제를 아는 것이 역사다. 그렇다고 어제를 알고 그냥 끝내서도 안 된다. 잘못된 과오는 반성해야 한다. 일본의 과거 침략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직도 부족하다. 한·일 양국 역사학계가 공동으로 교류하면 역사교육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 본다.

아베 정권 들어 일본이 우경화하면서 역사 왜곡이 심해지는데?

일본 정부가 교육을 통해 극우 사상을 넣으려 하는데 거기도 발전하는 세상이라 나는 그것이 오래가지 않으리라 본다. 일본 보수 정권이 비교적 오래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래도 21세기인데 과거의 제국주의적 또는 냉전주의적 상황은 희석될 것이다.

역사학자가 보기에 현재 한반도 처지가 구한말과 비슷한가?

주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4대 강국 시각에서 보면 한반도가 분단 상태에 있는 게 안전하다. 한반도가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륙 세력권에 들어가면 한반도는 해양 세력, 특히 일본을 찌르는 칼이 된다. 반대로 한반도가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 세력권에 포함되면 해양 세력이 대륙을 침략해 들어가는 다리가 된다. 과거 일제강점기가 대표적인 예 아닌가. 광복이 되면서 남북으로 갈렸다. 이 상태가 4대 강국에게는 안전하다. 4대 강국끼리 충돌을 방지하는, 칼도 안 되고 다리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은 어렵다는 얘긴가?

우리는 4대 강국에 의해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4대 강국이 포함된 6자 회담으로 통일 문제나 남북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걸 말해준다. 내가 보기엔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이뤄진 6·15 남북공동선언은 그런 역사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한이 어떻게 주도적으로 풀어야 하나?

통일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하면 분단이 어떻게 고착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1차적으로 1945년 삼팔선이 생기면서 국토가 나뉘었다. 다음으로 1948년 남북한 단독 정권이 생기면서 국가가 분단되었다. 이어서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이 갈린 과정을 거쳤다.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남북한은 베트남처럼 사이공 인민주의도 안 되고 독일처럼 흡수통일도 안 된다. 결국은 평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연 시작을 나는 6·15 남북공동선언이라고 본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민족이 화해하기 시작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도 열렸다. 통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남북한 사이에 연방제냐, 1정부 2체제냐, 2정부 2체제냐 하는 게 다를 뿐 통일국가 체제 논의도 상당 부분 합의가 이뤄졌다. 결국 2정부 2체제로 가는 건 공통분모다.

박근혜 정부 때도 역사학자로서 정부 승인을 받아 방북했는데?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기 일주일 전인 2016년 2월 역사 발굴 때문에 개성에 들어갔다. 고려 왕궁터를 비롯해 여러 고려 문화 유적이 남아 있어서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삼자고 했다. 그런데 개성이 2000년대 초반에 비해 많이 달라졌더라. 5층짜리 아파트가 많이 생기고 남루했던 개성 사람들 옷차림도 달라졌다. 개성공단, 해주공단, 원산공단을 지어나가면 통일이 차츰 되어갈 것이다. 통일이란 게 남북한 사람들 의식이 같아지고 생활이 동화되어가는 데서 출발한다. 차츰 남북이 동화되어가면 통일비용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들어갈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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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세 번째)이 방북 중인 김민하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박용길 장로, 강만길 교수(왼쪽부터) 등을 접견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북한 사람들과 북핵 문제도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내가 북한에 갔을 때 어느 북측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기 전에 북한은 달러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었는데, 무너지고 나니 달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더라, 결국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북핵을 대미 관계를 풀기 위한 마지막 카드라고 하더라. “우리를 승인하라는 것이고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역사란 지그재그로 발전한다고 강조했는데?

역사는 정치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경제적으로는 인간 생활을 균등하게, 사회적으로는 인간을 평등하게,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이게 직선으로만 가지 않는다. 그랬다면 인류의 역사가 여기 머물러 있겠나? 훨씬 더 많이 앞으로 갔을 것이다. 역사는 중간에 가다가 반작용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게 아니고 나선형으로 올라간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침략과 분단 등을 겪었지만 우리는 왕조시대를 극복하고 넘어섰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나 중국의 신해혁명 같은 것은 없었지만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해갔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분단도 극복하고 통일도 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자신감을 갖는 게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취임 100일을 맞은 문재인 정부에 할 말이 있다면?

내치야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북 문제가 걱정이다. 미국 트럼프 정권도 대북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높아서 지난 10년간 닫힌 남북 관계를 푸는 게 쉽지 않다. 북·미 관계가 나빠지면서 야당과 수구 보수 세력이 정부를 비판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남북 관계의 문을 열어야 한다. 정부 내 대북 정책을 맡은 사람들의 의식이 중요하다. 얼마나 빨리 북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느냐보다는 방향이 맞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의식만 있다면 인내심을 갖고 북한을 설득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또 민간단체가 남북 간 교류를 더 넓혀 나가야 한다.

정희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7-9-1> 시사in

☞기사원문: 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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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청년시대여행이 공동 주관하는 ‘일제 강제동원과 야스쿠니신사-촛불원정대 특강’이 7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민족문제연구소 강연장과 ‘청년협동조합 몽땅’의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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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강으로 구성된 이번 강좌는 올해 8월 도쿄에서 열리는 ‘야스쿠니의 어둠에 평화의 촛불을’ 공동행동 참가자를 대상으로 마련된 것으로, 현지 행사에 앞서 참가자들이 한일관계와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동북아 평화공존의 방안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준비되었다.
1강에서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일제식민지배의 특징과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례와 한일 양국정부의 대응을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았다. 2강에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은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를 바탕으로 ‘천황제’와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 그 허상과 야만성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 일본사회의 사상적 근원, 우경화의 연원을 설명하여 강좌 참가자들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7월 19일 3강에는 영화 ‘안녕사요나라’ 상영회와 주인공인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고, 7월 26일 4강에는 촛불행동 설명회와 참가자 전체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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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맞아 6월 20일 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회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간담회에서 김정륙 회원은 당시 서울 충무로에 있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로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와 김상덕 위원장을 회유한 이야기, 김상덕 위원장이 6·25 직후 납북된 과정과 그 후 비참했던 가정사 등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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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를 마친 후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인장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시절 그리고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사용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김정륙 회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마련된 2층 전시실에 인장을 직접 진열했다.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의 유품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 기증하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며 소중하게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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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1층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이 열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하 잇는 모임)이 건립기금 1억 345만 원을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에 전달했다.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일본 시민과 단체로부터 모은 기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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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금전달식에는 잇는 모임에서 서승 공동대표, 안자코 유카 공동대표,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등 총 19명이 참석했고, 연구소 측에서는 이이화 시민역사관건립위원장,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이민우 운영위원장 등 약 60명이 참석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들도 함께 했다.
기금전달식에 이어 2층 전시실에서 자료기증식이 진행되었다. 잇는 모임은 그동안 기금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전후보상운동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모아왔는데, 이날은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 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후루카와 마사키 씨가 커다란 현수막을 기증했다. “야스쿠니 합사를 하지 마라!! 유골을 돌려 달라!!”라는 구호가 힘찬 글씨체로 적혀 있는 이 현수막은 2003년 군인군속재판 추가제소 당시 일본 법원 앞에서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들이 함께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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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는 모임 참가자들은 기금전달식에 앞서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남산 권역을 답사했으며, 6·10민주항쟁 31주년이 되는 날에는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견학했다. 그들은 일제와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용산과 남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했다.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일본 시민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알리고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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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음)와 육군사관학교(교장 정진경 중장)가 공동주최한 이날 기념식은 처음으로 육사에서 열렸는데 이는 육사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라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육사는 지난 해 12월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회의를 열었고, 올해 3월 1일에는 육사 교정에 독립전쟁 영웅 5인(이회영,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의 흉상을 제막하는 등 우리 국군의 뿌리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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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임원, 유족, 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는 1,100여 명의 육사생도 전원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주동욱 경희민주동문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 준비위원장이 신흥무관학교 경과보고를 했고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사를 했다. 윤경로 상임대표는 기념사에서 “신흥무관학교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육사 생도들이 배우기를 원했는데 쉽지 않았지만 촛불시민들의 덕분으로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매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 수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념식을 마친 후에는 육사 생도들의 분열식이 거행되었다. 이어서 독립전쟁 특별전시회를 관람 후 육사 생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을지강당에서 공연된 항일음악회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 공동대표, 정철승 조직위원장, 김용호 행사위원장 등이 참석했고 독립운동가 유족으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선생 그리고 김순흥, 권위상, 김희원 운영위원 등이 함께 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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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者增稅(부자증세)

 

衆庶號增稅(중서호증세)

人君不欲聽(인군불욕청)

何由初約遠(하유초약원)

請願若雷霆(청원약뇌정)

 

富者에 대한 增稅

 

썩 많은 이들이 增稅 부르짖는데

나라님은 당최 들으려 하지 않네

무슨 연유로 첫 약속 멀어졌나요

請하고 願함이 천둥과 벼락 같네.

 

<時調로 改譯>

 

많은 이 부르짖는데 나라님 듣지 않네

그 무슨 까닭으로 첫 약속 멀어졌나요

請하고 願하는 바가 천둥과 벼락 같네.

 

*增稅: 세금의 액수를 늘리거나 세율을 높임. ≒복상(卜相) *衆庶: 뭇사람 *人君:

임금. 나라님 *初約: 처음에 약속 *請願: 일이 이루어지도록 청하고 원함 *雷霆:

뇌정벽력(雷霆霹靂).  천둥과 벼락이 격렬(激烈)하게 침. 또는 그런 천둥과 벼락.

 

<2018.8.1, 이우식 지음>

목, 2018/08/0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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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통일의 집’ 방문기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 저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최인담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연구소가 강북구의 요청으로 기념관을 위탁운영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2016년 개관 이래 제가 이곳에서 일한지 어느덧 2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강북구에 문익환 목사의 사택으로 알려진 통일의 집이 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근무하게 된 김에 빠른 시일 내 한번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통일의 집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일의 집이 공사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박물관으로 새 단장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박물관 건립과 운영을 위해 사단법인 통일의 집에서도 박물관 운영을 위해 연구소에 조언을 구하고자 기념관으로 연락을 준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기념관 위탁 운영 과정을 상세히 전달해드리고자 연구소로 직접 연결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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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다시금 ‘통일’이라는 말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 날이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상황과 마주하게 된 것이죠. 아직도 그날 아침 사무실의 분위기가 생각납니다. 다섯 명의 직원들은 지금 이 순간이 훗날 오래도록 기념할 역사적 순간임을 직감했었는지 각자 앞에 놓인 모니터에 시선을 떼지 못했어요.
군사분계선에 선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모습은 어느 새 악수를 나누는 모습으로, 또 악수를 나누는가 싶더니 어느새 김정은 위원장이 천진한 모습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팔을 잡아끌며 야트막한 방지턱을 넘는 모습으로 장면이 바뀌더군요. 군사분계선이 마음속에 그린 상상의 것이었나, 이렇게 넘을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 싶어 울컥했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실감나지 않던 정상회담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날 이후로 사회의 많은 곳에서 변화가 일어났음을 실감해요.
그리고 지난 6월이었습니다. 통일의 집이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고 관람객을 맞아들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박원순 서울시장과 배우 문성근 씨가 손님을 맞이하는 사진도 몇 편의 기사를 통해 접했지요. 그로부터 며칠 뒤 강북구청의 담당 주무관이 기념관을 직접 방문했어요. 주무관은 통일교육원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강북구청과 서로 만나기로 했대요. 이를 발판삼아 강북구가 ‘통일’을 주제로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계하여 역사체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사실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이래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는 수강생들이 기념관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공유한 적은 없었거든요. 또 기념관에 전시 해설을 요청하신 적이 있지만 통일교육원의 교육프로그램의 주제와 맞지 않아 지속적으로 교류가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강북구와 근현대사기념관과 통일교육원이 서로 연계하여 통일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그간 근현대사기념관은 기념관 인근에 있는 애국자시 16기의 묘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살려 시민들과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활성화하고 있었어요.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도보로 10분 이내 갈 수 있는 초대 제헌국회 부의장 신익희 선생 묘역, 1세대 검사 이준 열사 묘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묘역, 초대 국군이라 할 수 있는 광복군 합동 묘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묘역을 1시간 시간 코스로 둘러볼 수 있는 ‘초대初代길’은 근현대사기념관을 찾는 중고등학교 학급 단위의 단체관람객에게 매우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념관 설립 단계부터 민족문제연구소는 통일교육원과 국립4·19민주묘지 그리고 통일의 집을 염두하고 기념관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량으로 통일의 염원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2016년 8월, 광복 71년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소중한 모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의 회비로 후원한 독립민주기념비가 세워질 당시 기념비의 의의는 독립과 민주 그리고 통일을 기념하고 염원하는 조형물을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었어요. 지난 10년간 냉각된 남북의 분위기에도 통일이라는 염원을 잊지 않은 연구소의 바람도 근현대사기념관의 전시와 독립민주기념비에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저에게 통일의 집 방문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하셨어요. 아, 이제는 정말 통일의 집 방문을 미룰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7월, 여름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습니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통일의 집까지 걸어가는 데는 작은 골목 사이 최단거리로 15분 정도가 걸리더군요. 국립4·19민주묘지 앞을 거쳐 큰 길로 간다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통일의 집 앞 골목까지 이정표가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아서 50m 정도 지나치기도 했지만 이내 훤한 대문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박물관과 만날 수 있었어요.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익환 통일의 집 개관전이 열린다는 커다란 플래카드도 볼 수 있었어요. 반쪽 문이 열린 대문으로 총총 계단을 올라가니 소담한 정원이 펼쳐지더라고요. 뒤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펼쳐진 빨간 벽돌집은 문익환 목사와 가족이 1970년부터 살던 집이라고 합니다.
1994년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 박용길 선생님께서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을 걸고 일반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고 해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성금으로 집을 복원하였으며 2018년 6월 1일 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어요. 지금은 문익환 목사가 남긴 유품과 글, 서한 등 귀중한 근현대사의 자료를 보존하고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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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기 전에 안내판을 꼼꼼히 읽고 화단을 한번 둘러보며 숨을 가다듬었고 있노라니,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문익환 목사 댁을 방문한 손님이 된 기분을 느꼈어요. 문영금 통일의 집 관장님은 문을 열고 친히 슬리퍼를 내어주시며 손님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시라며 관람객을 배려해 주셨어요.
거실로 들어서자 “너른마당”이라는 글자가 적힌 액자가 눈에 띄었어요. 문익환 목사의 글처럼 오래 된 피아노와 문익환 목사의 사진과 그림이 벽에 걸렸으며, 문익환 목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들이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아담한 거실에 둘러앉아 벗과 덕담을 나누는 어떤 순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관람객을 배려한 작은 의자와 방석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방에서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문익환 목사의 생애를 담은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윤동주, 장준하와 같은 역사 속 인물들과 교류하며 보편적인 말과 진실함으로 사람들 한가운데 서 있으며, 김일성 위원장과 포옹하는 장면이 나지막하면서도 힘 있는 육성과 함께 지나갔습니다. 그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해방의 혼돈을 거친 젊은 청년이 종교에 헌신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의 거목이 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유물은 박용길 선생님이 모아놓은 남편의 수인번호였어요. 생애 중 10여 년 이상을 춥고 고달픈 곳에서 투쟁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다음으로 기도방은 한가운데 자그마한 탁자가 놓여있었어요. 이곳에 앉아 기도하는 목사님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다음으로 안방으로 가는 복도를 두고 널찍하고도 깔끔한 화장실이 사용한 흔적 그대로 남아있었어요. 복도 벽면에는 문익환 목사의 청년시절, 신학자의 삶, 수감생활, 방북의 과정을 지도와 연표, 사진으로 보여주는 그래픽 패널이 있었어요. 좁은 집을 전시실로 알차게 활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안방으로 들어서니 붉은 벽돌이 노출된 천장 일부가 눈에 띄었어요. 관장님께서 함께 둘러보시며 원래 복도에서 끝나는 집을 안방 방향으로 집을 증축하면서 가려져있던 굴뚝을 이번에 노출시켰다고 하셨어요. 마당이 훤히 보이는 안방은 문익환 목사의 자필 편지, 성서 연구 노트가 가지런히 진열장에 정리되어 있었어요. 생전에 그가 읽던 책은 성서부터 역사서, 시집 등이 벽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박물관을 둘러보고 문영금 관장님과 너른마당에 앉아 담소를 나눴어요. 관장님께서 제게 전시를 어떻게 보셨는지 물으시며 말씀하셨어요. 원래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통일의 집을 개방했을 때는 아버지의 유품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물건들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도록 배치하셨대요. 그러다 박물관으로 단장하면서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바꾸다보니 배치할 수 있는 물건이 줄어들어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셨어요.
그렇지만 이 공간은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집을 고스란히 복원하고 그 안에 그의 생애와 그 시대의 치열함이 녹아있는 유물들이 놓여있어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리고, 또 다른 공간에서 얼마든지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소장 자료를 가지고 계시니 그것을 활용할 수 있으면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아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를 약속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은 이때, 박물관에 걸린 ‘남누리 북누리 한누리 되도록’ 이라는 글처럼 통일을 향한 염원이 한데 모여 천천히 평화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 2018/08/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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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

– 역전다방- 최후의 결전3편

“해방전야의 독립운동가들: 민족주의 진영”

목, 2018/08/0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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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내역사 시즌2-비하인드히스토리 9화

44년만에 무죄, 문인간첩단 조작사건과 임헌영

 

 
목, 2018/08/0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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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 최후의 결전 2편

해방전야의 독립운동가들 “공산주의 그룹과 조선독립동맹”

목, 2018/08/0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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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비하인드 히스토리 8회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기념관”

목, 2018/08/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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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구소에 관한 허위사실을 계속 유포하는 사람(비회원)이 교육청에 정관 정보공개를 청구하더니, 이제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교육청 승인 정관을 ‘연구소 소개’에 게시해 놓았으니 더 이상 의미없는 정보공개 청구를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목, 2018/08/0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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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관련 게시물을 진정 민족문제연구소가 쓴 글이 맞나요?
내가 알고 있는 민문연의 수준이 이정도였습니까?

의미 없는 정보공개청구?????

지난 3월 24일 총회 이전에 홈페이지에 정관이 게시되었고, 여러 회원이 문제를  제기하자 홈페이지에서 정관을 삭제했습니다.
왜 삭제했습니까?

지도감독기관인 서울시교육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했을때
민문연은 ‘정관은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공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공개해야할 정관을 스스로 공개하지 않은 것도 큰 문제인데,
‘영업상.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비공개해달라도 했습니다.

민문연 운영의 근본 규범인 정관마저도 공개하지 않으려는 민문연의 작태에 분노가 치솟습니다.

만약, 민문연이 미리 정관을 공개했다면 정보공개청구도 없었을 것이고.
‘영업상.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추가의 정보공개청구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정보공개청구를 하지 않았다면 홈페이지에 게시했을까요?
가슴에 손을 언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회원의 당연한 권리 행사를 ‘의미 없는’이라고 했습니다.

점입가경, 설상가상…..
민문연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봄날 눈 녹듯 사라지고 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작금의 사태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금, 2018/08/0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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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D-26! 릴레이 응원영상 3탄!]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전설의 개발자’라고 불리우는

역사게임의 선구자 김태곤PD가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응원합니다!

화, 2018/08/0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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