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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친일파] 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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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친일파] 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 (1)

익명 (미확인) | 목, 2017/11/16- 16:01

김덕영 선임연구원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한 번 맑아지고 땅이 한 번 편안해지매 통서(統緖)를 전하는 데에서 보록(寶籙)을 넓어지게 하였고, 별이 다시 빛나고 바다가 다시 넘실대매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서 영전(令典)을 송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업이 한이 없게 되었고, 척의(尺依)는 점차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천황 폐하께서는, 상제(上帝)께 밝게 받아서 후인들을 열어주셨습니다. 뇌사(雷肆:書筵)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림에 용안(龍顔)에는 기쁜 빛이 돌고 진저(震邸)에서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하는 칭송이 퍼짐에 따라 인지(麟趾) 역시 어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억만년토록 태평을 누릴 아름다움에 응하였기에, 바야흐로 황태자를 미리 세우는 예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자질은 공자의 학문을 세우는 데 부끄러우나, 정성은 요(堯)임금이 되기를 축원하는 데 간절합니다. 사해에서 구가(謳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만리 밖까지 덕스러운 교화가 퍼짐에 모두들 성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정 5년(1916년-필자) 11월 3일에 조선총독부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신(臣) 이인직(李人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14<경학원잡지>제12호에당시경학원사성이었던이인직이일본태자(뒤에 쇼와천황)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으로 쓴 글의 일부입니다.
대단하지요. 이인직이 신소설의 개척자지만 그 글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이 문장은 그가 가장 ‘빛나는’ 글을 쓸 때가 언제인지를 알려줍니다. 그의 지향과 정체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을 쓸 때입니다.

 

숨겨진 행적
최초의 신소설<혈의누(血의淚)>로잘 알려진국초(菊初)이인직(李人稙)은1862년에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한산(韓山) 이씨 양경공파(良景公派) 25세손으로 이윤기(李胤耆)와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5살 때 1866년 생부 윤기가, 18살 때인 1897년엔 생모 전주 이씨가 각각 사망합니다. 그리고 9살 때 3대조 면채(冕采)의 손자인 은기(殷耆)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외 이인직에 대한 기록은 38살인 1900년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00년 관비유학이라는 공식적인 기록이 나타나기까지 이전 행적은 찾기 힘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행적은 38살부터 55살까지 16년간의 기록입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인직이 을미사변과 관련해서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전문 외교관 출신으로 통감부와 총독부의 초대 외사국장을 역임한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록(<明治外交秘話>,東京千倉書房,1936)에서이인직을조중응(趙重應)과함께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서 과외생(課外生)으로 자신의 강의를 들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중응은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으로 일제하 자작, 중추원 고문을 지낸 대표적 친일파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미사변 후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의 폐비 조치를 강행하는 등 사후처리를 담당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06년에 사면되어 귀국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는 아관파천으로 망명한 한국인들을 을미망명자(乙未亡命者)로 분류했으며 그 인원은 31명인데, 그 명단 중 이인직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마쓰의 지위나 명망을 생각하면 그의 회고를 허위나 거짓으로 보기에 힘듭니다. 더불어 김기장(金基璋)의 증언까지 고려하면 이인직이 조중응과 일본 망명 생활을 함께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기장의 경우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동경전문학교(현 와세다 대학)를 졸업하고 주일 공사관 참서관, 경리원 감독을 역임했던 자로 조중응의 일본 망명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는데, 그는 “조중응과 이인직은 일본에 재류할 때부터 거의 주종과 같은 관계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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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웅

 

아마 이인직은 조중응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인직이 일본으로 함께 망명한 것은 을미사변이나 김홍집 내각 하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서 피신했다기보다 정황상 함께 동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고서는 망명자가 귀국하여 관비 유학생 자격을 얻은 다음 1900년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동경정치학교와 이인직

국비 유학생으로 이인직은 1900년 9월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 정식 입학합니다. 최소한 이인직의 자필이력서에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동경정치학교가 이인직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근래 연구 성과는 이마저도 의구심이 들게 만듭니다.
동경정치학교(이하 정치학교)는 마쓰모토 쿤페이(松本君平)가 1898년 10월 ‘고등문관, 의회의원, 외교신문기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입니다. 3년제이며 17세 이상의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교육을 통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정치가나 신문기자 등의 양성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고마쓰는 위 회고록에서 이인직과 조중응이 과외생으로 자신이 그 학교에서 강의했던 열국정치제도(列國政治制度)를 강습(講習)한 제자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인직이 관비 유학생 시절인 1900~1903년 사이 고마쓰는 정치학교에서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관비 유학생 이전 일본 체류 시기에 일종의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고마쓰의 기록 외에 다른 증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의문을 갖게 하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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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 미도리의 <명치외교비화>

우선 정치학교는 제대로 운영된 적이 별로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경부통계서>에 의하면 학교규모는개교 당시 1898년 강사 40명, 학생 97명, 1901년 강사 10명, 학생 120명, 1902년 강사 10명, 학생 13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강사 수가 급격히 줄었을 뿐만 아니라 1899년과 1900년 2년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2년간의 공백은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사실상 휴교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정치학교는 1903년 9월 경영부진으로 폐교됩니다.
실제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의 회고를 통해 본 정치학교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정치학교는 사루가쿠초 변에 있는 중학교의 낡은 교실을 빌려 개교했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보니 학교라기보다는 고작 강습회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중략) 2, 3개월 채 되지 않아 점차 출석률이 나빠졌다. 학생의 출석이 아니라 선생님의 출석이었다.(중략) 나도 포기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山川均, <日本人の自伝>,平凡社,1982)

 

그러면 1900년 9월 정치학교에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했다는 이인직의 이력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입학과 졸업 자체가 사실인지도 불투명해집니다. 이인직의 행적은 이토록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활자로 조합된 그의 글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 줍니다.

봉건주의에 대한 혐오

이인직은 1901년 한국공사관의 추천으로 일본 <미야꼬신문(都新聞)>에견습으로들어갑니다. 그는 미야꼬신문에 1901년부터 1904년까지 8개의 논설문을 게재했는데 그의 사상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팔베개를 하고서 사십성상(四十星霜) 동안 참으로 잘 잤다. 곁에서 잠꼬대를 하는 자는 우리 이천만 동포다. (「入社說」, <都新聞>,1901.11.29.)

 

이인직은 당시의 조선을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어찌 깨어났지만 아직 이천만 동포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서 동포를 깨우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인직에게 있어 조선이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꾸고 있는 꿈은 ‘봉건적 유습’입니다. 이후에 발표된 「몽중방어(夢中放語)」(<都新聞>,1901.12.18.)에서도당대주요국의상황을꿈으로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한국과 중국을 제외하고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 확대를 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깨어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미 이인직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던 점은 후술하고, 그는 일관되게 봉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인직은 조선을 미개화 상태, 봉건적 유습이 지배하는 야만의 상태로 파악했기 때문에 일단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봉건적인 유습을 혁파해야만 했고, 그것이 이른바 ‘계몽주의’로 이어집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인직은 마치 봉건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인 개화자강 운동가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비롯해 구한말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중 꽤 많은 숫자가 친일파가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타파하고자 했던 봉건 유생이 ‘의병’을 결성하여 일제에 항거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이렇듯 순식간에 바뀌어버립니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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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개발자들

인터뷰 김수빈 회원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의 개발자인 고용진(왼쪽)과 안겨레(오른쪽)

 

100년 전, 독립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목표도 가족을 지켜 내겠다는 책임감도 제국주의와 반민족행위자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명감도 봉건적 속박에서 억압받는 성을 해방하겠다는 처절함도 있었겠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저마다 ‘가슴 뜨거워지는 한 순간’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가슴엔 과연 어떤 ‘한순간’이자리 잡고 있을까? 그 뜨거움의 원천은 각기 다르겠지만, 그 한순간을 만났고, 이에 두려움도 무릅쓰고 한 발짝 내디딘 청년들이 있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을 개발한 고용성 개발자와 안겨레 개발자가 바로 그들이다. 10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난세의 영웅’ 개발자 두 분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문: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겨레 : 안녕하세요, 한림대 법학과 재학 중인 안겨레입니다. 한림대학교 내 창업교육센터에서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게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고용성 : 안녕하세요, 한림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고용성입니다. ‘난세의 영웅’ 개발과 저희 회사 경영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은 어떤 게임인가요?
안겨레 : ‘난세의 영웅’은 선사시대부터 건국 이후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사 RPG입니다. 주인공은 3명이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저희 게임의 주요 콘텐츠 중에 하나가 캐릭터가 돌아다니며 NPC에게 말을 거는 방식인데요, NPC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사에 관한 정보와 게임 진행에 관한 정보를 고루 얻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임 안에 담긴 한국사 정보는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입니다. 수능은 물론, 한국사능력검정 1급, 국가직 공무원, 지방직 공무원 등의 시험 출제율 최상위에 뽑힌 것만을 골라서 게임에 넣었습니다. 또한 역사를 다루다 보니 철학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명분이 왜 필요한가? 등등의 요소가 단순히 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를 통해 더 발전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합니다. 철학적 접근이 어렵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접근성이 높은 게임매체를 통해 조금 더 생생하게 흐름을 잡아주는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문 : 원래부터 게임 개발에 흥미가 많았나요?
고용성 : 저희는 중학교 동창인데요, 그때 같이 재밌게 만들던 게임 제작 프로그램이 군대제대 후 최신화로 업데이트된 걸 알고 다시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때 당시엔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단 게임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겨레 : 저도 처음에 게임 개발보다 게임 자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수학을 포기하고 문과에 진학한 상태라 그 생각을 접고 공부에만 매진했죠.

문 :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로 한국사 게임을 만들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저는 중국의 ‘삼국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삼국지 게임을 하다 흥미가 생겨 <삼국지>를 읽었고, 나중엔 책을 줄줄 외울 정도로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사를 삼국지보다 늦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제대 후에 노량진에서 검찰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흥미가 생기고, 제일 자신 있는 전략과목이 되었습니다. 공부가 정말 힘들었던 어느 날, 예전에 즐겁게 했던 삼국지 게임이 떠올라 ‘한국사 게임도 있겠지’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는데,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 매우 의아했어요. ‘삼국지 게임도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게임은 왜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삼국지 게임에 빠져 삼국지를 섭렵하게 됐듯이, 한국사 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한국사에 빠지는 세상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검찰직 시험을 포기하고, 게임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죠. 

문 : 대전환이 일어났네요. 진로를 변경했을 때, 고민이 많이 되지 않았나요?
안겨레 : 저는 법학과, 용성이는 경영학과다 보니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은 뛰어나지 못했어요. 옛날 중학교 때 장난스레 가지고 놀던 게임 툴만으로는 전문적인 게임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진로를 변경해도 괜찮을까’란 고민과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문과생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시대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았고, 제 마음은 마른 낙엽에 옮겨 붙은 불씨처럼 계속 커져만 갔어요. 제가 좋아했던 게임 속 영웅들, 역사 속 위인들은 도전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제가 이 일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제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족한 건 배우면 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는 생각으로 짐을 챙겨 노량진에서 나왔습니다.

문 : 고용성 님은 어떤 계기로 안겨레 님과 함께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나요?
고용성 : 겨레가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저는 창원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어요.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 그 음식점 대표여서 제대 후에 음식을 배우고, 그쪽 계열로 창업하려 했는데 겨레가 함께 게임을 개발하자는 연락이 와서 그걸 접고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음식점을 하면서 2년간 번 돈을 ‘난세의 영웅’ 초기 창업 자금에 보탰습니다.

문 : 창업 자금이 꽤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금과 관련된 계획은 어떻게 세웠나요?
고용성 : 원래 개발 자금으로 1년 반 정도는 지출하리라 예상했지만, 하다 보니 너무 어려운 점도 많고, 처음이라 익숙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림대 학교 창업지원센터에서 심사를 거쳐 창업 지원금을 받아 충당해 나갔습니다.

문 : 게임은 두 분이서 만드신 건가요?
안겨레 : 처음 출시했을 때는 저희 둘이서만 만들었고, 후에 리메이크할 때는 전문 프로그래머한테 외주를 맡기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래머도 저희 게임팬이었는데,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돕겠다는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외주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희만의 엔진이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서 자체적인 개발이 가능한 정도까지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문 : 한국사가 워낙 방대해서 게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텐데요.
안겨레 : 네, 사실 시나리오라는 걸 처음 써봤는데 다행히 옛날에 책을 읽은 경험이 많아서 초반에는 잘 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창작의 고통이 심하게 와서 글이 안 써지면 개발업무를 하고, 그러다가 스토리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글을 쓰는 패턴으로 조절하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료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있었나요?
안겨레 : 한국사 내용은 주로 시험 출제 빈도가 높은 것들로만 구성했습니다. 게임 안에서도 캐릭터들이 대화할 때 나오는 붉은 자막은 한국사 시험 관련, 푸른 자막은 게임 진행 관련정보로 구분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기 싫어도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오고, 반대로 한국사가 좋아서 왔는데 시험에도 도움이 되니까 한국사 자격증을 따게 되는 등 좋은 영향을 끼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 게임 스토리는 어느 시대까지 진행되나요?
안겨레 : 현재 선사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이미 나온 상태고, 올해 12월에 조선 후기편이 나옵니다. 앞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편까지 더 나올 예정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2021년까지 완성될 것 같습니다. 한국사 시험 범위 내에서 다루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를 끝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한국사 시험에 높은 출제 빈도수 위주로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게임 팬카페의 팬들이 빨리 다음 장을 달라고 하셔서 (웃음) ‘7장’인 조선 후기까지를 후딱 내고,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1기’, 개화기부터는 ‘2기’로 나누어 약간의 기간을 두고 출시하려 합니다. 일단 전체를 다 만들고, 구글 스토어 말고도 다른 플랫폼에 출시해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문 : 난세의 영웅 팬카페의 연령 분포는 어떤가요?
안겨레 : 10대부터 60대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그중 20대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0대, 10대 순입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난세의 영웅’ 팬들이 함께 답사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30대가 가장 많다는 것이 참 다행이네요. 게임 홍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안겨레 : 사실 저희가 조선 후기편 개발로 인해 지금은 홍보를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편이 완성된 후에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데요, 현재 성남시에서 진행하는 ‘인디크래프트’에 저희가 선정되어서 그쪽에서 저희 홍보를 전담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구글피처드’에서도 홍보가 이루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한림대에서도 홍보 지원을 해주기로 하였고요.

문 : 게임 타이틀을 왜 ‘난세의 영웅’으로 정하게 됐나요?
안겨레 : 제 개인적인 역사인식인데요, 평범한 사람도 난세를 만나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숨지 않고 뛰쳐나온 경험이 많죠. 그런 위기 순간에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영웅’이란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지 영웅이 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난세’란 개념은 더 포괄적이죠. 그래서 더 다양한 방면에서영웅이 등장할 수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게임 타이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문 : 게임이 다 완성되고 나면, 본인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계획들이 있나요?
안겨레 : 다 완성되고 나면, 일단 게임을 깔끔하게 한 번 더 다듬고 홍보 쪽으로 매진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후엔 계속 게임업계에 종사하게 될지, 아니면 공부를 좀 더 해서 애플리케이션 등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나갈지 고민 중입니다.
고용성 : 저는 ‘난세의 영웅’이 완성되고 나면 외전 버전까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램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습니다.

문 : 처음에 두 분께서 한국사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는, 우리 역사콘텐츠의 부재를 절감해서 두 팔 걷어붙였지만, 일이 진행되어갈수록 부담감과 무게감이 가중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난관들을 어떻게 버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사실 한국사 게임이 없습니다. 국내 내수시장이 작아 돈이 안됩니다. 중견기업 정도 되면 이런 게임은 안 한다고 해요. 수지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요, 또 두 명만으로 만들기엔 엄청 버거운 내용이라서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앞으로도 이런 게임이 나오기는 힘들 거라 예상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독점한 상태가 되어버린 거죠. 게임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은 ‘미래형 교과서다’라고 할 만큼 저희 게임이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어서 학원가에서도 원장님들이 저희 게임을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정말 많이 힘들던 때가 있었는데, 이건 유일하게 저희가 누릴 수 있는 ‘빈집’이고, 그 생각으로 계속해 오다 보니 지금은 조금 숨통이 트인 상황입니다. 큰 난관들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보란 듯이 멋진 한국사 게임을 출시해 주신 고용성 님, 안겨레 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장 존경하는 위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회영 선생’이라 말씀하신 안겨레 님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회영 형제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안겨레 님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데 ‘그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나에게 이 두 분이 바로 ‘난세의 영웅’이다. 더불어 한국사 게임 콘텐츠의 부재에 의문을 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하며 정면 돌파한 두 분의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난세 속에 온 국민이 잠재적 위인’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게임 ‘난세의 영웅’을 통해 우리역사를 기억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 2020/11/1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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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4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올해는 4월혁명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4월혁명이 일어난 원인과 전개, 5·16쿠데타로 인한 좌절, 4월혁명이 한국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 등 4월혁명을 다각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회를 마련했다. 원래 4월 19일에 개막하려 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9월 25일에야 겨우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전시회 구성은 제1부 우상의 시대 : ‘국부’가 된 독재자,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 제3부 사월 그날 이후,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로 이루어져 있으며 8개의 패널과 이승만 관련 〈대한뉴스〉 영상, 신동엽 시인, 여중생이 죽기 전 남긴 편지 등 4개 영상, 그리고 4월혁명 관련 서적과 당시 격문, 음반, 영화포스터 등 다양한 실물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자료가 다수이나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아이엠피터
tv, 연세대학교박물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한상언영화연구소로부터 귀중한 자료의 전시 협찬을 받았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전시회 지상중계에서는 각 주제별 전시회 현장 사진과 주요 실물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통령에 리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을 추대하며> 자유당, 1956.4. 근현대사기념관 소장
대통령후보 이승만박사 선거사무장 이재학, 부통령후보 이기붕선생 선거사무장 박영출, 자유당중앙위원 일동 명의의 자유당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추대 홍보물이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자유당은 1956년 3월 5일 전당대회를 열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5·15 정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다.

① <4·19> 학생운동기 – 아혼록 1960.2.28.~4.28.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4월혁명에 참가한 학생들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② <피어린 4월의 증언> 1960. 부산 거주 대학생의 일기로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대학생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4월혁명 양상을 전해준다.

③ <영한대역-4월의 영웅들>, 일신사, 1960. ‘세계의 눈에 비친-한국 자유혁명의 산 기록’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영미권 유수 언론이 이승만의 독재와 4월혁명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다룬 사설 칼럼 보도 등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④ <혁명재판 공판기> 1960.8. 혁명재판 법정 녹음을 녹취한 공판기록. 부정선거관리·모의·지령사건, 정치깡패사건, 발포명령자사건, 장면부통령저격사건, 전성천선거법위반사건 순으로 편제되어 있다.

<격! 참의원 의원의 망동을 규탄한다> 사단법인 사월혁명단, 1961.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격! 삼천만은 사월 혁명 영령의 명복을 빌자> 월요회, 1961.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① 〈오발탄〉 1961년 4월 13일 개봉 이범선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유현목이 연출한 영화이다. 전후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어두운 화면과 우울한 정조를 통해 보여준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이다. 사월혁명이 가져온 대표적 영화로 5·16쿠데타 이후 한때 상영 중지되었다.

② 〈삼등과장〉 1961년 5월 4일 개봉 삼등과장의 아들인 영구는 사월혁명을 주도한 대학생 계층으로 자부심이 있으나 놀고먹기를 좋아하며 여자친구에게 푸념만 하는 젊은이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사월혁명이 ‘실패’로 자인되고 있던 1961년 초의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③ 〈잘돼갑니다〉 1968년 작, 1989년 9월 9일 개봉 경무대 이발사의 눈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말로를 묘사한 영화이다. 한운사 작 동명의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1968년 영화로 만들었다. 개봉을 앞둔 상황에서 삼선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상영금지 되었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가서야 해금되었다.

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유성기음반, 도미도레코드, 1960.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소장(이하 동일)
② 〈사월의 깃발〉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③ 〈아 4·19〉 유성기음반, 미도파레코드, 1960.

④ 〈너를 찾아 서울 왔다〉 수록 <송운선 작곡집>, 세광출판사, 1961. 송운선은 송성운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며 1950년대 말부터 작품을 발표했으며, 혁명 관련 대중가요로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못 잊을 4·19〉, 〈광명의 4·19〉 등을 만들었다. 〈너를 찾아 서울 왔다〉는 혁명 1주년을 앞두고 기획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광명의 4·19〉 수록 노래책, 세광출판사, 1961.
⑥ 〈어머니는 울지 않으리〉 유성기음반, 아세아레코드, 1960.

 

① <항쟁의 불길>,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이하 동일) 4월혁명을 소재로 한 정론, 시, 소설, 희곡을 실은 북한의 작품집
② <조선> 1960년 제5호, 조선화보사. 4월혁명 소식을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보도한 북한의 대외선전용 화보

③ <남조선 학생운동>,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4월혁명을 비롯해 해방 후 남한에서 일어났던 각종 학생운동을 소개한 북한 도서

④ 〈항쟁의 서곡〉 영화 스틸사진, 조선예술영화제작소 출품, 창춘(長春)영화제작소 더빙, 중국영화배급사 배급, 1960. 4월혁명 직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항쟁의 서곡〉 스틸 사진. 강홍식이 연출을 맡았으며 심영, 김연실 등 유명 월북영화인들이 출연했다.

수, 2020/11/1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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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개최

 

10월 23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며, 강북구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독립전쟁 선
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이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독립전쟁선포 100주년이자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전쟁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에 부응하고자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 본격화한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에서 기조발제와 주제 발표 및 토론, Ⅱ부는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로 학술회의가 시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학술회의 Ⅰ부는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기조발제를 맡은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독립전쟁과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제1주제 ‘1910년대 유교계의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는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가 발표하였다. 일제 강점 초기 만주에 정착한 유림들과 신흥무관학교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교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참여에 대해 다루었다. 토론자로 나선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유교계가 어느 정도로 관계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제2주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 현황 분석과 독립운동’은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발표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구축한 신흥무관학교 인명 DB를 토대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의 활동과 분화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로 나선 숭실대학교 황민호교수는 신흥
무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436명의 인물들을 직접관련 단체 9개와 간접관련 단체 5개로 구분하고 중요 인물들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고 동시에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졸업 후 독립운동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였다. 
다음으로 한성민 대전대학교 교수가 제3주제인 ‘일본의 간도출병 배경 검토’를 발표하였다. 일제가 1920년 ‘훈춘사건’을 빌미로 간도지역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한 ‘간도 출병’의 배경을 당시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 강릉원주대학교 이명종교수는 일제의 ‘간도출병’을 전체적인 배경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데 연구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주제는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청산리 전역과 절반의 작전’으로 발표하였다. 청산리 전투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과 일본군의 활동을 추적하는데 지도를 활용하여 보여줌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었다. 토론자 동덕여자대학교 이승희 교수는 <吉長日報>라고 하는 중국신문을 검토대상으로 삼고 청산리 전투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활동의 양상과 일본군의 움직임을 규명한 점과 중국 동북지역 한인 무장투쟁과 일제 침략정책의 상관관계를 도출해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였다.
Ⅱ부 종합토론에서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의 주재로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이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상황에 맞춰 관계자와 예약 참석자 50명만 제한적으로 참석하여 진행되었지만 학술회의의 모든 진행 과정을 촬영하여 편집영상을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2/0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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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코로나 시대, 한일 시민들이 함께 외친
“야스쿠니 NO!”―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 온라인 화상회의로 열려

10월 23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야스쿠니문제 국제회의가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이 국제회의는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본질을 폭로하고, 야스쿠니무단합사철폐소송의 현황을 점검하며, 국제사회에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호소하기 위해 2016년부터 매년 서울에서 열려왔는데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올해는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했으며, 동북아역사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후원으로 마련되었다.

 


올해는 2006년부터 시작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맞이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 성찰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함께 해온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 원고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변호인단, 연구자, 활동가, 지원단, 시민 등이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가졌다. 특히 올해 국제회의를 준비하며 온라인 화상회의의 특징을 살려 인터넷 홍보를 통해 일반 참가자를 모집하였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30여 명의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참가하여 야스쿠니문제의 대중화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김영환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 이희자공동대표는 개회사를 통해 코로나 사태를 맞아 비록 직접 만
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함께 싸워나갈 것을 강조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모든 이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모임’ 사무국장은 스가 정권의 출범을 맞아 대일과거청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망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일시민들의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야스쿠니 합사철폐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아사노 후미오(浅野史生),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
는 발표와 토론을 통해 코로나로 지연되고 있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소송전략에 대해 원고 유족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2부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는 시간이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제안자이기도 한 서승 공동대표(우석대 석좌교수)는 15년의 운동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이 문제의 해결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캠페인,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연구주체의 양성, 유럽에서의 국제회의 개최 등 이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했다. 한편, 평생 동안 모아온 야스쿠니 관련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기도 한 즈시 미노루(辻子実) 야스쿠니반대도쿄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야스쿠니반대를 위한 한국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얻은 성과를 소개하고 국제적인 시민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 패널토론은 야스쿠니반대운동에 참여한 청년세대를 대표하여 권다정(청년시대여행) 활동가와 도쿄촛불행동의 사무국으로 활약해 온 나카무라 모모코(中村桃子) 씨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에 참여한 감상과 자신의 변화에 대해 발표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 사무국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이영채, 김영환 사무국장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15년의 성과와 한계, 과제와 전망에 대해 토론했다. 이날 국제회의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 최낙훈, 이명구, 박진부, 박남순, 동정남, 박매자, 이병순, 신명옥 어르신들께서 함께 하여 일본의 변호단, 지원단 여러분들과 화상으로나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코로나를 함께 잘 이겨나가자는 의미에서 응원의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회의장 벽면에는 야스쿠니합사철폐소송의 원고로 참여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신 원고들(김희종, 임복순, 고인형, 임서운, 윤옥중, 남영주, 최두용, 유충현, 백귀례, 남영주)의 사진으로 채워진 현수막이 걸려 참가자들을 숙연케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의 참가자들은 야스쿠니문제의 해결을 위해 먼저 가신 분들의 몫까지 힘껏 싸워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NO!”를 힘차게 외쳤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12/0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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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년 교사 직무연수 운영,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직무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를 주관했다. 이번 연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현대사 자료들 중에서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사료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됐다. 참여한 교사들은 모두 5차에 걸쳐 ‘니시키
에’, ‘일출신문조선쌍육’, ‘애국반회보’ 등 일제의 선전 자료와 친일, 강제동원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 과제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10월 27일(화) 진행된 이번 연수의 첫 프로그램, 「니시키에로 본 청일전쟁과 지워진 역사」에서는 강효숙 원광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니시키에(錦絵)는 근세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를 모태로 탄생한 회화 장르로, 18세기 후반부터 메이지 시기까지 유행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취시키고 선전 미술로 활용되는 등 어두운 양면을 가진 예술이기도 하다. 강효숙 교수는 니시키에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에는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격하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한 ‘청일전쟁’이 니시키에를 통해 다시금 조망됐다.
강의를 마친 후 수강생들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을 방문, 「조선안성도격전지도朝鮮安城渡激戰之圖」 등 청일전쟁 관련 니시키에를 관람했다. 아울러 박물관은 강연장 내에도 10여점의 니시키에를 별도 전시하여 수강생들의 학습과 체험을 도왔다. 이러한 실물 사료 체험에 대해 수강생들은 필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때로는 설명을 청하기도 하며 높은 열의를 보였다. 박물관은 앞으로 이어질 연수에서도 사료를 실제로 감상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편성할 예정이다.
올해 직무연수는 1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2주차 「일출신문 조선쌍육으로 본 일제의 강제병합과 왜곡된 역사 인식」에서는 놀이, 삽화 속에 담긴 일제의 침략 의도를 분석해본다. 3주차 「친일 관련 사료와 디지털아카이브 활용방법」에서는 방대한 일제강점기 사료군에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해야 하는지를 방법론적 측면에서 다룰 예정이다. 제4강과 5강에서는 애국반 회보와 강제동원의 실상을 사료와 사진을 통해 분석해보며 일제 지배 정책의 기만성과 식민지 폭압의 실체를 파헤친다. 다양한 시각, 이미지 자료와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활용하여 수강생들의 학습 성취를 돕는다. 한편, 이번 직무연수와 관련된 내용은 연수 종료 이후 유튜브 및 뉴스레터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목, 2020/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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