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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친일파] 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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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친일파] 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 (1)

익명 (미확인) | 목, 2017/11/16- 16:01

김덕영 선임연구원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한 번 맑아지고 땅이 한 번 편안해지매 통서(統緖)를 전하는 데에서 보록(寶籙)을 넓어지게 하였고, 별이 다시 빛나고 바다가 다시 넘실대매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서 영전(令典)을 송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업이 한이 없게 되었고, 척의(尺依)는 점차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천황 폐하께서는, 상제(上帝)께 밝게 받아서 후인들을 열어주셨습니다. 뇌사(雷肆:書筵)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림에 용안(龍顔)에는 기쁜 빛이 돌고 진저(震邸)에서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하는 칭송이 퍼짐에 따라 인지(麟趾) 역시 어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억만년토록 태평을 누릴 아름다움에 응하였기에, 바야흐로 황태자를 미리 세우는 예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자질은 공자의 학문을 세우는 데 부끄러우나, 정성은 요(堯)임금이 되기를 축원하는 데 간절합니다. 사해에서 구가(謳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만리 밖까지 덕스러운 교화가 퍼짐에 모두들 성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정 5년(1916년-필자) 11월 3일에 조선총독부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신(臣) 이인직(李人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14<경학원잡지>제12호에당시경학원사성이었던이인직이일본태자(뒤에 쇼와천황)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으로 쓴 글의 일부입니다.
대단하지요. 이인직이 신소설의 개척자지만 그 글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이 문장은 그가 가장 ‘빛나는’ 글을 쓸 때가 언제인지를 알려줍니다. 그의 지향과 정체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을 쓸 때입니다.

 

숨겨진 행적
최초의 신소설<혈의누(血의淚)>로잘 알려진국초(菊初)이인직(李人稙)은1862년에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한산(韓山) 이씨 양경공파(良景公派) 25세손으로 이윤기(李胤耆)와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5살 때 1866년 생부 윤기가, 18살 때인 1897년엔 생모 전주 이씨가 각각 사망합니다. 그리고 9살 때 3대조 면채(冕采)의 손자인 은기(殷耆)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외 이인직에 대한 기록은 38살인 1900년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00년 관비유학이라는 공식적인 기록이 나타나기까지 이전 행적은 찾기 힘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행적은 38살부터 55살까지 16년간의 기록입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인직이 을미사변과 관련해서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전문 외교관 출신으로 통감부와 총독부의 초대 외사국장을 역임한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록(<明治外交秘話>,東京千倉書房,1936)에서이인직을조중응(趙重應)과함께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서 과외생(課外生)으로 자신의 강의를 들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중응은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으로 일제하 자작, 중추원 고문을 지낸 대표적 친일파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미사변 후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의 폐비 조치를 강행하는 등 사후처리를 담당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06년에 사면되어 귀국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는 아관파천으로 망명한 한국인들을 을미망명자(乙未亡命者)로 분류했으며 그 인원은 31명인데, 그 명단 중 이인직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마쓰의 지위나 명망을 생각하면 그의 회고를 허위나 거짓으로 보기에 힘듭니다. 더불어 김기장(金基璋)의 증언까지 고려하면 이인직이 조중응과 일본 망명 생활을 함께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기장의 경우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동경전문학교(현 와세다 대학)를 졸업하고 주일 공사관 참서관, 경리원 감독을 역임했던 자로 조중응의 일본 망명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는데, 그는 “조중응과 이인직은 일본에 재류할 때부터 거의 주종과 같은 관계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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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웅

 

아마 이인직은 조중응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인직이 일본으로 함께 망명한 것은 을미사변이나 김홍집 내각 하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서 피신했다기보다 정황상 함께 동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고서는 망명자가 귀국하여 관비 유학생 자격을 얻은 다음 1900년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동경정치학교와 이인직

국비 유학생으로 이인직은 1900년 9월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 정식 입학합니다. 최소한 이인직의 자필이력서에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동경정치학교가 이인직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근래 연구 성과는 이마저도 의구심이 들게 만듭니다.
동경정치학교(이하 정치학교)는 마쓰모토 쿤페이(松本君平)가 1898년 10월 ‘고등문관, 의회의원, 외교신문기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입니다. 3년제이며 17세 이상의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교육을 통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정치가나 신문기자 등의 양성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고마쓰는 위 회고록에서 이인직과 조중응이 과외생으로 자신이 그 학교에서 강의했던 열국정치제도(列國政治制度)를 강습(講習)한 제자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인직이 관비 유학생 시절인 1900~1903년 사이 고마쓰는 정치학교에서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관비 유학생 이전 일본 체류 시기에 일종의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고마쓰의 기록 외에 다른 증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의문을 갖게 하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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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 미도리의 <명치외교비화>

우선 정치학교는 제대로 운영된 적이 별로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경부통계서>에 의하면 학교규모는개교 당시 1898년 강사 40명, 학생 97명, 1901년 강사 10명, 학생 120명, 1902년 강사 10명, 학생 13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강사 수가 급격히 줄었을 뿐만 아니라 1899년과 1900년 2년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2년간의 공백은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사실상 휴교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정치학교는 1903년 9월 경영부진으로 폐교됩니다.
실제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의 회고를 통해 본 정치학교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정치학교는 사루가쿠초 변에 있는 중학교의 낡은 교실을 빌려 개교했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보니 학교라기보다는 고작 강습회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중략) 2, 3개월 채 되지 않아 점차 출석률이 나빠졌다. 학생의 출석이 아니라 선생님의 출석이었다.(중략) 나도 포기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山川均, <日本人の自伝>,平凡社,1982)

 

그러면 1900년 9월 정치학교에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했다는 이인직의 이력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입학과 졸업 자체가 사실인지도 불투명해집니다. 이인직의 행적은 이토록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활자로 조합된 그의 글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 줍니다.

봉건주의에 대한 혐오

이인직은 1901년 한국공사관의 추천으로 일본 <미야꼬신문(都新聞)>에견습으로들어갑니다. 그는 미야꼬신문에 1901년부터 1904년까지 8개의 논설문을 게재했는데 그의 사상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팔베개를 하고서 사십성상(四十星霜) 동안 참으로 잘 잤다. 곁에서 잠꼬대를 하는 자는 우리 이천만 동포다. (「入社說」, <都新聞>,1901.11.29.)

 

이인직은 당시의 조선을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어찌 깨어났지만 아직 이천만 동포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서 동포를 깨우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인직에게 있어 조선이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꾸고 있는 꿈은 ‘봉건적 유습’입니다. 이후에 발표된 「몽중방어(夢中放語)」(<都新聞>,1901.12.18.)에서도당대주요국의상황을꿈으로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한국과 중국을 제외하고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 확대를 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깨어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미 이인직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던 점은 후술하고, 그는 일관되게 봉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인직은 조선을 미개화 상태, 봉건적 유습이 지배하는 야만의 상태로 파악했기 때문에 일단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봉건적인 유습을 혁파해야만 했고, 그것이 이른바 ‘계몽주의’로 이어집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인직은 마치 봉건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인 개화자강 운동가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비롯해 구한말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중 꽤 많은 숫자가 친일파가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타파하고자 했던 봉건 유생이 ‘의병’을 결성하여 일제에 항거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이렇듯 순식간에 바뀌어버립니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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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개막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이 8월 11일 개막하였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인 3월 5일 또는 4월 1일에 개막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되었다. 창간일 대신 두 신문이 1940년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한 8월 11일에 맞추어 개막하였다. 이 기획전은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년간 두 신문의 부일협력 행위를 추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민족지’ 논쟁을 소개하며 “두 신문이 과연 민족지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제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서는 조선‧동아의 창간배경을 파헤쳤다. 3‧1운동 후 일제는 민심 파악과 여론 조작을 위해 민간신문의 설립을 허용했다는 사실과 두 신문의 창간 주도세력의 성격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경쟁적으로 침략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두 신문의 투항이 사실상 이해관계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음을 다양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총독부의 보도지침이 강제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본국민적 태도’를 보인 전쟁 보도는 조선·동아의 노골적인 부역행위의 결정판이었다.
제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는 조선·동아가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전쟁동원을 어떻게 선전·선동했는지를 고발한다.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몬 행위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할 두 신문의 흑역사이다.

 

제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서는 일제하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다룬다. 언론사를 사유화한 두 사주는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강연·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는 활동을 펼쳤다. 방응모가 고사기관총을 국방헌납하고 김성수가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달라”며 철대문을 뜯어다 바친 반민족범죄도 소개한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숙청과 우리의 반복되고 있는 부역언론의 현재를 비교하였다.
고경일 작가의 카툰과 레오다브의 그래피티가 전시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언론개혁 특강 등 부대행사가 전시 폐막 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전시물로는 동아일보가 정간 해제를 목적으로 총독부에 복종을 서약한 경위가 담긴 「동아일보 발행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와 조선일보 폐간 당시 사주 방응모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밀약을 담은 「언문신문 통제에 관한 건」 등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가 있다.
그동안 조선‧동아 1면에 실린 일왕부부의 사진에만 주목했다면 1면에 일왕부부의 사진이 실리게 된 뒷배경을 바로 이 극비문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입수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 원본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1924년 만들어진 이 성토문 전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친일 성향과 패배 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 민중이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에 얼마나 실망과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전시장을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 VR온라인전시도 추진중이다. 전시 홍보 영상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으며 기획전 도록도 회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열린다. 언론개혁의 의지를 담아 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수, 2020/08/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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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그린벨트 훼손 불법 호화 묘지’ 규탄 집회

 

 

연구소 경기북부지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8월 8일 의정부종합운동장 엄복동 동상 앞에서 ‘친일파 조선일보 방씨 일가 불법행위범시민 규탄대회’를 열고 불법 호화묘지에 대한 행정절차에 즉각 돌입할 것을 의정부시에 요구했다.
앞서 고발뉴스는 지난해 1월부터 방씨 일가가 700여 평에 이르는 그린벨트 임야를 훼손해 호화 분묘를 불법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의정부시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을 연속 보도했다. 고발뉴스의 보도를 접한 기념사업회는 이날 집회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해방 후에는 친독재를 일삼아온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가 수십 년 전부터 의정부시 가능동에 불법 조성한 가족묘지에 대해 관계당국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에 상응하는 법적 조치와 원상회복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한 ‘의정부 관내 불법 조성된 조선일보 방응모 일가의 가족묘에 대하여 법률에 따라 엄격한 처벌과 원상복구를 위하여 청원드립니다’란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려놓았다.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엄복동 동상부터 가족묘가 시작되는 입구까지 행진했다.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올 가
을에 정식 창립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산림법, 장묘법, 개발제한구역특별법 등 위반 혐의로 고발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08/2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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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61]

벽제관 후면 언덕에 솟아오른 ‘전적기념비’의 정체는?
침략전쟁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랐던 그들만의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 도시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곧잘 마주치는 용어의 하나가 ‘하이킹(hiking)’이다. 누군가는 이를 ‘산책여행(散策旅行)’이라고 옮겨놓은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어쨌거나 도회지 생활에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배낭을 꾸려 반나절이나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교외지역으로 도보여행을 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러한 하이킹은 193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크게 성행한 적이 있었고, 심지어 전시체제기가 본격화한 이후에도 “걷는 것은 훌륭한 국민운동”이라고 하여 이러한 활동 자체가 크게 장려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성 근교(京城 近郊)의 하이킹 코스를 소개하는 특집 연재기사들이 잇따라 신문지상에 등장하였고, 여러 단체에서 주선하여 벌어지는 하이킹 행사도 신청자 모집에 어렵잖게 큰 호응을 이끌어 내곤 했다.
이 당시에 무수하게 쏟아졌던 하이킹 관련 안내서적을 통틀어 그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경전하이킹코스(京電ハイキングコース)’ 시리즈였다. 1937년 10월 15일에 제1집 <북한산(北漢山)>이 처음 선을 보인 이후로 같은 달에 <비봉(碑峰)>(제2집),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제3집), <당인리(唐人里)>(제4집), <양천(陽川)>(제5집) 등이 한꺼번에 배포되었고, 해를 바꿔 1938년 5월에는 <벽제관(碧蹄館)>(제6집)과 <남한산(南漢山)>(제7집)이 추가로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제1집 말미에 수록된 ‘편집후기’를 보면 앞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체 30개에 달하는 하이킹코스의 목록이 장황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최초의 방대한 계획과는 달리 실제로는 총7편을 펴낸 것을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발간은 중단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들 자료는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의 전무였던 무샤 렌조(武者鍊三)의 지시에 따라 3년 정도의 기획기간에 걸쳐 편찬한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성전기의 산악부원과 감리실원이 주축이 되어 실지조사를 겸하고 카토 칸카쿠(加藤灌覺), 오카다 코(岡田貢), 이마무라 토모(今村鞆) 등과 같은 준관변학자(準官邊學者)의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전문적인 사진촬영자가 배치되어 다양한 화보 성격의 사진자료가 첨부되었다. 여기에는 도보여행지로 이동하는 교통편에 관한 정보라든가 각 지점 간의 행로 등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고, 각 코스에서 풍치가 빼어난 곳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이고 주변 행로에 흩어진 고적(古蹟)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풍부하게 곁들여졌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시리즈로 펴낸 ‘경전하이킹코스’의 제6집 <벽제관(碧蹄館)> (1938년 5월 1일 발행)의 표지 모습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전투의 현장이 묘사된 지도자료이다. 흔히 벽제관전투라고는 하지만 실제의 전장은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을 중심으로 한 곳이었으며, 더구나 벽제관의 위치도 지금과는 다르게 ‘빈정리’에 자리하고 있었다.(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벽제관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1938)에 수록된 문록교(文祿橋, 분로쿠바시) 쪽에서 바라본 벽제관 일대의 원경사진으로 산중턱에 보이는 하얀 돌기둥이 곧 ‘벽제관전적기념비’이다.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의 정상에 설치된 벽제관 고전장 표석의 모습이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잔존여부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혹여 이러한 행로 도중에 일본인과 관련한 사적지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촘촘하고 상세한 설명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 가운데 1938년 5월 1일에 발간된 <벽제관(碧蹄館)>(제6집)은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 대표적인 하이킹 안내서였다.
벽제관이라고 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기네 선조들의 전승지(戰勝地)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그 어느 곳에 못지않게 세밀한 사료조사와 현지탐방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한 결과를 담은 것이니만큼 비록 소책자일망정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려 제작한 흔적이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역력히 감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벽제관>의 75~76쪽에는 벽제관 주변의 탐방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 현재 그 관리는 당지(當地)의 우편소장(郵便所長)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벽제관전적보존회(碧蹄館戰蹟保存會)에 맡겨져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동씨(同氏)의 안내로 전적견학(戰蹟見學)의 편의를 얻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벽제관의 역(役)이 있던 이래로 춘풍추우 340년 소화 8년(1933년) 9월에 이르러 이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일대기념비(一大記念碑)의 건립이 실현되었다. 비(碑)의 모양은 애급(埃及, 이집트) 나일 하반(河畔)의 광야에 흘립한 오벨리스크(Obelisk)를 본뜬 것으로, 경성으로부터 벽제관에 오는 손님들이 명군(明軍)의 진지였던 월천리(越川里)에 이어지는 작은언덕을 지나자마자 곧장 북방 밀수(密樹)의 언덕 위에 그 높고 하얀 자태를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 비는 양질의 화강암(花崗岩)으로 제작되어 전기(電氣) 연마를 하여 광택이 아름답고 새로 식수한 수십 주의 앵수(櫻樹, 벚나무) 가운데에 서있다. 비의 표면에는 고 중추원촉탁 김돈희(故中樞院囑託 金敦熙) 씨의 글씨로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으며, 이면(裏面) 비의 대석(臺石)에는 당시 경기도지사 마츠모토 마코토(京畿道知事 松本誠)씨의 이름으로 다음의 명(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은 이왕직 촉탁에하라 젠즈치(江原善槌)가 지은 것이다.
비가 있는 언덕 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벽제관의 건물이 있다. (비명 부분은 인용생략)

 

이 내용에 따르면, 벽제관으로 가는 작은 고갯길을 넘어서자마자 모든 도보여행객들은 누구나 저 벌판 너머로 온통 사쿠라의 동산으로 변신한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존재를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구도였다. 여기에 나오는 중추원촉탁 김돈희(1871~1937)는 일제 때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선암사 강선루, 낙산사 의상대 등의 편액 글씨를 남겼으며, 특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제호(題號)도 바로 그의 글씨라고 알려진다.
일찍이 이곳 벽제관 지역에는 1911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명목상 고양군수(高陽郡守)가 회장을 맡고 기타 지역유지가 여기에 참가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보존회 설립이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1915년 4월에 “문록역(文祿役, 임진왜란) 때의 유적인 벽제관, 괘갑수(掛甲樹) 등의 보존 관리 및 이를 널리 사회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벽제관고적보존회(碧蹄館古蹟保存會)가 설립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碧蹄館戰蹟紀念碑建設會)라는 것이 꾸려져 기념탑의 건립까지 시도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자에 수록된 「이십여 성상(二十餘 星霜)을 농촌계발(農村啓發)에 전심(專心), 벽제일대(碧蹄一帶)에서는 신(神) 같이 앙모(仰慕),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의 공적(功績)」이라는 제목의 인물탐방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 당지(當地)에 군청(郡廳)이 있을 시(時)에는 300여 호(戶)의 인가(人家)가 즐비하던 것이 군청이 20여 년 전에 경성(京城)으로 이전한 후로는 폐가파옥(廢家破屋)이 연년(年年)히 증가하여 지방이 쇠퇴하여짐을 우려하고 발전책(發展策)을 연구하였으나 장래 산간촌락(山間村落)으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적당한 대책이 없어 고심하였다.
당지의 벽제관은 역사가 깊은 고적이오 또한 문록역 고전쟁지(古戰爭地)이므로 이를 보존에 주력하여 각 지방에 선전(宣傳)하여 10여 성상(星霜)을 두고 당국에 교섭한 결과 재작춘(再昨春)에 기부인가(寄附認可)를 받는 동시에 당국 원조와 동지의 찬조를 얻어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조직하고 내선만(內鮮滿) 각지를 통하여 기부금모집에 노력한 결과 9천여 원(圓, 엔)의 거액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불행히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이어서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속출(續出)되어 국내는 전시상태를 이루었으니 계획하였던 사업도 지연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래(以來) 국제관계가 점차로 진압(鎭壓)됨을 따라 금춘(今春)에 공사가 착수하여 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근만원(近萬圓)의 공비(工費)로 건설된 기념비는 웅장하게도 벽제관 후산상(碧蹄館 後山上)에 돌립(突立)하여 벽제의 면목을 일신케 되었으며 벽제관공원(碧蹄館公園)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일본인 사에키 토루는 1911년 이후 고양우편소장을 거쳐 벽제우편소장으로 장기 재직하면서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이곳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다시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꾸려 1931년 이래 모금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9천 원의 기부금에다 당국의 보조금 1천 원을 더하여 1933년 봄에 이르러 마침내 기념비의 제작에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벽제관전적기념비의 건립 제원(諸元)에 대해서는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제12집 제9호(1933년 9월)에 수록된 「벽제관전적기념비 설계개요(設計槪要)」라는 자료에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에서 제작 발행한 ‘벽제관전적기념비’의 모습이다. 벽제관 후면 언덕 위에 세워진 이 기념비의 전면에 보이는 글씨는 중추원촉탁 김돈희(中樞院囑託 金敦熙)가 썼으며, 그 아래쪽에 ‘조혼(弔魂)’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벽제관 건물과 벽제관전적기념비를 도안(圖案)에 담은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의 모습이다. 1934년 1월 20일부터 벽제우편소를 통해 사용하는 우편물에 적용되는 일종의 기념스탬프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조선체신사업연혁사>, 1938)

 

[총고(總高)] 38척(尺) 2촌(寸), 비(碑)의 높이 33척 3촌, 하부(下部) 크기 5척 2촌각(寸角), 상부(上部) 크기 2척 7촌각
[기단(基壇)]은 원형(圓形)으로 높이 2척 9촌, 외경(外徑) 40척, 내경(內徑) 36척, 삼방(三方, 세 방향)에 폭(幅) 8척의 계단(階段)을 두고, 계단 좌우에 길이 7척 폭 4척의 장원형(長圓形)의 수석(袖石, 소맷돌)을 붙임. 탑신(塔身)과 기단(基壇)은 둘 다 전부 화강석으로 만듬.
[탑신(塔身)] 앞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 아래에 조혼(弔魂)이라 새기고, 뒤에는 건설유래기(建設由來記)를 새김.
[기단(基壇)] 상(床)은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중앙 원형을 따라서 배수구(排水溝)를 두며, 사방(四方)으로 방사선상(放射線狀)의 토관(土管)으로 배수시키도록 사리(砂利, 자갈)를 까는 것으로 함.
[기공(起工)] 소화 8년(1933년) 4월 5일
[준공(竣工)] 소화 8년(1933년) 7월 5일
[제막식(除幕式)] 소화 8년 9월 9일
[공비(工費)] 4,165원(圓)
[양식(樣式)] 근대식(近代式)
[설계(設計)] 조선총독관방 회계과(朝鮮總督官房 會計課)
[시공사(施工者)] 경성미술품제작소(京城美術品製作所)

 

이에 따라 1933년 9월 9일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으며, 당시의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가 몸소 이 행사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남겼다.

 

…… 방금(方今) 내외(內外)의 정세(情勢)는 더욱 난국(難局)에 향(嚮)하여 동아(東亞)는 드디어 다사(多事)코자 하여 국민(國民)의 왕성(旺盛)한 사기(士氣)와 열렬(熱烈)한 건투갱진(健鬪更進)하여 아세아민족(亞細亞民族)의 각성(覺醒)을 요(要)함이 익공(益功)한 추(秋)에 당(當)하여 여사(如斯)히 왕사(往事)를 추회(追懷)하여 미래(未來)에 선처(善處)한 도표(道標)가 될 만한 의의(意義) 있는 시설(施設)의 실현(實現)은 정신(精神)의 작흥(作興), 극동민족(極東民族)의 융합(融合)에 선보(禪補)됨이 자못 대(大)할 줄로 신(信)한다.

 

요약하자면 바야흐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가 진행되는 이때에 옛 벽제관 전투를 기리는 시설물의 등장은 그 자체가 미래의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라는 언급인 셈이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다시 극동민족의 융합을 이끌어내는 승전의 주체가 되리라는 것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벽제관 일대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여긴 탓인지 일본군대의 사기를 앙양하고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공간으로 종종 사용된 흔적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33년 10월에는 때를 맞춘 듯이 용산주둔 일본군 보병 제78연대가 벽제관 일대에서 추계대훈련을 실시한 적이 있었고,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1938년 12월에는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 생도 200명이 벽제관 마을에서 견학차 하룻밤을 머물렀던 사실도 드러난다.
그리고 일제패망기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943년 10월에는 벽제관전투 350년이 되는 해라고하여 당시 전몰자에 대한 추조제(追弔祭)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벽제관전적기념비가 해방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어 사라진 것인지는 분명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아일보> 1950년 1월 22일자에 게재된 김진구(金振九)의 연재기고문 「국치비존폐(國恥碑存廢)의 시비(是非) 하(下)」를 보면, “…… 구랍 29일 회견할 때에 구 경기도지사(具 京畿道知事)는 희망적으로 표명하였다. 일인 소행인 벽제관(碧蹄館)의 전적비(戰蹟碑)와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장난인 인왕산맥(仁旺山脈)의 암석각자(岩石刻字)만은 제거하고 싶다고 ……” 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으로 보면 1950년을 넘어가는 시점까지도 벽제관 전적기념비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8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사방공사 관련 ‘치산치수비’의 제막식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분명 벽제관 앞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대개 벽제관이라고 하면 이 전적기념비의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 말고도 별스러운 기념물이 하나 더 있었다. 1940년 6월 24일에 제막된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6년 계속사업으로 고양리(高陽里) 주변 3개리에 걸쳐 사방사업(砂防事業)을 실시한 결과 산림녹화를 이룩한 것을 기리고자 일제가 이에 대한 기념물로 조성한 것이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4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 따르면 분명히 벽제관 앞에다 이것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 역시 해방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혹여 이 근처에 매몰 처리된 것이라면 언젠가는 홀연히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서 이것의 정체가 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 달갑지 않게 일제강점기의 해묵은 기록을 다시 뒤져봐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수, 2020/08/2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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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월혁명 60주년을 맞아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의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좌는 해방 이후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문화예술인들이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켜 혁명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강좌는 9월 5일에서 9월 2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 수강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방침에 따라 온라인 수강으로 변경되었다. 실제 강의를 촬영한 뒤 영상 편집을 마친 결과물을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게 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문화예술계의 대응-한국문학에서 본 4·19혁명>의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해방 전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함께 혁명문학 소개를 통해서 세계혁명문학의 특징과 문학에서의 4월혁명의 성과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껍데기는 가라! 시인의 절규-4·19혁명과 한국문학>은 한양대학교 유성호 교수가 강의하였다. 이 강의를 통해서 신동엽, 김수영 등의 시인들의 작품에 4월혁명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3강 <혁명의 기록-사월의 노래>는 성공회대학교 이준희 교수가, 4강 <잘 돼 갑니다-우상의 시대>는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 소장이 맡았다. 대중문화 속에 4월혁명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이 외에도 5강 서울대학교 방민호 교수의 <피의 행진-대열 속에서>, 6강 숙명여자대학교 권성우 교수의 <성찰, 자유, 배신의 미학-4·19가 문학에 미친 영향과 파장> 강의도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다.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의 홈페이지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의 홈페이지에서 2020년 10월 18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양질
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목, 2020/09/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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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학교현장을 다시 떠나며

이민우 운영위원장

 

1981년 5월 21일 오후 8시경 인천제일교회에서 한완상 교수의 강연회가 끝나고 청년학생 5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광주민중항쟁 진실규명하라’ 외치며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인천 인성여고 교사이며 인천기독청년협의회 회장이었다. 1981년 5월 18일에 이미 5.18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전두환정권의 사죄 등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 때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인천 중부경찰서에 잡혀갔다. 당시 동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광야서점에 내 이름 앞으로 와 있던 유인물 300여 장의 출처를 대라며 경찰은 같이 연행되었던 다른 후배들과 나를 엄청 두들겨 고문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결국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만기 출소하고 인성여고에서 해직되어 교단을 떠났다. 내가 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때에 나중에 출소한 후에 알았지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학생은 학교 교무실의 내 자리를 지키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참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당시 탄압받던 민주노조였던 콘트롤 데이터 노동조합 탄압저지대책위 간사로 또 원풍모방대책위 간사로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결국 생산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직접 함께 투쟁하자고 하여 가방공장에서, 트랜스 공장에서 1년여를 일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들어가 10년을 노동현장에 대한 상담과 투쟁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였다. 1980년대 노동현장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도 그 한복판에서 3개월여를 집에도 못가고 치열하게 현장과 함께하였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이 변혁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으로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인천에 선인학원 재단이 있었다. 당시 부패사학의 대명사였다. 이 재단을 실제로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그 유명한 백인엽이었다. 조그만 사립재단을 인수하여 선인재단으로 바꾸고 그 산하에 유치원 1곳, 초등학교 1곳, 중고등학교 10곳, 전문대학 1곳, 대학교 1곳 도합 14개의 학교를 거느린 거대 사학재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아 그야말로 사학재벌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여 인천교육계의 암덩어리가 되었다. 졸업장을 팔아먹고, 그야말로 학교 부지를 헐값에 사기 위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데도 학생의 교육환경은 최악으로 9층 건물에 화장실은 1층에 달랑 한 개뿐이었다.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의 교육환경에 학생들을 수용하고 학생들에게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교사를 옛날의 하인을 부리 듯 하니 최악의 교육조건에 내몰린 학생들과 교사, 교수 들이 학원민주화를 외치며, 학원 부패척결을 외치며 들고 일어나자 지역사회에서 선인학원 정상화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의 싸움을 지원하였다. 나도 여기에 함께하여 결국에는 선인학원이 해체되어 14개의 학교가 공립화되고 인천대학교는 부패사학의 대학에서 국립대학교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천대학교의 정상화를 위하여 나는 이때에 교직원으로 들어가 5년여를 일하고 1999년 김대중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교사 복직 때에 마지막으로 복직하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을 학교현장에서 평교사로 복무하고 정년을 맞이하여 다시 학교현장을 떠나게 되니 참으로 인생은 길고도 짧은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 몇 권 쓸 정도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간다. 정년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니 참으로 사연과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한 삶이어서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앞으로 우리 민족적 과제인 평화와 통일, 아직도 미완인 친일 청산을 위해 씨름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금, 2020/09/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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