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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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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익명 (미확인) | 목, 2017/11/16- 16:09

정세훈 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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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독재와 억압, 불의와 부정의 토대인 친일을 청산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70년 넘게 채워진 질곡의 사슬을 풀고 민주와 정의, 화합과 평등이 넘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만들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친미독재,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군사독재, 그리고 이들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권력을 이어받고자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민분열, 친일반역, 국정농단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의 비열한 통치와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체제가 반복되어 온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들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친일, 그 뿌리 깊은 잔재는 오늘날 정치, 사회, 학문, 자본, 언론, 예술 등 모든 곳곳, 요소요소에 악의 고리로 남아있다.
1919년 3·1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친일세력의 근원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최후의 정점에 이승만을 몰아낸 민주혁명의 힘이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보다 일제에 빌붙어 수족행위를 하고 나팔수 노릇을 한 친일파가 더욱 악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일파들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들이고 살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학도병,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의 선동대가 되는 온갖 악행을 도맡아 저질렀다.
1948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구체적인 죄목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에 조인하거나 모의한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간부,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독립운동 방해단체 간부, 군경찰 간부, 군수공업 경영자, 관리 중 악질적 죄질이 현저한 자, 도(道)나 부(府)의 자문기관 또는 의결기관 의원 중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 종교 사회 문화 경제 등 각 부문에서 반민족적 행위자,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 위해(危害)를 가한 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급 이상 관공리, 헌병, 경찰, 헌병보, 고등경찰 등이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방해로 인하여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친일파는 단 한 명도 단죄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은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욱 승승장구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그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했다.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친일파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후광을 입은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현재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문단을 예로 들어보자. ????친일인명사전????(2009)에 오른 친일문인은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용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등 무려 40인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미당 서정주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문인이다. 서정주야말로 친일에서부터 친독재까지 철저한 권력의 시녀였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문단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은’ 그는 대학강단에서, 문단에서,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또 그 제자들은 그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시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던 서정주는 죽어서도 그 권력을 문단의 후학들에게 그대로 넘겼다.
반민족적, 반문학적 친일의 과오가 명백한 그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이 만들어지고, 바로 그 문학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런 기이함은 미당 서정주를 ‘국민시인’, ‘민족시인’으로 칭송한다. 심지어는 올해 여름에 발간한 미당전집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은 미당을 ‘민중시인’이라고까지 말했다. 북한의 3대 세습 정권에서도 있을 수 없는 망언이었다.
미당은 1942년 7월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문학 작품을 썼다. 이미 여러 경로로 밝혀진 바와 같이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시가????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들을 양산했다.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징병의 신성화와 정당화는 물론 학병지원을 권유했으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적극 동조했다.

미당이 남긴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인지 그 평가는 차치하고, 그는 민족의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를 문학상 등으로 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지어낸 천여 편의 시들도 ‘겨레의 말’이 아니라 일종의 기가 막힌 언어도단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류의 도덕적 보편성과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미당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인간 본연의 품성이 그릇된 자였다. 그릇됨을 덮고 가치관마저 전도시키는 그의 문학은 우리 모두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원숭이가 손목이 잘려도 바나나를 놓지 않듯, 권력도 움켜쥔 힘을 쉽사리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반성과 성찰을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사회권력과 관료권력, 종교권력과 문화권력 등이 그러하듯이 문학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물러났어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승계되고 이어가고 있다. 지배권력은 다른 피지배세력이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기 전까지 유구한 것이다.
미당이 생전에 지닌 문단권력은 현재 그의 추종세력들에게 전이되었다. 추종자들에게는 미당의 매국적인 친일문학 행위도, 군부독재를 찬양한 행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미당문학상으로 미화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 그의 행적을 문인이 아니고 정치인에 대입시켜보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존재다. 그럼에도 미당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무리들이 미당을 기리는 것은 미당이 건재해야만 자신들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당문학상에 대한 비판 또는 폐지의 주장은 고사하고 그 상을 심사하고 수상하는 사람들이 우선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에게도 있을 터이다.
동서고금의 예술을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결합한 예술은 차후에 거의 모든 평가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대다수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예술 등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를 넘겨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친일세력들의 영향력과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독립은 했으나 아직도 정신적 독립은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결과다.
완전한 독립, 그리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이 득실거리는 시대, 누군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의의 역사를 모른 체 하면 대대손손 청사에 물려줄 정의의 역사는 사라진다.

편집자주 시인 정세훈은 1955년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품에는 시집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등이 있고 현재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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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이해를 돕는 논문과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이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이 부교재가 학교 현장에서 지역의 일제잔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장을 만들어 내고, 친일 청산의 대안과 실천을 마련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 소재 1100여 곳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었고, 전권 PDF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월, 2021/01/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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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
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1/01/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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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설립 30주년 기념식

학예실 김슬기 연구원

1991년 2월 27일 문을 연 민족문제연구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월 27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코로나로 회원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대신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된 이 행사에는 동시 접속자 300여 명이 온라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당일 2천여 명이 행사영상을 감상하였다.
먼저 회원들과 각계 인사들의 30주년 축하인사를 담은 영상을 감상한 후 광주지부 회원이자 작가인 주홍 씨가 샌드아트로 그린 연구소 30년사 영상으로 기념식의 문을 열었다. 함세웅 이사장은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이듯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가 든든히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과 뿌리가 되어주신 분들은 후원회원 분들”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어 김영환 대외협력실장과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의 사회로 지난 30년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를 진행했다. 마지막 순위를 발표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회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식 5가지
를 소개하는 ‘당신이 몰랐던 민족문제연구소’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 모두가 예상했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1위로 선정되고 당시 영상이 재생되자 모두에게 그때의 감격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음악 교사이자 <항일음악 330곡집>을 집필한 고 노동은 선생의 자제인 노관우 회원의 밴드는 축하공연으로 항일음악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 등을 선보였다. 특히 연구소 30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편곡·헌정한 ‘장타령’에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가사 ‘삼십년을 한결같이, 삼백년도 끄떡없게, 삼천리에 퍼져가세’가 울려 퍼지자 현장에 있던 이들의 함박웃음을 자아냈다. 뒤이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30년 동안 함께 손잡아 주었던 후원회원들의 일상을 둘러볼 수 있는 ‘회원극장’을 상영하였다. 올해로 28년째 꾸준히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유동성 회원, 백년전쟁을 통해 가입 후 명실상부 연구소 간식보급에 힘써온 김진주 회원, 참치횟집을 운영하며 손님들에게 연구소와 연구소의 활동을 알리는 박점구 회원의 일상이 직접 만날 수 없는 이 시기에 더욱 가깝고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끝으로 박수현 사무처장이 앞으로 진행될 연구소 30주년 기념사업을 발표하였고, 임헌영 소장 및 상근자 전원의 감사인사로 행사를 마쳤다. 임헌영 소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평화의 주춧돌이 되어 영구히 남아 불행했던 한세기를 증언하고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많은 시민들이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30주년 기 념식 영상은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과 유튜브 채널에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목, 2021/03/2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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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68]

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장기수 전담감옥이었던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의 건립 내력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마포 공덕리) 앞에 모여든 인파의 모습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 출옥하는 16인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일제가 이른바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이라고 불렀던 거족적인 삼일만세운동의 여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인 1921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 이른 아침부터 4, 5백 명이 훨씬 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삐 아현(阿峴, 애오개)을 넘기 시작했다. 누구는 전차로, 누구는 자동차로, 누구는 직접 걸어서 각기 도착한 곳은 먼저 온 이들로 꽤나 혼잡해진 어느 감옥의 문 앞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12월 23일자에 수록된 최린, 권동진, 한용운, 오세창, 이종일, 김창준, 함태영 등 7인의 가출옥 관련기사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사건 관련 48인에 포함되어 최초에는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다가 확정판결 이후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된 상태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든 까닭은 바로 ‘독립선언사건(獨立宣言事件)’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출옥(滿期出獄)을 하는 16명의 인사들을 맞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광경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악수(握手)하고 감루(感淚)만 종횡(縱橫), 경성감옥 문밖에는 5, 6백 명의 고구 친척이 산 같이 모였다, 작조(昨朝) 감옥(監獄)에서 출감(出監)된 17인(人)」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昨) 4일 오전 9시로부터 아현리(阿峴里) 경성감옥(京城監獄) 앞에는 남녀 합하여 4, 5백 명의 인원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전차길 옆으로부터 감옥 문 앞까지 사람이 피하여 다닐 수 없이 섞기여 섰고 자동차 7, 8대는 감옥 들어가는 어구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 사람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그리웠던 사람을 일 분 일 초라도 얼른 좀 보았으면은 하는 빛이 나타난다. 이 일은 다른 일이 아니라 이미 본지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고 장구한 사이에 춥고 더운 것을 참아가면서 또는 엄밀한 옥칙을 지키여 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살이를 하다가 금월 3일까지가 만기되어 작 4일에 출옥되는 날이었는데 오전 9시 반이 되매 출옥하는 분들의 가족은 의복일습을 가지고 들어와서 감옥에 드리매 제1회로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이필주(李弼柱), 김원벽(金元壁) 4인을 감방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의복을 바꾸어 입히는 모양이더니 …… 그 뒤으로 제2회에는 신석구(申錫九), 나용환(羅龍煥),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4인이 나왔고, 제3회로 김완규(金完圭), 최성모(崔聖模), 박준승(朴準承), 홍병기(洪秉箕) 4인이 감방으로부터 함께 나아와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옥문 밖을 나아갔고 제4회로 권병덕(權秉悳),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신홍식(申洪植) 4인이 나왔는데 시원하게 옥문을 벗어져 나오면서도 아직 1년이나 고생살이할 다른 분들을 애처롭게 여기면서 2년 전에 들어갔던 옥문을 다시 아주 나와 버리기는 11시 20분경이었더라.…… 그리고 별항에 보도한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았던 20명 중에 16명은 경성감옥으로부터 출옥되고 유여대(劉如大), 강기덕(康基德), 홍기조(洪基兆) 3인은 수속의 관계로 5일까지가 만기로 되었고 그 외 이종훈(李鍾勳)은 지우금(至于今)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 있었던바 역시 2년이었으므로 작 4일 오전 10시에 만기 출옥되었더라.

 

이들에 이어서 그해 연말에는 권동진(權東鎭), 김창준(金昌俊), 오세창(吳世昌), 이종일(李鍾一), 최린(崔麟), 한용운(韓龍雲), 함태영(咸台永) 등 7인이 가출옥(假出獄)의 형태로 경성감옥에서 풀려났다. 다시 해가 바뀌어 1922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오화영(吳華英)과 이갑성(李甲成), 그리고 이승훈(李昇薰)이 차례대로 만기출옥을 하면서 ‘독립선언사건’과 관련하여 투옥된 인사들은 모두 감옥을 벗어나게 되었다. 삼일만세운동이라고 하면 그 누구라도 퍼뜩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1923년 5월에 서대문형무소로 개칭)’의 존재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여기에 정리된 자료에서도 나타나듯이 독립선언사건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핵심인사들이 막판에 옥고를 치렀던 곳은 바로 경성감옥(京城監獄, 공덕리 105번지; 지금의 서울서부지방법원 구역 일대)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이 맨 처음 투옥되었던 서대문감옥에서 경성감옥 쪽으로 이감(移監)된 것은 결국 최종심이 되고 말았던 경성복심법원의 항소심 선고(1920년 10월 30일)가 이루어지면서 기결수(旣決囚)로 신분이 바뀐 이후의 일로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경성감옥의 편제는 조선총독부령 제11호 「조선총독부 감옥 및 감옥분감의 명칭, 위치(1912년 9월 3일 개정)」에 따라 처음 설치되었으며, 감옥의 소재지는 마포 공덕리였다. 이때 종전에 경성감옥이라고 했던 곳은 이 이름을 물려주고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다. 이보다 앞서 금화산(金華山) 아래 금계동(金鷄洞)에 신축 감옥이 들어선 것은 1908년 10월 19일의 일이었으니, 불과 4년 사이에 2개의 감옥이 잇달아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렇다면 직선거리로 놓고 보더라도 3킬로미터 남짓에 불과한 구역 안에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 이렇게 둘씩이나 만들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명시적으로 그 연유를 풀어놓은 자료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그 시절의 신문자료를 죽 훑어보았더니 독립문 밖의 새 감옥이 준공 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이곳이 협착(狹窄)하여 죄수를 수용하기 곤란하므로 다시 증축(增築)하기를 의논중이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27일자(국문판)에서는 남부 둔지미(南部 屯芝味)가 새로 짓는 감옥서의 후보지로 거론된 바 있고, 그 직후에 다시 용산 청파 4계(靑坡四契)와 청파 피병원(避病院) 부근 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효창원(孝昌園)의 일부에다 공역비 3만 원을 들여 1천 명을 수용할 큰 감옥을 건설한다는 기사가 잇달아 게재된 사실이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 (1935)에 수록된 재감인원(在監人員) 추이에 관한 도표자료이다. 경술국치 이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특히,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는 이 수치가 15,000명 수준으로 크게 치솟아 오른 것을 확인할수 있다.

이러한 논의가 거듭된 끝에 1911년 4월에 이르러 신축감옥의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곳은 마포공덕리에 자리한 탁지부 양조소(度支部 釀造所, 아현리 451번지)의 건너편 지역이었다. 이곳의 위치는 애오개 너머 마포나루로 가는 길목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일제가 부여한 지번상으로는 ‘경성부 용산면 공덕리 105번지(총면적 16,817평)’에 해당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1년 9월 2일자에 수록된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 제하의 기사는 신축감옥에 대한 착공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덕리(孔德里)에 신설(新設)하는 경성감옥공사(京城監獄工事)는 작일(昨日) 총독부 영선과(總督府 營繕課)에서 지명입찰(指名入札)을 행(行)한 결과(結果) 약(約) 20만 원(圓)의 가격(價格)으로 마츠모토구미(松本組)에 낙찰(落札)이 되었는데 부지(敷地)는 전부(全部) 1만 6천여 평(評)이라. 선(先)히 지균(地均)을 행(行)하고 갱(更)히 감방(監房), 기타 부속가옥(附屬家屋)을 건축할 터인데 본(本) 감옥신축에 관하여는 내지(內地)의 신식감옥(新式監獄)의 건조물(建造物)을 시찰(視察)하고 각종(各種)으로 연구중(硏究中)인즉 조선감옥(朝鮮監獄)의 모범(模範)으로 건축할 터이오, 공사(工事)는 직(直)히 착수한다는데 46년(즉, 1913년) 상반기(上半期)에 준공(竣工)할 예정이라더라.

 

그 이후에 일부 설계변경이 있었고 이에 따라 당초의 예정보다는 공사일정이 크게 앞당겨질 것으로 보였으나, 막바지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912년 12월 16일에 느닷없이 발생한 화재로 옥사(獄舍) 1동(棟)이 소실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서대문감옥 쪽에서 죄수들이 옮겨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사인부 2백여 명만이 긴급하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불 탄 건물은 그 이듬해에 재건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당시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을 통틀어 어떠한 수형자를 어느 곳에 수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그나마 대략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총독부 사법부 장관의 통첩(通牒)으로 고시되는 「감옥수용구분(監獄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件)」 정도이다. 여기에는 우선 “경성지방법원과 관할 지청(인천, 춘천, 원주는 별도)의 판결을 받은 수형자는 ‘서대문감옥’에 수용되고, 이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외국인(중국인은 제외) 남자는 ‘경성감옥 영등포분감(永登浦分監)’에 수용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경성감옥 자체에 대해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명단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을 뿐더러 아무런 관련 규정이 적시된 것이 없다.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1929)에 나타난 경성형무소(공덕리 105번지)의 위치이다. 이곳은 애오개와 만리재 쪽에서 각각 넘어온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가까우며, 마포가도의 길 건너편에는 총독부 양조시험소(釀造試驗所, 지금의 마포경찰서 자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래쪽으로 효창원과도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은행에서 펴낸  <픽토리얼 초센 앤 만츄리아(Pictorial Chosen and Manchuria)> (1919)에 수록된 경성감옥의 전경 사진이다. 이곳의 편제는 1912년 9월에 설정되었지만, 실제 감옥 시설이 완성된 것은 1913년으로 넘어간 시점이었다. 이 사진은 건립 초기에 촬영된 탓인지 외곽에 둘러진 담장의 모습이 벽돌 재질이 아닌 목책(木柵)인 것이 눈에 띈다.

경성감옥의 존재는 경성형무소로 개칭된 이후의 시점에 와서야 관련 규정상으로 처음 명시적으로 등장하는데, 1923년 12월 8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감옥수용구분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24년 1월 1일 시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경성형무소의 관할 판결청으로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이 명기되었고, 특히 별표(別標)의 말미에 따로 “본 수용구분중 무기(無期) 및 형기(刑期) 10년을 넘는 남자 수형자에 대해서는 내지인(內地人)인 때는 영등포형무소에, 기타의 것이 되는 때는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경성형무소에, 대구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에 수용할 자는 대전형무소에 각 이를 집금(集禁)한다” 는 구절이 첨부되었다.
이 규정으로 본다면 경성형무소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과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 관내에서 무기 및 형기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장기수(長期囚), 그것도 조선인 남자 수형자만을 전담하여 가두는 공간으로 정의되는 셈이었다. 그 이후 이러한 구분에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40년 2월 19일에 총독부 법무국장의 통첩으로 고시된 「형무소수용구분(刑務所收容區分)의 변경에 관한 건(개정, 1940년 3월 1일 시행)」에 수록된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종래 ‘경성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 각 형무소 및 지소’의 장기수형자(長期受刑者)는 집금형무소인 ‘경성형무소’에 수용한다는 구절을 바꿔 그 대상지역을 훨씬 더 확대하도록 결정한 사항이 표시되어 있다. 이를 테면 이 시기 이후로는 ‘조선 전체의 각 형무소와 지소’의 장기수형자를 초범(初犯), 누범(累犯), 사상범(思想犯)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각각 경성형무소, 대전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일괄 수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2월 19일자에 게재된 법무국장 통첩 「형무소수용구분에 관한 건(개정)」을 보면 종래 경성복심법원 및 평양복심법원 관내에 속하는 장기수들을 수용하던 경성형무소의 기능이 폐지되고, 이때부터 그 대상이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어 무기 또는 형기 10년 이상의 남자 수형자 가운데 초범(初犯)을 집합 수용하는 집금형무소(集禁刑務所)로 전환된 사실이 드러나 있다.

경성감옥에 대한 얘기를 하노라면, 이곳에 갇힌 수형자들의 노역장으로 사용된 ‘마포연와공장 (麻浦煉瓦工場, 도화동 7번지)’의 존재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곳은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활발하게 건립이 추진되던 각종 관아청사(官衙廳舍)와 관사(官舍)의 건립공사에 소요되는 건축자재를 저렴하게 조달하기 위해 1906년 10월에 영등포의 토관공장과 짝을 이뤄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에 부속되어 만들어진 연와제조소(煉瓦製造所)에 뿌리를 두었다. 이것들은 1907년 4월과 7월에 잇달아 직영(直營)으로 편입되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벽돌은 대한의원 본관, 탁지부 청사, 평리원 청사, 공업전습소 등의 신축공사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에는 총독부의 직할로 전환되었다가 1913년 4월에 이르러 이곳의 업무가 일체 경성감옥의 관장(管掌)으로 넘겨지면서 감옥의 작업장으로 탈바꿈하였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는 진광렬(秦光烈)이라는 사람이 기고한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桃花洞 煉瓦工場)」 제하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붉은 옷 입은 직공’이라고 하는 것은 기결수 수형자(旣決囚受刑者)가 착용하는 자색(赭色, 검붉은 황토색)의 죄수복을 가리킨다.

 

<동아일보> 1924년 8월 8일자에 수록된 연재기고문 「(내동리 명물) 도화동 연와공장」 관련 기사이다. 이곳은 1913년 4월 이후 경성형무소의 노역시설로 사용되었으며, 이 글에 나오는 ‘붉은 옷’이라는 것은 기결수들이 입는 죄수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 서울 안에 양제집이 겅성드뭇한 오늘날 벽돌 만드는 공장이 없어 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새문 밖 도화동에 연와공장이 생겼습니다.
◇ 도화(桃花)에는 흰 꽃 피는 벽도(碧桃)도 있건마는 보통 도화라 하면 붉은 빛을 생각하고 벽돌에도 여러 가지 빛이 있건마는 보통 벽돌이라 하면 붉은 빛으로 여깁니다. 벽돌 만드는 공장이 도화동에 앉은 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 이 도화동 연와공장에서 노동하는 직공(職工)들은 다른 공장 직공과 다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입니다. 붉은 옷 입은 직공들이 붉은 벽돌 만드는 것도 역시 빛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붉은 옷 입은 직공은 두 사람이 한데 쇠사슬로 매어 다니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할 때는 쇠사슬이 풀립니다. 그러나 총 든 사람이 망대 위에 서고 칼 찬 사람이 뒤를 따른답니다. 직공 중에는 따라지신세의 직공들입니다. 이 직공 중에는 붉은 염통의 끓는 피를 눈물 삼아 뿌릴 유지한 사람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빛으로 어울린다기가 차마 어려워 그만 두겠습니다.

경성감옥 혹은 경성형무소는 해방 이후에 서울형무소 지소(1945.11.21 개칭)와 마포형무소(1946.3.28 개칭)를 거쳐 마포교도소(1961.12.23 개칭) 시절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 일대를 에워싸고 진행되는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1963년 가을에 이르러 안양교도소의 신축 준공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감에 따라 최종 폐쇄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포형무소의 내력을 뒤지다 보니 조금은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퍼뜩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노덕술(盧德述) 등도 이송(移送)」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담겨있다.

 

<경향신문> 1949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친일부역자 피의자들이 일괄 마포형무소로 이감될 것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반민특위에서는 23일 위원회 결의로서 노덕술(盧德述), 문명기(文明琦), 노기주(魯璣柱), 하판락(河判洛), 이원보(李源甫) 등 5명을 동 특별검찰부로 송청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 특위에서는 종래에는 체포된 반민혐의자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 수감하여 왔었던바 여기에는 미결수도 수용되어 있는 관계로 기밀누설의 염려가 있다 하여 위원회 결의로서 25일부터 일체의 반민혐의자를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로 이감하기로 되었다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독립선언사건의 주역들과 무수한 장기수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옥고를 겪어야 했던 바로 그 공간이 어느덧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의해 체포된 친일파 군상의 집결지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교차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목, 2021/03/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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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김순흥 광주지부장(전 광주대학교 교수)

당신들이 군사독재 밑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압니다.
당신들이 겪고있는 군부의 폭력과 학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내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갑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세계만방의 모든 인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결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나아갑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미얀마 만세 !!!
민주주의 만세 !!!

※ 위 시는 김순흥 광주지부장이 4월 10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광주시민’ 6차 딴봉띠 집회에서 직접 영어로 전달한 메시지다.

목, 2021/04/2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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