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원조 적폐, 박정희 동상 설치 반대 청원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민족문제연구소서 발간

▲ 전범이 된 조선청년’ 저자 이학래 씨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후 이른바 ‘B·C급 전범’으로 전락했던 이학래(92) 씨의 회고록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신간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은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조선인 청년이 어떻게 이국땅에서 일본군의 말단 포로감시원이 됐고, ‘전범’의 멍에를 지게 됐는지를 구술한다.
17살 청년의 인생은 3천 명의 포로 감시원을 2년 계약으로 모집한다는 일제 광고를 접하면서 일순간에 뒤바뀐다.
면사무소에서도 그에게 시험을 볼 것을 권했는데, 당시 관공서의 이야기를 거절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사실은 강제징용”이었다는 게 이씨 주장이다.
2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은 뒤 도착한 곳은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이었다.
포로 감시와 작업 인원 모집 등을 맡은 이씨는 허기져 몰려든 포로들에게 화를 내거나 규칙을 위반한 이들의 뺨을 때리는 등 별다른 인식 없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인정머리 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하고는 하지만, 당시의 일본군은 포로를 인간으로 취급한 적이 없었어요. 일본군에게 포로는 무시해도 좋은 존재였어요.”
일제 패망 직후 이씨와 동료들은 자기 변론도 허용되지 않는 전범 재판을 받으며 변호사의 민족적 편견 등으로 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책 후반부는 사형수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씨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우고, 또 스스로 반성했던 과정을 펼쳐 보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젊은이는 공부 모임 ‘평화그룹’ 참여, 중앙노동학원 입학 등을 하면서 왜 식민 피해자인 자신이 전범이 되었는지를 공부해 나간다.
이씨와 조선인 전범 동료는 1955년 4월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에 지속해서 국가 보상과 유골 반환을 요구했다.
1960년대 초 실현될 듯하던 국가 보상은 1964년 한일협정 타결로 없던 일이 됐다.
일본 정부는 보상은 한국 정부의 몫이라며 책임을 외면했고, 대일 민간 청구권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으로 한정되면서 조선인 전범의 사형 같은 경우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씨는 “양국 정치의 사각지대, 전전·전후의 사각지대에 우리 문제는 함몰되고 말았다. 한일 어느 나라 정부와 교섭해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당시 답답했던 마음을 토로했다.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입법화 운동 등을 펼쳐 온 이씨는 1997년부터 전 연합국 포로와 가족들을 초대해 사죄하면서도 조선인 전범들은 못 본 척하는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면모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포로에 대해서 정중한 사과를 하는 한편, 포로 관리를 시키고 책임을 떠안긴 우리는 왜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습니다. 우리 문제는 한국과 일본 정부간 교섭대상에서도 제외됐습니다. 실로 허무하고 비통한 심경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전범이 돼 일본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간 동료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주는 것이 살아남은 자신의 책무라는 것이다.
‘동진회’가 수십 년의 활동을 이어오는 동안 생활고와 우울증, 친일파라는 손가락질 등으로 조선인 전범 자신이나 그 가족이 비극적 선택을 한 사례들은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 씨는 한국판 발간 후기에서 “반강제적이었다고 해도 동시대에 독립 투쟁을 한 분들도 있었기에 부채감은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라면서 “한국 정부가 2006년 일본 강점기하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해 명예 회복해준 점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312쪽. 1만5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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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연합뉴스
☞기사원문: “전범 돼 죽어간 동료들 원한 푸는 것이 제 책무”
∷ 전교조 소속 교사 윤희찬 회원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문 : 1995년 3월에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답 : 평소 친일문제에 관심을 갔고 있었는데 마침 1995년 3·1절 무렵 경희대학교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당시 이름 반민족문제연구소)에 직접 방문하여 회원 가입을 하였습니다. 1995년이 한일협정 체결 30주년이 되는 해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재평가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었습니다. 연구소도 그때 ‘친일협정, 30년 동안의 굴욕’이라는 학술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문 : 할아버지께서 3·1운동 독립유공자라고 알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후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답 : 할아버지 함자가 윤영주(1893~1988)입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인데 3·1운동 당시 26세의 나이로 대구에 있는 동산 기독교성경학교에 재학중이었습니다. 3월 8일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구 시위에 참석한 후 고향인 의성군 금성면 대리동으로 귀향했습니다. 대리동 기독교회 박낙현 목사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어요. 그리고는 태극기 100여 장과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비밀리에 제작했습니다. 의성군 장날인 3월 18일, 장터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지요. 보안법 위반으로 1년 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출옥 후 할아버지는 목사가 되어 목회활동을 하셨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혀 일경에게 항상 감시를 받았습니다. 1988년 96세의 연세로 부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92년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가정형편이 어려운데다 감시받는 생활이 싫어 만주에 건너가 지내시다 해방 후 귀향했습니다. 의성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좌익활동을 하셨습니다. 1949년 보도연맹으로 대한민국 군경이 보도연맹관련자들 학살할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부산으로 도망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학살의 공포를 한평생 트라우마로 안고 사셨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고 잠들었다가도 한밤중에 갑자기 깨어나 두려움에 떨기도 하셨습니다.
문 : 지난 9월 21일 대법원으로부터 복직 판결을 받으셨는데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답 : 2001년 전교조 서울지부 교권국장으로 있을 때 상문고 비리와 관련해 재단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2001년 7월 교육청 앞에서 상문고와 관련해 민주 관선 이사 선정과 파견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경찰이 저를 비롯해 전교조 서울시지부장 김재석 용산고 교사(용산고)와 이을재 교사(한천중), 우삼동 교사(신정여상)를 구속 기소했습니다. 2004년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2005년 광복절 때 특별사면을 받아 복권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택 교육감 시절이어서 복직이 안 되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두 번째 구속을 당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로 그동안 복직 발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5년 조희연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된 후, 복직 신청을 하여 서울 숭곡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한두 달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직권 취소로 말미암아 다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2016년 교육부를 상대로 한 임용취소처분 취소소송에서 두 차례 승소했고 이번에 대법원에서의 확정 판결로 마침내 복직하게 된 것입니다.
문 : 17년 만에 복직하시는데 감회가 어떠신지요.
답 : 물론 기쁩니다. 서른 살 무렵인 1985년에 서울 고려대 사대부고 국어교사로 부임한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제가 환갑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정년이 1년 5개월쯤 남았습니다. 2015년에 잠깐 재직했던 숭곡중학교로 갈 것 같습니다. 비록 남은 기간이 아주 짧지만 비정상적이고 특권층만을 위한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문 : 전교조 가입은 언제 하셨고 어떤 부문에서 중점적으로 활동하셨습니까?
답 : 1989년 전교조 출범 때부터 활동한 창립멤버입니다.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교권부장, 조직부장, 부지부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제가 전교조에 들어와서 주안점을 둔 것은 사학비리 척결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학비리재단은 대체로 일제시대 친일파와 닿아 있습니다. 김달하라고 아시죠. 북경에서 밀정짓을 하다가 다물단에 의해 처단된 사람 말입니다. 김달하는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창숙 선생에게 총독부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김달하의 사위인 조 아무개(초대 교장을 겸함)와 친일교육자 김활란이 공동 설립자로 있었던 동구학원이 대표적인 세습비리사학입니다. 조 아무개의 아들이 현재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2008년 11월 동구여상(현재의 동구마케팅고)에서는 교육청 예산으로 200여 권의 도서를 구입하기로 했는데, 학교측이 국어·역사 교사들이 신청한 <친일파 99인>(연구소 기획) 등 3종의 근현대사 관련책에 대한 구입목록을 무단으로 제외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2014년에는 동구마케팅고 이사장과행정실장의 비리 관련 민원을 교육청에 제기한 교사를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전교조는 사학비리를 막기 위해 꾸준히 입법 청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발의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2006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서는 사립학교법이 재단측에 유리하게 개악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자신이 박정희가 불법으로 탈취한 영남대 이사장으로 재직했었으니 가재는 게편이란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문 : 2015년에 잠깐이나마 복직하셨는데 전교조 해직교사에게 특혜를 줬다는 등 종편과 보수언론으
로부터 인신공격을 받지 않으셨나요?
답 : 엄청난 인신공격을 받았지요. 종편과 보수언론에서는 제 과거 발언과 SNS에 올린 글까지 철저히 뒤져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재판정을 만들어야”와 “세월호 범인 박근혜”입니다. 전자는 김정훈 전교조 전 위원장의 징역 1년 반에 집행유예 선고를 내린 사법부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후자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박근혜의 잃어버린 7시간이 없었으면 세월호 최악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음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TV조선, 채널A 등은 북한식 표현이니 하며 저를 친북 용공분자 혹은 파렴치한으로 몰았습니다. 이러한 종편과 보수언론의 여론몰이로 인해 교육부의 임용 취소 결정이 훨씬 앞당겨진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공격의 이면에는 진보 진영의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흠집 내려는 의도도 다분했습니다. 더구나 이 무렵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대통령 명예훼손 사실에 대해 저를 조사하였는데 그후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문 : 요새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의 적폐청산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교육계에서 시급히 청산
해야 할 적폐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시급한 현안은 불공정한 입시제도 개선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동안 교육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욱 더 심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입시사정관제도, 자사고·특목고 활성화 등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악화시킨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교육계 적폐를 바로 잡아 참다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실현해야 합니다.
한편 박근혜 정권하에서 전교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법외노조’가 되었습니다. 전교조의 합법화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행정통보를 취소하면 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해고당한 노조 전임자가 50여 명이나 되는데 이들이 교단에 설 수 있도록 신속한 조치가 취해져야 하겠습니다.
문 : 끝으로 연구소 회원들께 드릴 당부 말씀은?.
답 :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폐해는 일제 교육제도를 답습한 데서 옵니다. 사학 비리가 대표적이죠. 또 자사고다 특목고다 하여 교육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학제가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회원들께서 우리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인간다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성원해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甲乙(갑을)
同人誰甲乙(동인수갑을)
貴賤亦如何(귀천역여하)
旣定因錢貨(기정인전화)
難期止不和(난기지불화)
甲과 乙
같은 사람인데 뉘 甲, 뉘 乙인가
귀함과 천함일랑 또한 어떠한가
돈으로 인하여 이미 정해졌으니
不和를 그침은 기약하기 어렵다.
<時調로 改譯>
甲과 乙 누구인가 貴賤 또한 어떠한가
저 돈 따위로 인하여 이미 정해졌으니
오호라! 不和를 그침 기약하기 어렵다.
*同人: 같은 사람. 바로 그 사람.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여 모인 사람 *甲乙:
甲과 乙을 아울러 이르는 말. 순서나 우열을 나타낼 때, 첫째와 둘째 *貴賤:
부귀(富貴)와 貧賤. 신분이나 일 따위의 귀함과 천함 *旣定: 이미 결정되어
있음 *錢貨: 돈 *不和: 서로 화합하지 못함. 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함.
<2017.7.12, 이우식 지음>

▲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박근혜 퇴진과 적폐청산을 외친 촛불 혁명의 결과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그러니 문재인 정부에는 적폐청산의 의무가 있다. 군도 예외는 아니다. 국방부가 뒤늦게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발포 책임자 조사에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광주학살은 돌발사건이 아니었다. 군은 제주 4·3사건, 6·25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는 다시 제암리 사건, 난징대학살 등 일본군이 저지른 수많은 학살 사건으로도 이어진다.
해방 이후 군을 주도한 것은 친일군인들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역대 육군참모총장은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다. 제주 4·3사건부터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것은 친일군인과 그 후계자들이었다. 그러니 광주학살의 진상 규명은 더 근본적인 적폐청산과 이어져야 한다. 군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일본군 잔재를 지워내고 그 자리에 독립군의 정신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군일로 바꾸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난 8월28일 언급한 것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적혀 있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독립운동의 정점은 무장투쟁이다. 임시정부는 출범 직후인 1920년에 이미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했다. ‘국군’을 창설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오랜 염원은 1940년 9월17일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벌어진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계승한 광복군의 창군으로 결실을 맺었다.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임을 자임했다. 중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있었고 영국군이나 미군과의 합동작전도 펼쳤다. 광복군이 있었기에 임시정부는 일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다. 연합국이 카이로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공인하게 된 배경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대일항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방 이후 국군의 창군은 독립군과 광복군을 잇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친일군인들이 장악한 군은 독립운동을 자신의 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상황에서 1956년에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했다. 육군 제3사단이 휴전선을 돌파해 북진한 1950년 10월1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이 적혀 있다. 북진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 국시다. 이승만식 북진통일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면 당연히 북진을 기념하는 날로서 국군의 날도 헌법정신에 위배된다.
게다가 1950년 10월1일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사단장은 친일군인이던 정일권과 이종찬이었다. 제3사단은 백색테러로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3사단에는 서북청년단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이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제3사단은 백골부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은 친일파와 정치깡패를 권력의 도구로 활용하던 이승만정권다운 일이었다.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역사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독립군의 역사를 국군의 뿌리로 삼아야 하며 그 일환으로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군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법령으로 정해지는 기념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가가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국경일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정해진다. 다른 하나는 정부 부처 차원에서 기념하는 ‘각종 기념일’이다. 각종 기념일은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으로 정해진다. 국군의 날은 각종 기념일에 속한다. 그러니 대통령령만 고치면 국군의 날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군일로 바꾸는 쾌거가 문재인 정부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7-09-04> 한겨레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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