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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드립니다 – 남경필 지사의 조상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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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드립니다 – 남경필 지사의 조상에 대해

익명 (미확인) | 수, 2017/11/15- 10:26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조상이 친일인명사전에 있는 남정철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SNS상에 상당히 많습니다. 더불어 친일경찰 노덕술의 아들이 노재봉 전 국무총리라거나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건희 회장이라는 글들도 있구요. 사실 관계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문의드립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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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7일(목), 감사원 앞
주최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목, 2017/08/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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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_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0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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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제작 등: PD 김세호, 조작가,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역적’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목, 2018/04/0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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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등 반민족·반민족행위자 묘 이장 촉구대회

“반민족주의자 김창룡의 묘를 몰아내자!”
“친일청산하고 민족통일 이뤄내자!”
“국회는 국립묘지법을 신속히 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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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현충원 묘지 현충원 묘지 앞 ⓒ 송혜림

6일 10시, 대전국립묘지 현충교에선 뜨거운 열기를 잊은 듯한 힘찬 구호가 울려퍼졌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이 묻혀진 현충원에 ‘친일파’라니, 과연 무슨 일일까.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된 김창룡과 5.18 민주항쟁을 진압한 책임자들이 순국열사들과 함께 현충원에 묻혀있다고 문제를 제기 했다.

이번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등 반민족 반민주행위자 묘 이장 촉구대회’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평화재향군인회, 대전충청 5.18민주유공자회 등 시민단체 주최로 현충교에서 진행되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묵념하기 위해 찾는 현충원, 잘못된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날 행사는 가두 판넬 전시와 홍보물 배포, 성명서 낭독과 파묘퍼포먼스 등으로 진행되었다.

현충원의 장군묘역은 반민족 사범들의 안식처인가” 울분의 성명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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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교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든 모습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가 열린 와중,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 임재근

오전 9시, 가두 판넬 전시 및 홍보물 배포로 시작한 행사는 본격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를 열었다.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의 대회사와 촉구 발언이 이어지고, 대회 참가자들의 성명서 낭독이 시작되었다. 아래는 성명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촛불혁명으로 구석구석 이 땅의 적폐를 청산중에 있으며, 오래된 민족의 적폐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새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곳 국립묘지는 과거의 적폐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여전히 ‘국립묘지법’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국립묘지는 이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해방 후에는 이승만 비호 아래 양민학살에 앞섰고, 민족 지도자이신 김구 선생님의 암살을 사주하는 등, 온갖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김창룡이 ‘국립 묘지법’의 비호 아래 이 곳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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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서를 낭독중인 이순옥 부위원장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이 <국립묘지법 개정과 친일파 묘 이전 촉구대회> 성명서를 낭독중이다. ⓒ 임재근

그리고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한 주범이자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여 처벌받은 범법자 안현태와, 5.18 민주항쟁 당시 진압군 측 주요 책임자인 유학성, 소준열이 이곳에 버젓히 편하게 잠자고 있다. 이런 자들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국립묘지에 대한 모독이자, 우리 국민을 욕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짓이자, 이 곳에 고이 잠들어 계시는 순국선열과과 애국지사를 능멸하는 것이다.”

대회 참가자들은 더불어 이해 관계자들에 주장하는 바를 밝혔다. 우선 김창룡과 안현태 등의 유족에는 “그들의 묘가 현충원에 있는 한 국민에게 조롱받을 것”이라며 “고인을 위한다면 하루빨리 묘를 이장”하길 요구했다. 또 국회위원들에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개정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길” 촉구했다.

더불어 현충원 유족들과 국민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우리 호국영령 들은 반민족 반민주 인사들과 한자리에 묻혀 맘이 편하실리 없다. 유족과 국민들은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이들을 국립현충원에서 몰아내도록 여론을 만들자”라며 친일파 파묘에 힘을 보태주길 호소했다.

추모의 장에 친일파 흔적은 없어져라… 파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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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현충원 파묘 퍼포먼스 김창룡의 묘 앞에서 파묘 퍼모먼스를 대회 참가자들이 이행하고 있다.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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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룡 묘 앞에 놓인 피켓들 김창료 묘 앞에 참가들이 준비한 피켓들이 놓여져 있다. ⓒ 송혜림

‘민족의 반역자 김창룡 묘 파가라!’라고 적힌 커다란 삽이 등장했다. 대회 참가자들이 삽에 이어진 끈을 잡고 영차영차 잡아당기자, 마치 무덤을 파내는 듯한 파묘 장면이 연출된다. 현충원 장군묘역에 위치한 육군중장 김창룡의 묘에서는 위와 같은 파묘 퍼포먼스와 묘 이전을 촉구하고 국립묘지법을 개정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

김창룡,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이들이 이렇게도 분노하는걸까. 192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한 그는 1940년에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중지군의 아마카스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었다. 중국공산단 거물 왕진리를 체포하는데 큰 공을 세운 그는 이후 다수의 항일조직을 적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월남 이후 국방경비대 내부 좌익숙청을 벌이며 육군 방첩대장이 된 김창룡은 1949년 ‘김구암살사건’에서 사건 당일 범인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 특별 배려하며 배후 은폐에 가담했다. 6.25 전쟁 이후 김창룡은 특무부대장으로 부임 후 정치적목적과 성과주의로 상당한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암살당한 그의 장례식은 최초의 국군장으로 안양의 사설 묘역에서 치뤄졌으나, 1988년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애국지사 조문기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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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원에 이장된 조문기 묘 앞에서 대회 참가들이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송혜림

친일파의 묘에서 퍼모먼스를 이행한 참가자들은 고 조문기 열사의 묘로 이동했다. 조문기 열사는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대한애국 청년당을 개설하고 국내 항일운동을 주도해왔다. ‘친일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구호아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하다 2006년 파킨스병으로 사망했다.

추모사를 발언한 박해룡은 “이승만 정권 하에 단독정부와 독재를 반대한 조문기는 민주화 투쟁과 통일 운동을 이어나갔다. 현대사를 바로잡고자 노력했고,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데 함께 했다.”라며 “승리의 영광없이 고난밖에 없던 가시밭길을 걸어오셨다. 그러나 현재 남북회담의 비핵화와 종전선언 등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 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시대에 발맞춰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몰아내는 데 힘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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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곽낙원의 묘와 김 인의 묘 앞 단체촬영 김구 어머니 곽낙원의 묘와 김구 아들 김 인의 묘 앞에서 참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 송혜림

또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의 묘 앞에서는 “민주화를 갈망했던 아들이 부당하게 세상을 뜬지 70년이 되었다. 여전히 국내 곳곳에는 친일의 잔재가 남아있다.”라며 “요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김구와 김구 어머니가 그토록 꿈꾸시던 통일을 앞두고 있다. 조속하게 친일과 유신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노력하겠다. 양심 민주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연대하며 만들어가겠겠다”라며 추도사를 마쳤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친일 인사 중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으로 총 63명이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가슴아픈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의 하나로 이들 묘지를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어져 왔으나, 현행 법에 제정된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수년 째 미뤄져 왔다. 그러나 최근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국회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민족사의 오랜 숙원이 해결되어 현충원의 진정한 존재가치가 바로잡히길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2018-06-0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현충원에 드리워진 그림자, 친일파의 묘?

목, 2018/06/0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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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한 어린이가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역사에만 초점을 맞춘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에서 문을 열었다. 2011년 2월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출범한 지 약 8년 만의 개관으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기부와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민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등 시민단체와 학계 등이 중심이 돼 민간 차원에서 추진돼 왔다.

송기인 초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이 재직 2년간 받은 급여 2억원을 전액 기탁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건립이 추진됐다. 이후 초등학생들부터 학계, 시민사회 인사들까지 1만여명의 시민이 건립운동에 참여해 16억5000만원의 건립 기금을 조성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자료와 기금을 보내는 등 건립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의 과거사 관련 시민단체들과 학계 인사들 역시 1억원이 넘는 기금을 보냈다.

박물관에 전시된 상당수 자료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등 시민들이 기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선생이 68차례에 걸쳐 6000점이 넘는 자료를 보내 왔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한이 서려있는 유품을 박물관에 보냈다.

박물관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축적한 자료 등을 포함해 총 7만여점의 자료와 5만여권의 도서가 수집됐다. 이 중 엄선한 일부가 박물관에 전시되고 나머지는 보관해 관리한다.

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부터 식민 통치와 수탈, 친일파와 항일 운동,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역사를 담은 총 4부의 전시로 구성됐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을사오적 등 친일파의 훈장과 유품 등 희귀한 자료가 전시됐다. 박물관은 향후 소장자료를 활용해 전시는 물론 교육교재와 역사문화 강좌, 답사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박물관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세워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남산과 용산 일대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본산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독립운동 선열의 묘역이 효창원에 들어섰다”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역사문화벨트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이화 박물관 건립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이날 개관식에서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건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자발적인 역사문화운동을 통해 박물관이 개관했다”며 “단순한 자료 전시에만 집착하지 않고 시민과 청소년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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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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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선명수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경향신문

☞기사원문: 시민과 독립운동가 후손이 만든 ‘아픈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에 개관

※관련기사

☞연합뉴스: ‘아픈 역사 한눈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경술국치일 맞춰 개관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 열어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8월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 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정확히 기록한 사료와 전시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자리잡은 박물관의 규모는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연면적 1500여㎡에 이른다. 박물관에는 기획전시실과 상설전시실, 서고와 수장고, 연구실 등을 갖췄다.

전시실에 보관된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증언하는 사료들 중 일부를 모아본다.

1. 순종황제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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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이 국권을 넘긴다고 밝힌 칙유로 석판 인쇄된 원본이다. “국권을 내가 믿고 의지하는 이웃 나라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조선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하면서 시정방침을 밝힌 포고문에는 “전 한국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그 통치권 양여를 수락한다”고 쓰여 있어 조약 체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김정효 기자

2. 을사오적 권중현이 받은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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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오적 중 1인인 권중현이 한국 병합을 기념해 받은 메달과 증서이다. 권중현은 1907년 1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힌 고종황제의 친서가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직후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한 나인영 오기호 등에게 저격당했으나 목숨은 잃지 않았다. 강제병합 뒤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20년까지 10년간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김정효 기자

3 조선총독부 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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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문관들이 착용하는 칼. 직급과 상관없이 모두 제복에 칼을 착용하도록 하여 조선인들에게 총독부 관리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칼자루와 칼집에 ‘오동 문양’이 한 개씩 새겨진 것으로 보아 ‘주임관’이 사용한 폐검이다. 손잡이는 상어 가죽을 입혔다. 김정효 기자

4. 천인침과 군 위문품 속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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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인침은 참전한 사람이 무사하기를 빌며 1미터 정도 길이의 흰 천에 붉은 실로 여성 천 명이 한 땀씩 꿰매어 만든 일종의 부적이다. 천인침은 부적과 같이 배에 두르거나 모자에 꿰메어 다녔다. 아래 속조끼는 부산공립고등여학교 2학년생 야마구치 사치코가 ‘무운장구’라고 쓴 미나미 조선총덕의 글씨와 일종의 호신부로 조선신궁의 도장을 찍은 천을 덧대어 만든 속조끼이다. 조선군사후원연맹이 학생들이 만든 것을 모아 군인에게 위문품으로 보냈다. 김정효 기자

5. 궁성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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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마다 ‘천황’ 있는 동쪽을 향해 의무적으로 절(궁성요배)을 해야 했던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이다. 김정효 기자

6.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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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바 부대보병 제6사단 등이 1937년 7월에서 1938년 11월까지의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이다. 히노마루 안에 난징과 한커우를 점령한 날짜가 정확히 적혀 있다. 남경대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정이 눈에 띈다. 김정효 기자

7. 특별지원병 이은휘의 장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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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행기는 청년들이 죽으러 나갈 때 앞세운 깃발이라고 해서 ‘청춘만장’이라고 불렸다. 이 깃발에는 “축 육군병지원자훈련소입소 궁분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초면 제남부락 연맹”이라고 쓰여있다. 이은휘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사실상 강제로 지원병으로 끌려갔다.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아내를 두고 그는 결국 1944년 7월 11일 남태평양 파푸아뉴기니 라바울에서 전사했다. 아래는 당시 일본군 육군 병사가 사용한 군복과 철모 수통 등 군장이다. 김정효 기자

김정효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한겨레

☞기사원문: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수, 2018/08/2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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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37.6.5. 호외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8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建制宣言)에 따라 1936년 3월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공산당계열, 국민당계열, 토비(土匪), 한국민족주의계열 등의 연합이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만 남게 된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재되었고 제1·2군은 남만주에서, 제4·5·7·8·10군은 동만주에서, 제3·6·9·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에서 1938년까지 만주 각지에서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중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 다수의 한인들이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특히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위를 거쳐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사장,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를 중심으로 국내 진공을 감행한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가 호외로 대서특필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이른바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길림・간도·통화 3성연합 치안숙정공작)’을 개시하여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연길현에 토벌대사령부를 설치하고 관동군 제2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을 토벌대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토벌작전에 일본군 6,500명, 만주국군 25,000명, 길림・간도·통화성 경찰토벌대 35,000명 등 총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또한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정찰, 기총소사, 폭격을 가하고 투항 권유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각급 지방행정기관과 협화회를 동원, 현지 주민들에 대한 사상공작을 펼치고 항일연군들에 대한 귀순공작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양정우·조아범·김일성·진한장·최현에게 1만원, 박득범·방진성에게 5천원, 위증민·전광(오성륜)에게 3천원의 현상금이 각각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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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노조에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으로부터 노획한 사진들.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러한 소탕작전으로 인해 1940년 1월 이금명 사살, 2월 1로군 총사령 양정우 사살, 1로군 참모장 방진성 체포, 1940년 12월 제5사장 진한장 사살, 1941년 1월 1로군 정치위원 전광 귀순, 1941년 3월 제2로군 군장 위증민 사살 등으로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는 1941년 3월 19일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성공리에 마치고 해산했다. 노조에 토벌작전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귀순한 동북항일연군을 토벌대와 귀순공작대로 활용하고 그들의 정보를 이용해 동북항일연군의 근거지 곧 밀영·피복창·지하창고까지 모조리 파괴했기 때문이다.
노조에 대토벌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김일성과 최현이 각각 이끄는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 제13여단은 1940년 하반기에 소만국경의 소련 영내로 철수했다. 이후 소규모 유격대를 편성해 소만국경을 넘어 관동군과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했으나 대규모 무장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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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에 토벌사령부가 1941년 2월 제작한 길림·통화·간도 3성 지역 요도(要圖).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가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0년 10월 19일에 선전용으로 발간한 소책자 「박득범(朴得範) 김재범(金在範) 김백산(金白山) 내부기록(來部記錄)」(일본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이다. 총 9쪽으로 된 이 소책자는 귀순자 3인과 노조에 사령관의 면담, 노조에 사령관의 훈시, 박득범·김재범·김백산의 ‘결심을 말하다’, 기념사진, 박득범 체포시 압수한 총기 일람표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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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의 표지와 기념사진. 기념사진에서 앞줄 왼쪽부터 다나카 경비과장, 노조에 사령관, 유홍순 간도성 차장.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1940년 10월 19일 오전 11시 30분 박득범은 김재범, 김백산과 함께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에 방문했다. 사령관실에서 노조에 사령관을 접견했는데 이 자리에 간도성 차장 유홍순(창씨명 中原鴻洵)과 다나카(田中) 경비과장, 사령관 부관 하세가와(長谷川) 소좌가 함께 배석했다. 유홍순 차장,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순으로 노조에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노조에 사령관이 귀순자 3명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매진해달라”는 취지의 훈시를 하였다.
그러자 박득범이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라고 귀순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재범과 김백산도 동일한 취지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노조에 사령관의 선창하에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대일본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민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만주국 황제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충성 서약을 하였다. 끝으로 노조에 토벌사령부 인근에 위치한 충혼비(忠魂碑) 앞에서 기념 촬영하였다.

 


 

결심을 말하다

박득범

박득범오늘까지 걸어온 길이 오로지 암흑이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의 죄는 실로 엄청 나서 중형에 처해짐이 너무도 마땅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후 각 기관 특히 군부당국이 너무도 친절하고 관대히 대우하고 지도해 주신 것에 대해 무슨 말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를 따름입니다.지금 각하의 훈시를 경청하니 우리가 밟아온 길을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 아무쪼록 선도, 지도 편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마지막으로 특별히 심경을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그동안 만주국 특히 조선인 동포에게 또한 경제와 산업, 문화 기타의 건설에 있어서 파괴적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 이제와 생각하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만주국) 부흥에 대해 미력이나마 한층 더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이제 「내부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박득범은 1908년 연길현 부암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부암동 농민협회에 참가하고 그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적위대 중대장이 되었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1사 제1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9년 8월 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참모장이 되었고, 1940년 3월 제1로군 사령부 직할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이 되었다. 1939년 8월 박득범은 간도성 돈화현 한원봉 부근에서 관동군 독립보병 28대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32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을 비롯해 1940년 9월 체포되기 전까지 일만 군경과 3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의 군경을 전사시켰다. 9월 말 왕청현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연길로 압송된 후 변절하여 간도성 치안공작반 제2공작반에서 귀순공작을 벌였다. 일제 패망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 하바로프스끄현 세레뜨낀에서 노역하다가 1950년 석방되어 북한으로 갔다.
김재범은 1937년부터 1938년 11월까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제7단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이후 김일성 부대(제1로군 제2방면군) 정치주임으로서 연길현 동불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6월 김백산의 밀고에 따라 안도현 대마녹진에서 일만군과 공작반원들에게 체포됐다. 9월 25일 위증민의 문건 등 주요 정보를 일만군에 제공해 토벌작전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 방문 직후에 동포 여성과 결혼해 연길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만선일보』 1940.10.23). 한편 김백산에 대해서는 제1로군 경위려의 제3단 단장을 맡고 있었고, 1940년 3월 체포되어 투항한 후 김재범, 박득범 체포·귀순에 적극 나섰다고만 알려져 있다.
당시 간도성 차장이었던 유홍순은 전북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있다가 1934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민정청 실업과장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간도성 실업청장, 민생청장을 지냈다. 1940년 5월부터 간도성 차장에 임명되었고 ‘동남부치안숙정공작’ 시기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조직을 주도, 고문에 선임되어 간도성 귀순공작반을 지휘하였다. 1943년 12월 간도성 차장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강원도지사에 올라 해방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 강원도조사부에 체포되어 그해 7월 공민권정지 3년형에 처해졌다.
토벌대 사령관인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22기로 1939년 8월 관동군 제2독립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에 임명되어 그해 10월부터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1941년 3월 사령부가 해산되자 천진 소재 독립혼성 7여단장으로 부임했고 독립혼성 제30여단장(상해), 마에바시(前橋)육군예비사관학교장, 제63사단장을 역임하다가 1945년 4월 예편했다.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은 만주지역 치안숙정시기에 일제가 집요하게 펼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사상, 귀순공작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일제가 치안숙정 관련 문서를 통해 선무·귀순공작에 대한 실시방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데 비해 구체적인 실천사례가 책자로 제작된 것은 드물어 그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박광종 선임연구원

월, 2018/05/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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