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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게 남겨진 숙제, ‘친일파 재산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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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게 남겨진 숙제, ‘친일파 재산환수’

익명 (미확인) | 일, 2017/11/12- 03:03

누구보다 잘 사는 친일 후손들…‘환수율 겨우 3%’

11월17일은 ‘순국선열에 날’이다. 이날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대한민국의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한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등의 순국선열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을 표하는 날이자 그들의 독립정신 및 호국정신을 기리는 법정 기념일이다. 또한 이날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치욕적인 날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순국선열의 날’ 지정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날로 기념하고, ‘을사조약’ 체결의 역사적인 치욕을 새기기 위해서 지정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같이 국권을 뺏겼던 날을 잊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웠던 순국선열들을 기리기에는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친일파’, 그중에서도 ‘재산환수’ 문제는 우리나라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법률 개정으로 친일행위에 대한 유연한 법률적용 가능
친일재산환수 대한 법률적 증거 있음에도 미진한 환수

승소율은 매우 높지만 재판성립요건 자체가 쉽지 않아

이완용 ‘0.09%’ 환수…되팔거나 법인명의라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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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에 날’을 맞아 친일파 재산환수 이슈가 다시금 제기된 상황이다. <사진=YTN 뉴스 캡처>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국내에서 ‘친일파’란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했던 자로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굉장히 치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당시 적극적으로 동조한 협력한 인물들과 함께,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과거에 대한 반성’은 커녕 이들의 만행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며 옹호하는 자들도 친일파로 불린다. 결국 ‘친일파’는 ‘매국노’와 동급으로 사용되는 말이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같은 친일파는 1800년대 말 일본이 ‘군국주의’로 우리나라를 위협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근대 서양의 시스템으로 국가를 개조했다. 중국이 정점에 서는 수천 년 간의 조공 제도로 고착된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깨고 천황의 이름으로 대등하게 청나라와 조선에 외교 문서를 보냈다.

특히 이듬해인 1868년 조선을 향해 자신들이 ‘왕정 복고’를 이뤘음을 국서로 통보했는데, 그동안 형님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던 조선 조정에 황제를 참칭하는 민감한 언어 선택으로 큰 충격을 줬다. 자연히 ‘왕’인 조선은 일본에 격이 한 등급 내려간다. 당연히 조선은 국서 접수를 거부하고 일본도 1872년 외교 사절단이 철수하는 등 갈등은 점점 고조됐다.

그러나 1876년 운요호 사건 때 이양선으로 일본이 무력 시위를 하자 조선 조정은 격론 끝에 문호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당연히 일본과 통상은 텄다고 해도 조선 조정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국론 역시 ‘존왕양이’의 외세 배척 여론은 더욱 강해졌고,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는 이런 여론을 잘 이용했다. 이 때만 해도 우의정 박규수와 영의정 이유원 정도가 외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었는데 실상 그마저도 동도서기론, 즉 “서양 문명은 기술면에서 앞서 있을지는 모르나 동양의 정신 문화를 존중하고 배울 점이 있다”는 식의 이상론이었지 일본을 좋아한다는 커녕 최소한 일본에게 뭘 배운다거나 가까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880년 대, 우의정 박규수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본 책과 문물을 접하고 일본의 발전상을 흠모하게 된다. 물론 김옥균의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니, 우리는 프랑스 같은 문화 군사 강국을 이루자’는 언급을 볼 때, 일본과 동급으로 조선을 생각했지, 결코 ‘신하’가 된다는 생각은 그들 역시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들이 청나라식 근대화, 양무운동을 개화 모델로 삼고 국정을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식 급진 개혁을 바랐던 김옥균의 개화당은 친일파란 누명을 쓰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서양에 쓰러지기 직전인 청나라 모델로는 미래가 없다는 건 확실했던 개화파는 초조했다.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완공 축하연에 난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도 확보하고 서울 요지를 선점한 그들의 난은 성공하는 듯 했으나 압록강 근처에 주둔했던 청나라 군대가 삽시간에 반격을 가하면서 실패한다. 갑신정변이다. 역적이 된 개화파는 일본으로 탈출했고, 조선에 일본식 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친일파가 처음 매국노의 멍에를 쓴 건 한일강제합병이 아닌 이 때가 최초다.

그러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한일합병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전만 해도 친일 세력을 발본색원 할 것같이 굴었던 수구파(개화당을 제외한 민씨 쪽 친청파+이완용)들은 얼굴을 싹 바꿨다. 1905년 외교권을 뺏긴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정미 7조약 등등 대한제국을 해체할 치명적인 조약들마다 수구파들은 누구보다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이완용, 송병준 등은 각기 무리를 짓고 친일 충성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맨 앞에서 길안내를 맡은 것은 친일파들이 심어놓은 헌병보조원, 즉 조선인 조센징 앞잡이들이었다. 1910년 강제병합이 완성되자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은사금과 부동산 등은 물론 조선귀족 지위까지 나눠 받았다.

과거 대한제국이 부족한 재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주미공사관은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넘어갔고, 개화파의 거두이자 왕실 종친 박영효는 28만원, 이완용은 15만원, 박제순은 10만원의 은사금을 받고 아주 떵떵거렸다. 구한말 끝날 때까지 그동안 친일을 했든 친청·친러였든 상관없이 합병 때까지 조선 조정에서 버틴 자들은 모두 친일파라고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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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 일가가 옥인동 집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가 이완용 본인이다. 친일파의 거두로 불리는 이완용은 여의도 면적 두 배에 가까운 토지를 소유했지만 국고로 돌아온 것은 0.09%에 불과하다. <사진출처=구글 이미지 검색>

그 후로도 일본 제국이 35년 간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제국주의의 양상도 같은 듯 같지 않게 계속 변모했는데, 친일파들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변모해 갔다. 조선이 점점 제국주의 일본에 동화되고 식민 지배의 정도도 깊어지고 점차 더 많은 조선인들이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일부 권세를 가진 집안들이 저질렀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그 범위를 넓히고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런 시대를 시각적으로 리얼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 옛 MBC 대하드라마인 ‘여명의 눈동자’다. 친일파의 출신 성분은 조선 귀족들에서 점차 일반 서민 출신들까지 확대되면서 광범위하게 우리나라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친일파의 정의

이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정의는 법률로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지난 2021년 10월12일에 공포되고 시행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2조 정의 부분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지난 1945년 8월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법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20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나온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2.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3.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4.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

5.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

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7.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다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으로 제3조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사람은 예외로 한다.

8.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9.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

10.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1.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12.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5. 판사·검사 또는 사법관리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6.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8.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19.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

20.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에 의한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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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친일파 단죄문’ 등 반민족행위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다. <사진=YTN 뉴스 캡처>

이같은 20가지의 친일행위의 법률적 정의로 인해, 그동안 애매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지목이 가능해졌다. 또한 친일파의 청산 및 친일재산 환수의 법률적 증거가 생긴 것으로 평가된다.

친일파 재산환수

문제는 친일파 땅 환수 작업이 미진하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환수한 친일파의 땅은 전체 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자치단체는 친일파 무덤과 땅을 찾아 단죄비를 세우고 국가 환수를 촉구하기도 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관련소송 97건 중 93건이 종결됐다. 이 93건 중 91건에서 승소해 승소율은 97.8%에 이른다. 2006년 7월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 송병준 등 168명을 조사해 여의도 면적의 1.3배에 해당하는 1113만9645㎡를 환수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국가에 귀속된 친일파의 땅은 1300만㎡(전체 3%)에 불과하다.

남아있는 4건은 모두 친일파 이해승과 관련된 소송이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지난 2009년 9월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하고 그의 후손이 물려받은 서울 은평구 일대 토지 2922m²를 친일재산으로 결정했다. 이에 이해승의 손자 그랜드힐튼서울호텔의 이우영 회장은 경기 포천시 임야 등 192필지(공시지가 110억원대)에 대해 국가귀속결정 처분 취소 소송을 내 승소 했지만, 법무부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지난 11월9일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 낸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심대로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또 이 회장이 제기한 친일 재산 확인 결정 처분 취소 소송에 대해서도 원심과 같이 “친일 재산이 맞고 환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해승은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5대 손으로 1910년 10월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아 광복될 때까지 유지했다. 1911년 1월에는 일제의 한일병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16만8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이듬해엔 한국병합기념장도 받았다.

이해승은 또 1917년부터는 친일파 이완용 주도로 설립된 친일단체 불교옹호회에서 고문을 맡았다. 이후에도 그는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쇼와대례기념장(1928년)을 받고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평의원(1937년)을 지냈다.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5월 이해승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도 이해승이 1913년과 1917년 취득한 서울 은평구 일대 토지를 친일 재산이라고 보고 국고 환수를 결정했다.

이에 이해승의 후손인 이 회장이 “조부는 대한제국의 황실 종친으로 후작 작위를 받았을 뿐이다. 식민 통치에 협력한 친일행위자가 아니고 재산도 환수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이해승이 식민 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인정한다”면서도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로 후작 작위를 받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재산 환수 불가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이해승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각종 이권과 특혜를 부여받은 것이 맞다”며 “당시 취득한 이해승의 재산은 친일 재산이기 때문에 국가가 환수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결국 재판 끝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해승이 후손에게 물려준 300억원대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게 된 것이다.

부족한 재산환수

하지만 국가에 환수되는 땅은 친일파들이 일제 강점기 보유했던 재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행 상법 상 후손들이 물려받은 토지를 팔거나 법인 재산으로 등록하면 환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을사오적 이완용은 일제강점기 여의도 면적 두 배에 가까운 토지를 소유했지만 국고로 돌아온 것은 이 토지의 0.09%에 불과하다. 또 친일파 송병준도 일제강점기 당시 받은 토지의 0.04%만 환수 대상이 됐다.

조사위 관계자는 “해방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토지 관련 행정자료가 사라져서 찾지 못한 것도 많다”며 “해방 이후 곧바로 친일청산 작업에 들어갔다면 친일파 재산을 모두 찾아내 국고로 돌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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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0> 사건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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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06/1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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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환경연합 정기산행을 내장산으로 다녀왔습니다

연한 초록잎들의 향연이라 어느 곳에 가든 맘 편히 산행을 즐길수 있었습니다

지난해까지는 비지땀을 흘리며 오르는게 목적이고 즐거움이었다면

지난 삼월부터의 산행은 그동안 산에 가도 그냥 지나치던 많은 생명들을 유심히 보고

그곳에 있는 이유를 들으며 가는 산행이어서 또 다른 즐거움이 있는 산행입니다

자~~아 이제 4월의 초록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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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주차장까지 차는 들어가지만 우리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옆에 차를 세우고 이런 초록의 터널 속으로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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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자주괴불주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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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내장산은 산벚나무와 연초록나무들이 어우러져 파스텔톤으로 수채화를 그려놓은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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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잘보이는 쇠별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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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하면 붉은 빛만 떠올릴텐데 4월의 단풍나무는 아주 작은 붉은꽃을 피우며 잎은 초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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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옆에서 본 미나리냉이입니다 잎은 미나리같고 꽃은 냉이꽃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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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제비꽃입니다 보라색말고도 흰색, 노란색등 많은 종류의 제비꽃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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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개들어 하늘 보면, 이렇게 초록별들이 눈부시게 살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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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으며 그 동안 열지 않았던 시각과 청각을 최대한 열고

눈으로 초록잎과 꽃을 관찰하고, 귀로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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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 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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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진 자리에 꽃받침이 마치 또 하나의 꽃인양 붉은빛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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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은 굴거리나무 군락지가 천연기념물91호로 지정된곳입니다

군락지는 좀 더 위쪽이지만 입구에도 심겨져있습니다

굴거리나무는 아랫녁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로 내장산 굴거리나무 군락지는 북방한계선이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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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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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골사이를 비집고 또 다른 생명이 자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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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똥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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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 입구는 벌써 부처님오신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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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한 산악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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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의 연못에서 동전 던저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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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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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마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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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에 같이 한 자매입니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좋아 잠시 자연을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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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금창초입니다 털복숭이 봉우리가 터져 이런 보라색꽃이 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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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극꽃입니다 꽃이 초록색이라 잎인지 꽃인지 잘 구분을 못합니다 초록색꽃도 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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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에 핀 백작약입니다 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피어있어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아야 보이는 꽃이었습니다

꿀이 많아서인지 향기가 좋아서인지 작은 벌레들이 아닥다닥 붙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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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보고 수줍게 피어있는 윤판나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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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발톱입니다. 너무 작은 꽃이어서 사진으로 담기 쉽지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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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은 내장산 생태탐방로 3.8km를 걷는 길입니다

그중 비자나무숲은 오는 사람들에게 쉬어가라고 아주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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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이상되었다는 비자나무에서 오늘의 기념사진 한장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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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입니다

우리가 아는 붉은빛이 감도는 철쭉은 산철쭉이라 부르고 진짜 철쭉은 이런 연한 분홍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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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구슬붕이 꽃이 참 멋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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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러둘러 도착한 백련암은 불출산이란 병풍으로 둘러진 멋진 사찰이었습니다

이곳 스님께서 백련암의 다른 모습을 알려주셔서 누워서 불출산과 백련암의 또 다른 멋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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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좋은 말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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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 호수 속 나무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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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초등학생 딸은 이렇게 산행을 하며 한뻠더 가까워 보입니다

인생으로 치자면 4월은 이런 어린아이의 파릇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아 순수해서 그냥 빠져들게 만드는 그 무엇 말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그냥 4월의 초록에 푸~~욱 빠져들 보세요^^

월, 2015/04/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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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평]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을 환영하고 대법원의 8년 직무유기를 규탄한다.

 

대법원은 오늘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에 따른 노동조합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고용노동부의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하였다.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33조, 외국인의 지위를 보장한 헌법 제6조, 국적에 따른 근로조건의 차별대우를 금지한 근로기준법 제5조, 인종차별금지를 금지한 노조법 제9조 등에 비춰볼 때, 위 판결은 지극히 타당하고 상식적인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판결이 나오기까지 대법원에서만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을 10년 전으로 돌려보자. 2005년 4월 24일 서울·경기·인천지역에서 취업해 일하고 있던 이주노동자 99명은 지역별 노동조합인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를 설립하고, 같은 달 5월 설립신고서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했다. 같은 해 6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장은 노조 임원 및 조합원 일부가 출입국관리법상 취업 및 체류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므로 노조법상 노동조합으로 볼 수 없다며 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이주노조는 고용노동부의 노조설립신고 반려처분이 법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헌법상 권리인 노동3권을 출입국관리법상 체류자격이 없다는 임의적 상황에 따라 차별하는 처분은 위법 · 무효이므로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2006년 2월 7일 서울행정법원 제13행정부(재판장 김태종 판사)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원고 청구를 기각했으나, 2007년 2월 1일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 제11특별부(재판장 김수형 판사)는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설립신고서 반려처분이 법적근거가 없는 것으로 위법하므로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2007년 2월 23일 고용노동부가 상고하여 대법원에서 심리가 시작된 이 사건은 대법원의 최장기 미제사건 기록을 갱신하며 무려 8년 동안이나 계류되어 왔다. 김황식 전 대법관, 후임 양창수 전 대법관을 거쳐 권순일 현 대법관에 이르기 까지 주심 대법관만 3명을 거쳤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결과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내국인 노동자들이 형사처벌을 받았다고 하여 노동조합 가입자격이 제한되거나, 이미 가입된 노동조합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이 출입국관리법에 따른 체류자격이 없더라도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한, 헌법상 노동3권이 제한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올해 제323차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에서 채택된 제374차 결사의자유위원회 보고서에서는 8년째 계류된 이주노조 설립신고 상고심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체류자격에 상관없이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단체교섭권을 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을 한국 대법원과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대법원의 8년에 걸친 심리 지연으로, 이주노조는 모진 수난을 겪었다. 아노아르 후세인(방글라데시) 초대 위원장을 비롯해 미셀 카투이라(필리핀) 4대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이주노조 주요 임원들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표적단속 되어 강제추방 당하거나,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럼에도 이주노조는 노동조합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자주적인 단결을 통해,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이주노동자 스스로 바꿔보겠다는 창립정신으로 끈질기게 싸워왔다. 우리 모임은 이주노조의 지난 10년 동안의 헌신적인 투쟁에 경의를 표하며 깊은 연대의 마음을 표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 사건 판결 어디에도, 대법원이 지난 8년 동안 고심한 흔적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대법원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인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한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눈 감았다. 한국경제의 가장 밑바닥을 책임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폭력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목소리를 8년 동안 외면했다. 이는 인권의 보장과 정의의 구현이라는 사법부의 존재목적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최고법원의 권위와 존엄은 법원에 출입하려는 이주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조끼를 억지로 벗겨내려는 것이 아니라, 인권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스스로의 목적에 충실할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음을 대법원이 지금이라도 깨닫길 바란다.

 

2015. 6. 25.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한 택 근

목, 2015/06/2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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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평]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을 환영하고 대법원의 8년 직무유기를 규탄한다.

 

대법원은 오늘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에 따른 노동조합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고용노동부의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하였다.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33조, 외국인의 지위를 보장한 헌법 제6조, 국적에 따른 근로조건의 차별대우를 금지한 근로기준법 제5조, 인종차별금지를 금지한 노조법 제9조 등에 비춰볼 때, 위 판결은 지극히 타당하고 상식적인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판결이 나오기까지 대법원에서만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을 10년 전으로 돌려보자. 2005년 4월 24일 서울·경기·인천지역에서 취업해 일하고 있던 이주노동자 99명은 지역별 노동조합인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를 설립하고, 같은 달 5월 설립신고서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했다. 같은 해 6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장은 노조 임원 및 조합원 일부가 출입국관리법상 취업 및 체류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므로 노조법상 노동조합으로 볼 수 없다며 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이주노조는 고용노동부의 노조설립신고 반려처분이 법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헌법상 권리인 노동3권을 출입국관리법상 체류자격이 없다는 임의적 상황에 따라 차별하는 처분은 위법 · 무효이므로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2006년 2월 7일 서울행정법원 제13행정부(재판장 김태종 판사)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원고 청구를 기각했으나, 2007년 2월 1일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 제11특별부(재판장 김수형 판사)는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설립신고서 반려처분이 법적근거가 없는 것으로 위법하므로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2007년 2월 23일 고용노동부가 상고하여 대법원에서 심리가 시작된 이 사건은 대법원의 최장기 미제사건 기록을 갱신하며 무려 8년 동안이나 계류되어 왔다. 김황식 전 대법관, 후임 양창수 전 대법관을 거쳐 권순일 현 대법관에 이르기 까지 주심 대법관만 3명을 거쳤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결과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내국인 노동자들이 형사처벌을 받았다고 하여 노동조합 가입자격이 제한되거나, 이미 가입된 노동조합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이 출입국관리법에 따른 체류자격이 없더라도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한, 헌법상 노동3권이 제한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올해 제323차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에서 채택된 제374차 결사의자유위원회 보고서에서는 8년째 계류된 이주노조 설립신고 상고심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체류자격에 상관없이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단체교섭권을 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을 한국 대법원과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대법원의 8년에 걸친 심리 지연으로, 이주노조는 모진 수난을 겪었다. 아노아르 후세인(방글라데시) 초대 위원장을 비롯해 미셀 카투이라(필리핀) 4대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이주노조 주요 임원들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표적단속 되어 강제추방 당하거나,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럼에도 이주노조는 노동조합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자주적인 단결을 통해,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이주노동자 스스로 바꿔보겠다는 창립정신으로 끈질기게 싸워왔다. 우리 모임은 이주노조의 지난 10년 동안의 헌신적인 투쟁에 경의를 표하며 깊은 연대의 마음을 표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 사건 판결 어디에도, 대법원이 지난 8년 동안 고심한 흔적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대법원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인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한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눈 감았다. 한국경제의 가장 밑바닥을 책임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폭력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목소리를 8년 동안 외면했다. 이는 인권의 보장과 정의의 구현이라는 사법부의 존재목적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최고법원의 권위와 존엄은 법원에 출입하려는 이주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조끼를 억지로 벗겨내려는 것이 아니라, 인권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스스로의 목적에 충실할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음을 대법원이 지금이라도 깨닫길 바란다.

 

2015. 6. 25.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한 택 근

목, 2015/06/2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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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님,

핸폰 번호변경으로 친일인명사전을 재 다운로드 하려는데

방법을 알려주세요.

멜주소: [email protected]

목, 2017/08/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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