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열 교수가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통계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이영훈 이사장의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펴낸 책 가 논란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자 저자 6명이 모욕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 논란은 많지만 ‘학계’에서 정식으로 비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언론도 분명하게 비평·보도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69)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학자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를 꺼린다. 학회에서 논쟁은 하지만 언론에 직접 얼굴을 내밀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와 이 이사장은 고교(경북고)·대학(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동창이고 그 역시 식민지근대화론 창립자인 안병직 교수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영훈과 고교 대학 동기동창
-이영훈의 책 는 소설가 조정래의 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다. 뉴라이트 기관지 격인 2007년 여름호에 만경평야가 일본인에게 수탈당하는 것으로 묘사한 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글을 선입관을 빼고 읽어보면 틀림없이 ‘혹’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나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일제하 수리조합·토지 개량사업 자료 해제작업을 많이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수리조합 설립신청서는 낙성대경제연구소도 보지 못한 자료다. 이 자료를 보면 만경강 북쪽 옥구·익산·군산은 1909년 이미 빈틈 없이 수리조합이 있고, 만경강 남쪽 동진강 호남평야도 수리조합이 설립신청서는 냈지만 허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수리조합 설립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의 배경을 놓고 벌인 이른바 ‘벽골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영훈은 벽골제가 바닷물 유입을 막는 방조제로 그 하류 의 주인공이 살던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다·갯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리조합 신청서에 첨부된 당시 ‘동진강 수리조합 구역도’를 보면 이 지역에 마을과 수로 표시가 있다. 갯벌에 수로 표시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1872년 지도에는 전북 김제군에 5개 장시(5일장)가 있는데 그 중 2개가 벽골재 하류에 있다. 갯벌 위에 5일장이 열릴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은 조선후기 산업의 핵심인 농업이 몰락했고, 이를 일본 기술과 자본이 일으켜 결국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허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 몰락을 수치로 반박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문건을 보면 ‘두락당 지대량의 장기 추세’ 그래프가 있다. 1685년부터 1945년까지 논 한 마지기에 지대를 얼마 받았느냐를 회귀분석을 통해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지대가 떨어진 것을 생산량 하락으로 봤다. 그래프는 1910년 거의 바닥으로 농업이라는 산업기반이 무너진 것을 표시한다. 이 그래프에는 1685년 지대로 22말을 받았는데, 1935년에는 14말 받은 것으로 돼 있다. 1935년은 일제강점하 농업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1685년보다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선 농업의 몰락 사실은 이영훈 교수의 학문적 근거이자 바탕이다. 이런 허술한 그래프가 이론적 바탕인 것이 놀랍다.
“이 그래프는 30여개 지주 장부를 근거로 회귀분석한 것인데 회귀분석에서 유의성과 사실은 별개다. 이 지주 장부도 일관성이 없고, 연도별로 드문드문 있다. 그 중 전라도 영암 남평 문씨 문중 논에 대한 지대장부만 이런 추세를 보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일정하다. 이 1개 장부가 전체 통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한 개의 데이터가 매우 특이할 때 통계에서 그것을 제외해야 하는데 이영훈은 그리하지 않았다. 또 하나 문제는 조선후기로 들어와 소작제도가 변화하면서 지대를 받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걸 감안하지 않고 장부상 수치만 보다 오류가 생겼다.”
사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실증적 연구와 수학을 동원한 수량경제학을 강조한다. 조선후기 농업을 전공한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경제연구진이 전국 수리조합 창고를 뒤져 장부를 발굴해 쓴 는 조선후기·일제하 농업연구의 기반이 되는 연구서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책이다. 그런데 일제하 공업·노동을 전공한 허 교수가 이 책의 기반을 흔들었다. 2005년 이라는 책으로 식민지 시대 개발을 비판한 그는 2011년 이라는 책으로 아예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이론적 근거인 농업부문 허구를 폭로했다.
경제학자로서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
낙성대경제연구소(김낙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370쪽)가 추계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질농업생산액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1930년까지 평탄한 수준을 유지하다 다시 1940년까지 급속히 상승한다. 그리고 1942년까지 평탄하게 유지되다 끝난다. 결국 191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의 농업생산량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일본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이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한 기간으로 생산량이 증가할 합리적 이유가 없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지면적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일 것이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일제가 산미증식운동을 벌인 1930년대 이후 농업생산량이 비슷한 것도 오류”라고 말했다. 특히 이 그래프는 1942년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급격히 악화한 경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1943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졌다”면서 “이것을 빼고 일제가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개발이 조선인 생활을 향상시켰다는 주장도 “일제의 하천개수사업은 철저히 일본인과 일본군을 위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업생산량은 해방 후 급격히 늘었고, 한국 경제는 일본에 의해 성장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허 교수가 이렇게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라서 가능했다. 숫자와 통계를 들이밀며 얘기하면 국사학계 학자들은 반박을 못한다. 허 교수는 “이영훈의 특징은 숫자를 들이밀며 얘기해 반박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그 숫자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 허수열 교수가 이용훈 <반일종족주의>통계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그는 이영훈 이사장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에 대학도 같은 과를 다녔으니 매우 친하다. 학회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도 점심 때 같이 웃으며 식사하는 사이다. 허 교수도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으로 나를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들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이영훈 이사장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서울대생이며 대학생 시절 위장취업을 한 노동운동가다. 이 이사장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돼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겨우 복학했을 정도다.
사실 운동권에서 역사문제는 매우 치열한 ‘주제’였다. 특히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사회-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로 가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1930년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에게 맞추려면 조선에서 농업의 몰락과 자본주의 시작을 어디로 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경제사학자 중에 운동권·진보 성향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이사장 역시 백남운 이론에 심취하다 1980년대 17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가 오히려 줄고 19세기 조선 농업이 몰락하는 것을 발견, 백남운 이론에서 탈피했다. 이 이사장의 스승인 안병직 교수 역시 진보적 학자로 일제강점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설명했다. 이는 해방 후 미국 식민지로 이어져 80년대까지 운동권의 주요 이론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학문의 세계도 정치판과 비슷”
식민지근대화론은 1980년대 중반 ‘사회 구성체 논쟁’ 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진보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한말·일제침략하 자본주의 근대화론’ 논쟁이 일었다. 1922년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포기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허 교수는 “1970~80년대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던 시기에 중국 사회주의가 평등사회 모델로 많이 언급됐다”면서 “그러나 1991년 사회주의 환상이 무너지자 운동권이 대거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탄생이다. 그는 “극좌에서 중간까지만 갔으면 좋았는데, 극우로 간 것이 문제였다”면서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를 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제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의 정부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한다.(연세대 류석춘 교수의 위안부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일제하 공업·자본·노동이 내 전공이다. 1930년대 주로 북한지역에서 공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노동수요가 증가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노동규제를 실시한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일본·조선 경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강제징용이 시작된다. 조선총독부는 알선이라 하지만 실제는 강제다.”
-일본이 계속 주장하고, 우리나라 학자상당수도 종군 위안부 모집에 정부의 강제성 문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말 없는 것인가, 학자들이 찾지 못한 것인가.
“그런 문건을 조선총독부가 남겨 두겠는가.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총독부는 계속 서류를 소각했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일본 방위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개하지 않는다.”
-스스로 경제사학계의 ‘소수파’라고 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논박하는 교수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학문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치판과 비슷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교수 아래서 반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나. 경제사학을 전공해 밥먹고 살려면 서울대 이외에는 힘들다. 충남대의 내 밑에서 경제사학을 전공해 어느 대학 교수로 갈 수 있을까. 현실이 그렇다. 다수가 그러니 그냥 침묵하고, 나와 같이 엉덩이에 뿔난 사람만 소리치는 것이다.”
허 교수는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이영훈·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과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냈다. 대학 때 이영훈만큼 운동권은 아니었다. 조교를 거쳐 안병직 교수로부터 1985년 박사학위도 받았다. 1978년부터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 교토대 초빙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등을 지내고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가만히 허 교수를 보고 있으면 ‘점잖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 앞에서 기자의 뺨을 때린 친구 이 이사장과 180도 달라 보였다. 우정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겠지만 그래도 친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 기자가 임종국상 수상자이지 않았으면 인터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하기 전 2006년 임종국상 수상소감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 수상소감에는 13척으로 330척과 맞선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인용돼 있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사내가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횡행하는 지금 그의 심경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 같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
BTS, (케이) 팝의 역사를 다시 쓴다 / 이정엽
3·1운동 100주년에 ‘북간도’로 향한 이유 –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역사’ / 반태경
서평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보는 새로운 문제의 제기 –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 정재훈
책소개
한국의 20세기는 식민과 분단으로 인해 전쟁과 생존의 위협이 상존하는 시기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전쟁의 압살과 청일전쟁, 20세기 전반기의 러일전쟁,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남북 두 분단정부의 수립, 6·25전쟁 등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로 인해 민족사회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에 의해 비민주적 통치가 진행되었고,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시민이 되기보다 절대적 순종을 덕목으로 하는 신민이 되기를 요구 받았습니다. 물론 20세기에는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따른 거대한 전쟁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사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단 세계적 냉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은 냉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오히려 치열한 열전 상태로 돌입했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21세기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던 그때를 떠올려봅니다. IMF의 여파와 세기말 증후군이 겹치면서 회색빛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세기 전반에 비해 후반기에 우리 사회가 성취한 역사적 성과를 떠올리며 21세기는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이 컸습니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던 군사정부의 그늘과 지역주의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요하기 시작하고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이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여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우리의 현실을 살펴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핵전쟁이 곧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는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남북의 평화는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북미 정상의 협상은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갈증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조건이 그나마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대신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과 이란의 전쟁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리아 난민을 비롯한 지구촌 시민의 삶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16년에는 촛불시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굳센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지구를 휩쓸고 간 자리에 남긴 노동유연화, 위험의 외주화와 같은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절반의 절반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가 어떠한 시대가 될 것이라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역사를 볼 때 20세기가 직면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21세기 인류와 우리 민족사회가 계속해서 지고 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제에 접근하기 위한 역사학의 선택 가운데 하나가 20세기 식민·분단·전쟁 등 온갖 폭력에 맞섰던 저항을 조명하고, 민주·평화·평등의 시선이 확산되도록 노력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금단(禁斷)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구역 또는 범위 안에 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또한 금기(禁忌)는 ‘마음에 꺼려서 싫어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단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전자가 주로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스스로 애써 기피하려는 의식의 측면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체제가 철저하게 막아선 금단의 영역을 넘은 저항을 발굴함으로써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시선을 갖는 것, 이 또한 『내일을 여는 역사』가 상상하는 내일을 여는 방법입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편집위원회는 2019년 가을호(통권 76호)에 ‘여는 글’을 포함해 모두 23편의 원고를 수록했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북한에 대한 내면적 이해, 남북의 민간 교류를 세밀하게, 그렇지만 맛깔스런 필치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여러 편의 글을 실었습니다. 역사적 저항과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오늘날의 시민행동을 연속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통일에세이’에는 다양한 분야의 남북 교류사업의 성과와 과제를 담았습니다. 신주백은 2000년대 이후 학술 교류를 역사학 분야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와 정치적 배려 그리고 경제적 지원이 맞물릴 때 교류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권영길은 평화철도 연결운동이 현실적인 평화 만들기 실천의 길이고 이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두대간 사진전을 열기도 했던 뉴질랜드 사람 사진가 로저 세퍼드는 2011~2012년, 2017~2018년의 종주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남북한의 사람들, 문화, 그리고 산도 똑같았다면서 분단이 바꾸지 못한 것들을 말합니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주제인 코민테른과 신간회를 다뤘습니다. 김영진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코민테른이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에 관여했던 역사적 사실과 연구경향 등을 설명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한 코민테른의 ‘권위’가 각 지역별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폭넓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윤효정은 신간회에 대한 이해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민족통일전선론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조망한 뒤, 신간회 평가를 해소 문제에 국한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부정을 넘기 위해 중앙 및 지회가 대중과 접촉하면서 벌인 활동 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합니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오늘날 현재적 논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해와 편견도 섞여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세 가지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류동민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상관성을 정리했습니다. 양자의 양립 불가능성이 정치담론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가지 입론의 역사적 연원을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정현진은 전교조가 박근혜 정부 사법부를 통해 법외노조가 된 부당성과 합법화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정욱식은 분단체제 해체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국방비 동결을 추진해야 하며, 2019년 현재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7위, 일본이 6위, 북한은 18위로 평가되었다는 구체적인 사실도 제시합니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고투한 인물 군상의 모습을 주로 다뤘습니다. 먼저 음악가 채동선과 홍난파의 삶을 비교한 고(故) 노동은의 유고를 실었습니다. 민족음악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홍난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채동선의 삶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순섭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힘쓴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의 일대기를 간명하게 서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가 그렇듯이 그녀도 월북한 이후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김형수의 김남주 연대기는 시대의 변화와 시인의 삶을 연결하면서, 또 그가 썼던 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혁명을 고민한 김남주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한편 임경석은 이번 호부터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코민테른 인명사전’을 연재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기획된 인명사전에 수록한 14명의 인물 정보를 순차적으로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을 위해 집필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건조한 문체이지만, 강상주, 박진순, 박애 등 한인 사회주의자에 대해 기존 연구보다 한층 보강된 내용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6년 출간된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뛰어넘는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한 종합적 정리가 언젠가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톺아보기 위한 ‘사실체크’에서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과 일제하 수리조합사업을 분석했습니다. 한국의 민간협동조합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소남은 이 운동에 사회운동과 적극적 연계, 좌우 양편을 넘는 통합적 활동,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지원, 생명사상의 수용 등의 특징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연대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박수현은 수리조합사업이 일제 통치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 일방적 관제사업이었기 때문에, 중소지주와 자작농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조직적 저항이 속출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출간으로 재점화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지속적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동전 오기영 전집』과 『대명률』을 다뤘습니다. 『동전 오기영 전집』은 일제하·해방직후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삶을 영위한 오기영의 생각을 담은 책 모음입니다. 장규식은 오기영을 안창호의 대공주의를 계승해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 자유주의를 제창한 인물로 조명하면서 통일독립을 열망한 그의 활동을 높게 평가합니다. 『대명률』은 조선왕조 형법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서적입니다. 한상권은 14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대명률』이 조선에 수용·적용된 과정을 상세히 해설했습니다.
‘북한의 이해’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강응천은 북한의 국호가 조선민주주의공화국도 아닌, 조선인민공화국도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인민민주주의를 향한 후진국 사회주의의 기호이자, 민주기지론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문범강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출발한 북한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이 독자적인 조선화로 발전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조선화 화단의 상황을 소개합니다. 외부의 시선과 달리 활발한 논쟁과 화가의 독자적 작품세계가 실재함을 말합니다. 컬러로 수록한 작품을 직접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최열이 연재하는 ‘예인열전’은 지난 호에 이어 겸재 정선의 작품세계를,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과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문화평론가 이정엽이 케이팝(K-pop)의 흐름 가운데 방탄소년단(BTS)의 위치와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만든 반태경 피디는 명동촌으로 대표되는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삶을 영화화한 동기와 역사 속 기독교 신앙인이 펼친 사회적 실천의 가치를 담담하게 전달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평’에서는 정재훈이 최근의 화제작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다뤘습니다. 변화보다는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위 책이 왕조교체의 원인과 성리학 수용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역사를 큰 줄기에서 보는 시도들이 더욱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20년이 지난 21세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했는데, 『내일을 여는 역사』도 바로 21세기의 첫 해인 2000년 3월에 첫 호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제 성년을 맞은『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21세기와 함께 호흡해왔다고 할 것입니다.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지도 아닌, 폭넓은 대중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시사주간지도 아닌, 어떻게 보면 ‘주변’ 또는 ‘경계’에 서서 지난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주변과 경계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낳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금기를 넘는 시선이 이 지면을 통해 넘쳐날 수 있도록 더 정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김민철 교수, 발표자로 조목조목 비판 “일 극우 위안부·강제동원 부정 논리 뉴라이트가 진부한 레퍼토리 답습”
주익종 “한반도 재산 85%가 적산” 주장 김창록 “일 재산은 식민지 수탈 산물 일 정부와 법원도 개인청구권 인정”
이영훈 “위안부, 성노예 아니었다” 주장 강성현 “위안부 강제동원 광범위했고 공창제는 전쟁 전 일 형법에도 불법”
▲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 공동주최로 ‘역사부정을 논박하다 <반일 종족주의> 긴급진단’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김민철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 김창록 경북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사무처장. 김명진 기자[email protected]
“강제징용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 등의 극단적인 역사 왜곡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반일 종족주의>를 향해 학자·전문가들이 포문을 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는 1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반일 종족주의> 긴급토론회를 열어 이 책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했다.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학술단체 차원의 대응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문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듯, 80명 가량의 청중이 찾아와 토론장을 매웠다.
이날 발표자로 나온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한국근현대사)는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자유주의사관론자’라 자칭하는 극우 지식인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사학’에 빠졌다고 공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한국의 뉴라이트들이 이런 진부한 레퍼토리를 내세우는 건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싸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했다.
토론회에선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 조처의 배경이 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논박이 이뤄졌다. 앞서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해방 직후)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은 한반도 총재산의 85%에 달했다. 애당초 한국 측이 일본에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재산은 대한제국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니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고, 일본인의 사유재산도 식민통치의 비호 아래 이뤄진 구조적 수탈의 산물이므로 정당한 재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주 연구위원의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는데 한국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는 주장도 문제 삼았다. 김 교수는 “개인의 청구권은 협정에 의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일 양국 정부와 법원에 의해 확인되었다”며 “주 연구위원의 논리는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다’고 전제할 때만 정합성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베 정부조차 단언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전제”라고 꼬집었다.
<반일 종족주의>에 나온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주장은 이미 학문적으로 극복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 책에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합법적인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된 것이며, 위안부는 폐업의 권리와 자유를 가졌으므로 성노예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현재의 연구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식민지 공창제를 모델로 하되 더 억압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라는 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동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공창제는 전쟁 전 일본 형법과 국제법으로도 불법이라는 점, ‘위안부’의 생활이 성노예와 같다는 점, 더 나아가 식민지 공창제뿐 아니라 일본 본토 공창제 역시 성노예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표자들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정치적 의도도 지적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필자 대부분은 뉴라이트로서, 이들이 주도했던 대안·교학사·국정 역사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되었다.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의도는 일본 극우세력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편찬하는 모임’같이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수층을 결집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창록 교수는 “이영훈이 조정래 소설가를 비난하기 위해 동원한 ‘광기어린 증오의 역사소설가’라는 말이 과연 누구에게 진짜 어울리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1919년 치열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조명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린다.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는 오는 4일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개최된다.
학술회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며, 서울시·강북구·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한다.
주최 측은 “3·1운동 100주년인 올 한 해, 자유 평등 민주 평화라는 3·1정신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제대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극우세력과 뉴라이트 등 한국 내 동조자들의 역사부정과 과거로의 퇴행은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결코 용이하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며 “그만큼 이들의 궤변을 원천 봉쇄할 연구 성과의 축적과 활용도 절실해지고 있다”고 학술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3·1운동 100주년을 정리하면서, 1919년 그때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추구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일본에서 새로 발굴된 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이시카와의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 준비 자료 을 처음으로 집중 분석한다. 이 문서들은 1차 관변자료로 3·1운동의 발상에서 지방으로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그 전개과정과 구체적 실상은 물론 일제의 탄압상과 대응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문서는 일제 검사 이시카와가 1919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어난 함경도 지역 3·1운동 참여자를 기소하기 위해 작성한 115개 사건, 총 950여 명의 관련자에 대한 기록으로 재판자료가 거의 멸실된 북한지역 3·1운동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는 희귀 자료다. 발표자들은 문서를 면밀하게 분석해 3·1운동 당시 함경도 지역에서 전개된 지하조직 결성, 지하신문 발간, 관공서 방화, 관공리 퇴직권고 등 다양한 형태의 항쟁과 새롭게 밝혀진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 행적 등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지난 8월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기념관은, 문서철을 탈초·번역하고 내용 분석을 거친 뒤 해제를 붙여 Ⅰ,Ⅱ 두 권의 책자로 펴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기소 준비자료에 등장하는 3·1운동 관련자에 대한 심층 검증과정을 거친 뒤, 독립기념관과 함께 공동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 북한 학계와도 관련 자료의 제공 등 협력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와 Ⅱ부 발표 및 Ⅲ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된다.
개회식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 그리고 한완상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의 격려사로 이뤄진다.
Ⅰ부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주제로,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과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사자료센터 연구원이 발표한다.
Ⅱ부 ‘이시카와 자료와 함경도 지역 3.1운동’을 주제로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발표한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30일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해방 이후 73년 만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법적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겁니다. ‘불법 식민지배’라는 맥락 속에서 피해자들의 고통과 권리, 그리고 일제의 위법성이 또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일철주금 대법원 판결문, 2018.10.30.)
그런데 ‘반일종족주의’는 이 판결이 명백한 역사 왜곡에 근거한 ‘황당한 판결’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판결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강제동원은 과장을 넘어 날조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게 이영훈 전 교수와 이우연 박사를 비롯한 저자들의 생각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가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도 이 ‘강제동원’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지난번 ‘위안부’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강제동원’ 이슈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이우연 박사는 지난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 인권이사회 정기 회의에서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제네바본부 회의실에선 믿기 힘든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일본 극우단체 국제역사논전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참석한 이우연 박사가 강제동원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나선 겁니다.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고, 징병 역시 합법적이었습니다. 일본인, 한국인 구분 없이 임금은 공평하게 지급됐습니다. 오히려 한국인 임금이 더 높았습니다. 전쟁 기간 한국 노무자들은 쉽고 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우연 박사, 2019.7.2. 스위스 제네바 UN 인권이사회)
이러한 주장은 책 반일종족주의에도 그대로 소개됐습니다. 샤머니즘에 가까운 반일종족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사법부와 행정부가 ‘자발적 노무동원’을 강제연행과 노예노동으로 오해했다는 게 골자입니다.
특히 이우연 박사는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게 된 것은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임금 역시 정상적으로 지급됐고, 일본인보다 임금이 낮은 경우는 민족 차별이 아니라 대부분 조선인이 탄광 작업의 경험이 없어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강제저축이나 업무 중 구타와 같은 전근대적 노무관리도 없진 않았지만, 이는 일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습니다.
■ “일베류’ 역사 선동” 반박…일본과 국제사회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
▲ 지난 1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는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민철 경희대 교수는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싸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왜곡과 무지, 혐오 발언으로 가득 찬 역사부정론자들의 ‘일베(일간베스트·극우 성향 커뮤니티)류 역사 선동'”이라는 겁니다.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이른바 ‘자유주의사관론자’라 자칭하는 극우 지식인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사학'(自虐史學)에 빠졌다고 공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강제노동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무덤 속에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역사 부정론이 한국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다만 선수만 한국의 뉴라이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치의 발전도 없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면서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인 양 의기양양한 것을 보면 무척 당혹스럽다.”(김민철 경희대 교수)
김 교수는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민족차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증언과 공식 자료들은 차고 넘친다”며 “반일종족주의는 이런 자료와 증언을 모두 무시하고 심지어 일본 사법부와 국제노동기구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 폭력 동원·임금 차별…”인질적 약탈적 납치였다”
▲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는 빗속을 뚫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했습니다.
일본 내무성이 조선의 민정 동향을 조사한 ‘복명서(復命書)'(1944.7.3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일제의 폭력적인 동원 방식이 잘 설명된 자료 중 하나입니다.
– “조선인 노무자를 일본으로 송출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질적 약탈적 납치 등이 조선 민정에 미치는 악영향도 악영향이지만, 송출이 곧 그들의 가계 수입의 정지를 의미하는 경우가 극히 많은 모양이다.”
– “징용과는 별도로 기타 어떤 방식에 의하든 출동은 모두 납치와 같은 상태이다. 그것은 만약 사전에 이를 알리면, 모두 도망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습, 유출(誘出), 기타 각종 방책을 강구해서 인질적 납치상태의 사례가 많은 것이다.”
일제 말기 전남 장흥의 유생이 쓴 일기에도 강제동원의 실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동원의 폭력성과 강제성은 더욱 짙어졌습니다.
– “1943년에는 면리원들이 마을을 수색하여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사람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잡아가기 시작했다. (…) 도망자가 많아지자 모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군면의 관리들이 밤중에 마을을 습격해서 노동자를 잡아갔으며, 모집된 자가 도망가면 가족 중 1명을 대신 데려가서 머릿수를 채웠다.”
임금 차별 경향 역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김민철 교수는 조선인 임금은 금속광산과 철강업에서는 일본인의 60% 정도였고, 조선인 광부의 임금은 일본인 광부의 70% 전후였다고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업주가 ‘강제저축’을 이유로 들어 매월 임금의 일부를 가져가서, 조선인 광부가 손에 쥘 수 있었던 실제 월급은 10엔 정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강제저축은 퇴직 때 받을 수 있게 돼 있었지만, 조선인의 절반 이상, 지방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도망·소재불명·불량송환 등으로 정상 퇴직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 “학문적 사망선고”…이제 기댈 곳은 대중뿐
▲ 이영훈 전 교수가 교장으로 있는 ‘이승만 학당’은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를 운영하며 대중에게 반일종족주의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전 교수 등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우리 안의 견고한 ‘통념’에 대해 거듭 경고합니다. 실증적으로 취약한 한국인의 통념과 달리, 이 책은 실증을 토대로 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 학술적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다며, 잘못으로 판명될 경우 주저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이들이 ‘식민지근대화론’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지만, 지금까지 비판을 수용하거나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이 책의 상당 부분 또한 그동안 많은 지적과 비판을 받았음에도 원래 그대로”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젠 “‘자기 확신에 빠진 오만함’이란 말도 과찬일 정도로 광적인 수준”이라는 지적인데, 박 사무처장은 이들이 책을 낸 의도에 대해서도 이런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필자들은 대부분 뉴라이트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이 주도한 ‘대안교과서’·’교학사 교과서’·’국정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 처분되었다. 이 교과서들이 인정을 못 받았다는 것은 이들에게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기댈 곳은 이제 학계가 아니라 대중들, 그중에서도 과거 독재 정권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층이었다. 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수층을 결집하고, 궁극적으로 극우 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것,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 이들의 의도일 수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주장을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설파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인데, 일본 극우단체 ‘새역모'(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행보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학문의 자유’와 ‘역사 부정’ 사이에서, 이제는 진지한 대응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2006년 8월, KBS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쟁점을 다루는 다큐 를 제작, 방영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장면이 연출된 탓에 1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야스쿠니 관련 이슈로 회자되곤 한다.
바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2013년 사망)’가 출연했기 때문인데, 그녀는 방송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희생된 피해자 유족들(한국, 대만)과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대담을 나눴다.
이희자(한국 측 피해자 유족): “…왜 내 아버지가…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서 죽어야 했던 그 당시 2만 1000명의 조선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야 하는가 (중략) 지금도 그 당시 대만이나 한국, 남의 나라를 지배했던 그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하려고 하니까 문제 삼는 것입니다.”
도조 유코: “그럼 나라의 룰로 그 사람들을 차별해서 당신들의 아버지들을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지 않았다면 ‘일본인으로 싸웠건만 왜 합사시켜주지 않는가?’라고 화내지 않았을까요? 어찌 됐든 일본인으로 싸워주셨으니까… 일본인으로 싸우다 돌아가신 분은 모두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이 전쟁에 나가셨던 당신 아버지 같은 병사와 국가 간의 약속이었어요.”
(중간 생략)
이희자: “그것이 (한국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하는 것) 자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조 유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 없이 신으로 모시는 일본의 시스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 당신의 슬픔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 아버님의 영혼이 평온하게 쉬고 계시는데 이런 식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흔들어대면 아버님이 좋아하시리라 생각하시나요? 분명히 아버님은 슬퍼하고 계실 겁니다.
기막힌 대화가 이어졌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도조 유코는 “야스쿠니 신사에 왜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합사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 신분으로 싸웠으므로, 또 죽어서는 야스쿠니에 간다는 약속을 하고 싸웠으므로 합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요지로 답했다.
나아가 ‘이런 야스쿠니의 시스템이 자랑스럽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평화롭게 쉴 수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도조 유코, 그녀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할아버지 도조 히데키를 제신으로 평안히 모시고 만나며 자부심을 보상받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처럼 비쳤다.
반면 그녀의 망언에 마주한 이희자(76)씨는 1944년 일본군의 강제징용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피할 수 없으니 빨리 다녀오겠다”던 아버지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남겨진 가족들은 그대로 태평양전쟁 피해자 유족이 됐다.
세월이 흘러 이희자씨가 강제 징용된 아버지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97년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었다. 일제는 살아 있는 아버지를 빼앗았고, 야스쿠니는 죽은 아버지까지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이희자씨에게 야스쿠니 신사는 현존하는 지옥이 아닐 수 없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야스쿠니의 한국인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인지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라 함은,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미화, 선전하는 데 앞장선 군국주의 시설이다. 이는 주지의 사실로, 야스쿠니 신사를 거론할 때 언론과 매스컴이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하여,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응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에 2만 10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무단으로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학계의 연구가 본격화된 것도 비교적 최근 일이며, 이희자씨와 같은 활동가들의 노력을 통해 조금씩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국회 차원의 관심은 2005년 당시 강창일 의원 등 79명이 낸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합사 취하 및 일본 각료 등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단을 촉구하는 대한민국 국회 결의안’이 거의 유일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 결국 문제 해결의 공은 유족, 즉 야스쿠니 신사의 무단 합사로 피해를 입고 있는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유족들은 2001년, 2007년, 2013년 3회에 걸쳐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에 한국인 합사 철회 소송을 제기했으나 앞선 2건은 기각, 마지막 2013년 소송은 1심 패소한 상태다(2019년 5월 28일 도쿄 지방법원 판결).
▲ 지난 5월 28일, 야스쿠니 신사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패소판결에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민족문제연구소 영상 갈무리) ⓒ 최우현
야스쿠니가 자행한 무형의 폭력과 강압
야스쿠니 신사 합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행위가 유족들의 동의를 전혀 받지 않은 ‘무단’ 합사라는 점이다. 실제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조선, 대만)의 군인, 군속 출신의 전사자 합사에 착수한 것은 1959년경. 그러나 이 행위는 매우 위법적인 행위였다.
왜냐하면 1959년 한국은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으며 ‘국적(國籍)’도 일본에 소속돼 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1952년, 일본 법무부 통지에 의거 일본 내 거주하는 한국인은 일본 국적을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국적 조항을 근거로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전후 보상 대상에서 배제했다. 쉽게 말해, 이제 국적도 바뀌고 국가의 지위 등도 바뀌었으므로 보상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본 정부가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이러한 국제적 지위의 변동과 인식의 변화를 아예 무시하고 조선 출신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무단 합사한다. 실상 이는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일본의 역사학자 아카자와 시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야스쿠니 신사>에서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가 “식민지 출신의 합사를 천황과 국가로부터 받는 은혜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등 패전 후 발생한 커다란 변동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1940년경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참배객들(야스쿠니 신사 홈페이지) ⓒ 최우현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나서 잘못된 상태를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유족들의 요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족들에게 일체의 통지도 하지 않았던 폭력적 무단 합사를 철폐하고 조상들의 넋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은 무엇일까?
납득할 수 없는 야스쿠니의 논리
앞서 소개한 다큐에서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대변한 도조 유코씨가 발언을 통해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소개한다, 실제로 도조 유코 씨의 주장은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
도조 유코: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합사했다고 주장하시지만… 이것은 일본의 룰이었어요. 전사한 사람은 어떻든지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은 일본의 룰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타이완도 한국도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차별하지 않고 합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도조 유코: “(이희자 씨에게) 아버님의 심정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당신의 척도로 아버님의 심정을 전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당시 한국, 타이완의 아버님들은 정말로 용감하게 싸우셨습니다. 그것을 60년도 지난 지금 아버님을 야스쿠니에서 빼내려고 하는 것은 아버님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래도 아버님을 빼내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또 하나, 일단 합사를 하면 영혼들은 하나의 방석처럼 되어버립니다. 이 사람을 빼내고 저 사람을 빼내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합사(合祀)라는 말은 사전에 있어도 분사(分祀)라는 말은 없습니다.”
* (2006.8.13. 방영)
정리하자면 ▲그 당시(전사한 시점)에서는 조선 출신자도 모두 일본인이었으므로 죽은 후에도 일본인이라는 점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다는 생각으로 싸우다 죽었다는 점 ▲교리상 하나의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한국인 합사’를 철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수천 년간 이어 내려오고 지켜온 전통적인 사생관과 죽은 자를 위로하던 풍습 따윈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야스쿠니 신사의 사생관, 종교 교리를 강요하는 논리다. 이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는 민간 풍습에 대한 일본 국가 권력의 폭력적 개입으로 인해 치유되지 않는 평생의 한”이라는 지영임 교수의 비판이 있기도 했다(지영임(2013), 야스쿠니 재판을 통해 본 한일 종교관의 쟁점과 해결방안).
위자료 ‘1엔 소송’
이러한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은 오랜 기간 주위로부터의 오해와 편견에 시달려 왔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전후 사정은 알아보지 않은 채 이들을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시선들이다.
“어떤 사람은 속 모르고 야스쿠니에 있다고 하면 뭐라고 말하는 줄 알아요? 친일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얼마나 일본에 충성을 다했으면 야스쿠니에 모셔놓고 그렇게 잘 대접하는데 무슨 그게 한이 되냐고 합니다. 아주 죽을 것 같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출처: 박남순 / 야스쿠니 무단합사 피해자 후손 인터뷰( ‘19.3.5.)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위 박남순(76)씨의 아버지 박만수씨는 1942년 11월에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브라운 섬에서 희생됐다. 그와 함께 야스쿠니 합사 철폐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이명구(81)씨의 아버지 이낙호씨도 마찬가지로 1944년 군속으로 징용, 남양군도 팔라우 섬에서 사망했다. 모두 일제의 강제징용에 의해 가족을 빼앗겼다. 이들의 이야기는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라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증언집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고 야스쿠니의 제신으로 모셔진 한국인 영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경우를 일반적인 일로 전제하고 2001년 이래 20년 가까이 일본 정부, 야스쿠니와 싸워온 유족들을 친일이라 매도할 순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악질적인 오해는 이들 유족들이 ‘돈’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전혀 맞지 않은 사실이다. 실제 소송에 참여한 한국인 유족들은 매번 위자료(손해배상)를 요구하긴 했지만 그 액수는 불과 ‘1엔'(약 10원). 그야말로 상징적인 액수다.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유가족들은 다시 소송(2차 항소심)을 준비 중이다. 1심 도쿄 지방법원 패소의 아픔을 넘어 주저 없이 상급 재판소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1심 판결까지만 해도 5년 7개월이란 긴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항소심에는 유족들이 납득할 만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지난 5월에도 일본 도쿄 지방법원은 판결 당일 5초가량의 판결문 낭독만 하고 판결 이유조차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무책임하다. 그 한마디를 하려고 5년 7개월을 기다리게 했단 말인가.
이처럼 현 일본 정부와 사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향해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일본이 한국인 합사의 잘못됨을 인정하려면 강제징용의 잘못된 역사를 다시 한번 들추어내고, 무단 합사와 같은 무형적 폭력 행위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우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지금의 일본 정부가 스스로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상이다. 광복 후 7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국제사회가 인정한 전쟁 범죄의 가해자는 여전히 당당하고 피해자는 그 몰염치에 상처받고 있다.
10월 17일(목)부터 3일간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추계예대제’가 거행된다. ‘야스쿠니 뉴스’가 또 한 번 포털의 메인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올해는 한일 양국의 역사 전쟁 한가운데 방치된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는 건 어떨까.
▲ ‘진지하게’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한일 역사를 배우기 위해 방한 중인 일본 주오대학부속 고등학생들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보며 연구원의 한일 식민지배 역사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2019.10.22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장우리 기자 = “야스쿠니(靖國) 신사는 어릴 때 도시락 싸서 소풍 가던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22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일본인 여고생 카와세 아스카(17)양은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물관에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 할머니의 역사 강연을 들은 카와세 양은 “몇 년 전에도 한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방문은 사뭇 다르다”며 “일본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식민지배 역사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도쿄의 주오(中央)대학부속고등학교 학생 40명은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해 일제강점기의 상흔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들뜬 표정으로 전시실 관람을 시작한 이들은 식민지배의 실상에 대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며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자료집에 틈틈이 필기를 하기도 했다.
이번 역사 답사를 기획한 재일교포 교사 고화정(40)씨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한일 간 과거사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며 “학생들이 스스로 역사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카미무라 아키코(33)씨는 “그동안 학생들이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K팝과 드라마를 활용해 한국 문화를 가르쳐 왔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역사적 배경을 직접 현장에서 배워보자는 취지로 이번 일정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학생들 역시 이번 답사가 한국을 더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자신을 ‘아미'(방탄소년단의 팬클럽)라고 밝힌 카토우 유나(17)양은 “전시실에서 벽관(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기 위해 벽에 홈을 파서 만든 투옥실) 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며 “직접 눈으로 보니 더 와닿는 게 많았다”고 말했다.
다카츠 유스케(17)군은 “일본에 돌아가서 관련 역사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 한일 역사 투어 나선 일본 고등학생들
(서울=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한일 역사를 배우기 위해 방한 중인 일본 주오대학부속 고등학생들이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보며 연구원의 한일 식민지배 역사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2019.10.22 [email protected]
일본 학생들을 만난 이희자 할머니는 “일본 때문에 겪었던 불행한 이야기를 먼저 하게 돼 미안하다”면서도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가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고 불행한 가족사를 설명했다.
이어 “몰랐던 사실을 알아간다면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러분의 마음 한구석에 내 이야기가 남는다면 정말 보람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학생들은 남영동 대공분실, 서대문형무소 등을 더 돌아본 후 오는 24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앞서 21일에는 명성황후 시해 현장과 평화의 소녀상도 방문했다.
중고교 <역사> 국정교과서 진필진으로 유일하게 참여했던 장교를 국방부가 진급시키려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역사단체들이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22일, 역사정의실천연대는 성명을 내고 “국정교과서 현대사 집필진이었던 나종남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가 무려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령 진급 심사를 통과했다고 한다”면서 “국방부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반 헌법적인 역사관을 지닌 인사를 대령으로 진급시킨 데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고, 진급 결정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는 “국방부가 적폐청산은커녕 박근혜 정권의 교육적폐 중의 적폐인 국정 역사교과서의 집필자에게 대령 진급이라는 ‘훈장’을 달아 줌으로써,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무색케 했다”고도 지적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전국역사교사모임, 흥사단 등 450여 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 관계자는 이날 “국방부가 나 교수에 대한 승진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육사를 항의 방문할 예정이며, 1인 시위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오마이뉴스>는 지난 21일자 기사 “국정교과서 집필 장교, 15 대 1 경쟁 뚫고 대령 진급?”(http://omn.kr/1le84)에서 “국방부가 2016년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현역 장교를 대령으로 진급시킬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역사교육단체 대표자들은 물론 군 안팎에서도 ‘적폐 교과서 ‘복면’ 집필자에 대해 책임을 묻기는커녕 진급을 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처음 보도한 바 있다.
▲ 부산지역 교육단체인 부산학부모연대가 23일 부산시교육청 본관 앞에서 친일파 교가 사용 부산지역 학교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보성 기자
“과거사 청산하자면서 학교 행사 때마다 친일파 교가를 부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23일 부산시 교육청 본관에 모인 부산지역 학부모들은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부산 학부모들은 역사를 배우고, 정의를 세워야 할 학교에 친일잔재가 버젓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일본의 강제징용 배상 거부에 이은 수출제재, 경제전쟁 본격화로 곳곳에서 일본 규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아이들의 배움터인 학교에서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더디다. 특히 학교를 상징하는 교가가 친일파 작곡·작사가의 손을 거쳐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는 것은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부산지역 교육단체인 부산학부모연대는 친일파 작곡·작사자들이 만든 교가임에도 이를 바꾸지 않고 있는 학교 명단을 전수 조사해 이날 부산시교육청 본관 앞에서 공개했다. 명단을 보면 친일파들의 교가를 지금껏 사용 중인 부산지역의 학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 16곳에 달한다.
이들 교가는 군국가요의 나팔수였던 이흥렬,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을 선동했던 김성태와 김동진, 일제 전쟁물자 공출의 공신인 이항녕이 각각 작사·작곡을 맡았다. 이흥렬은 일제 강점기 시기 내내 전국을 돌며 군국가요를 보급한 친일파다. 김성태 역시 ‘용사가 되는 날’, ‘우리들은 제국군인’ 등 노래로 전쟁참전을 선동했다.
김동진은 만주악단협회, 신징음악단 공동주최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악국 발표회’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의 작품을 내놓는 등 친일 행적을 일삼았다. 관료였던 이항녕은 경성제국대 졸업과 동시에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친일 활동을 펼쳤고,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해 식량공출에 앞장선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일제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더 큰 문제는 친일파 작곡 교가에도 이를 칭송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A 고교의 경우 교가 소개란에 “한국의 중견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로 활동했던 이흥열 교수에 의해 (교가가) 고쳐졌다”며 “전자의 곡은 고음 위주나 후자의 것은 정중하고 장중한 느낌을 줘 힘에 넘친다”고 설명했다. 곡에는 학업정진으로 민족의식 고취 등을 노래한 내용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밖에 성차별과 군사풍 분위기의 교가 내용 역시 문제가 됐다. ‘부덕의 선봉, 고운 요조들, 행실을 닦아, 순결한 목련처럼’, ‘대한의 일꾼, 충성의 우리의 넋, 애국충성 가슴에 새겨, 함포연기 자욱한데, 태평양에 전선을 띄우고’ 등 시대에 동떨어진 표현이 많았다. 일제 문화 통치 시기 교가 제정 확산으로 일제 군가와 비슷한 군가, 행진곡 형태의 노래도 여러 학교에서 발견됐다.
이에 대해 부산학부모연대는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아직도 학교 행사 때마다 부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시 교육청은 우선 교가부터라도 청산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구포초등학교의 학부모인 이인수 씨는 “친일파 재산조차 제대로 환수 못 하고, 국어책에는 친일 시인의 시가 있고, 친일파가 장학사업을 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곡을 쓴 친일파의 노래를 배운다”며 “아직도 우리는 일제의 그림자 속에 있다”고 비판했다.
D고교의 졸업생인 박강우 씨도 “최근에야 우리 교가가 친일파의 손에서 탄생한 것을 알게 됐다”며 분개했다. 그는 “항일 운동을 강조하고 이를 자긍심으로 삼는 학교에서 침략전쟁을 찬양한 자의 곡이 교가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다”면서 “즉각 교가를 교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정은 부산학부모연대 대표는 “사회적으로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서 친일파 교가 외에도 다수의 교가에 잔재가 남아있다”면서 “과거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워야 할 미래세대의 공간에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그늘이 드리워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친일 작사·작곡자의 교가 사용 학교는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있다. 최근 바른미래당 이찬열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친일파 교가를 사용 중인 학교는 충남 31곳, 경북 30곳, 전북 25곳, 충북 23곳, 전남 18곳, 부산 16곳, 광주 13곳, 강원 10곳, 대구 6곳, 경기 6곳, 경남 5곳, 대전 2곳, 울산 3곳, 서울 1곳 등 전국적으로는 모두 189곳에 이른다.
▲ 광복절인 8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아베규탄 촛불문화제에서 시민들이 경제 도발을 일으킨 일본의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손피켓과 친일인명사전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9.08.15ⓒ정의철 기자
▲ 10월 22일 장남 노관우씨가 고 노동은 교수 대신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 장관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평택시민신문] 평택시가 22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2019 문화예술발전 유공자 시상식’에서 고 노동은 교수가 문화예술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고 밝혔다.
평택의 위인 지영희의 숨겨진 업적을 최초로 발굴해 평택시와 인연이 깊은 고 노동은 교수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음악사를 방대하고 깊게 연구한 대학자다. 그는 민족음악학·친일음악·항일음악·동아시아음악·근현대음악가·음악교육 등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생전에 평택시의 열정적인 음악문화 사업에 감동받아 한 평생 수집한 근현대음악사료 7만점을 평택시에 기증한 바 있다.
현재 평택시는 기증자료를 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한국민족음악도서관(가칭)을 조성 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장선 시장은 “한민족의 문화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헌신한 고 노동은 교수의 유지를 받들어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시가 한국을 대표해 한류음악을 알리는 국제문화도시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한편, 문화훈장은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5개 등급: 금관·은관·보관·옥관·화관)이다.
아사히신문 마쓰이 야요리와 함께
국제여성법정서 세기의 판결 받아내
12개국 여성 희생자 기림비 세우며
한일 넘어선 전시 성범죄 보편성 강조
“일본에 속아 끌려온 한반도 여성들
피해자 동의없는 국가정상 간 합의
해결도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
▲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법정’을 주도했던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의주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식민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이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과 전쟁의 문제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잔혹했던 36년 식민통치의 아픔을 고발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상징’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오랜 시간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며 현실참여 활동을 해온 여성운동가인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공동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전시 여성에 대한 범죄’라는 위안부 문제의 보편성이다. 그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초청으로 22일 열린 ‘2000년 여성국제법정’ 19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21일 방한해 와 만났다.
“저는 원래 말레이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1990년대에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집회를 열었는데 말레이시아 기자에게 집회를 취재해보라고 권했죠. 그 기사가 마침 현지 신문 1면에 실려서 말레이시아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중에 로자린 쏘우라는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할머니를 만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친해진 뒤 제 ‘대모’가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저와 위안부 문제의 시작이네요.” ▲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 그와 동료들은 2000년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민간 법정을 준비하며 심각한 협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그 뒤 나카하라 교수는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마쓰이 야요리(1934~2002) 기자와 함께 세기의 재판에 나서게 된다. 2000년 12월8일부터 사흘간 열린 ‘여성국제법정’이란 이름의 민간 법정이었다. 그는 “당시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아서 이를 다른 일본인들에게 알리고 전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마쓰이는 달랐다”고 말했다. “갑자기 마쓰이가 ‘위안부 문제는 여성에 대한 국가와 일본군의 범죄’라며 이를 (확인하는) 재판을 하자고 했어요. 우리는 그런 재판이 가능할까 몹시 두려웠지만, 어쨌든 시작을 한 거죠. 마쓰이는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카하라 교수 등은 재판 실무 준비를 위해 1998년 6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너무 많았다. 가장 큰 두려움은 전쟁의 최고 책임자이자 군 통수권자였던 히로히토 일왕을 법정에 올린다는 사실이었다. 재판을 주도한 마쓰이 등에게 우익의 협박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한동안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더욱이 아시아 각국에 흩어진 피해자들을 도쿄로 불러 모으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끈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총 64분의 피해자를 증인으로 법정에 불렀습니다. 할머니들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가족이나 운동가들이 최소 2명 정도는 붙어야 했어요. 항공료와 체재비, 통역·번역비 등도 필요했어요. 중간에 ‘내 퇴직금을 부어야 하나’란 생각도 했지만, 일본의 한 고령 여성이 ‘천황의 죄를 물어야 한다’며 거액을 기부하셨어요.”
이 민간 법정에선 위안부 제도에 책임이 있는 일왕 등 9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제도가 나치 시절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에 맞먹는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임을 명명백백하게 선언한 세기의 판결이었다.
그 뒤 나카하라 교수에게 또 하나의 전기가 찾아온다. 와세다대 박사과정의 제자 홍윤신( 저자)씨가 오키나와 위안소 조사 연구를 위해 미야코지마를 방문했다가 중요한 증언을 채록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는 홍씨에게 12살 때 섬에서 피부가 하얀 조선인 여성들이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하러 우물에 들렀다 잠시 쉬던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자기 섬에 왔다가 전쟁 뒤 사라진 누나들이 누굴까 의아해하던 요나하는 이후 그들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조사 결과 미야코지마에만 총 17곳의 위안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1일 오후 서울 중구 의주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이 장소에 위안부 여성들을 기억하는 비를 만들고 싶다는 요나하의 얘기를 들은 홍씨는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 윤정옥(94) 선생과 나카하라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나카하라의 주도로 시민 모금이 이뤄져 2008년 9월7일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희생자가 된 12개국 여성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해 12개국 언어로 비를 새겼다. 비의 이름은 ‘여성들에게’다.
나카하라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와 군이 저지른 ‘국가 범죄’임을 부인하려는 한·일 양국의 사회 분위기에도 일침을 놨다. “규슈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산부인과 의사였던 아소 데쓰오(1910~1989)라는 의사가 1937년 11월 군에 소집이 됩니다. ‘나는 부인과 의사인데 왜 소집을 할까’ 의아해하던 그가 상하이에 도착해 보니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아소는 군으로부터 그곳에 있던 여성 100여명의 신체검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일기에 ‘일본인 위안부들은 성매매를 해본 이들이었지만, 한반도 출신 여성들은 성경험조차 없어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적었다. 나카하라는 “(한반도 출신 여성은) 좋은 일거리가 있다고 속여서 끌고 온 것이다. 이는 사기다. 성경험이 없는 여성이 어떻게 위안부가 되기 위해 오겠냐”고 말했다. 나카하라는 한·일 양국 정부의 2015년 12·28 합의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국가 정상끼리 한 합의는 해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 아베규탄시민행동이 2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를 예정대로 종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 8월 22일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지만, 정부 안팎에선 지소미아 효력이 끝나는 11월 23일 이전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안이 제기되고 있다. ⓒ 김시연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한 달을 앞두고, 정부 안팎에서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 없이 지소미아 연장은 있을 수 없다며 ‘대못 박기’에 나섰다.
750여 개 시민사회·노동·종교단체가 참여한 ‘아베규탄시민행동’은 2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지소미아를 예정대로 종료하라고 촉구했다.
“강제동원 사죄 배상 문제, 한일 정부 야합해선 안돼”
우리 정부는 지난 8월 22일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자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지소미아를 연장하라고 우리 정부를 지속해서 압박해왔고, 우리 정부도 최근 이낙연 총리가 일왕 즉위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지소미아 효력이 끝나는 11월 23일 이전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일본 수출규제 철회와 지소미아 연장을 맞바꾸는 안이 논의될 수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는 단호했다.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는 이날 “지금 강제동원 사죄 배상을 미봉하거나 은폐하고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아베와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해서 지소미아를 연장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는데 명백한 가짜뉴스이길 바란다”면서 “아베 정부의 경제침략과 역사 부정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는데 이 문제를 미봉하려는 건 역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일본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대신한 김진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도 사과를 받는 것도 거래처럼 이뤄져선 안 된다”면서 “정부 간 야합으로 문제를 덮으면 한국 사회도 일본 사회도 이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란 문제가 계속된다”고 밝혔다.
김 사무국장은 “1965년 한일협정이 그랬고 95년 아시아여성기금,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그랬듯 피해자와 국민 뜻을 무시하고 정부 간 야합으로 덮어 지금 일본 정부는 아직 식민 지배하는 것처럼 한국을 대하고 있고 피해자들은 아직 해방을 맞지 못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면서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를 일본과의 정치적 협상 지렛대로 이용하려고 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실제 오는 24일 아베 총리 면담을 앞둔 이낙연 총리는 지난 18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이 수출규제를 철회하면 지소미아 종료를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1일 국정감사에서 한일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정상회담이 가능하려면 일본의 전향적 태도와 성과가 담보돼야 한다”면서 “그 성과를 만들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아베규탄시민행동은 이날 기자회견문에서 “아베 정권이 아무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한일 관계를 복원하려 시도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면서 “진작에 파기됐어야 했을 협정을 두 번이나 연장한 뒤, 수출규제와 결부해 연장을 종료하고 다시 이와 결부해 재연장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촛불 민의에 반해 박근혜 정권의 적폐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며 스스로 적폐정권 행태를 닮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문재인 정부에 보다 단호한 태도로 미국의 압력, 아베 정권의 도발에 맞설 것을 촉구하며 박근혜 적폐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예정대로 종료시킬 것을 요구한다”며 오는 26일 오후 6시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아베규탄 9차 촛불문화제’를 예고했다.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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