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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 늦어져 일본배상 청구인들 모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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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 늦어져 일본배상 청구인들 모두 사망”

익명 (미확인) | 수, 2017/11/08- 17:31

1108-5■방송 : 경남CBS<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제작 : 손성경 PD, 주소원 작가실습생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김민철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김효영 : 영화 ‘군함도’를 계기로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우리 국민들의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러나 여전히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이 부정되고,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도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길 좀 해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박사 연결되어있습니다.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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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철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김민철 : 네, 안녕하세요?

◇ 김효영 : 다시한번 정리하죠.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이 이뤄졌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 김민철 : 법적으로나 학술적으로 1939년부터 1945년 사이로 보고있습니다.

◇ 김효영 : 39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 김민철 : 네. 1938년에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바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이듬해부터 실질적으로 그런 내용들이 적용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1939년부터 강제동원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김효영 : 정확한 인원은 파악이 되고 있습니까?

◆ 김민철 :  정확한 인원은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를 가지고 최소 인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김효영 : 얼마입니까?

◆ 김민철 : 우선 몇 가지 유형에 따라 좀 달라지는데요. 군인 군속의 경우, 군 병력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한 42만 명 정도 되고 그 다음에 국외 시베리아나 일본 등 노동력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한 75만 명 내지 80만 명 정도 되는데요.

최소 인원이라 하면 이 통계상에는 1945년 4월 이후 통계는 다 빠져있거든요. 조사가 안 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게 최소 인원입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정확하게 몇 만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동원했던 주체인 일본 정부나 기업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설들이 나오는데 최소한 당시에 39년에서 45년 사이에 120만 명의 조선의 젊은 사람들이, 남녀 청장년들이 강제로 동원되었고요. 그리고 국내 동원된 게 있습니다. 이것은 1개월, 3개월 도내, 도외 동원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주로 북쪽 지방이 많죠. 전쟁을 하기 위해서 북쪽에 여러가지 군수공업들이나 도로를 만든다든지 하는데 그렇게 동원된 경우가 이게 총 연인원해서 550만 명이니까요.

쉽게 말씀드리면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됐다고 이해하시는 게 훨씬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 김효영 :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됐다?

◆ 김민철 : 네,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좀 넘으니까 가구당 한 명씩 동원됐다고 생각하면 빠르죠.

◇ 김효영 : 그렇군요.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이 강제동원을 인정을 하는 듯하기도 하고, 아닌 듯하기도 하고 태도가 자꾸 변하고 있죠?

◆ 김민철 :  근본적으로 바뀐 건 없습니다. 왜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냐면, 2년 전에 아베 정부가 메이지의 산업혁명 유산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했습니다.
◇ 김효영 : 유네스코 등재.

◆ 김민철 : 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하려고 했죠. 그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피해자와 민간단체에서 이것은 도저히 들어줘서는 안 되겠다. 왜냐면 소위 군함도 같은 주요 시설들 중에는 유네스코에서 지향하고 있는 인권이나 보편적인 가치 이런 것과는 정배치되는 강제노동이나 연합군 포로 노동도 있고,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강제로 연행해서 노동을 시켰거든요. 국제법상에서도 어긋나는 그런 강제노동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른바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는 거죠.

그런 피해자들의 증언이나 자료들을 가지고 국제사회에 호소를 했죠. 그걸 그대로 등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2년 전 총회에서 당시 일본대사가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에서 회원국을 상대로 강제노동이 있었고 유네스코의 권고대로 거기에 그런 역사를 기록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언을 했습니다.

◇ 김효영 : 그 발언을 번역해보면요. ‘수많은 조선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연행되어 가혹한 상태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 김민철 : 그게 이른바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국제노동기구)에서 규정하고 있는 강제노동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본 관광장관이 그걸 바로 부정하고 나왔죠. 형태상으로는 강제노동일 수는 있으나, 그 것까지는 부정하지는 못 하니까. 법적으로 국제노동기구에서 말하는 강제노동은 아니다. 왜냐면 1910년 강제병합이 일본으로서는 지금까지 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합법이기 때문에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도 합법이고, 전쟁 상황이기 때문에 강제노동의 예외 조항에 해당된다. 강제노동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고요.

또 하나 그 이유는 한국에서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이 징용 당했던 분들의 피해 호소를 강제동원당해서 강제노동했기 때문에 피해 배상하라고 한국 법원에 호소를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일본 기업이 배상 책임이 있다고 중요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 김효영 : 미쓰비시하고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했던 소송.

◆ 김민철 : 네, 그걸 병합해서 했는데요. 하급심에서는 일본 기업의 입장을 들어줬는데 대법원이 그걸 파기환송했죠. 상당히 의미 있는 판결인데. 고등법원으로 돌린 다음에 금액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놓고 최종 확정을 해야 되는데 그것을 지금 아직 못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원고로 계셨던 분들이 지금은 다 돌아가셨죠.
◇ 김효영 : 아이고, 그 몇 년 사이에 또 다 돌아가셨군요.

◆ 김민철 : 나이가 최소한 팔십, 구십 넘었으니까.

◇ 김효영 : 그 때 박근혜 정부 때 아닙니까? 우리 외교부가 또 이상한 일을 하지 않았나요?

◆ 김민철 : 네, 나중에 확인이 됐는데 외교부에서는 대법원에 공문을 보내서 사실상 ‘하지 마라, 한일관계에 굉장히 심각한 해를 끼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냈죠. 이것은 한국 외교부가 정말 우리나라 외교부인지 하는 그런 비판을 면하기가 힘들죠.

◇ 김효영 : 적어도 지난 정부에서 처럼 외교부까 해서는 안 되겠죠.

◆ 김민철 : 그렇죠. 엄연하게 그것은 안 되는 일이죠. 그렇지만 한국 정부의 경우에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지난번 대통령의 8·15담화나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우리가 조금 암시할 수 있듯이 해결하려는 그런 의지는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입니다.
◇ 김효영 : 이제 남은 것은 처벌 또는 배상, 그리고 제대로 역사에 남기는 기록 이런 작업들이 앞으로 남은 과제이지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 김민철 : 우선, 많은 부분 진상 규명이 됐습니다만 여전히 절반 이상은 피해가 밝혀지지 않았거든요? 추가적인 진상 규명 작업들이 우선 있어야 됩니다. 그게 국가 차원이든 시민사회 차원이든. 그 다음에 중요한 거는 몇 분 안 되지만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추가적인 배상 조치나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하고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교육의 자료로 계속 남겨져야 되고 기록할 의무가 다음세대에게 있기 때문에 잘 보존하고 교육의 자료로 정리하는 작업들이 필요하죠.

◇ 김효영 : 일본의 사죄, 아베 정권에서는 힘들겠죠?

◆ 김민철 : 거의 뭐 불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국제사회에서 다들 입을 모아서 비판하고 있는 권고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조차도 털끝만큼 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 김효영 : 마지막으로요. 우리가 일제 강제징용을 기억해야 되는 이유 말씀해주시고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 김민철 : 우선 많은 선배세대들이 식민지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서 고통당했습니다. 그런 아픈 역사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그런 측면도 있고요. 또 하나는 개인의 소중한 권리들이 침해당했습니다. 침해당한 권리들을 우리가 기억할 때 비로소 현재의 권리들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조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 김효영 :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김민철 :  네, 고맙습니다.

◇ 김효영 :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위원 김민철 박사 만나봤습니다.

<2017-11-08>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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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시위 나선 보통 사람들 얘기
경찰·검찰·법원 자료로 생생히 복원
“대규모 민족운동 원동력은 자발성”
“평범한 사람들 싸움이 오늘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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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열전 -3·1운동의 기획자들·전달자들·실행자들 조한성 지음/생각정원·1만6000원

1919년 3월5일 9시30분, 경성 덕수궁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순사보 정호석(당시 34살)은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얻었다. 경찰관 옷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서대문네거리에 있는 잡화상에서 광목을 사 집으로 돌아왔다. 넷째손가락 둘째 마디를 물어뜯어 흘린 피로 광목에 태극기를 그렸다. 다른 광목에는 ‘대한국 독립만세’라고 썼다.

담배설대에 광목들을 묶어 들고 집 근처의 흥영여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들어가 그는 만세 삼창을 한 뒤 ‘함께 만세를 부르지 않겠냐’고 물었다. 어린 여학생 한명이 나와 만세를 불렀다. 열 살 된 그의 딸이었다. 딸의 친구들 수십 명이 뒤를 이었다. 교사 두 명도 만세를 부르며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이들이 3·1운동의 ‘최연소 시위대’였다.

“그대는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검사)

“삶에 쪼들리고 있는 2천만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정호석)

“이와 같은 일을 하면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각오하고 한 일이니 목숨이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호석은 딸이 다니는 학교로 가 만세시위에 동참하게 했다. 왜 그랬을까? 그건 2016년 하반기 서울 도심을 비롯해 전국에서 벌어졌던 촛불시위 때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나선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만세’와 ‘촛불’은 나라의 미래를 바꾸는 일이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아이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오래도록 그 길을 기억하고, 후일 그 길이 막히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제대로 된 길을 찾아 용감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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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조 연구원이 최근 펴낸 <만세열전>은 3·1운동의 진짜 주인공들 이야기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대개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소중한 삶을 희생했지만, 역사책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그들의 삶을 역사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들을 생생하게 담아 내기 위해 경찰신문조서와 검찰신문조서, 예심심문조서, 공판시말서 등을 활용했다. 신문·심문조서는 ‘한 것도 안 했다’고 숨기는 피의자·피고인과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꾸미려는 공안당국 사이의 진실게임이 벌어진 기록이다. 거짓도 들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자료들을 적극 활용했다. 조 연구원은 그 까닭에 대해 <한겨레>와 통화에서 “조서 등은 보조 자료로 여겨져 왔지만, 거기에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3·1운동을 기획하고,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의 소식을 알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만세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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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책은 여운형(1886~1947)에서 시작한다. 그는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을 만났다.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를 보내기로 하고, 이 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독립청원서 두 통을 작성했다. 조직의 명의로 청원서 서명을 하려는 목적에서 ‘신한청년당’이 만들어졌다. ‘벼락정당’이었다. 신한청년당은 이후 조선과 일본, 만주와 연해주로 흩어져 조선인들을 만나며 독립의 희망을 얘기했다. “3·1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책은 이어 천도교와 기독교의 독립운동 결정과 힘을 모은 과정을 다룬다. 독자적 운동을 모색하던 학생들도 종교계 쪽의 운동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한차례로 끝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생각은 향후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독자적인 운동을 펼치겠다는 생각도 소중했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민족대표들이 독립운동의 지도를 포기했을 때 학생들이 나서 대신할 수 있었다.”
학생들만으로 3월5일 남대문역 시위를 준비했다. 일제는 이날 모인 군중이 약 1만명이라고 했는데, 3월1일은 2천~3천명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조직력, 3월1일 만세시위에서 얻은 용기가 가져온 결과였다. 남대문 일대는 ‘붉은 수건’으로 물들었다. 경성에서는 이날 시위 때 태극기가 처음 나왔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49살)은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하는 일을 하다 청주에서 체포됐다. 고문과 구타에도 처음엔 입을 열지 않았다. 전주에서 선언서를 배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만인이 죽어 백만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것이오. 만인을 죽이면 만인의 피가 백만을 물들이고, 백만을 죽이면 백만의 피가 천만을 물들일 것이오. 그럼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인종익·경찰신문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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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익의 신상카드에는 사진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길 바라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사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인종익은 1년5개월여 수형생활을 한 뒤 1920년 8월 출소했는데 이후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가 만든 신상카드에도 ‘사진 없음’이라고 돼 있다. “그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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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된 당시 19살 청년 김동혁. 그는 예심판사의 심문에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답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배재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김동혁(19살)은 3월1일 독립선언서 6매를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2일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2호, 5일 <조선독립신문> 3호를 배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예심판사)

“난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김동혁)

조선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3·1운동은 제대로 된 지도부가 없었는데도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자발성이야말로 대규모 민족운동이 가능한 원동력이었다.”

어릴 적 서당에 같이 다녔던 노끈장수 김호준(21살)과 경성공업전문학교 2학년 양재순(22살)은 <각성호회보>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들은 이렇게 썼다. “2천만 동포의 영혼과 삼천리강산을 가진 우리 민족은 맨손임을 걱정하지 말라. 철함 대포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투쟁의 앞에 3·1운동이 있다고 말한다. “100년 전 포기할 줄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이 오늘을 열었다.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 당당히 싸우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 시작에 3·1운동이 있다.”

황상철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15> 한겨레 

☞기사원문: 역사책에 안 나오는 3·1운동의 주인공들 

※관련기사 

☞서울경제: [책꽂이-만세열전]3·1운동을 완성한 무명의 보통사람들 

☞헤럴드경제: 소년·노끈장수·인쇄공…보통사람들의 3·1운동 ‘만세 이야기’

금, 2019/02/1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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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 10. 배동록 선생 – YouTube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D-9”
-릴레이 응원영상 열번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을 당했던 아버지와 한국인들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있는 재일동포 2세인 배동록 선생님이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를 위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방문해달라는 부탁을 전합니다.

—————————————-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모금 참여
https://www.minjok.or.kr/archives/97796

목, 2018/08/2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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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 민족음악의 스승이셨던 노동은 교수님!
선생님께서 2016년 12월 2일 국민적인 애도 속에 우리 곁을 떠나실 무렵,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은 촛불시민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촛불은 마치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민족음악의 역사적 실현이란 과업을 이룩하고자 노심초사하시던 열망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족적인 소망은 결실을 맺고 전기를 맞이하였으나, 선생님은 그 국민적인 승리의 합창을 듣지 못한 채 기어이 소천하시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의 깃발 아래서 보다 자유롭고 넉넉하게 선생님께서 탐구해 오셨던 민족음악의 세계를 구축하실 수 있게 된 새로운 세상을 향유하시지 못한 채 떠나버린 선생님이시기에 저희들은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던 노동은 교수님이시여!
선생님은 일찍이 음악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조직화된 소리”라고 정의하여, 음악을 전문 음악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인간이 함께 즐겨 듣고 감동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풀이해 주었습니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며, 베토벤이 너무나도 좋아 그의 머리를 흉내 내려고 미장원엘 다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베토벤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예술을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적인 만족감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국경이 없이 모든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로하고자 음악활동을 했다는 베토벤의 예술적 투지는 바로 노동은 선생님의 예술적 투혼이기도 합니다.
국경이 없다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굳이 민족음악을 강조하시며 일생을 민족음악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바로 고통 받는 민족을 위로하고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찍이 이강숙, 이건용 선생님과 함께 ‘민족음악 연구자 3총사’로 맹활약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참다운 민족음악의 얼을 찾고자 작곡가 김순남과 정율성 등과 같은 격변기의 민족해방투사의 음악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남긴 폐해에도 주목하여 친일음악과 왜색가요의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결혼행진곡’의 작곡자가 나치가 숭앙했던 바그너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곡은 물론이고 바그너 음악 전체를 연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면 끝까지 추적하여 벌한다고 알려준 것도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결코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피아노와 풍물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문화 속에 이미 널리 스며든 뽕짝 같은 왜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것조차도 우리 문화의 일부이므로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켜 역수출을 해야 한다”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와 강의를 겸하시던 그 열강을 이제 우리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음악사에 길이 남을 ????항일음악 330곡집????을 남겨 주셨습니다.
노동은 선생님! 선생님을 잃은 저희들이 슬픔을 딛고 그나마 위안을 삼는 점은 선생님의 유업들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명진 사모님과 아드님 노관우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 그리고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힘을 합해 선생님께서 터 잡은 민족음악의 고귀한 과업을 이어 가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이제 모든 염려 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삼가명복을 빕니다.

2017. 12. 9. 임헌영 올림

화, 2018/01/0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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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9/0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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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보고 연구소에서 정말 근거가 있는지 말해주세요.

일, 2018/01/2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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