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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건-인터뷰 전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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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건-인터뷰 전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익명 (미확인) | 수, 2017/11/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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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사진=tbs 공혜림 기자>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주도했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소장은 현 정부 ‘적폐청산’ 작업에 대한 비판의 뿌리도 ‘친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 8주년을 앞두고 tbs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친일은 행위만 생각하는데 행위만이 아니라 가치관으로, 파시즘 철학”이라며 “적폐청산을 정치적 보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파시즘적인 철학을 가진 자들이 자기 특권을 누리기 위한 말장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친일파 청산을 안 한 정도가 아니라 8.15 이후에 친일파들이 세상을 지배했다”며 “근대 민족 100년사 중에서 적폐청산 제1호가 친일파 청산”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임헌영 소장과의 인터뷰 전문.

– 기자: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공식적으로 펴낸 지 오는 8일 8주년을 맞습니다.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가 과거사 청산의 일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친일파 청산에 관대한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8년에 걸쳐서 친일인명사전을 준비해왔습니다. 그 18년 동안의 온갖 연구 축적을 모아서 낸 것이 친일인명사전인데, 이것을 2009년에 저희가 냈습니다. 이 사전을 낸 지가 벌써 8년째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 사전을 내고 나니까 국민들에게 우리가 ‘그동안 국민 여러분의 성원으로 이런 사전을 냈습니다, 약속 지켰습니다’ 하고 신고식을, 쉽게 말하면 출판 기념회를 하려고 모 여자대학교 강당을 다 빌려서 계약을 해놨는데 하루 전에 못한다고 장소를 못빌려준다고, 대여 못해준다고 취소 통보가 왔어요. 할 수 없이 거기서 못하고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출판 기념회를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친일인명사전을 대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한 데도 불구하고 권력층, 집권세력들은 친일인명사전을 냉대하는 구나, 출판 기념회 장소까지도 강제 취소시켜서 못하게 하는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친일인명사전입니다.

– 기자: 18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 임헌영: 거의 한 100여건의 각종 소송들이 있었고. 그 많은 소송을 1건도 우리가 진 게 없어요. 다 이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사히 나올 수 있었고. 특히 가장 고비를 겪었던 것은 인쇄까지 다 끝난 상태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사전에 들어가 있다고, 박지만씨가 발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그땐 정말 우리도 위기를 느꼈어요. 그랬는데 아무리 권력의 압력이 있어도 결국은 재판장에서 친일파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우리 사전에 실린 기사를 보고 판결 나서 바로 발행할 수 있었던 거죠.

– 기자: 왜 박지만씨가 소송 냈을 때 가장 큰 위기를 느끼셨습니까. 

= 임헌영:  인쇄도 다 해놓은 상태에서 내놓을 판인데. 박지만씨가 가처분 신청 내면 만약에 받아들여지면 다 찍어놓은 책을 못 내는 거예요. 정권도 이명박 정권 때니까 굉장히 위기를 느꼈죠. 다만 우리는 학술적으로 박정희가 썻던 혈서, 우리가 찾았잖습니까. 일본에 있는 국회 도서관에서 우리 연구원이 찾아서. 누구도 아무리 박정희를 옹호하고 싶은 사람도 그걸 보고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죽하면 우리가 이겼겠어요, 재판에서.

그 후손들이 다 자기 조상은 친일파가 아니다, 그 사전에 들어가면 안 된다, 친일파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고 소송 걸었는데 우리가 친일했던 거 다 해명해주고 다 해결됐죠. 실제로 후손들 중에는 참 좋은 사람들도 많고,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해당자가 대단히 억울한 측면들도 참 많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민족사적인 전기를 볼 때,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일본도 우리나라도 과거사 청산해야 하고 우리 정치 개혁을 위해서도 이건 가장 중요한 선제 조건이다. 이래서 우리도 참 냉험하게도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이 드러난 것만 가지고 한 것이 친일인명사전이었습니다.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었던 거고 후손들이 여기 와서 처음에는 분노해서 왔다가 나중에는 차근히 우리 취지를 설명 듣고는 이해할 수 있겠다 해서 우리 연구소 후원을 해주거나 회원이 된 분들도 있어요. 이게 정말 우리 민족사를 위해 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후손들로서는 우리 조상 그렇게 한 게 잘못이다, 이 한마디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옳았다, 그땐 다 친일했다, 친일이 뭐가 나쁘냐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은 대단히 곤란하고.

– 기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 올린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란 말씀이네요. 

= 임헌영: 이 사전을 보시면 저는 이게 쉽게 말하면 광복 8.15 이후에 우리나라 학문 연구의 바로미터입니다. 우리나라 학문이 이 정도로 성장했다. 국가권력은 아주 나쁘게 온갖 독재자와 쿠테타를 거쳐 갔지만, 그런 속에서도 우리나라 학자들이, 양심적인 학자들이 학문 연구를 축적해왔습니다. 그 많은 축적돼온 학문 연구를 우리가 다 종합한 겁니다. 우리가 뭘 새롭게 연구한 게 아니고 그동안 나온 신문, 잡지, 논문, 학술지에 실린 각종 조사들, 기록들, 증언들 다 종합해서 객관적으로 그대로 썼습니다. 우리 사전 서술하는 방법이 ‘친일한 사람들 이렇게 해서 나빴다’ 이런 구절은 하나도 없어요. 행위 자체를 아주 객관적으로 건조하게 냉철하게 그야말로 냉철한 하드보일드라는 냉철한 문장으로 딱딱 객관적인 기사체처럼 역사에서 말하는 기전체처럼 그대로 쓴 겁니다. 8.15 이후에 산 분들은 이후 행적까지도 그대로 써줬어요. 후손들도 자기 조상이 그렇게 활동한 건 전혀 몰랐을 거예요. 이력서가 가장 자세하게 나온 겁니다. 8.15 이후 자기의 업적이라고 생각한 것도 다 써줬어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사전 나온 뒤에는 이걸로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기자: 정치적인 색깔로 보는 분들도. 

= 임헌영: 많았죠. 우리나라는 친일파 청산을 안 한 정도가 아니라 8.15 이후에 친일파들이 세상을 지배했단 말이예요. 정치, 사회, 군부, 경찰, 사법, 입법, 재벌, 종교계, 교육계까지도 모든 기관에 그런 분들이 지배했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볼 때는 이게 정치적으로 집권세력이었다가 민주화라는 게 불과 11년밖에 안 됩니다. 고작 민주화라는 시절을 보낸 게 4.19 뒤에 1년,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11년밖에 안 됐잖아요. 그 11년 동안에 있다가 친일 후손들이 또 집권해서 옹호해온 것 아닙니까. 국정교과서까지 만들고 추태를 보여주다 물러났지만. 그런 속에서 그 분들은 이걸 정치적으로 해석해서. 우리 연구소는 어떤 정파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친일파 청산에 찬성해주고 지지하고 도와주면 그건 우리 연구소 편이 되고. 반대하거나 방해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비판하면 8.15 이후 제2의 친일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기자: 후손뿐 아니라 정치적 압박도. 

= 임헌영:  많았고. 우리는 일체 모든 연좌제를 반대합니다. 조상이 친일파였어도 후손이 훌륭한 정치가면 정치가로서 봐줘야지. 우리 연구소에서는 그 조상의 후손을 일체 공개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먼저 절대 공개 안 합니다. 다만 문제가 되었을 때 판단 요청이 오면 그 정치가 때문이 아니고 친일을 한 당사자의 행적은 판가름해주는 거죠. 후손에게 피해가 가기 위해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를 올바르게 판단해주는 역할만 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 기자: 학술적인 활동을 정치적으로 본 이유는 뭘까요. 

= 임헌영:  자기 조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거죠. 친일을. 자기 조상만 친일파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니까 엉뚱한 사람들도 이 사람도 친일파다, 이렇게 함께 물귀신 작전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정지용 시인이 그랬죠. 친일 후손 중에는 정지용 시인도 친일했다, 왜 사전에 안 넣었느냐, 이거 정치적이다. 어거지를 쓴 거예요. 정지용은. 여러모로 검토하거든요. 친일파가 아닌 사람을 넣은 건 한 명도 없습니다. 사전을 처음 만들 때 집필진들에게나 친일파를 선정하거나 심의할 때 제가 했던 말이 ‘여기 여러분들이 친일파를 선정해서 실을 때 우리 할아버지라고 생각해라. 나의 할아버지다. 이렇게 생각해 달라. 만약 내 할아버지가 여기 들어가면 기분 좋겠나. 나쁠 거다. 되도록 적게,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 아무리 잘 봐줘도 이건 아무리 봐도 친일파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분들만 소수로 해서 뽑아라’. 엄선한 겁니다.

– 기자: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건가요. 

= 임헌영: 편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위원장이 학자들이죠, 국사학자들. 그 밑에 필진들은 200여명. 몇십명이 각 분야별로. 수십명의 편찬위원들이 각 분야별로 다 나눠서 수십 차례 회의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합동 심사를 해서. 그 다음에는 제1차 수록 예상자 명단을 국민들에게 다 알려줬어요. 그러면서 이의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친일 안 했고 독립운동 했다는 자료를 가지고 오라, 그러면 우리가 참고하겠다 해서 공고했죠. 한참 지난 뒤에 제2차 확정 명단을 또 발표했어요. 또 언제든지 이의 있으면 제기해 달라. 그동안에 각종 고소, 이의 제기를 한 게 100여건 됐다고 봐요. 그게 해결된 마당에서 책을 펴낸 겁니다.

사전이 나온 뒤에는 일체 말이 없어요. 그 전에 소송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해결됐지요. 오직 행위자의 팩트 자체만 가지고 학술적인 측면에서 넣었거든요. 그 참고 자료를 각자 각자 한 사람마다 다 넣어줬습니다. 이런 사전은 없어요. 세계적으로 없습니다. 사람 하나마다 참고자료를 다 넣어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도 자기 조상에 대해서. 심지어는 우리나라 자료, 일본, 중국 자료 다 뒤졌거든요. 오죽하면 국가기관에서, 교육부니 법원이니 문제가 생기면 우리한테 자문해서 우리가 판단해 주거든요.

– 기자: 친일이란 역사가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 임헌영: 몇 십 년 전 일을 지금 들춰서 뭐하느냐.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자기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세력이 오랫동안 집권한 나라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말하면 인종 편견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존중합니다. 인디언 추장들도 자기 종족을 하나라도 죽이면 추장이 안 돼요. 우리 민족과 나라를 배신했던 사람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없어요. 아무리 후진국이라도 이러지 않아요. 독재자, 군부 독재, 쿠테타 온갖 걸 식민지 이후에 겪어왔는데. 그 원인이 뭐냐 하다가 우리가 친일인명사전 만든다 하니까 옛날 거 아니냐 하다가, 그 사람들 명단을 보니까 우리가 그렇게 쿠테타, 독재, 부정부패에, 도둑이 큰 소리 치고 그걸 잡으러 가는 경찰들이 벌벌 피신해 가는, 독립운동가들이 되레 피신해가지고. 이 거꾸로 된, 착한 사람이 피해 받고 나쁜 사람이. 그 원인이 뭐냐. 온갖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단 말이예요. 뭐든지 그 뿌리를 캐면 친일인명사전하고 다 연결된다.

유명한 소설가 박완서의 소설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동학군은 독립운동가를 낳고 독립운동가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쟁이를 낳고. 친일파는 독재자를 낳고 독재자는 재벌을 낳고 재벌은 많은 사장을 낳고.’ 삼대째 가난하게 산다고 소설에 그렇게 딱 나와요. 물론 그런 식으로 두부 자르듯이 그런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 뿌리가 친일이고. 우리나라 걱정보다 미국 걱정을 더 하는 사람들. 어떻게 성조기를 드록 시위합니까, 태극기도 아까운데. 그것도 정말 친일파적인 발상이다.

– 기자: 과거 친일 가치관이 아직. 

= 임헌영: 아직도 미완이라고 보고 있고. 우리나라는 특히 나쁜 사람들이 상대편을 공격할 때 종북 좌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렇게 해서 자기가 집권했잖아요. 자기 밑에 친일파들 배치해서 집권해서 독재하다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반공이었거든요. 자기 반대하는 건 빨갱이로 몰았단 말이예요. 친일인명사전이 나온다는데 ‘북한 사람 안 넣었다’. 너무나 무식한 소리입니다. 북한 사람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했던 시인도 들어가 있어요. 남북 가릴 것 없이 우리 민족의 정통성, 소위 민족을 팔아 먹었다, 그런 사람은 이데올로기, 남북에도 관계 없고 돈 많든 없든 종교에도 관계 없이. 오직 그겁니다, 민족과 조국이 어려웠을 때 배신했느냐 안 했느냐. 거기에 딱 초점 맞춰서 판단했습니다.

지금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숫자가 그 당시 전 국민 2천만명으로 쳐도 소수입니다. 반대파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 조상이 대단한 친일파인 사람들은 뼛속까지 반대하는 거죠. 친일 옹호하고 우리를 빨갱이로 몰려고 작정한 분도 있고. 또 뭔지 잘 모르고 세상 그렇게 다 살았는데 그게 나쁘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방관자예요.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자발적으로 자기가 하는 행위가 뭔지 아는 똑똑한 사람들, 사회 지도급 인사, 판단력까지 가진 사람이 자기 행동으로 자기 하나에만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위와 명예와 권세, 실세를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우리가 넣은 거거든요. 거기에 비하면 교장, 면장, 우리 명단에서 다 뺐어요. 우리도 논쟁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생계형 친일, 먹고 살기 위해서 했는데 뭐 나쁘냐. 그런 사람들은 친일 행위를 안 해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계형 친일이란 말은 성립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친일파로 안 봅니다. 혹시 이 방송 들으신 분들은 전해주세요. 우리가 한 것을 우리가 앞으로 더 잘 살고 올바른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평화 통일해서 우리 민족이 자주롭게 잘 살기 위한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이걸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적인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서 한 거지. 잘 사는 사람들 괜히 배 아파서 한 게 아닙니다.

– 기자: 요즘 ‘적폐 청산’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립니다. 

= 임헌영: 근대 민족 100년사 중에서 적폐청산 제1호가 친일파 청산입니다. 그걸 해결되면 상당수가 바뀌고. 그래야 정치가들이나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이 잘 사나 연구해야지. 결국 친일파 가치 철학. 사대 외세 의존하는 가치 철학이 그대로 유전되어서 유전만 되는 게 아니라 더 악랄한 수법으로 퍼져서 지금 그런 상황 아닙니까. 적폐청산 1호죠, 아니죠 0호죠.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친일청산은 항상 먼저. 친일파는 행위만 생각하는데 행위만이 아니라 가치관입니다. 파시즘 철학입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를 싫어합니다. 절대 평등을 안 해요. 자기 가족한테도 자기가 어른이고 우리 가족은 내 부하. 직장에서도 파쇼적이고. 그런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 민주주의를 싫어하죠. 그런 철학으로. 전쟁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평화를 좋아하는. 가짜 간첩 만들고 탄압하고 이래야 자기들은권세를 누리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단 말이예요. 호혜원칙을 지키는 사회를 싫어 한단 말이예요. 그런 철학은 21세기 UN이 정한 세계시민에 위배돼죠. 아주 못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적폐청산을 그야말로 마약에 박근혜 정권이 그대로 있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지금 그 밝혀지는 세계 인류에서 볼 수 없었던 죄악입니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습니까. 최대 과제가 촛불 시민들이 바라는 적폐 청산입니다. 어떤 분들은 또 일부 권세 가진 사람들은 정치적인 보복이다. 그야말로 파시즘적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특권을 누리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적폐청산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8·15 이후 첫 기회입니다. 항상 해야 하는데 못했어요. 4·19 이후에도 적폐청산 못했기 때문에 5·16 일어난 거고요. 근대 우리 민족사에 장애물이었던 국민 복지의 장애물, 평화통일의 장애물, 모든 부정부패, 권력 남용 다 들어가는 거죠. 독재 찬양도. 지금은 국정원에서 돈 대서 시민단체들이 전부 그게 독재 옹호하는 거잖아요. 적폐 청산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 기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 임헌영: 사전이 나온지 8년을 맞았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8년 동안 만질정도 나갔어요.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 생각에는 이게 웬만한 가정마다 비치서로 집안 비치서로 집안 한 권 있어야 하고. 모든 학교, 기관, 하나씩 들어가야 해요. 다 가지고 기본 가치관 자체를 파시즘적 철학을, 민주사회를 이룩할 수 없고 이 생각 가져야 합니다. 친일파라는 개념과 그 사람들이 저지른 작태, 범죄 행위를 저질러 놓고도 오히려 잘했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서서 압력행사하려고 하니까 민주주의가 불안하죠. 그런 것만 인식하면 ‘아, 이런 게 간단한 일이 아니구나’. 지금은요. 친일한 분들은 100% 돌아가셨습니다. 후손들은 아무 죄가 없어요. 자기 조상의 행위가 잘못됐으면 잘못됐다, 이렇게 하면 간단히 끝나는데 자꾸 옹호하려는 데서 파시즘적 생각을 부활시키려고. 그러니까 독재정권 자꾸 옹호해서 마찰이 일어나는 거죠 . 진짜 소수거든요. 지금 거의 청산됐다고 보고. 소수가…. 유럽이나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실현했던 나라에 비해서는 아직까지 구시대적 파시즘적 많은 편이예요.

우리 연구소는 지금 이제 새로운 사옥을 사서 이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돈이 많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20억을 빚지고 갑니다. 지금 이 사무실은 너무 좁고 강좌도 할 수 없고. 교통 좋은 데로 가서 강좌도 열고. 식민지 역사 박물관 건립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거든요. 큰 기부를 해주시길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공혜림 기자 [email protected]

<2017-11-06> t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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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제가 개인적으로 그냥 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도움 요청합니다.

월, 2019/01/21- 09:55
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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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1/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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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서 유족 유수예씨 최후진술
도쿄지방재판소, 2차 야스쿠니 소송 내달 중순 선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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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서 진술한 유족 유수예씨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2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에서 열린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 결심공판에서 진술한 유수예(74)씨. 유씨의 아버지는 유씨가 태어나기 바로 전날 전쟁터로 끌려간 뒤 숨져 일본에 의해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무단으로 합사(合祀)됐다. [사진제공 민족문제연구소] [email protected]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들이 보고 싶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달라. 며칠만 늦게 왔어도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 왔을 텐데….”

22일 오후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의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 103호 법정.

증인석에 서서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합사된 아버지의 명부를 빼라고 요구하는 유수예(74)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한마디 한마디 힘이 실렸다.

유 씨는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合祀)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이다. 유씨를 비롯한 유족 27명은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무단합사의 철회와 사죄, 유골 봉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열린 결심 공판에서 유씨는 원고측 최후 진술자로 나섰다.

그는 전장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소개하면서 사죄해야 할 일본이 아버지를 멋대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다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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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익들의 해방구 日야스쿠니신사…군복 입은 사람들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 제국주의시절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246만6천여명이 합사된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다. 2018.8.15 [email protected]

유 씨의 아버지 유봉학 씨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1월 아들 수예 씨가 태어나기 하루 전에 일제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갔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아버지는 만삭 때 헤어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의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끝내 사진으로라도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했다.

아버지는 해방을 겨우 보름여 앞둔 그해 7월 28일 일본 남부 가고시마(鹿兒島)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뒀다.

일본 정부는 전장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죽어서도 괴롭혔다. 멋대로 ‘일본과 천왕(일왕)을 지킨 신(神)’이라고 ‘추앙’하며 일제의 전쟁범죄자들과 함께 그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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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신사 합사자 명부
[고쿠가쿠인대학 웹사이트 캡처]

야스쿠니신사에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한 246만6천여명이 합사돼 있다. 실제로 위패와 유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합사자 명부가 있다. 합사자 중에 유봉학 씨 같은 조선인이 2만1천181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수예 씨는 아버지가 숨진 뒤 사실상 고아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할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두 달 만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재혼한 뒤 자신을 돌봐주던 이모가 결혼하면서 그는 껌팔이와 구두닦이, 신문팔이를 하면서 어렵게 성장했다.

유년기를 힘들게 버텼던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된 뒤였다.

유 씨는 법정에서 “아버지가 있었다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웠다”며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내가 죽으면 대가 끊긴다는 생각에 죽지도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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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야스쿠니(靖國) 신사 합사 취소 소송 공판이 열린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원고들이 변호사, 일본내 지원단체 관계자 등과 함께 유족의 사진과 항의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유씨는 “일본 측 기록에는 아버지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줬다고 적혀 있었지만, 가족들은 전사 통지서도, 유골도 받지 못했다”며 “그런데도 일본이 가족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야스쿠니에 마음대로 합사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나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이다”라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강력하게 요구한다. 야스쿠니에서 아버지를 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씨 등이 원고로 제소한 재판은 한국이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에서 진행 중인 두 번째 야스쿠니 합사 철회소송이다.

유족들은 지난 2001년 처음 합사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1차)을 제기했고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이후 더 많은 유족이 모여 지난 2013년 10월 도쿄지방재판소에 2차 소송을 제기했고, 한국과 일본 시민들과 변호사들이 이들을 돕고 있다. 2차 소송의 선고 공판은 다음 달 중순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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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지방재판소, 도쿄고등재판소, 도쿄간이재판소가 입주한 재판소 합동청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9-01-23>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로 전쟁터 끌려가 죽은 아버지, 왜 야스쿠니에 가두나” 

※관련기사 

☞한겨레: “내가 태어나기 하루 전날 끌려간 아버지는 야스쿠니에 합사됐다”

수, 2019/01/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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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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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수, 2019/01/2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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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1/2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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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전엔 후지코시 강제동원 2심 피해자 승소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 재확인…”1억원 지급”

【서울=뉴시스】심동준 기자 =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를 동원한 후지코시의 피해자에 대한 위자료 지급 책임을 2심 법원이 다시 인정했다.

이는 지난 2017년 4월5일 항소 접수 이후 658일 만에 나온 판단이다. 또 지난 18일 이 회사의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자 측의 2심 승소 이후 5일 만에 같은 취지의 하급심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1부(부장판사 박미리)는 23일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이춘면씨가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유지했다. 원심인 1심은 후지코시가 이씨에게 위자료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씨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에서 노동력을 동원하던 시기인 1944년 일본 도야마의 후지코시 공장에서의 노역에 동원됐다.

당시 이씨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교장으로부터 ‘일본 후지코시 공장에 가면 중학교와 전문학교도 다닐 수 있다’는 취지의 통지서 등을 보고 일본에 넘어가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는 공장에서 선반과 같은 큰 기계를 이용해 철을 깎거나 자르는 위험한 작업을 해야 했으며,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생활해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근무 환경 또한 부상을 당하더라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시 현장으로 내몰리는 등 열악했으며, 처음에 들었던 학교 교육은 물론 임금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이씨는 1945년 7월 공장 증설 계획에 따라 한반도에 들어왔고, 같은 해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그는 2015년 5월22일 한국 법원에 후지코시를 상대로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은 “후지코시의 이씨에 대한 행위는 당시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며 손해배상 청구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는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라고 봤다.

또 “이씨에게는 이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면서 이 사건 소송이 권리행사 장애사유가 해소된 이후 상당한 기간 내에 제기된 것으로 보고 후지코시에게 위자료 1억원 등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email protected]

<2019-01-23> 뉴시스 

☞기사원문 :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또 승소…청구권 재확인 

※관련기사 

☞연합뉴스 : 근로정신대 피해자 日후지코시 상대 손배 2심도 배상 판결 

☞서울신문 : ‘근로정신대’ 피해자, 일본 전범기업 상대 2심도 배상 판결 

수, 2019/01/2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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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인터뷰 조한성 출판팀장

 

독립운동가의 삶을 새롭게 발굴하고 알리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작업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제대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역사 속에 잊혀져버린 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작업의 주체가 역사가냐 아니냐의 여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잊혀진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충남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박경철 회원은 농업·농촌·농민문제, 즉 3농문제 전문가이지만, 한인애국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 참여해 큰 역할을 하셨던 이화림 지사의 회고록을 발굴하여 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삶을 복원하였다.
충남연구원에 찾아가 이화림 지사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번역해 <이화림 회고록>으로 펴낸 박경철 회원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임무성 교육위원도 함께 했다.

문 : 어떻게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셨나요?
답 : 중국 베이징대학 유학 당시 한국유학생 연구생회 활동을 하면서 타이항산 역사탐방을 추진해서 4차례 정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학 가기 전부터 윤세주 열사나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옌안 지역은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BS 특집 다큐멘터리 10부작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를 본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연구생회에서 뜻이 잘 맞았던 후배 정원식과 함께 역사탐방을 추진했는데요. 당시 베이징대학에 방문학자로 와 있던 서울시립대학 염인호 교수의 소개로 윤세주 열사의 후손과 연락이 닿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 ‘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와 연결되었습니다. 또 개인사업을 하시면서 기념사업회 일도 도와주시던 김영민 선생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영민 선생이 윤세주 열사와 함께 활동하신 분 중에 이화림이라는 분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면서, 이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서전을 남기셨다고 하는데, 윤세주 열사의 외종손인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다
는 거예요. 이 얘기를 듣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자서전을 찾아봤습니다. 제가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던 때인데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중고서점에 들어갔다가 이화림 선생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발견하였습니다. 얼른 그 책을 주문해서 받았는데 그때 온몸에 흘렀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왜 이 책이 나에게 오게 되었을까.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문 : 번역은 언제 시작하신 건가요?
답 : 그때는 먼저 천천히 정독했구요. 박사논문을 다 쓰고 학위를 받아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도중에 번역을 좀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 생겼어요. 이 책이 번역되기를 기다리시는 윤명화, 윤명순 할머니의 연세도 너무 고령이셔서 마음도 급했구요. 그래서 타이항산 탐방을 같이 했던 김선경 후배와 함께 번역해서 <이화림 회고록>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문 : 회고록을 보면 이화림 지사나 가족이 3·1운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것 같아요?
답 : 네. 맞습니다. 먼저 3·1운동 당시 이화림 지사의 오빠들이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어요.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전단지를 인쇄해서 뿌리기도 했구요. 그 과정에서 소학교 학생이던 이화림 지사도 오빠들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1995년 8월 요녕민족출판사가 출간한 <정도>와 한글 번역판 <이화림 회고록>

이화림 지사나 오빠들이 3·1운동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 듯 해요.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숭현소학교에서 일하셨는데, 상당히 민족의식이 강하셨어요. 구들장에 태극기를 숨겨놓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잊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요.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경찰들의 압박이 심해졌다는 거구요. 오빠들은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만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독립군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후론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는 언제 중국으로 망명하셨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당시 나이도 어렸고 공부도 계속해야 해서 어머니와 함께 국내에 남았어요.

1938년 중경 시절의 이화림 지사

 

이화림 지사는 숭현소학교와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역사문학연구회’라는 독서클럽에 가입했어요. 그곳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저서들을 처음 접합니다. 그후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는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얼마 후 이화림 지사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오빠들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북지역으로 떠나는데 오빠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문국의 소개로 김두봉 선생을 찾
아 상해로 갑니다.
그런데 김두봉 선생이 말하길, 독립운동은 김구 선생에게 가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김두봉 선생의 소개를 통해 김구 선생을 찾아갔는데 김구 선생이 이렇게 물어요.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 이화림 지사는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구 선생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의 비서 역할을 하며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활동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 거사하러 갈 때 폭탄을 넣어갈 속옷 고쟁이에 주머니를 만드는 일도 했구요. 윤봉길 의사의 거사 때에는 윤봉길 의사와 일본인 부부로 위장해 홍커우공원을 미리 정탐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화림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활동한 바로 이것이 이화림 지사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독립운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화림 지사가 이렇게까지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김구기념사업회나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쪽에서는 이화림 지사의 한인애국단 활동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 같아요. 이화림 회고록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역사학계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연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문 : 이후 이화림 지사는 김구 선생과 헤어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서 일하게 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답 : 이화림 지사가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되는 과정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에요.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화림 지사도 그 과정에서 자연히 김구 선생과 헤어지게 된 거죠. 이화림 지사는 광저우로 피신하는데 거기서 유학생이었던 김창국이라는 분을 만나 결혼하고 아들도 낳게 되요. 그런데 이때 조선민족혁명당의 지도자 윤세주가 광저우에 와서 유학생들에게 연설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나서달라는 것이었죠. 이화림 지사는 그
연설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반성도 하게 된 것 같아요.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경을 넘어놓고 지금은 유학생과 결혼해서 애기를 낳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리려고 했으니까요. 이화림 지사는 고민 끝에 남편과 아들을 남겨두고 민족혁명당이 있는 난징으로 떠납니다. 이화림 지사는 민족혁명당 부녀국에서 박차정 지사와 함께 열심히 활동하게 됩니다.
사실 윤세주의 후손 분들이 생전에 이화림 지사에게 연락하고, 자서전을 찾으려고 노력한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윤세주 열사 때문에 이화림 지사가 개인의 행복한 삶을 버리고 힘든 독립운동의 길에 나서게 됐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윤세주 열사의 마음의 빚을 그 후손 분들이 나누고 계신 거지요.
1942년 5월 일본군 수십만이 팔로군을 섬멸하기 위해 타이항산지구로 쳐들어왔던 유명한 타이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팔로군 주력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윤세주, 진광화 열사가 전사하게 되는데요. 이 전투에서 이화림 지사는 중산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배워왔던 의술을 발휘해서 부상자 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화림지사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시절 가장 빛나는 활약은 바로 이것이
라고 할 수 있죠.

문 : 이화림 지사의 해방 후 활동은 어떠했나요?
답 :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서 해방을 맞습니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북진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중국 내전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이화림 지사는 당시 무정 장군의 권유로 옌안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무정 장군이 이화림 지사는 옌안에 남아서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줍니다. 이화림 지사는 1947년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옌볜에 있는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에서 근무합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이화림 지사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해 북한으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의무병으로 부상자 치료에 전념했구요.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를 다쳐 다시 랴오닝성 선양으로 복귀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부상 치료 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 그 후 이화림 지사는 중국에서 의사로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1955년에는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했고, 옌볜조선족자치주 위생국 부국장, 국장, 옌볜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 당대표 등을 역임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1984년 퇴직하는데, 그동안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 1만 2천 위안을 옌볜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놓고 왔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아동단체에 대한 기부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문 :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셨는데, 해방 후 활동이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고 있군요.
답 : 네. 그렇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의 독립운동, 사회주의자의 독립운동에 대한 서훈을 어디까지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요. 이화림 지사의 서훈이 이 문제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 같아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하더라도 이분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다는 점에서 좀 더 전향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근 MBC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와 관련해 이화림 지사를 취재해 갔는데요. 그런 관심이 좀 더 널리 퍼져서 서훈 문제도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문 : 이화림 지사에 대해 여쭙느라고 정작 선생님에 대한 질문은 못했습니다. 현재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소개해주시고, 올해의 계획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 :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농민수당, 농민기본소득에 관해 연구해서 전국에 알리고 중앙정부부터 지방까지 이 정책이 채택되고 추진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농민기본소득이란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자는 것 인데요. 현재 농민들의 소득은 도시 농촌 간에도 차이가 크지만 농민 간에도 소득차가 큰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농사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농민에게 농민기본소득을 보장해주자는 주장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공론화되어 현재 해남, 강진, 부여 등지에서 농민수당을 도입한 상태이구요. 조만간 경기도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는 전국적으로 30여 차례 농민기본소득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요. 올해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그 외에 농촌의 사회문제, 복지, 개발문제도 연구하고 충청남도와 중국과의 교류 활성화 문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올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아름다운 공주의 풍경을 뒤로 하고 박경철 회원과 인터뷰를 마쳤다. 역사가 왜 연구와 실천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목, 2019/01/2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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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

지난 2018년 12월 15일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 한
국학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좌담 <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열렸습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대학 교수가 참여했고,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았습니다. 좌담회 전날인 1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나의 인생과 역사학>을 주제로 강만길 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강만길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 연구를 통해 일제시기 반식민사학의 변혁적 전통을 복원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전망을 담아내지 못한 채 사용되던 ‘해방 후 시대’를 분단시대라 역사적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복원하고,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을 분단시대 극복사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매진해 왔습니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고, 통일문제 강연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히토쓰바시대학 교정에는 이 대학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동판이 있습니다. 후쿠다 도쿠조는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입론한 일본 제국주의시대 경제사학자였는데, 조선사회는 19세기 후반 일본의 강요로 문호가 개방될 때까지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중세사회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백남운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해 우리 역사에도 중세사회가 있었다고 논증했는데, 자신의 도쿄상과대학 선생인 후쿠다 도쿠조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입니다.
14일의 강연에서 강만길 교수는 후쿠다 도쿠조와 백남운의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습니다.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4살 때인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다닐 때에는 한국전쟁에 반대하고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사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당시 일본 역사학자들이 사용하지도 않았던 ????통상휘찬???? ????통상휘편???? 같은 자료를 이용하여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와 함께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조선경제사를 연구했습니다. 또한 관동대지진 대학살에 관한 자료집을 펴내고,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中公新書, 1975)라는 책을 발간해 당시에 5만부 가량 팔리면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두 강 교수가 역사연구의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해 본 이번 좌담은 여러모로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두 강 교수는 연배도 1살 차이로 비슷한데, 식민지와 해방, 분단, 6.25전쟁, 냉전, 반공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분단과 전쟁은 남한에서 반공독재를 낳고 고착화했으며, 일본에서는 분단된 재일조선인사회에 민족 차별이 더해졌습니다. 두 강 교수는 자기 존재의 모순을 사회 모순으로 전화시키며 실천적연구를 통해 인간해방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역사학자이기 이전에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한 지식인입니다.
두 강 교수는 오래 전부터 교유를 이어 왔는데, 여러모로 닮은 점도 많습니다. 자본주의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경제사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그렇고, 경제사를 연구하다가 사회운동사로 연구를 확대해 간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학자로서 추구해온 역사인식에 공감하고 지식인으로서 추구해 온 삶의 가치와 지향에 공감하기 때문에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5일의 좌담에서도 강덕상 교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최근에는 소농사회론, 유교적인 동아시아 근대이행론 등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 좌담회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보다는 그 역사인식 문제를 주로 다루었는데, 향후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 연구에 참조되었으면 합니다.
강덕상 교수는 ????여운형 평전???? 완성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1권과 2권은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는데, 4권이 2019년 2월에 발간될 것이라 했습니다. 강덕상 교수는 1986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강만길 교수와 함께 여운형 묘소를 둘러보았는데, 현대사에 자리하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에 비하면 묘소가 너무 초라해 씁쓸했다고 합니다.
????여운형 평전????이 4권까지 완간되면 한국어로 번역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었지만 재일조선인도 많았습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서로 주고받은 정담이 지금도 애틋합니다. 강덕상 선생님이 사석에서 필자에게 건넨 한마디가 마음 한구석에 애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겪는 처지가 온전한 하나의 반쪽이라면 재일조선인은 그 반의 반쪽이라고.

병중에 계신 강덕상 선생님이 오랜 친구 강만길 선생님을 만나러 나오셔서 저녁 식사 자리도 마련해 주시고 좌담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두 분의 애틋한 정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강덕상 선생님의 완쾌를 바랍니다.

목, 2019/01/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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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 12월 8일, 김일동 작가가 전시품 ‘보상하라展’을 기증했다. 독립운동가 5인(김구, 김좌진, 안중
근, 이봉창, 유관순)의 희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팝아트로 작가의 작품해설은 다음과 같다.
(작품 해설 :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등장하고 그들이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착용하고 현대 문화
기본매체인 영상과 사운드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위해 힘
들게 활약을 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노고 끝에 이렇게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 대중문화·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를 작품으로 표현해 보았다.)

• 12월 7일, 야스쿠니재판지원회, 재일조선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화련 씨가 소장하고 있던 생활자료를 기증했다. 1934년(소화 9년)에 제작된 보자기로 ‘수복
강녕壽福康寧’이라고 쓰여 있다.

• 12월 10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김재용 교수(원광대)가 故 임종국 선생의 서신을 기증했
다. 서신은 임종국 선생과 <친일문학론>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오무라 교수가(2018년 7월 민
족사랑 참고) 주고받았던 것으로 <친일문학론>이 번역된 1976년 이전이 14점, 출판 이후가
30점, 총 44점이다.

• 12월 14일, 수원지부 소속으로 25년째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서용희 회원이 소장자료 4점
을 기증했다. 기증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법령관계 자료집으로 <모범조선호적기재례
전집>(1935), <조선호적예규>(1933) 등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9/01/2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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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는 12월 26일 오후 2시, 옛 남영동 대공분실 마당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운영과 관리를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넘기는 이관식을 열었다.
1970~1980년대 대표적인 고문기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의 요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과거군사독재 시절 박종철 열사 등 수많은 민주화 인사를 고문했던 장소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최근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됐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10민주항쟁 31주년 국가기념식에서 이 자리에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이관되어 민주인권기념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이날 이관식에는 고문피해자, 고문피해자 가족 및 유가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그리고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민갑룡 경찰청장 등 수백 명이 참석했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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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활동 백서> 출판기념회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상임대표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 주최로 12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에서 열렸다. 역사학자 이이화 이사는 축사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역사라도 기록해야 기억되며, 나쁜 놈은 나쁜 놈으로,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기록해 후배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말했다. 1권 751쪽, 2권 894쪽, 3권 667쪽 등 모두 2312쪽에 달하는 백서는 1권에서는 활동가 소회 등 활동 평가와 일지·좌담회·언론 보도·논평, 2권에서는 교과서 분석·집필 거부·교육부 공문서, 3권에서는 법적 대응 자료와 국제기구 활동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송두환 민변 전 회장(전 헌법재판관)은 축사에서 “2018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민변이 제기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 위헌 헌법소원심판청구’를 각하했다”며 “국정화 고시와 같은 불순하고 위헌적인 시도의 재현 위험성을 보다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재의 명시적 위헌 선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본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한경 부천 중원고 교사(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는 같은 자리에서 “박근혜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추진된 것처럼, 다음 문재인 대통령 한마디에 국정교과서가 폐기됐다”며 “앞으로 누구도 국정교과서를 꿈꾸지 못하는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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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명예이사장)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学) 초청으로 12월 12일~16일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한국학 연구센터 설립 2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초청 방문으로 신용옥, 조세열 상임이사가 수행하였다. 일정은 12일 출국, 13일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 자택 방문, 14일 강연회, 15일 강덕상 교수와의 좌담회, 16일 귀국 순으로 이루어졌다. 강덕상 교수는 재일사학자로서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과 일제의 조선인 학병동원 등을 연구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초창기부터 지도위원을 맡은 인연이 있다.
강 교수는 12월 14일 히토쓰바시대학 국제연구관에 열린 ‘나의 인생과 역사학-분단시대에서 미래를 여는 역사로’ 강연회에서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주장한 후쿠다 도쿠조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백남운의 사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과정 등 그간의 연구 역정을 소개했고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망했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강만길 교수와 강덕상 교수의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역사연구의 과거·현재·미래’ 좌담회가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의 사회로 열렸다. 강덕상 교수는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을 들고 나와 자신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준 책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두 강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관련한 역사인식 문제와 한국 및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강연회와 좌담회에는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생들이 참석했는데, 한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입장, 향후 진로 문제 등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질의가 있었는데 그 가슴 뭉클한 사연이 청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편집부

목, 2019/01/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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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회참여 운동 1세대 원로이며 연구소 3대 이사장인 김병상(86·필립보) 신부의 삶과 신앙을 기록한 회고록 〈따뜻한 동행〉 헌정 미사와 출판기념회가 12월 15일 인천시 심곡동 국제성모병원 3층 마리아홀에서 열렸다. 이 책에는 선후배 동료 사제들이 김 신부를 소개한 글과 더불어 김 신부의 구술·인터뷰·일기를 비롯해 지인들의 증언까지 충실히 정리해 놓았다. 1974년 유신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되자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김 신부는 천주교와 인천지역 민주화운동계의 상징이 됐다. 1977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고, 1976년~1980년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 8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에 임명되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9/01/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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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함세웅 이사장

 

2019년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 한 해 우리 연구소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고 격려해주신 은인 회원들과 구성원 모든 분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남북 정상은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 평화와 통일의 문을 여는 새로운 100년을 남북 8천만 겨레가 함께하자는 취지로 남북공동행사를 약속했습니다.
남북공동행사의 성공을 위해 지난 역사에 대한 해석과 그 안에 남아있는 차이를 우리는 함께 극복해야 합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는 평화공존과 일치를 위한 약속과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민족공동체는 일제의 침략과 그 후유증인 이념과 정파 때문에 갈등과 분열 속에서 서로 헐뜯고 살았습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이 모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3년 동안 서로 비판하고 심지어 경멸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부끄럽고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남북 분단과 증오였습니다. 이에 친일 매국노와 반공 분단 권력이 손잡고 독버섯이 되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올해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선조들이 품었던 그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3·1혁명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바로 구체적 표징입니다.
해방 정국 3년, 곧 미군정 시기가 미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였다는 분명한 역사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 인식이 미국을 넘어 남북이 함께 손잡고 확인해야 할 평화공존의 민족적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북이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한 어머니의 자손이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어머니가 같은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가족이 함께 만나고 살아가는 것은 인륜이며 하늘이 주신 천륜입니다.
이에 새해 우리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남북 8천만 겨레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는 일에 앞장서도록 노력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 잔재 청산은 물론 모든 비인간적 요소를 척결해 온 인류가 하나되는 평화공존의 보편적, 우주적 ‘민족문제연구소’로 승화하기 바라며 기도합니다.
새해 회원 여러분과 연구소 임직원 각자의 소망과 꿈이 실현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 2019/01/2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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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주관한 국제학술회의가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를 말한다-조사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덕성여대에서 열렸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 등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일어난 인적 피해 문제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국가와 시민사회 차원에서 달성한 진상규명 현황과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심화되고 발전된 진상규명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방법, 자료 발굴 등이 필요한지를 함께 모색하고자 마련되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김승은 책임연구원이 ‘한반도 내 인명피해 조사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성균관대 박사과정의 김강산 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발표하였으며, 재한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모임의 이치바 준코 대표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강제동원을 주제로 한 발표는 김민철 책임연구원,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 관장, 고바야시 도모코 유골봉환종교인시민연락회의 공동대표가 맡아 한국과 일본에서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의 현황에 관해 각각 발표하였다. 이어서 조시현 연구위원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는데, 류준범(국사편찬위원회), 이상의(인천대), 히다 유이치(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고바야시 히사토모(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량대륭(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씨 등이 한국, 일본, 자이니치의 입장에서 연구 성과와 활동 등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깊이 있는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번 회의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현장에서 연구와 실천을 거듭해 온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띤 논의를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함께 모색한 뜻 깊은 자리였다. 또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이 부각되고 있는 지금, 국가를 뛰어넘은 양국 시민들의 연대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19/01/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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