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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학생실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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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학생실천연대

익명 (미확인) | 일, 2017/10/29- 10:06



기독청년학생실천연대 종교개혁500주년 성명서 종교개혁정신을 희롱하는 교계적폐를 우리의 손으로 몰아내자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 이는 물질과 권력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시대 가톨릭의 파렴치한 신성모독에 대한 항의였다. 이 반박문은 2주 만에 신성로마제국 전역에 퍼지고 한 달여 만에 유럽 전체 지역에 퍼지면서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 사건은 종교 개혁과 개신교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며 중세 유럽을 끝내고 근대 사회를 연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이 물결은 장 칼뱅과 울리히 츠빙글리, 존 웨슬리,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종교개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당시 사회의 종교적, 제도적, 경제적 모순을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일으켜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의 역사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19세기 들어 선교사들의 방한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들어온 서구의 문물들은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하였고 소외받았던 민중들이 하나님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심어주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해방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고 1919년의 3.1운동 등 민족독립활동의 주체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겪어야 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들어선 독재군사정권에 항거하여 수많은 평신도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써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고 개발독재시기에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불의한 현실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산업선교가 태동하였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가치와 정신을 온전히 계승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권력을 가진 목회자와 장로들을 포함한 구시대적 가치관에 갇힌 소수의 금수저들이 한국교회를 자신들의 기업(企業)으로 전락시켰다. 그들의 성곽에서 쫓겨난 자들은 누구인가? 하루하루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피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농민들이었고 하루마저도 어떻게 먹고 살아가야 할지가 막막하던 빈민들이었다. 학업경쟁시대에 치이는 청년·학생들이었고 교회에서 헌신하되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외국인들 중 특히 종교권이 다른 이주민들, 성에 대한 다른 인식을 가졌던 성소수자들, 누구든지 사람답게 살고자 헌신하던 진보인사들까지, 아니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더 많은 다양한 이웃들을 한국교회는 색안경을 끼고 그들만의 잣대를 들이대 내쫓으며 ‘자신들만의 거룩한 성전’을 쌓아올리는 데 급급했다. 그나마 그 성에 남은 사람들은 온전할 수 있었던가? 교회에서의 설교에는 더 이상 ‘이웃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남아있지 않았다. 극우권력층을 향한 굴종과 아첨으로 대형교회 장로를 대통령으로 세우고 민중들을 탄압한 유신의 딸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내부적으로는 당회 및 내부조직을 통해 성도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교회의 통제에 따르게끔 강요했다. 교회직분을 놓고서 매관매직이 적나라하게 일어났었고 공동체의 재정은 남몰래 그들의 것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방관하거나 유가족들을 폄하하였으며 백남기 농민의 물대포 사건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구속, 최근 시민들의 촛불집회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매카시즘’으로 자위하기 급급해왔다. 그들의 뿌리를 들춰보면 친일이 난무하던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한국교회의 역사이자 현실이었다. 신학생시국연석회의의 시국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신공양 사교의 무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고 신전을 폐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선교로의 참여하는 것’이라고. 여기서 인신공양의 사교와 무당은 기독교계에는 누구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난 촛불혁명시기에는 그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일당들을 가리켰던 말이라면 이제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는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로 뭉쳐진 번영신학과 제국주의적이며 사회성이 결여된 근본주의의 끔찍한 ‘혼종’이 그 대상일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우리 시민들은 부패했던 정권을 끌어내렸듯이 이제 우리 평신도들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온전히 받들어서 한국교회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는 교계적폐들을 청산해야 한다. ‘그들만의 잔치’를 끝장내고 ‘누구나 함께 조건 없이 누릴 수 있는 평화의 식탁자리’를 만들어서 복음이 사회와 괴리된 ‘허공에 매인 십자가’가 아님을 선포해야 한다. 총회와 당회의 독재를 끝내고 평신도가 한국교회를 견인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평신도 교계참여정치’로 하루속히 정착되어야 한다. 권력에 대한 아첨과 혐오조성에 앞장선 과거를 참회하고 가장먼저 앞장을 서 버려진 이웃들을 찾아내어 누구든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복음적인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에 어울리는 믿음의 선조들의 간절한 호소이자 이 시대의 참된 길임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제 우리가 다 함께 ‘교계적폐 청산하여 종교개혁 완수하자’를 힘차게 외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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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번째 촛불교회가 열립니다. '성소수자 인권 유린하는 육군참모총장 장준규 규탄기도회'입니다. 군형법 92조 6항은 헌법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악법입니다. 더욱이 육군참모총장은 자신의 자의적 판단으로 한 사람의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고자 모였습니다. 6월 8일 저녁 7시 30분입니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으로 모여주십시오.

금, 2017/06/0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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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민족으로서 우리의 건국설화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매우 특별하다. 대부분 나라의 경우. 건국설화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배경으로 설정하거나 초인적인 영웅의 이야기로 출발하여 지배권력을 미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하여, 우리 설화의 경우에는 태백을 거점으로 삼아 상제의 아들인 환웅이 보기에 아름다운 땅을 선택하여 나라를 세우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이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칼럼_181004(2)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는,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초상화

단군신화로 알려진 위의 이야기가 후대에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어낸 것인지, 오랜 역사 속에 체화되고 전승되어온 이야기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토대를 형성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언어로서 가장 감동적이며 성스러운 내용을 담아낸 성경의 주기도문과 같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나라를 세우며(이화세계)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규범(홍익인간)을 삼는다는 것은 종교사적 견지에서는 황금률적인 표현이며 정치학적 의미에서도 제1의 공의적 원칙이다. 이번 글을 통하여 상기의 원칙들이 한국 역사에 투영된 기록을 찾아가며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가름해 보고자 한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무속적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적 모습으로 수렵사회를 반영한 제천행사가 부여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 형태로 행하여졌다고 전해지며, 농업이 번성하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단오와 추석과 같이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음식과 가무를 즐기는 명절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이후 신라의 기록을 보면 불교가 전해지면서 지배계층인 화랑이 중심이 되여 향도(香徒)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지배질서로서 종교적 규범을 강조하고 생활의 실천적 지침을 삼아 내려오다, 이후 일반백성에게까지 조직이 확산되면서 새로이 절을 짓거나 탑을 쌓거나 불공의 행사에 다중들이 함께 모여 공력을 제공하고 신앙적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고려 왕조로 들어서면서 종교적 배경과 행사를 위해서 조직되고 활동하였던 향도는 이제 향촌의생활 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香徒가 아닌 鄕徒가 되여 생활의 공간과 내용을 공유하면서 함께 노동하고 함께 즐기고 서로를 도와가는 양속으로 이동했다. 마을의 공동노역, 혼례, 장례, 마을 수호신 제사를 함께 치르면서 자연스레 상부상조적 조직으로 변모해 갔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한민족 역사를 줄곧 관통해온 두레라는 협동적 노동방식과 상부적 자조금융인 다양한 형식의 계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향촌의 통치 방식에서도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을 내세워 왕권을 대신하여 중앙에서 향촌으로 파견된 관리 간에 협의 내지는 역할 분담을 이루면서, 읍사(邑司)가 중심이 되어 일종의 지역자치를 이루면서 내려온 셈이었다. 그러나 고려말 성리학이 도입되어 확산되면서 자치적 성격이 강했던 향도와 읍사는 양반 중심의 지배계층에 의해 유교의 가르침과 규범을 가르치는 향약(鄕約)으로 흡수되어 재구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향약은 사원과 함께 향촌에 뿌리를 내린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면서 중앙정치의 훈구 세력에 맞서는 일종의 정치적 거점으로 변모한다.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적 관료체제인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경제의 축을 이루는 농업 기반인 토지의 사용 및 소유의 형태와 조세정책의 변화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는 지배권력간의 이권과 세력다툼, 그리고 권력의 틈새에서 민중들 스스로 자조하고 순응하며 때로는 협약하고 저항해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경제의 기반과 운용의 결과물을 놓고 지배계급과 기층민중간에 전개되는 ‘정치동력학’적 궤적이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확고히 정립한 조선조 초기에는 주요 경제기반인 농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산업정책의 기본으로 정하고 소농의 농민을 중심으로 백성을 위한 민본(民本)의 왕도사상을 정치적 지향으로 삼아 왔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 조준 등이 비록 의도했던 균전제를 온전히 도입하지 못했으나 과전 및 직전법을 시행하여 고려 말 혼란하고 무질서했던 토지 소유관계와 조세체계를 바로 잡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왕족과 세도가들의 토지겸병 현상이 심화된다. 수조권을 기반한 토지지배구조가 약화되거나 붕괴되고 매득(買得), 장리(長利,) 개간(開墾) 등 통하여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대되면서 농지를 떠나는 유민(流民)들이 대거 발생하고, 일부 양반들이 사노(私奴)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된다.

이에 지방에 기반을 둔 사림세력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가 만든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제도적 모범으로 삼고 사원과 유향소의 부활을 구실로 삼아, 탐욕스런 중앙의 왕족들과 세도가들을 견제하며 나라의 기반인 농촌사회가 무너져 가는 것을 방지하고 성리학을 정치사회적 규범으로 삼아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목숨을 건 정치투쟁을 전개한다.

중종에서 시작하여 명종을 거쳐 임진왜란 전의 선조 대에 이르기 까지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 향약을 한글로 보급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들인 조광조, 이퇴계 그리고 이율곡 등으로 이어지면서 사림파와 훈구파 간에 성리학의 해석을 겸한 권력투쟁과 향약논쟁의 역사가 펼쳐진다.

향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 섬서성의 한 향촌에 국한되어 행하였던 여씨향약을 주자가 국가단위의 시행을 위하여 새로이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다음과 같이 주요 4개의 덕목으로 요약하였다.

덕업상권(德業相勸) : 좋은 일, 바른 일은 서로 권한다.

예속상교(禮俗相交) : 미풍양속으로 서로 교제하여 이를 널리 확산시킨다.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한 일은 지적하고 비판하여 바로 잡는다.

환난상휼(患難相恤) : 개인 또는 향촌이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고 함께 극복해 나간다.

향촌에 거점을 두고 있던 조선조 사림의 양반들은 상기 향약의 내용과 제도를 무기로 삼아, 한편에서는 중앙정치의 세도가들의 탐욕과 패악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성리학적 윤리도덕을 기반으로 현존의 상하 신분관계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향촌의 공동체에 자발적 참여를 통한 자치기능을 부여하여 스스로 규계(規戒)하고 향촌을 유지 발전시키는 규칙을 세우며 고조선 이래 배달민족의 양속인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전통을 지켜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들의 향약 실천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움직임에 대하여 중앙의 왕족과 세도가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예건데 인물이 부족하다거나, 인심과 풍속이 투박하여 오히려 역작용의 폐해가 예상되며, 신분제의 붕괴가 염려되고, 왕권의 향촌을 다스리는 힘이 약화된다는 등 이유를 핑계로 삼아 몇 번의 사화를 통하여 사림파들을 숙청하고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

권력의 다툼과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향약은 오래된 것으로 이를 실시된 곳마다 사람들이 서로 보살피고 돌아보며, 서로 돕고 질병에 함께 대응하며 구제하며, 자제로 하여금 유학의 가르침을 따라 효제의 뜻을 두텁게 하는 것을 가르치니, 삼대지치(三代之治)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 – 化民成俗”라는 상소에 따라 중종 시절부터 적극적인 시행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매우 주목할 만한 인물이 조선중기 최고의 지성이자 실천적 행정가였던 이율곡 선생이다. 본인이 관직에 있을 당시 향약을 권하면서 파주향약의 서문을 직접 작성하였고 청주목사로 재직 시에는 서원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조가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려 하자 오히려 시기가 너무 이르다(時期太旱)고 주장하며 시행을 보류하도록 간곡히 주청하여 계획을 중단시켰다. 더욱 기이한 것은 본인이 훗날 향촌에 머물면서 다시 완성도가 매우 높은 해주향약을 제정하여 보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일견 서로 모순되고 상반된 이런 대목은 선조라는 못난 왕의 됨됨이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능할 듯하다. 사림들의 줄기찬 요구에 따라 신하들의 논의를 거쳐 향약의 전국적 실시를 결심할 단계에서 이율곡은, 선조가 민본의 왕도정치에는 별로 뜻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왕권 강화에만 마음이 머물러 있어, 이런 상태에서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향촌의 자치적 기능과 양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훼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왕권과 중앙정치의 강화를 위한 하부 조직으로 전락할 것을 심히 염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필자가 제3 섹타경제론의 서론에서 제기한 지적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겨우 유아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재단계의 사회적 경제영역은 당연히 지자체를 포함한 정부와 공공기관의 법제적 도움과 재정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揚水論), 제3 섹타가 추구하는 자발적 참여와 스스로 역동적이어야 할 네트워크 형성을 정치와 행정 권력이 저해하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되풀이 언급하지만, 제2 섹타와 더불어 세 분야 영역 모두 병렬적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율곡 선생이 보여준 천재적이면서도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다시 한번 반추해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패자적 왕권과 세도가들의 영향을 차단한 것만이 아니라,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여씨향약을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실천적인 내용을 담아내었다. 자발적 참여와 회원들간 원만한 합의를 유도하기 위하여 향약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세칙을 정치하게 기술하였고, 실천적이고 구속력 있는 모임이 되기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선악부(善惡賦)의 작성 요령과 규칙을 세밀히 규정하여 향촌내 세력가들이 행할 자의적인 패악을 엄하게 금하였으며, 향약의 기능을 사창(社倉)과 통합하는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을 제창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향촌단위의 사회안전망적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율곡 선생이 지향했던 향약 실천의 뜻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단순히 기존의 지배 질서를 온전히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넘어서서, 위로부터의 통치가 아닌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에 따른 자치를 이루고, 성리학적 규범 가치를 공유하면서 예(禮)를 통한 윤리적 절제로 향촌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며, 향촌 단위로 상호부조를 통해 사회경제적 안전망 기능을 부여하고, 전체적인 강제보다는 개인과 공동체간의 관계성 회복에 초점을 두었다 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앞선 칼럼 ‘인본적인 사회주의자’에서 소개한 19세기 초 프랑스 사상가 사를 푸리에의 기획과 일맥 상통하며 1990년대 노벨경제학을 수상한 인디애나 대학의 오스트롬 교수의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라는 저작에 담긴 구상과 비견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다시 한번 대학자의 경륜과 가르침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다. 안타까운 것은 필자가 역사 공부에 어둡고 한문이 서툴러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분야의 전문학자님들께서 좀더 구체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밝혀주시길 희망할 뿐이다.

아쉽게도 향촌 단위의 자치적 분권을 의도하였던 향약의 보급과 시행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 신분제의 급격한 붕괴, 다양한 원인으로 촉발된 농민층의 분화, 향시(鄕市)를 넘어선 격지 간 상업의 발달, 세도정치의 패악, 삼정의 문란 등으로 멈추어 서게 된다.

반면에 사림의 양반이 주도하였던 향약 운동을 대신하여, 모내기를 도입한 이양법으로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왔던 일반 백성 중심의 집단협동적 노동방식인 두레와 상호부조적 금융시스템인 다양한 계의 모임이 활발히 되살아 나고, 외척과 부패한 관리 등 지배층의 탐욕과 패악에 대항한 산발적인 민란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자각과 실천 운동들이 벌어지게 된다.

청제국을 파탄내는 서세동점 흐름과 한국땅에 상륙한 가톨릭과 개신교 등 기독교의 충격 속에 북학파를 시작으로 전개된 다양한 실사구시적 운동, 위로부터 자강을 시도한 개혁파의 시도, 일반 백성들의 근대적 각성을 촉발한 동학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운동 등이 전개되었고, 불행하게도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등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반쪽뿐인 현대 한국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칼럼_181004(4)통일뉴스
사진: 통일뉴스

2018년 현재, 남한사회는 양가(兩價)적이며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견 일인당 GDP가 3만 불을 넘어서면서 수치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고, 국력에 있어서도 세계 11위권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미들파워 국가로 부상하였다. 반면에 외부적 조건이 불리한 가운데 양극화가 극심하고 사회적 불안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득의 불평등 상황이 미국과 함께 OECD국가 중 가장 열악하여 1%의 국민이 20% 정도의 소득을 점하고 있고, 자산소득은 더욱 극심하여 이의 정도를 알려주는 피케티지수(국민순자산/국민총생산)가 10에 근접하고 있으며 (역사적 경험으로 지수가 6을 넘어서면 전쟁을 부추긴다고 피케티는 설명하고 있다), 1%의 부자와 재벌기업들이 민간소유 토지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자본 시장의 경우는 심한 정도를 넘어서서 1%의 자본가가 90%의 배당소득을 차지하는 등 극한적인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은, 마치 왕족 및 세도가와 이들의 하수인격인 권노(權奴)들이 불법적인 토지겸병의 탐욕으로 국가질서를 뒤흔들고 온갖 수단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던 조선중기 이후의 패악스런 모습이 다시 부활한 듯, 더욱 뿌리를 깊이 내린 채 난공불락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타결책으로 어리석게도 국민소득 4 만불의 수치적 성장론을 제시한다거나 소중한 그린벨트를 풀어서 주택 건설량을 늘려 투기를 막고 주거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상황을 더욱 나쁜 방향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핵심은 소수를 위하는 양적 성장에서 전환하여 일반시민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민본중심의 사회경제적 운영의 철학과 방향 위에서, 저마다 생업에 전념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투기적 부동산 소유에 대해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고통을 가하고 불로적 지대소득에 대한 확실한 누진과세를 적용하며, 경제적 성과를 국민 모두가 골고루 향유하는 배분과 순환의 원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역사적 변혁기에 서있는 한국사회는 당면한 문제를 본질적으로 직시하고 접근해야 한다. 부패하고 탐욕스런 무리와 이를 부추기는 관행 및 제도에 대항하여, 향촌의 사림들이 시도하였던 향약의 시행과 더불어 백성들의 자조적인 운동이었던 두레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건국 신화로 전해지는 이화세계와 홍익인간의 역사문화적 DNA를 다시 발견하고, 이를 사회생물학적으로 우리 생활 속에 살아있는 유전적 밈(meme)으로 진화되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꾸어 가야 한다.

목, 2018/10/0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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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번째 촛불교회 안내 미군 사드 철거와 성주 소성리 주민을 위한 기도회로 모입니다. 현재 한미간의 군사훈련이 이어지고 있고 북한은 이에 강경 발언과 미사일 발사로 맞대응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주 소성리에서는 언제 쳐들어올 지 모르는 사드를 막기 위해 밤새 뜬눈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얻을 평화라는 게 뭔지 정말 궁금합니다. 평화로 가는 길 따윈 집어치우고 평화라는 길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해주십시오. 일시: 9월 7일(목) 저녁7시30분 장소: 미대사관 앞 광화문광장

금, 2017/09/0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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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과 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한 모 신부가 7년 전 남수단에서 행한 비참한 일에 대해 깊이 참회합니다. 인간의 영혼을 어둡고 슬프게 만든 그의 폭력은 저희 사제단이 함께 매 맞고 벌 받을 일임을 인정하고, 기나긴 세월 남모르는 고통을 겪으신 피해 여성께 삼가 ..
월, 2018/02/2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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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깨어 있는 시민의식으로 강경화 외교부장관 후보자 지지서명페이지가 열렸습니다. 동참해주십시요.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려고 합니다. 동참해주실 분은 아래 형식에서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6월 5일(월) 12시 정오까지 15,018명이 지지를 보내주셨고 성함과 함께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청문회까지 계속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뜨거운 지지를 보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합니다 일본군‘위안부’(이하 따옴표 생략)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온 우리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후보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강 후보자는 일본군위안부…
일, 2017/06/1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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