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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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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익명 (미확인) | 목, 2017/10/26- 13:22

[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③·끝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마지막 편으로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의 맹점을 짚어봤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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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유신’이라는 명칭은 메이지유신(1868년)에서 따온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황도파 군인 등 군국주의자들이 쿠데타 등으로 강력히 요구한 쇼와 유신이 그 원형이라고 지적하셨다. (2·26쿠데타는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조선 총독을 지내기도 한 사이토 마코토를 비롯해 주요 인사를 살해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토론과 협상에 의한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추구한 것이다.편집자)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열등생이었다가 만주 군관학교 이후 우등생이 됐다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박정희의 국가 운영 방식이 일본 사관학교의 군대식 교육과 만주국 국가 운영에 그 원형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일본 식민 시대의 국가 운영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을 중시했다는 것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회상을 통해 나온 말이다. 기시는 만주 침략의 핵심 인물이었고 연합국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지목됐는데도 두 번이나 일본 수상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그의 글에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가 5.16 쿠데타 직후에 쓴 글들, 특히 <우리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책에 메이지 유신 지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 문장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는 있는데도 이런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온다. 추측건대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은 박정희가 기시에게 외교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정희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는 1936년 젊은 군인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서 큰 감명과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쇼와 유신과 박정희 유신 체제가 닮은 점이 많다. 기성 민간 정치인에 대한 불신, 강력한 통치, 군대식의 능률적 사고 등이 그렇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박정희는 쇼와 유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재학중일 때, 일본 육사에 있었을 때, 또 만주군 군인이었을 때 군인 사회를 풍미했던 것이 쇼와 유신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정희가 이른바 국가개조 운동으로 재건 국민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데 그때 <조선일보>에는 재건 국민 운동은 일제 말기 군국주의 일본의 전시 동원 국민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재건 체조는 일제 말기의 라디오 체조를, 신생활복은 국민복을, 국민가요는 말 그대로 일제 말기의 국민가요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이 쓴 글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등 국민 개조 운동, 국민 교육 헌장이 쇼와 유신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교육 헌장은 메이지 교육칙어, 황국신민서사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조회, 국기 하강식 등 국가주의 맹세의 의례와 교련과 체육의 모의 수류탄 던지기 군사교육, 충효교육, 라디오 체조와 내 집 앞 쓸기 운동, 국민가요 부르기, 퇴폐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 고도 국방 체제를 목표로 한 총력 안보 체제, 국가 통제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일제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실행했던 국가주의를 본 떠 되살린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유신 체제는 일본 극우가 꿈꿨던 쇼와 유신의 한국형 변조라는 지적인데 대체로 적절한 평가라고 본다.

유신 체제는 쇼와 유신의 군국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쇼와 유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주 인맥이라고 평가되는데,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 중심 인물로 체포됐을 때 살아난 것도 국내 만주 인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과 경제적 관계를 포함해서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자들이 아베의 외조부 기시를 비롯한 만주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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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프레시안 : 그런데 대다수 국민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공로는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 개발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한국인 중 상당수가 1960~70년대의 경제발전을 박정희의 공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발 독재’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붙어있던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특히 유신체제가 경제 발전에 효율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이 점을 특별히 유의해 검토하고 있다.

<현대사 이야기> 8권 전체가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 발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9권에서 유신 쿠데타를 다룰 때도 이 문제를 포함했다. 앞으로 유신 붕괴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려고 하는데, 경제가 유신 붕괴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예정이다.

일부 진보 세력의 ‘개발 독재’ 주장은 심각한 허점을 안고 있다. 우선 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삼척동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히 다른 정치체제인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중화학 공업인데, 1970년대에 한국에 중화학 공업 시설들이 많이 세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유신체제 붕괴에서 경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대만도 1972년 10대 건설 계획을 세우며 1970년대 내내 중화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리의 경우 1972년 유신 체제 이전에 중화학 공업은 이미 포항제철이나 비료공장 등 중요한 시설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서 76년까지 진행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도 1971년에 구체적 계획이 다 세워졌다. 즉 이 개발 계획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1973년 1월에 선언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중화학 공업을 선언한다. 그는 앞으로 중화학 공업 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 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박정희 스스로도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신 체제 같은 강권 체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개발 독재론자나 중화학 공업 건설과 관련한 글 등에서 보면 1973년 정부의 각종 특혜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1974~75년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는 두 해 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화학 공업을 시작하려면 엄청난 자본이 투자돼야 하는데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그 정도의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국 경제에 기적이 출현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74년부터 ‘중동 건설 특수’가 나타났다. 석유 폭등으로 떼돈을 번 산유국들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이다. 이것은 다 알다시피 박정희와도, 유신체제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중동특수에 맞춰 한국은 1975년부터 몇 십억 달러씩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대를 포함해 몸집이 엄청나게 커진 업체들이 있었고, 1975년을 전후로 해서 부동산 투자와 투기가 벌어졌다.

여기서도 건설 업체들이 상당한 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즉 중화학 공업화의 발판은 유신 체제가 아니라 중동 건설 특수에 따른 막대한 외화 수입, 그리고 부동산 투자 투기에 따른 대기업의 막대한 이윤 창출이었다.

이런 요소들이 작용하면서 국가가 보증해주는 차관을 가지고 중화학공업에 투자해서 누가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느냐가 당시 재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재벌로 성장하는데 중화학 공업처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중화학 공업에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과다 중복 투자 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체제 붕괴에는 경제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78년 12.12 선거에서 여당이 심각한 패배를 당했는데 당시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경제통인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등을 포함해 경제 각료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경제 문제가 심각해져서 선거에 패배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처음에 말을 안 들었지만, 김정렴 회고록에 따르면 계속 이러한 요구가 나왔고 결국 김정렴은 9년여 만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남덕우 등 경제 각료를 다 바꿨다.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 농성 사건과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면서 시작된 부마항쟁 역시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고 이에 따라 유신 체제가 경제 파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겠다고 한 것도 부마항쟁 현장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회고록에는 김재규가 경제 문제에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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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은 군사 작전을 하듯이 밀어붙여 수출을 늘렸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쥐어짠 병영 같은 공장이 있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들. YH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유신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 ⓒ연합뉴스

유신체제에서는 특히 재벌 중심의 팽창 정책이 주조를 이뤘는데, 유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성장 경제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일어난 이유도 과도한 성장 위주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박정희가 1979년 1차 조정을 했지만 이어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이 두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조정을 했어야 할 정도였다. 1979, 80년에는 중화학 공장 가동률이 40~60%에 머물고 있었다.

박정희의 고도성장정책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피부로 느끼게 했고 너무나도 지독한 투기 광풍에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1978년 한 해에 지가가 48%가 올랐다. 부마항쟁 때 낮에는 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지만 밤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샐러리맨도 있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 당하고 사는 사람들, 소외된 자,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등 20대 안팎이 시위 대열에 대거 합류했고, 세금 폭탄으로 불만이 컸던 상인들도 가세했다. 김재규는 이를 민란으로 규정했다.

물론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해에 중동 노동자 송금액이 11억 달러를 넘어서 기록적이었고, 현대의 총 매출액이 36억 달러로, 미국 종합경제지인 <포춘>이 집계하는 기업 총 매출액 순위에서 세계 98위에 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8년에는 노풍(통일벼 계열 신품종)벼 피해도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작물 시험장 책임자인 박노풍의 이름을 따서 노풍으로 불린 새 볍씨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볍씨가 나왔으면 실험 단계를 충분히 거쳐야 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빨리,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박정희 정권은 12·12선거 나흘전인 12월 8일 이듬해부터는 노풍을 재배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돌아선 농민들의 마음을 붙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농민들은 박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1978년 후반기부터 나빠진 경제는 1979년에 한층 악화되었고, 1980년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5.6%(전두환 회고록 등), -5.2% 등으로 나온다. 남한이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잘못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박정희가 얼마나 경제를 잘못 운영하고 있었는지가 막 드러나고 있었던 시점이었는데 김재규가 조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박정희 유신 체제가 경제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게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미 동맹과 촛불 민심

프레시안 : <현대사 이야기>에는 유신 선포 하루 전 미국 대사관에 관련 사실을 통보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인식은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1960년 4월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미국이 강경 진압을 막았다는(그리하여 민주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한미 동맹을 절대시하는 측과 자율성을 늘려야 한다는 측이 대립하고 있다. 촛불 민심을 받들어 자주적 외교를 하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북핵 위협이 커지면서 남한 정부의 운신 공간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내 민주화가 대외 관계의 민주화로 나아갈 길은 없을까

서중석 : 미국은 자신의 국익 범위 내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한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4월 혁명 때만 해도 미국은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용인하고 이승만-이기붕을 인정하는 가운데 한국 문제를 바라봤다. 그런데 4.19 시위를 보면서 달라졌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문제를 풀어가기가 어렵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한말에도 있었고, 그러면서 중립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중요성은 해방후 미·소 점령 아래서, 특히 좌우 합작 세력에 의해 강조됐다. 친미파로 미 군정 입법의원 의장이었던 김규식은 ‘친미 반소’나 ‘반미 친소’는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건 자주적 입장을 망각하고 미·소 양국의 조선에 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미 군정에서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도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중심을 바로잡고 ‘중앙당’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길만이 통일 독립을 보장하고 국익을 최대화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친미파임에도 왜 이런 주장을 했는지, 이들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울리고 있는 때가 지금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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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해 새로운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을 전후로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와해되는 가운데.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가 여기서 벗어나려면 전략적 사고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여운형 등이 활동할 때만 해도 미·소 두 나라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은 4강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됐다. 21세기 들어오면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세계 4강으로 부상했는데, 이 4강은 모두 한국을 둘러싸고 있다.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4강시대를 맞게 되었다.

1990년 전후로 냉전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 경제 및 문화 관계가 강화되면서 굉장히 긴밀해졌다. 중국은 어차피 우리와 이웃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국가였는데, 이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로 부상했다.

한국 경제의 돌파구로서 남북 관계라든지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진출해 유라시아 시대를 여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한반도가 중·러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북핵 해결도 4강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전처럼 한쪽에 따라다니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고, 우경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쟁국 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중국과 협력해 대응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일본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일본을 중·러에 대한 대항마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이런 차원에서 한·일 군사관계도 권고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는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찾아온 4강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4강에 대해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김규식이나 여운형, 안재홍 등이 친미친소를 중요시했던 것은 두 나라로부터 강력한 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친미친소만이 두 나라로부터 주체성 자주성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한반도를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 점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때를 전후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중국은 1992년 한국과 수교 이후 북한과 관계가 아주 심하게 틀어졌는데 이 때 북한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고 김정일이 8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최상의 환영을 받고 장쩌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해 7월 김정일은 평양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과 포옹을 하고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가능성을 속삭였다는 점이다. 미국 못지 않게 북에 적대적이었던 일본은 그해에 갑자기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를 크게 늘리고 2002년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 방문을 진행했다.

이 나라들이 김정일이 좋아서 그랬을까? 남북 협력시대가 열릴 때 북한에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이 동아시아 또는 세계 정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북아 정세는 또다시 경색됐다.

2000년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안목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대처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아무런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작스럽게 배치를 결정했다. 더군다나 탄핵을 받은 상황에서 이른바 사드 ‘알박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 문재인 정부가 전쟁 반대를 명확히 선언하고 그에 따르는 노력을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비판도 받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4강 시대에 얼마나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는 데 관건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해 명료한 인식과 확고한 실천이 요구된다. (끝)

<2017-10-26>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시민들의 의견

幼稚園生英語敎育

 

幼子能英語(유자능영어)

終如美國人(종여미국인)

鏡前嘆眼鼻(경전탄안비)

父母淚盈巾(부모루영건)

 

유치원생 英語 교육

 

나이 어린 자식이 英語에 능해

마침내 저 미국 사람과 같은데

거울 앞에서 눈과 코 탄식하니

부모 흘린 눈물 수건 가득하네.

 

<時調로 改譯>

 

어린 자식 英語 능해 미국인과 같은데

거울을 마주 대하여 눈과 코 탄식하니

오호라! 부모의 눈물 수건에 가득하네.

 

*幼稚園生: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 *幼子: 어린 자식. 어린 아들 *眼鼻: 눈과 코.

 

<2018.10.5, 이우식 지음>

금, 2018/10/0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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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民見李明博氏第一審宣告

 

平生亨運盡(평생형운진)

猝地作囚人(졸지작수인)

面壁逢仙境(면벽봉선경)

如夢十五春(여몽십오춘)

 

못난 백성이 이명박 氏의 第一審 선고를 보며

 

평생 순조롭던 運도 다했으니

졸지에 囚人이 되고 말았도다

壁과 마주하면 仙境 만나리니

十五年 세월 꿈과도 같으리다.

 

<時調로 改譯>

 

평생 亨運 다하니 졸지에 囚人 됐도다

壁을 마주 대하면 神仙 경지 만나리니

十五年 긴긴 그 세월 꿈과도 같으리다.

 

*愚民: 우맹(愚氓).  어리석은  백성  *第一審: 소송에서  제일 次로  받는 심리(審理)

*亨運:  순조로운 運數  *猝地: 갑작스러운  판국  *囚人: 감옥에  갇힌  사람.  옥수

(獄囚) *面壁: 壁을 마주 대하고 좌선함. 또는 그런 일 *仙境: 神仙이 산다는 곳.

선계(仙界). 선향(仙鄕).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018.10.6, 이우식 지음>

토, 2018/10/0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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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박선규 입니다

제안사항이 있어서 글남깁니다.

생활속에서 애국자와 매국노를 기억하기 위해서

2019년 역사 달력을 제작할것을 제안 드립니다.

1.애국자 탄생일

2.행적

3.애국자 순국일

4.매국노 뒤진날

5.매국노 매국질 행적

매일 달력에 간단하게 기재하여 주시면 생활속에서 우리 역사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역사달력은 판매하여 제작비에 충당하시면 될것입니다.

항상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전달하여기 위해서 노력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토, 2018/10/0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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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의 부인 한도신 여사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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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예진·한도신 부부 가족사진
(서울=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1938년 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의 평양신학교 졸업 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장남 동명, 김예진 선생, 장녀 선명, 차녀 재명. 앞줄 왼쪽부터 3녀 광명, 4녀 순명, 한도신 여사, 차남 동수. 2016.8.14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email protected]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여성이라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이기에 앞서 애국지사의 아내로 불렸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을 도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부인 한도신 여사가 99년 만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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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도신 여사의 훈장 전수 받는 김순명 씨 [부산 보훈청 제공]

한도신 여사의 작은 딸 김순명(85)씨는 어머니를 대신해 지난 5일 부산 해운대구 자택에서 보훈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김 씨는 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공적이 재조명 돼 애국지사의 아내가 아닌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다행이다”며 “국가와 남편,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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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에게 추서된 훈장 바라보는 작은딸 [손형주 기자]

김 씨는 어머니 한 여사에게 추서된 훈장을 한참 동안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1895년 평남 고평에서 태어난 한도신 여사는 스무 살에 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과 결혼했다.

한 여사는 1919년 2월 남편의 3·1 운동 거사를 돕기 위해 재봉틀로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이후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20년에는 김예진 선생이 참여한 평남도청 폭탄 투척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직접 운반하는 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상하이에서 조선 유학생들을 돌보며 기독교 여자절제회를 이끌었다.

1986년 92세에 세상을 떠난 한 여사는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며 겪은 고초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1천200매 분량의 육필 원고는 이후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라는 회상기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처럼 한여사는 남편을 도와 항일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지만, 그동안 국가로부터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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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한도신 여사를 가리키는 김순명 씨 가운데 여자아이가 김순명 씨이다. [손형주 기자]

남성 독립운동가를 뒤에서 도왔던 여성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다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이 남성 위주로 진행된 때문이다.

하지만 내년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앞두고 정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작된 이후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훈장을 대신 받은 딸 김씨는 “일제강점기 때 옥살이를 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고무공장에 다니며 넓적해진 손으로 6남매를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김 씨는 “투철한 애국심과 이웃사랑을 실천한 어머니를 잊지 않고 지금이라도 공적을 인정해 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해준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여성 독립운동가 재평가 작업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202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추가 발굴해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1949년 이후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5천여 명 가운데 여성 비율은 여전히 2∼3%에 불과한 실정이다.

[email protected]

<2018-10-08> 연합뉴스

☞기사원문: “애국지사 아내를 넘어”…99년 만에 훈장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월, 2018/10/0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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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5·18기록관서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나치 부역자들을 단죄한 프랑스의 사례와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광주에서 열린다. 8일 5·18기록관에 따르면, 2014년 프랑스 파리 국립기록보존소(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처음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전시회가 5·18기록관의 초청으로 오는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2018.10.08. (사진 = 5·18기록관 제공)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나치 부역자들을 단죄한 프랑스의 사례와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광주에서 열린다.

2014년 프랑스 파리 국립기록보존소(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처음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전시회가 5·18기록관의 초청으로 오는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8일 5·18기록관에 따르면, 이 전시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가 소장한 각종 자료를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의 반역 행위와 반인도적 범죄, 나치의 지배정책 등을 고발하는 초청전이다.

광주 전시는 ‘파리-5·18 광주, 끝나지 않은 과거청산’이란 서브타이틀을 달고 ‘다시 시작하는 광주의 과거청산’ 패널 등을 특별 제작, 5·18 진상 규명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선 2016년 서울 전시에 이어 두 번째로,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가 광주 전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5·18기록관과 함께 이 전시를 주관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국립기록보존소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역사자산인 5·18을 갖고 있는 광주에서도 프랑스처럼 과거청산 작업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데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광주 전시를 강하게 주문했다”고 밝혔다.

전시 구성은 5·18을 비롯해 ▲콜라보라시옹의 주역들 ▲공공의 적 ▲경찰조직의 콜라보라시옹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나치 부역 ▲경제계의 나치 부역과 강제동원 ▲가자, 전선으로! 독일군과 함께 등 8개 섹션으로 이뤄져 있다.

프랑스는 국권 수복 이후 과거사를 청산하며 12만명 이상을 법정에 세워 1500여명을 처형하고 3만8000명을 수감하는 등 나치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대거 단죄했다.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나치 부역자들을 단죄한 프랑스의 사례와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광주에서 열린다. 8일 5·18기록관에 따르면, 2014년 프랑스 파리 국립기록보존소(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처음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전시회가 5·18기록관의 초청으로 오는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2018.10.08. (사진 = 5·18기록관 제공) [email protected]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는 9000여 명이 약식 처형됐다. 프랑스는 7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치 부역자들을 추적하며 처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35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도 단 한명의 친일파도 처단하지 않았다. 5·18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 또한 미흡하다.

5·18 기간에 발생한 피해자는 모두 5517명(광주시 1~6차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집계)에 이른다.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는 155명이며 부상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 구금 부상자 1145명, 연행 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도 처형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대법원 선고형량대로 옥살이를 한 사람도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해 16명이 일부 죗값을 치렀을 뿐이다. 사실상 ‘5·18 총지휘자’인 전두환은 회고록에 거짓기록까지 남겨놓고 있다.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정부기관이 주체가 돼 국가의 치부를 가감없이 드러낸 이 전시는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5·18 진상조사 작업도 프랑스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깊이 새기면서 진행돼야 하며, 우리의 역사 인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11일 오전 10시30분께 5·18기록관에서 열리는 개막식에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 르네 니콜라 우즐로 부소장과 함세웅 이사장 등 다수의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email protected]

<2018-10-08> 뉴시스

☞기사원문: 과거사 청산, 프랑스와 5·18은 어떻게 다른가?…나치 부역자들 초청전

월, 2018/10/0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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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시대에 알고싶은 내용이 있을땐 구글, 네이버, 다음 같은 곳에서 검색을 하게 됩니다

안익태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있는 내용을 알아보려고 민족문제연구소에 접속하여 검색에서 안익태를 입력하고 검색했더니 친일인명사전앱에서 처럼 검색이 되지 않아서 실망됩니다

위키백과처럼 검색어를 입력하면 곧장 해당내용이 출력되게 하여야 합니다

일반인이 사전을 활용하듯이 친일인명사전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친일인명사전앱을 구입한 저도 몇번 설치하기는 했지만 스마트폰이 느려지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 않는 앱은 지우게 됩니다

친일인명사전을 전문가(?)를 위해서 만든것이 아니라면, 앱을 설치하지 않아도 위키백과처럼 쉽게 접근해서 쉽게 친일파를 확인 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인은 친일인명사전앱이 필요해서 구입하지는 않습니다(조금의 힘을 보텐다는 마음으로 구입할 뿐)

 

 

월, 2018/10/08-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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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字日(국자일)

 

如無吾國字(여무오국자)

萬姓半文盲(만성반문맹)

勿忘君恩德(물망군은덕)

終成世界驚(종성세계경)

 

한글날에

 

만약에 우리나라 글자가 없다면

많은 백성 반쯤은 까막눈이리니

세종 대왕님 그 은덕, 잊지 마세

마침내 세계도 놀라게 되었다네.

 

<時調로 改譯>

 

만약에 한글 없다면 반쯤 文盲이리니

세종 대왕 그 은덕, 잊어 버리지 마세

마침내 모든 나라도 놀라게 되었다네.

 

*國字: 나라 글자. 한글 *如: 여기에선 ‘만약’이란 뜻 *萬姓: 만민(萬民). 모든 백성.

또는 모든 사람 *文盲: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름. 또는 그런 사람

*恩德: 은혜와 덕. 또는 은혜로운 덕. 삼덕(三德)의 하나 *終成: 마침내 이루어짐.

 

<2018.10.9, 이우식 지음>

화, 2018/10/0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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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전시해설]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 초청전 “콜라보라시옹” 광주에서 열려
-2018 파리-광주의 과거청산-

개막식 : 2018.10.11.(목) 10:30~11:30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


1.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가 2014년 해방 70년을 맞아 기획한 <라 콜라보라시옹,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특별전이 민주항쟁의 도시 광주에서 열린다.

2. 이 전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것으로 프랑스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역자와 전쟁범죄자를 추적하여 단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번 초청전은 과거사에서 교훈을 찾는 프랑스의 철저하고도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줄 것이다.

3. 특히 이번 초청전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완벽한 진상규명을 위해 다시 힘을 모으고 있는 광주에서 열리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이 전시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시효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줄 것이다.

4. 10월 11일(목) 오전 10시 30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리는 개막식에는 프랑스 내셔널아카이브 르네 니콜라 우즐로 부관장과 이병훈 광주부시장,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나의갑 관장,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등 다수의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La Collaboration Vichy Paris Berlin 1940∼1945

2018.10.11.(목) ~ 2018.12.15.(토)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 

개막식 : 2018.10.11.(목) 10:30~11:30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
주관·주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ARCHIVES NATION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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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점령 하에서 프랑스가 해방된 지 70년을 맞아 2014년 11월 26일부터 다음 해 4월 5일까지 파리 내셔널아카이브에서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특별전이 광주에 소개된다. 이 전시는 프랑스 내셔널아카이브가 소장한 각종 자료를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의 반역행위와 반인도적 범죄 그리고 나치의 지배정책을 다루고 있다.

전시 제목인 ‘콜라보라시옹’은 본래 예술가들 간의 협업을 의미하며, 한국에서는 연예인들의 공동 작업을 가리키는 ‘콜라보’로 사용되면서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선 독일에 항복한 비시 정부의 페탱 원수가 독·불 사이의 국가 간 협력이란 뜻으로 사용한 이래, 독일 점령기의 부역행위를 일컫는 치욕적인 의미로 고착화하였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그간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완벽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나치에 대한 협력 혐의로 35만 여명을 조사하였으며 12만 명 이상을 법정에 세웠고, 이 중에서 약 1,500여 명을 처형하고 3만 8천여 명을 수감했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9천여 명은 약식 처형되었다. 35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겪고도 단 한명의 친일파도 처단하지 못한 우리와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숙정과정을 거쳤지만, 그럼에도 프랑스 내부에서는 1950년대 초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사면 이후 과거사 청산의 미흡함에 대한 비판이 단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면 비시 정부의 경찰청장 르네 부스케는 레지스탕스를 탄압하고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적극 협력했던 죄상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을 살고 난 뒤, 재계의 유력인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프랑스 경찰이 4천여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유대인 13,152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넘긴 이른바 ‘벨디브’체포작전은, 1992년에야 재조명됐고 3년 뒤 결국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책임을 인정하고 공개사과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국방부가 주최하고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관람하여 주목을 받은 〈라 콜라보라시옹,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특별전은 미완의 과거사청산을 반성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의 일환이다. 이 전시는 그 자체로 오욕의 역사에 대한 고백적 성찰이며 프랑스의 과거사청산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동시에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콜라보라시옹’이 결코 과거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인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정부기관이 주체가 되어 국가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대통령이 직접 관람하여 여론을 환기시키는 등, 역사를 직시하려는 프랑스의 자세는 적폐청산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인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와 한국의 과거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이 전시에서 주목해서 되새겨야 할 지점인 것이다.

특히 이번 초청전이 5.18민주화운동의 전 과정에 대한 완벽한 진상규명을 위해 다시 힘을 모으고 있는 광주에서 열리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이 전시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시효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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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탱의 초상화 옆에서 전시 설명을 듣고 있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 Présidence de la République

수, 2018/10/1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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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美國大統領云云南北關聯事

 

吾邦如屬國(오방여속국)

豈不服其言(기불복기언)

下命恒驚歎(하명항경탄)

衆民未忘恩(중민미망은)

 

미국 대통령이 南北 관련 일에 대해 운운함을 듣고

 

이 나라 대한민국 屬國과도 같은데

어찌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리까

명령만 내리시면 늘 놀라 감탄하며

많은 백성 아직도 은혜 不忘입니다.

 

<時調로 改譯>

 

屬國과도 같은데 어찌 복종 않으리까

명령만 내리시면 늘 놀라고 감탄하며

아직도 많은 백성이 은혜 不忘입니다.

 

*屬國:  從屬國.  법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정치나  경제ㆍ군사  면에서

다른  나라에  지배되고  있는  나라  *不服: 남의 명령이나 결정 따위에 대해 복종,

항복, 복죄(服罪) 따위를 하지 않음 *下命: 명령을 내림. 명령을 높여 이르는

*驚歎: 몹시  놀라며  감탄함  *衆民: 많은  백성 *未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

 

<2018.10.11, 이우식 지음>

목, 2018/10/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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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10/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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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문연 회원의 권리는 어디로 사라졌나?》

●민문연 회원은 단 10명?

 

우리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대강 1만3천여 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원은 단 10명이라고 말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고 다녀. 정신 나갔나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신 나간자의 말이 아니고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등록된 서울시교육청에 제출한 민문연의 총회회의록에서 놀랍게도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정기총회회의록.

회의일시: 2018년 3월 8일

회의장소: 민족문제연구소 3층

회원총수: 10명(함, 윤, 임. 조. 신. 김, 박, 박, 방, 이)

임원총수 : 5명 (함, 윤,………)

출석회원 : 9명( 함 . 윤. 임……….)

정관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밝힌 후 개회를 선언하고….라고 기록.

 

●민족문제연구소 임시총회회의록

회의일시: 2018년 4월 24일

회원총수: 10명(함, 윤, 임…..)

임원총수: 5명(함, 윤. 임 ….. )

출석회원: 10명

논의사항 : 감사선임.(최ㅇㅇ 감사)

법정수에 달해 본 임시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

 

회원 총수가 10명이고 적법하다고 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 들은 말이겠지 정신 나간 소리이길 바랐던 두려움이 정확한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민문연의 1만3천명의 회원은 어디로 가고 단지 10명만 회원이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늘 회원이라고 말해오던 1만 3천여 회원, 우리는 무엇입니까?

회원이 아니라면 비회원? 후원회원? 유령? 그런데 유령들이 회비를 내다니 돈 나오는 “자동출금기’ 란 말 인가요? ㅇ이사님의 말씀은 나머지회회원은 모두 후원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비회원이나 후원회원도 다 의무와 권리를 가지지 않습니다. 후원회원이란 권리와 의무는 가지지 않고 다만 그 뜻에 찬동하여 후원금을 내는 회원을 말합니다. 권리가 없으니 총회에 참석해 주장이나 의견을 말할 수도 없고 어떤 요구나 이의도 제기할 수 없으며 선거권, 피선거권도 없으니 지부장, 운영위원장을 선거도 못하고,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회비를 내고 싶으면 내고 꼭 내야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관에는 후원회원이란 말이 없습니다.

 

1만3천여명이 비회원, 후원회원이라면 회비를 꼭 내야하는 의무가 없어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만일 1만3천비회원(후원회원)이 회비를 안낸다면 민문연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30여명의 상근자 급여를 어떻게 지불할 것이며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비용, 운영비는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가진 당당한 회원 10명이 다달이 1억여원을 내게해서 상근자 급여를 주고 경비를 쓰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빌딩 매입 시 빚진 22억도 회원이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으니(3.24.총회서 임소장) 그 회원10명이 갚아주시겠습까?

 

회원 10명이 불가능하다구요?

당연히 벅차서 불가능 하겠죠?

 

그걸 몰라서 회원 10명으로 축소요술을 부렸나요? 지금까지 민문연을 든든히 지켜온 주인을 밀쳐내고서 권리는 그 10명 회원이 독점하고 “돈내는 의무는 1만3천 비회원?(후원회원?)이 져라“ 이런 염치없는 말을 할려구요?

아니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왔네요

회원총수가 해가 다르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1997년엔 106명.

1999년도에는 100명이었다가

2003년 3월15일 총회 회의록에는 10명

2003년11월 임시총회:20명.

2018년 3월 8일 10명 정기총회

회원총수가 이렇게 정신없게 늘어났다 줄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정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믿었던 민문연이 이러하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민문연을 지탱시키는 근본 뿌리

만문연이 운영되는 근본 힘은 무엇입니까? 돈 아닌가요? 회원들이 내는 회비가 민문연을 지탱시켜 왔습니다 든든하게 민문연을 떠받쳐 온 주인이요 근본 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 주인을 의무도 권리도 없는 비회원(후원회원)으로 강등시켰나요? 단 10명만 남겨두고.

민주주의 이 나라에서 가장 숭고한 뜻과 높은 가치를 자랑했던 민문연이 가장 비 민주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숨기고 기망해도 숭고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회비는 믿음이고 정성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매국을 청산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뜻이 숭고하고 정의로와 어느 단체보다도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창립 때부터, 10년 20년을 꾸준히 기쁜 마음으로 회비를 내어왔고 역사박물관 건립 기금도 내 형편으로는 벅찬 금액이라 월부로 나누어 내면서도 가슴 뿌듯하고 기뻣습니다.

돈은 많다고 많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곧 정성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힘 벅차게 돈을 냈을 지라도 마냥 즐거운 것은 그만큼 만문연이 자랑스러웠고 정의롭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보람과 긍지가 배반과 배신으로 돌아와 아무 권리도 없는 후원회원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십 수년의 열정이 회원권리 박탈로 돌아올 줄이야.

 

●회원의 권리

고작 회비 1〜2만원 내고 무슨 권리를 얘기 하느냐고? 회원의 권리 의무는 금액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평등합니다 마치 나라에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나 적게 내는 사람이나 평등하게 투표권이 하나이듯이.

 

우리가 성의껏 회비를 내는 것은 자랑스런 민문연이 잘 되기를 바라며 낸 것이지 권리만을 위해서 낸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도 몰래 회원의 권리가 전부 박탈당하고 후원회원이나 비회원으로 강등시키 버렸다면 어느 회원이 분노하지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입회할 때 분명히 회원입회서(가입서) 썼습니다. 이사장님 귀하께. 그동암 회비를 내었으니 이사회 인준을 받은 권리 의무를 함께 가지는 민문연의 당연한 회원이었음을 떳떳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적인 절차도. 공적인 동의도 받지않고 비밀리에 회원의 자격을 박탈한 일이 정당한 일인가? 오랫동안 회원들을 속인 일이 정의로운 일인가요

회원의 권리는 단순 개인의 권리보다 전체의 권리가 참으로 중요힌 것입니다. 그것은 민문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기 때문입니다.

민문연이 부정 부폐하지 않도록 감시 제어하는 동력인 것입니다. ‘제어 받지 않는 권력은 부폐하기 쉽다’ 는 말을 상기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문연을 지탱시켜온 근본이요 주인이며 정당하도록 지킬 수 있는 최후 보루를 깡그리 없애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심히 두렵습니다. 회원이 이 사실을 일고 분노해 회비을 안내게 된다면 민문연이 지탱 될 수 있을까요? 이처럼 무서운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예상 못할 만큼 아둔한 것인가요 아니면 바보같은 회원들이니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민문연의 회원이 권리가 하나도 없는 후원회원이면 민문연음 주인 10명의 것이라 우리는 법적으로는 아무말도 못하는 외인이고 55억 빌당도 10명 이사님들이 주인이라 빌딩을 사고 팔아도 법적으로 권리 전무함으로 아무말도 못하는 유령에 불과합니다. 정부가 국민을 우민화 시켜 아무말도 못하게 해놓고 마음대로 끌고가는 경우와 똑같은 꼴이 되었습니다.

 

●맑고 투명해야 할 단체.

정의로운 단체라면 그 경영도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 주인인 회원의 동의도 없이 정당한 민주적 절차도 거치지 아니하고 몰래 자격을 박탈하는 기망행위가 정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회원을 헌 신짝처럼 취급하는데도 계속 믿음을 가지고 좋아라 할수 있을까요?

 

●이중정관/ 한 달에 두 번의 정기총회

 

지난 2018년 3월24일 정기총회는 미리 모든 회원에게 공고 되었고 숙대강당에서 전국에서 2백여명이 참석해 총회를 했다

당연히 공고도 했고 전국 각지서 200여명이 참석한 24일의 총회가, 적법하고 정당한 총회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지도관청에 총회회의록을 제출한 것은 3원 24일의 총회회의록이 아니고 3웡8일 9명이 모여한 회의록을 제출했다. 이건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고 분명한 허위 사실을 보고한 허위보고요 확실항 범법행위다.

3월 8일 9명이 모여 명색이 정기총회라고 회의록까지 보고까지 해 놓고 16일 후에 또 정기총회를 연다고 공고를 하고 정기총회를 여는 것을 무슨 짓인가?. 한 달에 두 번의 정기총회라

 

이건 가짜 총회?! 회원을 속이는 면피성 가짜총회란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총회에 참석하려고 지방에서도 기차로, 버스로 헐레벌떡 참석한 회원들을 이렇게 속여도 되는 것인가?

운영용 정관과 신고용 정관 두개의 정관을 두고 이리왔다 저리 갔다 이중 플레이를 하며 회원을 속여 온 것도 적법하고 정의로운 일입니까?

한나라에 두 개의 헌법이 있을 수 없듯이 정관도 하나여야 정상아닌가요 두 정관 어느것도 비정상입니다. 법적으로 신고도 하지않고 승인도 받지않은 운영정관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정관도 아니요 법젇으로 신고 했다는 신고용 정관도 총회의 인준도 받지 않은 것이 어떻게 정당한 정관인가요 불법이요 비정상적인 두개의 정관으로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을 어떻게 정의롭고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회원의 분노

정성스레 회비내고 모든 행사에 충실히 참석하던 회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믿었던 그 문민연이 감쪽같이 우리의 권리를 박탈해 버리고 기망해도 계속 믿고 사랑하리라 생각하는가? 열성껏 회비내고

권리와 의무를 지는 당연한 민문연의 회원이라 생각했던 회원들은 권리는 하나도 없이 돈만 내라는 후원회원으로 밀어낸 처사에 말 할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후원회원이라면 아무 권리도 없는데 지부장은 무었이고 운영위원도 유령 일뿐이다 권리도 없는 휴원회원을 제명처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참으로 코메디 같은 모양이다.

이 모든 것이 옳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대체 누가 왜 이렇게 했을까

혹 다른 단체도 그렇게들 하니까 따라했다고 하거나 쉽고 돈이 적게 들어서 그랬다고 말할 것인가?

비록 다른 모임에 그런 경우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따라 해선 안된다 왜냐면 민문연은 어느 단체보다도 정의로운 단체니까. 편리하게 쉽게 하려고 불법을 따라 해서도 절대로 안 된다 국법을 어긴 매국을 바로 잡으려는 민문연이 법을 어겨서야 되겠는가 이건 단순한 기망 사건이 아니라 확실한 범법행위다 지금 민문연의 이런 상황을 임종국선생님께서 보신다면 잘 했다고 하실까 통탄해하시며 얼마나 괴로워 하실지 가슴이 아프다

이제 우리는 속임, 비논리, 비정상, 비민주로 범벅이 된 민문연.

누가 왜 이렇게 했는지 밝혀 규명하고 불법 기망을 걷어내고 맑고 정명한 민문연이 되도록 반드시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착실히 회비내고 정성으로 도왔던 바보스런 회원일지라도 이제는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2018년 10월 12일자

이기자(서울동부지부)

통일염원시민회의 대표

 

 

 

 

금, 2018/10/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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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일본군 군복을 입고 일본도를 쥐고 있는 박정희 사진을 “박원순이 만든 빨갱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작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으로 선동질을 하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던 보수단체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자경 씨가 법정 구속됐다.

10월 12일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이성호)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징역 4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하고 방 씨를 법정 구속했다.

문제가 된 사진은 일본의 누리꾼이 조작한 것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설립한 단체가 아닐뿐더러 “사진이 합성된 가짜”라고 감정한 친일문제 전문연구기관이다.

▲ 박정희 사진조작설을 유포하고 있는 방ㅇ경씨의 트윗

민족문제연구소는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 4월 12일 대법원의 원심 확정으로 500만원의 손해배상을 받아낸데 이어 형사소송 1심에서 방 씨의 유죄를 인정받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음해에 단호히 대응하여 징벌한다는 무관용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2016년 서울북부지검이 불기소처분을 내리고 2017년 서울고검이 항고를 기각했는데 서울고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어렵사리 재판이 진행됐다.”고 밝히고, “앞으로도 건전한 비판과 학술적 토론은 언제든 수용하겠지만 무분별한 허위사실 유포에는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서석구 변호사가 민사소송에 이어 형사소송에서도 방 씨의 변호를 맡아 눈길을 끌고 있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단독] 일본 누리꾼이 조작한 ‘박정희 친일사진’ 법정까지 간 사연 (2017.1.13)

☞경향신문: [단독]검찰 불기소 처분한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사건···법원 “공소 제기하라” (2017.5.24)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소송, 2심 승소와 스프레이 테러 형사조정
(2018.1.25)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박정희합성사진 조작관련 명예훼손 재판에서 연구소 최종승소 (2018.4.20)

금, 2018/10/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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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단체 관계자들이 11일 광주시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한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단죄를 조명하는 ‘콜라보라시옹’ 전시회를 살펴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는 12월15일까지 이어진다. /최현배 기자 [email protected]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드골 정권은 1950~1953년 나치 협력 혐의로 모두 35만여명을 조사했고, 12만명 이상을 법정에 세웠다. 이 가운데 1500여명이 처형됐으며 3만8000여명이 수감됐다. 1945년에는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도 9000여명에 달했다.

당시 페탱 총리도 나치 부역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기도 했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광주에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11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과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콜라보라시옹(La Collaboration·협력)-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특별전 개막식이 5·18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

전시명 ‘콜라보라시옹’은 1940년 10월 30일 당시 프랑스 필리프 페탱 총리가 독일 히틀러 총통과 정상회담 후 라디오 연설에서 “오늘 나는 협력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 선언에서 따왔다.

오는 12월 15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Archives Nationales)가 지난 2014년 나치로부터 해방된지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것이다. 특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에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에 대한 첫 전시가 열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는 게 5·18민주화운동기록관측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린 것은 지난 2016년 서울 전시회가 유일하다.

이번 광주 개막 배경에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측이 5ㆍ18에 대한 과거사 청산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광주를 특별히 선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시장은 5ㆍ18 소개를 비롯한 ‘콜라보라시옹의 주역들’, ‘공공의 적’, ‘경찰조직의 콜라보라시옹’,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나치 부역’, ‘경제계의 나치 부역과 강제동원’, ‘가자, 전선으로! 독일군과 함께’ 등 크게 8개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5·18은 물론 친일 잔재 청산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과 달리 나치 부역자를 엄혹하게 단죄한 프랑스의 역사관을 살펴볼 수 있다.

1964년 프랑스는 전쟁 중 민간인에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없애 지난 1994년 유대인 처형에 관여한 폴 투비에는 종신형을, 지난 1998년에는 모피스 파퐁은 10년 금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니콜라스 우즐로 부소장은 “지난 2014년 프랑스 정부는 해방 70주년을 맞아 기록보존소에 보관 중인 나치부역자들의 자료를 공개하며 많은 사회적 갈등을 낳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누구에게 책임 있고 누가 결정을 했는 지 등 역사적 진실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공개를 결정했고, 실제 전시가 열렸을 땐 반발이 없었다”고 밝혔다.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나치부역자 청산 과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전두환을 광주와 민족사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게 우리의 의무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8-10-12> 광주일보

☞기사원문: 5·18 광주, 프랑스 과거사 청산에서 배운다

※관련기사

뉴스1: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 한다”

전남일보: “국가가 모든 기록 공개하는 게 5·18진상규명 지름길”

금, 2018/10/1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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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寒露寄友人

 

霜降丹楓落(상강단풍락)

還鄕與我吟(환향여아음)

爲君新釀酒(위군신양주)

共醉臥空林(공취와공림)

 

寒露를 지나 벗님에게 띄우는 글

 

서리 오고 우수수 단풍도 지면

고향에 돌아와 나와 詩를 읊세

그대 위해 새로 술도 빚었으니

함께 취해 空林에 누워도 보세.

 

<時調로 改譯>

 

霜降에 단풍도 지면 還鄕하여 詩를 읊세

그대 벗님을 위하여 새로 술도 빚었으니

둘이서 함께 취하여 空林에 누워도 보세.

 

*友人: 벗 *霜降: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10월

23일경이다  *還鄕: 고향(故鄕)으로  돌아옴  *釀酒: 술을 빚어서 담금. 온양(醞釀)

*空林: 나뭇잎이 떨어져 공허한 숲. 또는 인가(人家)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

 

<2018.10.12, 이우식 지음>

토, 2018/10/1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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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창설 8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10월 10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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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대 창설 8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인사말하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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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회의가 열린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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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회의가 열린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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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회의가 열린 식민지역사북물관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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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회의장을 찾은 독립운동가 후손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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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을 발제하는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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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을 발제하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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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그리고 밀양’을 발제하는 최필숙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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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자로 참석한 조형열 연세대 연구교수, 조철행 독립기념관 연구원,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오른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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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로 상임대표를 좌장으로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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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학술회의에는 약 70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화, 2018/10/16-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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