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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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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익명 (미확인) | 목, 2017/10/26- 13:22

[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③·끝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마지막 편으로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의 맹점을 짚어봤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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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유신’이라는 명칭은 메이지유신(1868년)에서 따온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황도파 군인 등 군국주의자들이 쿠데타 등으로 강력히 요구한 쇼와 유신이 그 원형이라고 지적하셨다. (2·26쿠데타는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조선 총독을 지내기도 한 사이토 마코토를 비롯해 주요 인사를 살해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토론과 협상에 의한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추구한 것이다.편집자)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열등생이었다가 만주 군관학교 이후 우등생이 됐다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박정희의 국가 운영 방식이 일본 사관학교의 군대식 교육과 만주국 국가 운영에 그 원형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일본 식민 시대의 국가 운영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을 중시했다는 것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회상을 통해 나온 말이다. 기시는 만주 침략의 핵심 인물이었고 연합국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지목됐는데도 두 번이나 일본 수상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그의 글에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가 5.16 쿠데타 직후에 쓴 글들, 특히 <우리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책에 메이지 유신 지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 문장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는 있는데도 이런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온다. 추측건대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은 박정희가 기시에게 외교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정희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는 1936년 젊은 군인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서 큰 감명과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쇼와 유신과 박정희 유신 체제가 닮은 점이 많다. 기성 민간 정치인에 대한 불신, 강력한 통치, 군대식의 능률적 사고 등이 그렇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박정희는 쇼와 유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재학중일 때, 일본 육사에 있었을 때, 또 만주군 군인이었을 때 군인 사회를 풍미했던 것이 쇼와 유신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정희가 이른바 국가개조 운동으로 재건 국민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데 그때 <조선일보>에는 재건 국민 운동은 일제 말기 군국주의 일본의 전시 동원 국민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재건 체조는 일제 말기의 라디오 체조를, 신생활복은 국민복을, 국민가요는 말 그대로 일제 말기의 국민가요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이 쓴 글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등 국민 개조 운동, 국민 교육 헌장이 쇼와 유신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교육 헌장은 메이지 교육칙어, 황국신민서사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조회, 국기 하강식 등 국가주의 맹세의 의례와 교련과 체육의 모의 수류탄 던지기 군사교육, 충효교육, 라디오 체조와 내 집 앞 쓸기 운동, 국민가요 부르기, 퇴폐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 고도 국방 체제를 목표로 한 총력 안보 체제, 국가 통제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일제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실행했던 국가주의를 본 떠 되살린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유신 체제는 일본 극우가 꿈꿨던 쇼와 유신의 한국형 변조라는 지적인데 대체로 적절한 평가라고 본다.

유신 체제는 쇼와 유신의 군국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쇼와 유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주 인맥이라고 평가되는데,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 중심 인물로 체포됐을 때 살아난 것도 국내 만주 인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과 경제적 관계를 포함해서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자들이 아베의 외조부 기시를 비롯한 만주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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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프레시안 : 그런데 대다수 국민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공로는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 개발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한국인 중 상당수가 1960~70년대의 경제발전을 박정희의 공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발 독재’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붙어있던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특히 유신체제가 경제 발전에 효율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이 점을 특별히 유의해 검토하고 있다.

<현대사 이야기> 8권 전체가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 발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9권에서 유신 쿠데타를 다룰 때도 이 문제를 포함했다. 앞으로 유신 붕괴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려고 하는데, 경제가 유신 붕괴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예정이다.

일부 진보 세력의 ‘개발 독재’ 주장은 심각한 허점을 안고 있다. 우선 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삼척동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히 다른 정치체제인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중화학 공업인데, 1970년대에 한국에 중화학 공업 시설들이 많이 세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유신체제 붕괴에서 경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대만도 1972년 10대 건설 계획을 세우며 1970년대 내내 중화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리의 경우 1972년 유신 체제 이전에 중화학 공업은 이미 포항제철이나 비료공장 등 중요한 시설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서 76년까지 진행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도 1971년에 구체적 계획이 다 세워졌다. 즉 이 개발 계획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1973년 1월에 선언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중화학 공업을 선언한다. 그는 앞으로 중화학 공업 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 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박정희 스스로도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신 체제 같은 강권 체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개발 독재론자나 중화학 공업 건설과 관련한 글 등에서 보면 1973년 정부의 각종 특혜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1974~75년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는 두 해 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화학 공업을 시작하려면 엄청난 자본이 투자돼야 하는데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그 정도의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국 경제에 기적이 출현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74년부터 ‘중동 건설 특수’가 나타났다. 석유 폭등으로 떼돈을 번 산유국들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이다. 이것은 다 알다시피 박정희와도, 유신체제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중동특수에 맞춰 한국은 1975년부터 몇 십억 달러씩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대를 포함해 몸집이 엄청나게 커진 업체들이 있었고, 1975년을 전후로 해서 부동산 투자와 투기가 벌어졌다.

여기서도 건설 업체들이 상당한 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즉 중화학 공업화의 발판은 유신 체제가 아니라 중동 건설 특수에 따른 막대한 외화 수입, 그리고 부동산 투자 투기에 따른 대기업의 막대한 이윤 창출이었다.

이런 요소들이 작용하면서 국가가 보증해주는 차관을 가지고 중화학공업에 투자해서 누가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느냐가 당시 재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재벌로 성장하는데 중화학 공업처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중화학 공업에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과다 중복 투자 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체제 붕괴에는 경제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78년 12.12 선거에서 여당이 심각한 패배를 당했는데 당시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경제통인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등을 포함해 경제 각료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경제 문제가 심각해져서 선거에 패배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처음에 말을 안 들었지만, 김정렴 회고록에 따르면 계속 이러한 요구가 나왔고 결국 김정렴은 9년여 만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남덕우 등 경제 각료를 다 바꿨다.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 농성 사건과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면서 시작된 부마항쟁 역시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고 이에 따라 유신 체제가 경제 파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겠다고 한 것도 부마항쟁 현장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회고록에는 김재규가 경제 문제에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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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은 군사 작전을 하듯이 밀어붙여 수출을 늘렸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쥐어짠 병영 같은 공장이 있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들. YH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유신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 ⓒ연합뉴스

유신체제에서는 특히 재벌 중심의 팽창 정책이 주조를 이뤘는데, 유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성장 경제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일어난 이유도 과도한 성장 위주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박정희가 1979년 1차 조정을 했지만 이어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이 두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조정을 했어야 할 정도였다. 1979, 80년에는 중화학 공장 가동률이 40~60%에 머물고 있었다.

박정희의 고도성장정책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피부로 느끼게 했고 너무나도 지독한 투기 광풍에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1978년 한 해에 지가가 48%가 올랐다. 부마항쟁 때 낮에는 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지만 밤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샐러리맨도 있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 당하고 사는 사람들, 소외된 자,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등 20대 안팎이 시위 대열에 대거 합류했고, 세금 폭탄으로 불만이 컸던 상인들도 가세했다. 김재규는 이를 민란으로 규정했다.

물론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해에 중동 노동자 송금액이 11억 달러를 넘어서 기록적이었고, 현대의 총 매출액이 36억 달러로, 미국 종합경제지인 <포춘>이 집계하는 기업 총 매출액 순위에서 세계 98위에 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8년에는 노풍(통일벼 계열 신품종)벼 피해도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작물 시험장 책임자인 박노풍의 이름을 따서 노풍으로 불린 새 볍씨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볍씨가 나왔으면 실험 단계를 충분히 거쳐야 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빨리,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박정희 정권은 12·12선거 나흘전인 12월 8일 이듬해부터는 노풍을 재배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돌아선 농민들의 마음을 붙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농민들은 박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1978년 후반기부터 나빠진 경제는 1979년에 한층 악화되었고, 1980년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5.6%(전두환 회고록 등), -5.2% 등으로 나온다. 남한이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잘못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박정희가 얼마나 경제를 잘못 운영하고 있었는지가 막 드러나고 있었던 시점이었는데 김재규가 조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박정희 유신 체제가 경제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게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미 동맹과 촛불 민심

프레시안 : <현대사 이야기>에는 유신 선포 하루 전 미국 대사관에 관련 사실을 통보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인식은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1960년 4월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미국이 강경 진압을 막았다는(그리하여 민주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한미 동맹을 절대시하는 측과 자율성을 늘려야 한다는 측이 대립하고 있다. 촛불 민심을 받들어 자주적 외교를 하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북핵 위협이 커지면서 남한 정부의 운신 공간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내 민주화가 대외 관계의 민주화로 나아갈 길은 없을까

서중석 : 미국은 자신의 국익 범위 내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한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4월 혁명 때만 해도 미국은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용인하고 이승만-이기붕을 인정하는 가운데 한국 문제를 바라봤다. 그런데 4.19 시위를 보면서 달라졌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문제를 풀어가기가 어렵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한말에도 있었고, 그러면서 중립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중요성은 해방후 미·소 점령 아래서, 특히 좌우 합작 세력에 의해 강조됐다. 친미파로 미 군정 입법의원 의장이었던 김규식은 ‘친미 반소’나 ‘반미 친소’는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건 자주적 입장을 망각하고 미·소 양국의 조선에 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미 군정에서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도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중심을 바로잡고 ‘중앙당’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길만이 통일 독립을 보장하고 국익을 최대화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친미파임에도 왜 이런 주장을 했는지, 이들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울리고 있는 때가 지금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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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해 새로운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을 전후로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와해되는 가운데.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가 여기서 벗어나려면 전략적 사고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여운형 등이 활동할 때만 해도 미·소 두 나라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은 4강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됐다. 21세기 들어오면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세계 4강으로 부상했는데, 이 4강은 모두 한국을 둘러싸고 있다.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4강시대를 맞게 되었다.

1990년 전후로 냉전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 경제 및 문화 관계가 강화되면서 굉장히 긴밀해졌다. 중국은 어차피 우리와 이웃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국가였는데, 이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로 부상했다.

한국 경제의 돌파구로서 남북 관계라든지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진출해 유라시아 시대를 여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한반도가 중·러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북핵 해결도 4강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전처럼 한쪽에 따라다니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고, 우경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쟁국 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중국과 협력해 대응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일본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일본을 중·러에 대한 대항마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이런 차원에서 한·일 군사관계도 권고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는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찾아온 4강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4강에 대해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김규식이나 여운형, 안재홍 등이 친미친소를 중요시했던 것은 두 나라로부터 강력한 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친미친소만이 두 나라로부터 주체성 자주성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한반도를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 점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때를 전후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중국은 1992년 한국과 수교 이후 북한과 관계가 아주 심하게 틀어졌는데 이 때 북한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고 김정일이 8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최상의 환영을 받고 장쩌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해 7월 김정일은 평양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과 포옹을 하고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가능성을 속삭였다는 점이다. 미국 못지 않게 북에 적대적이었던 일본은 그해에 갑자기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를 크게 늘리고 2002년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 방문을 진행했다.

이 나라들이 김정일이 좋아서 그랬을까? 남북 협력시대가 열릴 때 북한에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이 동아시아 또는 세계 정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북아 정세는 또다시 경색됐다.

2000년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안목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대처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아무런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작스럽게 배치를 결정했다. 더군다나 탄핵을 받은 상황에서 이른바 사드 ‘알박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 문재인 정부가 전쟁 반대를 명확히 선언하고 그에 따르는 노력을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비판도 받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4강 시대에 얼마나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는 데 관건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해 명료한 인식과 확고한 실천이 요구된다. (끝)

<2017-10-26>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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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錢庵住持逐客乃笑吟

 

執着奚如此(집착해여차)

無非暫借錢(무비잠차전)

紅樓恒不惜(홍루항불석)

向客放揮鞭(향객방휘편)

 

崇錢庵의 住持가 나그네를 내쫓기에 웃으며 읊다

 

집착하심이 어찌 이와도 같은고

잠시 동안 빌린 돈 아닌 게 없네

妓樓에서는 늘 아끼지 않으면서

나그네에겐 채찍을 막 휘두르네.

 

<時調로 改譯>

 

집착 어찌 이런고 빌린 돈 아닌 게 없네

아가씨 술집에서는 늘 아끼지 않으면서

가련한 나그네에겐 채찍을 막 휘두르네.

 

*逐客: 손님을  푸대접하여  쫓아냄  *如此: 이러함  *無非: 그러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두 *暫借: 잠시 동안 빌림 *借錢: 차금(借金). 돈을 꾸어 옴. 또는 그 돈

*紅樓: 기루(妓樓). 창루(娼樓). 娼妓를 두고 영업하는 집 *不惜: 아끼지 않음.

 

<2018.7.17, 이우식 지음>

화, 2018/07/17-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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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그 동안 비뚤어진 기득권층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신 훌륭한 단체입니다.  잘못된 식민사관을 바로잡고 역사를 통해 미래를 생각하는 바른 생각을 하는 분들이 모인 단체로 늘 응원하고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IDS홀딩스 김성훈의 채권자 파산신청을 검색하다가 대리인이 이 단체 고문으로 있는 정만순 변호사님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는 IDS홀딩스 김성훈의 유사수신. 사기 피해자입니다.

열심히 사는 소시민으로 우리 사회가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사회이길 바라며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IDS홀딩스 사기사건으로  가정경제는 뿌리채 흔들려 앞날도 희망도 계획할 수 없는 어두운 현실에 맞닥뜨렸습니다.  사기사건은 곧 경제살인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절실히 느낀것은 법은 피해자 편이 아니었습니다. 사기꾼은 오히려 여러 변호사들에게  둘러쌓여  보호받는데 정작 피해자는 어떤 법적 보호 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고문으로 계신 정만순 변호사님!

부디 사기꾼의 파산을 돕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12000명의 피해자가 있는데  십여명의 채권자가  파산을 신청하고 이에 사기꾼 김성훈은 파산시켜달라 판사에게 적극요청하고 있습니다.  사기꾼 공범들의 지휘와 선동으로  정보가 부족한 어르신들을 상대로  하루빨리  김성훈을  파산시켜달라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땅에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정의로운 일입니다.

정의로움이  있어야 가치있는 일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사회는 IDS홀딩스 뿐만 아니라  유사수신 사기피해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고통속에  있습니다. 더이상 사기꾼이 이 사례로 답습하지 않도록 바로잡는 것도 이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일입니다.

사기사건은 경제살인입니다.

부디 정의가 아직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 2017/12/0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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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조희팔”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의 한사람으로

하루하루 절망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변제해준다는 말만믿고 기다렸지만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지않고

단한푼의 변제도 받지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산을 하여 면책을 받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12,000명의 피해금에 대한 파산을

극히 일부인 29명의 파산신청인이 대표하여 진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29명이 만명을 대신할수는 없습니다

파산이 받아들여진다면

만명의 피해자들이 또한번의 절망적인 일을 겪는것입니다

더이상의 피해를 보지않도록 파산을 막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목, 2017/12/0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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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장학금 조례 폐지운동’ 착수


▲ 박근혜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회원들이 19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시청 앞에서 새마을회관 건립 추진 폐기를 촉구하면서 청사 앞 게양된 새마을기를 철거하고 있다. 2017.1.19/뉴스1

광주지역 시민단체가 광주시와 광주 지역 5개 자치구를 상대로 ‘새마을장학금 지원 조례 폐기’를 촉구하고 나선다.

또, 새마을회에 매년 관행적으로 수억원씩 지원되는 ‘혈세 특혜’도 철회할 것을 촉구 할 예정이다.

26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 등 9개 시민단체는 “새마을장학금은 매년 막대한 시민혈세를 단지 새마을지도자 자녀들이라는 이유로 특정 단체에 지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시와 5개 자치구, 전남도 22개 시·군은 매년 30억원 이상의 예산을 1986년 제정된 ‘광주시 새마을장학금 지급 조례’에 근거해 지역새마을회에 지급해 오고 있다.

새마을회 측은 이 중 70% 가량을 회원 자녀 장학금, 조직 운영비, 자체 행사비로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시민단체는 “광주시와 5개 자치구, 전남도 22개 시·군이 새마을회에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매년 장학금까지 지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새마을 특혜 장학금 시민회의’를 구성해 대표적인 특권 반칙 조례인 새마을장학금 조례 폐지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새마을 특혜 장학금 시민회의’는 오는 27일 오후 2시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지난 2014~2017년까지 4년간 지급된 새마을장학금 내역과 지급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nam@

<2018-02-26> 뉴스1

☞기사원문: 광주시민단체 “새마을장학금 지급 납득하기 어려워” 

화, 2018/02/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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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술을 전혀 안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니 1980년대 초 평생 마실 술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신군부 시절 불법으로 연행당해 며칠 동안 고초를 겪고 난 뒤 울화가 치밀어 매일 밤 독주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무법이 횡행하는 시절을 살아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복기, 김기춘, 우병우 등 시대를 막론하고 늘 ‘법꾸라지’들이 난무했기에 교수님은 ????화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라는책을펴내서법기술자들을질타했다.
또한 법 문구를 어렵게 만들고 난해하게 표현하여 특권층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며 <한글헌법 노트><한자숭배 나라망친다>는책을 펴내기도했다.법학자로서보기 드문 한글 사랑으로 한교수님은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일교포 단체 초청으로 일본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재일교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교수님은 원고 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잠시 강연하시더니 곧바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왔으므로 이제부터 한국말로 연설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신다. 실용에 앞서 자존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민족적 자존 나아가 인간의 존엄은 개성 출신으로서 6·25의 참화를 처절하게 겪어낸 한교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을 해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한교수님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교수님은 멀리 지방 출장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외출 때도 늘 작은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시집일 때가 많다. 한번은 나에게 “시인 중에 누굴 좋아하시나?”라고 물으시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시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모순과 싸운답시고 자칫 거칠고 메마를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이며 사회운동의 초심을 지키라는 조언이셨을 것이다.
지방 출장 중에 부득이 한방에서 묵어야 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평판에 올랐던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중용되어 지금까지도 몇몇은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인물평들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밖에 서울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로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법적, 역사적으로 박정희의 악행을 거론하며 흉상 철거는 정당하다고 저항권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던 한교수님은 피고인석에 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이제 연구소는 1991년 창립 이래 터 잡고 활동하던 동대문시대를 접고 용산시대를 연다. 동대문시대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했다면 용산시대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과 대중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동대문을 떠나며 가장 어려운 시절 연구소 2대 소장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던 한상범 교수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국가보안법? 허~ 참나. 머릿속의 생각을 벌주는 나라가 어딨어?”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18/01/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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