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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친일문학상 반대운동 2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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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친일문학상 반대운동 2년의 기록

익명 (미확인) | 월, 2017/10/23- 11:46

권위상 운영위 부위원장

 

2001년 8월 4일, 중앙일보에서는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미당문학상을 제정했다. 이에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에서는 친일문학의 부역자이며 친독재 행적이 뚜렷한 서정주 시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문인단체로서 회원들 모두가 미당문학상의 수상 및 심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발맞추어 경향 각지의 작가들은 미당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예총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문화예술, 사회, 노동, 시민단체에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작가들과 문단에서 터져 나온 비판의 목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다음해부터 대다수의 시인들, 평론가들이 미당문학상 심사에 참여하고 수상의 영광을 떠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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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4일 연구소가 주최한 대한문인협회의 육당 춘원 문학상 제정 규탄 기자회견. 플래카드 뒤 오른쪽 첫 번째가 필자

 

그로부터 미당 사후 15년이 지났다. 보수재벌언론과 결탁한 미당문학상의 권위와 명예는 날로 높아졌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이 한국 최고 문학상의 위치에 올랐다. 이에 영합하는 몰지각한 문인들의 행위를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떼로 몰려들어 찬사와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마침내 2015년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박근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건국절’을 제정하고 법제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국민에 의해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자는 건국절 제정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한일합의 등 반역사적, 반민족적 폭거를 일방적으로 자행했다. 바로 이 즈음에 한국작가회의 내에서도 친일문학상에 대한 비판이 다시 등장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을 규탄하는 글들이 한국작가회의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해 한국작가회의 총회장에서는 미당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반대하는 피켓 시위가 한 회원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작가들에게 친일문인문학상 반대 서명을 받기도 했다.

2016년 한국작가회의의 산하 대외활동기구인 자유실천위원회(위원장 맹문재, 안양대 교수)는 친일문인문학상 반대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을 논의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를 자유실천위원회의 내부 사업 안건으로 공식화했다. 작가들의 주체적인 활동을 모색하기로 하고, 아울러 작가와 시민단체가 반대운동을 함께 논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친일문제에 있어 가장 공신력 있는 단체인 우리 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 주관으로 토론회를 준비했다. 10월 29일, 혜화동 소재 함춘회관에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자문과 성찰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우리 임헌영 소장님(문학평론가)을 좌장으로 하고, 발제자로 박한용(교육홍보실장) 임동확(시인, 한신대) 이규배(시인, 성균관대) 이도흠(문학평론가, 한양대), 토론자로 김점용(시인, 문예바다 주간), 정세훈(시인, 리얼리스트 100 상임대표), 안재성(소설가,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장), 김란희(문학평론가, 고려대) 김응교(문학평론가, 숙명여대) 노혜경(시인) 등이 동참하였고 그 밖의 학자, 문인, 시민 등 100여 명이 회의장을 채웠다. 4시간에 걸친 토론회는 ‘친일문학’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문제를 한국문학계에 공개적으로 던졌다. 비판적 성격을 분명히 한 이 세미나는 문단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친일문학(상)’에 대한 반대운동을 다시금 점화시키고 문인들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2017년 1월에 열린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 대한 한국작가회 차원의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총회 자료집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회원들에게서도 ‘친일문학상‘에 관한 한국작가회의의 방침이 정해져야 한다는 요구가 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2017년 미당문학상 후보에 오른 명망 있는 시인들이 후보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송경동, 심보선, 이장욱 시인 등이 미당문학상 후보가 되기를 거절했다.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후보를 사양한 시인은 더 있었다고 한다. 문학과 역사 앞에 자연인으로서, 아니 일개 미물로서의 부끄러움조차 없었던 서정주의 권위가 미당문학상 제정 17년 만에 비로소 깨어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작가회의 본회의 공식 사업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일부 회원들은 친일문학상에 참여하는 회원들을 제명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마침내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에서는 3월 25일, 최원식 이사장과 안상학 사무총장의 주도하에 친일문학상 내부토론회를 열었다. 김진경(시인), 임성용(자실위 부위원장), 이영광(미당문학상 기수상자), 장성규(문학평론가)를 발제자로 하여 한국작가회의 이사, 전국 지회장, 분과별 위원장 및 자유실천위원회 위원들은 치열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찬반의 입장이 부딪치는 지점도 생겼고, 토론회 참석자들의 의견만으로 이를 극복하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아무튼 이날 열린 작가회의 내부토론회는 많은 문인들에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주요한 관심사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점차 친일문학상 문제에 대한 비판적 공감대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올 7월, 한국작가회의 이사회에서는 3월의 내부토론회에서 나온 결과를 놓고 이사진들 간에 장시간의 논전이 벌어졌다. 진통 끝에, 한국작가회의는 공식적인 조직입장으로서 친일문학상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5·18문학상 수상자가 미당문학상에 당선되었고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일자 결국 수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우리 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으로 친일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장대 같은 폭우 속에서 20여 점의 친일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친일시 낭독회 개최와 시민 서명 운동을 통해서 친일문학상의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많은 언론과 SNS에서도 친일문학(상)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인하대 김명인 교수는 서정주를 ‘비단옷을 입은 노예’라고 규정짓고 ‘서정주의 이름을 걸고 상을 주는 문학상은 기형적 유산으로 보편적 신뢰나 합의가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서정주를 ‘일제와 전두환 찬양뿐만 아니라 십수 년간 문인협회, 시인협회 등 대표적 문인단체에 군림한 권력자로 한국문학을 극우, 냉전 문화정치의 일부로 만든 장본인’이라 규정했다.
때마침 미당 전집이 발간되자 동아대 전성욱 교수는 ‘미당의 문학적 성취는 무엇인가? 그 성취는 과연 그의 역사적 반역을 대속할만한 것인가?’라고 비판했고, 김륭 시인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빗대 ‘이 나라 문단엔 택시운전사보다 나은 어른이 왜 없는가?’라며 미당 전집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했다. 그 외에 여러 잡지와 매체에서도 미당문학상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폐지의 정당성을 거듭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특히 이명원을 필두로 한 젊은 평론가들이 본격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주장은 확고하고 명료했다. ‘친일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번번이 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제 때, 제대로 앓았어야 할 진통을 회피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나아가 동포들을 사지로 몰아놓는 데 앞장섰던 문인들을 기리는 문학상을 시행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지독한 모순이요, 넌센스’라고 했다. 또한 ‘과거 식민지 종주국에 적극 협력하고 파시즘적 담론을 만든 문인들은 기리는 문학상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그들은 ‘기념’할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이라고 했다.
여전히 일부 작가들과 문단 권력이라 할 만한 문인들은 ‘문학주의와 미학주의’를 내세우며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반대’는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한국문학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문학과 예술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을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를 겪고 강대국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 중에서,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기리는 기념상을 만들어 찬양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한 가지다. 오랫동안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를 빼앗기고 친일세력들이 정치적 지배자가 된 한국에서, 문학인들조차도 친일문학의 삐뚤어진 문학정신을 내면 에 간직해 두고 그동안 호가호위해 온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문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단언컨대 찬반의 논란이 필요치 않다. 친일문학은 ‘문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 그리고 반민주의 폭압 속에서 살아온 한국 작가들에게 친일문학,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역사의 문제’이자 ‘정의의 문제’인 것이다.

편집자주 – 권위상 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시인)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소속으로 친일문학상 반대운동에 앞장 서 활동해왔으며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의 연대에 기여하였다. 서울 서부지부장을 맡아 수년 간 지부를 이끌어왔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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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5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문화재수난사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이란 석조유물이 있다. 불교미술의 꽃이라는 일컫는 이 사리탑은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일찍이 1911년 여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절터를 벗어나 서울 명동과 일본 오사카 등지를 떠도는 통에 남다른 풍상을 겪었고, 1912년 12월경에 간신히 국내로 재반입된 이후 다시 총독부박물관의 야외전시유물로 전락한 이래 거의 한 세기가 넘도록 경복궁 안에 오갈 데 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비운의 문화재이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탑신이 크게 파손되는 악운이 겹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콘크리트로 겨우 외형이 복구되었고, 2016년 4월에 와서야 전면적인 해체 수리 복원을 위해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간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애당초 원래의 절터에서 무단 반출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내력이나마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라는 일본인이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 제1편』(1927)라는 책에 남겨놓은 「현묘탑강탈시말(玄妙塔强奪始末)」이라는 글 덕분이다.
그는 통감부 시절에 ‘퇴한명령(退韓命令)’을 받은 전력이 있고,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으로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그의 책에는 「관헌의 횡포와 관리의 비상식」이란 소제목이 말해주듯이 자기네 위정자(爲政者)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내용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하세가와 원수(長谷川 元帥)와 아방궁(阿房宮)」이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된 글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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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총독과 용산총독관저의 전경이 배경도안으로 묘사된 조선총독부 발행 ‘시정7주년기념엽서’(1917)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중에 러일전역비(러일전쟁비)의 잉여금 50만 엔을 들여 군사령관 관저로 하고자 건설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하세가와 씨는 물론이고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거처를 정한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중략)
50만이라고 하는 국탕(國帑, 나랏돈)을 낭비하고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의 결과로 이를 이궁(離宮)으로 삼으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은, 국민이 단호하게 이를 힐책하지않을 수 없고, 20년 전의 50만 엔은 오늘날 2백만 엔에 필적할 거금으로 이를 낭비하고 그 후 처지가 곤란해져서 부적합한 곳에 이궁을 둬야 할 필요는 추호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 대건축물을 일컬어 늘 불충관(不忠館)이라고 하는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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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병합기념사진첩』(1910)에 수록된 ‘데라우치통감 신임피로회장 약도’의 모습이다. 용산정거장 건너편으로 한국주차군사령부와 등진 자리에 포진한 통감관저의 위치 관계와 삼각도(三角道, 삼각지) 쪽에서 연결되는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방궁이라고 일컫는 곳은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이다. 흔히 총독관저라고 하면 남산 왜성대 인근에 자리한 옛 통감관저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과는 별개의 관저가 또 하나 존재했다는 얘기이다. 그 위치는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안에 포함된 곳으로 서울 용산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간쯤이었으며, 일제 때의 지번(地番)으로는 ‘한강통 11-43번지’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의 소재지 변동에 관한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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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용산총독관저는 원래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의 용도로 세운 건축물(1907년 6월 기공, 1910년 4월 준공)이었다. 하지만 너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립된 탓에 건물이 완공되기 이전에 이미 ‘통감관저’로 용도변경이 추진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총독부가 별도의 건물을 지어 이것과 맞교환하는 형태로 인수인계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정작 이곳이 총독관저로 바뀐 이후에는 아무도 이곳을 집무공간으로 삼았던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2년 8월에 우가키(宇垣) 총독이 자기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기 위해 20여 일 남짓 이곳에 기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참의 세월이 흐르도록 그 누구도 이곳을 거처로 정한 일조차 없었다. 무엇보다도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컸고, 서울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다 보니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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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리풍속대계 제16권』(1930)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 일대의 전경사진. 왼쪽 위에 지붕이 드러난 건물은 조선군사령부(옛 한국주차군사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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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의 대문 쪽에서 담아낸 전경사진.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은 그저 역대 통감이나 총독이 주관하는 연회와 접대가 드문드문 벌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를 들어 1910년 7월에 데라우치 통감이 부임했을 당시 축하피로연이 벌어진 장소가 이곳이었으며, 경술국치 이후로는 천장절 축하연이나 만찬회 따위가 곧잘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했다는 기록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간혹 식민지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이나 서양의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평상시에는 거의 비어있는 공간인 까닭에 그때마다 대대적인 건물수리와 조경공사가 벌어지곤 했다
용산총독관저가 이처럼 시설과 규모는 번듯하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덩치가 큰 탓에 이러한 처치곤란의 신세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발상이 바로 이궁(離宮) 건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을 지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와 같은 이는 『양경거류지(兩京去留誌)』(1915)를 통해 이를 조선에 있어서 천황 이궁의 하나로 삼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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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실린 미나미 총독 주최 제3회 고령자 초대회 관련보도.

 

『매일신보』 1935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왜성대 총독관저를 병합기념관으로 보존하는 대신에 용산총독관저를 증축 개조하여 새로운 관저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수립된 적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자못 흥미로운 것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1936년 이후 194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80세 이상의 장수노인(長壽老人)을 전국에서 초대하여 이곳 총독관저에서 성대한 경로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국민정신 작흥과 경로사상 고취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 행사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에 다음과 같은 미나미 총독의 인사말에서 잘 포착되고 있다. 『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미나미 총독이올시다. 오늘 고령자 제씨가 이 같이 다수히 참석하여 주신 것을 충심으로 기뻐합니다. 무릇 장로를 존경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런 지정이오 또 도덕의 근원인데 특히 동양에서는 경로의 좋은 습관이 깊이 사회에 침윤되어 왔고 조선도 고래로 이 미풍이 성황하였는데 이것을 민중 전반에 궁행실천시키고 싶어서 총독된 이후로 매년 고령자 위안회를 개최하고 지방에도 이를 장려하고 있는 터입니다.(중략)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은 천황폐하의 어능위(御稜威) 아래 용맹과감한 황군장병의 분투와 열렬한 총후국민의 협력에 의해서 여러분도 아다시피 지난번 항일의 제2수도인 한구(漢口)도 함락하고 적은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변은 결코 이로써 끝나지 않고 금후 국민은 일층 공고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 터이니 여러분은 장로의 입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편달하여 주어야 합니다.

 

용산총독관저의 연혁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가 패망을 앞둔 시점에서 이곳은 다시 ‘조선총독부지도자연성소(朝鮮總督府指導者鍊成所)’의 용도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고이소(小磯) 총독이 반도통치의 세 가지 큰 방침의 하나로 내세운 ‘수양연성의 철저적 실천’을 구현하기 위해 1943년 3월 1일부터 용산총독관저를 이용하여 개설한 기관이었다.
황도수련원(皇道修鍊院)의 성격을 띤 이곳에서는 육군중장 출신의 사이토 야헤이타(齋藤彌平太)가 소장을 맡았고, 총독 자신을 포함하여 총독부의 각 국장과 도지사 등을 대상으로 한 연성회가 진행되었다. 또한 총독부 고등관은 물론이고 판검사, 부윤, 군수 등을 집결시킨 수련회도 곧잘 이곳에서 실시된 바 있었다.
『매일신보』 1944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중추원 참의 30명이 참가한 합숙훈련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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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8월 29일자에 실린 총독부지도자연성소 입소식 관련 보도내용.

 

중추원 참의 30명의 합숙연성이 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의 총독부지도자연성소에서 5일간 예정으로 시작되었다. 참의들은 지난 4일부터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결전하 반도 민중의 전의앙양(戰意昻揚)과 황국근로관 확립에 관한 열성스러운 의견을 개진하였고 또 고이소 총독의 훈시를 듣고 금후 민중의 지도자로서 봉공할 결의를 굳게 한 터인데 연 2일간 계속된 회의로 자못 피로한 터임에도 불구하고 연성에 참가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연성소에 집합한 전원은 처음 신체검사를 받고 연성소 직원으로부터 주의사항 설명을 들은 다음 오후 6시부터는 신배(神拜)로부터 시작하여 열성스러운 연성을 시작하였다.

 

이곳 용산총독관저는 한국전쟁 시기에 반파(半破)된 모습이 드러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 아무도 이 건물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용산 ‘아방궁’ 역시 일제침탈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라는 점만큼은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금, 2018/04/2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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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I_0314ACI_0325 ACI_0349ACI_0357ACI_0373ACI_0399ACI_0403ACI_0414ACI_0431ACI_0525ACI_0546ACI_0562ACI_0543

수, 2017/11/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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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S 피해자입니다
파산이라는 것은 적어도 37 명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자는 해선 안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년 3개월 많은 이들이 이혼과 그리고 월세방으로 나 앉았고 그리고 37 명의 소중한 생명이 지병악화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성훈이 파산된다면 전 열심히 일하면 살려 하지 않을겁니다
똑같이 한탕 크게 해 먹고 파산 신청 할겁니다
법보다 국민정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조금이라도 빚은 갚아야 하는 것으로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아껴 사는 국민들이 억울하지 않더록 해 주십시요 꼭요

화, 2017/12/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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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홀딩스  1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사람입니다.

 

2016년 9월 2일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 되고

그 이후 모집책으로부터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기다려달라고만 했습니다

본인도 큰돈을 투자했으며

IDS가 잘못되면 자신이 더 큰일난다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물어볼때마다 희망고문 하듯

잘 될꺼라고만 했고

실질적인 변제안이 나올거라며

너무 확신에 차서 말을 했기에

전 믿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제와서는 제가 결정하고 투자한거니 변호사비용이며 법원 인지세와 송달료등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저로써는

다 따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도저히 답답해서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경찰서에 찾아가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김성훈을 비롯하여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라도 이 일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정말 피같이 모은 돈인데

그냥 이대로 사기맞은것으로 끝난다면 미쳐버릴것 같고 절대 절대 포기할수가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사건의 전말이 하나하나씩 들어날때마다 어이가없고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떡~!하니 나타나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수, 2017/12/0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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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youtu.be/UaxKw9Ndq34

화, 2018/02/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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