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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통감 일가족은 왜 한복을 입었을까? – 조선귀족 이지용과 그의 부인 홍옥경의 친일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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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통감 일가족은 왜 한복을 입었을까? – 조선귀족 이지용과 그의 부인 홍옥경의 친일행적

익명 (미확인) | 월, 2017/10/23- 11:42

식민지 비망록 29

이순우 책임연구원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6년 이후 한국통감으로 재임하면서 유달리 ‘동양평화’니 ‘우호선린’이니 하는 말들을 입버릇처럼 앞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관한 사진자료에는 갓을 쓴 한복 차림새로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행색을 한 모습도 남아 있다.
그가 과연 무슨 까닭에 이런 사진을 남겼는지가 궁금하여 무슨 단서가 될 만한 자료가 있나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일본복의 조선부인과 조선복의 일본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진 화보 한 장이 눈에 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들은 한복 차림의 이토 사진에 나오는 그들과 완전히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의 면면과 옷차림에 비추어 보아 두 장의 사진은 모두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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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2월에 촬영한 한복 차림의 이토 히로부미와 특파대사 이지용 일행의 모습. <일본역사사진첩> 1912년 10월 발행.(왼쪽) /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소개된 한복 입은 이토 통감 부인의 사진자료. 왼쪽부터 차례대로 박의병의 처 유주경, 이토의 딸 노리코, 이토의 부인 우메코, 이지용의 처 홍옥경이다.(오른쪽)

 

조선옷을 입고 뒤로 오른편에 선 부인은 공작 이토 히로부미 씨의 미망인 우메코(梅子)요, 왼편은 이토 공작의 딸 스에마츠(末松) 자작의 부인 노리코(德子)요, 앞으로 일본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은 부인은 이지용 씨 부인 이옥경(李鈺卿: 홍옥경-필자)이요, 왼편은 박의병 씨 부인 박주경(朴洲卿)이라. 이 사진은 지난 명치 39년(1906년) 11월 이지용 씨가 특파대사로 동경 갔을 때에 이토, 스에마츠 두 부인에게 조선의복을 선사한 답례로 두 부인이 이, 박 두 부인에게 일본의복을 선사한 기념사진.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1906년 12월에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특파대사로 일본 동경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등장인물의 면면은 왼쪽부터 특파대사의 수행원이던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의병(朴義秉, 1853~1929) 내외이고, 가운데가 이토 통감 내외, 오른쪽이 특파대사 이지용 내외, 그리고 앞쪽 맨 오른쪽이 이토의 딸이다.
<서우(西友)> 제2호(1907년 1월)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이지용 특파대사의 수행원에는 내부 회계국장 김관현(金寬鉉), 시종원 부경 송태관(宋台觀), 경무고문부 통역관 와타나베 타카지로(渡邊鷹次郞)의 부인, 특파대사 부인의 어학교사 요코야마(橫山)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연유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30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특사목적(特使目的)] 특파대사 이지용 씨가 금번에 수개(數箇)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특사를 도득(圖得)하였는데 기(其) 내용을 득문(得聞)한즉 이토통감 원류(伊藤統監願留)할 사(事)와 망명객 특사(亡命客 特赦)치 아니할 사(事)이라 하나 노고(勞苦)만 도비(徒費)하고 목적은 달(達)키 난(難)하리라고 항설(巷說)이 분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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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 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경성부사> 제2권, 1936

 

이를테면 이토 통감을 계속 통감의 자리에 남아 있도록 청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준용과 박영효 등 망명객의 특사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특파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목적이었다. 당시 특파대사로 선정된 이지용은 이미 1904년에도 이토의 방한에 따른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임무를 한 차례 수행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학(幼學) 이희하(李熙夏)의 아들로 용구(龍駒)라는 이름을 지닌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되는 흥인군 이최응(興仁君 李最應)의 손자로 출계하여 고종황제의 5촌지간인 근친황족으로 변신하는 인물이었다.
흥인군의 후사가 된 직후에는 이은용(李垠鎔)이라 했다가 1900년 9월 영친왕(英親王)이 이은(李垠)이라는이름을 갖게 되자 이 글자를 피해 이지용(李址鎔)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그는 황족이기에 앞서 그 누구보다도 친일매국의 행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서명한 당사자가 바로 외부대신 임시서리였던 그였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지를 마음껏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것은 그대로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05년 35세의 나이로 내부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도 적극 찬동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친일과 매국에 앞장 선 공로와 황족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는 한편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伯爵)’이라는 비교적 높은 작위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유명한 노름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1일자를 비롯한 여러 신문기사에는 그가 용산 강정(龍山江亭)에 박의병과 김승규 등을 불러 화투판을 크게 벌였다는 소식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화투판 동료 ‘박의병’은 다름 아닌 1906년에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했던 박의병과 동일인이다.
그는 1905년 이후 한성부윤을 지내면서 용산 일대의 군용지 수용에 깊이 관여하였고, 1907년 9월에는 임시군용 및 철도용지조사국장을 맡아 일본해군이 진해만 일대를 장악하여 해군기지를 조성하는 일에 앞장 선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1910년 6월 무렵의 신문기사에는 이지용이 화투판을 급습한 일본헌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얼굴을 다쳤다거나 그들에게 “다시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사죄까지 하며 망신을 당한 일이 잇달아 수록되어 있다. 나라의 운명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얼마나 화투노름에 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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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백작을 비롯한 다수의 친일인사들이 어울려 ‘지여땅이(짓고땡)’를 하다가 발각되어 도박범 및 도박장개장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2년 2월 1일자 보도내용.

 

하지만 그의 고질적인 도박병은 쉽사리 고쳐지질 않았고 이내 화투판을 다시 전전하다가 1912년 정초에는 다른 친일 권세가들과 어울려 ‘짓고땡’ 판을 벌이다 발각되어 큰 사단이 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이 일로 공판에 회부되어 태(笞, 매질) 100대의 판결을 받았고, 동시에 ‘백작(伯爵)’의 예우는 1912년 4월 9일부로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191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복작되는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그 사이에 친일의 대가로 치부한 재산은 대부분 탕진하고 말았는데, <동아일보> 1920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오호(嗚呼)! 이백(李伯)의 말로(末路)! 당년영화금안재(當年榮華今安在)」 제하의 기사는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그의 몰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가산이 탕패되고 생계가 곤궁함으로써 능히 백작이라 하는 영위를 보존키 어려울 뿐 아니라 도저히 귀족의 체면을 유지키가 어렵겠다 하는 이유로 백작 이지용 씨가 작을 내어 놓겠다는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는 소문이 매우 낭자하여 뜻밖에 이지용 씨는 세상을 주목을 받게 되고 말았다. …… 나날이 쇠잔하여 가기만 하는 가세는 마침내 불과 육십 원씩의 사글세조차 내기에 눈살을 찌푸릴 곤경에 떨어진 형편이라, 그런 고로 비록 허설일망정 작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실상은 괴이치 않은 일이라 하겠더라.

 

친일귀족 이지용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니 그의 처 홍옥경(洪鈺卿, 1870~?)과 관련한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황현(黃玹)이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지용의 처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지용이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으로 갔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에 머물러 있기를 청원하는 일과 망명을 한 이준용과 박영효의 일을 다루기 위함이었다. 이지용의 처 홍씨(洪氏)도 자칭 이홍경(李洪卿)으로 이에 동행하였다. 우리나라의 부녀는 원래 이름을 쓰지 않고 단지 모씨(某氏)라고 지칭할 뿐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왜속(倭俗)을 본떠 저마다 제 이름을 써서 사회에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홍경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홍경은 일본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와 정을 통하고, 또 코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와 통하고, 후에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도 통하였으니, 하기와라가 질투하였으나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일본 풍속에 남녀가 서로 보면 반드시 악수하고 입을 맞추는 것으로 친밀함을 표시하였다.
하기와라가 돌아가려할 때 홍경이 이를 전송하며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그의 입에 들이미니 하기와라가 그 혀를 깨물어 버렸다. 홍경은 아픔을 참고 돌아왔는데 장안의 사람들이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이를 비웃었다. 홍경은 일본어와 영어에 통하고 양장을 하고서 이지용과 더불어 손을 잡고 다녔다. 간혹 인력거를 타거나 얼굴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며 양양하게 달리니 행인들의 눈을 가렸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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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3월 이토특파대사의 방한 때 숙소인 손탁호텔 앞에서 이토의 수행원들과 주한일본공사관 관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한 사진자료. 동그라미 표시를 한 인물이 바로 이지용의 처 홍옥경과 염문을 뿌렸다고 알려진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2권, 1904년 5월 8일 발행.

 

여기에는 이지용의 처 이름을 ‘이홍경’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홍옥경’ 또는 ‘이옥경’의 잘못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 27일자에 “특파대사 이지용의 부인의 본래 이름이 ‘홍경현(洪敬賢)’이나 금번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차에 ‘이홍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탓에 벌어진 착오인 듯하다. 정확하게는 ‘홍옥경’이 맞으며, ‘이옥경’이라고 한 것 역시 일본인들의 풍속에 맞춰 남편의 성을 따른 표기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홍옥경은 일찍이 대한부인회 회장 또는 여자교육회 총재의 직함을 갖고 일본세력이 주도하던 경성사교계를 종횡무진하였으며, 일본애국부인회 평의원과 동양부인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병합 직후에는 작위수여에 대한 사은(謝恩)을 위해 조직된 귀족관광단(貴族觀光團)에 합류하여 일본 동경에서 황후를 배알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 후로는 남편 이지용의 도박 취향으로 인해 가세가 빈약해진 탓인지 약속어음부도나 토지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얘기가 드문드문 전해졌을 뿐 이렇다 할 활동상이 알려진 바는 없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친일여성인사들로 조직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간사 및 헌금자 명단에 다시 홍옥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걸로 보면, 그의 태생적인 친일본능이 얼마나 오래 세월 지속되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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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

호영

토, 2019/03/09- 01:11
53
0

우리가 히로시마에 핵폭탄 떨어뜨리고 ㅋ 일본 항복 받아냈냐 ㅋㅋ

꼬작 몇번 싸워 이겼고 일본 사람 몇명죽였다고 그게 독립 운동이라고? ㅋㅋㅋ 응 아니야..

3.1운동은 그냥 객기 부리다 일본군한태 뒤진 년놈들 행사일 뿐이다

일, 2019/03/10- 00:25
32
0

嘲金正恩(조김정은)

 

君何空手去(군하공수거)

前路益多難(전로익다난)

核化眞狂者(핵화진광자)

人民百尺竿(인민백척간)

 

김정은을 조롱함

 

그대는 어째서 빈손으로 갔는가

앞길에 더욱 어려움이 많으리라

核化하다니 참으로 미친 者일세

인민들은 높은 장대에 올랐도다.

 

<時調로 改譯>

 

왜 빈손으로 갔나, 앞길 더욱 多難하리

核으로 무장하다니 참으로 미친놈일세

수많은 인민들일랑 百尺竿頭 올랐도다.

 

*空手: 빈손 *前路: 앞길. 전정(前程) *多難: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음 *狂者: 狂人.

 

<2019.3.10, 이우식 지음>

일, 2019/03/10- 09:50
39
0

責問全斗煥

 

未止光州血(미지광주혈)

如前發妄言(여전발망언)

何時其罪盡(하시기죄진)

大哭衆寃魂(대곡중원혼)

 

전두환에게 責問함

 

光州의 피 아직 멎지 않았는데

여전히 망령된 말 하고 있구나

어느 때에나 그 죄가 없어지랴

많은 寃魂들 큰 소리로 哭한다.

 

<時調로 改譯>

 

光州의 피 흐르는데 前과 같이 망령된 말

어느 때가 되어서야 그 죄가 없어질 건가

오호라! 많은 寃魂들이 큰 소리로 哭한다.

 

*責問: 꾸짖거나  나무라며 물음  *妄言: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말함. 또는 그 말. 망담(妄談). 망설(妄說) *何時: 언제 *大哭: 소리를 내어

곡(哭)함. 또는 소리로 슬프게 욺  *寃魂: 분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넋.


<2019.3.11, 이우식 지음>

월, 2019/03/11- 09:25
7
0

讚胡志明先生

 

猫兒逢猛虎(묘아봉맹호)

大破可驚歎(대파가경탄)

不屈先生意(불굴선생의)

終成克萬難(종성극만난)

 

호찌민 선생을 기리며

 

어린 고양이가 사나운 범을 만나서

크게 부숴 버리니 경탄할 만합니다

굽히지 아니하신 호찌민 선생의 뜻

마침내 온갖 어려움 이겨 냈습니다.

 

<時調로 改譯>

 

猫兒가 猛虎 만나서 크게 부쉈습니다

굴복하지 아니하신 호찌민 선생의 뜻

마침내 온갖 어려움 극복해 냈습니다.

 

*胡志明: 베트남의 혁명가ㆍ정치가(1890~1969).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하여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대통령에 취임, 北베트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猫兒: 고양이

어린 새끼 *猛虎: 사나운 범. 썩 사나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름 *大破: 크게 부숨.

크게 부서짐 *驚歎: 몹시 놀라며 감탄함 *終成: 마침내 이뤄짐 *萬難: 온갖 어려움.

 

<2019.3.11, 이우식 지음>

월, 2019/03/11- 07:27
9
0

왜 악플 신고가 안됨? 왜 하루가 지나도 삭제가 안됨?

화, 2019/03/12- 02:24
22
0

0403-4

[바로듣기]

☞ (3.1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5편 “김대우” –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하여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인물

☞ (3.0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2부

☞ (3.05)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좌담회 1부

☞ (2.27)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2부

☞ (2.26) ‘내역사’ 시즌 3: 3.1혁명 100주년 특집 편성_만세열전1부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3/1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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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신요?

나여사

건강하신가여

포풀러구케…..

 

 

 

 

 

 

 

 

 

 

 

 

 

 

 

 

 

 

 

 

 

 

 

미인도아닌 미남도아닌포풀러정칠 하려는 너와나<

수, 2019/03/1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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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지역 3.1운동 100주년 2] 홍난파, 현제명 등 친일파 작품 위주… 항의 받고 급히 변경

0313-4

▲ 친일음악회 논란에 휩싸인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 포스터 ⓒ 부천시립예술단

오는 15일 부천시 주최로 열리는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가 친일음악회 논란에 휩싸였다.

부천시립합창단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로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공연하는 신춘음악회에선 ‘나물 캐는 처녀'(현제명 작사·작곡), ‘봄 처녀'(이은상 시, 홍난파 작곡), ‘봄이 오면'(김동환 시, 김동진 작곡), ‘가고파'(이은상 시, 김동진 작곡), ‘수선화'(김동명 시, 김동진 작곡), ‘산유화'(김소월 시, 김성태 작곡), ‘꽃구름 속에'(박두진 시, 이흥렬 작곡) 등의 한국 가곡을 부를 예정이었다.

신춘음악회를 주관한 부천시립예술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문화도시 부천이 동아시아 최초로 세계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된 기념으로 ‘신춘음악회 : 한국 가곡, 봄을 노래하다’를 마련하였다”고 밝혔다. 부천시는 지난 2017년 11월 세계에서 21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됐다.

부천시립예술단은 “이 음악회는 우리나라의 고풍스러운 정서가 가득한 시에 아름다운 음율(음률)을 담은 주옥같은 한국 가곡들”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선곡한 가곡들은 우리나라의 고풍스러운 정서가 가득한 시와 아름다운 음률을 담은 주옥같은 가곡들일까. 아니다. 이 가곡들은 현제명, 홍난파, 김동진, 김동환, 김성태, 이흥렬 등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대표적인 친일 예술인들이 작사·작곡했다.

홍난파와 현제명 등 친일음악인 위주로 선곡

0313-5

▲ 젊은 시절의 현제명.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족 음악인들은 홍난파와 현제명을 대표적인 친일 음악인으로 꼽고 있다.

홍난파는 1937년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 위원으로 활동, 1938년 사상전향자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전향성명’을 발표했다. 1938년 일본의 제2국가로 불리는 ‘애국행진곡’ 지휘, 1941년 조선음악협회 평의원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에 각각 선임돼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등을 작곡했다.

현제명은 조선총독부 지원으로 결성된 조선문예회, 대동민우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실내악단 등에 참여한 친일 음악인으로 친일 성악곡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발표하고 친일 행사인 ‘국민음악의 밤’에서 독창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전국 순회 가창지도대에 참가하는 등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현제명은 친일 음악인 중에서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음악가다.

가곡 ‘가고파’ 작곡가인 김동진은 1930년~1940년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과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한 ‘건국10주년찬가’와 ‘건국10주년 경축곡’과 관현악곡 ‘양산가’ 등을 작곡한 친일 음악인이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동환은 서사시 ‘국경의 밤’을 쓴 시인이자 친일연설문 모음집 ‘애국대연설집’ 등을 편집하고 발간한 친일 문인이다.

작곡가 김성태는 친일음악단체 ‘경성후생악단'(이사장 현제명) 지휘자로 이 실내악단을 통해 국민음악정신대를 내세우면서 공장과 학교 등에 국민음악을 보급한 친일 음악인이고, 이흥렬은 경성후생악단과 함께 음악으로써 나라(일본)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음악보국'(音樂報國) 운동을 주도한 친일 음악인이다.

‘친일 예술인들을 사후에까지 종횡무진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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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는 지난 2015년 9월 20일 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홍난파 기념비 앞에 “홍난파 단죄문”을 세웠다. ⓒ 장명진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아산지회 운영위원

일제에 부역한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시류에 편승하면서 교수가 되고 음악단체 대표를 지내면서 예술 권력을 행사했다. 생전과 사후에 문화훈장과 예술원상 등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했다.

현제명은 1945년 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위원회 문교부 위원, 1946년 서울대 예술대 음악학부 초대 음악부장,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4년 제1회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65년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홍난파는 일제 강점기인 1941년 8월 뇌결핵으로 사망했다. 사후인 1965년 10월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김동진은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 교수, 1974년 경희대 음대학장, 1974년 제15회 3.1 문화상 예술상 수상, 1982년 제2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음악부문을 수상했다. 김성태는 서울대 음대교수,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한국음악협회 고문 등을 역임하고 문화훈장 모란장과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3.1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이흥렬은 1960년 서울시 문화위원, 1963년 숙명여대 음대학장, 1967년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 노래 작곡 및 음악감독을 맡았던 류형선(54) 전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은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 친일 논란을 어이없어 했다. 그러면서 ‘음악인들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친일 예술인들을 사후에까지 종횡무진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류 감독은 12일 인터뷰에서 “음악의 공공적 가치 구현을 위해 기획과 프로그램 구성 등 주도적인 결정권을 쥔 분들이라면 친일 음악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 “(친일 예술인 작품 위주로 선곡한 부천시립예술단의 신춘음악회에 대해)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친일 음악인들을) 모르는 게 정말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류 감독은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천시립예술단) 그분들이 정녕 모르고 이 음악회를 기획했다고 판단한다. 알고는 이럴 수 없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그 무지가 친일 음악인들이 해방 이후 오늘까지 종횡무진 할 수 있었던 오욕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성찰해야 한다”며 부천시립예술단 음악인들과 관련 공무원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고양시·안산시·여주시는 친일 음악 청산, 부천시는 친일 음악 위주 신춘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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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제73주년 광복절 부천시 경축식에서 합창하고 있는 부천시립합창단. ⓒ 부천시립예술단

고양시는 지난달 26일 김동진이 작곡한 ‘고양시의 노래’ 사용 중단, 여주시는 지난달 28일 김동진이 작곡한 ‘여주의 노래’ 사용 중단, 안산시는 지난 7일 김동진이 작곡한 ‘안산시민의 노래’ 사용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부천시는 친일 예술인 위주의 신춘음악회를 열려고 했다. 만일 시민단체가 저지하지 않았다면 부천 시민들은 친일음악을 주옥같은 음악으로 착각할 뻔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지난 8일 신춘음악회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부천시에 항의하면서 피켓 시위 등을 계획했다. 시민단체가 거세게 반발하자 부천시립예술단은 신춘음악회를 나흘 앞둔 12일 프로그램을 급히 변경했다. 문제의 친일 예술인 곡은 빼고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작시, 작곡) ‘님이 오시는지'(박문호 작시, 김규환 작곡) ‘내 마음의 강물'(이수인 작시, 작곡) 등의 가곡을 부르기로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종선(42) 부천지부장은 12일 “부천시가 친일음악회나 다름없는 신춘음악회를 기획한 것은 친일청산에 대한 무관심과 친일예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서 “부천시는 앞으로 추진하게 될 각종 문화사업과 행사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찬양하고 기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촉구했다.

<2019-03-13 >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음악회 될 뻔한 부천시음악회 

※관련기사 

☞부천타임즈: 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 부천시 문화예술 곳곳에서 친일잔재 노출

수, 2019/03/1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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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 군국가요 작곡한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 내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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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 화면 갈무리. 이날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대중음악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의 성격상 KBS가 자료 검토 및 선곡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친일 행적이 있는 음악인의 노래를 선곡해 방송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에선 가수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이날 하은은 425표를 얻어 1승을 거뒀다. 하은의 열창과 탈북 청년들이 고향을 등지게 된 사연이 어우러져 뜻깊은 무대가 됐다.

그러나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1급 친일 작곡가의 곡으로 알려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방송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이 만든 노래다. 박시춘은 평생 동안 3000여 곡을 작곡, 이 가운데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신라의 달밤’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원 혹은 밀양보전을 졸업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밀양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대중음악계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82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시춘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중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1등급’ 친일파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인들을 징용·징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38년부터 지원병 제도를 실시,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에 동원했다. 1943년 공표되고 이듬해부터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서도 한국인들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입대를 기피하거나 거부하지 않도록 ‘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예술인들을 동원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천황제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영화와 가요를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적극 호응한 이가 바로 박시춘이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는 박시춘의 친일 행위에 대해 “1942년부터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내용의 ‘고성의 달’, 1943년 징병제 실시 기념영화 주제곡 ‘조선해협’,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축하 특별 기획음반 수록곡인 ‘혈서 지원’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942년 죽음을 각오하고 승리를 다짐하는 군인의 모습을 묘사한 가요인 ‘아들의 혈서’, 1943년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후방의 여인 및 부모의 모습을 그린 ‘결사대의 아내’, 부상을 입었음에도 일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내용의 ‘즐거운 상처’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 1943년 산업전사위문격려위문예능대에 참여해 활동함”이라고 밝혔다.

위 <결정이유서>에 따르면,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는 이외에도 ‘낭자일기'(노래 남인수) ‘병원선'(노래 남인수) ‘아세아의 합창'(노래 김정구) ‘진두의 남편'(노래 박향림) ‘지원병의 집'(노래 장세정) 등 13곡이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는 군국가요 작곡가로선 최다 기록이다.

지난 2016년엔 밀양 출신인 박시춘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가 ‘박시춘 음악제’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친일파를 기리는 음악행사를 도비를 지원받아 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이 빗발치면서 밀양시는 박시춘 음악제 개최를 백지화 했다. 박시춘 외에도 안익태·현제명·홍난파·남인수·김기수 등 다수의 음악인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 행적이 확인된 바 있다.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국장 겸 친일잔재조사위원회 연구원은 11일 통화에서 “대한민국 100년 특집을 하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 나와서 내 귀를 의심했다”면서 “박시춘은 친일 전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동원의 제일선에 서서 징병 유도 가요를 만든 대중음악계의 일급 친일파”라고 설명했다.

이지훈 국장은 “화려한 친일행적을 가진 이가 (친일의 대가로) 평생 호의호식한 데다 대중음악계 최고의 별로 아직까지 자리매김한 것은 씁쓸한 현실”이라며 “관계자들이 자료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임정 수립 100년 특집에 나온 것도 우려스러운데, 우승을 했다고 해서 더 당황했다”고 개탄했다.

<2019-03-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절 특집’에 1급 친일파 노래를? KBS의 황당한 결정.

수, 2019/03/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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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3 – 친일파 5편

“김대우 ;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하여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인물”

팟빵링크 : http://www.podbbang.com/ch/14024

수, 2019/03/1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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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國朝鮮

 

何如君子國(하여군자국)

孔孟滿朝廷(공맹만조정)

百姓恒歌舞(백성항가무)

吟哦四季寧(음아사계녕)

 

君子의 나라, 朝鮮

 

어찌 君子의 나라였었나

朝廷에 가득했었던 孔孟

백성들은 늘 歌舞하면서

四季安寧을 詩로 읊었네.

 

<時調로 改譯>

 

어찌 君子國이었나 朝廷 가득했던 孔孟

조선 백성들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계절 안녕에 대하여 詩를 읊조렸었네.

 

*君子國: 예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풍속이 아름답고 예절이 바른 나라라고

이르던  말 *孔孟: 공자와 맹자  *歌舞: 노래와    *吟哦: 음영(吟詠) *四季: 사계절.

 

<2019.3.14, 이우식 지음>

목, 2019/03/14-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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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의 패전 방송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알려진 친일파 ‘김대우’

조선총독부 학무과장 당시 황국신민서사를 제정 입안한 뼛속까지 친일파

황국신민서사란?

1937년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맹세문.

더 자세한 내용은 유툽과 팟빵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DBM7…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9/03/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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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모 방송에서 사회  분야별로 친일파 후손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는데, 다른 건 기억 안나고 국립인 서울대학교  교수진에

친일파 후손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보았습니다. (기억에 의존하는 거라 틀릴 수 있음)

그래서, 친일파 및 그 후손들을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1)친일파 및 후손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한 지도와

2)사회 분야별 친일 후손들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지도(?)를

연구/작성해 주실 것을 건의드립니다~~~

(혹시, 이와 유사한 자료가 이미 있다면 죄송합니다~)

목, 2019/03/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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