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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통감 일가족은 왜 한복을 입었을까? – 조선귀족 이지용과 그의 부인 홍옥경의 친일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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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통감 일가족은 왜 한복을 입었을까? – 조선귀족 이지용과 그의 부인 홍옥경의 친일행적

익명 (미확인) | 월, 2017/10/23- 11:42

식민지 비망록 29

이순우 책임연구원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6년 이후 한국통감으로 재임하면서 유달리 ‘동양평화’니 ‘우호선린’이니 하는 말들을 입버릇처럼 앞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관한 사진자료에는 갓을 쓴 한복 차림새로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행색을 한 모습도 남아 있다.
그가 과연 무슨 까닭에 이런 사진을 남겼는지가 궁금하여 무슨 단서가 될 만한 자료가 있나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일본복의 조선부인과 조선복의 일본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진 화보 한 장이 눈에 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들은 한복 차림의 이토 사진에 나오는 그들과 완전히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의 면면과 옷차림에 비추어 보아 두 장의 사진은 모두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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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2월에 촬영한 한복 차림의 이토 히로부미와 특파대사 이지용 일행의 모습. <일본역사사진첩> 1912년 10월 발행.(왼쪽) /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소개된 한복 입은 이토 통감 부인의 사진자료. 왼쪽부터 차례대로 박의병의 처 유주경, 이토의 딸 노리코, 이토의 부인 우메코, 이지용의 처 홍옥경이다.(오른쪽)

 

조선옷을 입고 뒤로 오른편에 선 부인은 공작 이토 히로부미 씨의 미망인 우메코(梅子)요, 왼편은 이토 공작의 딸 스에마츠(末松) 자작의 부인 노리코(德子)요, 앞으로 일본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은 부인은 이지용 씨 부인 이옥경(李鈺卿: 홍옥경-필자)이요, 왼편은 박의병 씨 부인 박주경(朴洲卿)이라. 이 사진은 지난 명치 39년(1906년) 11월 이지용 씨가 특파대사로 동경 갔을 때에 이토, 스에마츠 두 부인에게 조선의복을 선사한 답례로 두 부인이 이, 박 두 부인에게 일본의복을 선사한 기념사진.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1906년 12월에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특파대사로 일본 동경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등장인물의 면면은 왼쪽부터 특파대사의 수행원이던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의병(朴義秉, 1853~1929) 내외이고, 가운데가 이토 통감 내외, 오른쪽이 특파대사 이지용 내외, 그리고 앞쪽 맨 오른쪽이 이토의 딸이다.
<서우(西友)> 제2호(1907년 1월)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이지용 특파대사의 수행원에는 내부 회계국장 김관현(金寬鉉), 시종원 부경 송태관(宋台觀), 경무고문부 통역관 와타나베 타카지로(渡邊鷹次郞)의 부인, 특파대사 부인의 어학교사 요코야마(橫山)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연유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30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특사목적(特使目的)] 특파대사 이지용 씨가 금번에 수개(數箇)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특사를 도득(圖得)하였는데 기(其) 내용을 득문(得聞)한즉 이토통감 원류(伊藤統監願留)할 사(事)와 망명객 특사(亡命客 特赦)치 아니할 사(事)이라 하나 노고(勞苦)만 도비(徒費)하고 목적은 달(達)키 난(難)하리라고 항설(巷說)이 분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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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 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경성부사> 제2권, 1936

 

이를테면 이토 통감을 계속 통감의 자리에 남아 있도록 청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준용과 박영효 등 망명객의 특사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특파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목적이었다. 당시 특파대사로 선정된 이지용은 이미 1904년에도 이토의 방한에 따른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임무를 한 차례 수행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학(幼學) 이희하(李熙夏)의 아들로 용구(龍駒)라는 이름을 지닌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되는 흥인군 이최응(興仁君 李最應)의 손자로 출계하여 고종황제의 5촌지간인 근친황족으로 변신하는 인물이었다.
흥인군의 후사가 된 직후에는 이은용(李垠鎔)이라 했다가 1900년 9월 영친왕(英親王)이 이은(李垠)이라는이름을 갖게 되자 이 글자를 피해 이지용(李址鎔)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그는 황족이기에 앞서 그 누구보다도 친일매국의 행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서명한 당사자가 바로 외부대신 임시서리였던 그였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지를 마음껏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것은 그대로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05년 35세의 나이로 내부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도 적극 찬동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친일과 매국에 앞장 선 공로와 황족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는 한편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伯爵)’이라는 비교적 높은 작위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유명한 노름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1일자를 비롯한 여러 신문기사에는 그가 용산 강정(龍山江亭)에 박의병과 김승규 등을 불러 화투판을 크게 벌였다는 소식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화투판 동료 ‘박의병’은 다름 아닌 1906년에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했던 박의병과 동일인이다.
그는 1905년 이후 한성부윤을 지내면서 용산 일대의 군용지 수용에 깊이 관여하였고, 1907년 9월에는 임시군용 및 철도용지조사국장을 맡아 일본해군이 진해만 일대를 장악하여 해군기지를 조성하는 일에 앞장 선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1910년 6월 무렵의 신문기사에는 이지용이 화투판을 급습한 일본헌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얼굴을 다쳤다거나 그들에게 “다시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사죄까지 하며 망신을 당한 일이 잇달아 수록되어 있다. 나라의 운명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얼마나 화투노름에 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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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백작을 비롯한 다수의 친일인사들이 어울려 ‘지여땅이(짓고땡)’를 하다가 발각되어 도박범 및 도박장개장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2년 2월 1일자 보도내용.

 

하지만 그의 고질적인 도박병은 쉽사리 고쳐지질 않았고 이내 화투판을 다시 전전하다가 1912년 정초에는 다른 친일 권세가들과 어울려 ‘짓고땡’ 판을 벌이다 발각되어 큰 사단이 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이 일로 공판에 회부되어 태(笞, 매질) 100대의 판결을 받았고, 동시에 ‘백작(伯爵)’의 예우는 1912년 4월 9일부로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191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복작되는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그 사이에 친일의 대가로 치부한 재산은 대부분 탕진하고 말았는데, <동아일보> 1920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오호(嗚呼)! 이백(李伯)의 말로(末路)! 당년영화금안재(當年榮華今安在)」 제하의 기사는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그의 몰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가산이 탕패되고 생계가 곤궁함으로써 능히 백작이라 하는 영위를 보존키 어려울 뿐 아니라 도저히 귀족의 체면을 유지키가 어렵겠다 하는 이유로 백작 이지용 씨가 작을 내어 놓겠다는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는 소문이 매우 낭자하여 뜻밖에 이지용 씨는 세상을 주목을 받게 되고 말았다. …… 나날이 쇠잔하여 가기만 하는 가세는 마침내 불과 육십 원씩의 사글세조차 내기에 눈살을 찌푸릴 곤경에 떨어진 형편이라, 그런 고로 비록 허설일망정 작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실상은 괴이치 않은 일이라 하겠더라.

 

친일귀족 이지용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니 그의 처 홍옥경(洪鈺卿, 1870~?)과 관련한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황현(黃玹)이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지용의 처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지용이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으로 갔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에 머물러 있기를 청원하는 일과 망명을 한 이준용과 박영효의 일을 다루기 위함이었다. 이지용의 처 홍씨(洪氏)도 자칭 이홍경(李洪卿)으로 이에 동행하였다. 우리나라의 부녀는 원래 이름을 쓰지 않고 단지 모씨(某氏)라고 지칭할 뿐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왜속(倭俗)을 본떠 저마다 제 이름을 써서 사회에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홍경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홍경은 일본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와 정을 통하고, 또 코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와 통하고, 후에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도 통하였으니, 하기와라가 질투하였으나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일본 풍속에 남녀가 서로 보면 반드시 악수하고 입을 맞추는 것으로 친밀함을 표시하였다.
하기와라가 돌아가려할 때 홍경이 이를 전송하며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그의 입에 들이미니 하기와라가 그 혀를 깨물어 버렸다. 홍경은 아픔을 참고 돌아왔는데 장안의 사람들이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이를 비웃었다. 홍경은 일본어와 영어에 통하고 양장을 하고서 이지용과 더불어 손을 잡고 다녔다. 간혹 인력거를 타거나 얼굴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며 양양하게 달리니 행인들의 눈을 가렸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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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3월 이토특파대사의 방한 때 숙소인 손탁호텔 앞에서 이토의 수행원들과 주한일본공사관 관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한 사진자료. 동그라미 표시를 한 인물이 바로 이지용의 처 홍옥경과 염문을 뿌렸다고 알려진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2권, 1904년 5월 8일 발행.

 

여기에는 이지용의 처 이름을 ‘이홍경’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홍옥경’ 또는 ‘이옥경’의 잘못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 27일자에 “특파대사 이지용의 부인의 본래 이름이 ‘홍경현(洪敬賢)’이나 금번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차에 ‘이홍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탓에 벌어진 착오인 듯하다. 정확하게는 ‘홍옥경’이 맞으며, ‘이옥경’이라고 한 것 역시 일본인들의 풍속에 맞춰 남편의 성을 따른 표기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홍옥경은 일찍이 대한부인회 회장 또는 여자교육회 총재의 직함을 갖고 일본세력이 주도하던 경성사교계를 종횡무진하였으며, 일본애국부인회 평의원과 동양부인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병합 직후에는 작위수여에 대한 사은(謝恩)을 위해 조직된 귀족관광단(貴族觀光團)에 합류하여 일본 동경에서 황후를 배알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 후로는 남편 이지용의 도박 취향으로 인해 가세가 빈약해진 탓인지 약속어음부도나 토지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얘기가 드문드문 전해졌을 뿐 이렇다 할 활동상이 알려진 바는 없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친일여성인사들로 조직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간사 및 헌금자 명단에 다시 홍옥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걸로 보면, 그의 태생적인 친일본능이 얼마나 오래 세월 지속되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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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기획 제작 등: PD 김세호,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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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기,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 당시의 제도와 문화를 생동감있게 풀어내고 오늘 우리의 모습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추적합니다.

‘내역사’ 시즌2 – 1회 미식가 “식목일의 기원”

출연 : 이순우, 김영환, 강동민

연출 : 임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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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가 봄개편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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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자. 해태상(해치상)이 원래의 위치인 광화문 앞에서 경복궁 안쪽 구석에 옮겨져 거적때기에 둘러쌓인채 방치되고 있다는 기사다.

“오백년 옛 대궐 경복궁 앞에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해태(해치)를 보았으리라… 무슨 죄 있어 다리를 동이고 허리를 매어… 궁궐 한편 모퉁이에 결박 당하고 거적 쓴 채로 참혹하게 드러누웠더라.” 광화문 월대 앞에서 경복궁을 지키고 서있던 해치가 궁궐 한편에 쳐박혀있는 몰골을 전한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 기사다.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광화문 앞의 해치가 철거·이전된 것이다. 거적때기에 쌓여 궁궐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초라한 몰골은 식민지 조선의 딱한 처지를 웅변해주었다.

궁궐의 입출구를 구분짓는 월대 앞에 놓인 해치는 일종의 하마비 역할도 했다. 지금부터 궁궐권역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였다. “1870년(고종 7년)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로 삼았고…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 말을 탈 수 없다”(<고종실록>)는 기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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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발표한 광화문 앞 공간 복원 계획도. 월대와 해치를 복원한 역사광장과 시민들의 공간인 시민광장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공간 사이에 ㄷ 형태의 도로가 예정돼있다.

1924년 10월 조선총독부 정동 분실에서 일어난 불의 원인이 ‘해치상을 치워버린 탓’이라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찜찜했던지 일제는 쳐박아두었던 해치상을 조선총독부(중앙청) 뜰 앞에 옮겨놓았다. 지금 광화문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로 서있는 옹색한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 때 재이전한 것이다. 물론 제자리가 아니다. 광화문 해치는 흔히 ‘불(火)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궁문 앞에 세워놓은 흰돌의 물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규경(1788~?)이 “해치는 화수(火獸), 즉 불을 먹고 사는 짐승”(<오주연문장전산고>)이라 한데서 유래한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해치는 또 예부터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수(神獸)로 알려져 왔다. 후한의 왕충(27~97?)은 “해치는 옥사를 다스릴 때 죄가 있는 사람을 골라 들이받는 속성이 있다”(<논형>)고 기록했다.

역시 후한의 양부가 지은 <이물지>는 “외뿔 짐승인 해치는 싸움이 일어날 때 부정직한 자를 들이받고, 바르지 않는 자를 깨물었다”면서 “전국시대 초나라 법관들은 해치관을 법복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후 동양에서 법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해치관(冠)이나 해치문양의 관복을 의무적으로 입었다.

요즘의 검찰·감사원에 해당되는 조선시대 사헌부 관리들은 마찬가지였다.

“1796년(정조 20년)사헌부 지평(정 5품)이 해치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직됐다”(<정조실록>)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다.

해치를 궁궐 앞에 세워둔 까닭은 자명하다. 출퇴근하는 관리들은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 속 먼지를 털어내고 공명정대한 정사를 다짐하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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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07년 사이 촬영된 광화문 앞. 해치상과 월대가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10일 맺은 광화문 역사광장 조성 업무협약의 주요내용이 바로 ‘광화문 앞 월대와 해치상의 제자리 찾기’이다.

물론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의 언급처럼 역사광장(월대·해치)과 시민광장이 ㄷ자형 도로로 양분되는 등의 새로운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광화문 앞 공간을 반드시 광장으로 꾸며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나온다. 깊이있는 토론과 의견 수렴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책이라면 시대마다, 정권마다 제각각의 복원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두 일리있는 지적이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월대와 해치는 제자리에서 제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해치의 꼬리를 매만지면서 스스로 마음을 단속하고 시비곡직을 다짐하는 통과의례가 요즘처럼 절실한 때가 또 어디 있는가.<참고자료>

이순우, <광화문 육조 앞길-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하늘재, 2012
<테라우치, 조선의 꽃이 되다>, 하늘재, 2004
김언종, ‘해태고’, <한국한문학연구> 제42권 42호, 한국한문학회, 2008
이성준, ‘경복궁 근정전 월대 난간석주상 연구’, <미술사학연구> 272호, 한국미술사학회, 2011

<2018-04-12> 경향신문

☞기사원문: [여적]광화문 해치의 제자리찾기

목, 2018/04/1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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