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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58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2점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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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58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2점 보내와

익명 (미확인) | 목, 2017/10/19- 17:47

심정섭 지도위원 제58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2점 보내와
8월 22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8차 자료기증을 했다. 이번기증자료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저축예금통장, 보험료영수증, 보증서 등이다.

기타무라 메구미씨, 제4차 일본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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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9월 8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조선총독부 교통국에서 발행한 기관차 기념품, 금강산 화보 등 총 5점이다. 기증자들은 소장자료를 기증하면서 이 자료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생산한 자료이기 때문에 원래 자리로 가야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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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의 역사를 복원하고 역사 자원을 활용한 '천년의 숨결' 프로젝트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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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읍성 및 향교를 복원하여 역사문화 자원 보존 및 관광 활성화
토, 2026/06/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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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전병택 구미지회장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許亨植, 1909~1942)이 경호원 왕조경과 진운상을 데리고 소부대 현지지도를 다니던 중, 1942년 8월 3일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계곡에서 일제 관동군과 괴뢰국인 만주군에 의해 추격을 받아 교전중 33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1915년 음력 3월 장군이 6살 때 가문 전체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난 지 27년 만이다. 한편 허형식 장군보다 8살 어린,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출신 박정희(1917~1979)는 이 무렵 25살로 일본군이 세운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여 나중 일본군 장교가 된다. 박정희는 왜왕에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며 제국주의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지 77년 만에 추모식을 거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김도화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손성진 임영태.

3·1운동 100년을 맞아 식민과 분단, 독재와 이념의 장벽으로 가려진 대표적인 남한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경북 구미 출신. 13도 연합 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의 종질이자 이육사의 외당숙) 전적지 등 북만주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여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기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관한 역사평화기행의 핵심인 허형식 장군의 77주년 초모식을 중국 현지에서 고향 선산 쌀과 고국의 소주로 젯밥과 제주를 차리고 합동으로 절을 올리며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허형식 장군 유적지 답사팀은 하얼빈 공항에 도착한 후 항러빈 춘천 빈관에서 1박 후 하얼빈 시내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일제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실험을 자행한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비밀부대인 731부대 유적지를 답사한 후 동북항일연군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해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허형식 장군은 1909년 11월 18일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시산 허필(許苾 1865~1932.건국포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도 연합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 대한민국장)의 5촌조카이기도 하다. 허 장군은 만주에서 이희산(李熙山) 혹은 이삼룡(李三龍)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항일영웅열사 명단에는 허형식 장군과 동북항일연군 연합지휘부 참모장을 지낸 이홍광 장군, 동북항일연군 7군 군장 이학복장군 그리고 중국에서 수차례 영화로도 나온 바 있는 무단장에서 1천여 명의 일본군·만주군과 싸우다 총알이 떨어지자 일본군에 잡히느니 강으로 투신하여 죽음을 택한 8녀 투강의 주인공 동북항일연군 2로군 제5군 부녀단 이봉선, 안순복이 조선인으로서 항일영웅열사에 포함되었다.

제례를 진행한 김병길 어르신은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허형식 장군이 왜 부모
형제와 함께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까지 와서 이렇게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야 되었는지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는 우리가 상갓집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내 자식, 내 딸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병길 회원은 “왜 그런가? 주권이 없어 그랬다. 민족의 아픔, 민족의 설움을 허형식 장군이 먼저 깨닫고 느끼고 여기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서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왜놈들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냐?”며 “우리 적은 왜놈이다. 바로 일본제국주의자 후예들이 지금도 얼쩡거리고 있다. 참으로 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김병길 회원은 “우리 모두 이 역사적 사실을 명심하고 민족 자긍심을 강화해서 진짜 동방에서 떳떳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허형식 장군을 늦게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 하며 남은여생 동안 허형식 장군의 뜻을 받들어 살겠다”고 강조했다.

 


1939년 허형식 장군은 31세 젊은 나이로 조상지 군장의 뒤를 이어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에 올랐다. 중국인 조상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중국에서는 주하현을 상지시로 개칭하고 상지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로타리에 조상지 장군의 대형 기마동상을 세워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고 있다. 반면에 허형식 장군의 고향 경북 구미시는 물론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념비조차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역사를 망각한 나라, 영웅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한 일본제품 불매운동, 항일결의문 채택 등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구호가 남발하지만 이러한 과거 항일영웅에 대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널리 선양하는 일이야말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진정한 항일운동이며 일본을 뛰어넘고 이기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 장군이 유력하다고 학계에서 주장한다.
“허형식 장군이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이육사의 외삼촌 허발선생의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창 허발은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의 큰오빠이다.
허발, 허길, 일헌 허규는 남매 사이며 허길에게 허형식은 사촌동생으로 이육사의 외당숙이 되는 셈이다. 1930년대 말 이육사는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약한 외삼촌 허규와 함께 허형식 장군을 만주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금, 2019/09/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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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할아버지, 증손녀 올가예요. 겨우 한 줄 썼는데, 눈물부터 나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수용소. 평생을 대한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애쓰신 할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추운 곳에 가둬놓고 언 땅을 파게 했을까요. 2012년 KBS 역사스페셜 다큐를 만들 때, 제가 그곳에 갔어요. 문서에는 거기 병원 근처에 할아버지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아니었어요.
솔제니친도 갇혀 있었다는 그 수용소에는 무덤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대요. 강제노역과 영양실조로 쓰러진 수용자들이 눈을 감으면, 포크레인 같은 기계로 땅을 파서 시신을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대요.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깊이 묻지도 않아서 조금만 땅을 헤쳐도 유골이 산더미처럼 드러났대요. 그래서 옛날부터 그 동네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뼈를 가지고 놀았다고 그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이리나라는 할머니가 증언해 주셨어요.
할아버지의 조국에 갔어요. 국립현충원이란 곳에도 갔어요.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모신 국가묘지래요. 거기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어요. 제가 직원분들에게 애원했어요. 제발 우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서 이곳에 모셔달라고요. 그냥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빈말이라도 노력해보겠다고 답해줬으면 덜 야속했을 텐데….
그 수용소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갇혔대요. 자기 조상이 거기 묻혀있다고, 후손들이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대요. 일본 정부는 알았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유해를 가려내 자기 나라로 가져갔대요. 서울 가기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벌써 몇 년 전에 폴란드도 그렇게 했고, 그리스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그렇게 못해요? 저더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오던가, 할아버지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얘기해 달래요. 이건 나라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할아버지가 되찾으려 한 나라잖아요.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의 외손녀예요. 할머니는 3·1운동 몇 년 전 서울 사직동 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나셨어요. 돌아가시던 순간까지도 울면서 집에 너무 가고 싶어 하셨어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셨어요. 서울 집이며 동네 풍경을 그려주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릴 적에 엄마가 해주신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아빠 손을 잡고 구경 다닌 곳을 가보고 싶다고, 흐느끼셨어요.
스탈린 때는 이런 말이 있었대요.“벽에도 귀가 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어른들이 잘 때 헝겊으로 입을 막고 잤대요. 잠꼬대라도 하다가 스탈린을 원망하는 얘기가 새나가면 아이들까지 죽을 수가 있으니까요. 제가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직접 들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왜 이곳으로 끌려오셨는지,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말도 못 꺼내고 살았어요. 솔직히 지금도 좀 무서워요.
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엄마 아빠는 종일 일하러 나가시고. 우리 고려인들 많이 힘들었어요. 뼈에 사무치셨던지, 아니면 어린것이 못 알아들을 거라고 여기셨던지, 저를 다독이면서 혼잣말을 하셨어요. 그 얘기들이 너무 낯설고 신기했어요. 할머니는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오셨나?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닌가? “스카스카”를 해주시는 줄 알았어요.
“스카스카”는 동화라는 뜻의 소련말이에요. 저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게 저는 김경천 할아버지를 알
게 됐어요. 할머니 덕분에요.
할아버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어요. 그 모진 세월, “백마를 타고 일제 침략자들을 무찌르던 김경천 장군”의 전설이 동포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을까요. 2005년 할아버지의 일기가 발견됐어요.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피눈물로 쓰신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었어요. 거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동서양에 전쟁이 전개되면 우리는 중국의 동북 3성과 시베리아에 자연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백만의 우리 민족으로 세계에 대해서는 정의와 인도로, 일본에 대해서는 능히 혈전을 벌여 열강의 호의를 얻을 것이며, 독립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망명하기 직전인 1919년 3월 1일에 쓴 일기였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멀리 내다보셨다니! 할아버지 머릿속에는 진정한 자주독립의 경로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의 설움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이 독립전쟁으로 뭉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고,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도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로 독립군을 키우러 가셨어요. 무모한 짓이라고 손을 젓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호통을 치셨어요.

 

저 죄수복을 입은 청년이 무슨 죄가 있는가? 일본아, 네 죄에는 무슨 옷을 입겠느냐. 저 청년들은 내가 사랑하는 민족 중에 최고로 용감한 사람이다. 모두 20세가 되나 못 되나 하다. 저들은 동포라는 것을 알았다. 민족이란 것을 안 사람이다. 인종이 생긴 그 동시에 만물보다 더 먼저이며 최고로 아름다운 자유라 하는 것이 있음을 아는 자들이다.
호의호식하는 자칭 유지, 신사들아, 모두 어느 구석에 가서 숨었느냐. 외국유학도 쓸데없고 나이도 소용없다.…… 우리나라 신사나 청년이 두 눈이 멀거니 앉아 밥이나 먹고 있음은 죄인이다. 조국의 부름을 모르는가! 아아,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적이지만, 그대들은 모르는 체하는 적이다.

 

할아버지의 조국에 공부하러 왔어요. 경복궁에 처음 가봤어요. 어떤 분이 근처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거기가 이회영 선생님 기념관이었어요. 할아버지가 교관을 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분이요.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기념관 분들이 저에게 누구냐고 말을 걸었어요. 김경천? 후손들이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 찾는 게 아닌 줄로만 알고 나왔어요. 그때까지 저는 이회영 선생님을 몰랐으니까요.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1년쯤 지나, 이회영 선생님 손자인 이종찬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게 소망이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할아버지 유해를 찾고 싶다고, 할아버지 집터에 표지석을 놓고 싶다고, 백마 탄 할아버지 동상을 조국에 세워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할머니에게 증조할머니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유정화(柳貞和) 증조할머니.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대요. 할아버지 댁에 재산이 많았는데, 그걸로 독립운동하는 분들 돕고. 옥살이까지 하셨대요. 할아버지가 망명한 뒤, 일본육사 후배들이 만든 <전의(全誼)>라는 회보에 할머니 이야기가 실려 있대요. 어느 분이 알려주셨어요.

 

김 부인은 수년 이래 부채와 생활난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작년 겨울 소유하고 있던 가옥을 매각해 부채를 정리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김 부인은 지 부인의 비참한 상황을 동정해 가옥 매각 때 일금 100원을 지 부인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그 의기 장하다고 할 만하다. <전의(全誼)> 1923년 6월 24일자

 

이 글에서 “김 부인”이 증조할머니이고, “지 부인”은 할아버지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이자 신흥무관학교에서 함께 교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부인이에요. 신흥무관학교에서는, 할아버지와 지청천 장군 그리고 동천(東天)이란 별호를 쓴 신팔균(申八均) 선생님 세 분을 가리켜 “ 삼천(三天)”이라고 불렀대요. 신 선생님은 고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申櫶) 어른의 손자로,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오셨대요. 할아버지들이 독립군 동지니까, 할머니들도 독립운동 동지였던 거예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늘 말씀하셨어요. 아주 먼 곳에 우리 고향이 있단다. 그곳은 참 좋은 곳이란다. 우리는 지금 갈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참아야 한단다. 우리가 여기서 고생을 해야 고향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잘살 수 있단다. 그게 무슨 뜻인지, 어릴 적에는 몰랐어요. 그러나 지금은 알아요. 할머니의 혼잣말은 할아버지가 맏딸에게 들려주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할아버지께 고백할 게 있어요. 어쩌면 할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것만 같아 두려워요. 저는 할아버지 조국에 와서 깜짝 놀랐어요. 어떤 나라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조국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동료들을 한동안 잊고 살았대요. 할아버지는 그럴 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일기에 이렇게 쓰셨나요? “아, 춥고 외로운 이 고독한 군대의 장졸들을 누가 위로할까. 이 장졸들의 심정을 훗날 누가 동포들에게 알려줄까.”
자기 뿌리가 뭔지 잊으면 어떡해요. 여기는 자본주의라서 그런지, 출세한 사람들이 다 돈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익만 바라보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럼 나라 망하잖아요. 할아버지는 날마다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가족도 잊어버리고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그 정신을 정말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그 일을 도울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께서 노력하고 계세요. 대통령 직속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100인 위원회도 생겼어요. 저도 100명 중 1명으로 참여하게 됐고요. 정말 고맙고, 기뻤어요. 그런데, 저는 회의에 가면 울음부터 나와요. 어떤 분들은 저더러 왜 그리 서럽게 우느냐고 물어요.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우리 고려인들이 100년 가까이 어떻게 살았는데…. 귀 막고 입 막고….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끌려가셨어요. 몇 년 만에 풀려나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가족 곁으로 돌아오셨지만, 두 달 만에 또 잡혀가셨어요. 모스크바감옥에 갇혔다가 시베리아수용소에서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돌아가셨어요. 저는 할아버지의 조국에 와서 결혼을 했어요. 얼마 전에 딸도 낳았어요.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의 첫 번째 후손입니다. 할아버지께 알려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의 핏줄이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왔다고요.
증손녀 김올가 올림(<100년 편지> 334호, 2019.4.9.)

금, 2019/09/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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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73]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이순우 책임연구원

 

2020년 정초 무렵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옛 남면사무소) 앞에 일제 때 만들어진 비석 하나가 남아 있다는 얘길 듣고 서둘러 그곳을 탐방하러 길을 나선 적이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곳은 분명 ‘남면(南面)’인데 그 위치가 정작 양주시의 제일 북쪽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봤더니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으나 해방 이후 1945년 11월 3일에 이르러 군정청 법령 제22호 「북위 38도 이남에 연접한 군촌면읍시(郡村面邑市)의 관할구역 임시이전」에 따라 ‘파주군 남면’으로 조정되었다가 다시 1946년 2월 5일 ‘양주군’ 관할로 이관 처리된 내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어디까지나 연천군 남면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에 남아 있는 ‘히라누마 젠쵸(윤선장) 송덕비’의 모습이다. 1940년 11월에 건립된 이 비석은 신산체육공원과 남면사무소의 구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친일잔재논란과 관련하여 2019년에 철거되어 별도로 보관중인 상태이다.

 

아무튼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의 창고 옆쪽에서 바닥에 뉘어놓은 옛 비석 하나를 살펴보았더니 거기에는 “학무위원 겸 면협의회원 히라누마 젠쵸 송덕비(學務委員兼面協議會員 平沼善長頌德碑)”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이를 단서로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이 이름은 윤선장(尹善長, 1879~?)의 창씨명이며, 그가 연천군 남면 상수리 구장(1937.6)을 지냈다거나 양주세무서 관내 조선주 제조업자 총회에서 탁주 1등상을 수상(1937.10)했다거나 연천군 남면 면협의회원(1939.5)의 당선자라거나 하는 등의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비석의 뒷면에도 별도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을 간추려보니 대략 이러하다.

옥전(신사)을 지어/ 숭신의 기풍을 일으키고/ 쌀과 재물을 내어/ 이웃을 돌보며 흉년을 구제하네/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익에 봉사하여/ 한 고을에서 본보기가 되었으니/ 그 공적을 간략히 적어/ 부족하나마 송덕을 표하노라/ 연천군 남면 일동/ 히라누마 아마네가 적고/ 소화 15년(1940년) 11월에 이를 세우다(營造玉殿 興起崇神 捐出米財 保隣救歉 滅私奉公 垂範一鄕略記功蹟 聊表頌德 / 漣川郡南面一同 / 平沼周識/ 昭和十五年十一月 建之)

 

여기에 나오는 옥전(玉殿)은 여러 가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숭신(崇神)이라는 구절과 맞물려 생각건대 이는 필시 일제가 각 고을마다 설립을 강요했던 ‘신사(神祠)’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 시절 ‘경신숭조(敬神崇祖)’라거나 ‘숭신경조(崇神敬祖)’라거나 하는 것은 널리 통용되던 관제용어(官製用語)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그가 신사의 건립과 관련하여 상당한 비용을 부담했다는 뜻으로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이 비문을 정리한 이로 표시된 히라누마 아마네(平沼周)는 1933년 이후 연천군 남면 면장(面長)을 지낸 윤태혁(尹太赫, 1896~1959)의 창씨명으로 확인되는데, 그의 이름은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휘보(彙報)」의 ‘신사설립허가(神祠設立許可)’ 관련 항목에서도 포착되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남면(京畿道 漣川郡 南面)에 신사 설립의 건(件) 윤태혁(尹太赫) 외 11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본년 11월 28일부로 이를 허가함.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12월 3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연천군 남면 신명신사’의 신사설립허가내역이다. 여길 보면 연천군 지역의 경우 관인면, 삭녕면, 영근면, 중면, 미산면 등이 동시에 신사설립허가(대표 원출자는 그 지역의 면장)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1면 1신사’ 조영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황기2600년’에다 ‘황태자 탄생일’에 맞춰 경기도 연천군내 11개면 신사의 진좌제(鎭座祭)가 일괄하여 거행되었다는 소식이 실려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와 고스란히 겹치는 때에 나온 <매일신보> 1940년 12월 24일자에는 「연천군(漣川郡) 일면일신사 완성(一面一神祠 完成), 23일, 일제 진좌제 집행(一齊 鎭座祭 執行)」 제하의 기사가 수록된 것이 퍼뜩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산와 군수’는 1939년 1월에서 1942년 6월 사이에 연천군수를 지낸 최탁(崔卓, 1892~?)을 가리키며, 그의 창씨명이 바로 산와 타쿠(三和卓)였던 것이다.

 

성전하(聖戰下)에 맞이한 황기(皇紀) 2600년의 심원(深遠)한 의의(意義)를 자자손손에게까지 전하고자 연천군 8만 군민이 계획하여온 군내 11개면 신사 어조영공사(神祠 御造營工事)는 산와 군수(三和郡守)의 열의와 군민의 적성(赤誠)을 다한 근로작업과 소에 나오지(副直司) 씨의 헌신적인 공사봉사로 이즘 전부 준공되었으므로 23일 황태자전하 어탄신(皇太子殿下 御誕辰)의 가일(佳日)을 기(期)하여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부터 어영대(御靈代)를 봉천(奉遷)하와 전신사(全神祠)에서 일제히 진좌제(鎭座祭)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산와 군수는 여좌(如左)히 말하였다.
“각 면민의 간절한 열망에 의하여 일면일신사(一面一神祠) 어조영의 계획은 작년말경부터 시작되어 꼭 1개년이 되었는데 기간 면민의 눈물겨운 봉사와 소에(副) 씨의 희생적 공사봉사로 드디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특히 작년의 한해(旱害)로 인하여 식량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면민이 신사에 대하여 진지한 봉사를 한 것은 실로 그들이 얼마나 경신관념(敬神觀念)이 불타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깊이 감사한다.”

 

이 기사는 연천군 남면에 만들어진 신사라는 것도 사실은 ‘1면 1신사’ 조영계획에 따라 연천군 전역에서 일괄 조성된 결과물의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패망기에 이르러 이처럼 면 단위의 지역까지 소규모 신사들이 광범위하고 촘촘하게 설립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땅에 건립된 각종 신사들의 연혁을 살펴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신사들이 두루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에는 일본 최초의 해외신사(海外神社)로 일컬어지는 용두산신사(1678년)를 비롯하여 원산신사(1882년), 인천신사(1890년), 경성신사(1898년), 진남포신사(1900년), 군산신사(1902년), 용천신사(1905년), 대구신사(1906년), 대전신사(1907년), 삼랑진신사(1907년), 성진신사(1909년), 마산신사(1909년), 송도신사(1910년)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이 제정되면서 신사의 창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엄격한 조건에 따라 이뤄지도록 바뀌게 된다. 특히 부칙규정에 따라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기존의 신사들도 모두 일괄하여 이 절차에 따라 재창립되었다.
이를테면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신사의 제도적인 창립절차가 비로소 적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1917년 3월 22일에는 별도의 조선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奉祀)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신사(神社, 진쟈)와 신사(神祠, 신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로 간주되었고, 조선총독에 의한 허가(許可)에 있어서도 각각 창립(創立)과 설립(設立)의 형태로 다르게 처리되었다.
그리고 신사(神社)의 명칭은 대개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신사(神祠)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명신사(神明神祠, 신메이신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별칭(別稱)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일제 패망기에 접어들수록 신설되는 신메이신사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곁들여 ‘메이지천황(明治天皇)’도 함께 제신으로 설정되는 사례들이 급증하는 현상도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의 하나이다

신사(神社)의 창립 요건과 신사(神祠)의 설립 요건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 (1964)에 수록된 조선 관련 신궁(神宮), 신사(神社), 신사(神祠) 집계표이다. 관폐사는 조선신궁과 부여신궁을 말하며, 국폐사는 경성신사(1936), 용두산신사(1936), 대구신사(1937), 평양신사(1937), 전주신사(1939), 함흥신사(1939), 광주신사(1941), 강원신사(1941) 등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 존재했던 신사의 총 숫자에 대해서는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지은 <조선종전의 기록 ― 미소양군의 진주와 일본인의 인양(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1964), 108쪽에 수록된 것을 가장 유용한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조선신궁 권궁사(朝鮮神宮 權宮司)를 지낸 타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소장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부여신궁(扶餘神宮)을 포함하여 조선 전체의 각종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합쳐 모두 1,141개소(1945년 6월말 현재)가 존재했던 것으로 적고 있는데, 이 당시 부읍면(府邑面)의 총수(總數)가 2,346개소였으므로 얼추 잡아 면(面) 단위로 보면 하나 건너 한 곳마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가 두루 포진했다는 말이 된다. 이를 다시 지역별로 살펴보면, 부읍면의 숫자에 대비하여 전라남도(100%), 황해도(87.7%), 평안북도(80.8%), 충청북도(69.8%), 경기도(69.2%)의 순서로 집약도가 유난히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수록되는 ‘신사 창립 허가’와 ‘신사 설립 허가’의 내역을 전부 취합하여 이를 도표로 만들어 그 추이를 살펴보면, 이러한 숫자라는 것도 대개 1930년대 중반 이후에 집중적으로 늘어난 것이라는 사실이 포착된다.

 

신사(神社)와 신사(神祠)의 창립, 설립, 폐지 허가에 관한 연도별 추이

(✽)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게재된 내역을 취합하여 정리하였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주면 오관리에 조성된 홍성신사(洪城神祠)의 전경을 담은 엽서자료이다. 입구의 토리이는 1931년 10월에 세워진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대한 신사설립허가는 1923년 10월 25일에 있었던 것이 맞지만, 정작 <조선총독부관보>에는 관련사실이 전혀게재된 바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즈시 미노루 기증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여기에 취합된 자료에 나타난 숫자(즉, 2+80-3+886-16=949개소)와 모리타 요시오의 책(1964)에 수록된 그것(즉, 1,141개소)이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신사 창립과 신사 설립에 관한 허가 사항이 <조선총독부관보>에 100퍼센트 다 게재되는 것이 아니라 누락된 사례들도 제법 존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경기도 지역의 경우에도 <조선총독부관보>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경기도보(京畿道報)>를 통해 ‘신사설립허가’의 내역이 확인된 사례가 무려 14곳이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의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에 정리된 신사 목록을 대조해 본 결과, 여기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3곳 더 포함되어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신사 설립의 건수가 두드러지게 증가세를 나타낸 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전반도(全半島)에 고조되는 경신열(敬神熱), 신사(神祠)의 인가 격증(認可 激增), 작년(昨年)부터 33신사 늘어, 심전개발(心田開發)의 일증좌(一證左)」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정신(日本精神)의 고양(高揚)과 심전개발(心田開發)의 기운(機運)에 사로잡혀 최근 선내 각지(鮮內 各地)에 신사(神社)의 건립이 많아지고 있는데, 수년 전까지는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이 작년9년(1934년)에는 충주신사(忠州神社) 외에 27신사(神祠)의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금년에 들어와 다시 6신사(神祠)가 인가(認可)되고 또한 출원중(出願中)인 것이 14곳에 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것의 특이한 현상으로서 종래 그 출원자는 전부 내지인(內地人)뿐이었으나 최근에는 건설발기인(建設發起人) 가운데 조선인 유지(朝鮮人 有志)의 이름이 동반되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조선인 방면의 경신열(敬神熱)이 고조되어왔다는 증좌(證左)로서 총독부도 가능한 한 인가의 방침(方針)을 취하고 있다

 

<조선신문> 1935년 4월 6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이른바 ‘심전개발(心田開發)’과 관련하여 신사의 인가 건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담겨 있다.

 

<매일신보> 1940년 12월 21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의 ‘신명신사’ 진좌제 모습이다. 신사(神社) 규모 이상의 것은 제법 사진자료들이 남아 있으나, 면(面) 단위에서 조성된 신사(神祠)는 이러한 모습이나마 제대로 관련자료가 남아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나오는 ‘심전개발’은 우가키 총독(宇垣 總督)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일종의 정신계몽운동이었다. 1936년 1월 15일에 경성부민관 중강당에서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심전개발관민간담회’의 결과를 담아 최종 공표한 내용에 따르면, 심전개발은 “(1) 국체관념(國體觀念)을 명징(明徵)케 할 것, (2)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사상(思想) 및 신앙심(信仰心)을 함양(涵養)할 것, (3) 보은(報恩), 감사(感謝), 자립(自立)의 정신(精神)을 양성(養成)할 것”을 3대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때 이를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로 크게 부각된 것이 바로 각지에 신사 또는 사원(寺院)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정신(日本精神)을 고취하는 동시에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자력갱생(自力更生)에 심적 조성(心的 助成)을 이루게 하려고” 했으며, 특히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니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니 하는 표현이 본격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사설립허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1939년 이후의 일인데, 이 당시의상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3월 29일자에 수록된 「1군 1신사(一郡 一神社)를 목표(目標)로 강원(江原)서 건립을 계획, 명(明) 14년도부터 동(同) 20년까지, 1면 1신사(一面 一神祠)도 촉진(促進)」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춘천(春川)] 강원도내에는 현재 신사(神社)가 건립되어 있는 곳이 춘천, 강릉 두 곳뿐이므로 도당국에서는 소화 14년도(1939년도)부터 동 20년(1945년)까지 1군 1신사주의로 신사를 세우고자 계획중인데 14년도에는 우선 원주와 철원 2개 군에 건립하기로 내정되었다 한다. 그리고 명년이 마침 황기(皇紀) 2600년에 해당하므로 각군(各郡)에서 그의 기념사업으로 신사를 건립하겠다는 희망이 상당히 있을 모양인데 신사 1사를 세우자면 약 3만 원의 경비가 들게 되므로 급속한 실현은 보기 어렵게 될 터이라 한다. 그리고 신사(神祠)는 현재 30개소가량 되는 바 1면 1신사를 계획한 일도 있었으나 경비관계로 역시 속히 실현할 수 없으므로 도(道)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각군에서 분발하여 1면 1신사를 실현하기 바란다 하며 철원(鐵原) 같은 곳에서는 벌써 황기 2600년 기념사업으로 관하 각면(各面)에 1신사를 건립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1940년은 이른바 ‘황기 2600년(기원 2600년; 초대 천황의 즉위를 기점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되는 해가 되므로 이를 기념하는 사업으로 곳곳에서 ‘1면 1신사’의 형태로 신사의 건립을 추진하는 통에 자연히 허가건수가 급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흐름은 그 이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이어졌는데, <매일신보> 1942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경신사상(敬神思想)을 발양(發揚), 경기도(京畿道)의 일면일사(一面一祠) 완성불원(完成不遠)」 제하의 기사는 경기도 일대에서 벌어진 신사 설립의 추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유구 3천 년을 꿰뚫고 내려오는 경신숭조(敬神崇祖)의 황국정신을 한층 빛나게 하여 성전관철에 3백만 도민이 돌진케 하는 도움이 되게 하려고 경기도에서는 일찍부터 1면(面) 1사(祠)를 제창하고 황기 2천 6백년 기념사업으로 계속하여온 이래 도내 일 면민들은 앞을 다투어 정재를 모두어서 신사(神祠)어조영에 총후의 적성을 바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소화 15년(1940년) 4월 이래로 금년 4월 11일 현재까지의 만 2개년 사이에 73개면에서 새로이 면진호(面鎭護)의 신사 어조영을 완성시켜 현재 도내의 총신사는 111사에 이르렀다. 그중 수원군(水原郡)에는 15사, 연천군(漣川郡)에는 11사, 김포군(金浦郡)에는 8사, 시흥군(始興郡)에는 6사를 각각 어조영하여 1면 1사를 벌써 완성시켰다. 그런데 이 많은 신사에 봉사할 신직(神職)이 부족하여 경기도에서는 금년도에 3천 원의 예산을 세워 각 관공립학교의 교원, 군관리, 경찰관리와 및 신사의 숭경자 총대(總代) 중에서 희망하는 자를 선발해서 황전강구소(皇典講九所) 조선분소에 의뢰하여 신직의 봉무를 수강케 하기로 되었다.

 

(좌) 이른바 ‘국민정신작흥운동’이라는 명분 아래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 이세신궁의 내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쓴 이러한 신궁대마(神宮大麻, 진구타이마)가 광범위하게 배포되어 이를 카미다나(神棚)에 봉안하도록 강요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우) 조선신기학회(朝鮮神祇學會)가 펴낸 <대마의 제사방법(大麻の 祀り方)>(1938)에 수록된 ‘대마봉안 표준도(大麻奉安 標準圖)’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이를 보관하는 카미다나(神棚)의 형태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와 아울러 국민정신을 작흥(作興)하고 경신숭조의 관념을 철저히 하기 위해 집집마다 신궁대마(神宮大麻; 신궁에서 배포하는 일종의 종이부적)를 봉안토록 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권장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실제로 대륙신도연맹에서 펴낸 <대륙신사대관> (1941), 176쪽에 수록된 신궁대마의 반포(頒布)에 관한 통계 추이를 살펴보면, 1937, 8년도의 시기에 이르러 급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궁대마의 반포 추이

이러한 신궁대마의 반포와 함께 각 가정과 학교, 그리고 관공서와 직장마다 이를 모시는 공간으로서 카미다나(神棚; 찬장이나 선반 형태의 작은 제단)의 설치가 강요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료의 말미에는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더 한층 분발하여 지속적인 대마반포의 확산을 독려하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유달리 눈길을 끈다.

 

…… 이와 같이 반도(半島, 조선)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실로 약진일로(躍進一路)의 호성적(好成績)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화 15년도(1940년도)의 반포수 126만 3,640체(體)는 이를 반도의 총호수(總戶數) 428만 2,754호(戶)에 비하면 약 4분의 1에 지나지 않으므로 대마반포의 진정신(眞精神)인 것으로서 일호일체봉재(一戶一體奉齋)의 견지(見地)에서 본다면, 반도에 있어서 대마반포는 더욱 일층(一層)의 노력과 열의로 대중(大衆)에 대해 그 진정성의 체득(體得)과 봉재배수(奉齋拜受)의 이해를 다시 일단(一段) 깊이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으로 촉발된 비상시국(非常時局)이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신사라는 공간은 무엇보다도 전시체제 아래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정신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일차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임지(任地)를 부여받은 관리들은 으레 부임 첫날에는 제일 먼저 그 지역의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었고, 지원병에 선발되는 경우에도 입영기(入營旗)를 앞세우고 관내 신사에 봉고제(奉告祭)를 올리는 것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

 

<매일신보> 1937년 3월 4일자에는 신임 경기도 광주군수인 전예용이 부임 즉시 ‘광주신사’를 먼저 참배하고 군청에 초등청(初登廳)하였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6월 13일자에 수록된 최초 지원병 합격자인 최덕윤(崔德潤)이 관내 ‘숭인신사(崇仁神祠)’에서 봉고제를 올리는 장면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 수록된 「지원병 경성합격자(志願兵 京城合格者) 봉고제(奉告祭)와 축하회(祝賀會), 12일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초년도 지원병 전형시험에 합격된 202명 중 경성부내에도 영예의 군문을 돌파한 자가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은 기보하였거니와 그 중 부내 제기정(祭基町) 137번지 최덕윤(崔德潤) 군의 영예의 합격을 신전(神前)에 봉고하는 봉고식(奉告式)은 12일 오전 8시부터 부내 숭인신사(崇仁神社)에서 소관 당국대표, 동정회 대표, 생도 대표, 국방부인, 방호단원, 기타 유지 참렬하에 엄숙히 거행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경마장(競馬場) 장내에서 축하회도 개회할 터이라 한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 이르러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따라 침략전쟁의 또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그 이후 전세가 패망을 향해 치닫게 되면 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신사라는 존재의 효용가치를 강조하는 식민통치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매일신보>1943년 8월 6일자에 수록된 「일면인사(一面一祠) 목표로 하여 신사(神社), 신사(神祠)를 어건조(御建造), 경신숭조사상(敬神崇祖思想)을 철저(徹底)히 주입(注入)」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전시체제기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망의 징병제도와 해군지원병제도는 드디어 실시되어 반도청년도 내지동포와 어깨를 겨누고 육지로 바다로 나라의 방패가 되어 마음껏 싸울 때가 다가왔다. 이 얼마나 영광이며 영예인가. 그러나 우리는 영예를 치부하고 감격에만 잠겨서는 안 된다. 부르심을 받자올 청년은 수양연성을 하고 그 가정 또한 훌륭한 군인의 가정이 되어 무적황군으로서 손색이 없는 군인이 많이 나오도록 힘써야 된다. 일본은 신국(神國)이오, 만세일계의 천황폐하가 다스리시는 황국(皇國)이라는 국체의 근본을 경신숭조(敬神崇祖)의 실천에 의하여 체인(體認)하는 것이 훌륭한 군인이 되는 길이다.
총독부에서는 경신사상의 근본인 신사를 일면일사(一面一社)를 목표로 어건조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 2,346 부읍면 가운데에 신사 신사(神社 神祠) 수는 9백 사밖에 안 되는 부와 읍은 전부 어건조를 보았으나 면에는 3분지 2나 경신사상의 중심되는 시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신사의 어조영(御造營) 같은 존엄한 일은 각 지방민의 적성에 의함이 마땅하므로 당국으로서는 직접 어조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지방관민의 경신사상을 앙양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설과 운동을 일으키기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에 걸쳐 횡행했던 이러한 신사들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세세한 사례들까지 다 추적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의 기록>(1964), 111~113쪽에 정리된 내용에서 몇 가지 개략적인 단서를 얻어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승신식(昇神式)’은 신사를 폐쇄하면서 제신(祭神)의 신령(神靈)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의식절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총독부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경성신사(京城神社)는 8월 16일 오후 3시에 승신식(昇神式)을 행하였다. 원산신사(元山神社)는 16일 오후 8시, 강원신사(江原神社)는 17일 오전 5시, 인천신사(仁川神社)는 17일, 대구신사(大邱神社)는 18일 밤, 전북의 이리(裡里), 군산(群山), 남원(南原), 대장(大場), 김제신사(金堤神社)는 18일, 전남의 순천신사(順天神社)는 17일, 완도신사(莞島神社)는 18일, 황해도의 해주신사(海州神社)는 17일, 사리원신사(沙里院神社)도 그 무렵에, 평남의 진남포신사(鎭南浦神社)는 17일, 평북의 강계신사(江界神社)는 19일, 강원도의 장전신사(長箭神祠)는 18일에 각각 승신식을 행하였다. 평북의 만포신사(滿浦神社)는 8월 18일에 승신식을 행하고, 신체(神體)를 소각했다. 마산신사(馬山神社)는 9월 4일, 밀양신사(密陽神社)는 10월 5일에 승신식을 행하였다.
……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진 것으로 15일 밤에 평양신사(平壤神社), 16일에 정주신사(定州神社), 안악신사(安岳神社), 온정리신사(溫井里神祠), 17일에 안주신사(安州神社), 삭주신사(朔州神祠), 영변신사(寧邊神社), 천내리신사(川內里神祠), 재령신사(載寧神祠), 18일에 겸이포신사(兼二浦神社), 선천신사(宣川神社), 박천신사(博川神社), 소록도신사(小鹿島神社), 21일에 용천신사(龍川神社), 22일에 희천신사(熙川神社), 신막신사(新幕神社)도 그맘때였다. 신막신사의 신체는 17일경 씨자총대(氏子總代)의 손에 소각되었다. 8월 말에 안동신사(安東神社, 경상북도), 9월 2일에 강계신사(江界神社), 9월 7일에 해주신사(海州神社) 등이 불태워졌다는 보고가 있었다. 장연신사(長淵神社)는 8월 20일 무렵 재주민(在住民)과 일본군(日本軍)의 손으로 소각했고, 몽금포신사(夢金浦神祠), 태탄신사(苔灘神祠)는 조선인에 의해 부서졌다. 만포신사(滿浦神社)의 봉재전(奉齋殿)은 19일밤 조선인에 의해 소각되었다. (하략)

 

<대륙신사대관> (1941)에 수록된 평양신사(平壤神社, 1937년에 국폐사로 승격)의 전경이다. 이곳은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8월 15일 바로 그날 밤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조선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일제 패망 직후의 시점에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게재된 미군정장관 일반명령 제5호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즉시 폐지될 일제의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치안유지법과 사상범보호관찰령, 사상범예방구금령 등과 더불어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405~406쪽 부분에는 신사처리방침의 개요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도 함께 정리되어 있다

…… 9월 21일, 일반명령 제5호에 따라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폐지되고, 신궁 신사의 재산은 미군정청(米軍政廳)에 접수되었다. 조선신궁(朝鮮神宮)의 회계는 세출(歲出)은 이해 8월 31일, 세입(歲入)은 8월 22일로서 중지되고, 9월 22일에 결산보고서, 자금명세서와 현금을 군정청에 건넸다.
각지(各地)의 신사(神社)도 재산목록, 결산보고서 등을 지방의 군정청에 보고하였고, 토지건물은 군정청에 접수되었다. 11월 2일에 군정청은 각도지사(各道知事)에 대해 “각 신사의 본전은 당국의 허가를 얻어 소각(燒却)해도 지장이 없다. 다만, 신사 소유의 서류 및 재산은 도지사가 보관한다. 소각에 있어서는 관리(官吏)의 입회가 필요하고, 또한 10마일 이내에 주류(駐留)하고 있는 미군 부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통달(通達)했다. 이에 근거하여 지방의 신사 본전은 대다수 일본인(日本人)의 손에 의해 해체, 소각되었다. 신사는 대체로 경승지(景勝地)에 있으므로 이것을 혹은 도서관(圖書館, 춘천신사)으로, 혹은 양로원(養老院, 광주신사)으로, 혹은 학교(學校) 등으로 이용하고 싶다고 하는 요망(要望)이 있었다. (하략)

 

위의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군정장관(軍政長官) 아놀드 소장 명의로 공포된 미군정청 「일반명령 제5호(1945년 9월 21일)」의 앞머리에는 특별법의 폐지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경성일보> 1945년 9월 22일자에 수록된 관련보도에는 일제의 의해 생성된 특별법의 목록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1919년 4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6권 제14집 1024엽)
(ロ) 예방구금규칙(1941년 5월 15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8엽)
(ハ) 치안유지법(1925년 5월 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16엽)
(ニ) 출판규칙(1910년 1월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55엽)
(ホ) 사상범보호관찰규칙(1936년 12월 12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8집 230엽)
(ヘ) 신사에 관한 건(1919년 7월 18일 공포, 조선법령집람 제2권 제6집 188엽)

 

이 내용은 그 이후 「미군정청 법령 제11호」 ‘일반명령 제5호의 개정(1945년 10월 9일)’에 그대로 재반영되었는데, 여기에 즉시 폐지의 대상으로 언급된 특별법이란 것은 일제가 조선인 탄압의 통치수단으로 사용해왔으며 대표적인 악법(惡法)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라든가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이라든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동일한 반열에 ‘신사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기간에 신사라는 존재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끼친 폐해가 그만큼 깊었고 또 고약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저작권자 ⓒ 민족문제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토, 2021/08/2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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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뭉치면 산다

강인수

편집자주 – 지난 7월 하순에 일제강점기 형평사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강상호 지사의 아드님인 강인수 선생(대구 거주)이 북미교섭과 일본의 경제보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못마땅해하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행태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우국시를 보내왔다.


 

대통령이
6. 25 민족상잔을 겪은 우리 민족이
또 다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유럽으로 아세아로 아메리카로
온 세계로 동분서주
평화를 애걸복걸 절규하고 다니는데
왜 대통령을
좌파독재자라고 사정없이 몰아세울까
우리 동포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오순도순 잘 살자 하는 것이
어찌 좌파독재가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일제강점에서 해방한지
벌써 일 갑자년(甲子年)이 쑥 넘어섰는데도
일본은
아직도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다시 군국 제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
우리나라가 망하라고
경제보복으로 재침을 시작하였으니
아!
힘을 합하여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국민이 국론통일로 단결하여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우리 대통령이 아무 일도 못하게
무능한 대통령이니…….
온갖 막말을 주저 없이 내뱉으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반대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좌파독재자라면
대통령이 우리의 국적(國敵)이란 말인가
분하게도
일본 정치인이 무례(無禮)하게
감히 우리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내정간섭을 하고
일부 우리 언론인마저 대(對)일본 기사에서
한국인이 무슨 낯짝으로
일본을 대할 것인가라며 맞장구를 치고
어느 야 정당(政黨)도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사법부의 판결이 잘못된 것처럼
아베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무조건 항복하고 용서를 빌라 하니
아! 이 일을

일제강점은 한국을 개화한 통치가 되고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부로 전락되며
강제징용은 한국 실업자를 구제한
대일본제국의 선행(善行)이 되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자존심은 사라지고
친일정서(親日情緖)에 어울리게
손발이 착착 잘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권력다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을 정적(政敵)으로 망하기만을 원한
다면

동학란 이후 대한제국이 망한 것처럼
또 망할 것이다.
좌파독재니 빨갱이니 하는 이 지긋지긋한
욕설(辱說)은 듣기만 하여도
예나 지금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두려움이다
우리의 참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고
내부의 우리 동포간의 분열이기 때문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하였다.

금, 2019/09/2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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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편집자주 ― 신호근 부산지부 회원이 8월초 편지와 함께 얼굴마사지기 100개를 연구소로 보내주었다. 사연인즉 <민족사랑> 7월호에 실린 결산서에 400만원 적자가 난 것을 보고 회비를 증액했다고 한다. 신 회원의 연구소에 대한 관심과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부산회원 신호근입니다. 저는 평생 과학기술자로 살고 있습니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몇일
전 소식지에 있는 결산서를 보고 운영 적자가 발생된 것을 알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십수년 전, 고향 형님, 선배들과 같이하는 자리에서 당시 친일재산환수 문제로 설왕설래하던 중 제가 민문연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 “야가!! 빨개이 아이가 니는, 니 혼자 저기 가서 먹어라”고 하여 충격받고, 이후 어디에서도 민문연 회원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참고로, 저는 부산에서 선조부터 20대 이상을 거주하고 있습니다.)
외삼촌이 해방 직후 철도청 근무하였는데 학교 동문들 모임에 찬조하였다는 이유로, 보도 연맹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오래전부터 알게 되었고 다른 외삼촌들은 적색분자 연좌죄로 공무원 취직도 안 되고, 군 생활에서도 보직 차별을 겪었다고 들어서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향 형님들 만나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정재계 활동하시다보니 이런 얘기는 피하는 입장인데, 최근 변화가 있더군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듯이 용기를 내어서 연락드리고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민문연 창립과 함께 초기 활동하신 분들의 초심과 같이 운영하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생각은 있으나, 저와 같이 나서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지, 연구소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으며 운영에 어려움이 봉착되면 후원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며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민문연 발전을 기원하며
2019.8.1. 부산에서 신호근 올림

금, 2019/09/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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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가을역사강좌 ‘사료를 읽다, 근대 역사와 만나다’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진행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가을역사강좌가 9월 5일부터 시작하여 10월 22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일 시         강 사   주 제
9.5 .  (목) 서민교 진중일지에 기록된 의병학살
9.10  (화) 권보드래 매일신보로 본 3•1의 밤
9.17.  (화) 예지숙 회고록으로 본 친일여성들의 기억과 망각
9.19.  (목) 이태훈 시사평론을 통해 본 친일의 논리
9.24.  (화) 이임하 전쟁미망인 구술로 본 한국전쟁
9.26.  (목) 이형식 일기와 서한으로 읽는 식민지 조선의 침략자들
10.1.  (화) 이순우 항공사진으로 본 식민지 경성의 공간
10.8.  (화) 최우석 한일관계사료집으로 읽는 독립운동사
10.10.(목) 김민철 일기로 본 일제말기 전시수탈과 강제동원
10.15.(화) 송병권 GHQ문서에 담긴 해방 전후 한반도와 패전 일본
10.17.(목) 전명혁 일제강점기 형사사건과 형사기록물(치안유지법사건)
10.22.(화) 김승은 한일시민의 투쟁으로 공개된 한일회담 외교문서

 

사료를읽다,근대역사와만나다’를 주제로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화, 목요일 7~9시에 진행하는 강좌임에도, 매회 30여 명이 넘는 인원이 꾸준하게 참석하여 역사학습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근현대사의 전개와 그 속에서 부단하게 움직인 한국인의 삶을 포착하고자 하는 강좌여서 내용이 쉽진 않다. 일기·서한집·사진 등 개인의 기록, 진중일지와 명부·신문(訊問)자료·외교문서 등 전시기 기록과 통치사료, 선언문·사료집 등 독립운동 관련 기록, 그 외에 신문·잡지 등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료를 관련 전문연구자들의 해석을 통해 생생한 역사상을 수강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번 가을역사강좌를 통해 회원을 비롯한 일반시민들이 공식 역사 서술로부터 소외되었던 구술, 일기 등 생생한 원자료를 접함으로써 근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식민지 근대’의 모습을 추체험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근현대 한국의 역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19/10/29-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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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개최된 ‘백산무역과 경주최부자의 독립운동-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기획전시와 연계하여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라는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였다. 최부자를 비롯한 한국 전통 명문가와 자산가의 청부(淸富) 정신과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조명함으로써 지도층의 사회적 도덕적 책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고귀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강좌는 9월 21일에서 10월 6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매 강좌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특별강좌와 기획전시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 주었다.
첫 번째 강좌는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상임이사가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의 독립운동〉이란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기획전시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 이외에도 경주 최부자 고택에서 발견 된 많은 유물의 사진 자료들을 확인하고 최부자 댁의 ‘청부 정신’과 최준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백산 안희제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서 국민대학교 김성민 교수가 강의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산 안희제선생의 민족교육운동과 백산상회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3강 경주 최부자 주손이신 최염 선생의 회고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고령의 연세임에도 할아버지 최준 선생에 대한 기억과 최부자 댁의 많은 일화를 들려주었고,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듯 한 추억과 함께 최준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시
간이었다.
그 외에도 4강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 5강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석주 이상룡〉은 채영국 인천개항장연구소 수석연구원, 6강 〈이회영 형제들의 망명과 항일 역정(歷程)〉은 김명섭 단국대학교 연구교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였고, 5회 이상 출석률이 좋았던 13명의 참여자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이 전달되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역사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 시민들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에게 양질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기대해 본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화, 2019/10/29-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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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반일 종족주의』 비판 첫 학술토론회 열어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하는 첫 학술토론회가 지난 9월 30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뉴라이트 학자들이 역사왜곡을 넘어 강제동원 피해자를 모욕하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등 역사부정을 일삼고, 일본 ‘넷우익’과 연계하여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방기할 수 없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제기되었다. 연구소는 『반일 종족주의』의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고자 관련 학계에 긴급토론회를 제안했고 일본군‘위안부’연구회와 함께개최하게 되었다.
연구소에서는 박수현 사무처장이 친일청산 부정론 비판을, 김민철 연구위원이 강제동원 부정론 비판을 발표했고, 일본군‘위안부’연구회에서는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가 일본군‘위안부’ 부정론 비판을, 김창록 경북대 교수가 ‘법을 통해 본 반일종족주의의 오류’를 다루었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승만학당이 유튜브에 개설한 이승만TV를 통해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위기 한국의 근원 : 반일 종족주의”라는 제목의 동영상 강의를 옮겨 놓은 책이다. 7월에 발간된 지 두 달 만에 10쇄를 찍었고 ‘우파 도서 베스트셀러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지적한 강성현 교수는 “유튜브 등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과 기술로 가능해진 파급력”, 이를 통한 “한일 우파 간 역사수정주의 네트워킹”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등 역사부정을 일삼고, 일본 ‘넷우익’과 연계하여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방기할 수 없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제기되었다. 연구소는 『반일 종족주의』의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고자 관련 학계에 긴급토론회를 제안했고 일본군‘위안부’연구회와 함께 개최하게 되었다.
연구소에서는 박수현 사무처장이 친일청산 부정론 비판을, 김민철 연구위원이 강제동원 부정론 비판을 발표했고, 일본군‘위안부’연구회에서는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가 일본군‘위안부’ 부정론 비판을, 김창록 경북대 교수가 ‘법을 통해 본 반일종족주의의 오류’를 다루었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승만학당이 유튜브에 개설한 이승만TV를 통해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위기 한국의 근원 : 반일 종족주의”라는 제목의 동영상 강의를 옮겨 놓은 책이다. 7월에 발간된 지 두 달 만에 10쇄를 찍었고 ‘우파 도서 베스트셀러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지적한 강성현 교수는 “유튜브 등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과 기술로 가능해진 파급력”, 이를 통한 “한일 우파 간 역사수정주의 네트워킹”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강조하고 있는 ‘자유’란 일본군‘위안부’를 할 수 있는 개인영업의 자유란 말인가라고 힐난했다.
무려 2시간의 발표에 이어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좌장을 맡은 종합토론이 1시간 반 가량 진행되었다. 조시현 연구위원, 이나영 중앙대 교수,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가 토론을 이어가는 동안 돌모루홀을 가득 메운 청중은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진지하게 지켜봤다. 긴급토론회 영상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에서, 자료집은 연구소 누리집에서 다운로드 받아볼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화, 2019/10/29-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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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학술회의 열려

10월 4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며, 서울시·강북구·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한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의 취지는 3·1운동 100주년을 정리하면서, 1919년 그때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추구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일본에서 새로 발굴된 〈2·8독립선언 서명자 취조기록〉과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이시카와의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 준비자료 〈대정8년 보안법사건〉을 처음으로 집중 분석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1부와 2부 주제 발표 및 3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개회식에서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 그리고 한완상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의 격려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1부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서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2·8과 3·1 사이-3·1운동 준비과정을 중심으로’를 발제했다. 최 연구원은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2·8독립선언이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고 말하고 재일조선인유학생 송계백 고국 방문 시점의 분석과 민족대표들의 독립청원에서 독립선언으로 변화과정을 정리하여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였다. 이어서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 와세다대학 대학사자료센터 연구원이 ‘취조기록을 통해 본 2·8독립 선언으로의 도정’을 발제했다. 여기서의 취조기록은 2012년 일본에서 발굴된 「東京辯護會·第二東京辯護士會合同圖書館所藏刑事訴訟記錄」 속에 포함된 「출판법위반」 부책(簿冊)이다.
미야모토 연구원은 2·8 독립선언 서명자(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 서춘)를 일본 경찰과 검찰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취조한 내용과 이들의 공판기록 등을 통해 2·8 독립선언 과정을 재구성했다. 신문기록상에는 최팔용이 2·8독립선언의 중심인물이며 선언서 작성에 이광수뿐 아니라 다른 서명자들이 참여했음을 새로이 밝혀냈다.
2부의 주제는 이시카와 자료와 함경도 지역 3·1운동이다. 첫 번째로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은 ‘3·1운동 참여자 처벌과 법 적용’을 발제했다. 이 발제를 통해 이시카와 검사가 115개 사건에서 총 943명을 조사해 보안법, 출판법, 형법의 소요죄와 상해죄, 훼기, 방화죄, 제령 제7호를 적용해 529명을 기소했고 이중 광범위하게 적용된 혐의는 보안법 제7조 치안방해(81건)였음을 밝혔다. 한편 이시카와 검사의 기소자들에 대한 2심 판결 검토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거나 적용 법령의 일부를 취소하고, 기소자의 34.5%가 1심보다 감형되는 사례를 확인함으로써 재판부가 3·1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하고 최대한 중형을 내리려 한 총독부의 방침에 완전히 부응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조한성 연구원의 ‘함남 함흥의 지역 네트워크와 3·1운동’ 발제가 있었다. 조 연구원은 이사카와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함흥군의 지역적 특성과 기독교 학교의 실태를 확인하고 3·1운동 소식을 함흥군에 알렸던 이순영(원산), 강봉우(북간도)의 기독교적 배경과 역할을 살펴보고 함흥군에서 일어난 독립신문·격문 제작 배포운동과 조선인 관리 동맹사직운동의 전개양상을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3·1운동과 관련해 함흥군의 다양한 지역 네트워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명숙 연구원은 ‘함남 이원 3·1운동의 내외적 전파와 전개’를 발제했다. 이 연구원은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이원군 3·1운동의 진행과정과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시위 조직과 주체를 이시카와 자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DB를 활용해 면밀히 분석하였다. 아울러 이원군뿐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독립선언서 유입과 전파과정을 정리하고 각 군의 만세시위가 조직되어가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밝혀놓았다.
3부 종합토론에서는 한상권 전 덕성여대 교수를 좌장으로 하고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윤소영 독립기념관 연구원, 장신 한국교원대 교수,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허영란 울산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 편집부

화, 2019/10/2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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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편집자 주–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자 기사 「망명지사들 가족방문기(5)-김광서 장군편」이다. 자유신문사는 해방 직후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워온 망명지사들 가족을 방문하여 망명지사의 근황을 알아보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김광서 장군 편에서는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연고자들을 인터뷰했다. 이 자료를 통해 해방 직후 망명지사들에 대한 관심과 성원이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해외에 망명한 혁명지사 중 로서아로 망명하여 이래 26년 동안 그곳에 있다는 김광서(일명 金擎天) 씨의 가족을 방문코저 더듬더듬 알 만한 길을 통해 처음 얻은 소식은 이러하였다. 사직골 막바지 전 부기동 아래 무덕문 뒤로 찾으면 아직도 전에 그가 살던 구지(舊址)가 있으리라는 대단 명료치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기자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단서이었다. 무덕문 옛터라는 곳은 전에 일본인중학이던 경성중학 뒤 그리고 일인 관리들의 사택이 있는 동리이었다. 그러나 이러타 할 구지를 찾을 수 없어 그 동리에서 나아서 자라서 지금 70이 넘었다는 사직골 막바지의 고로(古老)를 찾으니 자기가 잘 아노라 하면서 들려준 이 얘기에서큰 광명을 발견하였다. 고로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저기 세집들이 많이 들어앉은 터가 바로 그 김대장댁 터이요. 지금 번지로 사직정 161번지(166번지의 오기-편집자)지요. 기미년 만세를 불렀던 바로 전 해(1918년) 가을에 김대장이 일본서 우리 동리에 나와 사시게 되었지요. 그때는 집 한가운데 연못이 있었고 연못가로 큰사랑, 작은 사랑이 이었는데 날마다같이 굉장히 손님들이 많이 오시더군요. 그때 식구는 김대장 내외분하고 나이 든 누이 한 분과 애기 둘 이렇게 단출합디다. 김대장은 아침저녁 용산군대에 나갈 적에 말을 타고 나가고 들어가는 □□ 우리와는 가까웁게 지내지 않았지만 드나드는 이 말로 보면 대단히 후한 이라고 합디다. 저 세집들이 □□ 수년 전까지도 돌기둥에 ‘김광서’라는 백자기 타원형 문패가 역력히 남아있더니 인제는 그도 저도 없어졌군요.
벌써 그 양반이 아라사로 가신 지도 스물여섯 해나 되니까 짧은 세월도 아니기는 하지요.

하며 노인은 1919년 3월 1일 만세소동이 있은 지 그 후 얼마 후에 과연 김대장의 자취가 사라지고 졸지에 헌병대와 경찰과 형사들이 그 집을 둘러싸서 이 동리 사람들까지 자유로 드나들지 못하였던 당시의 삼엄한 경계상황을 말하여 바깥과의 일체 연락이 끊긴 후 김대장의 가족들이 얼마나 갖은 위협과 곤란 중에 지내왔는가를 지금도 □□□□□□하는 태도로 한숨지었었다. 이같이 노인의 말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김경천 씨가 만세 후 로서아에 망명하였을 당시에 한 동리 사람으로 듣고 본 사실담에 한 토막이었다.

◇ ◇

기자는 다행히도 또 새로운 광명을 잡게 되었으니 위에서 들은 사직골 노인의 이야기가 김경천 씨에 대한 서화(序話)이라면 이것은 그 본실이며 후일담이다. 이 얘기를 들려준 분은 최근 소련으로부터 입국한 홍복린(洪福麟) 씨이다.

내가 김경천 선생을 처음 뵈옵기는 지금부터 25년 전 소련 연해주 따뷔이라는 조그만 어촌이었습니다. 20 당년의 나는 혈기에 날뛰는 한 젊은이였습니다. 말로는 큰 뜻을 품고 고국산천을 떠나 이곳에 나왔으나 아무런 계획도 아무런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사실 쓰라린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때 나를 건져주시며 나를 용기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김경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은 내가 연해주에 들어가던 바로 전 해 가을에 그곳에 오셨던 것입니다. 선생은 일본의 현역 기병대위로 혁명에 뜻을 품고 3.1운동 당시에 국내운동에 참가하다가 일본 관헌의 마수에서 벗어나 연해주로 망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로서아에 입국하신 후 처음에는 그가 일본 군인이었던 관계로 조사 밀정이라는 혐의로 로서아 관헌의 박해를 당하여 적지 않은 고생을 하시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조선의 혁명가임을 확실히 알게 되자 그네들은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되어 당시 10여 만이나 넘는 연해주의 조선인 통솔자로 임명하고 따뷔 어항의 어업조합장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래 선생은 재주 조선인의 사도며 지도자로 활동하시는 한편 그분이 □□□ 뜻하였던 장차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또 조국이 완전 해방된 후 조국을 지킬 국군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중략) 선생이 이미 59세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까지 모발이 흴 때는 아닙니다마는 이역 고투 20여 년에 선생의 모발은 은발같이 하얗게 되시었습니다. 선생의 위업 조국 국군의 선봉이 될 중견군은 지금 크게 자라고 있습니다. 현역 예비역 후비역을 통합하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조국 군인은 10만이나 됩니다. 이번 독소전쟁에 하리보우 싸움에서 위훈을 세워 조선 군인의 성가를 세계에 떨친 것도 선생 휘하의 조선 군인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네들은 반드시 조국을 위해서 큰일을 할 것입니다.
로서아와는 지금까지 너무 □□하고 너무 비밀을 엄수해온 □□이었던 관계로 그간에 정보를 알 길이 없고 따라서 김선생의 소식도 망명 혁명지사 중에서 알려졌던 사실이지요.

홍복린 씨의 얼굴은 흥분으로 홍조를 띄우고 그의 말은 열화를 품은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경천 씨와 다만 한 분의 육친인 손아래 누이 한 분이 현재 서울에 거주한다고 한다. 기자는 그분을 소개하기를 원하였더니 ‘너무 만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만 두셔도 좋지요’ 하였다. 기자는 김선생의 한 분 누님이 가까운 장래에 그리우시던 오빠를 만나시고 길이 행복하시라고 혁명지사 유가족에 대한 경의와 축복을 표하기로 하였다.

수, 2019/10/3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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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김제·군산 답사 진행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답사 프로그램 ‘식민지 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 김제·군산지역 역사기행’이 10월 5일(토) 전북지역에서 55명이 참가하여 진행되었다. 답사 해설은 허수열 충남대학교 교수가 맡아 주었다. 서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40여 명과 전
북지역에서 합류한 후원회원 10명, 그리고 진행스텝으로 임무성, 김혜영, 김무성 상근자가 참여하였다.
3시간여를 버스를 타고 달려 신태인에 도착한 답사단은 점심을 같이 먹고 낙양취수장을 찾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구마모토 농장, 벽골제, 만석보터, 죽산보유허, 해창관문 등을 탐방하며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에 남겨진 깊은 상처를 목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허수열 교수의 생생한 설명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근대 한국이 형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중요한 역사문화적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강의를 통한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역사인식을 제고하였고 아울러 근대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관심과 열린 시야를 갖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구나 허수열 교수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이 좋아졌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고, 근대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연구방향을 제시하여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이번 답사에는 현지의 전북지부 회원들이 함께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고, 김재호 지부장은 참가자 전원에게 새로 도정한 햅쌀을 한 부대씩 선물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19/10/2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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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희’와 ‘철수’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작은 출판사의 꿈 – 출판사 <철수와 영희> 박정훈 대표

 

지난 10월 11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판사 <철수와 영희> 박정훈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월간 <작은책>, <보리 출판사>등에서 10여 년 동안 근무하다 2006년 사회과학 출판사 <철수와 영희>를 차렸다. 2013년에 도서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김삼웅 엮음)을 제작하며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여 지금껏 후원하고 있다. 매달 연구소에 박 대표가 출판한 책을 한 권씩 기증한다.


 

문 :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어떤 책을 만드는 출판사인가요.

답 : <철수와 영희>는 어린이 ‘영희’와 ‘철수’, 어른 ‘철수’와 ‘영희’가 건강하게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움이 되는 책을 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6년 8월 15일 출판사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130여 종의 어린이, 청소년, 성인을 위한 인문, 사회, 생태 도서를 펴냈습니다. 대표 도서로는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최종규 저),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노정임 저),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이철수, 하종강, 배경내, 송승훈 저), <10대와 통하는 동물 권리 이야기>(이유미 저) 등이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어린이, 청소년 도서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에게 사회과학책은 생각을 강화할 뿐 바꾸기는 어려운데 어린이와 청소년은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시기라 책의 영향력이 더욱 큽니다. 그래서 저희 출판사의 청소년 책들은 한국의 청소년들이 꼭 알아야 할 정치, 역사, 사회, 종교, 환경 등의 주제로 여러 시리즈를 펴내고 있으며 모두 국내 저자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을 잘 담기 위해서는 국내 저자가 집필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문 :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요. 2014년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었습니다. 현재 출판계 상황이 어떤가요.

답 :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교과과정과 연계한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의무적으로 한 학기에 책한 권을 읽도록 권장합니다. 성인의 독서량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초중고생의 독서량이 없는 편은 아닙니다.
또 저희 출판사는 도서정가제의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서정가제 이전에 어린이 책 같은 경우 보통 책 가격의 절반을 유통 도매상에서 떼어갔는데요. 이밖에 학부모회 같은 곳에 도서 가격의 몇 프로를 기부하거나, 학교 같은 곳에서 도서를 할인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어요. 소비자는 가능하면 책을 싸게 구매하려고 하죠. 그럼 자연스럽게 업체들 사이에서는 할인율 싸움이 생기는 거예요. 이 할인율 싸움에서 유리한 건 대형출판사입니다. 대형출판사는 책을 많이 찍는 만큼 권당 제작비가 적게 들어요. 작은 출판사가 대형출판사를 가격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서 할인 폭을 규제하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가격 경쟁에서 한층 자유로워져 서적 공급가를 높일 수 있어요. 서점에게 할인하지 않으니 수익률이 높아지고, 공급가를 높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죠. 이렇게 가격보다 책의 질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서 저희 출판사는 오히려 혜택을 보았습니다.

문 : 출판업계에 더 필요한 제도가 있을까요

답 : 아직 도서 유통 도매상에서는 어음을 지급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처음 출판사를 시작 하시는 분들이 도매상과 거래하면 어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공급가를 낮춰서 현금으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렵죠. 각 지역으로 분산된 모든 서점과 직접 거래할 수 없기에 도매상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출판사가 도매상에게 어음을 받으면 저자분들과 기타 거래처에 돈을 지급할 수 없어요. 게다가 어음으로 거래하면 다른 책을 새로 제작하는데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 가치를 두며 책을 만들고 있는데 이 어음 관행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더는 어음을 받지 않습니다. 도매상에게 거래 정지를 당하고 정상화되는 등의 과정을 견디며 중간 협상을 했
습니다.
다른 하나는 도서관을 늘리고 사서를 정규직화 하는 것입니다. 괜찮은 책을 만들면 도서관에 납품
됩니다. 도서관 콘텐츠는 그곳 사서가 고르고요. 특히 어린이 책은 아이가 스스로 책을 사지 않고, 가이드가 필요해서 학교나 도서관에서 선정한 책을 부모가 구매합니다. 도서관 선정 도서의 중요성이 큰데
사서는 비정규직이 많습니다. 사서가 정규직이 되면 양질의 도서를 판단하고 도서관 구성 콘텐츠를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나아집니다. 그러면 출판사는 책의 질로 경쟁하게 되어 도서 질이 높아지고 도서관은 좋은 책을 소장할 수 있어 서로가 좋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문 : 출판사를 운영하며 어려운 상황도 있었나요

답 : 저희 책들이 좌편향 불온도서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13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던 때 조선일보에서 사회면 전체를 할애해 “어린이 역사책도 좌편향 심각”이라는 타이틀로 대문짝만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우리 출판사 책과 함께 9종의 어린이 역사책을 소개하며 어린이 역사서 상당수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폄하했다는 등의 이유로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좌편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판매 부수와 관련한 출판사 인터뷰를 인용해 이렇게 많이 팔린 책들이 좌편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도 이 기사는 큰 반향이 없었어요. 2015년 상황이 더욱 심각했죠.
2015년 문화일보에서 우리 도서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이야기>(이임하 저)에 대한 기사를 실었어요. 이 도서는 부산시 교육청이 지정한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있었는데 문화일보에서 책의 좌편향이 의심된다고 보도하자 청소년 추천도서 선정이 취소되었어요. 그게 문제를 더 촉발해서 문화일보 3회, 조선일보 3회, 동아일보 2회, 중앙일보 1회, 세계일보 1회 등 일주일 동안 수십 건의 기사가 신문과 방송에 나왔습니다.
문화일보는 우리 책이 6.25가 남침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남침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본문에서 세 차례나 나옵니다. 이들 언론은 사실과 다르거나 앞뒤 문맥을 자르고 짜깁기하는 등의 왜곡 보도를 했습니다.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문화일보에서는 저자인 이임화 선생의 교수직에 의문을 품는 기사까지 썼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자를 위협하는 일까지 생길 것 같아 반박 자료를 만들어 한겨레와 경향에 들고 갔어요. 왜곡 보도를 계속하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기사를 내면서 상황이 조금 누그러들었죠.

그해에 다시 ‘스토리케이’라는 보수단체가 우리 출판사 책 3종을 또 좌편향으로 규정하여 역시 조선, 동아, 문화일보 등에 의해 기사화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 책이 좌편향으로 분류된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이 삽화로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TV 등을 통해 전 국민이 보았던 장면이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사진으로 실려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쨌든 언론 보도에 놀란 경기도교육청은 관내 초, 중, 고등학교에 공문을 보내 관련 도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학교별로 폐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실제 관련 도서들이 경기도 관내 도서관에서 폐기되고 빠지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후 도서관 사서들과 독서운동단체의 문제 제기로 다행히 이 공문은 철회되었습니다.

문 : 국정화 교과서 논란 속에서 고비가 많았군요. 이들 논란은 종식되었지만, 현재 출판사에서 ‘국방부
불온서적’ 관련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답 : 2008년 국방부가 23종의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했던 사건이 유명했습니다. 국방부는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라는 이유를 들어 21군데 출판사의 23종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군내 반입을 금지했는데, 이것이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 파문을 불러왔었죠. 결국 해당 도서를 펴낸 출판사 중 11군데 출판사와 11명의 저자가 2008년 10월 국방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는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정태인, 하종강, 이임하 저)가 불온서적 리스트에 들어있었고 소송에 참여했습니다. 이 소송은 1심과 2심에서 “국방부장관의 불온서적 지정이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패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1, 2심까지 패소한 후 4군데의 출판사가 상고를 포기해 대법원까지 상고한 출판사는 이제 7군데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자 한 분이 돌아가셔서 10명의 저자가 상고한 상태입니다. 지난해 대법원에서는 원심법원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서울고등법원으로 사건을 환송했습니다. 기나긴 법정 싸움이 여전히진행 중입니다.

 

문 : 2008년의 불온서적 재판이 여태껏 종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책을 내
고 계시고 출판사는 안정적으로 운영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답 : 같은 지향점을 가진 분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업하여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철수와영희>에서 책 출간 아이템을 정하고 책을 만드는 과정은 끊임없이 편집자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과정입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것을 책을 만드는 과정마다 배우게 됩니다. 신인 저자들을 발굴해 여러가지 기획을 하는 과정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10대와 통하는 성과 사랑>(노을이 저)과 <10대와 통하는 음식이야기>(박성규 저)는 신인 작가인 부부의 책입니다. 노을이 씨가 먼저 쓰시고 반응이 좋아 남편분인 박성규 씨께도 집필을 부탁드려 다음 책이 나오는 데 4년 걸렸습니다. 신인 저자들은 느리더라도 부분 부분을 주의 깊게 제작합니다. 이런 책들을 더 많이 내고 싶어요.
처음 출판사를 차렸을 때 10년 이상 가는 책을 2, 3권이라도 건지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소망이 몇 배 이상 이루어졌어요. 모두 <철수와영희>를 성원해준 독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펴내는 책들도 10년 이상 갈 수 있도록 더 새롭고 참신한 기획으로 책을 펴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 출판사 책을 믿고 격려해주시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화, 2019/10/2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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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1 ]

철도순직자조혼비, 조선철도 1천리 돌파가 남긴 기념물
해마다 용산철도공원에서 벌어진 철도순직자조혼제의 풍경

이순우 책임연구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도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편찬한 <신자전(新字典) >(1915)의 말미를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색달라졌거나 새로 창안되어 일본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여러 한자어들을 따로 묶어 수록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달러(dollar)를 불(弗)로 쓴다거나 센트(cent)를 선(仙)으로 표기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서양식 미터법의 도입에 따라 미터(m)는 미(米)로, 그램(g)은 와(瓦) 또는 극(克)으로, 리터(ℓ)는 입(立)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령 천(粁)과 같은 글자인데, 미터(米)가 천(千)개 모여 있는 모양이므로 이는 곧 ‘킬로미터’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천(瓩)이라는 글자 역시 그램(瓦)이 천(千)개이므로 ‘킬로그램’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어에도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촌(寸, 치)이나 척(尺, 자)과 같은 재래식 단위표기의 개념을 결합 활용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는데, 예를들어 촌(吋)은 인치(inch)이며, 척(呎)은 피트(feet)이며, 마(碼)는 야드(yard)이며, 리(哩)는 마일(mile)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영국(英國)에서 건너온 단위이므로 대개 촌(吋)은 영촌(英寸)이라 하고, 척(呎)과 리(哩)는 각각 영척(英尺)과 영리(英里)라고 적어도 상관이 없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식 표기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영역의 하나가 바로 철도 관련 분야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철도라고 하면 종주국이라고 하는 영국의 영향이 월등히 큰 측면이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유달리 미터법보다는 야드 파운드법이 선호되는 경향이 우세했다. 따라서 정거장 사이의 거리라든가 철도선로의 총연장은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몇 마일로 기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5년 7월 23일자의 제1면 상단에는 ‘조선철도 일천리 개통기념(朝鮮鐵道 一千哩 開通記念) 철도대경주(鐵道大競走)’ 행사를 예고하는 안내 문안이 큼직하게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1천 리’는 ‘1천 마일’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는 곧 ‘1,609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호남선(湖南線, 1914년 1월)과 경원선(京元線, 1914년 8월)이 잇따라 개통된 데에 이어 1914년 10월부터 착공한 함경선(咸鏡線)의 원산 문천 구간 12.5마일이 1915년 8월 1일에 부분 개통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관의 철도영업이정(鐵道營業哩程)은 마침내 1,000마일을 돌파하여 총누계 1,006마일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개 산업의 개발과 문화의 보급이 교통운수의 진보에 의지하는 바가 크고, 특히 지방에서는 교통의 발달이 개진(開進) 방법의 최대요건이라 일컬어진다는 뜻에 따라 철도영업거리가 1천 마일을 돌파한 것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종관선(朝鮮縱貫線)은 부산의 해륙연락설비와 압록강의 대가교(大架橋)를 통해 유라시아 대교통로 간선철도(歐亞 大交通路 幹線鐵道)의 일부로서 지대한 가치를 지닌다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의 이면에는 “조선의 재력(財力)과 부력(富力)의 정도에 비하면 1천 마일의 철도를 가진 것 자체가 조선통치 5년간의 치적에 있어서 가히 자랑거리의 하나가 됨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자화자찬식의 인식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큰 경사이니만큼 때마침 총독정치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에서 거행되는 시정오년기념(始政五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 맞춰 성대한 축하회와 더불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려는 계획이 진즉부터 추진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한창 공진회가 진행중이던 1915년 10월 3일에는 일본 황족 칸인노미야(閑院宮)와 이른바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순종)’, 그리고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 등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일제히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철도 1천리 기념축하식이 거행되고, 경회루에서는 축하연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튿날인 10월 4일 오후 2시에는 철도국 소관 용산철도정원(龍山鐵道庭園, 나중의 용산철도공원)에 건립된 조혼비(弔魂碑) 앞에서 제막식을 겸해 철도순직자조혼제(鐵道殉職者弔魂祭)가 열렸고, 곧이어 이웃하는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로 자리를 옮겨 국원공적표창식(局員功績表彰式)이 진행되었다.

이때 제막된 ‘조혼비’는 추풍령(秋風嶺)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총 높이가 41.6 척(尺; 12.6미터)에 달했으며, 비면의 글씨는 데라우치 총독이 쓴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총독부 철도국 장관 오야 곤페이(大屋權平, 1862~1924)가 지은 비문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비석의 앞면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백작의 휘호이다. 조선철도는 경인선으로 효시를 삼는다. 이윽고 경부철도의 부설계획이 있었는데, 이때 일로(日露,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國交)가 장차 위태로워지려 하매 우리 정부(일본정부)는 곧 보조 공비를 내어 이를 서둘러 완성하려했다. 오래지 않아 간과(干戈, 방패와 창)가 충돌하여 향도(餉道, 군량을 나르는길)가 긴급을 요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다시 육군으로 하여금 경의, 마산 양 철도의 속성을 서둘러 동사자(董事者)는 밤낮으로 병마(兵馬)를 바삐 분주하게 한 사이에 3선은 모두 완성되었다. 평화극복 후에 여러 선로는 국유(國有)로 귀속되고 통감부를 거쳐 총독부 관리로 옮겨졌다. 기설선로가 개수되었고, 압록강 갑교(閘橋)가 가설됨으로써 유라시아대륙과 연락이 되고 국제철도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남, 호남, 경원 3선로가 완성되고 다시 함경선의 기공으로 나아갔다. 이 사이에 봉공순직(奉公殉職)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은 절개를 어찌 백전무공(百戰武功)이라 하지 않으리. 이에 철도 일천리의 가신(佳辰, 경사)을 맞이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동도지은(同道之恩)을 오래도록 기록하노라.
대정 4년(1915년) 10월 조선총독부철도국장관 공학박사 오야 곤페이 짓고 쓰다.

 

이로부터 해마다 10월 4일에는 이곳에서 철도종사자로서 철도건설이나 유지보수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운수업무에 종사하다가 순직한 이들에 대한 조혼위령제가 꼬박꼬박 거행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만, 1937년에 총독부 철도국이 경인철도 시절에 노량진 제물포 구간을 처음 운행한 날인 9월 18일을 택하여 ‘철도기념일(鐵道記念日)’을 새로 제정한 것에 영향을 받아 1940년 이후로는 바로 이 날짜에 조혼제가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로 해마다 증가하는 철도순직자의 추이를 따로 집계할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1940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 숫자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현상만큼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2년에 누적 순직자는 2,790명(전년대비 +146명)이었던 것이 1939년에는 4,137명(+296명)으로, 다시 1943년에는 조혼제의 합사자(合祀者)가 6,132명(+593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절대 규모면에서 1915년 최초의 조혼제 당시 철도순직자의 총수가 635명이었다는 점과도 크게 대비가 된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조선경찰협회와 조선소방협회의 주관으로 해마다 경복궁 근정전 용상에
제단을 설치하고 행사를 치른 순직경찰관 경방직원초혼제(警防職員招魂祭)의 경우, 1944년 10월 현재 순직경찰관이 403명에 순직소방수가 55명으로 이를 모두 합쳐도 458명 정도의 규모였다. 이러한 사실과 비교하면, 철도순직자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실감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곳 조혼비가 자리한 용산철도공원 일대(지금의 ‘한강로 3가 65번지’ 철우아파트및 용산세무서가 자리한 위치)는 야구대회나 자전거경주 등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풀장이 마련되어 이곳에서 수영대회가 열리거나 근처의 연못에서 아이스하키 대회가 거행된 시절도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자에 연재된 「10주년 기념 조선야구사(朝鮮野球史), (10) 조선 최초의 야구대회」 제하의 기사를 보면, 1915년 6월 13일에 조선공론사(朝鮮公論社)가 전조선야구대회(全朝鮮野球大會)를 최초로 이곳 용산철도공원, 속칭 ‘구(舊) 그라운드’에서 개최하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때 참가단체로는 철도구락부청년단, 체신구락부, 조선은행군, 경성중학, 경성실업구락부군, 철도구락부소년단 등 여섯 팀 이외에 조선인 단체로 오성친목회군(五星親睦會軍)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이곳은 용산 병영지의 인접지역에 자리한 탓에 이곳에 일본군 병력이 집결한 흔적도 곧잘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16년 4월 15일자에는 신설되는 제19사단 병력과 종전의 조선주차 제9사단 병력이 교대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환송 및 환영을 위한 대원유회(大園遊會)가 용산철도공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30년 10월에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란 대규모 군사훈련이 거행될 당시에는 이 일대에서 고사포대(高射砲隊)가 진지를 펼친 한편 훈련참가부대의 강평회(講評會)와 야연(野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시기에 이르러 일제가 용산철도공원에 조성했던 철도순직자조혼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별도의 순직비가 조성되고 순직철도종사원에 대한 합동추도식이 해마다 재연된 흔적이 완연히 포착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향신문> 1955년 9월 18일자에 수록된 「합동위령제 엄수, 철도사고 순직자」 제하의 기사는 어떠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에 대한 위령제가 재개된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교통부에서는 1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에 있는 동부(同部) 후정에서 제3차(회) 순직자합동위령제(殉職者合同慰靈祭)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금번 위령제는 (단기) 84년(1951년) 9월 1일 이래 철도운수사업에 종사하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141주(柱)의 영령을 추도하기 위한 것으로 위령제가 끝난 후 유가족들에게는 광목(廣木) 반 통과 기타 물품이 증정되었으며, 특히 동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내 극장에 안내하고 이들에게 위안의 하루를 보내게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교통부(交通部)의 후정(後庭)이라고 하는 곳은 ‘한강로 3가 63번지 구역’에 자리한 교통고등학교 구역을 가리킨다. 1953년 7월 부산에 피난중이던 정부가 환도(還都)할 적에 오갈 데가 없어진 교통부가 용산의 교통학교 교재전시장(敎材展示場)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을 새로운 청사로 삼아 터를 잡았고, 그 후 1963년 9월 1일에는 철도청(鐵道廳)이 발족하면서 교통부 청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위령제가 벌어지는 공간은 시기에 따라 교통부 후정이나 철도청 뒷마당으로 표기되었고, 또 어떤 때는 순직비의 소재지가 철도고등학교 교정(校庭)이라거나 교통공무원교육원 뒤뜰로 표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기가 실제로 다수의 철도순직자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일제의 유습(遺習)이 분명했던 철도순직자 조혼제의 관행은 그 유래를 따질 겨를도 없이 불과 7, 8년 사이에 고스란히 부활하는 상황이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 2019/10/30-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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