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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연원, 1949년 6월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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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연원, 1949년 6월 공세

익명 (미확인) | 목, 2017/10/19- 18:03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28

국회프락치사건의 시작

그것은 프레임이었다. 만들어지는 순간 각인되고 부인할수록 견고해졌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온몸을 옥죄었다. 그것은 흡사 개미지옥과 비슷했다.
1949년 5월 9일 동아일보는 ‘의정 단상의 1년 회고’라는 코너에 민국당 국회의원 김준연의 글을 실었다. ‘회고’라기보다는 반대파에 대한 일방적 매도로 가득 찬 글이었다. 그는 주장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 운운하며 5·10선거에 불참하고 대한민국의 성립을 방해했다고,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소위 ‘소장파’라 불리는 무리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하며 남로당의 선전방침을 추종하고 있다고. 그의 주장은 놀라웠다. 국회 내에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고, 그들이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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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당 중진 김준연 의원. 1949년 5월 9일 동아일보 기고를 통해 국회프락치사건을 예고했던 그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88구락부의 일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준연이 누구인가? 일제강점기 ML파임을 숨기고 서울파 고려공산동맹의 책임비서를 꿰찬 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 몰래 당 중앙을 탈취하여 선전부장에 올랐던 자이다. 체포 후 전향하여 우익의 논객이 되었고, 동아일보와 긴밀한 연관 속에서 해방 후 민국당(한민당의 후신)의 중진이 되었다.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얼굴에 올라오기 시작한 검버섯처럼 그는 어느새 독기 가득한 극우 인사가 되었다.
김준연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날 동아일보엔 심상치 않은 기사가 하나 실렸다. 최근 남로당원 3명이 검거됐는데, 그들이 소장파 국회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황윤원과 접촉했다는 것이었다. 남로당원들은 이들 국회의원들에게 외군(外軍) 완전 철퇴, 남북 정치범 석방, 남북통일정치회의 개최, 선거에 의한 최고입법기관 구성과 중앙정부 수립, 조국방위군 재편 등을 주장하여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후일 남로당 7원칙으로 알려진 사항이다. 남로당원들은 국회의원들이 소속된 정당 내에서 프락치 활동을 벌이고 국회의 원들을 조종하여 남로당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고 한다.
두 개의 글로 프레임이 완성되었다. 내부에 적이 있고 그 배후에 남로당이 있다는 프레임이었다. 실상 동아일보는 두 개의 글로 중대 사건을 암시한 셈이었다. 무속인들도 부러워할 예지능력이었다. 8일 후인 5월 17일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이 체포되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의 시작이었다.

 

이승만과 민국당의 연합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은 내외 양면에서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도전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내부의 ‘적’도 만만치 않았다. 제도권 밖에는 김구와 김규식 세력이 건재하고 있었고, 이들과 공명하는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이 반민법과 지방자치법, 진보적인 농지개혁법 등을 견인하며 신생 정부에 도전하고 있었다. 가장 뼈아픈 것은 반민특위였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가장 강력한 힘인 경찰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었다. 더구나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한민당도 야당을 선언하고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다. 내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1948년 말부터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여순사건 이후 추진된 국가보안법 제정이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한민당과 다시 손을 잡는데 성공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초래한 위기가 두 세력을 하나로 묶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기꺼이 손을 잡고 극우반공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함께 했다. 1949년 들어 이승만 정권은 부분적 조각을 단행할 때마다 한민당 세력을 정부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다른 ‘적’에 대적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민당은 한민당대로 신익희와 지청천 세력을 끌어들여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제 한민당은 민주국민당(민국당)이 되었다. 이승만과 민국당의 연합으로 전선은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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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1일 이문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의 구속을 보도한 기사. <경향신문> 1949.6.23.

 

정부 vs 국회

1949년 5월 21일 임시국회가 열렸다. 5일 전인 5월 16일 80여 의원들이 중대한 안건이 많다고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국회의장 신익희는 웬일인지 국회 개원을 지연시켰다. 의원들이 지방에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댔지만 일부 의원들에 국한된 얘기여서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국회는 시작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국회의원 3명이 구속된 후에야 국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동료 의원들의 체포를 알게 된 국회의원들은 국회가 열리자마자 검찰총장 권승렬에게 체포 경위를 따져 물었다. 권승렬은 이들 국회의원이 3월 하순부터 좌익계열 인사와 내왕하는 것을 탐지하고 내사에 착수했으며, 이들이 남로당 7원칙에 동의하고 이를 남한에 적용하는 것을 협의한 혐의로 구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권승렬의 답변은 더 큰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물적 증거 여부에 대해 답변하면서 “이 사건은 물적 증거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소는 있습니다마는 … 없습니다마는 …” 하고 심하게 말을 더듬은 탓이었다. 사실상 증거도 없이 국회의원들을 체포했음을 은연중 드러낸 답변이었다.
더구나 당국은 구속영장이 발부된 4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을 체포하지 못했다. 황윤원 의원이었다. 지방에 있다가 체포를 피하게 된 황윤원 의원은 5월 24일 국회에 출석해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공산당과 열렬히 싸워왔으며 죄라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 죄밖에 없다고 울먹였다.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은 체포된 국회의원들이 실제로 국가보안법에 걸릴만한 행동을 했는지 의심했다. 당시 경찰의 자의적 공권력 행사가 드문 일이 아니었던 데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공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장파 의원들은 체포된 국회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안을 제기했다. 격론 끝에 투표 결과는 재석 184명 가운데 가 88표, 부 95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재석이 184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얼마나 첨예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석방에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지지세력 확보를 위해 역량을 총동원한 결과였다.
이후 양측의 싸움은 김준연 의원의 제명에 관한 긴급동의안 제기로 옮겨 붙었다. 김준연 의원이 석방동의안 토의 과정에서 체포 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자는 모두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자라고 매도한데다 5월 9일자 동아일보 기고문과 기사가 소장파를 모략하려는 모종의 음모로 읽혔기 때문이었다.
갈등은 국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세 의원의 석방동의안에 찬성한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다. 집회를 개최한 이들은 손빈과 허일 등 반민법 대상자들이었다. 이들은 연일 ‘민중대회’를 개최하며 국회를 압박했다. 동네 반장들까지 동원되어 주민들을 동원했지만 당국은 사태를 방조했다. 시위대는 6월 2일 국회가 있는 중앙청까지 행진했고, 6월 3일에는 반민특위로 몰려가 난동을 벌였다. 이쯤 되자 이들의 진짜 목적이 드러났다. 88명의 의원에 대한 공격은 표면이고 실상은 반민특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민특위는 난동을 부린 주도자를 검거하는 한편, 이들의 배후로 밝혀진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을 구속했다. 최운하는 노덕술 만큼이나 유명한 일급 친일 경찰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움직임을 기다린 자들이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의 빌미였다.

 

반민특위 습격, 국회의원들의 체포, 그리고 암살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경찰을 인솔하고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들은 반민특위 소속 특별경찰대를 무장해제하고, 반민특위 직원들을 연행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 우연히 그곳을 방문했던 검찰총장 권승렬도 경찰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몸수색을 당하고 권총을 빼앗겼던 것이다. 한 의원은 경찰의 반민특위 테러를 ‘경찰의 쿠데타’라 명명했다.
국회는 분노했다. 국회는 경찰의 테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국무총리 이하 전 각료의 퇴진, 반민특위의 원상복구를 결의했다. 그러나 친일 판사 출신인 장경근 내무차관은 국회에 출석하여 반민특위 습격이 내무부 책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도 6월 7일 AP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특경대의 해산은 자신이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태가 이러하자 경찰들은 반민특위 인사의 쇄신, 경찰관 신분의 보장을 주장하며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총퇴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대통령부터 일개 경찰관들까지 불법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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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유해. 1949년 봄, 김구의 현실정치 참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치테러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회가 폐회한 다음날인 6월 21일 체포되지 않았던 황윤원의원과 노일환,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의원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6월 25일에는 국회부의장 김약수가 체포되었다. 이들 국회의원의 혐의는 남로당 공작원의 회유에 넘어가 남로당에 가입하고 국회 내에서 정부 파괴 공작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국회 밖에서 발생했다.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것이다.

독재의 연원, 6월 공세
일련의 사건들은 명확히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극우반공체제 강화였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권력 기반인 경찰 조직을 뒤흔드는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반민특위의 인적 배경이자 국회 내 반정부 중심세력인 소장파 국회의원을 체포해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1949년 봄부터 부쩍 정계로 진출할 가능성이 점쳐졌던 잠재적 최대 라이벌김구를 제거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대파를 공격하는데 좌익사건을 활용하고, 관변의 힘으로 민을 동원하여 반대파에게 압박을 가했으며, 최후의 방법이라 할 ‘암살’을 시행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그 후에도 유사한 사건들을 손쉽게 목도할 수 있다. 부산정치파동이 그러하고 장면암살미수사건이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1949년 6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이승만 독재의 연원이라 할만하다. 이후에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소장파 대신에 민국당이 새로운 탄압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1950년 4월에 있었던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이란 김성수, 김준연, 백관수, 조병옥 등 민국당 지도자들이 군과 경찰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내통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살해하고,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조작하려다 이 사실이 들통 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백성욱 내무부장관과 신태영 육군총참모장, 최영희 헌병사령관, 김병완 치안국장 서리 등 이승만 정권의 주요 인사가 관련되어 있었는데, 조작의 정도가 너무 노골적이고 저급하여 이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이승만 독재의 역사는 대상을 바꿔 반복되었다. 한번은 비극이었고, 한번은 희극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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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한테만 가면 전부다 맛탱이가 가버리네

다 팔아묵고 왔네

참나…

목, 2017/08/0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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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일제강제노역 내용에 관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증폭되니, 민문연 홈페이지 해킹당했네요.

내가 가입,참여하면 무슨 사이트이든 해킹피해, 회원정보유출되길래 민문연 홈피 가입안했는데,

가입안해도 해킹피해 보는구만.

 

아무튼, 시민역사관( 식민지역사관 ) 후원하였고,  발기인 신청했습니다.

 

– 음악, 영화, 사랑, 책, 예술, 문화, 역사 를 좋아하는 단순한 한민족인 –   Mrrkgpy 7 

 

그 이석훈 맞음.  사실 돈도 없고, 여자 못사귄지 16년이 다 되어가면서도

아무튼, 나중에 내 손자 보여줄려고 발기인 신청했습니다.

 

PS – 자유게시판이라서 그런지 글 적는 뉴라이트부류 쓰레기들도 정말 많네요.

 

목, 2017/08/0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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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다운로드]


한국 외교부의 어깃장에 강력 항의한다.


중앙일보 2017년 8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시절인 지난해 11월 외교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 행사에 부정적 견해들을 인용한 의견서(이하 외교부 의견서)를 대법원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과 상관없이 일본 기업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외교부 의견서는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어 피해자들과 피해 회복을 위해 싸워온 시민단체로서는 분노와 함께 절망감을 떨칠 수 없다.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은 대법원이 최종 확정판결을 내리길 손꼽아 기다렸다. 그 사이 피해 당사자 원고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확정판결이 이렇게까지 늘어진 데는 일본기업의 지연 전술이 있었다. 그러나 항간에는 한국정부가 방해하고 있어 늦어지고 있다는 강한 의혹도 돌았다. 그런데 이번 보도로 그것이 의혹이 아니라 사실임이 확인됐다. 그동안 외교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나 이제 그걸 수정해야겠다. 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일을 방해했다고.

외교부 의견서를 보면서 지난 2002년 외교부가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거부하면서 내세운 ‘악명 높은’ 답변이 떠오른다. 문서를 공개했을 때 한일 관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답변을 받아보고서 우리는 한국 외교부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본 외무성 한국지부가 아닌가 착각했다. 외교부 의견서 역시 같은 기조에 서있다. 불리하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서라도 자국 피해자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자 국가의 의무 아닌가.

국제관계라는 것이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문제는 형세가 불리하거나 논리가 부족하더라도 피해자를 위해 일하려고 노력하고 있느냐이다. 피해자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될 것이다. 정 안되면 하는 척이라도 해라. 그게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하에서 외교부는 무엇을 했나.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유골 조사와 봉환 문제를 비롯해서 노동자의 통장 반환 문제, 야스쿠니문제 등을 두고 일본정부와 씨름을 할 때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배상 판결까지 부정하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기관인가. “이게 나라냐”라는 비난이 달리 나온 것이 아니다.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놓고 외교부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서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국가에 의해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들이 피해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국가가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모든 국가가 지켜야할 국제법의 한 원칙이기도 하다. 이 원칙은 위안부 피해자분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권피해자들에게 적용되며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자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해 외교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이번 외교부 의견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책임회피에 급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교부가 지고의 가치라고 여기고 있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 역시 인권과 정의에 기초하여 재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음하며 절규하는 피해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하에서 이들이 어떠한 경위로 동원되어 비인간적인 조건하에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이 끝난 다음 어떤 과정을 거쳐 귀국했으며, 돌아가신 경우 사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유골이라도 수습해 생사도 모르는 가족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모두 일본 정부에게 있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이러한 피해자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 진지하게 과거를 성찰하고 성실하게 진실을 규명해 이들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데 있다. 형식적인 법 논리를 들이대며 궁색하게 잘못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을 변명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법을 말하곤 있지만 힘의 논리만이 정의라는 법과 인권을 부정하는 인식과 다를 바 없다. 잘못된 시대, 잘못된 정부에 의해 잘못된 합의가 피해자들의 삶을 또다시 유린한다고 한다면 이를 바로 잡는 일은 이 시대에 바로 오늘 제대로 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비판의 화살이 국정을 농단한 주범들에게만 겨냥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국정 농단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아이히만’들에게도 그 화살이 겨눠져 있다. 외교부라고 여기서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외교부의 아이히만들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뼈를 깎는 반성과 혁신이 없는 한, 한국 외교의 미래는 없다. 변화는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묻는다. 한국 외교부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 기관이며, 관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를. 이제 당신들이 답변할 차례다.


2017년 8월 4일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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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08/0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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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 도쿄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주최로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하고 향후 지속적인 활동을 다짐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번 집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가 용산으로 확정된 후 처음으로 갖는 집회로 연구소에서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강동민 자료팀장, 노기카오리 선임연구원 그리고 교육홍보실 오경아 영상팀원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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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집회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작은 행사로 준비되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참가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의 인사말에 이어 이희자 대표가 참가자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강동민 자료팀장이 그동안의 활동 경과와 건립지 개요, 향후 계획을 보고하자 참가자들은 감동과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이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와 과거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아 한일 시민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매개로 더욱 깊은 교류를 추진해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 집회를 개최할 때마다 사회를 보는 이가 있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 활동에 참여해온 다나카 유키 씨다. 이날도 사회를 맡은 그는 “오늘 집회는 앞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일본에서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개관 후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소감으로 집회를 마무리했다.
이미 모금 목표액 500만 엔(약 5,080만 원)을 달성했지만 이날을 계기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것이 이 집회의 취지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날 집회에 처음 참가한 와카타니 마사키 씨는 진지하고 성실하게 또 열정적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는 우리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거액의 건립기금을 쾌척하고 귀중한 자료도 기증했다. 이렇게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낸 이 모임은 앞으로도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활동을 추진해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월, 2017/08/0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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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지난 5월 15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역사 전문 팟캐스트 채널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1 ‘역적’(역사적폐청산)이 회를 거듭할수록 회원들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1부에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역사적폐의 주범이 누구이고 이들의 역사쿠데타 배경과 논리가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파헤쳐서 재미있는 입담으로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고 있다면, 2부의 ‘이게 실화냐’
에서는 매회 다양한 전문가를 초대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역사문제를 짚어주어 관심을 받고 있다.

13이제 ‘시즌 1 역적’은12화(8월 7일) 마지막 본방송과 8월 여름특집, 그리고 9월 에필로그를 끝으로 마
감하고 ‘시즌 2’를 준비할 예정이다. 앞으로 남은 시즌 1 여름 특집 방송에도 회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기대한다. 팟캐스트 ‘역적’은 팟캐스트 전문채널 팟빵과 유투브, 아이튠즈에서 ‘역적’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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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은희 교육팀장

월, 2017/08/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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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여름방학을 맞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사 강좌를 열었다.
최근 ‘암살’, ‘밀정’ 그리고 ‘군함도’와 같이 우리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
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장면들이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을 가질 법하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청소년이 영화를 통해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개설하였다.
이번 강좌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연구소 상근자들이 직접 강사로 나섰다. 조한성 선임연구원,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 김승은 자료실장,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이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강좌를 진행되었으며, ‘밀정’, ‘암살’,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차례로 다루었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 사요나라’를 다루는 강좌에서는 강제동원 피해 유족인 이희자 여사(태평앙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와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해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를 직접 느끼고, 역사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수강신청은 7월 10일부터 24일까지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강좌 별로 20명을 선착순 접수하였다. 무료로 진행되는 강좌이며 출석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과 여름휴가가 변수로 떠올랐으나, 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신일중학교 교사의 권유로 평소 역사에 흥미를 가진 3학년 학생 6명이 전 강좌를 참여하였고, 1강 20명, 2강 24명, 3강 25명, 마지막 강좌는 수강생의 학부형까지동석한 까닭에 29명으로 수강 정원을 훌쩍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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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좌를 마친 청소년들은 ‘전체 역사를 기억하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강사의 질문에 각자의 다짐과 응원을 담은 메시지를 작성해 희망나무를 꾸몄다. 제일 인상 깊은 강좌로 제3강 ‘안녕, 사요나라’를 꼽으며 일본의 강제 징용 피해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모든 강좌를 빠짐없이 들은 청소년 17명에게는 수료증을 발급했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의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개관1주년 기념 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을 준비 중이다. 또한 기념관 인근 묘역에 잠든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한 시민강좌와 독립민주시민학교 강좌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월, 2017/08/0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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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 폭파의거’ 72주년을 맞아 연구소는 광복회 화성시지회(지회장 안소헌)와 서울특별시의회(의장 양준욱)의 후원으로 7월 22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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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에 앞서 이준 열사 집터 등 북촌 일대에서 ‘친일의 길, 항일의 길’이라는 주제로 회원, 시민 등 약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권시용 연구원이 안내를 맡아 이상재 집터, 여운형 집터, 김성수 옛집, 한용운 옛집, 진단학회 사무소 터, 손병희 집터, 이병도 집터, 한상룡 옛집, 윤보선 가옥, 정독도서관, 윤덕영, 윤택영 집터 등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의거 7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함세웅 이사장과 안소헌 지회장, 임헌영 소장 등이 부민관 폭파의거의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의거 70주년을 맞아 재현한 연극 ‘정의의 폭탄’을 녹화한 16분 분량의 요약 영상을 상영하여 참가자들은 부민관 폭파 의거와 의거의 주역인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분 독립투사의 삶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인 경성 부민관은 1935년 건립되어 여러 차례 명칭과 용도가 바뀌었으며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현재까지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서울시의회 양준욱 의장과 사무처의 지원으로 본 회의장을 기념식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에서 영화 〈군함도〉 개봉을 맞아 배우 송중기 팬연합이 모금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500만원) 전달식이 진행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

∷ 편집부

월, 2017/08/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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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7월 14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간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를 맞아 오후 1시부터 종로구 안국동 덕성학원 해영회관에서 이준 열사의 집터 표석 제막식을 가졌다.
함세웅 이사장은 여는 말에서 “비록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일본의 국권 침탈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분의 열사의 뜻을 가슴에 새긴다. 이준 열사가 살았던 110년 전의 집터가 새로 밝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집터 표석을 통해 이준 열사의 독립정신이 시민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축사에서 “이런 중요한 일을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나서서 하지 못한 것이 한편으로 부끄럽지만 정부가 못 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며 “2년 뒤면 건국(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 새 정부가 취임한 만큼 독립국가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도 “안국동 집터는 이준 열사가 안창호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독립 자주의 염원을 실천하던 현장”이라며 “비록 열사께서는 숭고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역만리에서 순국하셨지만 우리는 열사의 애국정신을 더욱 지향해 미래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박상임 덕성학원 재단이사장,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축사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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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이준 열사 집터 위치 확인 및 집터 표석 제막까지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준 선생의 사위 유자후가 쓴 <이준선생전>(동방문화사, 1947)에 나오는 이준 집의 소재지 ‘북서 안현 11통 16호’와 한성부 호적자료(1906년 6월 작성)의 ‘안국방 소안동 안현 11통 6호’를 토대로 삼아 <황성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별건곤>의 기사와 토지대장 등을 샅샅이 조사하여 이준 집터가 ‘안국동 152・153번지’이고 현재 종로구 안국동해영회관(건물 서쪽에 인접한 안국 153 베이커리카페 포함) 자리임을 밝혀냈다. 연구소는 지난 3월 관련 자료를 첨부하여 종로구청에 표석신설신청서를 제출하였고 3월 20일 열린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 제1차 회의에서 ‘이준 집터’ 표석설치안이 심의 통과되면서 7월 14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에 맞춰 표석 제막식을 열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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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유리 묘역에서 열린 이준 열사 추모식에 참석한 뒤 행사장에 도착한 이준 열사의 외증손자인 조근송 씨(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는 유족을 대표해 집터 위치 확인과 표석 제작에 관여한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이준 열사가 여기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고 있어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말했다.
오후 1시 40분 기념행사를 마친 후 해영빌딩 왼편에 설치된 표석에 모여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박원순 서울시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조근송 유족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하게 치러졌다.
한편 제막행사 전인 12시 30분에는 이양재 이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이준 열사 유묵과 광복군의 태극기 등 자신이 소장한 귀중한 독립운동 자료와 고서 수십 점을 행사장에 전시하고 직접 자료 설명도 해주었다.

10∷ 박광종 선임연구원

월, 2017/08/0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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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기념사업에 혈안이 되어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구미시가 2016년 4월 8일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의 요청으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신청서를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에 신청했다.
신청서를 접수한 우정사업본부는 같은해 5월 23일 ‘2016년 제1차 우표발행심의위원회’를 열고 ‘박정희대통령 탄신 100주년’ 우표 발행을 결정했다. 총 17명 중 이날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위원 9명 전원이 찬성한 것이다. 하지만 백범김구기념관이 신청한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우표’는 찬성 4, 반대 5로 발행이 무산됐다. 이 같은 사실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는 했으나 촛불집회와 탄핵국면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신경민, 추혜선, 최명길 의원 등이 박정희 우표 발행의 부당성을 제기했고 미래창조과학부와 우정사업본부 노조에서도 반대하고 나섰다. 구미지역 시민사회단체들도 역시 우표 발행 중단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우정사업본부에는 우표 발행 문제와 관련해 200건이 넘는 반대 민원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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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단체들의 논리는 명확했다. 우정사업본부의 우표류발행업무처리세칙 4조는 ‘정치적·종교적·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우표 발행을 못하도록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표발행심의위원 중에는 국정농단의 공범인 김기춘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이 포함되어 있음도 확인됐다.
연구소는 우표발행 저지를 위해 신경민 의원실, 우정사업본부 노조 등을 방문해 연대키로 하고 2017년 6월 22일 광화문 1번가 국민인수위원회 앞에서 국가공무원노조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진데 이어 6월 29일에는 연구소 단독으로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열리는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발행 취소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결과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에 대해 재심의 결정을 내렸다 최근 적폐청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높아지면서 입장을 선회하고 원점에서 재논의한 결과 총 14명이 참석해 11명이 찬성, 반대 1명, 기권 2명으로 재심의가 결정됐다.
이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7월 12일 재심의 회의를 열고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여부를 다시 논의했다. 그 결과 전체 17명 위원 가운데 12명이 참석해 철회 찬성8명, 반대 3명, 기권 1명으로 최종적으로 우표발행이 취소된 것이다.
당초 우정사업본부는 재심의할 근거가 없다며 기존 결정대로 발행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데다 근거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우정사업본부가 박정희 우표 발행 재심의에 나서게 된 근거로 내밀고 있는 것은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세칙’ 제17조 2항 2호이다. 세칙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우표발행 및 보급에 관한 사항에 관해 우정사업본부장의 자문에 응한다”는 규정에 근거해 김기덕 본부장이 우표발행심의위원회에 재심의 문제에 대한 자문안건을 올린 것이다. 이는 그간 입장을 뒤집는 것이라 허위해명 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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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발행이 취소가 예견되자 세종시청사 내 우정사업본부 앞에서 우표 발행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였던 남유진 구미시장은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냈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7월 14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취소되었답니다’라는 전면 광고를 내보내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박정희 기념사업 등 친일독재 미화와 역사왜곡 중단을 위해 최선을다할 것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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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인들의 이름을 딴 기념문학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연구소는 작년 11월 29일 서울 대학로 함춘회관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공동으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가 열리기까지 작가회의 회원이자 시인인 권위상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전 서울서부지부장)의 노고가 컸다. 이 토론회 이후 작가회의도 올해 3월 25일 내부 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며 5월에는 미당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는 김혜순 시인이 5·18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수상의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 김 시인이 스스로 수상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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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현실문제에 직접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는 송경동 시인이 7월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미당문학상 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려는 중앙일보사의 연락을 받고 “적절치 않은 상”이라며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미당의 시적 역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친일 부역과 5·18 광주학살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 군부정권에 부역했던 이를 도리어 기리는 상 자체가 부적절하고 그 말미에라도 내 이름을 넣을 수는 없다”고 썼다. “그건 어쭙잖은 삶이었더라도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부정이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 왔고 살아가는 벗들을 부정하는 일이며, 식민지 독재로 점철된 긴 한국의 역사, 그 시기 동안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수없이 죽어 가고 끌려가고 짓밟힌 무수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내 시를 존중해 주는 눈과 마음이 있었다면 도대체 나와 미당이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라며 “ 조금은 외롭고 외지더라도 내가 걸어보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고 믿어 본다”며 미당문학상 거부 뜻을 분명히 했다.
연구소는 작년 8월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문효치)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려 하자 집회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상 제정을 철회시킨 바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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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회원수련회가 7월 8일과 9일 이틀간 충남 아산늘푸름수련원에서 열렸다. 전국 각지는 물론 도쿄에서도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260여 명의 회원들과 그 가족들이 함께했다.
먼저 연구소와 회원들의 적폐청산에 앞장 서 온 것에 감사하다는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서 내년 3월 개관을 목표로 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추진과정에 대해 김승은 자료실장이 상세히 설명하였다. 뒤이어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로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광주지부와 대전지부가 모범지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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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소장이 역사관 건립에 대한 회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호소했고, 올초 연구소 운영위원장에 취임한 이민우 인천지부장은 감사인사를 하는 가운데 “역사관 건립, 회원 배가”를 선창하여 회원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조영숙 회원과 딸 부부, 최리순 회원이 참석한 도쿄지회의 기증자료 소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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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마당의 하이라이트인 광주지부 ‘꿈꾸는 예술’(대표 정찬경)이 마련한 친일·항일음악회와 큰들문화예술센터의 창작마당극 ‘오작교 아리랑’ 공연은 회원들의 큰 갈채를 받았다.
끝으로 수련원 3층 강당에서 이어진 놀이마당에서는 광주지부의 댄스스포츠 공연이 펼쳐진 가운데 밤늦도록 회원들 간의 친교의 시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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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현충사를 답사하면서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표준영정 교체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아산지회와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2017년 수련회에 함께해 주신 모든 회원분들과 물품을 협찬해 주신 각 지부, 특별히 사전준비와 진행에 많은 도움을 주신 충남지부, 아산지회 회원님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04[ 수련회에 도움을 주신 분들 ]
▪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가 고급 막걸리 ‘사미인주’ 10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전북지부(지부장 김재호)가 치킨 3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충남지부 최종진 회원이 생막걸리 10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논산지회 최의진 회원 친환경스팸 3상자를 협찬해 주었다.
▪ 관악동작지부 송진복 지부장이 보조배터리, 보습제 등을 협찬해 주었다.

월, 2017/08/0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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