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지역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익명 (미확인) | 목, 2017/10/05- 21:56

1005-6

[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관련기사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⑯ [단독] ‘틀린 표현 버젓이’ 역사교과서…“일본 더 진전하기도”(2017/10/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⑮ [단독] 빈약한 강제동원 교과서 기술…심한 경우 3줄뿐 (2017/09/28)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⑭ [단독] 빛 좋은 개살구?…총체적 난국 ‘강제동원역사관’ (2017/09/26)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⑬ [단독] 혈세 522억 어떻게 흘러갔나…수상한 국립강제동원역사관 (2017/09/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⑫ [단독]오류투성이 ‘피해자 명부’…창씨개명 알아야 확인 가능? (2017/09/1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⑪ “한국인은 열람 못해”…여전히 찾지 못한 이름들 (2017/09/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⑩ 16년간 연락 없는 외교부…”우리가 귀찮은 존재인가” (2017/09/12)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⑨ “화장실 따라와 늦게 나오면 매질” 근로정신대 끌려간 13살 소녀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⑧ 친일파비가 현충시설…정부는 ‘나 몰라라’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⑦ “노동자상 기부한다”는데…‘안 받겠다’는 국토부 (2017/08/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⑥ “너무 배고파 개밥까지” 94세 피해자의 눈물 (2017/08/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⑤ [단독] 58년만의 부고…“곡괭이 잡은 채 생매장됐다니” (2017/08/1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④ “내가 죽더라도 알려야 한다” (2017/08/0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③ “개 묻듯 묻었다” 탄광노동자 기록, 누가 지켜야 하나 (2017/08/07)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② “우리마저 손 놓을 수 없어”…일본의 소도시가 우키시마호를 기억하는 법 (2017/08/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① 우키시마호 참사 72년, 가라앉은 귀향의 꿈 (2017/08/01)

광복 72주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정부는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피해자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대신 나선 이들은 수많은 ‘익명의 조력자’였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 기획 시리즈에서 다 담지 못한 강제동원 학계, 시민단체계 인사들의 ‘고군분투기’를 소개한다.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가의 협조가 절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기관은 전무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99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이후 김 연구원은 일본이 수탈한 조선의 인·물적 자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와 연구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역사문제연구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에 제안해 ‘강제동원진상규명 시민연대’ 시민단체를 꾸렸다. 이뿐만 아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초안도 김 연구원의 손을 거쳤다. 김 연구원은 강제동원 연구에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면 해당 자료 열람이 힘들어진다”면서 “우리 정부가 자료 연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1005-8

▲ 사진=김서경 작가 제공

◀ 김서경 노동자상 조각가…예술로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서울 용산역 앞 세워진 국내 최초의 강제동원노동자상은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조각했다. 노동자상은 조선인 노동자가 어둡고 깊은 갱도를 나와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김 조각가는 이를 ‘불편한 눈부심’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 조각가가 노동자상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에 끌려갔다. 일부는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로나마 고향 땅에 잠드신 분들도 있다”면서도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조각가는 앞으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진상규명 위해 사할린에 흘린 땀방울

비포장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린다. 러시아 사할린 각 지자체 기록보존소에 연금, 노동자 카드 등 자료의 열람을 신청한다. 허가가 떨어지면 ‘서류철’로 된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산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정보 문제로 복사가 불가능한 자료도 다수다. 일일이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조사해온 방법이다. 방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활동, 사할린에 잠들어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발굴에 집중해왔다. 지난해에는 사할린에 홀로 파견됐다. 그는 약 500여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발굴해냈다. 방 교수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와 유가족 모두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이들의 수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자료가 부족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명부 발굴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포기할 수 없던 아버지의 ‘이름’

“이희자 보추협 대표에게 물어봐라. 이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취재 도중 만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과 피해자를 보듬으며 약 3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또한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관련 기록 찾기에 나섰다.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가까스로 아버지의 사망 사실이 적힌 명부와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명시한 문건 등 총 6건의 자료를 찾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피해 유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에는 보추협을 결성,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찾아낸 기록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려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출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난 45년 이후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면서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005-11

▲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충 해결사’

장완익 변호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다. 지난 199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담당 변호사로 일하던 지인이 유학을 가면서 장 변호사가 대신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장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고충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업무를 진행했다. 장 변호사는 광복 이후 들어선 정권이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노태우·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사 해결을 경시했다”며 “이로 인해 강제동원 역사가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주도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1005-12

▲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외길 25년째 

“술맛 떨어지게 또 우키시마호 얘기냐”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이 지인을 만나면 듣는 핀잔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1948년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폭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아직 정부는 희생자 숫자는 물론 정확한 사고 원인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꾸준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반핵포럼에 참석해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됐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는 총 82명의 생존자를 만나 증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 2008년에서야 ‘우키시마호사건소송자료집’ 두 권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형식적 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 회장의 주장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단 2명. 전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우키시마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아직도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 묻혀 있을 유해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제작도 계획 중이다. 언제까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홀로 싸워야 하는 걸까.

1005-13

▲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역사 알아야 바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수십 년간 자료를 분석, 수집해온 ‘강제동원 전문가’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의 제의로 강제동원 문제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 95년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을 도왔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지난 2015년까지 위원회 조사과장으로 1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등의 작업을 지휘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입수와 유골 봉환에 힘썼다. 위원회가 종료된 후에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한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를 기획 중이다. 경희궁 지하터널, 인천 동일방직터 등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은 8000여 곳이 넘는다. 인천과 부산 등 각 지역에 노동자상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 연구위원은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일본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05-14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문재인 정부, 노동자상 건립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

최종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8월 최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건립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 교토시 단바망간광산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이유로 일본 입국이 불허됐다. 일본 정부뿐이었을까. 한국 정부마저 노동자상 건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최 직무대행이 속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4월6일부터 매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최 직무대행은 지난 6월24일 열린 ‘노동자상 건립 촉구대회’에서 “정부는 강제동원 노동자 피해 보상을 위해 주권국가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력 끝에 노동자상은 지난 8월 용산역 앞에 세워졌다. 현재 부산에서도 노동자상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시민을 상대로 지지 서명을 받고 노동자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 오는 12월28일에 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1005-15

▲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군함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다

“소설 ‘군함도’ 집필은 운명이었습니다” 지난 7월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먼저 군함도의 비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한수산 작가다. 한 작가가 소설 ‘군함도’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년. 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은폐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작가는 오로지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해 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한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다만 이 분노를 분출할 길을 여는데 우리가 소홀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건국 이후 흔히 말하는 ‘친일 정부’가 이어졌다. 기득권 세력은 부단히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과거사 기록 작업이 더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1005-16

▲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수많은 희생자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의 전문분야는 일본 역사교과서다. 한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일본 역사교과서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지 꼼꼼히 ‘모니터링’ 해왔다. 한 박사는 일본의 각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왜곡된 부분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착취당한 일에 대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에는 전쟁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범죄, 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은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강요당했다”면서 “그런데 현재 역사 교과서는 희생자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박사는 “강제동원과 관련해 교과서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강제동원의 실태를 정확히 알리고,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짚어주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1005-17

▲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행동하는 일본의 양심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바라는 목소리는 일본에도 있었다. 지난 60년대부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사학자 고(故) 박경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후 일본 전역을 돌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네트워크 공동 대표를 맡는 등 주축이 됐다. 네트워크는 일본 내 흩어져 있던 400여 명의 강제동원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은 단체다. 히다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조사, 비밀 자료 공개 요구, 미불 임금 처리 등을 위해 힘썼다. 네트워크가 수집한 자료는 한국 위원회로 보내져 진상규명을 위한 토대가 됐다. 최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히다 대표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에서도 다시금 노력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정진용, 이소연, 심유철, 박효상, 박태현 기자 [email protected]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email protected]

영상=윤기만 [email protected]

<2017-10-05>쿠키뉴스

☞기사원문: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15번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응원영상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모금 참여
https://www.minjok.or.kr/archives/97796

금, 2018/09/07- 09:52
43
0

식민지 비망록 38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3

옛 연합군포로수용소 터에 들어선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의 현재 모습. 사진의 한가운데 보이는 벽돌형 건물이 원래 포로수용소 막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24

『매일신보』 1942년 2월 16일자에 전면 보도된 ‘싱가포르 함락’ 관련 내용이다. 이 당시 무조건 항복에 따라 다수의 영국군과 호주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선통사(善通寺, 젠츠우지) 포로수용소를 개설하여 적국 고위장교 위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홍콩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와 도쿄, 그리고 조선, 대만(臺灣, 타이완), 태(泰, 타이), 마래(馬來, 말레이), 비도(比島, 필리핀), 과와(瓜哇,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도 속속 포로수용소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선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타이라(高橋坦, 육군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2년 3월 23일에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육군대장)가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장)에게 보낸 ‘조선군부로수용계획(朝鮮軍俘虜收容計畫)’ 제하의 전문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설치목적이 노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미영인 부로(米英人 俘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 함과 동시에 의연히 조선인 대부분이 내심 갖고 있는 구미숭배관념(歐美崇拜觀念)을 불식하기 위한 사상선전공작의 재료로 제공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25

육군성(陸軍省)에서 1942년 7월 5일부로 조선부로수용소가 경성부 청엽정 3정목(청파동 3가) 100번지에 설치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일본제국관보』 1942년 11월 4일자 휘보(彙報)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26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옮겨온 연합군 포로들이 ‘조선부로수용소 본소’인 옛 이와무라제사소 공장터에 당도하는 장면을 담은 보도사진. (『통보』 제126호, 1942년 10월 15일자)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복해환(福海丸, 후쿠카이마루)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설정된 곳은 원래 이와무라제사소(岩村製絲所)의 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평양의 신학교 건물과 같은 곳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27

조선부로수용소 출신 호주군 병사 존 윌킨슨(John D. Wilkinson)이 남긴 『조선포로수용소에 관한 스케치(Sketches of a POW in Korea)』 (1945)에 수록된 ‘경성 캠프 약도’. 포로수용소 막사로 사용된 4층짜리 벽돌건물은 이와무라제사소의 공장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지난 2011년 1월까지 잔존하였으나, 학교 건물신축공사 관계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포로라는 처지에 이러한 시설조차도 과분하다는 이유로 폐공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번복되었다고 알려진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편찬하고 조선공업협회가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라는 자료를 취합하면, 이 자리가 제사공장으로 사용된 것은 1930년에 가베상회(可部商會, 1927년 1월 창립)가 처음인 듯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경영난으로 이내 부도 처리되면서 1932년 이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계열의 동양제사 경성지장(東洋製絲 京城支場)으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이와무라제사소(1934년 10월 창립)로 탈바꿈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회사의 설립자는 함북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遊仙炭鑛)의 주인 이와무라 쵸이치(岩村長市)인데, 이러한 탓인지 이 공간은 토목건축청부업과 목재제재업 등을 영위하는 이와무라구미(岩村組)의 경성출장소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그 후 이와무라제사소는 1940년 1월에 이르러 서울지역을 벗어나 원재료(누에고치) 조달이 용이한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감에 따라 이 자리는 빈 건물로 변한 상태였다.

28

『매일신보』 1938년 6월 1일자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던 이와무라제사공장이 원재료인 누에고치가 풍부하게 확보되는 강원도 춘천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깐 눈여겨 볼 대목은 포로수용소의 입지여건이다. 보통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다수의 군중과 격리된 오지를 선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도시의 외곽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포로수용소는 이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지 인접지역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 연합군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 일본제국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것 아니더라”는 식의 관념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9

‘싱가포르 함락 1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군사령부가 영국군 포로장교들을 강제동원하여 벌인 좌담회 내용이 『매일신보』 1943년 2월 15일자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황군(일본군)의 기동력이 빠른 데에 놀랐다”거나 “신속 과감한 기습에는 견디지 못했다”는 식의 굴욕적인 발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이들 연합군포로들이 노역의 대상자로 적극 활용된 사례는 1943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이 이곳에 재배치된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들은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되었고, 이 인원은 추후 보충되어 총계 350명으로 증원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니는 연합군 포로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29호(1942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현지보고(12) 조선부로수용소」라는 제목의 탐방기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2쪽)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단벌옷의 나그네 차림으로, 풀이 죽어 정신없이 일동(一同)이 조선으로 보내져 온 것은 가을이 아직은 옅은 9월말이었다. 그리고 이곳 경성 청엽정(靑葉町, 청파동)의 ‘조선부로수용소’에서 그들의 제2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부 남방(南方) ○○작전에서 살아남아, 시시각각으로 압박해오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포위철환(包圍鐵環) 아래 온갖 계책이 소진되어 죽음의 문턱을 앞두고 항복에 따라 목숨을 유지하게 된 광영의 ― 그 광영은 이미 낡고 또한 공허한 것이지만 ― 영국군인, 호주군인이다. 그로부터 2개월, 그 가을도 급격히 떨어져 저물어 어느 새 그 사이에는 흰 눈이 온 것을 보았다.
(23쪽) 그 면면은 영국병사, 호주병사 외에 프랑스병사, 카나다병사도 각 1명씩이 섞여 있고, 최고령은 카쥬 중좌(中佐)의 58세부터 최연소는 20세까지이다. 점심에는 빵을 먹고, 아침과 저녁은 일본식(日本食)인데, 이미 미소시루(味噌汁, 된장국)와 다꽝(澤庵, 단무지)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소내(所內)는 장교를 제하고 10개 반으로 나뉘어져, 아침에는 7시에 기상하고 취침은 9시, 정연한 규율생활을 한다. 2개월 사이에 아침저녁 점호의 인원보고만큼은 완전히 일본어로 할 수 있게끔 되었다.
(24쪽) 아침 8시반, 그들은 희희낙락하게 대오를 갖춰, 교대로 황국총후(皇國銃後)의 생산작업에 참가하고자 수용소를 출발한다. 경성에는 시내 수개 소에 그들의 작업장이 있다. 각 곳의 작업장에서 그들은 묵묵히 작업에 힘쓰고 있다.
(25쪽)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 반도 동포가 부로황화(俘虜皇化)의 최일선에 있다. 이곳 작업장에는, 이날, 지난 6월에 모집에 응했던 임헌직(林憲直, 충남), 기본진원(杞本鎭月, 충남), 이부창인(李阜昌仁, 전남 제주도)의 세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지도와 감시로서 정전(征戰)의 고귀한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말미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제국이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 직후의 일이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에 수록된 「반도인 청년의 광영, 미영인 포로감시원에 대량 채용」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반도인으로 하여금 명실이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고자 명후년부터 징병제도를 실시한다는 발표에 조선산천이 기쁨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때 22일에도 다시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남방 각지에 포로가 되어 있는 미국, 영국 사람을 감시하는 무거운 임무를 조선 청년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다는 공표가 있어 반도청년의 기쁨을 절정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육군당국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반도청년에가 맡기게 된 것은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조선의 큰 영예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할 때 포로를 감시한다는 것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동양 사람은 사람으로 알지 않든 미국과 영국 사람을 지킨다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실로 그들로 하여금 반도인의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여 마음으로부터 일본제국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신을 갖게 하는데 있는 만큼 그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하략)

 

30

『매일신보』 1943년 3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에 온 부로(포로)」 개봉안내 광고문. 안석영(安夕影)이 감독 편집한(조선군사령부 지도, 조선영화 제작 배급) 이 영화는 연합군 포로와 더불어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활약을 담고 있는데, “귀축미영의 초라해진 패잔의 생생한 모습을 보라”는 선전문구만으로도 제작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1

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에 관한 구라시게 조선군 보도부장의 담화를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

 

이와 함께 이 당시 포로감시원의 채용대상으로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국민학교 졸업자로 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두 달 가량의 훈련과 더불어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현지에 파견한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다만, 이때 함경남북과 평안남북을 포함하는 서북선 지방 거주자는 인력동원대상에서 특별히 배제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하자원개발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많은 사람이 소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당시 조선군 보도부장 구라시게는 “특히 특별지원병을 지망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은 자나 장래의 비약을 기하여 구미인(歐米人)을 연구하려는 열의를 가진 청년은 절호한 이 기회이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라는 취지로 포로감시원 지원 모집을 부추긴 바 있었다. 이때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로감시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 일대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애꿎게도’ 일본의 패망 이후 포로학대와 가혹행위를 이유로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 판결을 받거나 징역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다.

금, 2018/09/07- 10:00
84
0

白露(백로)

 

衆人嘆酷暑(중인탄혹서)

可識忽秋臨(가식홀추림)

促織哀鳴夜(촉직애명야)

思鄕獨醉吟(사향독취음)

 

白露에

 

많은 사람 심한 더위 탄식했는데

문득 가을이 왔음을 가히 알겠네

귀뚜라미 찌르르 구슬피 우는 밤

고향을 그리며 홀로 취해 읊는다.

 

<時調로 改譯>

 

酷暑를 탄식했는데 문득 가을이 왔네

귀뚜라미 찌르르르 구슬프게 우는 밤

고향을 그리워하며 홀로 취해 읊는다.

 

*白露: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들며

9월  8일경이다.  또는 ‘이슬’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  *衆人: 뭇사람 *酷暑: 몹시

심한 더위 *促織: 실솔(蟋蟀). 청렬(蜻蛚). 귀뚜라미  *哀鳴: 새나 짐승, 벌레 따

위가 슬프게 욺. 또는 그런 소리 *思鄕: 망향(望鄕).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각함.

 

<2018.9.8, 이우식 지음>

토, 2018/09/08- 09:58
49
0

식민지역사박물관. 실수로 입금했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2013년 부정선거 주장때부터 주사파들에게 악용당하면서 피해를 많이 본 이석훈이라고 합니다.

실수로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하였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문자 메세지도 그만 주시길 바랍니다.

이석훈  010-4335-7501     [email protected]      790812-1######

월, 2018/09/10- 19:19
91
0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2502

안녕하세요?
위의 사이트는 모 교회의 계시판입니다.
건국 100주년이 아니다.
이승만은 배드로다.
등등 참 힘든 역사관으로 교인들이 힘들어 합니다.

최근에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까지 동원해서 몇개월간 계속 힘든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고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o 대한민국의 위기와 기독교의 역할_건국 70주년의 의미

2018년 9월 16일(일요일)에는 다시 김문수 전 지사를 초청하여 2시간에 걸쳐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강연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 좌파의 근본 문제점, 좌파 탈출 경험, 좌파 정책의 필연적 실패 등에 대해 김문수 전 지사가 체험하여 느끼고 본 대로 진술하려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사랑침례교회 서창동 캠퍼스로 오셔서 같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시: 2018년 9월 16일 오후 3시
강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강연 제목: 나의 좌파 체험 및 탈출기

o 이병태 교수: 문재인 정부 1년_한국 경제는 왜 위기인가? 최저 임금 소득 주도 성장의 허구

o 이춘근 박사: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과 부국강병 2부_박정희 시대의 국제 정세

o 김철홍 교수: 나는 어떻게 좌파를 버렸나?_공산주의 주사파 이해, 좌파 탈출

o 전교조의 실체와 학교 교육의 문제 1부_전교조의 정체 및 사상

o 홍지수 작가: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1부_정치적 금기어(PC)의 정의 및 계보,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 세계 좌경화

일, 2018/09/16- 16:20
97
0

기사를 읽던 도중 철도순직자조혼비에 대해 알게되어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철도순직자 조혼비에 관한 정보를 더 들을 수 있을까해서 글 남겨 봅니다.

추가적으로 기사에서 조혼비 설명해주시던 이순우 소장님께 연락이 닿아서 몇가지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이메일을 알아갈 수 있을지 글 남겨봅니다.

일, 2018/09/16- 14:57
141
0

奉勸人君國家朝餐祈禱會不參

 

衆嘲祈禱會(중조기도회)

忽欲使君知(홀욕사군지)

孰語耶蘇國(숙어야소국)

愚民起大疑(우민기대의)

 

삼가 나라님께 국가 朝餐 기도회 不參을 권하오

 

많은 이가 朝餐 기도회 조롱하니

문득 나라님이 알도록 하고 싶소

그 누가 예수의 나라라 말합니까

못난 백성은 큰 의심을 일으키오.

 

<時調로 改譯>

 

많은 이 조롱하니 나라님 아셔야겠소

예수의 나라라고 그 뉘라서 말합니까

마침내 못난 백성은 大疑를 일으키오.

 

*人君: 임금. 나라님 *朝餐: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아침 식사 *耶蘇: ‘예수’

音譯語 *愚民: 우맹(愚氓). 어리석은 백성 *大疑: 크게 의심함. 의심이나 의혹.

 

<2018.9.17, 이우식 지음>

월, 2018/09/17- 13:56
24
0

嘆世態(탄세태)

 

愚夫論國事(우부논국사)

雜漢說儒經(잡한설유경)

牧者錢蟲化(목자전충화)

山僧尙未醒(산승상미성)

 

세태를 탄식하며

 

어리석은 남자가 나라의 일 논하고

잡스런 놈이 儒家의 경전을 說하네

牧者는 그만 돈벌레 되고 말았으며

山僧은 아직도 술에서 못 깨어났네.

 

<時調로 改譯>

 

愚夫가 國事 논하고 잡놈이 儒經 설하네

예수 믿는 목사님은 錢蟲 되고 말았으며

산속의 저 스님 또한 아직도 未醒이라네.

 

*愚夫: 어리석은 남자 *國事: 나라에 관한 . 나라 정치에 관한 일. 나랏일 *雜漢:

잡놈 *儒經: 유서(儒書). 유가서(儒家書). 유가(儒家)에서 쓰는, 유학에 관한 책.

 

<2018.9.18, 이우식 지음>

화, 2018/09/18- 07:24
54
0

 우리의 전진 도상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고,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과 남이 서로 손을 맞잡고 뜻과 힘을 합쳐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때 길은 열릴 것이며, 우리 스스로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는 흔들림을 모르고 더욱 힘 있게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소중한 자산입니다

목, 2018/09/20- 22:29
34
0

/wp-content/uploads/2018/09/201809.pdf

금, 2018/09/21- 19:04
98
0

[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금, 2018/09/21- 19:01
78
0

寄金正恩國務委員長

 

孰測人民苦(숙측인민고)

村儒欲問君(촌유욕문군)

好機南北美(호기남북미)

此際拂喧紛(차제불훤분)

 

김정은 국무 위원장에게 띄우는 글

 

그 누가 人民의 괴로움 헤아리나

시골 선비는 그대에게 묻고 싶소

南과 北과 또 미국에게 好機이니

차제에 떠들썩함 탁 떨쳐 버리오.

 

<時調로 改譯>

 

人民의 苦 뉘 아나 시골 선비 묻고 싶소

南北과 미국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이니

차제에 떠들썩함을 화들짝 떨쳐 버리오.

 

*村儒: 시골에 사는 선비 *好機: 좋은 기회. 호기회(好機會) *喧紛: 매우 떠들썩함.

 

<2018.9.22, 이우식 지음>

토, 2018/09/22- 07:18
6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