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지역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익명 (미확인) | 목, 2017/10/05- 20:58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던, 우연한 기회가 주어졌든 도전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민중의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는 새로운 직업의 길을 개척한 ‘꾼’들을 찾아 그들의 밥벌이와 가치를 묻습니다. 동영상 강좌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한다면, 페이퍼 특강에선 독자에게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할 계획입니다. 직업의 세계에선 때론 구체적인 기술보다 좋은 관점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1005-1

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며 48년 건국설을 밀어붙일 때 역사학자 조한성은 책『한국의 레지스탕스』를 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밀결사 단원들이 목숨과 맞바꾸면서도 소망했던 새로운 조국 꿈을 추적했다. 그들의 투쟁은 때론 성공하고 많은 경우 패배했지만 그들이 흘린 선혈에서 대한민국이 비롯되었다고 조한성은 말한다. 이후 그는 『해방 후 3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해방 후 역사가 미소 양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 민족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분단도, 전쟁도 모두 외세 탓인가?”

역사학자 조한성을 만났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의 저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그 참신한 질문 때문이다. 43세의 이 역사학자는 늘 치밀한 사료분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상상을 선사했다. 인터뷰는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1005-2

▲ 좌 부터 ‘해방 후 3년’ ‘한국의 레지스탕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다. 이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 공저다. 그의 저술은 때로 모래알처럼 작게 보였던 것도 크게,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한다.ⓒ출판사 생각정원 캡처

현대 사학의 원로이신 서중석 선생님께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한성: (웃음) 이제 서중석 선생님 그만 팔아먹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영상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충격이 컸죠. 돌베개에서 나온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시절 체험이 저를 현대사로 이끌었어요.

지도교수님은 현대사 박사 1호이신 서중석 교수님과 근대사 1세대 연구자이신 임경석 교수님이셨어요. 서 교수님은 한 강의에 20개 정도의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학생들을 나눠 조사를 시키셨어요.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행연구’에 대한 파악이었죠.

연구사 정리는 역사연구의 기초공정이에요. 현대사는 아직도 공백이 많은 분야거든요. 그 공백을 찾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 인식과 질문을 던지게 돼요. 서중석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에도 박정희 시대를 계속 정리하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론 힘이 드시더라도 80년대까지 쭉 정리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임 교수님은 사료를 다루는 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치셨어요. 서중석 선생님 안식년일 때 임 교수님께 배웠거든요. 사료 가운데 한국 근대사 자료는 일제 생산문서가 상당히 많아요. 이 문서들은 일제의 관점으로 쓰였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독립운동가가 쓴 자료라 해도 그 문서들은 작성자 중심으로 작성되었기에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엔 사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해 참과 거짓을 읽어내야 합니다. 임경석 선생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전부터 역사학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조한성: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선생님 수업이 재미도 있고 진지했어요. 전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힘을 내는 스타일인가 봐요.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어머닌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길 원하셨는데 제가 막내라 그런지 진로를 강요하진 않으셨어요. 나중 문제가 있으면 곁에 끼고 함께 살려고 그러셨는지는 몰라요. (웃음)

석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와 자료를 봐야 하고, 이때부터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대단한 은사님들께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저의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에 담아 알리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1005-3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조한성ⓒ민중의소리

돈벌이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한성: 처음 이 일을 선택할 때부터 돈 버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사학과 들어가면 죽으라고 한문공부 해야 한다고 해서요. 실제로 사료분석에 한문은 필수인가요?

조한성: 아, 너무 안타까워요. 한문을 피해갈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고대사, 한국 중세사, 동양사 연구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 실력이 필요해요. ‘지곡서당’ 같은 곳을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요. 서양사는 영어가 필수, 한국근대사의 경우 한문과 일어가 중요해요.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요. 전공에 따라 영어, 러시아도 필요하죠. 해당 언어를 알면 더 다양한 사료를 볼 수 있으니까 유학을 가는 친구도 많아요. 다만 현대사의 경우 국한문 혼용이 많아 한문의 자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설렁설렁해도 가능해요.

일제의 공적조서, 해방 후엔 명백한 친일파 증거

그래도 한문의 자구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어야 하는군요? (웃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하셨습니다. 그때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도 큰 성취감을 느낀 조사 활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한성: 아시겠지만 친일파와 관련한 조사는 당대에 해야 했던 작업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증인을 채택할 수가 없죠. 만일 해방 후 철저히 조사했다면, 친일행위를 목격하고 들은 이들의 증언, 당사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자료가 다 남아있었겠죠.

제가 ‘관료팀’에 배치되어 도지사, 군수들 조사했어요. 거물급들은 관련 텍스트가 남아있는데 지방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4년 반이라는 시한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알려지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을까요?

조한성: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남긴 ‘지나사변 공적조서’라는 자료가 있어요. 중일전쟁 시기 일제가 관료들의 공적을 조사해 훈‧포상을 해줬는데 당시엔 공적을 적은 조서였지만 지금은 친일 행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죠. 어떤 후손이 선조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지방에서 선조를 미화하고 기념사업을 하려다 이 자료 때문에 친일행위가 명확히 드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이 자료는 위원회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인데 이 자료 때문에 3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관료들의 친일 행위가 많이 드러났어요. 위원회가 천 명 정도의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자료의 수집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위원회가 좀 더 오래 유지가 됐더라면 아마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거상 巨商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와 손잡고 좋은 일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들의 후손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더라고요. 친일파 분류는 어떻게 합니까?

조한성:  친일파 분류는 대개 1904년 러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의 행위를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해방 후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는 누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지,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일제 강점기 친일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친일파 선정에서 제외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친일행위를 한 경우는 친일파로 선정합니다.

‘밀정’의 압권,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암살’ ‘밀정’ ‘군함도’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흥행입니다. 모두 보셨는지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성 이면엔, 또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준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한성:  저 역시 언급하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역사학계에서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영화 ‘밀정’은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작가나 감독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대사 하나하나를 많이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김원봉이 황옥(기자 주:황옥은 실제 인물이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료를 설득하는 대목의 대사를 보세요.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소?”

김원봉이 황옥을 설득하는 방면도 압권이거든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영화의 백미죠. 실제 역사에서도 황옥이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에요. 아마 작가의 상상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과한 비판이죠.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느냐’인 것 같아요.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어색하잖아요? 그런 건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자연히 느끼게 되죠. 반대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면 그 역사적 팩트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도 있거든요. 최근 영화 ‘군함도’가 흥행에 실패한 건 아쉬워요. 흥행의 실패로 군함도의 역사나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인 건 맞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계열을 모두 수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라이트의 공격에 대한 반정립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임정 법통계승을 따지다 1919년 건국절로 가거든요. 역사적 맥락에 비추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거든요.

조한성:  우선 48년 건국절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죠. 반면에 1919년 건국절 주장도 한계가 분명해요. 건국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스러워요. 건국절 논란 자체는 소모적이에요. 애초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압도하진 못했어도 여타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919년~21년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 이후에는 세력이 약화하지만 40년 이후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광복군도 만들고 좌우합작도 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웠죠. 다만 여타 세력을 압도하진 못했기에 안타까움이 있죠.

1005-4

▲ 역사학자로서의 특징이랄까. 조한성 작가는 인터뷰 도중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에선 관련 자료를 다시 꼼꼼히 보고 말을 다듬었다.ⓒ민중의소리

“독립선언 33인 중 단 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참 맛깔나게 우리 역사를 소개하는 스타강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올해 설민석 강사가 3.1 운동 관련 ‘민족대표들의 태화관 술자리 발언’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을 술자리로 폄하하고 ‘태화관 마담’ 발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자칭 ‘민족대표’라는 분들이 독립선언문을 내고 자수한 건 당시 목숨 걸고 항쟁을 이어갔던 민중과 대비하면 투항주의, 내지는 명백한 제한성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지도자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한성:  

저도 개인적으론 설민석 강사의 강의를 좋아해요. 이분 때문에 우리 역사에 재미를 붙이신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장하거나 재미있게 하려다 실수할 수 있거든요.

책은 출판 전 단계에서 거를 수 있지만, TV는 그렇지 않죠. 미디어 환경의 특성상 ‘스타강사’들은 자신의 역량 그 이상의 것을 요구받거든요. 방송국에선 시청률을 생각해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역사의 영역에선 강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봐요. 요릿집에서 했다고 독립선언 그 현장을 술자리라고 하는 건 엄청난 왜곡이죠.

독립선언 33인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학계에서도 존재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역할 즉, 국내 3.1 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준비하고, 조직을 확장해 이 운동을 전국화한 공로는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33인의 ‘서명’은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상황에선 목숨 걸고 한 겁니다.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을 끌어 모두 적용하려고 했고요.

33인이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조선민족대표’라고 밝혔어요. 이를 이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을 ‘민족대표’라고, 즉 민족지도자 33인으로 과대평가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33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 조선 총독부, 각국 영사관에 알리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통고’를 한 것이죠. ‘자수’라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이고, 자신들의 표현대로 독립선언을 통고한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이 33인의 역할이었죠.

28일 최종회의에서 군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는데, 군중시위가 폭력화할 것에 대한 우려였어요.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독립선언의 경과를 주장하기로 한 것이죠. 애초 33인은 군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이것이 한계죠.

만약 33인 중 단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체포될 때까지 지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에 버금가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3.1 운동 주역 중 천도교, 기독교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는데요. 바로 학생이에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지요. 이들이 3.1, 3.5 서울시위를 실질적으로 지도했고 각 지방의 시위에서 활약했어요. 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45년 이후 4.19, 6월 항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죠. 전 학생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독립 운동사를 보면 무슨 단체니 계파니 하며 반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어떤 큰 줄기가 없이 오밀조밀하게 흩어져 분열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그런 것인지요? 당시 식민지 나라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는지요?

조한성: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다른 나라의 사례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다만, 우리 독립운동의 약점은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진짜 불행은 해방 시기가 바로 치열한 냉전의 시작 시기였다는 것이죠. 미소 대결이 첨예화된 곳이 한반도였어요.

“내부의 힘이 강대국의 ‘규정’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저서 『해방 후 3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규정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민족 내부의 통합된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이는 지금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일종의 경각심을 준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관점은 ‘역사에 대한 가정’,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분단의 길목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요?

조한성: 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보면 미·소의 규정력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미소 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소 공동위원회죠. 한반도를 미래를 다루는 회의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동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외부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부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것도 미소의 규정력만큼이나 크다는 것이죠. 그럼 분단이 되지 않으려면 어때야 했을까. 그것은 좌우가 하나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좌파의 역할입니다. 남쪽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좌우를 묶으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이런 세력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자연히 박헌영이나 김일성이 좌우합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의 영향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쪽이 훨씬 진지했어요. 여운형의 경우 수차례 북으로 가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단 한 차례도 내려오지 않았죠.

『해방 후 3년』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남로당의 단정 반대 투쟁이나 4.3 항쟁, 지하 총투표 조직이 진지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 좌경 모험주의로 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던.

조한성: 남로당의 모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헌영은 지하 선거를 위해 모든 조직을 동원해 투표용지를 옮기고 주민을 모아 투표를 시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이 노출되고 파괴돼요.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조직이 모두 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당시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투쟁이 얼마나 졸속이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죠. 김일성과의 경쟁을 의식한 박헌영의 야심이었다고 밖엔 해석이 안 돼요.

김구는 일관되게 ‘충칭 임정’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고, 미 군정을 엎기 위한 2차례의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좌우 합작 절호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칭 임정세력이 주요 내각을 구성하고 나머지 3석 정도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배타성’,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김구가 해방 이후 나라의 전면적인 개혁의 측면에서 좌익세력과도 진지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반공의식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제가 연구 하면서 가장 복잡한, 그러니까 어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달리 개인적 권력욕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임정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확실히 김구 선생은 반공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활동하면서 쌓인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은 20년 무렵 레닌자금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립을 암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께선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즉 ‘5년 신탁통치 후 통일 정부 수립방안’에 진정성이나, 현실성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가령 동아일보의 치명적 오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조한성: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국제적 합의였으니 결의안대로 되었다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반탁운동이 일어나면서 결의안대로 하는 것이 어렵게 돼버렸다는 겁니다.

당시 오보를 동아일보만 꼭 찍어서 얘기하면 동아일보측이 굉장히 섭섭할 거예요. 당시 다른 신문들도 대부분 똑같이 보도했으니까요. 당시 오보는 사실상 미 군정이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은 건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소련을 경직화시켰고, 이후 3상회의 원안 고수만 주장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미국이나 소련이나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 전쟁 막는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보는 지금의 한반도, 남북 상황.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대통령의 안보행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조한성: (한숨) 우선 답이 없어 보일 만큼 깜깜하죠. 북한은 당분간 핵무장의 완성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이고요. 그 후 북미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해방 후 3년의 경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상황에 끌려만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참혹한 실정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교력과 상관없이 48년도엔 누가 봐도 전쟁이 확실했어요. 이승만은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런 이승만이 불안했던 미국은 한국군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죠. 결국 전쟁에 이길 힘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쌍방 간의 도발을 이어가다 남침을 맞잖아요?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면 김일성이 그렇게 쉽게 남침을 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사인을 계속 주면서 북‧미간 협상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사자 아닙니까?

역사연구자로 살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한성: 제 관점으로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직 한국 학계에선 ‘논문’은 인정받지만, ‘대중저술’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들이 대중저술을 선호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오히려 역사 관련 책을 써요. 재미있죠.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엔 늘 ‘오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이런 오류 없이 대중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레지스탕스』 , 『해방 후 3년』,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저술인 『군함도 – 끝나지 않은 전쟁』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있는 문체가 당대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지금은 ‘3.1 운동’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에요. 자료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잘 정리가 안 되는 경우에요. 일반인들이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분들의 자료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심문 조서’같은 형식으로 많은 분의 자료가 남아있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쓰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거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며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잡는 방법이랄까요? 조언 해주신 다면요?

조한성: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실제 주인공으로 분해서 인터뷰 형식이든, 신문기사의 형식이든 자신의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이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으면 해요.

<2017-10-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드는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3

“3.1혁명 100주년 특집편성_만세열전 1부”

팟빵링크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9/02/28- 10:29
11
0

‘5분 친일인명사전’ 4편, 친일 지식인(언론인) 심우섭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유툽과 팟빵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DBM7…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9/02/28- 10:27
13
0

팟캐스틑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전형”

팟빵 링크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9/02/28- 10:26
18
0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 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대법원 판결이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신청한 ‘신일철주금의 한국 자산 관련 압류조치’를 우리 법원이 승인한데 대해 일본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다른 양자 협의를 요청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무엇인지?

목, 2019/02/28- 10:25
5
0

더 자세한 이야기는 민족문제연구소 역사 전문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3

친일파 3편 – ‘오현주’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오현주, 반민특위 법정에서 불기소 판결로 풀려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팟캐스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팟빵링크 :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9/02/28- 10:25
26
0

50년 7월 청주상고 교사등 100여명 집단학살 매장시켜

0228-7

▲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지난 2009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청주청원 합동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충북도는 올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으로 보은 내북면 아곡리를 선정했다. 아곡리는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선정한 도내 우선 발굴 대상지 6곳에 포함됐으며 충북도와 도내 유족회 간담회 때 최종 대상지로 선정됐다.

도내 민간인 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87곳이며 2007~2008년 청주 분터골과 지경골 2곳에 대한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이후 MB정부 출범이후 근거법 기간 만료돼 발굴사업이 중단됐다.

도는 올해 자체 사업으로 5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보조사업자 공고와 심의를 거쳐 ㈔민족문제연구소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아곡리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청주지역에서 소집된 150여 명으로 추정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3월초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해 수습된 유해는 보존 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다. 충북도는 국회 계류 중인 과거사 관련법(7건) 제·개정이 이뤄지면 국가사업과 연계해 추진할 방침이다.

아곡리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는 이미 2014년 6월 청주·청원 보도연맹유족회, 충북역사문화연대가 일부 발굴작업을 진행했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외면하는 가운데 민간단체가 장비를 동원해 20여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0228-8

▲ 2004년 청주청원유족회의 보은 내북면 아곡리 보도연맹 양민학살 매장지 자체 발굴작업 모습.

당시 발굴 현장에서 취재진을 만난 주민 신덕호씨는“그때 (1950년 7월10일께) 군인·경찰이 논밭에서 일하던 주민들을 전부 집에 들어가게 하고 산골짜기 쪽에서 총소리가 나구 비명이 들렸다. 트럭이 서너대 왔으니까 한 100명쯤 되는 것 같다. 총살 한 뒤에 마을 사람들 불러놓구 ‘빨갱이 잡아놨으니 장례 치르라’고 해서 우리가 가까운 야산 3곳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보은 아곡리 민간인 학살 피해 사실은 지난 1994년 <충청리뷰>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취재진을 만난 목격 주민 황성철씨는 “7월7일 오전 10시께 아곡리에 트럭 5~6대가 들어와 여기서 내린 사람들을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살시켰다. 마을주민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지시를 받고 구덩이에 시신을 묻었다. 여자들도 몇명 보였다”고 진술했다.

또한 아곡리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청주 가족들이 유일하게 시신을 수습한 경우도 확인됐다. 당시 청주상고 교사였던 고 강해규씨(당시 30세)는 청주경찰서 무덕관(강당)으로 소집된 뒤 몇일후 아곡리까지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 강 교사의 경우 가족들이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 인근 산자락에 위령비를 세운 것이 확인됐다.

94년 취재진과 연락이 닿은 미망인 이숙용씨(당시 72세)의 기억은 생생했다. “전쟁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땐데. 전날 밤에 학교에 숙직하러 간 애들 아빠가 다음날 낮이 됐는데도 안오길래 걱정이 됐어요. 근데 친구분이 부리나케 찾아와서 경찰에 붙잡혀갔다고 그러더라구요. 얼른 경찰서로 가보라고 하길래 음식 준비할 새도없이 빵을 사가지고 달려갔어요”

이씨가 청주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군용트럭 4∼5대를 둘러싸고 가족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안에는 젊은 나이의 보도연맹원들이 힘없이 앉아있었다. 남쪽으로 먼저 피난시켜 준다는 헌병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가족들은 이들에게 음식, 옷등이 담긴 보퉁이를 건네주며 안부를 빌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구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보은 친정집에서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된 것.

권혁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28> 충북인뉴스 

☞기사원문: 69년만에 전쟁 원혼 풀리려나? 보은 아곡리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관련기사 

☞뉴시스: 충북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보은 내북면 아곡리 

☞아시아뉴스통신: 충북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추진 

☞중부매일: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3월부터 유해발굴 추진

목, 2019/02/28- 14:18
13
0

北美再度頂上會談決裂

 

再遇無成果(재우무성과)

諸邦笑兩人(제방소양인)

犬猿焉可近(견원언가근)

莫道易相親(막도이상친)

 

북한과 미국의 두 번째 정상 회담 결렬

 

다시 만나 아무런 성과도 없으니

여러 나라에서 두 사람을 비웃네

犬猿間에 어찌 가까울 수 있을까

서로 친하기 쉽다고 말하지 말라.

 

<時調로 改譯>

 

재회하여 無成果니 여러 나라 둘 비웃네

개와 원숭이 間인데 어찌 가히 가까울까

相親함 무난하다고 그런 말은 하지 말라.

 

*再度: 再次. 두 번째 *決裂: 갈래갈래 찢어짐. 교섭, 회의 따위에서 의견이 합쳐

지지 않아 각각 갈라서게 됨 *諸邦: 諸國. 여러 나라 *犬猿: 개와 원숭이라는

으로, 서로 사이 나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相親: 서로 친하게 지냄.

 

<2019.2.28, 이우식 지음>

목, 2019/02/28- 20:18
36
0

새밀

고향동상친구형님

사밀

31

창녕영산의 새밀

1919

31가곱다

ㅂㅗ곱다

……..315

금, 2019/03/01- 06:42
38
0

정우성 묻고, 임헌영 답하다 

여성독립운동가 조명 영화 많다
‘암살’ 모델 남자현 열사 외에도
기생들 만세 동참·독립자금 대
독립운동가 가족 희생도 엄청 나
도운 여성들 훈장 주자는 말도

친일-친미 독재세력 이어졌는데?
지배세력 오랜 선거로 단련
개혁세력 더 치밀한 논리로 맞서야
혁명은 결국 국민의식 변화
극우파 5%로 줄이는 게 혁명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다. 문재인 정부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2019년을 한반도 평화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때마침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평화의 마중물이 될 ‘제2차 북미회담’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고 있다. 3·1 독립선언서에 담겼던 ‘세계평화의 정신’이 100년의 시차를 두고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 정착이라는 결실로 맺어질 수 있을지 온 겨레와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한겨레>는 3·1운동 100주년의 현재적 의미와 아직 이루지 못한 친일청산의 중요성 등을 짚어보는 다양한 기획을 연재 중이다. 그 중 하나로 최근 각종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배우 정우성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의 활동을 통해 역사청산 문제에 앞장서 온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의 대담을 마련했다. 이번 대담은 ‘정우성이 묻고 임헌영이 답하다’라는 주제로 27일 오후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됐다. 이날은 마침 1991년 창립한 민족문제연구소가 28살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0301-3

▲ 정우성-임헌영 대담

3·1운동과 난민인권운동 닮았나?
우리도 30여년 나라밖 떠돌아
이웃나라 도움으로 독립운동
나라 잃은 난민 돕는 건 당연

정우성(이하 정) 지난해 <한겨레>와 ‘난민 문제’ 관련한 인터뷰를 하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민족문제연구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연말을 맞아 존경하던 임헌영 소장님을 찾아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대담을 제안받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는데, 막상 이 자리에 오니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임헌영(이하 임) 젊은 독자들에게 3·1운동 100주년 이야기를 전하는 편안한 자리다. 오히려 저를 만나고 (정 배우의) 인기가 떨어질까 걱정이다. (웃음)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날에 소장님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갖게 돼 기쁘다. 벌써 100주년이 됐는데, 3·1운동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소장님께서 한 번 짚어주시며 시작하면 좋겠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100년을 기다렸을 것 같다. 지난 10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오히려 3·1정신을 매장하고 지우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 이후 분단과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3·1정신은 잊고 돈벌이 잘하고, 잘 먹고 잘살자”는 의식에 매몰돼 있었다. 100년 만에 제대로 3·1정신을 기념하는 자리니 그분들도 이제서야 제삿밥 먹어도 되겠다 싶으실 터다. 모든 언론과 정부 기관이 총동원돼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3·1정신이 무엇인지 의미를 되살리는 데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0301-2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오른쪽)과 배우 정우성(왼쪽)이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3·1운동 100주년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삼쩜일절’이라 읽는 세대에게?
독립운동한 분들 존경하라
친일사전 오른 이는 0.0176%
교장도 면장도 친일이냐 반발은
서민이 재벌 걱정하는 격

민족정신을 다시 한 번 다져야 하는 시점이라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고, 그동안 기득권 세력들이 왜곡하고 폄훼한 독립 선열들에 대한 가치를 되새김질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불과 1년 반 전에 ‘광화문 혁명’도 일어났고 정부가 바뀌었다. 3·1운동의 정신과 촛불 혁명을 연관 지어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3·1만세운동은 겉으로는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했지만, “왕(고종) 만세”를 외친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외친 것은 “조선독립 만세”였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김으로써 한 왕조가 끝이 났고 미래와 희망이 사라진 시대였다. 하지만 국민 절대 다수는 이념, 신분, 학벌, 빈부의 차이를 넘어서 한마음으로 만세를 외치며 우리가 살아 있음을 선포했다. 광화문 촛불 혁명 때도 똑같이 모든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하나였다. 당시 집회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못했던 지인들을 만난 경우가 많지 않나. 이런 건 3·1운동 이후 거의 처음이 아닐까. 100년 만에 민중이 다 함께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청년들이 많이 나섰다고 들었다. 당시 대다수 민중은 태극기를 본 적도 없을 정도였다던데. 광화문 때도 청소년들이 많이 거리로 나왔다. 당시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나라를 이끌 주인공인데, 요즘 청년들은 먹고 사는 문제 등 고민이 더 많은 것 같다. 지금 청년들에게 3·1운동에 대해 가져야 할 가치관에 대한 당부 말씀을 해주신다면?

청년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항상 역사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화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청년들에게 “어른들 말씀 잘 듣고 가만히 있어라”라고 교육했다. 하지만 개화기를 겪고, 국운이 기울면서 청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됐다.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에 앞장선 것은 결국 청년들이었다. 우리는 3·1만세운동을 떠올리면 항시 ‘민족대표 33인’을 말하는데, 그분들도 아마 청년을 비롯해 일반 민중들이 그렇게까지 들고 일어날 줄 몰랐을 것이다. 독립선언서가 굉장히 문학적이긴 하지만, 어렵기도 하다. 당시 그걸 읽고 완벽히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2%도 안 됐을 거다. 지금 대학 나온 사람들도 잘 못 읽을 정도인데. 독립선언서에 감화된 것이 아니라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 나라 잃은 설움을 느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선 것이다. 어느 시대나 아직 타락하지 않은 청년들이 더 올곧은 역사의식을 가진 셈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3·1운동에는 각종 직업을 가진 민중들이 다양하게 참여했고, 각자의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최근 출간된 <만세열전>(조한성 지음)이라는 책에서는 “3·1운동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100년 전 민초들이 이룩한 촛불”이라고 정의했다. 

제가 감동을 한 것은 당시 흔히 기생이라 불렸던 여성들이 만세운동에 많이 동참했다는 것이다. 그 여성들은 유흥업소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상류층의 부정부패를 더 많이 보고 알았다. 그리고 그분들은 당시 ‘일정한 수입이 있는 여성 직업군’이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 여성분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독립운동 자금이 전해졌다.

얼마 전 본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에도 유관순 열사와 함께 투옥된 기생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사회가 천시했어도 그분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다. 소장님께서 여성에 관해 말씀을 해주셨으니, 자연스럽게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해보겠다. 영화 <암살>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환기됐고, <항거>를 통해 유관순 열사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최근 정부가 유관순 열사의 서훈이 3등급에서 1등급으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영화의 영향도 있었고, 그후 연구도 많이 이뤄져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암살>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 열사가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그간 선양사업이 남성 위주로 추진되면서 관심에서 빗겨나 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고 기념하자는 취지의 행사나 흉상 건립 등의 기념사업도 이뤄지고 있다. 올바른 현상이다.(2018년 12월 기준으로 국가보훈처에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수를 보면, 남성은 1만5180명, 여성은 357명이다.)

반민특위와 친일청산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고 임종국 선생의 책을 읽다 보니, 가족의 희생이 엄청났다. 우리는 독립운동가 개인만을 기억하지만, 그 노력 뒤에는 믿고 옆에서 지지해 준 가족들의 희생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얼마 전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독립운동할 수 있게 도운 여성들의 공적을 인정해서 따로 훈장을 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가족과 그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가부장제 사회였어도 가족들의 지지와 도움이 없이 독립운동은 못 했을 것이다.

사실 친일청산이 안 되면서 그 세력이 독립운동가 가족들도 많이 핍박했다고 들었다. 그 세력이 결국 친독재 세력으로 이어져서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지형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소장님만 해도 박정희 정권 시절 문인간첩단조작 사건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두차례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시지 않았나. 이런 잘못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도 이어져 블랙리스트라는 이름 아래 문화예술가들도 많은 핍박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100년은 3·1정신을 지우고 역사적으로 매장시키는 데 소진된 시기였다. 분단 이후 친일세력이 그대로 친미세력으로, 이후로 독재 세력으로 이어지면서 대대로 지배계급으로 자리했다. 그들은 대대로 선거운동에 단련된 사람들이다. 가끔 “일제식민시대 때 우리 집안은 징역 간 사람도 없고, 다친 사람도 없고, 일본군 강제위안부 끌려간 사람도 없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런 집안은 멀쩡한 집안이 아니다. 민주정권이 들어서고도 늘 수세에 몰리는 게 가슴이 아프다. 민주세력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비유하자면, 레슬링장에 레슬링 선수들이 버티고 섰는데, 거기에 무용수들을 집어넣고 싸우라고 해봐라. 싸움이 안 되는 거다. 과거로부터 지배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고 선거에 단련된 세력들을 갈아치우려면, 개혁세력이 얼마나 더 논리를 세우고 독립운동보다 더 치열한 각성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가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고 “이젠 다 됐다”는 착각 속에 다시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돌아가면서 국민들도 시대적 학습효과를 얻은 것 같다. 혁명이 끝나면 혁명이 완성됐다고 생각하는데, 혁명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정권이 바뀐 것이 역사의 변수가 되기는 하지만, 저는 혁명이라는 것은 결국은 국민의 의식 변화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세계 시민으로서 가지는 의식 말이다. 인권의 중요성, 남녀평등의 중요성, 세계평화의 중요성, 환경의 중요성…. 이런 것들을 중심에 놓고 관심을 가지는, 그런 국민 의식의 전환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다. 우리 사회엔 일부 극우파들이 있다. 극우파가 20%를 넘어서면 썩은 사회다. 한 사회에는 별종들이 많기 때문에 한 5% 정도 있는 건 봐 줘야 한다. 그건 다양성이다.(웃음) 그런데 20%가 넘으면 불행한 사회다. 그 세력을 5% 이하로 줄이는 것이 결국 혁명이라고 본다. 세월호 가족들을 보면서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이고 맹자가 말하는 ‘사단칠정’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과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인데,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극우로 불러주는 것도 아깝다.

소장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짧은 시간 안에 변화의 주체가 됐다. 친일·친독재 세력들이 물질숭배와 성장 우선 논리를 설파하고 젊은 세대의 역사교육을 단절시켰지만, 결국 우리 국민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올바르게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젊은 세대들도 좀 더 현명한 길을 찾지 않을까, 저는 긍정적으로 본다.

동감한다. 우리나라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하는 미국보다, 메이지유신 이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거의 없었던 일본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 이승만이 불과 12년, 박정희가 그렇게 독재를 했어도 18년밖에 정권 유지를 못 했다. 전두환은 간신히 임기 채웠다. 87년 6월 항쟁, 그 이후로는 5년 단임이다.

정우성 배우 주연한 ‘증인’ 봤다
“넌 자폐아, 네 말 못 믿어” 대사
“넌 빨갱이” 독재자 말과 겹쳐
차별적 색 입혀 말 못하게 해

0301-1

▲ 임헌영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왼쪽)과 배우 정우성(오른쪽)이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한 ‘3·1운동 100주년 관련 대담’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결국 1900년대 조선 역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다. 저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활동을 하면서 난민 사태가 벌어지는 많은 국가를 가보면 그들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고, 그 후유증을 아직도 앓고 있다. 난민 이야기를 할 때 우리 독립운동가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많은 이들에게 와닿지 않는 것같기도 하다. 소장님께서는 3·1운동과 난민 인권 운동의 연결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 모두가 당시 난민이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국외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사람, 러시아 사람, 심지어 일본 사람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 30여년을 나라 밖에서 떠돌며 고생한 우리 선조들을 도와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도 지금 난민을 돕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최근에는 조선어사전 편찬 과정을 다룬 <말모이>나 당시 일본인을 이기고 자전차대회에서 우승한 <자전차왕 엄복동> 등 총이나 칼이 아닌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이 나오고 있다. 소장님께서 보시기에 앞으로 독립운동에 관련한 작품을 만든다고 할 때, 어떤 점에 집중해야 할지 말씀해달라.

요즘은 영화·드라마가 끼치는 영향이 문학의 영향력을 넘어선 지 오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도 한 회도 안 빼놓고 다 봤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젊은이들이 역사청산이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는 건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을 고취하는 음악인은 아직 안 나오는 듯하다. 이탈리아 베르디의 오페라가 가장 민족의식이 강한 음악으로 평가받는데, 국민의 역사적 정서를 일깨워주고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음악을 하는 시대를 앞서가는 가수도 좀 나오면 좋겠다. 내가 문학평론가이기도 해서 글쓰기 강의를 제법 하는데, 항상 모든 예술은 젊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젊은 감각으로 소통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젊은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젊어진다는 것은 시대의 핵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정 배우가 주연한 <증인>을 봤다. 자폐를 가진 아이가 주인공이더라. 영화를 보면서 “넌 자폐아잖아. 네 말은 믿을 수 없어”라고 하는 장면에서 독재자들이 “너 빨갱이잖아. 네 말을 믿을 수 없어”라고 했던 것이 겹쳐 읽히더라. 우리 정치가 그랬다. 진실과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차별적인 색을 입혀 말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나.

소장님께서 민족문제연구소에 몸담고 계시기 때문에 자폐아 지우가 놓인 상황을 일제시대, 독재시대에 바른말을 하는 지식인들에게 말을 못 하게 했던 핍박으로 해석하신 듯하다. 감사하다.

이제 교육에 관한 문제로 옮겨가서 이야기를 해보겠다. 요즘 어린 학생 중에 ‘3·1절’을 ‘삼쩜일절’이라고 읽는 친구도 있다고 한다. 역사교육이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고,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새 세대의 눈높이에 맞춘 소통방식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친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당시 친일은 어쩔 수 없던 일이다”라는 보수의 논리도 판을 친다. 어린 세대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해야 할까.

영화·드라마 통한 역사청산은?
‘미스터 션샤인’ 한회도 안빼고 봐
베르디같은 음악가도 나왔으면
모든 예술은 젊어야 한다젊다는 건
시대의 핵을 본다는 것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에 대한 의무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역사를 공부하고,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너희들이 잘살기 위해서”다. 남의 나라에 업신여김받거나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짓밟히지 말고 행복하게 평화롭게 살려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모든 사람이 한 건 아니다. 나머지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존경할 줄 알면 된다. ‘바보처럼 왜 그렇게 살아’라고 하지 않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 ‘우리 할아버지가 당시 면장을 했고, 교장을 했는데, 친일이냐’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사는 4389명이다. 당시 조선 인구가 대략 2500만 정도였으니 0.0176%에 불과하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자의에 의해 친일을 했을 때”에 오르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사를 걱정하는 것은 노숙자나 서민이 재벌 걱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지막 질문드리겠다. 28일 2차 북미정상회담이 한반도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 또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소장님 의견을 듣고 싶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큰 틀에서 보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한국전쟁의 종식’이라는 ‘종전선언’, 더 나아가 ‘부전(不戰)선언’에 방향성을 두고 노력하면 된다. 기차를 타고 (평양, 신의주, 만주, 몽골, 러시아를 지나) 런던까지 갈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회담 결과가 어떻든 앞으로도 최대한 남북화해의 모드를 이어가야 하고, 무엇보다 미국이나 다른 주변 세력이 아닌 우리 민족의 이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처해 나갔으면 좋겠다.

정리/유선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9-03-01> 한겨레 

☞기사원문: [영상] ‘삼쩜일절’이라 읽는 세대에게…정우성이 묻고, 임헌영이 답하다

금, 2019/03/01- 11:36
48
0

問金正恩(문김정은)

 

汝豈爲人彘(여기위인체)

過肥步不輕(과비보불경)

思量同族苦(사량동족고)

忽欲發悲鳴(홀욕발비명)

 

김정은에게 묻는다

 

너는 어찌 사람 돼지가 되었는가

너무 살쪄 걸음도 가볍지 않구나

동족의 그 괴롬 생각해 헤아리니

불현듯 비명 소리를 지르고 싶다.

 

<時調로 改譯>

 

어찌 人彘 되었는가 걸음도 무겁구나

같은 겨레 괴로움 생각하여 헤아리니

불현듯 비명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人彘: 돼지 같은 사람이란 *不輕: 가볍지 않음 *思量: 생각하여 헤아림 *悲鳴:

슬피 욺. 그런 울음소리. 일이 위급하거나 몹시 두려울 때 지르는 외마디 소리.

 

<2019.3.1, 이우식 지음>

금, 2019/03/01- 21:31
38
0

어제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잘풀려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길 기대하던 많은 국민들에게

 

미국은 엉뚱한 핑계를 만들어 협정을 또 깨트린 트럼프를 보며

 

한반도 평화를 깨트리고 냉전을 유지해 한국에 고물무기 팔아먹으며

 

주한미군이 한국돈 펑펑쓰며 영구히 주둔하려는 미국의 속셈를 확인할수 있었고

 

협상이란 서로 주고받아야 풀릴텐데 고의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미국으로

얼마전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에 눈물바다로 눈시울이 뜨거운데
상봉자중 북한주민 한분이 미국때문에 이렇게됐다며 미국은 떠나야한다고 절규하듯이
누가 저들에게 분단으로 생이별의 고통을 주었는지 진정한 역사 사실과
북한의 핵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사실에 근거하여 풀어보면

요즘 남북평화협상에 미국은 한반도 평화협상이 아닌 협박처럼 자기들은 경제봉쉐도 않풀고
또 김정은등 북한에게 트럼프가 정전을 종전으로 곧 해준다고 약속해놓곤 종전선언도 않해주며

북한에만 무조건 비핵화 하라고 협박하고 우리정부엔 중국 러시아 유럽까지 연결되어 우리경제살릴
남북연결 철도공사와 러시아 천연까스등 평화적인 남북교류까지 못하게 협박하는 세계 유일깡패국가로

애초부터 우리민족을 전범일본서 약탈한 금괴등 뇌물받고 일본대신 강제분단시킨 미국 일본이라 자국이익위해
평화통일 못하게하려는 속셈을 우리후손에게는 분단의 고통을 넘기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이글을 올린다

[원래 우파정신은 민족주의와 자기국가를 최고로 치는 국수주의가 진짜 우파정신으로
타국을 배타하고 자기민족을 아끼고 보호하며 시장경제원리를 선호하는게 우파정신이고

보수란 좌우파에 관계없이 전통이나 풍습과 자기들 자리나 가치관을 지킨다는 뜻으로
외국의 극우단체가 자국민 보호위해 외국인 추방이나 테러행위에 또 다른나라를 혐오하는 태도가 잘보여주며

좌파란 소득이 많고 재산이 많으면 세금도 많이내서 공공근로나 학교와 주택 병원등 복지정책에 많이 투자해
서민들도 아프거나 배고프지않고 공부도 할수있게 골고루 잘살자는 정책이 좌파정책이며

진보란 좌우파를 떠나서 나쁜정책을 고쳐서 더나은 사회를 향하는 정신을 진보라하는데
한국당등 일부야당과 일부 탈북자단체와 뉴라이트와 일베등 자칭 우파 보수단체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며

일본에 충성하던 친일매국노가 해방후 친미매국노로 변신한 반국가 반민족 사대매국노들이 보수우파라고 국민을 속이는것이다]

먼저 우리도 있고 일본 미국도 있는 핵발전소를 북한이 핵무기 만든다고
미국 일본이 트집잡아 1994년 제네바에서 영변핵발전소 가동중단 대신
미국 일본이 중유발전소 지어주고 중유지원키로 합의했으나

북한이 영변핵발전소까지 파괴했어도 미국 일본이 북한이 핵을 숨겼다고 거짓 핑계를 만들어
제네바협정을 깨트린후 북한에 선제공격 위협하여
북한이 핵발전소 다시 짓고 핵무기만들게 유도한게 음흉한 미국 일본의 계산된 속셈으로

북한이 핵무기 만드니 미국은 한반도서 전쟁날것처럼 위협하며
이명박그네 정권때 한국에 미국서 퇴출하는 고물무기 세계최고로 많이 팔아먹었고
미국세력확장용 미국이익인 한국 주둔비용에서 추가해 군사시설물 건축비와
미군월급과 식대까지도 돈 더 뜯어갔으며
[주둔지 임대료까지 매년 3조원이상과 전기수도 자동차세 재산세 수입세등
세금면세까지 치면 4조원 가량됨]

일본은 전범국가라 군대도 못갖고 전쟁도 할수없는 나라인데
전범후손인 아베가 북한핵 핑계대고 침략할수있게 바꾸는중으로

박정희가 1963년 불법쿠테타 성공후 일본가서
만주총통으로 직속상관이었던 전범 기시 수상에게 경례하며
우리땅이던 독도앞바다를 일본요구대로 한일협정서에 공해로 표기해
현재 독도분쟁 만든 최악질 매국노로

당시 미군과 일본군 또 박정희가 장악한 한국군이 북한을 침략후 한반도를
일본식민지로 넘긴다는 비밀협정에 서명했으니
음흉한 미국도 참여해 미국무부 비밀문서에 미쓰야협정으로 기록해
현재까지 기밀보관중인데 [미국서 유명한 부르스 커밍스교수 증언]

만약 중국과 쏘련이 참여 북한을 정복못하게 불리하면
남북한에 핵을 쏟아부어 생명체가 못살게 파괴하려한것으로
그래서 일본 양심학자들이 기시와 박정희를 태어나선 안될 귀태라한것이며
일본사회당등 반대로 무산된 침략협정이며

기시 외손자 아베가 할얘비 뜻에따라 매국노 박정희 딸 박근혜와
한국인들 반대에도 한일군사협정 맺어
한국전쟁나면 돕는다는 핑계로 한반도 재침략 발판을 마련한것으로
양영태가 개입한 강제징용자 배상못받게하는 재판조작과 위안부 굴욕협정처럼 박근혜의 매국행위이며

[조선의 마지막 총통인 아베 노부유키가 아베수상 할얘비로 조선서 퇴각할때 조선은 친일파[매국노]가 많아서
100년안에 조선을 다시 식민지만든다 떠들었듯이 요즘 전범 후손인 아베의 군사력 증강과 침략근성이 증명하는것임]

이처럼 과거 1905년 미국 일본의 외무장관격인 가쓰라와 테프트협상처럼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만들고 일본에게는 조선을 식민지만들라고 협상하며 적극 협조한 더러운 미국이

해방후 독일처럼 전범일본을 갈라야하는데
일본이 조선등 침략국에서 약탈한 엄청난 금괴를 미국에 뇌물로 주고
조선을 대신 강제분단시킬때 쏘련은 전범 일본을 가르자했으나
원폭을 터트려 유엔을 장악한 미국에 힘으로 밀렸고 영국도 미국을 편들게 미국이 조종한것이었다

[일본이 조선등 타국서 약탈한 엄청난 금괴와 731부대 살상무기정보를 준댓가로
일본대신 조선분단과 전범인 일본왕과 731부대장도 전범처리 않하기로 하였음]

당시 독립군과 애국국민과 제주도민이 조국분단 반대하자
미군정 지시받은 이승만이 처벌하려던 친일매국노를 구출후
정부와 군경 요직에 기용 강제분단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등 애국자와
애국국민과 제주도민 또 독립군을 친일매국단체 서북청년단과 친일파 군,경 시켜 빨갱이로 몰아 암살과 학살한게 미군정의 지시였다

[여수 순천학살등 민간인 학살사건에 항상 미군 고문관이 뒤에서 지시헀고
거창 양민학살과 제주4.3 학살때도 미군 고문관을 파견해 학살 지시했었고

조국분단 반대하던 김구선생님도 북한서 친일파를 처벌하자 남한으로 도망온 친일파들이 만든 서북청년단에서 총무보던 안두희를
포병소위로 둔갑시킨후 김구선생님께 접근시켜 암살후 근처서 대기중인 헌병대로 빼돌린후 감옥도 얼마안살리고 출세시킨걸
민주운동가 권중희 선생 제자 박기서씨가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처단한것임 ]

미국과 일본이 짠 강제분단때문에 삼백만명이 숨진 6.25비극과
현재까지 수십만의 이산가족등 분단고통 만든것으로
일본은 6.25전쟁때 전쟁물자 판매로 엄청난 소득올려 지금도 남북간 전쟁을 부추기는것이며

그래서 얼마전 양심적인 주한미국대사 지낸분이 한국서 무릎꿇고
미국의 강제분단정책이 한국인에 큰고통을 줬다고 사죄하는데도 음흉한 미국 일본 속셈은

전쟁나서 폐허로 약소국이 안돼고 한국이 독일처럼 평화통일되어 강대국이 되면
미국은 일본대신 조선을 강제분단시킨 책임과
친일매국노 박정희 이용해 침략배상을 다른나라보다 엄청 싸구려로하고

위안부 강제납치와 강제징용등 실질적 배상과 사죄도 않하는 일본은
남북합친 강대국이된 한국이 일본에게 침략 배상책임을 다시 물을까봐
죽어라고 한국과 북한의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더러운 미국 일본으로

미국은 한국내 친미매국노 양성위해 일부 탈북자단체나 보수단체에 달러주며 남북간 교류방해하는것으로
탈북자들이 북한비방 삐라에 넣은 달러가 미국이 준돈이며

평화통일 향하는 정부를 비난하는 데모에 성조기와 일장기들게하며 북한에 퍼주기나 종북이라고 허위비방시키고

자기들이 부패재벌과 짜고 비정규직 양성과 최저임금에 세금도둑질로 망친 민생경제와
외국서 마구빌려온 외채도 문재인 정권탓으로 돌리는 것이며
외국보다 가게수가 많고 인터넷 홈쇼핑등 으로 영업안되는것도
문제인정권탓으로 허위비방에 열올리는것으로

친일매국노가 만든 조중동등 매국언론도 재벌과 부패세력의 검은돈을 운영비로 지원받아
미국 일본만 편들고 있으며 문재인정권을 허위비방에 열중하는것으로
돈받고 여론조작도 불법이니 처벌해야하고

친일매국노가 만든 한국당과 박근혜와
얼마전 침략국 군대 일본자위대 기념식에 참석해 축하해준
학원재벌에 친일파 나경원도 있고 홍문종등 부패학원재벌도 여럿있으며
일본여자에 오사카서 태어난 반쪽일본인 이명박과 친일매국노 후손 김무성도 있고
친일매국노 후손인 정우택등 다수가 매국노 후예들이라 미국 일본 편들고

홍준표나 황교안등 친일파 군사독재 정권서 민주시민과 학생을 탄압하던 공안검사출신들이
지금도 평화통일로 향하는 민족교류를 방해하며 종북이라고 국민속이는것이다
[뉴라이트에게 일본이 간첩처럼 돈주고 친일교육시키고 일베를 뉴라이트가 관리하고
일본전범기업서 뉴라이트 수장이 돈받은 영수증과 똥별들 모임인 성우회도 지원한 사실을 발견]

해방후 강제분단 당시 전범일본을 갈라야지 왜 죄없는 조선을 가르냐고 항의하던 김구선생에게
권총으로 위협하던 미군정 총책임자 하지중장처럼
[한국을 식민지처럼 지배하라는 미군군령처럼 한국총통이 하지였음]

처벌하려던 친일파를 미군정과 미국앞잡이 이승만이 구출후
정부와 군경 요직에 기용후 조국분단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등 애국자와
독립군과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암살과 학살한것이며

그것들이 매국댓가로 돈이많아 한국당등 정당만들어 정치하며
조중동등 언론과 재벌도 많이있구 학교도 많이차려 뉴라이트 교수나 일베 양성해
방송에 나와서 현재까지 남북간 이간질에 일본을 미화하고
미국의 우리민족과 영토를 강제분단한 매국정책도 미화하는것으로

미국과 일본이 짜고 지금 평화통일 방해하며 북한을 경제봉쉐 탄압하는것이며
뉴라이트와 일베들이 미국 일본 지시받고 지금도 한반도 평화교류 방해하며
정전을 종전으로 끝내자는것두 반대하는 반국가 반민족 매국노들인것이며

일본왕에게 충성서약후 독립군죽이던 친일매국노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이후락시켜
기업과 짜고 최저임금 최고노동시간으로 근로자 착취후 기업서 뇌물받아 50억불 스위스은행 부정축재와
[기업서 돈뜯던 중정부장 이후락 아들이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증언]

최태민과 수십조 도둑질한 박근혜도
얼마전 독일내에서 최순실일가등 돈흐름을 독일검찰이 발견한것만 십여조원 가량으로
박근혜 석방하란 태극기부대에 일당주고 동원하는돈도 우리세금 훔친돈 같으며 돈받고 데모참여나 여론조작도 불법이니 강력히 처벌해야하고

이명박도 메릴린치증권과 중동 아프리카투자등등 전문가들이 투자하지말라해도
수백조 우리세금 고의로 투자후 날리고 뒤로 수십조 뇌물받고 또 수십조 날리며 4대강 물막아 오염시킨 이명박과 박근혜 둘다 뉴라이트 친일매국노들이라

미국 일본 지시받아 실행한것이 동서베를린 자유왕래로 평화통일 강대국 만든 독일처럼 남북교류를 막으려고

금강산 관광도 이명박이 깨고 우리 업주들에게 엄청난 이익 발생하는 개성공단은 박근혜가 깨트린것이다
또 남북공동경비로 평화롭게 고기잡고 중국어선 못오던 서해안 평화어업협정도 이명박이 깨트림

[금강산 관광은 이상한 관광객 한명이 잠자는 밤중에 경계선 철책을 넘어 사살된걸 핑계댔으나
한국에서도 야간에 민간인이 군경계선 넘으면 사살됨]

 

금, 2019/03/01- 21:24
31
0

용산역 광장서 강제징용노동자상 합동 참배

0206-4

▲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1일 서울 용산역에서 열린 강제징용노동자상 합동 참배행사에서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와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 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2019.3.1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제가 내년이면 100살이 됩니다. 3·1절 날 모여서 이렇게 행사를 해주시니 감사하고 눈물이 납니다.”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는 1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강제징용노동자상 합동 참배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힘겹게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선 이춘식 할아버지는 감동에 북받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주최한 이번 행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춘식 할아버지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 추진협의회 공동대표는 “이춘식 어르신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은데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며 “함께 투쟁하고 재판에 참여한 동료들이 다 세상을 떠나서 마음이 아프다고 하신다”고 할아버지의 말씀을 대신 전했다.

이 대표는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난 날을 잊을 수 없다”며 “많은 분의 도움으로 승소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다른 나라 사법부를 존중하지 않는 일본은 정말 파렴치하다”며 즉각적인 배상 이행을 촉구했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추도사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늘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며 “비극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억울한 희생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눈물이 마르기 전에, 분노가 힘을 잃기 전에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통일로 나갈 때 우리 역사는 바로 세워진다”고 강조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70년이 넘도록 미뤄진 미완의 해방을 온전한 해방으로 완성해야 한다”며 “일본의 죄악을 완전히 청산하고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분쇄하자”고 강조했다.

그는 또 “과거 일본이 우리 민족에 행한 인권 유린에 대한 사죄와 배상 없이 새로운 관계 정립도 불가능하다”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email protected]

<2019-03-01> 연합뉴스 

☞기사원문: 아흔아홉 할아버지의 눈물…”일본 강제징용 사죄·배상해야”

금, 2019/03/01- 17:29
36
0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간 도내에 남은
일제 지명의 청산 문제 여러차례 보도해 드렸는데요,

일부 시군에서 일제 지명을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박연선 기자입니다.

전주 동산동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조각 편자에 구름 운자를 써 편운리,
우리말로는 쪽구름 마을로 불렸습니다.

동산은 일본의 대표 군수기업이자
한반도 수탈에 앞장선 미쓰비시 그룹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호입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는 여전히 한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김재호/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부끄러운 일제 잔재물입니다.
역사 정의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행정동이 개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큰 변화가 없었지만 최근 행정에서도 타시도 사례를 취합하며 개정 작업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상묵/전주시 자치행정과장
“민족 역사나 정서상에도 맞지 않고있기 때문에
금년 100주년을 특히 기념해서 일제 잔재물에
대한 명칭이라든가 시설물에 대해서는
정리를 하도록…”

군산 서수면에서는 주민들 스스로
일제 잔재를 털어 내겠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서수는 상서로운 이삭, 즉 이상향을 뜻하는 일본말 ‘미즈호’를 옮긴 것으로,
일본에서는 고속철도나 게임 케릭터 이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또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있었던 러시아 사할린의 ‘포자르스코예’ 또한 식민지 시절 서수로 불렸습니다.

김형열/서수면 이장협의회장
“옥구 농민 항일 항쟁의 발원지인데,
그 발원지에서 일본의 잔재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이
저희 면민으로서는 퍽이나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주 고사동과 군산 금광동 등 일제의
강압과 행정편의를 이유로 이름이 바뀐 도내
행정지명은 전체의 3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알려진 일제 지명의 청산은 물론 청산해야 할 지명을 찾아내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로 꼽힙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순국선열들의
뜨거운 외침이 세기를 넘어 일제 잔재 청산의
마중물이 되고 있습니다.

MBC뉴스 박연선입니다.

<2019-03-01> 전주MBC 

☞기사원문: [3.1기획] 청산해야 할 일제 지명

금, 2019/03/01- 23:44
47
0

[앵커]

지금 제 뒤로 보이는 건물, 일제 식민통치 기구였던 조선총독붑니다. 실제 건물이 있던 경복궁 바로 앞에 KBS가 당시 모습을 증강현실로 재현했습니다.

일본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조선과 조선 왕실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에 총독부를 세워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고, 일제의 지배력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KBS가 단독 보도할 역사적 사료도 바로 이곳 총독부에 만든 것입니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KBS 탐사보도부가 일본 현지에서 최초 발굴했습니다.

3.1운동을 이끈 주도자급 인물 한 명, 한 명 140명을 계보 형태로 조선총독부가 그려놓은 자료입니다. 여기엔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가도 등장합니다.

이 자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잊힌 독립운동가는 누구인지 집중 보도합니다.

탐사보도부 이재석, 유원중, 이세중 세 기자가 차례로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일본 외무성이 생산한 문서 자료가 한데 모여 있는 외교사료관.

3.1운동 이후 경계심이 한층 높아진 일제가 밀정을 활용해 촘촘한 감시망을 마련한 흔적이 공문서로 포착됩니다.

[김광만/역사저술가 : “일본 관헌이 다수의 밀정을 사용해서 선교사의 가정에에 출입하는 다수의 조선인을, 앙래하는 사람들의 동향을 보고했다는 내용입니다 (1919년 4월)”]

취재진은 일본 공공기관뿐 아니라 분야별로 전문화된 고서점에서도 3.1운동과 밀정 관련 자료를 수개월 동안 추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찾아냈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140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계보 형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김광만/역사저술가/공동 발굴 : “(말하자면 원본 계보도가 들어가 있었던 거죠?) 그렇죠. 수십 장 속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중에 이제 소요(3·1운동)에 관계된 것만 빼낸 거죠.”]

천도교를 이끌었던 손병희 선생을 맨 위로 놓고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측 인사들이 아래로 배치됩니다.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천도교 조직망이 각 지역 책임자들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기독교계를 이끈 이승훈 선생을 시작으로 각급 주도자들을 거쳐, 6개 학교 학생운동 대표자들로 이어집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인 청년들을 이끈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주조, 평양조, 의주조 등 북한 지역 목사들을 주축으로 3.1운동의 동력이 북쪽으로 전해집니다.

이번엔 불교 한용운 선생.

“한용운의 명을 받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자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당시 배포 책임자였던 중앙학림생도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김승태/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장 : “(일제가) 어떻게 3·1운동을 보고 어떻게 사건을 구성하려고 했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백 명이 넘는 3.1 운동 주도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계보도가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문가들과 함께 계보도의 구체적 내용을 검증하고 일본 외무성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이 계보도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최우석/독립기념관 연구원 : “경찰에서 조사가 일차적으로 끝난 다음에 그것을 총정리해서 만든 문건 속에 이 표도 같이 제작해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조직화된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한편, 특히 기존 사료에서 찾기 힘든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이 적잖이 포함됐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교수 : “3.1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들 가운데 묻혀 있는 분들이 많죠. 각 인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때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KBS는 3.1운동 계보도를 서울역사박물관에 제공해 오늘(1일)부터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계보도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3.1운동의 주역’들을 이어서 유원중 기자가 보도합니다.

▼ 우리 역사에서 잊힌 ‘3·1운동 주역’ 더 있었다!

들불처럼 번진 3.1 만세 운동으로 당시 조선총독부는 크게 당황합니다.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고문과 조사가 이어졌고, 경찰과 밀정들의 정보를 더해 3.1운동 전모 파악에 나섰는데요.

이렇게 해서 총독부가 20여 일 만에 만든 게 바로 이번 계보도입니다.

계보도에는 기존에 알려진 3.1운동 주역들보다 더 많은 140명이 등장합니다.

이미 훈장을 받았거나 아니면 친일파로 변절해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정부가 역사적 평가를 마친 사람들을 제외하고 34명의 새로운 인물이 드러났습니다.

저희는 이 34명이 누구냐고 보훈처에 질의해봤습니다.

그러자 9명은 현재 독립유공자 심사가 진행 중이고 10명은 친일 또는 월북 등 이상 행적을 보인 사람들로 파악하고 있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15명은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일제가 3.1운동의 주역이라고 파악했지만 우리 정부 기록에는 없는 이 15명은 누굴까요?

백 년 전의 기록, 탐사K는 지난 2달에 걸쳐 이들의 흔적을 추적했고 일부이지만 의미 있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이 얘기는 이세중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숨은 주역’ 있었다

전문학교 학생대표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된 주익 선생,

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학교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자료보존고 깊숙한 곳에 보관된 졸업앨범,

[서명일/고려대 박물관 학예사 : “(지금 이게 전부 졸업 앨범인 건가요?) 네. 1917년부터 2018년까지의 100년간의 앨범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빛바랜 앨범 속 주익 선생의 사진,

생년월일과 본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본관이 신안이고, 그러니까 신안 주씨라는 뜻이죠. 그리고 학과가 법과이고…”]

후손은 어디에 있을까.

주익 선생의 본관인 신안 주씨 종친회를 찾았습니다.

주익이라는 이름 옆에 적힌 그의 활약상,

[주범석/신안주 씨 종친회 사무국장 : “항일 투사라고 나오네요. 그리고 신간회라고 나오고, 그리고 보전이니까 보성전문을 졸업했다고 나오네요.”]

족보에 나오는 주익 선생의 아들과 손자, 증손주들.

이를 토대로 수소문한 끝에 부산에 후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 오면서 호적 하나 챙기지 못한 가족들,

취재진이 가져간 사진으로 난생처음 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주진령/’주익 선생’ 증손녀 : “진짜 사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얘기로만 들었지.”]

주익 선생이 학생대표로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이야기는 취재진을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주격림/’주익 선생’ 손자 : “독립운동하시고, 함경도 대표로 참가하셨다, 그 정도만 알지. 그 이상은 나도 모르지.”]

후손들은 취재진이 건넨 자료를 토대로 서훈을 신청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경기 이천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이강우 목사, 계보도가 가리킨 이천중앙교회부터 찾았습니다.

전도사로 몸담았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당시 문서는 모두 사라진 상태.

[김응호/이천중앙교회 원로 장로 : “그분이 이제 3·1 운동에 관련해서 뭐 활동을 했다고 그러는데 분명한 기록이 없어요.”]

지역 원로 장로로부터 이 목사의 후손을 찾아낼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30년 전 이강우 목사의 기록을 찾고 있던 가족으로부터 호적을 건네받은 적이 있다는 겁니다.

[홍석창/원로 목사 : “가지고 있는 자료를 좀 드리면 자기 아버지가 더 널리 선전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지고 내 집을 찾아온 거지.”]

호적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막내딸 이경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리움은 여전합니다.

[이경애/’이강우 목사’ 딸 : “아버지 흔적을 찾은 거 같은 게 기쁘더라고. 아버지하고도 일찍 헤어졌어요, 우리가… 저기 독립운동 한다고 맨날 돌아다니고…”]

이외에도 탐사K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조사한 결과 15명 가운데 일부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김문진 선생은 대구지방법원의 조사를 받았고, 함경도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다 숨진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충남 홍성에서 3.1운동을 이끈 김병제 목사는 목회활동을 이어가다 광복 직후 숨졌고, 중앙학교 생도였던 장기욱 선생은 신간회와 조선 공산당에 참여해 항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

3.1운동 밀서를 평북 의주 책임자에게 전달한 송문정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습니다.

3.1 운동의 주역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당 : “여태까지 조금 보류됐던 인물들에 대해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만큼 더 이제 적극적으로 (서훈 검토)해야 될 필요는 있죠.”]

정부는 지난해 행적이 일부 입증되지 않더라도 친일 활동이 없으면 서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관련 규정을 바꿨습니다.

KBS 뉴스 이세중입니다.

[앵커]

앞서 보신대로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 한 명, 한 명을 계보로 그렸습니다. 3.1운동으로 인한 위기감이 그만큼 컸고 갈수록 탄압의 강도는 높아졌습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있는 사진들, 참혹한 수난의 역사입니다. 그 고통,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잊어선 안될 저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36년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총독부 건물은 꽤 오랜 시간 살아남았습니다. 1996년, 광복 50년이 넘어서야 총독부 건물은 철거됐습니다.

이렇게 무너지고 나서야, 그 뒤로 치욕을 강요당한 경복궁이 제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220명이 넘는 친일파 인사가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역사의 제모습은 언제 되찾을지, 여전히 남는 질문입니다.

<2019.03.01> KBS NEWS 

☞기사원문: [탐사K] 총독부가 만든 ‘3·1운동 계보도’ 단독 발굴

금, 2019/03/01- 23:22
48
0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

0302-1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윤성효

0302-2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류금렬 집행위원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성효

시민들이 3·1혁명 100주년이 되는 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행적을 낱낱이 새긴 ‘단죄비’를 세웠다. 1일 경남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건립한 것.

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집행위원장 류금렬, 아래 대책위)는 이날 낮 12시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 건립식,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앞에 김백일 동상이 세워진 때는 2011년 5월 27일.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김백일 장군은 한국전쟁 때 흥남 철수 과정에서 미군을 설득, 피란민 10만여 명을 배에 태운 인물”이라며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당시 동상은 행정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이곳에 동상을 건립하려면 경남도과 ‘문화재 형상변경 검토’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당시 거제시가 이를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경남도는 동상 철거를 요청했다. 이에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는 거제시를 상대로 동상철거 명령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거제시가 패소했고, 이는 2013년 10월 11일 대법원(당시 대법원장 양승태)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거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2018년 9월 대책협의회를 구성해 동상 철거운동을 다시 벌이기로 했다. 38개 단체가 참여해 ‘대책위’가 결성되었다. 대책위는 지난 2018년 10월부터 지난 2월 28일까지 거제시청 앞에서 117일 동안 동상 철거를 위한 집회와 1인시위를 이어왔다.

그리고 대책위는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우기로 하고, 거제시와 거제시의회, 유적공원을 관리하는 거세지해양관광개발공사 등과 간담회를 열어 논의해 왔다.

대책위는 경남도와 단죄비 설치에 따른 ‘문화재 형상 변경 검토’ 과정을 거쳤다. 2011년 당시 거제시의 잘못된 행정과 대법원의 판결로, 친일 김백일의 동상을 철거할 수 없게 되자 우선 그 옆에 ‘단죄비’를 세운 것이다.

단죄비는 김백일 동상과 같은 3미터 높이로 되어 있다. 단죄비에는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취지문’과 함께,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라고 적혀있다. 그 옆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단죄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김백일의 친일행적을 새겨 놓았고, ‘연도별 친일행적’과 ‘간도특설대 죄상’도 적혀있다.

0302-3

▲ 이종우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이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열린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에서 취지문을 읽고 있다.ⓒ 윤성효

0302-4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참가자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윤성효

0302-5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윤성효

기념식에서 이종우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은 취지문을 읽었다. 취지문에는 “3·1독립운동 100주년, 광복 7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아직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며 “김백일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간도특설대 중대장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고 훈장까지 받은 자”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대책위는 “우리는 3·1독립운동 100주년 전에 김백일 동상 철거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거제시민들의 힘을 모아 이 단죄비를 건립하였다”며 “우리는 김백일의 동상이 철거될 때까지 ‘단죄비’를 세움으로써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고 했다.

또 대책위는 “국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현양행위금지법’ 등을 제정하도록 하여, 전국의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념물이 철거되고 다시는 건립되지 못하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며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우리의 운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동성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38대 참가단체의 헌신적 노력과 류금렬 집행위원장의 집요한 노력이 단죄비 설치를 가능하게 되었다”며 “하지만 아직 우리는 성과를 논하고 공로를 치하할 수 없다. 우리 앞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김백일의 동상이 아직 버젓이 서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서 대책위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고 동상이 철거될 때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현양행위금지법이 제정될 때까지 부단한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류금렬 집행위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여러분이 이 시대의 애국지사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시대에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그 말은 틀렸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며 “단죄비는 친일행적에 대한 단죄이고 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류 집행위원장은 “김백일 동상이 근본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그의 유족들이 부끄럽다며 스스로 동상 철거를 요구하길 기대하고, 아니면 우리의 노력에 의해 동상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동상 철거를 위한 소송 진행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파라미타’ 청소년들이 참석해 <독립운동가>를 불렀고, 참가자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원종태 집행위원은 “단죄비 건립은 그동안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건립에 필요한 재정은 모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며 “어제(2월 28일) 단죄비 건립 계획을 공개했다. 혹시나 단죄비 건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대책위 몇 분이 어제 저녁부터 밤새도록 이곳을 지켰다”고 말했다.

김백일은 1938년 12월 일제 간도특설대 창설 창설요원이었고, 일제 침략에 적극 협력한 공로로 1943년 9월 일제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5위 경운장’을 받았으며, 해방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육군5여단장, 육군보병학교 교장, 육군3사단장 등을 지냈다.

0302-6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 윤성효

0302-7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청소년들이 <독립운동가>를 부르고 있다. ⓒ 윤성효

0302-8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고, 류금렬 집행위원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윤성효

0302-9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 윤성효

0302-10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 윤성효

0302-11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식”을 열었다. ⓒ 윤성효

0302-12

▲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 윤성효

<2019-03-0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혁명 100주년, ‘친일행적 단죄비’ 세운 거제시민들 

※관련기사 

☞연합뉴스: 거제시민들,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 ‘친일’ 단죄비 세워 

☞프레시안: 거제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단죄비’ 세웠다

토, 2019/03/02- 00:42
5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