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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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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익명 (미확인) | 목, 2017/10/05- 20:58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던, 우연한 기회가 주어졌든 도전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민중의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는 새로운 직업의 길을 개척한 ‘꾼’들을 찾아 그들의 밥벌이와 가치를 묻습니다. 동영상 강좌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한다면, 페이퍼 특강에선 독자에게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할 계획입니다. 직업의 세계에선 때론 구체적인 기술보다 좋은 관점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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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며 48년 건국설을 밀어붙일 때 역사학자 조한성은 책『한국의 레지스탕스』를 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밀결사 단원들이 목숨과 맞바꾸면서도 소망했던 새로운 조국 꿈을 추적했다. 그들의 투쟁은 때론 성공하고 많은 경우 패배했지만 그들이 흘린 선혈에서 대한민국이 비롯되었다고 조한성은 말한다. 이후 그는 『해방 후 3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해방 후 역사가 미소 양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 민족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분단도, 전쟁도 모두 외세 탓인가?”

역사학자 조한성을 만났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의 저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그 참신한 질문 때문이다. 43세의 이 역사학자는 늘 치밀한 사료분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상상을 선사했다. 인터뷰는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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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부터 ‘해방 후 3년’ ‘한국의 레지스탕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다. 이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 공저다. 그의 저술은 때로 모래알처럼 작게 보였던 것도 크게,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한다.ⓒ출판사 생각정원 캡처

현대 사학의 원로이신 서중석 선생님께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한성: (웃음) 이제 서중석 선생님 그만 팔아먹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영상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충격이 컸죠. 돌베개에서 나온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시절 체험이 저를 현대사로 이끌었어요.

지도교수님은 현대사 박사 1호이신 서중석 교수님과 근대사 1세대 연구자이신 임경석 교수님이셨어요. 서 교수님은 한 강의에 20개 정도의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학생들을 나눠 조사를 시키셨어요.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행연구’에 대한 파악이었죠.

연구사 정리는 역사연구의 기초공정이에요. 현대사는 아직도 공백이 많은 분야거든요. 그 공백을 찾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 인식과 질문을 던지게 돼요. 서중석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에도 박정희 시대를 계속 정리하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론 힘이 드시더라도 80년대까지 쭉 정리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임 교수님은 사료를 다루는 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치셨어요. 서중석 선생님 안식년일 때 임 교수님께 배웠거든요. 사료 가운데 한국 근대사 자료는 일제 생산문서가 상당히 많아요. 이 문서들은 일제의 관점으로 쓰였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독립운동가가 쓴 자료라 해도 그 문서들은 작성자 중심으로 작성되었기에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엔 사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해 참과 거짓을 읽어내야 합니다. 임경석 선생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전부터 역사학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조한성: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선생님 수업이 재미도 있고 진지했어요. 전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힘을 내는 스타일인가 봐요.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어머닌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길 원하셨는데 제가 막내라 그런지 진로를 강요하진 않으셨어요. 나중 문제가 있으면 곁에 끼고 함께 살려고 그러셨는지는 몰라요. (웃음)

석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와 자료를 봐야 하고, 이때부터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대단한 은사님들께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저의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에 담아 알리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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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조한성ⓒ민중의소리

돈벌이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한성: 처음 이 일을 선택할 때부터 돈 버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사학과 들어가면 죽으라고 한문공부 해야 한다고 해서요. 실제로 사료분석에 한문은 필수인가요?

조한성: 아, 너무 안타까워요. 한문을 피해갈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고대사, 한국 중세사, 동양사 연구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 실력이 필요해요. ‘지곡서당’ 같은 곳을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요. 서양사는 영어가 필수, 한국근대사의 경우 한문과 일어가 중요해요.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요. 전공에 따라 영어, 러시아도 필요하죠. 해당 언어를 알면 더 다양한 사료를 볼 수 있으니까 유학을 가는 친구도 많아요. 다만 현대사의 경우 국한문 혼용이 많아 한문의 자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설렁설렁해도 가능해요.

일제의 공적조서, 해방 후엔 명백한 친일파 증거

그래도 한문의 자구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어야 하는군요? (웃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하셨습니다. 그때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도 큰 성취감을 느낀 조사 활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한성: 아시겠지만 친일파와 관련한 조사는 당대에 해야 했던 작업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증인을 채택할 수가 없죠. 만일 해방 후 철저히 조사했다면, 친일행위를 목격하고 들은 이들의 증언, 당사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자료가 다 남아있었겠죠.

제가 ‘관료팀’에 배치되어 도지사, 군수들 조사했어요. 거물급들은 관련 텍스트가 남아있는데 지방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4년 반이라는 시한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알려지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을까요?

조한성: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남긴 ‘지나사변 공적조서’라는 자료가 있어요. 중일전쟁 시기 일제가 관료들의 공적을 조사해 훈‧포상을 해줬는데 당시엔 공적을 적은 조서였지만 지금은 친일 행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죠. 어떤 후손이 선조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지방에서 선조를 미화하고 기념사업을 하려다 이 자료 때문에 친일행위가 명확히 드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이 자료는 위원회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인데 이 자료 때문에 3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관료들의 친일 행위가 많이 드러났어요. 위원회가 천 명 정도의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자료의 수집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위원회가 좀 더 오래 유지가 됐더라면 아마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거상 巨商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와 손잡고 좋은 일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들의 후손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더라고요. 친일파 분류는 어떻게 합니까?

조한성:  친일파 분류는 대개 1904년 러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의 행위를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해방 후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는 누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지,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일제 강점기 친일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친일파 선정에서 제외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친일행위를 한 경우는 친일파로 선정합니다.

‘밀정’의 압권,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암살’ ‘밀정’ ‘군함도’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흥행입니다. 모두 보셨는지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성 이면엔, 또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준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한성:  저 역시 언급하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역사학계에서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영화 ‘밀정’은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작가나 감독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대사 하나하나를 많이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김원봉이 황옥(기자 주:황옥은 실제 인물이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료를 설득하는 대목의 대사를 보세요.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소?”

김원봉이 황옥을 설득하는 방면도 압권이거든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영화의 백미죠. 실제 역사에서도 황옥이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에요. 아마 작가의 상상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과한 비판이죠.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느냐’인 것 같아요.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어색하잖아요? 그런 건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자연히 느끼게 되죠. 반대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면 그 역사적 팩트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도 있거든요. 최근 영화 ‘군함도’가 흥행에 실패한 건 아쉬워요. 흥행의 실패로 군함도의 역사나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인 건 맞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계열을 모두 수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라이트의 공격에 대한 반정립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임정 법통계승을 따지다 1919년 건국절로 가거든요. 역사적 맥락에 비추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거든요.

조한성:  우선 48년 건국절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죠. 반면에 1919년 건국절 주장도 한계가 분명해요. 건국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스러워요. 건국절 논란 자체는 소모적이에요. 애초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압도하진 못했어도 여타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919년~21년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 이후에는 세력이 약화하지만 40년 이후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광복군도 만들고 좌우합작도 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웠죠. 다만 여타 세력을 압도하진 못했기에 안타까움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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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로서의 특징이랄까. 조한성 작가는 인터뷰 도중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에선 관련 자료를 다시 꼼꼼히 보고 말을 다듬었다.ⓒ민중의소리

“독립선언 33인 중 단 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참 맛깔나게 우리 역사를 소개하는 스타강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올해 설민석 강사가 3.1 운동 관련 ‘민족대표들의 태화관 술자리 발언’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을 술자리로 폄하하고 ‘태화관 마담’ 발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자칭 ‘민족대표’라는 분들이 독립선언문을 내고 자수한 건 당시 목숨 걸고 항쟁을 이어갔던 민중과 대비하면 투항주의, 내지는 명백한 제한성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지도자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한성:  

저도 개인적으론 설민석 강사의 강의를 좋아해요. 이분 때문에 우리 역사에 재미를 붙이신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장하거나 재미있게 하려다 실수할 수 있거든요.

책은 출판 전 단계에서 거를 수 있지만, TV는 그렇지 않죠. 미디어 환경의 특성상 ‘스타강사’들은 자신의 역량 그 이상의 것을 요구받거든요. 방송국에선 시청률을 생각해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역사의 영역에선 강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봐요. 요릿집에서 했다고 독립선언 그 현장을 술자리라고 하는 건 엄청난 왜곡이죠.

독립선언 33인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학계에서도 존재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역할 즉, 국내 3.1 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준비하고, 조직을 확장해 이 운동을 전국화한 공로는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33인의 ‘서명’은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상황에선 목숨 걸고 한 겁니다.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을 끌어 모두 적용하려고 했고요.

33인이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조선민족대표’라고 밝혔어요. 이를 이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을 ‘민족대표’라고, 즉 민족지도자 33인으로 과대평가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33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 조선 총독부, 각국 영사관에 알리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통고’를 한 것이죠. ‘자수’라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이고, 자신들의 표현대로 독립선언을 통고한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이 33인의 역할이었죠.

28일 최종회의에서 군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는데, 군중시위가 폭력화할 것에 대한 우려였어요.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독립선언의 경과를 주장하기로 한 것이죠. 애초 33인은 군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이것이 한계죠.

만약 33인 중 단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체포될 때까지 지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에 버금가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3.1 운동 주역 중 천도교, 기독교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는데요. 바로 학생이에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지요. 이들이 3.1, 3.5 서울시위를 실질적으로 지도했고 각 지방의 시위에서 활약했어요. 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45년 이후 4.19, 6월 항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죠. 전 학생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독립 운동사를 보면 무슨 단체니 계파니 하며 반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어떤 큰 줄기가 없이 오밀조밀하게 흩어져 분열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그런 것인지요? 당시 식민지 나라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는지요?

조한성: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다른 나라의 사례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다만, 우리 독립운동의 약점은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진짜 불행은 해방 시기가 바로 치열한 냉전의 시작 시기였다는 것이죠. 미소 대결이 첨예화된 곳이 한반도였어요.

“내부의 힘이 강대국의 ‘규정’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저서 『해방 후 3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규정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민족 내부의 통합된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이는 지금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일종의 경각심을 준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관점은 ‘역사에 대한 가정’,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분단의 길목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요?

조한성: 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보면 미·소의 규정력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미소 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소 공동위원회죠. 한반도를 미래를 다루는 회의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동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외부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부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것도 미소의 규정력만큼이나 크다는 것이죠. 그럼 분단이 되지 않으려면 어때야 했을까. 그것은 좌우가 하나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좌파의 역할입니다. 남쪽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좌우를 묶으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이런 세력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자연히 박헌영이나 김일성이 좌우합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의 영향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쪽이 훨씬 진지했어요. 여운형의 경우 수차례 북으로 가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단 한 차례도 내려오지 않았죠.

『해방 후 3년』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남로당의 단정 반대 투쟁이나 4.3 항쟁, 지하 총투표 조직이 진지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 좌경 모험주의로 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던.

조한성: 남로당의 모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헌영은 지하 선거를 위해 모든 조직을 동원해 투표용지를 옮기고 주민을 모아 투표를 시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이 노출되고 파괴돼요.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조직이 모두 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당시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투쟁이 얼마나 졸속이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죠. 김일성과의 경쟁을 의식한 박헌영의 야심이었다고 밖엔 해석이 안 돼요.

김구는 일관되게 ‘충칭 임정’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고, 미 군정을 엎기 위한 2차례의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좌우 합작 절호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칭 임정세력이 주요 내각을 구성하고 나머지 3석 정도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배타성’,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김구가 해방 이후 나라의 전면적인 개혁의 측면에서 좌익세력과도 진지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반공의식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제가 연구 하면서 가장 복잡한, 그러니까 어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달리 개인적 권력욕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임정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확실히 김구 선생은 반공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활동하면서 쌓인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은 20년 무렵 레닌자금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립을 암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께선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즉 ‘5년 신탁통치 후 통일 정부 수립방안’에 진정성이나, 현실성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가령 동아일보의 치명적 오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조한성: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국제적 합의였으니 결의안대로 되었다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반탁운동이 일어나면서 결의안대로 하는 것이 어렵게 돼버렸다는 겁니다.

당시 오보를 동아일보만 꼭 찍어서 얘기하면 동아일보측이 굉장히 섭섭할 거예요. 당시 다른 신문들도 대부분 똑같이 보도했으니까요. 당시 오보는 사실상 미 군정이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은 건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소련을 경직화시켰고, 이후 3상회의 원안 고수만 주장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미국이나 소련이나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 전쟁 막는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보는 지금의 한반도, 남북 상황.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대통령의 안보행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조한성: (한숨) 우선 답이 없어 보일 만큼 깜깜하죠. 북한은 당분간 핵무장의 완성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이고요. 그 후 북미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해방 후 3년의 경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상황에 끌려만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참혹한 실정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교력과 상관없이 48년도엔 누가 봐도 전쟁이 확실했어요. 이승만은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런 이승만이 불안했던 미국은 한국군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죠. 결국 전쟁에 이길 힘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쌍방 간의 도발을 이어가다 남침을 맞잖아요?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면 김일성이 그렇게 쉽게 남침을 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사인을 계속 주면서 북‧미간 협상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사자 아닙니까?

역사연구자로 살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한성: 제 관점으로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직 한국 학계에선 ‘논문’은 인정받지만, ‘대중저술’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들이 대중저술을 선호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오히려 역사 관련 책을 써요. 재미있죠.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엔 늘 ‘오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이런 오류 없이 대중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레지스탕스』 , 『해방 후 3년』,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저술인 『군함도 – 끝나지 않은 전쟁』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있는 문체가 당대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지금은 ‘3.1 운동’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에요. 자료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잘 정리가 안 되는 경우에요. 일반인들이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분들의 자료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심문 조서’같은 형식으로 많은 분의 자료가 남아있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쓰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거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며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잡는 방법이랄까요? 조언 해주신 다면요?

조한성: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실제 주인공으로 분해서 인터뷰 형식이든, 신문기사의 형식이든 자신의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이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으면 해요.

<2017-10-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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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개교 이흥렬·김성태 등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음악인이 만든 교가 사용
충남교육청 “일선학교에 공문 보내 파악 중…조만간 발표”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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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A고등학교와 B고등학교의 교가는 각각 친일인명사전(사전)에 수록돼 있는 이흥렬과 김성태가 작곡했다.

[굿모닝충청 이종현 기자] “반만년 역사위에 지나간 자취…”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A고등학교의 교가 중 일부다. 이 학교는 1922년 개교해 국무총리와 내무부장관, 시장, 야구 선수 등 졸업생 2만8403명을 배출했다.

“하늘과 마주선 계룡의 싱싱한 숨결…” 1955년 개교한 같은 지역 B고등학교는 현재까지 졸업생 1만4989명을 배출했다.

두 학교의 공통점은 바로 친일 음악인들이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A고등학교와 B고등학교의 교가는 각각 친일인명사전(사전)에 수록돼 있는 이흥렬과 김성태가 작곡했다.

A와 B고등학교 학생들은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음악인들이 만든 교가를 불러왔던 셈이다.

이처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일제 잔재가 여전하다.

앞서 지난 14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남지부(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연구소)는 보도자료를 통해 “광주 지역 상당수 학교가 현제명, 이홍렬, 김동진, 김성태 등 친일 음악인 4명이 만든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며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지역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교육청이 친일 잔대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굿모닝충청>이 교육청과 전교조, 연구소를 통해 취재한 결과, 도내에서 20여개 학교에서 친일 음악인이 작사‧작곡한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 음악인은 강연이나 방송활동, 국민개창운동 등 분야에서 창작과 단체 활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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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음악인은 강연이나 방송활동, 국민개창운동 등 분야에서 창작과 단체 활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를 말한다. (자료사진, 왼쪽부터 김성태, 이흥렬)

김성태는 1941년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와 농업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영화 ‘농업보국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담당했다.

이때 그가 지휘한 경성방송혼성합창단은 ‘태평양행진곡’, ‘미영 격멸가’ 등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하는 곡들을 불렀다.

이후 1943년 경성음악연구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군국의 어머니’ 등을 작곡했고, ‘우리들은 제국군인’ 등을 지휘하며 조선청년의 참전을 선동했다.

또 이흥렬은 ‘봄이 오면’, ‘자장가’ 등 노래 400여 곡을 만든 작곡가다.

그는 1940년대 국민개창운동과 경성후생악단, 평양대화악단 등에 참여했다. 또한 반국가적 음악을 구축하고 일본 음악을 수립하는 활동에 앞장선 행적이 드러나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전교조 관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문제를 제기했다”며 “교육청이 친일 음악인들이 만든 교가를 하루 빨리 파악해 조치에 나서야한다”고 말했다.

교육청 관계자는 “일선학교에 공문을 보내 교가의 작사‧작곡가 명단을 받고 있다”며 “조만간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헀다.

<2019-02-18> 굿모닝충청 

☞기사원문: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 충남에 ‘수두룩’

※관련기사 

☞대전MBC: [리포트]학교에 남은 ‘일제 잔재’

월, 2019/02/1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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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민족문제연구소 비리 부정 관련자와 책임자는 사과하고 거취를 결정하라

–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 3차 월례 정기집회, 2019. 2. 16

작년 8월 24일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이 출범한지 이제 반년가량 지났다. 오늘 집회가 3번째 월례 정기집회다. 그동안 우리 민바행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비리와 관련해 사실에 입각해 문제제기를 해왔고, 감독관청인 서울시교육청은 4일간 실태조사를 실시했으며 그 결과 연구소의 비리와 부정은 사실로 드러났다.

교육청은 작년 12월 14일 ‘미승인 정관 사용(2중 정관 사용)’에 대해서는 ‘엄중 경고’, ‘기부금 부적정 사용’에 대해서는 ‘기관 경고’ 그리고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5인 전원과 감사 2인 전원에게 경고라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이는 우리 민바행의 문제제기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연구소의 비리와 부정은 위에 지적된 내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내용이 더 나올지 알 수 없다.

기부금 부적정 사용의 내용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고 특히 ‘2중 정관’ 사안은 겉으로 보여 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집행부에서 전국의 1만 3천 회원을 속여온 사안으로 이는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생명인 민족문제연구소로서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집행부를 믿고 어렵게 회비를 내오며 연구소를 지탱해온 전국의 회원들과 국민의 신망을 저버리는 배신행위가 아닐 수 없다. 연구소가 지난 2000년 이후 18년만에 다시 겪는 치욕이었다.

그럼에도 집행부와 이사회는 반성이 없다. 감독관청의 처분을 받았으면 적어도 회원들에게 공개하고 사과문이라도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저 아직까지 쉬쉬하고 있다.

지난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고발조처를 당한 사실을 일체 함구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당시엔 이사 전원이 사퇴를 했다. 그나마 그때 이사들은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이사와 감사들은 전원 경고라는 치욕스러운 처분을 받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뭉개고 있다. 아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비위를 서로 공유한 실무자들과 한배를 탔으니 같이 조용히 넘어가자는 것인가?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문제제기한 민바행에 대한 분풀이인가, 아니면 특정인에 대한 보복인가? 연구소 명의로 발표됐다는 소위 그 ‘민족문제연구소 음해세력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입장문’이라는 글은 남 보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수준이 떨어져, 절대 민족문제연구소 명의로 나와서는 안 될 졸문이었다.

그 졸문 발표는 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집행부 핵심 상근자들과 그들을 지휘해야 할 이사회의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 지를 세상에 여실히 드러낸 일대 사건으로 남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집행부와 이사회가 지금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스스로를,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모르는 듯하다. 참 딱한 일이다. 우리 민바행이 대응하기가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다.

지금 정말로 우리 민바행이 민족문제연구소를 “와해”시키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런 집행부의 안일함과 적반하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연구소의 기제는 무엇인가? 주인인 회원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구소 공든 탑을 주인없이 저들이 쌓아올렸다고 착각하는 오만방자함과 기득권 유지에 대한 욕심 그리고 그것들을 유지시키는 패거리 정신이리라.

그리고 연구소에 감시 감독 통제 기능이 작동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두 감사는 집행부와 밀착되어 15년째, 11년째 연임하고 있다. 최수전 업무감사, 임명호 회계감사의 전 감사는 임기 2년 한번 마치고 잘렸다.

2000년 초반 당시에는 집행부가 분기에 한번 운영위원회의 감사를 받았는데, 세무사로서 집행부 회계 감사를 깐깐하게 하다가 2년만에 잘린 것이었다.

이사(회)는 집행부를 통제하지 못 한다. 거기에 연구소 주인인 회원들의 대변 기구인 운영위원회는 몇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민우 운영위원장부터 거의 집행부 요원 수준이다. 이민우 위원장부터가 과거 사무국 출신으로, 지부장으로 진출해서 운영위원장이 되었으니 예상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연구소 집행부 업무를 제대로 독려해 썩은 부분이 있다면 도려내야 할 책무가 있는 사람들이 집행부의 비리를 옹호하는 호위무사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다보니 연구소는 핵심 상근자의 놀이터가 됐다.

거기에 이들 핵심 상근자들을 제대로 통제해야 할 소장은 2002년에 부소장으로 들어와 2003년부터 지금까지 17년을 소장 직을 수행하고 있다. 거의 종신직이다. 정관에도 연임 제한 규정이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장은 상근자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상근자는 소장의 연임을 지원한다. 공생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임헌영 소장의 전임 소장도 2년만에 물러났다.

지금의 소장과 핵심 상근자들과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청산하고 엄정한 관계를 정립해 놓지 않는다면 앞으로 연구소 비리는 끊임없이 계속 될 것이다. 지금보다 더 경악스러운 비리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인적 청산이 절실한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인은 누구인가? 케케묵은 질문인 것 같지만 지금 연구소에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다.  회원인가? 상근자인가? 아니면 이사진인가?

상근자는 이미 회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중하지도 않는다. “’회원 10명’이라는 문구 하나에 그들의 인식과 태도 등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이미 연구소는 ‘이사 5인과 상근자 5인’으로 구성된 “회원 10명”이 주인격으로, 이사진과 핵심 상근자들이 연구소의 공동주인인 셈이다.

설사 편의상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사원, 또는 법인 회원)을 10명”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치더라도 어찌 진짜 회원은 한명도 없이 이사와 상근자가 그 자리를 다 차지해야 하는가? 그것도 십수년동안을 운영위원장에게도, 전임 위원장에게도, 회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어느 회원이 그에 동의했는가?

그래서 그런가 회원들의 대표라고 하는 운영위원회는 꿀먹은 벙어리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인이 회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운영위원회가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길은 무엇이고,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타개하는 길은 인적 청산이고, 그 힘은 바로 회원에게서 나온다.

지금 연구소는 ‘회원 주권’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이제 우리 민족문제연구소는 ‘상근자 주권’도 아니고, ‘이사 주권’도 아닌, ‘회원 주권’의 이정표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연구소에 반드시 ‘회원 소환제’를 확립해야 한다.

그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지난 십수년 동안 전국의 회원들을 속이며 “회원 10명”으로 우리 민족문제연구소를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든 비리의 당사자들에 대한 처리다.

십수년 “회원 10명” 안에 있으면서 실무를 집행해 온 당시 사무총장과 사무국장, 그리고 역시 그 “회원 10명” 안에 있었고, 18년 동안 연구소 운영의 책임이 있는 소장은 반드시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길만이 새로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비리 당사자들의 반성과 사과, 그리고 거취 결단을 촉구한다.

2019. 2. 16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

월, 2019/02/1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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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 할 수 있게 도운 여성들 공적도 인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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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 노준희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만인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올해 2019년은 자주독립의 근간과 실체인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특별한 해다. 이에 정부와 독립기념관, 아우내 3.1운동 독립사적지가 있는 충남 천안시는 기념일을 치르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역사적인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취임 3년차를 맞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을 만났다. 이준식 관장은 영화 <암살>과 육군 창작뮤지컬 <신흥무관학교>로 널리 알려진 독립군 양성기지 지도자이자 한국독립군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다. 또한, 임시정부 간부 출신 여성독립군인 지복영 여사는 지청천 장군의 차녀이자 이 관장의 어머니다.

대를 이은 독립운동 집안에서 태어난 이준식 관장 역시 국정교과서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는 등 역사를 바로잡는 활동에 몰두했다. 지난 11일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지금, 이 관장에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3.1운동은 여성과 청소년이 주체로 등장한 계기

–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독립기념관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7개 전시관 중 3개 전시관에서 3월 1일에 맞춰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원본자료를 공개하는 특별전시를 한 달간 개최한다. 독립선언서, 원본 태극기 등 평소 훼손을 우려해 전시하지 않았던 귀중한 자료들이다.

2월 28일엔 겨레의집 앞에서 정부가 주관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전야제’를 크게 열 계획이다. 겨레의집 2층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체험전시관을 별도 오픈한다. 자체적으로는 임시정부 수립 내용까지 담은 해외 순회전시를 LA, 뉴욕, 상하이, 도쿄에서 열 예정이다.

4월엔 임시정부기념사업으로 육군본부, 충남도와 음악회를 열 예정이며 현재 행사를 협의 중이다.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인 4월 11일엔 임시정부 요인 21명을 어진 방식으로 그린 초상화를 특별 전시할 계획이다. 8월엔 국내 최대 규모 무궁화테마공원도 연다.”

– 3. 1운동을 역사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으로 나눠서 설명한다면?
“역사적 관점에선 거족적, 평화지향적 운동이었다. 사회적 관점으로 보면 3.1운동이야말로 한국민주주의의 기원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뒤이은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으니, 대한민국 기원은 1919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해석은 3.1운동을 계기로 여성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여성과 청소년이 사회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준 것이 3.1운동이었다. 3.1운동 이후 여성과 청소년의 사회 진출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 올해 가장 선행돼야 할 연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3.1운동 사망자 수가 6000~8000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극히 일부다. 독립기념관은 이런 기록을 빨리 찾아 명단을 확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우리 임시정부는 국민 대다수가 인정할 뿐만 아니라, 중국 쑨원 정부와 2차대전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 등 다른 나라들이 승인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인식이 있어 이를 불식시키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

– 외조부 지청천 장군에 대한 기억은?
“내가 태어난 다음 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직접적인 기억은 없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따라서 만주 등을 전전하며 독립운동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외할아버지가 더 유명하시고 공적으로 더 큰 일을 하셨지만, 외할머니는 그런 남편을 도와 가족생계를 책임졌다. 자식들이 성장한 후에는 독립운동에도 직접 참여한 외할머니가 더 인상 깊다. ‘윤용자 여사 외손주’라는 사실이 더 자랑스럽다.”

“기록 위주로 선정하다보니 여성 독립운동가 비율 3%… 관점 자체를 바꿔야”

– “해외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인가.
“자신을 돕는 아내가 없었으면 남편이 밖에 나가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독립운동가를 도운 아내의 활동도 넓은 의미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아내들에게 훈장을 줘야 한다.

지난해 독립운동가를 뒷바라지한 여성들이 처음으로 독립운동 포상을 받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과 석주 이상용 선생의 손자며느리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다행히 회고록을 남겨 기록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비율이 3%다. 여성이 남성보다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적어 기록상으로는 남성이 훨씬 많다. 기록 위주로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면 남성이 많아진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 독립운동을 도운 활동 등 독립운동 성격이 포함된 건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여성 포상이 늘고 있으나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 유관순 서훈을 더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유관순 열사의 훈격만 조정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시급한 게 있다. 임시정부 수반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훈장을 수여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분이 3등급 훈장을 받기도 했다. 천안 출신 석오 이동녕 선생은 임시정부의 살아 있는 역사다. 임시정부 주석을 3번이나 지냈는데도 2등급 훈격이다. 이런 분들의 훈격을 조정하는 것이 가장 절실하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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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경 독립기념관 전경이다. 사진 가운데 우뚝 솟은 겨레의 탑이 보이고 뒤쪽에 겨레의 집이 보인다.ⓒ 독립기념관

“이름 없이 순국한 무명용사 기리는 기념탑 건립해야”

– 독립운동사에서 무장투쟁한 독립군이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장투쟁 역사는 60년대에 연구가 활발했다. 그런데 무장투쟁에 참여한 무명독립군을 기리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일을 부각하는 데 실패한 거 같다.

무장투쟁 지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름 없이 헌신한 무장독립군이 없었으면 지도자가 빛날 수 있었을까. 직접 총 들고 일본과 맞서 싸운 독립군 무명 독립용사를 기억하고 이들을 기릴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무명 독립용사를 기리는 기념탑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다닌다.”

– 독립기념관도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있다던데 얼마나 발굴했나. 또 기존 독립유공자가 아닌데 포상을 받은 경우가 있던데, 이는 어떻게 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유공자를 한 명이라도 더 발굴하라고 했다. 국가보훈처가 독립기념관에 발굴을 위임한 일이기도 하다. 지난해 361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보훈처에 포상심사를 신청했다. 독립유공자가 아닌데 포상을 받은 경우 회수 절차가 어려워 상훈법에 따른 절차를 거쳐야 포상을 취소할 수 있다. 독립에 기여했다 하더라도 이후 변절한 사실이 확인되면 포상 취소 대상이다.”

– 천안 지역에서 근현대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단체가 생겼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독립운동을 기리는 일은 정부가 마땅히 할 일이다. 해방 후 역사가 꼬이다 보니까 시민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역사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의 활동을 보면 역사 정립에 기여한 바가 많고 앞으로 기여할 것이 많다고 본다. 천안만 해도 근현대사의 산 현장인데 역사의 현장이 방치된 곳이 많다. 제대로 정비하고 감춰진 곳을 찾아 알리는 일을 시민이 나서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만세운동 최소 200만 참여, 당시 10명에 1명 꼴… 독립운동은 나와 직결된 문제”

– 남북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은?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남북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 인식의 간극을 줄이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 모두 동의하는 역사가 있지만, 아닌 것도 있다. 3.1운동과 관련해 김일성 주석과 안중근, 신채호 선생은 남북 모두 긍정한다. 같은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간극을 줄이는 게 필요하다. 통일을 내다본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 역사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모든 사람을 설득해서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친일인명사전을 낼 때만도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후에는 친일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 지금은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을 못 봤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 매우 힘들지만, 차곡차곡 하나하나 헤쳐나가야 한다.”

– 독립운동이 단지 지나간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나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살아 있는 이야기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 만세운동 참여자로 최소 200만 명을 추산한다. 당시 한반도 거주 인구가 1600만 정도였다. 적어도 10명에 1명 꼴로 참여했다는 얘긴데, 친일파 후손이 아니라면 자기 집안 누군가는 만세 시위에 참여했을 것 아닌가.

독립운동은 나와 직결된 문제다. 단순히 100년 전에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라는 사실을 생각하길 바란다. 이분들이 목숨 바쳐 싸우지 않았으면 지금의 대한민국과 나는 없을지도 모른다.”

– 현실을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모든 젊은이는 다 자기 세대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나도 그랬다. 모든 청년세대의 통과의례 같다. 집 없는 설움과 나라 없는 설움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시야를 넓게 잡고 생각을 크게 해주길 바란다. 더 큰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싸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내일을 위한 투지를 불태우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내용을 일부 수정해 천안아산신문에도 게재합니다.

<2019-02-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아내에게도 훈장을” 독립기념관장의 이유있는 주장

월, 2019/02/1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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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1993년 1월 16일에 반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입한 사람으로서 지난 해 5월에 제명될 때까지 25년 4개월 가량 성실히 회비를 납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본인이 회원 지위를 유지하던 기간 동안의 연구소에서의 회비 인출 내역을 알아야 할 상황이 생겨 은행에 갔으나 기록이 없어  2003년 6월부터밖에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1993년 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10년 가량 연구소가 본인의 계좌에서 인출해간  “회원”으로서의  “회비” (“후원 회비” 분명히 아님) 내역을 통보바랍니다.

 

2019. 2. 19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전 운영위원장 여인철

화, 2019/02/19-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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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2.1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4편 “심우섭” 한 시대 형제의 다른 삶, 기회주의자 지식인의 원형

☞ (2.12)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_2편_한일청구권협정의 쟁점은?

☞ (2.05)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3편 “오현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밀고한 배신자, 반민특위 법정에 선다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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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화, 2019/02/1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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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02/1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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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교서 사용 확인…”친일 청산을 통해 학교문화 개선”

(청주=연합뉴스) 변우열 기자 = 충북 도내 일부 학교가 친일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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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연합뉴스 자료사진]

19일 충북도교육청에 따르면 친일문화 청산 등을 위해 도내 초·중·고 교가의 작사가, 작곡가를 전수조사하고 있다.

현재까지 376개교를 조사한 결과,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9개교 등 19개교가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노래를 교가로 사용하고 있다.

충주의 3개 고등학교의 교가는 현제명이 작곡하고, 이은상이 작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현제명이 작곡만 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도 1곳이 있다.

또 김성태가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가 9곳이 있다. 김동진과 이흥렬이 작곡한 노래도 각각 3곳에서 교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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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 [연합뉴스 자료사진]

현제명, 김동진, 김성태, 이흥렬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고, 이은상은 친독재 논란을 빚고 있다.

도교육청은 전수조사를 마친 뒤 친일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한 교가를 다른 노래로 교체해 나갈 예정이다.

이에 앞서 충북도교육청은 2017년 ‘일본 향나무(가이스카 향나무)’를 교목(校木)으로 지정한 5개교의 교목을 소나무, 은행나무 등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3·1운동 100년을 맞아 아직도 남아있는 친일을 청산하는 등 학교 문화를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친일 음악가들이 만든 교가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19-02-19> 연합뉴스 

☞기사원문: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교체”…충북교육청 전수조사 

※관련기사 

☞노컷뉴스: 친일 음악가 만든 교가 19개교 교체 추진 

☞한국일보: 충북교육청 “친일음악가들이 만든 교가 교체”

☞뉴시스: 충북 19개 학교서 친일 작사·작곡가 교가 사용 

☞헤럴드경제: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지금도 부른다…충북도교육청 전수조사

☞대전일보: 충북교육청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교체” 전수조사 나서

화, 2019/02/1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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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9/02/1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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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17개 학교 친일 확인…광덕 중·고 ‘새 교가’ 만들기로
충북 19곳 확인, 충남·울산 조사 나서…친일 잔재 청산 운동

광주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친일 음악인 등이 만든 ‘친일 교가’를 바꾸는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이 학교들은 입학식 때 교가 제창을 식순에서 빼고, 교가를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친일 교가 교체는 교육계가 펼치는 친일청산 작업 가운데 하나다.

교가 바꾸기의 물꼬를 튼 것은 광주지역 학교들이다. 광주시는 광주교대 산학협력단에 맡겨 지난달 9일 나온 ‘지역 친일 잔재 조사용역’에서 17개 학교 교가가 친일 음악인이 작곡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18일 밝혔다. 작곡가 김동진이 서강중·고, 동신중·고, 동신여중·고 등 11개교, 현제명이 숭일중·고 등 3개교, 김성태가 광덕중·고 등 2개교, 이흥렬이 광주일고 교가를 각각 작곡했다. 이 가운데는 전남대·호남대·서영대 등 대학 3곳도 있다. 이들 학교 교가 작곡가 4명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광덕중·고 신흥수 이사장은 졸업식에서 교가 제창을 하지 않도록 하고, 3월 입학식 때 신입생이 새로운 교가를 부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학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후손이 설립한 학교다. ‘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학교 측이 학부모·교사를 상대로 설문조사에 나섰고, 동문회가 지난 11일 열린 총동창회에서 교가 바꾸기 여부에 대한 토론을 벌여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문이자 ‘님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인 김종률씨에게 교가 작곡을 맡기기로 했다. 올해로 건학 111주년을 맞은 광주 첫 사립학교인 숭일중·고도 3월 교가 교체 대책반을 꾸리기로 했다. 나머지 중·고교도 올해 1학기 안으로 교가를 바꾸기로 했다.

울산시교육청은 다음달부터 친일 교가·교명 등에 대한 조사를 벌인다. 경남도교육청도 지역 교육계에 남은 친일 잔재에 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도교육청은 친일 교가 교체 작업을 위해 다음달부터 친일 행적 의혹이 있는 4명의 작곡가들에게 대한 검증을 시작할 계획이다. 검증을 마친 뒤 친일 관련 교가를 바꾸는 작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충청지역에서도 도내 교가 가사·작곡가 명단을 <친일인명사전>과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충북도교육청은 현재 19개교 교가를 친일 음악가가 작곡한 것으로 확인했다. 충남도교육청은 전체 학교 713곳 교가의 친일성 여부를 조사해 20일 조사 결과와 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충남도교육청 관계자는 “전수조사 결과에 따라 해당 학교 구성원들에게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협의할 것을 권고하고 필요에 따라 교육청이 강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명재·백승목·권순재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18> 경향신문 

☞기사원문: “친일 작곡가가 만든 ‘교가’ 바꾸자” 광주 학교들 선두로 확산

※관련기사 

☞연합뉴스: 친일인사 교가 없애고 일본 나무 뽑고…일제 잔재 지우는 교육계 

☞연합뉴스: “친일 음악가가 만든 교가 교체”…충북교육청 전수조사 

☞굿모닝충청: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 충남에 ‘수두룩’ 

☞한겨레: 광주일고, 친일 음악인이 작곡한 교가 바꾼다

화, 2019/02/1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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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94살 이상주씨 숙환으로 별세
소송 당사자인 생존 피해자는 한 명뿐
“양승태 대법원이 일부러 지연시킨
대법원 재판이 빨리 진행됐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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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30일 대법원에서 일본 신일철주금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나오자, 대법원 앞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씨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일본 전범 기업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징용 피해 소송 중인 피해자 한 명이 별세했다. ‘양승태 대법원’이 징용 재판을 지연시킨 결과 유사한 다른 재판도 지연됐고 결국 피해자는 재판 결과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법조계에 따르면 신일철주금 징용 피해자이자 소송 당사자인 이상주씨가 지난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 이씨는 또 다른 징용 피해자 6명과 함께 2013년 3월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2015년 11월 1심은 회사가 피해자 1인당 1억원 등을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회사의 항소로 현재 서울고등법원 제13민사부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었다.

항소심이 3년 넘게 이어지는 이유는 지난해 10월 말에서야 생존 피해자 이춘식(95)씨 등 3명의 피해자가 먼저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의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춘식씨 사건은 2013년 7월 파기환송심 이후 5년 넘게 대법원에서 재판을 하지 않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청와대·외교부와 입을 맞춰가며 재상고심을 고의로 지연시킨 재판이 이 사건이다. 지난해 10월에서야 대법원은 이춘식씨 등 원고에게 회사가 1억원씩 배상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상주씨는 17살이던 1942년 10월 일본 이와테현 가마이시 제철소로 끌려갔다. 면 직원이 ‘네가 안 가면 형이라도 붙잡아 보내겠다’고 해 억지로 갔다. 1943년 5월까지 수레로 원석과 석탄을 실어다가 용광로에 넣어 쇳물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식사로는 밥, 된장국, 단무지가 전부였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19일 “이상주 할아버지는 기자회견이나 집회가 있을 때면 충청남도 보령에서 상경해 참여하는 등 재판 결과를 애타게 기다렸다”며 “대법원 판결이 일찍 나오지 않아 재판이 길어지면서 지난해부터 여러 명의 피해자가 재판 결과를 보지 못한 채 떠나셨다”고 말했다.

이씨가 별세하면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소송 당사자 중 생존 피해자는, 이미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이춘식씨 한 명으로 줄었다. 2015년 5월 피해자 고 김공수씨의 가족 3명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은 지난해 11월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신일철주금은 “정부의 대응 상황 등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겠다”며 일본 정부의 배상 불가 방침을 따르고 있다. 이에 신일철주금 징용 피해자와 변호인단은 일본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 앞에서 배상을 촉구하는 항의 방문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지난달 8일 이춘식씨 등이 낸 신일철주금의 한국 자산 압류 신청을 승인했다.

최우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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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활동가와 강제징용 소송 피해자 변호인들이 지난해 11월12일 한국 대법원의 손해배상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요청서와 피해자 4명의 사진을 들고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로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야노 히데키 강제연행·기업 책임추궁 재판 전국 네트워크 사무국장, 김민철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운영위원장,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임재성 변호사, 김세은 변호사.

<2019-02-19> 한겨레 

☞기사원문: 신일철주금 ‘징용 피해자’ 항소심 진행 중 별세

화, 2019/02/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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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의 본인 (여인철) 계좌에서의 “회비“(“후원 회비” 아님) 인출 내역 통보 요청>

연구소가 1993년 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본인의 계좌에서 인출해 간 회비 내역을 통보 바랍니다.

본인은 1993년 1월 16일에 반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입한 사람으로서 지난 해 5월에 제명될 때까지 25년 4개월 가량 성실히 회비를 납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본인이 회원 지위를 유지하던 기간 동안의 연구소에서의 회비 인출 내역을 알아야 할 상황이 생겨 은행에 갔으나 2003년 6월 이전의 기록이 없어 그후의 내역밖에 받지 못 했습니다.

그러니 1993년 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10년 4개월가량 연구소가 본인의 계좌에서 인출해 간 본인의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법인) 회원” 또는 “사원”으로서의 “회비” (“후원 회비” 분명히 아님) 내역을 통보바랍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인인 “회원”이라고 생각하며 회비를 납부해왔고, 그런 인식 하에 지난 20여년 지부장과 운영위원, 그리고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연구소 집행부 측의 기망뿐이었습니다.

본인이 내온 그 “회비“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법적 효력이 있는 승인 정관과 별개인) 운영 정관과 가짜 정기총회, 그리고 회보 등 각종 장치와  발언 등을 통해 운영위원장을 지낸 본인조차 마치 “(법인) 회원” 또는 “사원”인양 착각에 빠지도록 속여가며 인출해 간 돈으로, 만일 본인이 “(법인) 회원” 또는 “사원”이 아닌, 아무 권리도 없는 단순 기부자 또는 “후원 회원“이었음을 알았다면 내지 않았을 돈입니다.

결국 연구소 집행부는 “회원”을 “10명”이라고  이미 정해놓고 다른 전국의 “회원”들은 “후원 회원”으로 간주했으면서도 회비를 빼내가기 위해 기망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이러한 행위는 법적으로 ‘사기’에 해당할 수도 있으며, 또 “회원”의 “회비”를 회비로 취급하지 않고 “후원 회원”의 기부금(회비 제외)으로 처리했을 것이기 때문에 기부금품법 위반의 소지도 상당하다고 봅니다.

연구소는 이제라도 더 이상 전국의 1만 3천 “회원”들을 기망하지 말고 반성, 사과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작금의 비리 사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인은 단순 “후원 회원”이 내는 후원금 또는 기부금으로 본인의 계좌에서 연구소가 돈을 인출해가는 것에 동의한 바 없으며, 주인인 “회원”의 의무로서 내는 “회비” 인출에 동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밝힙니다.

2019. 2. 19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전 운영위원장 여인철

목, 2019/02/21-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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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국장님 박 교수님

보고 싶네예!

희비를

내야

댈낀테,

잘안 풀리겐는교?

……31518….다오메

ㅇㅏ베다

목, 2019/02/21-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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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9일과 29일 2차례에 걸쳐, 정하진 회원(충남지부)이 소장 도서, 전국 지역 지도 및 리플렛(808점), 공중전화카드(215점) 등 다수의 자료를 기증했다. 정하진 회원은 고인이 되신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수집했던 자료와 함께 기증한 것으로 유품은 일제강점기 통신부, 급여증명서, 교사임명서, 품행우수상(31점) 등이다.
• 1월 29일 꾸준히 자료기증을 하고 있는 심정섭 지도위원이 지인인 김선식 예원출판사 대표, 의병 김용구의 증손자 김주원 씨와 연구소를 방문했다. 김선식 대표는 <소장訴狀 내 생전에 이 한을> 등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관련 도서 등 책 5권을, 김주원 선생은 소장자료인 <후은김선생신담록> 기증과 함께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도 전달했다.

 

김선식 대표

 

김주원 선생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금, 2019/02/2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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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일제강제동원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후지코시)의 대리인 김세은, 임재성 변호사와 소송 사무국인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등이 일본 도쿄에 있는 신일철주금 등 피고기업의 본사를 방문했다.
원고 측은 2018년 11월 12일과 12월 4일에도 배상과 문제해결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신일철 주금 본사에 찾아갔지만 피고 측과 만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18년 12월 31일 원고 측은 신일철주금이 갖고 있는 ‘PNR’(POSCO-Nippon Steel RHF Joint Venture Co.,Ltd) 주식에 대해 압류신청을 했고, 지난 1월 4일, 포항지방법원은 해당 주식에 대한 압류결정을 했다.
이번 방문에서 “만약 본 협의요청이 합리적 답변이나 이유 없이 거절될 경우, 원고들의 연세가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절차를 개시할 예정”이라는 요청서를 전달하여 이후 압류주식에 대한 매각절차를 시작할 것임을 통지하였다. 한편,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 이후 제기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 3건의 항소심 판결에서 2019년 1월 18일, 1월 23일, 1월 30일에 모두 원고 승소판결이 나왔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금, 2019/02/2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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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0일 광주지부가 오랫동안 추진해왔던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회가 열린후, 친일잔재 조사 내용이 각종 미디어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명의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가 일선 학교에서 불리고 있음이 밝혀져 학생과 학부모, 동문 등의 거센 반발을 샀다.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 현제명 : 전남대, 숭일중·고 ▲ 김성태 : 광덕중·고 ▲ 이흥렬 : 광주일고
▲ 김동진 : 호남대, 서영대, 동강대, 서강중·고, 금호중앙중·금호여고, 동신중·고, 동신여중·고

2월 13일 광주일고 측은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즉시 폐기하고 학교 동문인 김종률 씨에게 새 교가의 작곡을 맡기고, 학생을 대상으로 교가 가사도 공모해, 11월 3일까지 완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광주일고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이었음에 비추어 친일 작곡가의 교가를 사용하는 것은 그 역사성에 배치된다고 지적되었으며 재학생, 교직원,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90% 이상 교체를 원하는 것으로 나왔다.
연구소 충남지부와 전교조 충남지부는 14일 공동성명을 내고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 도내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충남도교육청은 친일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충남교육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시민, 교육 단체가 참여하는 가칭 역사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편집부

금, 2019/02/2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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