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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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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익명 (미확인) | 목, 2017/10/05- 20:58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던, 우연한 기회가 주어졌든 도전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민중의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는 새로운 직업의 길을 개척한 ‘꾼’들을 찾아 그들의 밥벌이와 가치를 묻습니다. 동영상 강좌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한다면, 페이퍼 특강에선 독자에게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할 계획입니다. 직업의 세계에선 때론 구체적인 기술보다 좋은 관점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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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며 48년 건국설을 밀어붙일 때 역사학자 조한성은 책『한국의 레지스탕스』를 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밀결사 단원들이 목숨과 맞바꾸면서도 소망했던 새로운 조국 꿈을 추적했다. 그들의 투쟁은 때론 성공하고 많은 경우 패배했지만 그들이 흘린 선혈에서 대한민국이 비롯되었다고 조한성은 말한다. 이후 그는 『해방 후 3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해방 후 역사가 미소 양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 민족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분단도, 전쟁도 모두 외세 탓인가?”

역사학자 조한성을 만났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의 저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그 참신한 질문 때문이다. 43세의 이 역사학자는 늘 치밀한 사료분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상상을 선사했다. 인터뷰는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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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부터 ‘해방 후 3년’ ‘한국의 레지스탕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다. 이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 공저다. 그의 저술은 때로 모래알처럼 작게 보였던 것도 크게,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한다.ⓒ출판사 생각정원 캡처

현대 사학의 원로이신 서중석 선생님께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한성: (웃음) 이제 서중석 선생님 그만 팔아먹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영상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충격이 컸죠. 돌베개에서 나온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시절 체험이 저를 현대사로 이끌었어요.

지도교수님은 현대사 박사 1호이신 서중석 교수님과 근대사 1세대 연구자이신 임경석 교수님이셨어요. 서 교수님은 한 강의에 20개 정도의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학생들을 나눠 조사를 시키셨어요.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행연구’에 대한 파악이었죠.

연구사 정리는 역사연구의 기초공정이에요. 현대사는 아직도 공백이 많은 분야거든요. 그 공백을 찾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 인식과 질문을 던지게 돼요. 서중석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에도 박정희 시대를 계속 정리하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론 힘이 드시더라도 80년대까지 쭉 정리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임 교수님은 사료를 다루는 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치셨어요. 서중석 선생님 안식년일 때 임 교수님께 배웠거든요. 사료 가운데 한국 근대사 자료는 일제 생산문서가 상당히 많아요. 이 문서들은 일제의 관점으로 쓰였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독립운동가가 쓴 자료라 해도 그 문서들은 작성자 중심으로 작성되었기에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엔 사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해 참과 거짓을 읽어내야 합니다. 임경석 선생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전부터 역사학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조한성: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선생님 수업이 재미도 있고 진지했어요. 전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힘을 내는 스타일인가 봐요.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어머닌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길 원하셨는데 제가 막내라 그런지 진로를 강요하진 않으셨어요. 나중 문제가 있으면 곁에 끼고 함께 살려고 그러셨는지는 몰라요. (웃음)

석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와 자료를 봐야 하고, 이때부터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대단한 은사님들께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저의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에 담아 알리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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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조한성ⓒ민중의소리

돈벌이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한성: 처음 이 일을 선택할 때부터 돈 버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사학과 들어가면 죽으라고 한문공부 해야 한다고 해서요. 실제로 사료분석에 한문은 필수인가요?

조한성: 아, 너무 안타까워요. 한문을 피해갈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고대사, 한국 중세사, 동양사 연구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 실력이 필요해요. ‘지곡서당’ 같은 곳을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요. 서양사는 영어가 필수, 한국근대사의 경우 한문과 일어가 중요해요.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요. 전공에 따라 영어, 러시아도 필요하죠. 해당 언어를 알면 더 다양한 사료를 볼 수 있으니까 유학을 가는 친구도 많아요. 다만 현대사의 경우 국한문 혼용이 많아 한문의 자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설렁설렁해도 가능해요.

일제의 공적조서, 해방 후엔 명백한 친일파 증거

그래도 한문의 자구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어야 하는군요? (웃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하셨습니다. 그때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도 큰 성취감을 느낀 조사 활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한성: 아시겠지만 친일파와 관련한 조사는 당대에 해야 했던 작업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증인을 채택할 수가 없죠. 만일 해방 후 철저히 조사했다면, 친일행위를 목격하고 들은 이들의 증언, 당사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자료가 다 남아있었겠죠.

제가 ‘관료팀’에 배치되어 도지사, 군수들 조사했어요. 거물급들은 관련 텍스트가 남아있는데 지방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4년 반이라는 시한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알려지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을까요?

조한성: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남긴 ‘지나사변 공적조서’라는 자료가 있어요. 중일전쟁 시기 일제가 관료들의 공적을 조사해 훈‧포상을 해줬는데 당시엔 공적을 적은 조서였지만 지금은 친일 행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죠. 어떤 후손이 선조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지방에서 선조를 미화하고 기념사업을 하려다 이 자료 때문에 친일행위가 명확히 드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이 자료는 위원회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인데 이 자료 때문에 3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관료들의 친일 행위가 많이 드러났어요. 위원회가 천 명 정도의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자료의 수집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위원회가 좀 더 오래 유지가 됐더라면 아마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거상 巨商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와 손잡고 좋은 일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들의 후손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더라고요. 친일파 분류는 어떻게 합니까?

조한성:  친일파 분류는 대개 1904년 러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의 행위를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해방 후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는 누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지,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일제 강점기 친일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친일파 선정에서 제외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친일행위를 한 경우는 친일파로 선정합니다.

‘밀정’의 압권,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암살’ ‘밀정’ ‘군함도’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흥행입니다. 모두 보셨는지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성 이면엔, 또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준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한성:  저 역시 언급하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역사학계에서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영화 ‘밀정’은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작가나 감독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대사 하나하나를 많이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김원봉이 황옥(기자 주:황옥은 실제 인물이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료를 설득하는 대목의 대사를 보세요.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소?”

김원봉이 황옥을 설득하는 방면도 압권이거든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영화의 백미죠. 실제 역사에서도 황옥이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에요. 아마 작가의 상상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과한 비판이죠.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느냐’인 것 같아요.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어색하잖아요? 그런 건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자연히 느끼게 되죠. 반대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면 그 역사적 팩트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도 있거든요. 최근 영화 ‘군함도’가 흥행에 실패한 건 아쉬워요. 흥행의 실패로 군함도의 역사나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인 건 맞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계열을 모두 수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라이트의 공격에 대한 반정립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임정 법통계승을 따지다 1919년 건국절로 가거든요. 역사적 맥락에 비추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거든요.

조한성:  우선 48년 건국절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죠. 반면에 1919년 건국절 주장도 한계가 분명해요. 건국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스러워요. 건국절 논란 자체는 소모적이에요. 애초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압도하진 못했어도 여타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919년~21년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 이후에는 세력이 약화하지만 40년 이후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광복군도 만들고 좌우합작도 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웠죠. 다만 여타 세력을 압도하진 못했기에 안타까움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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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로서의 특징이랄까. 조한성 작가는 인터뷰 도중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에선 관련 자료를 다시 꼼꼼히 보고 말을 다듬었다.ⓒ민중의소리

“독립선언 33인 중 단 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참 맛깔나게 우리 역사를 소개하는 스타강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올해 설민석 강사가 3.1 운동 관련 ‘민족대표들의 태화관 술자리 발언’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을 술자리로 폄하하고 ‘태화관 마담’ 발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자칭 ‘민족대표’라는 분들이 독립선언문을 내고 자수한 건 당시 목숨 걸고 항쟁을 이어갔던 민중과 대비하면 투항주의, 내지는 명백한 제한성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지도자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한성:  

저도 개인적으론 설민석 강사의 강의를 좋아해요. 이분 때문에 우리 역사에 재미를 붙이신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장하거나 재미있게 하려다 실수할 수 있거든요.

책은 출판 전 단계에서 거를 수 있지만, TV는 그렇지 않죠. 미디어 환경의 특성상 ‘스타강사’들은 자신의 역량 그 이상의 것을 요구받거든요. 방송국에선 시청률을 생각해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역사의 영역에선 강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봐요. 요릿집에서 했다고 독립선언 그 현장을 술자리라고 하는 건 엄청난 왜곡이죠.

독립선언 33인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학계에서도 존재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역할 즉, 국내 3.1 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준비하고, 조직을 확장해 이 운동을 전국화한 공로는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33인의 ‘서명’은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상황에선 목숨 걸고 한 겁니다.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을 끌어 모두 적용하려고 했고요.

33인이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조선민족대표’라고 밝혔어요. 이를 이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을 ‘민족대표’라고, 즉 민족지도자 33인으로 과대평가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33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 조선 총독부, 각국 영사관에 알리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통고’를 한 것이죠. ‘자수’라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이고, 자신들의 표현대로 독립선언을 통고한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이 33인의 역할이었죠.

28일 최종회의에서 군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는데, 군중시위가 폭력화할 것에 대한 우려였어요.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독립선언의 경과를 주장하기로 한 것이죠. 애초 33인은 군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이것이 한계죠.

만약 33인 중 단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체포될 때까지 지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에 버금가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3.1 운동 주역 중 천도교, 기독교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는데요. 바로 학생이에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지요. 이들이 3.1, 3.5 서울시위를 실질적으로 지도했고 각 지방의 시위에서 활약했어요. 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45년 이후 4.19, 6월 항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죠. 전 학생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독립 운동사를 보면 무슨 단체니 계파니 하며 반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어떤 큰 줄기가 없이 오밀조밀하게 흩어져 분열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그런 것인지요? 당시 식민지 나라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는지요?

조한성: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다른 나라의 사례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다만, 우리 독립운동의 약점은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진짜 불행은 해방 시기가 바로 치열한 냉전의 시작 시기였다는 것이죠. 미소 대결이 첨예화된 곳이 한반도였어요.

“내부의 힘이 강대국의 ‘규정’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저서 『해방 후 3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규정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민족 내부의 통합된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이는 지금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일종의 경각심을 준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관점은 ‘역사에 대한 가정’,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분단의 길목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요?

조한성: 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보면 미·소의 규정력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미소 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소 공동위원회죠. 한반도를 미래를 다루는 회의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동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외부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부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것도 미소의 규정력만큼이나 크다는 것이죠. 그럼 분단이 되지 않으려면 어때야 했을까. 그것은 좌우가 하나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좌파의 역할입니다. 남쪽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좌우를 묶으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이런 세력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자연히 박헌영이나 김일성이 좌우합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의 영향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쪽이 훨씬 진지했어요. 여운형의 경우 수차례 북으로 가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단 한 차례도 내려오지 않았죠.

『해방 후 3년』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남로당의 단정 반대 투쟁이나 4.3 항쟁, 지하 총투표 조직이 진지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 좌경 모험주의로 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던.

조한성: 남로당의 모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헌영은 지하 선거를 위해 모든 조직을 동원해 투표용지를 옮기고 주민을 모아 투표를 시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이 노출되고 파괴돼요.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조직이 모두 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당시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투쟁이 얼마나 졸속이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죠. 김일성과의 경쟁을 의식한 박헌영의 야심이었다고 밖엔 해석이 안 돼요.

김구는 일관되게 ‘충칭 임정’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고, 미 군정을 엎기 위한 2차례의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좌우 합작 절호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칭 임정세력이 주요 내각을 구성하고 나머지 3석 정도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배타성’,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김구가 해방 이후 나라의 전면적인 개혁의 측면에서 좌익세력과도 진지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반공의식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제가 연구 하면서 가장 복잡한, 그러니까 어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달리 개인적 권력욕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임정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확실히 김구 선생은 반공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활동하면서 쌓인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은 20년 무렵 레닌자금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립을 암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께선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즉 ‘5년 신탁통치 후 통일 정부 수립방안’에 진정성이나, 현실성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가령 동아일보의 치명적 오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조한성: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국제적 합의였으니 결의안대로 되었다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반탁운동이 일어나면서 결의안대로 하는 것이 어렵게 돼버렸다는 겁니다.

당시 오보를 동아일보만 꼭 찍어서 얘기하면 동아일보측이 굉장히 섭섭할 거예요. 당시 다른 신문들도 대부분 똑같이 보도했으니까요. 당시 오보는 사실상 미 군정이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은 건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소련을 경직화시켰고, 이후 3상회의 원안 고수만 주장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미국이나 소련이나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 전쟁 막는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보는 지금의 한반도, 남북 상황.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대통령의 안보행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조한성: (한숨) 우선 답이 없어 보일 만큼 깜깜하죠. 북한은 당분간 핵무장의 완성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이고요. 그 후 북미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해방 후 3년의 경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상황에 끌려만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참혹한 실정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교력과 상관없이 48년도엔 누가 봐도 전쟁이 확실했어요. 이승만은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런 이승만이 불안했던 미국은 한국군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죠. 결국 전쟁에 이길 힘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쌍방 간의 도발을 이어가다 남침을 맞잖아요?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면 김일성이 그렇게 쉽게 남침을 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사인을 계속 주면서 북‧미간 협상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사자 아닙니까?

역사연구자로 살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한성: 제 관점으로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직 한국 학계에선 ‘논문’은 인정받지만, ‘대중저술’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들이 대중저술을 선호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오히려 역사 관련 책을 써요. 재미있죠.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엔 늘 ‘오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이런 오류 없이 대중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레지스탕스』 , 『해방 후 3년』,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저술인 『군함도 – 끝나지 않은 전쟁』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있는 문체가 당대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지금은 ‘3.1 운동’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에요. 자료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잘 정리가 안 되는 경우에요. 일반인들이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분들의 자료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심문 조서’같은 형식으로 많은 분의 자료가 남아있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쓰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거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며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잡는 방법이랄까요? 조언 해주신 다면요?

조한성: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실제 주인공으로 분해서 인터뷰 형식이든, 신문기사의 형식이든 자신의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이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으면 해요.

<2017-10-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시민들의 의견

대전단체 및 졸업생 등 총장후보자 토론회 앞서 기자회견… “3.8민주의거 정신 훼손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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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불씨를 당겼던 ‘3.8민주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에 맞춰,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배재대학교 교정에 서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 철거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승만동상철거공동행동’과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대전충남4월혁명동지회’ 등은 7일 오후 대전 서구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학교는 하루 빨리 이승만 동상을 자진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지난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는 우리 대전지역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인 ‘3.8 민주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며 “이는 우리 지역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운 4.19 혁명의 선봉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3.8민주의거’는 1960년 자유당독재와 부정부패에 저항했던 대전지역 학생시위다. 3월 8일 대전고학생 1000여 명과 10일 대전상고 학생 600여 명 등 총 1600여 명의 학생들이 자유와 민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대전지역 대표적인 민주의거다.

그동안 대전시에서는 3.8 민주의거의 국가기념일 지정 위해 ‘범시민추진위원회’를 결성, 대전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정부에 전달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그 결실을 맺게 된 것.

그럼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배재대학교 교정에 서 있는 것은 대전시민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4.19 혁명에 의해 독재자라는 역사적 평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당국자 일부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대학교로서는 유일하게 배재대학교에 이승만 동상이 서 있다”며 “심지어 두 번이나 철거되었던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웠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배재대는 즉각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이승만 동상 철거는 대학 구성원은 물론, 대전시민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것이 독재정권에 의롭게 맞서 싸웠던 3.8 민주의거의 대전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 그리하여 이 땅에 정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도록 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날 규탄발언에 나선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이승만은 친일파를 앞세워 부정부패를 저지르다 온 국민의 저항으로 쫒겨 난 ‘독재자’다. 4.19혁명으로 그는 이미 역사적 단죄를 받았다”며 “배재대는 더 이상 대전지역 학생들의 고귀한 희생을 욕보이는 짓을 그만 두어야 한다. 즉각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라”고 밝혔다.

또한 김영진 독립유공자유족회 대전지회 간사는 “이승만은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는 물론, 자신과 생각이 다를 것이라는 판단 하나로 보도연맹원 등 10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그 어떤 법적절차도 없이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자'”라고 주장했다.

이어 김 간사는 “이런자의 동상이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세워둔다는 것은 배재대 학생과 졸업생은 물론, 대전시민을 무시하고 우롱하는 처사”라고 배재대의 자진철거를 촉구했다.

배재대 졸업생도 규탄에 나섰다. 2001년 배재대를 졸업한 김인재씨는 “독재자의 동상을 세워놓고 대체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우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독재를 본받으라는 것인지, 그의 반헌법적 범죄행위를 존경하라는 것인지, 대체 그 의도를 모르겠다”며 “배재대학교는 대전시민과 학생, 졸업생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진리의 동산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라”고 말했다.

한편, 배재대학교는 이날 오후 새로운 총장 선출을 위해 후보자 6명이 참여,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총장후보자 초청 공개 토론회’를 개최했다.

<2018-11-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여전히 이승만 동상 남아 있는 배재대… “자진 철거해야”

수, 2018/11/0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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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지원단체 “공동대리인단 꾸려 내년 3차 소송 진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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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승소 판결이 내려진 10월 30일 오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 할아버지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며 소감을 밝히던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슬찬 기자

지난달 30일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고가 원고들에게 1억 원씩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한 원심을 확정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피해자들이 일본에 첫 소송을 제기한 건 1995년, 한국에 첫 소송을 제기한 건 2005년이다. 그때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났다. 시민단체들은 “이 재판의 싸움엔 긴 역사가 있다”고 강조하며, 이 재판 결과로 피해자들이 겪어온 일생의 고통이 해소될 수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이번 판결을 보도하며 ‘배상금’만 부각하는 일부 언론 행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 ‘1억’을 강조하며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에게 소송을 제안하는 ‘소송 브로커’가 많다며 우려를 표했다.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주최로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소송 변호단 및 한·일 사무국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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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 이춘식(94) 할아버지가 10월 30일 오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전원합의체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이동하고 있다.ⓒ김슬찬 기자

이날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는 강제징용 판결 의미를 왜곡하는 일부 인사들의 발언, 언론 보도의 행태를 지적하며 “함부로 말씀하시지 말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 공동대표는 30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재판을 도와왔다. 그는 “이 소송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제가 그 현장에 있어 잘 안다. 그런데 승소 판결 뒤 언론에 나오는 말들이 모두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했단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수십 년간 소송을 진행했는지 아픔, 슬픔 등의 마음은 알아주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또, 이 공동대표는 20년간 진행해 온 소송을 두고, ‘해당 재판 결과로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질 것’처럼,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에서 일한 모든 사람들이 배상금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일각의 주장을 비판했다.

이날 그는 일제강점기 신일철주금에서 강제 노역을 한 피해자들의 이름이 담긴 두터운 파일 13개를 보여주었다. 지난 20년간 소송을 진행하며 강원도, 충청도 등 전국에서 만난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자료였다. 이 대표가 한 명, 한 명 만난 피해자들은 총 20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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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신일철주금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파일ⓒ민중의소리

공동대리인단이 또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한 소송 이어간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소송을 지원하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는 대법원 판결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강제징용 관련 소송을 진행하고 싶다는 문의 전화가 걸려온다고 한다.

이날 간담회에서, 피해자를 대리해 온 변호인단과 단체들은 향후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보장할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우선, 이들은 전국을 다니며 올해 안에 피해자 유족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해 이번 대법원 판결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알리고, 또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소송을 진행할 수 있게 지원할 계획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서 조사한 피해자 실태 자료를 바탕으로, 올해 안에 지역별 설명회를 열 예정이다. 이후 소송에 대한 의사를 확인해, 소송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향후 소송은 변호사 개인이나 단독 법무법인이 아니라 ‘공동 대리인단’을 꾸려 진행한다. 앞으로 진행될 소송은 2005년 1차 소송, 2012년 2차 소송에 이어 ‘3차 소송’으로 명명된다. 3차 소송 소장 접수는 내년 4월 이전에 이루어질 계획이다.

임 변호사는 “지난주 대법원 판결 이후, ‘소송 브로커’들이 1억 원이라는 점을 굉장히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며 ‘가족 중에 강제징용 피해자가 있다면 소송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는 적절하지 않은 소송 형태로, 피해자들을 또다시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다”며 “충분한 정보 제공, 공동대리인단 구성을 통해 안정적으로 피해자의 법에 대한 접근권을 실현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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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주최로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소송 변호단 및 한·일 사무국 기자간담회’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민중의소리

지원단체-대리인단, 가까운 시일 내 신일철주금 본사 방문 예정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 단체와 변호인단은 가까운 시일 내 신일철주금 본사를 방문해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할 예정이다.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야노 히데키 사무차장은 신일철주금이 자사 홈페이지에 게시한 ‘기업행동 규범’ 중 ‘규칙을 준수하고 높은 윤리관을 갖고 행동하겠다’(제1항목),‘각국의 법률을 준수하고, 각종 국제 규범·문화·관습 등을 존중하며 사업을 하겠다’(제8항목)는 부분을 언급했다. 그는 “이런 행동 규범을 갖고 있는 기업이라면, 일반적 상식에서 봤을 때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시현 연구위원은 “피해자들은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했다.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노예와 같이 생활하며 몸이 망가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들에겐 육체적 손해, 정신적 피해가 있다”며 “가해자가 져야 할 책임 중 배상은 일부에 불과하다. 사죄, 책임 인정 등에 대한 부분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가 아닌 특정 기업에 책임을 무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신일철주금을 포함한 다른 광역 기업들이 어떻게 과거사 문제와 대면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것인지 이제서야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2018-11-0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강제징용 피해자의 수십 년 고통보다 ‘배상금 1억’에 집중한 사람들

※관련방송

☞KBS: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소송 브로커 우려…“정식 대리인단 구성할 것”


☞YTN: “강제 징용 피해자 모집…추가 소송 예정”


※관련기사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 소송, 한일 공동 대리인단 구성한다

수, 2018/11/0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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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임종국상’ 시상식

학술부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소장
언론부문 원희복 경향신문 출판국 부국장

1965년 국민적 반대 속에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임종국 선생(1929∼1989)은 우리 근현대사 왜곡의 근본 원인이 과거사 청산의 부재에 있음을 직시하고, 반민특위 와해 이후 금기시되고 있던 친일문제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1966년『친일문학론』을 발표하여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던졌으며, 그 외에도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작들을 남겨 한국지성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회장 장병화)가 제정한 〈임종국상〉은 ‘친일청산’,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선생의 높은 뜻과 실천적 삶을 오늘의 현실 속에 올바르게 계승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를,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두 부문에서 선정해 수여한다. 2005년부터 매년 수상자를 배출하였으나, 2008년과 2009년도는 사무국을 맡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가『친일인명사전』편찬에 주력해야 했던 사정으로 시상이 잠시 중지되었으며, 올해가 12회째이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14 사회·언론 부문 5 등 19건이 올라왔으며, 지난 10월 12일 열린 심사위원회 본심에서 열띤 토론 과정을 거쳐 학술부문에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 소장을, 언론부문에는 원희복 경향신문 선임기자를 제12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하였다.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 김동명 국민대 교수, 박찬승 한양대 교수, 장완익 변호사, 정근식 서울대 교수,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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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학술부문 수상자인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은, 199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 참여해온 활동가이자 2004년부터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관으로 과거사 청산에 참여한 연구자이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미결과제가 산적한 가운데 해산된 뒤에는,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산하 인권평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히는 지난한 작업을 지속해왔다.

수상저서인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1백만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의 실태를 총체적으로 조명한 노작이다. 이 책은 민간인학살의 양상을 유형화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실화해위원회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피해상황도 정리해 담았다. 신기철 소장은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외에도 국가폭력과 전쟁범죄를 줄기차게 추적하여 무려 7권에 이르는 역저를 내놓았다. 심사가 시작될 무렵 출간된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는 비록 심사과정에서는 거론된 바 없지만, 금정굴 학살을 시대적 배경에서부터 사건의 전개와 은폐과정, 기억하기와 해법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한 방대한 저작이다. 이 모든 성과들이 저자가 말하듯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작업의 연속선상에서 거둔 놀라운 결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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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희복 경향신문 선임기자

언론부문 수상자인 원희복 경향신문 출판부국장은, 오랜 기간 경향신문에 재직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과거사 청산을 위해 헌신해온 중진 언론인이자 저술가이다. 그는 독특하게도 역사 전문 기자를 자임해왔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뭇 기자들이 선호하는 분야가 즐비하건만 역사 그중에서도 과거사 분야와 시민운동이 그의 주 관심사다. 그는 역사와 진실에 대한 망각이 오늘의 부조리한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이 원희복 기자가 한국현대사의 사건들을 추적 조명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작업은 인물탐구와 역사르포로 대별되는데, 인물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조명하여 인물을 드러내는 형태로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왔다. 2014년부터 〈주간경향〉에 연재하고 있는 ‘원희복의 인물탐구’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역사정의 민주화 평화통일 등 시대적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 데 비해,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과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은 아직 그늘에 가려져 있는 역사의 사각지대를 추적 복원하고 있다.

2015년 주간경향에 연재한 ‘광복 70년 역사르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진도 팽목항까지 한국현대사의 주요 현장 40여 곳을 발품을 팔아 답사하고 사료를 발굴하여 재구성한 탐사보도이다. 이 기획은 해방에서 4·16참사에 이르는 70년간에 일어난 주요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를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출간한 『촛불민중혁명사』는 촛불항쟁의 연원에서부터 전개과정, 그리고 그 역사적 성격을 정리 분석한 주목해야 할 역작이다. 특히 항쟁 발생의 주원인으로 박근혜 정권의 무리한 역사전쟁 도발을 꼽고 있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시상식은 11월 9일(금) 오후 7시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린다.

제12회 임종국상 시상식
때 : 2017년 11월 9일(금) 오후 7시
곳 :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문의 :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 / www.minjok.or.kr


※수상자 약력

신기철

주요경력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남
1983년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입학
1985년 인천에서 노동운동
1989년 영등포 산업선교회 노동자학교 교사
1990년 서울남부금속 노동조합
1995년 ~ 1998년 공단서점 대표
1998년 ~ 2003년 고양시민회 사무국장
2004년 1월~12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팀장(전문위원)
2006년 4월 ~ 2010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팀장(별정직 사무관)
2013년 5월 ~ 2018년 현재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소장

저서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인권평화연구소, 2018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인권평화연구소, 2017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인권평화연구소, 2016
《멈춘시간 1950》, 인권평화연구소, 2016
《전쟁범죄》, 인권평화연구소, 2015
《국민은 적이 아니다》, 헤르츠나인, 2014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자리, 2011

원희복

주요경력
1990년∼현 : 경향신문 기자-차장-부장(전국부장, 편집장)-선임기자/부국장
1999년∼현 : 민족일보진상규명위원회 홍보위원장-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
2006년 : 청와대 국가안전보장자문회의(NSC) 자문위원
2006년 : 민주언론시민상 본상 수상(민족일보 사건 명예회복)
2012년 : 대통령 표창(재난보도 공헌)
2012년 :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2018년 ~ 현 : 인사혁신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자문위원
2018년 ~ 현 :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심사위원
2018년 ~ 현 :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민족화해〉 편집인

저서
《촛불민중혁명사》, 말, 2018
《르포히스토리아-서대문형무소에서 팽목항까지》, 한울아카데미, 2016
《사랑할 때와 죽을 때-한·중 항일혁명가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공명, 2015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1994

※역대수상자 1108-20

목, 2018/11/0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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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우발적 광기가 아닌 이승만의 조직적 대량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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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인권평화연구소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에 있는 고봉로에서 가장 높은 곳인 개미고개엔 야트막한 황룡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주민들이 자주 오르는 산책 코스다. 험하지 않은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깊이가 18m가량 되는 수직굴이 나온다. 이곳은 일제시대 금을 캐기 위해 만들어진 금광이지만 지금은 폐광이 된 곳이다. 원래 깊이는 50m가량이었지만 무너지면서 얕아졌다. 이곳을 사람들은 황금을 뜻하는 금(金)과 우물을 뜻하는 정(井)을 써서 ‘금정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곳 ‘금정굴’에선 지난 1995년 9월 집단으로 파묻힌 유골이 다리뼈와 머리뼈 등이 마구 뒤엉킨 모습으로 발굴됐다. 유골 주변에선 시체들을 묶은 통신선과 탄피도 쏟아져 나왔다. 발굴된 유해는 153구였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들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후퇴했던 이승만 정권이 그해 9월 서울과 고양 일대를 수복했다. 국민을 버린 채 자신만 피난에 나섰던 이승만 정권은 경찰과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인민군부역자를 처단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을 부역자로 몰아 재판도 없이 학살했다. 그 과정에서 고양 일대의 수많은 민간인, 나이 어린 중학생은 물론, 항일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부역자 혹은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뒤 금정굴에 암매장됐다. 유가족들은 자신들도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학살의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왔다. 그러다 용기를 내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45년간 잠들어있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 비롯된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이승만 독재 세력 공범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대량학살”

집단 학살의 현장이 드러난 뒤에도 유족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지난한 투쟁은 계속됐다. 모두가 외면하고, 모두가 침묵하며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유가족들과 함께 묵묵히 싸워온 이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온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고양 지역의 금정굴 사건을 접한 이후 금정굴 사건 진상규명과 나아가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해 온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신기철 소장이다. 신 소장은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마친 지금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금정굴 학살의 진실을 파헤치고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의 시간을 기록한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를 출간했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 시간 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한다’,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을 출간하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진실을 다뤘다. 한국전쟁 전후로 학살당한 민간인 1만4천343명의 명단을 수록한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시상하는 제12회 임종국상 학술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신 소장은 책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에서 금정굴 학살에 대해 “전쟁 상황에서 비롯된 우발적 광기가 아니라 이승만 독재 세력 공범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대량학살”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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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0월 금정굴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인권평화연구소

“그동안 좌우 갈등이라고 
정리해온 개념 역시 국가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확인했다”

이 책 1부 학살에선 해방과 식민 과거 청산의 실패, 분단과 독재 체제의 고착, 전쟁 그리고 금정굴 학살을 통해 고양지역에서 살아가던 민중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소개하고 있다. 1950년 고양경찰서가 수복되고 치안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주민들이 연행됐다. 끌려간 사람 대부분은 부역 의심을 받는 사람들의 가족이었다. 이후 20일 동안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 의용경찰대, 태극단원 등 60여 명이 번갈아 가며 학살을 저질렀다. 고양 금정굴 사건의 마지막 날인 10월 25일 20명이 학살당하는 현장에는 고양경찰서장까지 직접 가담했다. 금정굴은 고양경찰서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야산에 위치에 있었으므로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가장 빠른 길인 일산시장 관통로를 지나갔는데, 이를 목격한 주민들이 많아지자 그다음부터는 목격자가 적은 철길로 우회했다. 나중에는 트럭을 이용하여 금정굴 현장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총살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는 경찰관은 이무영 서장을 비롯해 12명이며, 의용경찰대원은 이진 등 26명, 태극단은 단장 이장복 등 20여 명이었다. 학살당한 이들의 구체적인 사례와 국가 기관의 개입과 활동은 이 학살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국가는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진실을 은폐했다. 학살이 일어난 1950년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제기돼 관련한 재판이 있었다. 의용경찰대원 25명, 시국대책위원 2명, 경찰관 여러 명이 조사를 받았고 11월8일에는 금정굴 현장검증까지 이루어졌다. 이중 25명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며 11월 20일 8명에 대해서만 공판청구서를 작성하고 나머지 17명을 석방했다. 이들 8명에 대한 재판은 12월 22일 열렸다. 재판 결과 사형 2명, 징역 15년 2명, 징역 10년 1명, 형 면제 3명이었다. 이 재판을 통해 금정굴 학살은 은폐되고 전쟁범죄자였던 이승만 정부는 법의 수호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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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이런 과정은 “그동안 좌우 갈등이라고 정리해온 개념 역시 국가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게 하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 기록을 통해 그동안 규명되지 않았던 금정굴 학살의 진실, 즉 국가 권력이 어떻게 이를 저질렀고, 왜곡, 은폐 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안에서
적으로 취급되었던 항일운동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민주주의자,
민중혁명가에 대한 억압의 시대도
절반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남은 절반은 민중 스스로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때 완성될 것이다.
거짓의 시대를 끝내자.”

2부 진실에선 무려 43년이 지나서야 시작된 진실 규명 활동과 유해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삭살 사실을 부인하는 국가와 지역 사회의 거짓 그리고 이에 대한 끝없는 투쟁의 과정을 소개했으며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진실규명 활동과 중단, 그리고 후속조치 등 남은 과제를 위한 현재의 투쟁을 정리해 담고 있다. 금정굴 사건에 대한 은폐 시도와 학살에 가담한 태극단 활동에 대한 미화 조작은 전두환의 집권 이후 강화됐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태극단의 활동이 반공 교재의 소재가 되어 경기도 내 각 학생들에게 보급됐고, 태극단원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1983년 ‘태극단 투쟁사’를 발간했다. 1984년에는 국방부 영화제작소에서 ‘태극단’ 활동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전쟁기념관 2층에는 수복 전후 태극단원들이 활동한 흔적들이 전시돼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각종 활동에 앞장서고 있으며 금정굴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사업에 맞서 아직도 “학살이 아닌 처형”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등 학살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학살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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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지역 보훈단체 회원들은 지난 8월 고양시의회 의원 사무실 복도에서 ‘고양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제정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였다. 보훈단체의 반대에도 8월31일 고양시 의회 본회의에선 조례안이 시 의원 33명 가운데 찬성 24명, 반대 8명, 기권 1명으로 통과됐다. 조례안이 만들어진지 8년 만이었다.ⓒ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신 소장은 말한다. “금정굴 사건은 부역혐의 사건이 개인들 사이의 감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체계적인 공격 때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금정굴 사건의 진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좌우 대립, 또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남과 북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대립의 진짜 원인은 우리 사회 안의 거짓, 즉 국가범죄의 진실을 숨기는 것에 있었다.”

이 책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산 자들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은 왜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을까? 부모라는 이유로, 형이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여야 했을까?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여야 했을까? 이 ‘평범한 악(evil)’을 숨겨 온 대한민국은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찾아 떠난 28년의 여정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여러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신 소장은 진실을 찾기 위해 떠났던 여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대한민국 안에서 적으로 취급되었던 항일운동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민주주의자, 민중혁명가에 대한 억압의 시대도 절반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남은 절반은 민중 스스로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때 완성될 것이다. 거짓의 시대를 끝내자.”

<2018-11-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새책]“대한민국은 왜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을까?”

※ 관련기사

☞경향신문: 올해 ‘임종국상’ 수상자에 원희복·신기철씨

☞통일뉴스: 9일 제12회 임종국상 시상식…신기철.원희복 수상

☞연합뉴스: 제12회 임종국상 수상자에 신기철·원희복씨

☞프레시안: 제12회 임종국상에 신기철 소장·원희복 기자

금, 2018/11/0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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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토론회로 한국 대법원판결 알리기 주력…韓 시민단체와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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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시민단체들, ‘강제동원문제 해결’위해 공동행동 결성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강제동원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11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스페이스 단포포’에서 결성집회를 열고 있다. 2018.11.11 [email protected]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지난달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과거청산의 기회로 삼자며 연합 단체를 발족했다.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입법을 위한 일한공동행동 등 일본 시민단체들은 11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스페이스 단포포’에서 ‘강제동원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을 발족하는 집회를 열었다.

공동행동에 참여하는 단체는 이외에도 나가사키(長崎)·히로시마(廣島)·나고야(名古屋) 미쓰비시(三菱) 강제동원소송지원 3단체, 일본제철 전(前)징용공 피해를 지원하는 모임,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포럼 평화·인권·환경,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연결하는 모임 등이다.

공동행동은 지난 8월 한국 시민단체들이 만든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과 연대해 강제징용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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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용 판결’ 한일대립 고조 (PG) [최자윤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

구체적으로 공동행동은 ▲대법원판결 내용과 의미를 알리고 일본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집회 개최 ▲기업(신일철주금)에 대한 대법원판결 수용과 배상 요구 ▲토론회와 방송 출연 등을 통한 대법원판결 지지 등의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공동행동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한국 대법원이 피해자의 호소를 인정하고 신일철주금에 배상을 명하는 획기적인 판결을 냈다”며 “1965년 이후 기다려온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 회복 기회가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말로 강제3원, 강제노동 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을 꾀할 때”라며 “한국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단체들이 연대하기 위해 공동행동을 결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동행동의 제안자 중 한 명인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씨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남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끈기 있게 운동을 전개하겠다”며 “이를 통해 한일 관계의 재정립을 꾀하는 한편 과거청산에 기초한 북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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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시민단체들, ‘강제동원문제 해결’위해 공동행동 결성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강제동원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11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스페이스 단포포’에서 결성집회를 열고 있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2018-11-11>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 시민단체, 강제동원문제 해결 위해 뭉쳤다…”지금이 기회”

※관련기사

☞한겨레: 한-일 시민단체, ‘강제징용 문제 진정 해결’ 공동행동

☞KBS: 日 시민단체, 강제동원문제 해결 위해 뭉쳤다…“지금이 기회”

일, 2018/11/1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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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8순이 다 되신 서울동부지부 이기자 선생께서,

민문연 집행부의 그동안 20년 가까이 회원들 몰래 2중 정관(신고용 정관과 운영정관)을 만들어 “(이사 5인과 직원을 포함하여) 회원 10명”으로 총회와 임시총회를 통해 연구소 주요의사결정을 해온 어처구니없고 기만적인 행각에 대해 지난 10월 12일에 올린 비판글인데

이우식이라는 정체를 알수 없는 자의 허접한 글들에 의해 계속 밀려나며 회원님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매  전국의 1만3천여 회원 여러분들의 주목을 호소하며 다시 올립니다.

지난 3월 24일 전국의 회원을 모아 숙대에서 정기총회를 열기 전인 3월 8일 이미 소위 “회원 10명”이 모여서 정기총회를 열었으며 (1년에 정기총회를 두번 열어온 민문연) 연구소 집행부는 이를 교육청에 신고했으나,

정작 3월 24일 전국에서 수백명을 모아 연 ‘진짜’ 정기총회는 교육청에 신고도 안 했습니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총회를 위해 올라온 회원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날 참석해서 결정한 사안들은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이 총회 공지를 받고 참석한 총회는 법적 효력이 없는  ‘가짜’ 총회였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시민단체가 있습니까?  이 사안을 전국 각 지부, 회원님들께 전파해 주십시오.)

⟪민문연 회원의 권리는 어디로 사라졌나?》

●민문연 회원은 단 10명?

 

우리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대강 1만3천여 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원은 단 10명이라고 말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고 다녀. 정신 나갔나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신 나간자의 말이 아니고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등록된 서울시교육청에 제출한 민문연의 총회회의록에서 놀랍게도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정기총회회의록.

회의일시: 2018년 3월 8일

회의장소: 민족문제연구소 3층

회원총수: 10명(함, 윤, 임. 조. 신. 김, 박, 박, 방, 이)

임원총수 : 5명 (함, 윤,………)

출석회원 : 9명( 함 . 윤. 임……….)

정관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밝힌 후 개회를 선언하고….라고 기록.

 

●민족문제연구소 임시총회회의록

회의일시: 2018년 4월 24일

회원총수: 10명(함, 윤, 임…..)

임원총수: 5명(함, 윤. 임 ….. )

출석회원: 10명

논의사항 : 감사선임.(최ㅇㅇ 감사)

법정수에 달해 본 임시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

 

회원 총수가 10명이고 적법하다고 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 들은 말이겠지 정신 나간 소리이길 바랐던 두려움이 정확한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민문연의 1만3천명의 회원은 어디로 가고 단지 10명만 회원이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늘 회원이라고 말해오던 1만 3천여 회원, 우리는 무엇입니까?

회원이 아니라면 비회원? 후원회원? 유령? 그런데 유령들이 회비를 내다니 돈 나오는 “자동출금기’ 란 말 인가요? ㅇ이사님의 말씀은 나머지회회원은 모두 후원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비회원이나 후원회원도 다 의무와 권리를 가지지 않습니다. 후원회원이란 권리와 의무는 가지지 않고 다만 그 뜻에 찬동하여 후원금을 내는 회원을 말합니다. 권리가 없으니 총회에 참석해 주장이나 의견을 말할 수도 없고 어떤 요구나 이의도 제기할 수 없으며 선거권, 피선거권도 없으니 지부장, 운영위원장을 선거도 못하고,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회비를 내고 싶으면 내고 꼭 내야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관에는 후원회원이란 말이 없습니다.

 

1만3천여명이 비회원, 후원회원이라면 회비를 꼭 내야하는 의무가 없어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만일 1만3천비회원(후원회원)이 회비를 안낸다면 민문연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30여명의 상근자 급여를 어떻게 지불할 것이며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비용, 운영비는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가진 당당한 회원 10명이 다달이 1억여원을 내게해서 상근자 급여를 주고 경비를 쓰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빌딩 매입 시 빚진 22억도 회원이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으니(3.24.총회서 임소장) 그 회원10명이 갚아주시겠습까?

 

회원 10명이 불가능하다구요?

당연히 벅차서 불가능 하겠죠?

 

그걸 몰라서 회원 10명으로 축소요술을 부렸나요? 지금까지 민문연을 든든히 지켜온 주인을 밀쳐내고서 권리는 그 10명 회원이 독점하고 “돈내는 의무는 1만3천 비회원?(후원회원?)이 져라“ 이런 염치없는 말을 할려구요?

아니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왔네요

회원총수가 해가 다르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1997년엔 106명.

1999년도에는 100명이었다가

2003년 3월15일 총회 회의록에는 10명

2003년11월 임시총회:20명.

2018년 3월 8일 10명 정기총회

회원총수가 이렇게 정신없게 늘어났다 줄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정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믿었던 민문연이 이러하다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민문연을 지탱시키는 근본 뿌리

만문연이 운영되는 근본 힘은 무엇입니까? 돈 아닌가요? 회원들이 내는 회비가 민문연을 지탱시켜 왔습니다 든든하게 민문연을 떠받쳐 온 주인이요 근본 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 주인을 의무도 권리도 없는 비회원(후원회원)으로 강등시켰나요? 단 10명만 남겨두고.

민주주의 이 나라에서 가장 숭고한 뜻과 높은 가치를 자랑했던 민문연이 가장 비 민주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숨기고 기망해도 숭고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회비는 믿음이고 정성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매국을 청산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뜻이 숭고하고 정의로와 어느 단체보다도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창립 때부터, 10년 20년을 꾸준히 기쁜 마음으로 회비를 내어왔고 역사박물관 건립 기금도 내 형편으로는 벅찬 금액이라 월부로 나누어 내면서도 가슴 뿌듯하고 기뻣습니다.

돈은 많다고 많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곧 정성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힘 벅차게 돈을 냈을 지라도 마냥 즐거운 것은 그만큼 만문연이 자랑스러웠고 정의롭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보람과 긍지가 배반과 배신으로 돌아와 아무 권리도 없는 후원회원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십 수년의 열정이 회원권리 박탈로 돌아올 줄이야.

 

●회원의 권리

고작 회비 1〜2만원 내고 무슨 권리를 얘기 하느냐고? 회원의 권리 의무는 금액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평등합니다 마치 나라에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나 적게 내는 사람이나 평등하게 투표권이 하나이듯이.

 

우리가 성의껏 회비를 내는 것은 자랑스런 민문연이 잘 되기를 바라며 낸 것이지 권리만을 위해서 낸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도 몰래 회원의 권리가 전부 박탈당하고 후원회원이나 비회원으로 강등시키 버렸다면 어느 회원이 분노하지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입회할 때 분명히 회원입회서(가입서) 썼습니다. 이사장님 귀하께. 그동암 회비를 내었으니 이사회 인준을 받은 권리 의무를 함께 가지는 민문연의 당연한 회원이었음을 떳떳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적인 절차도. 공적인 동의도 받지않고 비밀리에 회원의 자격을 박탈한 일이 정당한 일인가? 오랫동안 회원들을 속인 일이 정의로운 일인가요

회원의 권리는 단순 개인의 권리보다 전체의 권리가 참으로 중요힌 것입니다. 그것은 민문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기 때문입니다.

민문연이 부정 부폐하지 않도록 감시 제어하는 동력인 것입니다. ‘제어 받지 않는 권력은 부폐하기 쉽다’ 는 말을 상기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문연을 지탱시켜온 근본이요 주인이며 정당하도록 지킬 수 있는 최후 보루를 깡그리 없애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심히 두렵습니다. 회원이 이 사실을 일고 분노해 회비을 안내게 된다면 민문연이 지탱 될 수 있을까요? 이처럼 무서운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예상 못할 만큼 아둔한 것인가요 아니면 바보같은 회원들이니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민문연의 회원이 권리가 하나도 없는 후원회원이면 민문연음 주인 10명의 것이라 우리는 법적으로는 아무말도 못하는 외인이고 55억 빌당도 10명 이사님들이 주인이라 빌딩을 사고 팔아도 법적으로 권리 전무함으로 아무말도 못하는 유령에 불과합니다. 정부가 국민을 우민화 시켜 아무말도 못하게 해놓고 마음대로 끌고가는 경우와 똑같은 꼴이 되었습니다.

 

●맑고 투명해야 할 단체.

정의로운 단체라면 그 경영도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 주인인 회원의 동의도 없이 정당한 민주적 절차도 거치지 아니하고 몰래 자격을 박탈하는 기망행위가 정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회원을 헌 신짝처럼 취급하는데도 계속 믿음을 가지고 좋아라 할수 있을까요?

 

●이중정관/ 한 달에 두 번의 정기총회

 

지난 2018년 3월24일 정기총회는 미리 모든 회원에게 공고 되었고 숙대강당에서 전국에서 2백여명이 참석해 총회를 했다

당연히 공고도 했고 전국 각지서 200여명이 참석한 24일의 총회가, 적법하고 정당한 총회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지도관청에 총회회의록을 제출한 것은 3원 24일의 총회회의록이 아니고 3웡8일 9명이 모여한 회의록을 제출했다. 이건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고 분명한 허위 사실을 보고한 허위보고요 확실항 범법행위다.

3월 8일 9명이 모여 명색이 정기총회라고 회의록까지 보고까지 해 놓고 16일 후에 또 정기총회를 연다고 공고를 하고 정기총회를 여는 것을 무슨 짓인가?. 한 달에 두 번의 정기총회라

 

이건 가짜 총회?! 회원을 속이는 면피성 가짜총회란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총회에 참석하려고 지방에서도 기차로, 버스로 헐레벌떡 참석한 회원들을 이렇게 속여도 되는 것인가?

운영용 정관과 신고용 정관 두개의 정관을 두고 이리왔다 저리 갔다 이중 플레이를 하며 회원을 속여 온 것도 적법하고 정의로운 일입니까?

한나라에 두 개의 헌법이 있을 수 없듯이 정관도 하나여야 정상아닌가요 두 정관 어느것도 비정상입니다. 법적으로 신고도 하지않고 승인도 받지않은 운영정관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정관도 아니요 법젇으로 신고 했다는 신고용 정관도 총회의 인준도 받지 않은 것이 어떻게 정당한 정관인가요 불법이요 비정상적인 두개의 정관으로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을 어떻게 정의롭고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회원의 분노

정성스레 회비내고 모든 행사에 충실히 참석하던 회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믿었던 그 문민연이 감쪽같이 우리의 권리를 박탈해 버리고 기망해도 계속 믿고 사랑하리라 생각하는가? 열성껏 회비내고

권리와 의무를 지는 당연한 민문연의 회원이라 생각했던 회원들은 권리는 하나도 없이 돈만 내라는 후원회원으로 밀어낸 처사에 말 할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후원회원이라면 아무 권리도 없는데 지부장은 무었이고 운영위원도 유령 일뿐이다 권리도 없는 휴원회원을 제명처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참으로 코메디 같은 모양이다.

이 모든 것이 옳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대체 누가 왜 이렇게 했을까

혹 다른 단체도 그렇게들 하니까 따라했다고 하거나 쉽고 돈이 적게 들어서 그랬다고 말할 것인가?

비록 다른 모임에 그런 경우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따라 해선 안된다 왜냐면 민문연은 어느 단체보다도 정의로운 단체니까. 편리하게 쉽게 하려고 불법을 따라 해서도 절대로 안 된다 국법을 어긴 매국을 바로 잡으려는 민문연이 법을 어겨서야 되겠는가 이건 단순한 기망 사건이 아니라 확실한 범법행위다 지금 민문연의 이런 상황을 임종국선생님께서 보신다면 잘 했다고 하실까 통탄해하시며 얼마나 괴로워 하실지 가슴이 아프다

이제 우리는 속임, 비논리, 비정상, 비민주로 범벅이 된 민문연.

누가 왜 이렇게 했는지 밝혀 규명하고 불법 기망을 걷어내고 맑고 정명한 민문연이 되도록 반드시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착실히 회비내고 정성으로 도왔던 바보스런 회원일지라도 이제는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2018년 10월 12일자

이기자(서울동부지부)

통일염원시민회의 대표

일, 2018/11/1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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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은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도록 萬人에게 허락된 공간입니다. 내가 올린 漢詩를 ‘허접한

글’이라고 폄하하고 나를 향해 ‘정체를 알 수 없는 者’라고 하셨는데요, 이 자유 게시판이 ‘만주벌판’님의 소유

입니까? 내가 올린 漢詩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 홈페이지의 자유 게시판을 담당하는 분이 진즉 조치를 취했을

게 아닙니까? 말씀을 삼가하시고 상대방에 대한 기본 예의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나도 앞으로는 이 홈페이지

의 성격에 맞는 작품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월, 2018/11/1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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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11/1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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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면담 요청 거부… 경비회사 직원이 입장 전달
변호인단 “비겁하다…신일철주금 한국 재산 압류 절차 밟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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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일철주금 항의방문하는 한일 시민단체·강제징용 피해자측 변호인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활동가와 강제징용 소송 피해자측 변호인이 12일 한국 대법원의 손해배상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들고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를 방문하고 있다. 왼쪽부터 야노 히데키 강제연행·기업 책임추궁 재판 전국 네트워크 사무국장,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김민철 집행위원장,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임재성 변호사, 김세은 변호사. 2018.11.12 [email protected]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한국 대법원 강제징용 소송의 피해자측 변호인들이 12일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손해배상을 촉구하고자 일본 도쿄(東京)의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본사를 찾았지만 사실상 문전박대당했다.

재판의 원고측(강제징용 피해자들) 변호인인 임재성·김세은 변호사는 이날 오전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마루노우치(丸ノ內)의 신일철주금 본사를 방문했다.

이들은 이번 소송의 원고 중 이미 고인이 된 세 명의 영정 사진과 생존해 있지만 고령인 이춘식(94) 씨의 사진을 들고 신일철주금 본사 건물에 들어갔다.

강제징용 소송의 판결 결과를 받아들여 배상하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들고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 논의하려 했지만, 신일철주금 측은 자사 직원이 아닌 용역 경비회사 직원을 보내 입장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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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일철주금 본사 앞에서 질문 답하는 피해자측 변호인들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지난달 한국 대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진 강제징용 소송의 피해자측 변호인들이 12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마루노우치(丸ノ內)의 신일철주금 본사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신일철주금 본사를 찾았지만 사실상 문전박대당했다. 2018.11.12 [email protected]

경비회사 직원은 신일철주금 총무과의 지시로 밝히는 입장이라며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이(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상당히 유감이다. (한일간) 외교 교섭의 상황을 보면서 대처하겠다”라고 준비해온 메모를 읽었다.

경비회사측은 요청서에 대해서는 “리셉션 데스크에 놓고가면 보관하겠다”고 말하고 이를 신일철주금측에 전달할지 언급하지 않았다.

변호인 등은 재차 신일철주금측과 면담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요청서를 전달하지 못한 채 30분만에 건물을 나왔다.

임재성 변호사는 건물 앞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돌아가신 (원고)세 분과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원고)를 대신해서 온 것이니 요구서라도 받아가라고 했지만 놓고가라고만 했다”며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큰 빌딩(본사 건물)을 만드는 데에는 원고 네 분의 젊은 날의 고생과 희생이 있었다”며 “최소한 이 사람들(원고들)의 목소리라면 내려와서 받아가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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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한국·중국 강제징용 피해자 차별 배상 (PG)
[최자윤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

임 변호사는 “신일철주금이 (배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확인했다”며 “협상에도 응하지 않음에 따라 신일철주금의 한국내 재산 압류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고측은 신일철주금이 포스코와 함께 설립한 합작회사 ‘PRN’의 주식을 압류할 방침이다. 신일철주금은 2007년 설립된 이 회사의 주식 30%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신일철주금은 지난달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1억원씩 배상해야 하지만, 배상을 이행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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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시민 활동가들, 신일철주금 본사 앞에서 유인물 배표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12일 오전 출근시간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 주변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신일철주금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있다. 2018.11.12 [email protected]

이 회사는 2012년 주주총회에서는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법률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수용할 방침을 밝혔지만, 정작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는 “일본 정부의 대응 상황 등에 입각해 적절히 대응할 것”이라며 일본 정부의 ‘배상 불가’ 방침을 따를 뜻을 밝히고 있다.

이 회사의 2~3분기 매출은 2조9천34억엔(약 28조8천74억원), 순이익은 1천412억엔(약1조4천8억원)이나 된다.

일본 정부는 신일철주금 외에도 한국에서 비슷한 소송을 제기당한 자국 회사에 배상과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일본 시민단체들의 연합체인 ‘강제동원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소속 활동가들은 이날 오전 출근시간대 신일철주금 본사 앞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신일철주금이 손해배상에 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이날 변호인 등의 신일철주금 본사 방문과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유인물 배포에는 한국과 일본 취재진 100여명이 몰려 큰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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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변호인단의 신일철주금 본사 방문에 몰린 한일 취재진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지난달 한국 대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진 강제징용 소송의 피해자측 변호인들이 12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마루노우치(丸ノ內)의 신일철주금 본사를 방문하기 앞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발언하고 있다. 이날 신일철주금 본사 앞에는 한국과 일본 취재진 100여명이 몰려 큰 관심을 보였다. 2018.11.12 [email protected]

<2018-11-12> 연합뉴스

☞기사원문: 영정들고 갔는데…징용피해자 변호인 ‘문전박대’한 신일철주금(종합)

※관련기사

☞경향신문: 징용피해자 변호인들 ‘문전박대’한 신일철주금

☞서울신문: 징용 피해자 변호인단 도쿄 신일철주금서 문전박대

☞한국일보: 징용 피해자 변호인단 도쿄 신일철주금서 문전박대

월, 2018/11/1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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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8/11/13-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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