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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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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익명 (미확인) | 목, 2017/10/05- 20:58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던, 우연한 기회가 주어졌든 도전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민중의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는 새로운 직업의 길을 개척한 ‘꾼’들을 찾아 그들의 밥벌이와 가치를 묻습니다. 동영상 강좌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한다면, 페이퍼 특강에선 독자에게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할 계획입니다. 직업의 세계에선 때론 구체적인 기술보다 좋은 관점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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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며 48년 건국설을 밀어붙일 때 역사학자 조한성은 책『한국의 레지스탕스』를 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밀결사 단원들이 목숨과 맞바꾸면서도 소망했던 새로운 조국 꿈을 추적했다. 그들의 투쟁은 때론 성공하고 많은 경우 패배했지만 그들이 흘린 선혈에서 대한민국이 비롯되었다고 조한성은 말한다. 이후 그는 『해방 후 3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해방 후 역사가 미소 양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 민족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분단도, 전쟁도 모두 외세 탓인가?”

역사학자 조한성을 만났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의 저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그 참신한 질문 때문이다. 43세의 이 역사학자는 늘 치밀한 사료분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상상을 선사했다. 인터뷰는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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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부터 ‘해방 후 3년’ ‘한국의 레지스탕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다. 이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 공저다. 그의 저술은 때로 모래알처럼 작게 보였던 것도 크게,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한다.ⓒ출판사 생각정원 캡처

현대 사학의 원로이신 서중석 선생님께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한성: (웃음) 이제 서중석 선생님 그만 팔아먹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영상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충격이 컸죠. 돌베개에서 나온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시절 체험이 저를 현대사로 이끌었어요.

지도교수님은 현대사 박사 1호이신 서중석 교수님과 근대사 1세대 연구자이신 임경석 교수님이셨어요. 서 교수님은 한 강의에 20개 정도의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학생들을 나눠 조사를 시키셨어요.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행연구’에 대한 파악이었죠.

연구사 정리는 역사연구의 기초공정이에요. 현대사는 아직도 공백이 많은 분야거든요. 그 공백을 찾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 인식과 질문을 던지게 돼요. 서중석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에도 박정희 시대를 계속 정리하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론 힘이 드시더라도 80년대까지 쭉 정리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임 교수님은 사료를 다루는 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치셨어요. 서중석 선생님 안식년일 때 임 교수님께 배웠거든요. 사료 가운데 한국 근대사 자료는 일제 생산문서가 상당히 많아요. 이 문서들은 일제의 관점으로 쓰였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독립운동가가 쓴 자료라 해도 그 문서들은 작성자 중심으로 작성되었기에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엔 사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해 참과 거짓을 읽어내야 합니다. 임경석 선생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전부터 역사학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조한성: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선생님 수업이 재미도 있고 진지했어요. 전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힘을 내는 스타일인가 봐요.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어머닌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길 원하셨는데 제가 막내라 그런지 진로를 강요하진 않으셨어요. 나중 문제가 있으면 곁에 끼고 함께 살려고 그러셨는지는 몰라요. (웃음)

석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와 자료를 봐야 하고, 이때부터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대단한 은사님들께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저의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에 담아 알리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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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조한성ⓒ민중의소리

돈벌이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한성: 처음 이 일을 선택할 때부터 돈 버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사학과 들어가면 죽으라고 한문공부 해야 한다고 해서요. 실제로 사료분석에 한문은 필수인가요?

조한성: 아, 너무 안타까워요. 한문을 피해갈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고대사, 한국 중세사, 동양사 연구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 실력이 필요해요. ‘지곡서당’ 같은 곳을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요. 서양사는 영어가 필수, 한국근대사의 경우 한문과 일어가 중요해요.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요. 전공에 따라 영어, 러시아도 필요하죠. 해당 언어를 알면 더 다양한 사료를 볼 수 있으니까 유학을 가는 친구도 많아요. 다만 현대사의 경우 국한문 혼용이 많아 한문의 자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설렁설렁해도 가능해요.

일제의 공적조서, 해방 후엔 명백한 친일파 증거

그래도 한문의 자구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어야 하는군요? (웃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하셨습니다. 그때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도 큰 성취감을 느낀 조사 활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한성: 아시겠지만 친일파와 관련한 조사는 당대에 해야 했던 작업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증인을 채택할 수가 없죠. 만일 해방 후 철저히 조사했다면, 친일행위를 목격하고 들은 이들의 증언, 당사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자료가 다 남아있었겠죠.

제가 ‘관료팀’에 배치되어 도지사, 군수들 조사했어요. 거물급들은 관련 텍스트가 남아있는데 지방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4년 반이라는 시한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알려지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을까요?

조한성: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남긴 ‘지나사변 공적조서’라는 자료가 있어요. 중일전쟁 시기 일제가 관료들의 공적을 조사해 훈‧포상을 해줬는데 당시엔 공적을 적은 조서였지만 지금은 친일 행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죠. 어떤 후손이 선조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지방에서 선조를 미화하고 기념사업을 하려다 이 자료 때문에 친일행위가 명확히 드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이 자료는 위원회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인데 이 자료 때문에 3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관료들의 친일 행위가 많이 드러났어요. 위원회가 천 명 정도의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자료의 수집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위원회가 좀 더 오래 유지가 됐더라면 아마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거상 巨商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와 손잡고 좋은 일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들의 후손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더라고요. 친일파 분류는 어떻게 합니까?

조한성:  친일파 분류는 대개 1904년 러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의 행위를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해방 후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는 누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지,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일제 강점기 친일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친일파 선정에서 제외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친일행위를 한 경우는 친일파로 선정합니다.

‘밀정’의 압권,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암살’ ‘밀정’ ‘군함도’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흥행입니다. 모두 보셨는지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성 이면엔, 또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준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한성:  저 역시 언급하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역사학계에서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영화 ‘밀정’은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작가나 감독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대사 하나하나를 많이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김원봉이 황옥(기자 주:황옥은 실제 인물이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료를 설득하는 대목의 대사를 보세요.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소?”

김원봉이 황옥을 설득하는 방면도 압권이거든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영화의 백미죠. 실제 역사에서도 황옥이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에요. 아마 작가의 상상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과한 비판이죠.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느냐’인 것 같아요.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어색하잖아요? 그런 건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자연히 느끼게 되죠. 반대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면 그 역사적 팩트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도 있거든요. 최근 영화 ‘군함도’가 흥행에 실패한 건 아쉬워요. 흥행의 실패로 군함도의 역사나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인 건 맞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계열을 모두 수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라이트의 공격에 대한 반정립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임정 법통계승을 따지다 1919년 건국절로 가거든요. 역사적 맥락에 비추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거든요.

조한성:  우선 48년 건국절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죠. 반면에 1919년 건국절 주장도 한계가 분명해요. 건국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스러워요. 건국절 논란 자체는 소모적이에요. 애초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압도하진 못했어도 여타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919년~21년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 이후에는 세력이 약화하지만 40년 이후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광복군도 만들고 좌우합작도 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웠죠. 다만 여타 세력을 압도하진 못했기에 안타까움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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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로서의 특징이랄까. 조한성 작가는 인터뷰 도중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에선 관련 자료를 다시 꼼꼼히 보고 말을 다듬었다.ⓒ민중의소리

“독립선언 33인 중 단 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참 맛깔나게 우리 역사를 소개하는 스타강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올해 설민석 강사가 3.1 운동 관련 ‘민족대표들의 태화관 술자리 발언’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을 술자리로 폄하하고 ‘태화관 마담’ 발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자칭 ‘민족대표’라는 분들이 독립선언문을 내고 자수한 건 당시 목숨 걸고 항쟁을 이어갔던 민중과 대비하면 투항주의, 내지는 명백한 제한성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지도자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한성:  

저도 개인적으론 설민석 강사의 강의를 좋아해요. 이분 때문에 우리 역사에 재미를 붙이신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장하거나 재미있게 하려다 실수할 수 있거든요.

책은 출판 전 단계에서 거를 수 있지만, TV는 그렇지 않죠. 미디어 환경의 특성상 ‘스타강사’들은 자신의 역량 그 이상의 것을 요구받거든요. 방송국에선 시청률을 생각해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역사의 영역에선 강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봐요. 요릿집에서 했다고 독립선언 그 현장을 술자리라고 하는 건 엄청난 왜곡이죠.

독립선언 33인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학계에서도 존재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역할 즉, 국내 3.1 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준비하고, 조직을 확장해 이 운동을 전국화한 공로는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33인의 ‘서명’은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상황에선 목숨 걸고 한 겁니다.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을 끌어 모두 적용하려고 했고요.

33인이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조선민족대표’라고 밝혔어요. 이를 이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을 ‘민족대표’라고, 즉 민족지도자 33인으로 과대평가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33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 조선 총독부, 각국 영사관에 알리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통고’를 한 것이죠. ‘자수’라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이고, 자신들의 표현대로 독립선언을 통고한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이 33인의 역할이었죠.

28일 최종회의에서 군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는데, 군중시위가 폭력화할 것에 대한 우려였어요.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독립선언의 경과를 주장하기로 한 것이죠. 애초 33인은 군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이것이 한계죠.

만약 33인 중 단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체포될 때까지 지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에 버금가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3.1 운동 주역 중 천도교, 기독교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는데요. 바로 학생이에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지요. 이들이 3.1, 3.5 서울시위를 실질적으로 지도했고 각 지방의 시위에서 활약했어요. 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45년 이후 4.19, 6월 항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죠. 전 학생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독립 운동사를 보면 무슨 단체니 계파니 하며 반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어떤 큰 줄기가 없이 오밀조밀하게 흩어져 분열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그런 것인지요? 당시 식민지 나라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는지요?

조한성: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다른 나라의 사례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다만, 우리 독립운동의 약점은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진짜 불행은 해방 시기가 바로 치열한 냉전의 시작 시기였다는 것이죠. 미소 대결이 첨예화된 곳이 한반도였어요.

“내부의 힘이 강대국의 ‘규정’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저서 『해방 후 3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규정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민족 내부의 통합된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이는 지금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일종의 경각심을 준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관점은 ‘역사에 대한 가정’,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분단의 길목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요?

조한성: 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보면 미·소의 규정력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미소 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소 공동위원회죠. 한반도를 미래를 다루는 회의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동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외부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부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것도 미소의 규정력만큼이나 크다는 것이죠. 그럼 분단이 되지 않으려면 어때야 했을까. 그것은 좌우가 하나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좌파의 역할입니다. 남쪽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좌우를 묶으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이런 세력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자연히 박헌영이나 김일성이 좌우합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의 영향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쪽이 훨씬 진지했어요. 여운형의 경우 수차례 북으로 가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단 한 차례도 내려오지 않았죠.

『해방 후 3년』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남로당의 단정 반대 투쟁이나 4.3 항쟁, 지하 총투표 조직이 진지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 좌경 모험주의로 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던.

조한성: 남로당의 모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헌영은 지하 선거를 위해 모든 조직을 동원해 투표용지를 옮기고 주민을 모아 투표를 시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이 노출되고 파괴돼요.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조직이 모두 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당시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투쟁이 얼마나 졸속이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죠. 김일성과의 경쟁을 의식한 박헌영의 야심이었다고 밖엔 해석이 안 돼요.

김구는 일관되게 ‘충칭 임정’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고, 미 군정을 엎기 위한 2차례의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좌우 합작 절호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칭 임정세력이 주요 내각을 구성하고 나머지 3석 정도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배타성’,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김구가 해방 이후 나라의 전면적인 개혁의 측면에서 좌익세력과도 진지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반공의식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제가 연구 하면서 가장 복잡한, 그러니까 어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달리 개인적 권력욕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임정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확실히 김구 선생은 반공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활동하면서 쌓인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은 20년 무렵 레닌자금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립을 암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께선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즉 ‘5년 신탁통치 후 통일 정부 수립방안’에 진정성이나, 현실성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가령 동아일보의 치명적 오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조한성: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국제적 합의였으니 결의안대로 되었다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반탁운동이 일어나면서 결의안대로 하는 것이 어렵게 돼버렸다는 겁니다.

당시 오보를 동아일보만 꼭 찍어서 얘기하면 동아일보측이 굉장히 섭섭할 거예요. 당시 다른 신문들도 대부분 똑같이 보도했으니까요. 당시 오보는 사실상 미 군정이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은 건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소련을 경직화시켰고, 이후 3상회의 원안 고수만 주장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미국이나 소련이나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 전쟁 막는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보는 지금의 한반도, 남북 상황.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대통령의 안보행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조한성: (한숨) 우선 답이 없어 보일 만큼 깜깜하죠. 북한은 당분간 핵무장의 완성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이고요. 그 후 북미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해방 후 3년의 경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상황에 끌려만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참혹한 실정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교력과 상관없이 48년도엔 누가 봐도 전쟁이 확실했어요. 이승만은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런 이승만이 불안했던 미국은 한국군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죠. 결국 전쟁에 이길 힘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쌍방 간의 도발을 이어가다 남침을 맞잖아요?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면 김일성이 그렇게 쉽게 남침을 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사인을 계속 주면서 북‧미간 협상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사자 아닙니까?

역사연구자로 살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한성: 제 관점으로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직 한국 학계에선 ‘논문’은 인정받지만, ‘대중저술’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들이 대중저술을 선호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오히려 역사 관련 책을 써요. 재미있죠.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엔 늘 ‘오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이런 오류 없이 대중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레지스탕스』 , 『해방 후 3년』,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저술인 『군함도 – 끝나지 않은 전쟁』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있는 문체가 당대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지금은 ‘3.1 운동’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에요. 자료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잘 정리가 안 되는 경우에요. 일반인들이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분들의 자료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심문 조서’같은 형식으로 많은 분의 자료가 남아있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쓰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거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며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잡는 방법이랄까요? 조언 해주신 다면요?

조한성: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실제 주인공으로 분해서 인터뷰 형식이든, 신문기사의 형식이든 자신의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이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으면 해요.

<2017-10-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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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대통령이 우리 최고의 무역흑자국인데 사드로 무역마찰중인 중국을 방문 힘든 외교협상 끝에

우리헌법에도 민족간 전쟁을 만들수있는 행위는 불법이라 명시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적시해놓았듯이

한반도 평화를 지켜야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확인하는 큰성과를 받아왔고 대중무역도 원상태로 돌아가며

 

이명박그네가 망쳐논 남북관계를 다시 평화적 한반도로 바꿔놓고있는데 친일매국노 후예당인 한국당등 야당이

사사건건 트집잡고

북한역시 핵무기는 미국견제용이지 한국공격용이 아니라고 밝혀도 올림픽까지 북풍조작 안보팔며 이념조작하는데

 

요번 아이스하키 단일팀도 동서베를린 자유왕래로 평화통일을 이룬 독일이 자기들 하키팀 출전못하더라도

평화로운 한반도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의 평화통일위해 한국의 남북단일팀을 지원한것인데도

역시 친일매국노가 만든 한국당등 친일파가 변신한 가짜우익 가짜보수들이라 반국가 반민족 매국행위하는것으로

 

우릴침략해 36년간 우리민족 수백만명을 학살하고 아녀자 수십만명을 위안부로 끌고가 학살했으며

강제동원과 엄청난 우리재산 약탈하고도 피해배상도 않하고 진정한 사과도 없이 독도를 넘보듯 한반도 재침략 노리는 뻔뻔한 일본에

 

미국지시가 있어도 한미일 삼국군사동맹을 반대한다는 역사적인 문대통령의 발언으로 중국도 감동시켜 한중관계가 좋아지는데

야당대표란것이 아베에게 찾아가 머리조아리며 굴욕적 위안부나 군사협정을 일본편드는 더러운것들로

이명박그네에 충성하던 친일파가 만든 조중동과 문화와 연합 경제신문등등 쓰레기언론과 기레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또 과거 미국옆 쿠바가 쏘련미사일기지를 설치하려하자 미국이 폭격한다하여 무산돼었는데도

박근혜가 전쟁시 미국일본으로 향할 핵탄두를 한국인 죽어도 한국상공서 터트린다고 사드미사일기지를 한국에 들여와

중국이 사드 레이다로 중국 감시와 미사일로 중국을 폭격할수있다고 반대하고 러시아도 반대해

 

전쟁시 중국 러시아가 폭격 일순위가 사드기지라했고 무역거래와 관광객 끊어 엄청난 적자를 보고 있었는데

이것도 문통이 해결해 칭찬은 못해줄망정 가짜우익 보수당과 종편과 신문이 문대통령 까대기에 총력기울이며

이명박 똘마니인 간철수는 본색을 드러내며 보수당과 통합한다고 호남을 배반하며 문대통령을 비난하는데

 

이것들이 평화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는 헌법정신을 위반하며 미국의 선제공격론을 부추기고 있지만

만약 미국이 선제공격하면 핵무기말고도 휴전선의 장사정포와 화학무기공격으로  6.25때도 삼백만명이 숨졌지만

지금은 수천만명이 숨지거나 멸망할 한반도 전쟁을 부추기는 반국가 반민족 매국노들이란걸 잘나타내준 작태이므로

이에 한반도가 분단된 원인과 요즘 북한핵사태와 애국애족심이 투철한 외국과 다른 한국의 가짜우익 가짜보수들을 집중 조명해보자

 

 

1994년 제네바에서 영변핵발전소로 핵무기 만들수있다하여 가동중단 대신 미국일본이 중유발전소 지어주고 중유지원키로 합의했으나
북한이 영변핵발전소까지 파괴했어도 미국일본이 핑계를 대고 제네바협정을 깨트린후 북한에 선제공격 위협하여
북한이 핵발전소 다시 짓고 핵무기만들게 유도한게 음흉한 미국과 일본으로

북한핵만드니 미국은 한반도서 전쟁날것처럼 위협하며 한국에 미국서 퇴출하는 고물무기 세계최고로 많이 팔아먹었고
미국세력확장용 미국이익인 한국주둔비용도 더뜯어갔으며 서해미군기지와 일본서 쫏겨나는 해군기지도 우리세금으로 짓고
일본은 전범국가라 군대도 못갖고 전쟁도 할수없는 나라인데 미국과 짜고 북한핵 핑계대고 침략할수있게 바꾸는중으로

 

지금 미국과 일본이 짜고 구상중인 한미일 삼국 연합군사동맹이 과거에 비슷한 매국적인 전략협상이 있었는데

박정희가 1963년 불법쿠테타 성공후 일본가서 만주총통으로 직속상관이었던 전범 기시 수상에게 경례하며

우리땅이던 독도 앞바다를 일본요구대로 한일협정서에 공해로 표기해 현재 독도분쟁 만든 최악질 매국노로

당시 미군과 일본군 또 한국군이 북한을 침략후 한반도를 일본식민지로 넘긴다는 비밀협정에 서명했으니

음흉한 미국도 참여해 미국무부 비밀문서에 미쓰야[63]협정으로 기록해 현재까지 기밀보관중이며

[부르스 커밍스교수 증언]

 

만약 중국과 쏘련이 참여 북한을 정복못하게 불리하면 남북한에 핵을 쏟아부어 생명체가 못살게 파괴하려한것으로

그래서 일본 양심학자들이 기시와 박정희를 태어나선 안될 귀태라한것이며 일본사회당등 반대로 무산된 협정인데

지금 기시 손자인 아베가 할얘비 뜻에따라 매국노 박정희 딸 박근혜와 한국인들 반대에도 한일군사협정 맺어

한국전쟁나면 돕는다는 핑계로 한반도 재침략 발판을 마련한것으로 위안부 굴욕협정처럼 박근혜의 매국행위이며

 

이렇게 한국인 생명 무시하는 미국이 1905년에도 일본에게 조선을 식민지만드는데 적극 협조한 더러운 미국으로
해방후 독일처럼 전범일본을 갈라야하는데 731부대 살상무기정보를 준 살인마 731부대장도 전범처리 않하듯이

일본이 조선등 침략국서 약탈한 엄청난 금괴를 미국에주고 부탁 일왕도 전범처리않고 조선을 일본대신 강제분단시켜

당시 독립군과 애국국민과 제주도민이 조국분단 반대하자 이승만이 처벌하려던 친일매국노를 구출후
정부와 군경 요직에 기용

 

강제분단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등 애국자와
애국국민과 제주도민 또 독립군을 빨갱이로 몰아 암살과 학살한것으로 이들이 진짜 우익 보수로

자기민족을 아끼는 민족주의와 자기국가를 최고로 사랑하고 타국을 배척하는 국수주의가 진짜 우익보수정신인데

친일파가 변신한것들이라 일본에 충성하다 미국에 충성하며 미국일본편들어 조국분단을 돕고 애국국민을 학살한것으로

 

미국과 일본과 매국노들땜 강제분단되어 분단때문에 300만명이 숨진 6.25비극과 현재까지 분단고통만든것으로

일본은 6.25전쟁때 전쟁물자 판매로 엄청난 소득올려 지금도 남북간 전쟁을 부추기는것이며
미국은 우리세금으로 미국세력확장하고 미국고물무기 팔아먹듯이 한국에 엄청난 피해준것으로

그래서 얼마전 양심적인 주한미국대사 지낸분이 한국서 무릎꿇고
미국의 강제분단정책이 한국인에 큰고통을 줬다고 사죄하듯이

 

전쟁나서 폐허로 약소국이 안돼고 한국이 독일처럼 평화통일되어 강대국이 되면

미국 일본의 조선 강제분단 책임을 물을것이며 친일매국노 박정희 이용해 침략배상을 제대로 않한 일본이
침략배상까지 독일처럼 철저히 배상할까봐 죽어라고 한국과 북한의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더러운 미국 일본이고

 

강제분단에 협력한 친일매국노들이 일본대신 미국에 충성하며 미국의 강제분단정책이 잘한짓이라고 역사왜곡하며

그세력들이 만든당이 현재 한국당등 야당이며 학교에도 뉴라이트 교수와 선생들이 학생에게 왜곡된 역사가르키며

조중동등 언론도 만들어 국민속인것이며 일본은 한국내 뉴라이트에게 간첩처럼 지원금주며 매국노를 양성하고있고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군의 전시작전권도 미국이 갖고 한국군을 지휘하라고하며 성조기들고 데모하는 매국노들이며
60억불 부정축재한 박정희와 박근혜 서방인 최태민 최순실과 수십조 도둑질한 박근혜와
수백조원 나라돈 날리고 수십조 뇌물받은 이명박도
뉴라이트 소속이라 미국 일본 편들어 남북간 냉전만드는것으로 남북간 자유왕래와 교류를 막으려고 금강산 관광도 깨고

[이상한 관광객 한명이 잠자는 밤중에 경계선 철책을 넘어 사살됨]

업주들 이익이 엄청 발생하는 개성공단도 깨고 휴전선이 불확실해 마찰이 잦아 안전위해 만든 서해평화 어업협정도 깨트린것인데

현재 세금도둑질 수사를 정치보복이라 선동하며 세금도둑질한 돈풀어 한국당등에 정치자금주고 댓글알바와 데모하는데 돈주고 동원하는것이다

 

(박정희 불법집권기간은 저개발 아시아가 선진 서양문물 받아들일때라 동양이 다발전할때인데도

당시 장면정부가 경제개발계획 세워놓은걸 설계도 보고서 따라했으며 기업과 짜고 근로자 최저임금으로 착취후

경제살려야할 세금 60억불 박정희가 도둑질해 당시 북한 필리핀 싱가폴 버마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등등 다른 아시아국가보다 경제 훨씬못살린거 세계경제발전도표에 다 나와있으며

 

박정희가 60억불 도둑질해 스위스계좌로 빼돌린건 기업서 돈뜯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신 아들이 미국 프레이져 국회청문회가서 증언했듯이

 

만주서 독립군들 많이 죽인죄로 해방후 처형이 무서워 도망다니던 박정희는 이승만이 일본장교 모집하자 국군에 입대후에

경상북도 공산당 군사부장맡아 간첩질하였고 나중에 체포되자 조사관이었던 만주 일본장교 매국노인 백선엽에게

군대내 공산조직과 자기형 친구까지 공산조직 다불고 목숨구걸하였고 백선엽이 목숨살려주고 군대 복직까지 시켜

 

조카에게 마음준 김종필시켜 불법쿠테타 계획후 본인은 실패하면 튀려고 육군본부옆 술집서 사복입고 변장후 기다리다

쿠테타 성공했다는 소식듯고 군복갈아입고 합류한 기회주의자로 덕분에 백선엽이 인천서 박정희믿고 불법을 마구 저질렀고

박근혜는 자기멋대로 북한방문해 김일성 김정일을 칭송과 선물바치고 주체사상탑과 김일성 생가에도 묵념한 진짜 빨갱이 가족이며

 

노무현정권때 일본함정이 독도를 침략해 전국민이 일본을 비난하고 성토하자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가

일본위해 “울릉군만 떠들지 전국이 시끄럽게 떠든다”고 일본위해 한국인을 비난하였고

당시 노무현대통령의 발포지시로 일본함정을 내쫏앗으며

 

또 세계경제인들이 한국방문하였을때 한나라당 대표로 박근혜가 참석한후 한국경제발전을 망치려고 경제인들에게

“한국의 좌파정권에 경제협력이나 한국에 투자하지말라”고 이념조작하며 어이없는 매국발언까지한 가짜보수 진짜 매국노들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등 한국당 전신이 세금도둑질과 외국에 빚을 엄청만들어 IMF만든걸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살렸듯이

현재도 이명박그네가 나라빚 엄청만들고 정경유착 세금도둑질로 망쳐논 한국경제를 살리려하는데

마치 문재인정권이 경제망친것처럼 트집잡으며 사사건건 시비걸고 유언비어퍼트리며 발목잡는것이다 )

 

토, 2018/01/2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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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마싱령에는

우리도 가야….가야…벌씨

벌써,

가야대는데,

육일오!

기성공단!

니죽기전에 내죽기전에  가건나,   (참고정지영상은 경남민언련)

고나마  문재인 촛불정권이 이룬  마식령

정언트럼프문재인의 한반도는  정태춘박은옥이다…..망구 내말이지만,  오이로의 어미와 오일오의 아비로서,

월, 2018/01/2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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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1/2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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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1/2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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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수, 2018/01/24- 14:49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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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빈 기부 하려고 해도 링크가 계속 깨져서 나옵니다.

해피빈 링크 쪽에 댓글 달아도 반응도 없고…

 

수, 2018/01/2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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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0주년 맞아 6회 제작
4ㆍ3 사건 의의ㆍ역사 등 담아


올해 70주년을 맞은 제주 4ㆍ3을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한 ‘4370신문’이 발간됐다.


㈔제주4ㆍ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제주4ㆍ3 의 의의와 역사, 다양한 문화컨텐츠 등을 폭넓게 담은 타블로이드 판형 월간지인 ‘4370신문’ 창간호를 지난 15일 발간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신문은 1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4ㆍ3 70주년 추념식과 서울 4ㆍ3 문화제 현장이 담길 오는 5월까지 월간으로 제작된다.

이어 오는 11월 제주4ㆍ3 70주년의 한 해 활동을 결산하는 결산호을 발행할 예정이다.

‘4370신문’ 창간호에는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강우일 주교의 권두언을 포함해 노순택 사진가의 사진과 ‘4ㆍ3 기행’ 사진, 박재동 화백의 ‘박재동의 펜으로 본 제주4ㆍ3’, 제주 민예총 강정효 이사장의 ‘제주4ㆍ3과 예술’ 등 사회 각계 인사와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해 제주4ㆍ3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담았다.

신문 제호인 ‘제주4ㆍ3 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는 제주4ㆍ3 70주년의 핵심 구호로, ‘강병인글씨연구소 술통’을 운영 중인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제작했다.

매월 15일 발행되는 ‘4370신문’은 서울시와 제주도를 비롯해 제주4ㆍ3 희생자유족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예총, 전교조,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와 연계해 제주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배포될 예정이다.

4ㆍ3범국민위 박찬식 운영위원장은 “4370신문은 5만에서 10만 부를 발행해 배포할 계획”이라며 “또한 온라인, 소셜미디어 등과도 연계해 제주4ㆍ3과 70주년 사업을 전국적이고 대중적으로 알리는 소통과 홍보 창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헌 기자 [email protected]

<2018-01-23> 한국일보

☞기사원문: 제주 4ㆍ3 전국화 위한 ‘4370신문’ 발간

※관련기사


☞일간제주: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4370신문’ 창간호 발행

☞헤드라인제주: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4370신문’ 창간호 발행 

목, 2018/01/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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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시민사회, 국정 역사교과서 저지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인 5월 31일 관보 게재를 통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는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저지넷)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 학계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다. 저지넷은 485개 단체로 구성되었으며,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았다. 교육부는 새 정부 출범 직전까지도 국정교과서 연구학교를 지정하고 보조교재 배포를 시도하는 등 꼼수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연구학교로 선정된 경산 문명고등학교마저 거센 반대에 부딪혀 결과적으로 국정 역사교과서 채택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운동, 국내외에 큰 반향

2016년 8월 29일 국치일부터 본격화한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운동이 2017년에 들어 국내외의 성원에 힙입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일본과 미국의 해외동포는 물론 연구소의 취지에 공감하는 일본 시민사회도 적극 동참하였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일본 각지의 시민과 단체로부터 1천만 엔 이상을 모았고, 1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연구소에 전달하였다.

 

미국 3대 도시에 연구소 지부 결성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에 발맞추어 11월 미국의 3대 도시인 워싱턴 뉴욕 LA에 연구소 지부가 결성되었다. 미주 지부 창립식 및 준비위원회 결성식에는 임헌영 소장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에 창립된 워싱턴지부(윤흥로 이사장, 박진영 지부장)와 LA지부(정찬열 지부장, 김창옥 사무국장), 2018년 3월 창립 예정인 뉴욕지부(이춘범 이사장)는 친일 청산운동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적극 동참하고 현지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교육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일제식민지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출간

2012년부터 5년여의 작업 끝에 『일제식민지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이 출간됐다.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이후 오랜만에 펴낸 소중한 학술 성과다. 여기에 실린 통치기구는 통감부•조선총독부 본부와 소속관서(총 248개의 기구)로 각 항목마다 존속기간•성격•연혁•조직과 기능•참고문헌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를 총체적으로 다룬 사전은 이번이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정책사•제도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나아가 식민통치의 구조와 식민지배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항일음악회 성황리에 열려

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12월 18일 서울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항일음악회-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개최했다. 고 노동은 교수가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서 ‘광복군 아리랑’ ‘안중근 옥중가’ ‘압록강행진곡’ 등 11곡을 선곡하여 장사익, 노브레인, 오단해, 두레소리 합창단 등이 노래하였다. 800여 청중의 열띤 호응 속에서 잊혀졌던 항일음악을 되살리고 독립투사들의 치열했던 항일정신을 기린 뜻깊은 자리였다.
한편 연구소는 10월 27일부터 12월 18일까지 고양 창원 대전 광주 부천에서 ‘촛불 1년, 다시 부르는 항일의 노래’ 토크 콘서트를 순회 공연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마련과 항일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된 이 공연에 이야기 손님으로 이재명 시장, 노회찬 박주민 의원, 김광진 정청래 전 의원이 초대되어 ‘촛불혁명과 우리 시대의 적폐청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1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조재곤 박사, 사회부문 한상권 교수 수상

11월 10일 제11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렸다. 학술부문에는 러일전쟁을 한국인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러일전쟁과 한국사회』를 저술한 조재곤 박사가, 사회부문에는 오랜 기간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의 상임대표를 맡아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보급과 한국사 국정교과서 도입을 저지한 한상권 교수가 선정돼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박정희 관련 명예훼손 소송, 모두 승소

1월 25일, 연구소가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 일베회원 강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각각 500만원, 300만원, 3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하라는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12월 12일에는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를 상대로 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 소송 2심에서 서울북부지방법원은 피고의 항소를 기각하고 연구소에 500만원을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통해 3•1혁명의 의미를 재조명해

연구소는 6월 1일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지역문화연구센터와 공동으로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함흥법원 검사의 기소자료와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등 기존 연구에서 다뤄지지 않은 자료를 활용하여 3•1혁명의 새로운 양상을 도출하였고, 운동보다는 혁명으로 명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3•1혁명의 역사상을 한층 풍부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회째 맞은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8월 12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 열린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행사에 무단합사 피해자 유족들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사무국을 맡은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이 행사는 2006년 8월부터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해왔다.
한편 6월에는 그간 보추협의 숙원사업이었던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가 출간되어 유족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근현대사기념관, 다채로운 강좌로 학생•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어

연구소가 2016년부터 위탁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시의적절한 다양한 주제의 강좌를 개최하여 학생과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7월 25일~28일 진행된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 강좌에서는 최근 흥행한 영화 <밀정> <암살>과 강제동원문제를 다룬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소재로 삼아 연구소 상근자들이 강사로 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강제동원 피해실태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이밖에도 ‘저항과 협력-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3~6월) ‘역사의 길에서 민주주의를 묻다’(6~7월)와 ‘순례길의 독립운동가’(9월) 등의 강좌를 열어 독립전신과 민주의식 고양에 앞장섰다.

목, 2018/01/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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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2심 판결이 있었다. “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주문 내용은 간결했고 연구소는 승소했다. 1심에 이어 2심까지 재판부는 연구소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재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가 2014년 8월경부터 인터넷에 널린 유포된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4년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이에 연구소는 2016년 3월 방모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모씨는 소송대리인으로 서석구 변호사(박근혜 변호인)를 선임했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 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부르며 “방모씨의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1심에서 패소한 그들은 2심에서도 여전히 색깔론을 펼쳤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유지하며 방모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로써 방모씨는 5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해야 하는데 방모씨 측이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여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청량리 사무실에 침입해 출입문과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달아난 60대 김모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반성의 뜻을 담은 사과문을 12월 20일 연구소로 보내왔다.

08작년 4월 새벽 1시쯤 연구소가 위치한 동대문구 사무실을 찾아온 김모씨는 연구소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출입문에 엑스(X)자 모양의 낙서를 한 후 도주했다. 스프레이 테러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CCTV를 토대로 수사에 들어간 동대문경찰서는 11월에 김모씨를 붙잡아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서 열린 형사조정에 참석한 김모씨는 모든 것이 가짜뉴스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수차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연구소도 김모씨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만큼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래의 사과문은 김모씨가 형사조정의 결정에 따라 작성하여 연구소로 보내온 것이다.

 

사 과 문

상기 본인은 사건 당일 집회를 마치고 저녁식사 겸 회식자리에서 탄핵 반대 등 시국에 관해 토론을 나누는 중 잘못된 교육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분위기로 흘러 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문제라는 잘못된 소신과 판단으로 만취상태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황당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이 문제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끼친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차후 두 번 다시 이런 사태를 재발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죄송합니다.

2017. 12. 20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목, 2018/01/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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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제작하는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이하 역적 시즌2)가 12월 18일 시작했다. 촛불혁명 이후 역사적폐의 시대적 소명을 담아 제작된 시즌1은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아 애플 팟캐스트에서 발표된, 2017년 새로 출시된 최다 다운로드 팟캐스트 20위 안에 드는 쾌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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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는 매회 1, 2부로 구성된다. 1부는 역사적폐의 근원적인 뿌리를 되돌아보는 지난 100년의 한국 근현대사를 다룰 예정이다. 100년이란 긴 시대를 다루는 만큼 1년 동안 진행하는 장기프로젝트로 기획했고,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과 MC노가 호흡을 맞춘다. 박 실장은 역사 사실의 전달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이슈와 연결고리를 찾아 설명함으로써 시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계획이다. 1~2월 방송에서는 19세기말 내우외환의 조선사회가 반봉건 반외세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갔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2부는 연구소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개된 주요 활동을 전달하는 내용으로 방학진 기획실장과 연구소 회원인 김광진 전 국회의원이 공동으로 진행한다. 또한 매주 주제에 맞게 이야기 손님이 초대하는데 첫 회에는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을 모시고 효창원과 역사적폐청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선생, 석주 이상룡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 등을 모시고 반민특위와 임청각의 뒷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역적 시즌2는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미디어협동조합인 국민TV와 공동으로 제작하여 기존 오디오방송뿐 아니라 영상방송으로 채널을 확장하였다. 오디오방송은 팟캐스트 전문채널인 팟빵과 아이튠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으며 영상방송은 유튜브 국민TV채널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또한 앞으로 1, 2부와 별도로 영상방송에 걸맞은 새로운 특집기획을 준비 중이다. 연구소가 보유한 자료를 활용한 역사덕후방송, 대중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전달하는 역사토크쇼 등을 상반기에 만나볼 수 있다.

• 김세호 PD

목, 2018/01/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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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는 창립 때부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신흥무관학교–한국광복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201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기 위해 육사(당시 교장 이봉원 중장) 측에 공문을 보냈으나 협조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매년 기념식을 외부에서 열고 있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인 9월 29일 김완태 중장이 새로 육사 교장에 임명되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육사 교장 면담을 신청하여 11월 9일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황원섭 공동대표, 이준식 기획위원장, 김재운 기획팀장, 김올가(김경천 장군 후손), 방학진 사무국장 등이 육사 교장과 보직자들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기념사업회 대표단은 육사가 1946년 5월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모체로 내세우면서 독립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이었음을 지적했다. 이에 김완태 교장은 흔쾌히 본인 임기 중에 반드시 육사의 정통성이 독립군에 있음을 명확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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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후 12월 11일 육사 충무관 강당에서 ‘육군 역사 재조명을 위한 특별학술회의 –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가 열렸다. 그동안 관련 시민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군의 기원을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내용의 세미나 등을 개최했으나, 육사가 직접 이 같은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김완태 교장은 환영사에서 “현재 군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독립전쟁을 국군의 역사와 연계 및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육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신흥무관학교와 무장독립투쟁’ ‘독립군·광복군과 육군의 기원’ ‘육사의 효시에 대한 연구’ 등 3가지 소주제에 대한 발제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됐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한시준 단국대 교수, 독립기념관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한편 육사는 관련 사업의 하나로 육사박물관에서 신흥무관학교와 한국광복군 특별 전시회도 준비하고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8/01/2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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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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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교제관시보이던 하야시 부이치의 유고 사진집 <조선국진경> (1892)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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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재동에 설치된 ‘외아문’의 대문 모습. 대문 기둥에 걸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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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포정사’라는 편액이 내걸린 경기감영 대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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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던 일본공사관 구역 안에서 외아문 독판 민종묵(한복 차림)과 서울주재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청국주차조선총리 위안스카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선국진경>을 남긴 일본공사관원 하야시다.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그가 평소 여가를 활용하여 담아낸 120여 장의 조선 관련 사진자료 가운데 이를 선별하여 그의 처 하야시 카메코(林龜子)가 유고 사진첩으로 묶어낸 것이 바로 ????조선국진경????이었다.
이 사진첩에 수록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서울 도성의 각 성문을 비롯하여 경복궁 광화문과 창경궁 홍화문, 그리고 동묘 남묘 세검정 영은문 남한산성 등과 같은 여러 문화유적의 옛 모습이 담겨 있다. 대개 익숙한 풍경이긴 하지만, 그의 조선주재 시기에 비춰 촬영시점이 명확하게 파악되므로 이들 유적의 원형고증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정동 일대에 포진한 각국 공사관의 전경은 물론이고 용산과 마포 일대의 강변풍경과 부산, 인천, 강화 등지를 포함하여 저 멀리 거문도와 제주도의 풍광까지도 두루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남산 부엉바위약수터의 모습이라든가 초가집에 파묻힌 원각사탑(지금의 탑골공원 자리)과 조대비(익종비)의 장의행렬과 같은 이색적인 장면도 담고 있다.
또한 이 사진첩의 강점은 여느 사진자료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없는 공간들의 모습을 다수 채록해두고 있다는 점인데, 예를 들어 훈련원 청사와 하도감의 전경, 그리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든가 경기감영의 대문 사진 등이 그것이다.
흔히 ‘외아문(外衙門)’으로 불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개항기의 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882년 12월에 재동에 있는 민영익의 집터(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치한 중앙행정기구이다.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외무아문(外務衙門)’으로 고쳤다가 다시 1895년 7부 편제로 전환할 때 ‘외부(外部)’로 개칭되며, 그러다가 1896년 6월에 이르러 광화문 앞 옛 이조 터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요컨대 ‘외아문’은 세계열강과의 교섭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이들을 상대로 한 외교업무를 전담했던 주요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기관에 관한 사진자료는 퍼시벌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1885)에 수록된 단 한 장의 사진을 빼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바로 하야시가 남긴 이 사진첩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는 외아문의 대문 모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진의 희소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것 말고도 ‘기보포정사(畿輔布政司)’라고 새긴 편액이 달린 경기감영의 대문 모습도 크게 눈길을 끄는 사진자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보’는 경기도를 가리키며, ‘포정사’는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으뜸 관아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따지고 보면 ‘경교장’이라는 명칭의 어원도 바로 이곳 경기감영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이곳의 옛 모습은 대개 1902년 한성부 청사가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의 것만 더러 남아 있을 뿐 명실상부하게 경기감영 시절의 것은 제대로 구경해 보질 못했다.
일본공사관원이던 하야시가 짬짬이 채록한 이러한 사진자료들은 애당초 점차 자기네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고 있는 ‘잠재적 식민지’ 조선에 대한 충실한 정보보고의 용도로 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땅의 옛 모습을 사진자료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는 셈이다. 마치 일제가 문화침탈을 위해 제작 배포한 ????조선고적도보????가 오늘날 유적지 복원의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근대 사진첩의 양면성은 대개 그러한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1/2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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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harvardbusiness123/FJjr/39

청원번호 94326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106958?navigation=petitions

[청원진행중]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찾기 및 박물관 설립

 

박근혜 정권때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중단 으로 인해

민족의 역사적 의미가 퇴색이 되고

민족의 역사적 흔적 찾기가 퇴색이 되고

민족의 자랑, 역사의 뿌리 찾기가 퇴색이 되었고

민족의 기(基,氣)을 다시 새롭게 세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찾기의 현상금을 걸고,

대한민국에 안중근 의사의 박물관을 만들어서

민족 사관의 기틀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조국의 광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최일선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정치가를

암살한 안중근의사의 높은 기개와 뜻을

대한민국 후손들이 본 받을수 있는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찾기 현상금 및 대한민국에 안중근의사 박물관 설립을

청원하고자 합니다.

 

목, 2018/01/2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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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32

삼남으로 가는 길목인 청파 배다리는 왜 사라졌을까?
– 남대문정거장 확장과정에 희생된 만초천 물길의 돌다리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칠패, 팔패, 이문골, 도저골, 쪽다리를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작이 바삐 건너 승방뜰 건너 남태령 넘어 인덕원 지나 과천에서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이를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참나무정이 얼른 지나(하략)

 

이것은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 1925년 12월 4일자에 연재한 〈춘향(春香)〉에 수록된 한 대목으로,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서울도성 남대문을 나서 전라도를 향해 내려가는 행로가 길게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살펴보면 칠패니 이문골이니 돌모루니 하는 곳들처럼 더러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고, 도저골(도동), 청파, 동작, 남태령, 인덕원과 같이 지금도 제법 익숙한 지명들인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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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전도(완산본)>에 표시된 청파주교의 위치.이곳을 지나석우(石隅,돌모루)에 이르면 다시 노량진(당고개경유)이나 동작진 또는 서빙고진 방향으로 길이 갈라진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정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정리고(程里考)에는 ‘성문분로(城門分路)’ 즉, 서울 도성의 각문을 나서면 전국으로 갈라지는 길이 일목요연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울의 남쪽을 향해 한강으로 이어지는 행로는 동작나루를 건너는 8대로(해남 방향)와 서빙고로 넘어가는 4대로(동래 방향), 그리고 노량진으로 연결되는 7대로(수원 방향) 등 세 가지가 있다.

<대동지지> ‘정리고’에 표시된 청파 배다리 경유 주요 대로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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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모두 숭례문을 벗어나면 이문동을 거쳐 석우참(石隅站, 돌모루참)에 이르러 각각의 길이 갈라지는데, 요컨대 그 옛날 삼남지방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는 청파 배다리와 청파역이 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 양재 톨게이트나 만남의 광장쯤으로 받아들여졌던 셈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 국왕 정조가 화성능행에 나서거나 효창원에 행차할 때도 이용했던 행로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머릿속에 담아둘 만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성현(成俔)의 문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에 수록된 ‘청파석교기(靑坡石橋記)’에 따르면 이곳에 돌다리가 처음 놓인 것은 연산군 때의 일로 확인된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대개 이곳을 ‘배다리’라고 불렀던 모양인지 여러 고지도나 문헌자료에는 이곳을 ‘석교’라기보다는 ‘주교(舟橋)’로 표시해놓은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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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에 설치된 ‘청파 배다리 터’ 표석.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거듭 등장하는 청파 배다리가 있던 자리는 어디였을까? 서울역 앞쪽에서 용산 방향으로 걷다 보면 동자동과 갈월동의 경계면을 따라 경부선 철길 아래를 비스듬하게 뚫고 지나는 갈월가도교(葛月架道橋)라는 이름의 쌍굴다리가 이내 나타난다. 이곳을 통해 청파동 쪽으로 건너가면 1997년 9월에 서울시에서 세운 ‘청파 배다리터’를 나타내는 표석 하나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협회본부(청파동 1가 161번지) 앞에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표석은 잘못된 고증의 결과물이며, 원래 배다리는 300미터 남짓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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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사>제2권(1936)에 수록된 청파배다리일대의 전경. 만초천 물길 위에 놓인 이 다리에 인접하여 경인철도가 그 옆으로 함께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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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래거문(漢城府來去文)>에 수록된 남대문외 지도. 동그라미 표시는 각각 오른쪽 위가 숭례문, 가운데 위가 염천교, 가운데 아래가 청파 배다리의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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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작성된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 부지협정도’. 동그라미 표시는 각각 왼쪽 위가 숭례문, 왼쪽 아래가 염천교, 가운데가 청파 배다리이며, 그 오른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것이 신설되는 우회도로(지금의 갈월가도교 자리)이다. (<조선철도사> 제1권, 1929)

 

이 자리는 현재 서울역 철도부지에 편입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이 부근의 지적도면을 살펴보면 청파 배다리의 원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서울역 안쪽 플랫폼의 남단부 아래에는 ‘서계동 76번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동쪽으로 동자동과 접한 경계선 가운데 유독 배가 불룩한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가 나타난 것은 원래 만초천 물길이 흘러내리던 흔적이 그대로 동네의 경계선으로 굳어진 탓인데, 이를 통해 청파 배다리의 원위치를 가려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청파 배다리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1902년 작성된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 부지협정도(京釜鐵道 南大門停車場 敷地協定圖)’에 잘 드러나 있다. 일본자본으로 이뤄진 경부철도회사가 남대문정거장을 경부철도의 종착역으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이 일대의 철도부지가 광범위하게 편입되는데, 이때 청파 배다리로 연결되는 기존의 도로가 차단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오랜 세월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의 길목 역할을 했던 옛 돌다리는 용도 폐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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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정거장 확장과정에서 용도 폐기된 청파 배다리를 대체하기 위해 조성된 갈월가도교의 현재 모습.

 

이와 아울러 이 지점에서 남쪽으로 멀찍이 물러난 곳에 별도의 우회도로가 만들어졌으며, 그 결과 경부철도와 교차하도록 굴다리가 조성된 것이 오늘날 ‘갈월가도교’의 원형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철길 아래를 지나는 굴다리는 대개 직각 방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은 전차선로가 함께 지나는 탓에 회전반경과 기존도로의 연결관계 등을 고려하여 사선(斜線)으로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더하여 청파 배다리의 존재를 완전히 말살시킨 것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 시행된 남대문정거장 일대의 대규모 개축공사였다. <경성일보> 1919년 2월 21일자에 수록된 「남대문역 개축설계」 제하의 기사는 경성역과 수색역을 곧장 잇는 ‘경의선 직통노선 개설공사’와 관련하여 장차 변모할 남대문정거장 일대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설계의 내용]을 살펴보면, 역전광장은 시구개정(市區改正)과 정거장의 개축 등에 의해 그 면적이 현재의 3배로 확장하고 구내의 총연장은 650간(間), 즉 약 11정(町)에 달하며, 그 북단은 봉래정(蓬萊町) 1정목의 도로에서 80간 북방으로 넓히는데, 이곳에 남대문소학교 정문과 봉래정 1정목 통과의 중간부터 서쪽을 향해 새로 개착하는 12간 도로와 접속시키며 새로 다리를 놓고 건널목을 만들어 현재의 봉래정 건널목은 폐지하기로 되었다.
[하상(河床)의 이전(移轉)] 역의 서부를 흐르는 하상은 상류 서소문 외 합동(蛤洞) 부근에서 일직선으로 남쪽을 향하도록 교체하고, 현재의 하상 위치는 이를 매립하여 역 구내에 이용하고 곳곳에 교량을 가설하며, …… 이와 관련하여 새로 변경하는 하상의 폭원은 8간으로 이에 부수된 도로는 10간폭이 될 것이라 한다.

 

이렇듯 대규모의 경성역 개축공사에 곁들여 만초천이 직선화하면서 원래의 물길은 사라지고 오늘날 서울역 후면에 자리한 청파로(복개하천)가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바람에 그나마 간신히 남아 있던 청파 배다리의 옛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볼 대상은 ‘염초청교(焰硝廳橋)’의 행방이다. 이 다리는 남지(南池) 옆 칠패길을 거쳐 만리재나 애오개로 건너갈 때 반드시 경유하던 곳이며, 흔히 ‘염천교(鹽川橋)’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은 위의 기사에 나와 있듯이 남대문정거장 확장과정에서 하천 물길과 더불어 매립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남대문 옆 상공회의소 앞쪽에서 중림동 약현성당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의 이름이 ‘염천교’이다. 그러니까 이 다리는 여전히 실존하는 다리인 셈인데, 이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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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21년 3월호에 수록된 철도과 선교 ‘봉래교(蓬萊橋)’의 모습이다.1920년 5월에 준공된 이 다리는 당시 ‘경성역과 수색역간 경의선직통노선’을 만들 때 우회도로의 용도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엉뚱하게도 ‘염천교’로 둔갑한 상태이다.

 

알고 보면 이 역시 ‘청파 배다리터’ 표석이 엉뚱한 자리에 서 있는 것만큼이나 오류투성이다. 현재 염천교로 오인되고 있는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봉래교(蓬萊橋)이다. 이것은 일제가 수색역 방향으로 직통선로를 만들 때 ‘오리지날’ 염천교를 없애버리고 경성역 뒤쪽으로 연결되는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 만든 과선교(跨線橋; 1919년 7월 15일 기공, 1920년 5월 24일 준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염천교라는 이름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익숙하게 남은 탓인지, 봉래교라는 존재는 부지불식간에 잊히고 그 자리는 종종 염천교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이 다리의 교각에는 ‘염천교’라는 이름이 버젓이 달릴 정도로 일제가 만들어놓은 봉래교는 이제 완전히 염천교로 둔갑한 상태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봉래교라는 것은 봉래동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따온 것일 텐데, 실상 이 이름조차도 일제가 이 땅에 남겨 놓은 고약한 왜색지명의 하나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경성부사????제2권(1936),536쪽에수록된내용에따르면“청일전쟁개시전일본거류민은전전긍긍하며 사지에 처한 상황이었으나, 일본군이 입성하여 만리창에 막영(幕營)하고, 현재의 봉래정(蓬萊町)을 거쳐 남대문 안으로 들어와 거류민을 보호했다. 거류민은 흡사 봉래도(蓬萊島: 신선이 살고 있다는 불로불사의 이상향)에 온 듯한 생각을 했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다.”고 적고 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잘못된 다리 이름은 서둘러 바로 잡아주거나 차제에 새로운 명칭으로 바꿔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울러 일제에 의해 지형이 크게 훼손된 청파 배다리와 염천교의 경우 원위치에 가장 가까운 곳을 선정하여 올바른 ‘표석’을 설치하는 노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만약 안내문을 덧붙여야 한다면, 일제에 의해 이 다리들이 사라진 과정도 꼭 함께 서술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목, 2018/01/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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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랑스러운 아버님을 두었지만 내 아이에게는 미안한 아버지입니다
– 2017년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은 임국희 선생 자제 임병욱 회원

정리 : 이명숙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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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광복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회자되는 말이 있다. ‘친일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를 언급하며 이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했다. 나라와 민족을 우선했던 애국지사, 해방이 되고도 합당한 예우를 하지 않았던 국가, 오히려 친일파가 득세했던 세상이 있었다. 그 사이 애국지사의 가족 대부분은 3대가 망한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번 호 인터뷰 주인공은 광주지부 임병욱 회원이다. 그가 들려주는 선대 이야기와 자신의 삶에는 동학농민운동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근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와 불의에 저항했던 선대가 남긴 건 가난이었지만 선대의 명예를 되찾고자 부단히 노력한 결과, 2017년에 아버지 임국희 선생이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문 : 고 임국희 선생께 지난해 11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셨습니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먼저 묻힐 뻔 했던 아버님의 독립운동 공적을 국가가 인정해준 것이어서 정말 기쁘고, 아버님의 힘들고 어려웠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아버님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문 : 임국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사실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답 : 아버님이 1901년생이십니다. 제가 1960년생이니까 저희 아버님이 60세에 저를 낳으셨구요. 저는 집안의 막내입니다. 누나 다섯 분, 형님 한 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현재 누이 두 분과 저만 남았습니다. 제가 8살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당연히 아버님의 과거사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11년 전 보훈처 홈페이지에 아버님 함자를 넣어보니 독립운동가 번호가 있더라구요. 그때서부터 아버님의 흔적을 찾아다녔죠. 전국을 다 다녔습니다. 지금처럼 독립운동 자료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되지 않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일 때 누나들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아버지는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주의운동가 즉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고, 그러다가 저까지 잡혀간다고 반대를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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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국희 선생의 사회활동과 예비검속 사실을 보도한 1930년대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

 

문 : 임국희 선생님이 어떤 독립운동을 하셨는지 알려주세요

답 : 저희 아버님은 부산에서 신간회의 청년부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부산 지역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와 당시의 한국 실정을 외신기자들에게 영어와 러시아로 설명하셨구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년계몽운동을 하셨다고 독립운동사에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12[기록으로 전해지는 임국희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 : 부산지역에서 청년운동을 하였고, 주로 부산청년동맹에서 활약했다. 부산청년동맹은 조선청년총동맹 산하 단체로 부산에서 결성된 항일청년단체로 1927년 12월 창립 이후 부산지역의 청년운동 및 각종 사회운동을 지도하며 일제의 지배정책에 저항했다. 주요 활동은 당시 청년들이 처한 현실에 기반한 노동운동이었으며,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운동회 등을 열어 대중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임국희 선생은 부산청년동맹 집행위원 및 조사・연구부 부원, 부산청년동맹 서부지부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신간회·근우회 등 부산 지역의 각종 단체에서 개최하는 강연회와 연설회에서 연사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부산조선방직공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노동자파업을 지지·후원했던 일본인 사회주의자 쓰지(辻登喜吏)와 나카무라(中村忠)와 협력하여 파업 전말을 알리기 위한 격문 수백 매를 인쇄하여 조선과 일본 각지로 우송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구금되었다. 석방 후에도 꾸준히 부산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갔고, 1931~1932년 일제에 의해 수차례 예비 검속당했다.]

문 : 주로 청년동맹에서 활동하셨는데, 기록으로 드러난 사실 외에 직접 전해 들으신 독립운동 내용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답 : 직접 들은 이야기는 사실 거의 없습니다. 주위 친척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누나들에게 들은 후문으로는 가정은 잘 돌보지 않고 주로 외부활동만 많이 해서 좋은 가장은 아니었다고들 하셨습니다.

문 : 임국희 선생이 러시아어를 하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해외에서 활동하셨던 건가요?

답 : 잘은 모르지만 일본에서 공부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충청도에서 대대로 대농을 하며 잘 사는 집이었답니다. 큰누이가 살아계시면 지금 아흔 살이 되는데, 소학교를 다닐 때 머슴을 두고 가마를 타고 다녔다고 하니 경제적으로 상당히 여유 있는 집이었을 것 같습니다. 유학파인 아버님은 일어뿐만 아니라 영어, 러시아어까지 4개 국어를 하셨다고 하네요. 이외에도 정치경제학을 비롯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신문에 나와 있는 것으로는 아버님의 귀국 후 활동 중 외신기자들에게 우리나라 주변의 국제정세를 영어와 러시아어로 설명하시다가 체포되신 게 많더라구요.

문 : 원래 충청도 출신이신데, 활동은 주로 부산에서 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답 : 물론 있지요. 제 증조부께서 동학혁명 가담자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하셨습니다. 그 울분을 못 참으신 할아버지께서 일본과 가까운 부산으로 가셔서 아버지를 유학 보내셨습니다. 배워야 한다구요. 당시 아버지는 꽤나 영특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저희 집이 부농이라는 것을 숨기고 가족 전부가 부산으로 이사했구요. 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며 아버지 유학비를 대셨고, 귀국 후 각종 사건으로 아버지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돈으로 빼내셨다 하더라구요. 만약 아버지가 일제 때 독립운동을 안 하셨으면 아마 지금 저도 잘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저희 누나들은 그런 점에 있어 아버지를 살짝 원망하기도 하더라구요.

문 : 지난해 서훈 신청이 처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간 어떤 과정을 겪으셨나요?

답 : 네, 딱 10년 걸렸네요. 이명박 정권이 시작되던 해에 처음 서훈 신청을 했고, 1년 후에 연락이 오더라구요. 결과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3번 더 신청서를 넣었지만 마찬가지 결과만 돌아왔습니다. 왜 우리 아버님의 독립운동이 인정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었습니다. 혹시 연구소에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했지요, 아버님의 공적을 확인해 주기를요.
그런데 연구소에서 저희 아버님의 공적에 대해 너무도 자세히 조사해주고, 잘 정리해주었습니다. 사실 그 양식 그대로 보훈처에 제출했는데 그로부터 2달 후 서훈이 결정되었다고 연락이 오더군요. 서훈 결정은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보통 10년 이상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연구소에서 조사해주신 공적내용이 보훈처에 제출하는 ‘독립유공자평생이력서’에 잘 들어맞게 정리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연구소에 감사드립니다. 또 저와 같은 독립운동가 유족이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연구소가 힘써주시면 좋겠습니다.

문 : 아버님이 어릴 적 돌아가셨는데, 기억에 남는 아버님과의 추억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답 : 아버님은 늦게라도 아들 하나를 더 보시겠다고 저를 막내로 낳으셨어요. 남들에게는 구부정하신 할아버지였지만 저에게는 아버지였죠. 부산에 살고 있을 때 많은 분들이 저희 집에 자주 오셨어요. 그분들이 모두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동지들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제가 5살 때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셨습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같이 3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많이 힘들어하셨던 기억이 있어요. 가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숨어 사신 것 같아요. 부산에서는 항상 감시당하시고 조봉암 사건[1959년 이승만정권이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사건] 이후로 숨어사시다시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늘 우울해 하시던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8살 되던 해에 서러움과 가난으로 자진하셨습니다.

문 : 해방 후에도 아버님께서 감시당하고 숨어사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왜 그러셨는지, 또 조봉암 사건을 말씀하셨는데 어떤 연관이 있었나요?

답 : 제가 태어나기 전이거나 아주 어린 나이라 직접 듣거나 기억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로 주위 친척이나 누나들에게서 전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버님은 일제로부터 36년 만에 해방이 되었는데 또 다른 나라에 지배당할 수 없다고 하시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항상 ‘방첩대’의 감시 하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희 아버님과 같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시가 심했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더더욱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이후 조봉암 사건이 있은 후에도 감시가 심해 사실상 가택연금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여서 집 밖 외출도 어려우셨습니다.
[방첩대 :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정보수집 등 반공·방첩·정보업무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군사기구이다. 실제적으로는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탄압 등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49년 10월에 창설되어 1950년 10월까지 1년여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이후 유사한 방첩업무를 담당했던 부대까지 통칭하여 ‘방첩대’라 불렀다.]

문 : 증조부 때부터 무려 4대에 걸친 가족사가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떠나보내신 후, 회원님의 삶도 순탄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생활은 어떠셨나요?

답 : 아버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청운동 근처 산골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1968년 김신조 사건이 일어난 후 청와대 인근 산속 마을을 전원 소거하면서 우리 가족들은 봉천동의 습지대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천막 하나 내주며 살라 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 그 상황이 나쁜지 어쩐지도 잘 몰랐었죠. 그곳에서 큰누나와 막내누나, 저 셋이 살던 중 큰 물난리를 겪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홀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때가 고1 때였는데, 세검정에 자리를 잡고 구두닦이 등으로 품을 팔아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려웠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죠.

문 : 서울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는지요. 또 어떤 계기로 지금의 광주에 오시게 되었나요?

답 : 가난의 대물림이란 것이 정말 무섭더라구요. 그 와중에도 대학에 가고 싶어 음대를 지원했습니다. 다행이 합격해서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수십 년의 서울살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포에 계시는 장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광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연고가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어 오히려 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대통령표창을 받으신 아버지가 계서 너무나 자랑스러운데, 그간 어려운 생활들로 저는 제 자식에게 해준 게 없어서 많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문 : 연구소와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답 : 저는 2012년 연구소에서 만든 〈백년전쟁〉 특히 ‘프레이저보고서’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명박 정권 하에서 이런 것을 제작해서 배포할까, 거긴 어딜까, 이런 궁금증으로 찾다보니 민족문제연구소를 처음 알게 되었구요. 연구소의 면면을 살펴보고 이런 단체라면 적은 돈이지만 후원해야 할 듯해서 회원이 되었습니다.

문 : 얼마 전 광주에서 열린 ‘적폐청산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에서 광주지부 회원님, 상근자들을 처음 만나신 것으로 압니다. 첫인상은 어떠셨어요?

답 : 마음 같아서는 항상 연구소 행사에 찾아가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통 못 가보다가 제가 있는 광주에서 그것도 항일음악콘서트를 한다고 하여 꼭 참석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제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거든요. 처음 들어보는 ‘항일음악’이 어떤 것인지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 콘서트를 본 후 쇼크가 더 컸어요. 이런 항일음악은 중고등학교에서 알아서 자체적으로 교육하고 콘서트도 진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학생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이런 내용을 연구소가 전국을 찾아가서 하고 있다니. 더 나아가 현재의 음악교육에 친일음악, 친일음악인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의 교육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충격 속에서도 콘서트 자체는 정말 좋았습니다. 다만 시간이 길어 나이 먹은 사람은 오래 있기 좀 힘들었습니다. 무릎이 아프더라구요.

문 : 앞으로의 계획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답 : 하루빨리 아버님을 국립묘지에 안장해 드리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얼마 전에 신청했고, 지금 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아버님의 업적을 찾을 수 있는 만큼 더 찾고, 동학혁명으로 돌아가신 증조부의 행적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버님의 서훈 이후 후손에 대한 예우보상을 일정 부분 받게 되었는데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꽤 있더라구요. 독립유공자 자녀의 평균 연령은 87세, 손자녀는 77세로 모두 상당한 고령이십니다. 집안 막내인 저는 60대로 독립유공자 손자녀보다도 젊은 편에 속하죠. 그런데 친일파의 후손 중 자녀도 제 나이 또래는 상당히 있습니다. 김무성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겠죠.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에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은 3대까지 국가로부터 합당한 예우를 받도록 하겠다.”며 보훈 보상 체계 개선을 말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령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조금이라도 더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앞으로 조속한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 또한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의 자손이란 긍지를 갖고 연구소 활동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연구소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도 찾아볼 계획입니다.

목, 2018/01/2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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