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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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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익명 (미확인) | 목, 2017/10/05- 20:58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던, 우연한 기회가 주어졌든 도전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민중의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는 새로운 직업의 길을 개척한 ‘꾼’들을 찾아 그들의 밥벌이와 가치를 묻습니다. 동영상 강좌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한다면, 페이퍼 특강에선 독자에게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할 계획입니다. 직업의 세계에선 때론 구체적인 기술보다 좋은 관점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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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며 48년 건국설을 밀어붙일 때 역사학자 조한성은 책『한국의 레지스탕스』를 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밀결사 단원들이 목숨과 맞바꾸면서도 소망했던 새로운 조국 꿈을 추적했다. 그들의 투쟁은 때론 성공하고 많은 경우 패배했지만 그들이 흘린 선혈에서 대한민국이 비롯되었다고 조한성은 말한다. 이후 그는 『해방 후 3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해방 후 역사가 미소 양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 민족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분단도, 전쟁도 모두 외세 탓인가?”

역사학자 조한성을 만났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의 저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그 참신한 질문 때문이다. 43세의 이 역사학자는 늘 치밀한 사료분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상상을 선사했다. 인터뷰는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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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부터 ‘해방 후 3년’ ‘한국의 레지스탕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다. 이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 공저다. 그의 저술은 때로 모래알처럼 작게 보였던 것도 크게,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한다.ⓒ출판사 생각정원 캡처

현대 사학의 원로이신 서중석 선생님께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한성: (웃음) 이제 서중석 선생님 그만 팔아먹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영상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충격이 컸죠. 돌베개에서 나온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시절 체험이 저를 현대사로 이끌었어요.

지도교수님은 현대사 박사 1호이신 서중석 교수님과 근대사 1세대 연구자이신 임경석 교수님이셨어요. 서 교수님은 한 강의에 20개 정도의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학생들을 나눠 조사를 시키셨어요.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행연구’에 대한 파악이었죠.

연구사 정리는 역사연구의 기초공정이에요. 현대사는 아직도 공백이 많은 분야거든요. 그 공백을 찾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 인식과 질문을 던지게 돼요. 서중석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에도 박정희 시대를 계속 정리하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론 힘이 드시더라도 80년대까지 쭉 정리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임 교수님은 사료를 다루는 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치셨어요. 서중석 선생님 안식년일 때 임 교수님께 배웠거든요. 사료 가운데 한국 근대사 자료는 일제 생산문서가 상당히 많아요. 이 문서들은 일제의 관점으로 쓰였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독립운동가가 쓴 자료라 해도 그 문서들은 작성자 중심으로 작성되었기에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엔 사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해 참과 거짓을 읽어내야 합니다. 임경석 선생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전부터 역사학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조한성: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선생님 수업이 재미도 있고 진지했어요. 전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힘을 내는 스타일인가 봐요.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어머닌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길 원하셨는데 제가 막내라 그런지 진로를 강요하진 않으셨어요. 나중 문제가 있으면 곁에 끼고 함께 살려고 그러셨는지는 몰라요. (웃음)

석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와 자료를 봐야 하고, 이때부터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대단한 은사님들께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저의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에 담아 알리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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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조한성ⓒ민중의소리

돈벌이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한성: 처음 이 일을 선택할 때부터 돈 버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사학과 들어가면 죽으라고 한문공부 해야 한다고 해서요. 실제로 사료분석에 한문은 필수인가요?

조한성: 아, 너무 안타까워요. 한문을 피해갈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고대사, 한국 중세사, 동양사 연구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 실력이 필요해요. ‘지곡서당’ 같은 곳을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요. 서양사는 영어가 필수, 한국근대사의 경우 한문과 일어가 중요해요.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요. 전공에 따라 영어, 러시아도 필요하죠. 해당 언어를 알면 더 다양한 사료를 볼 수 있으니까 유학을 가는 친구도 많아요. 다만 현대사의 경우 국한문 혼용이 많아 한문의 자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설렁설렁해도 가능해요.

일제의 공적조서, 해방 후엔 명백한 친일파 증거

그래도 한문의 자구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어야 하는군요? (웃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하셨습니다. 그때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도 큰 성취감을 느낀 조사 활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한성: 아시겠지만 친일파와 관련한 조사는 당대에 해야 했던 작업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증인을 채택할 수가 없죠. 만일 해방 후 철저히 조사했다면, 친일행위를 목격하고 들은 이들의 증언, 당사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자료가 다 남아있었겠죠.

제가 ‘관료팀’에 배치되어 도지사, 군수들 조사했어요. 거물급들은 관련 텍스트가 남아있는데 지방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4년 반이라는 시한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알려지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을까요?

조한성: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남긴 ‘지나사변 공적조서’라는 자료가 있어요. 중일전쟁 시기 일제가 관료들의 공적을 조사해 훈‧포상을 해줬는데 당시엔 공적을 적은 조서였지만 지금은 친일 행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죠. 어떤 후손이 선조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지방에서 선조를 미화하고 기념사업을 하려다 이 자료 때문에 친일행위가 명확히 드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이 자료는 위원회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인데 이 자료 때문에 3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관료들의 친일 행위가 많이 드러났어요. 위원회가 천 명 정도의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자료의 수집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위원회가 좀 더 오래 유지가 됐더라면 아마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거상 巨商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와 손잡고 좋은 일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들의 후손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더라고요. 친일파 분류는 어떻게 합니까?

조한성:  친일파 분류는 대개 1904년 러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의 행위를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해방 후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는 누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지,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일제 강점기 친일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친일파 선정에서 제외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친일행위를 한 경우는 친일파로 선정합니다.

‘밀정’의 압권,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암살’ ‘밀정’ ‘군함도’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흥행입니다. 모두 보셨는지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성 이면엔, 또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준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한성:  저 역시 언급하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역사학계에서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영화 ‘밀정’은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작가나 감독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대사 하나하나를 많이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김원봉이 황옥(기자 주:황옥은 실제 인물이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료를 설득하는 대목의 대사를 보세요.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소?”

김원봉이 황옥을 설득하는 방면도 압권이거든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영화의 백미죠. 실제 역사에서도 황옥이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에요. 아마 작가의 상상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과한 비판이죠.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느냐’인 것 같아요.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어색하잖아요? 그런 건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자연히 느끼게 되죠. 반대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면 그 역사적 팩트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도 있거든요. 최근 영화 ‘군함도’가 흥행에 실패한 건 아쉬워요. 흥행의 실패로 군함도의 역사나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인 건 맞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계열을 모두 수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라이트의 공격에 대한 반정립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임정 법통계승을 따지다 1919년 건국절로 가거든요. 역사적 맥락에 비추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거든요.

조한성:  우선 48년 건국절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죠. 반면에 1919년 건국절 주장도 한계가 분명해요. 건국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스러워요. 건국절 논란 자체는 소모적이에요. 애초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압도하진 못했어도 여타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919년~21년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 이후에는 세력이 약화하지만 40년 이후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광복군도 만들고 좌우합작도 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웠죠. 다만 여타 세력을 압도하진 못했기에 안타까움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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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로서의 특징이랄까. 조한성 작가는 인터뷰 도중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에선 관련 자료를 다시 꼼꼼히 보고 말을 다듬었다.ⓒ민중의소리

“독립선언 33인 중 단 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참 맛깔나게 우리 역사를 소개하는 스타강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올해 설민석 강사가 3.1 운동 관련 ‘민족대표들의 태화관 술자리 발언’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을 술자리로 폄하하고 ‘태화관 마담’ 발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자칭 ‘민족대표’라는 분들이 독립선언문을 내고 자수한 건 당시 목숨 걸고 항쟁을 이어갔던 민중과 대비하면 투항주의, 내지는 명백한 제한성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지도자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한성:  

저도 개인적으론 설민석 강사의 강의를 좋아해요. 이분 때문에 우리 역사에 재미를 붙이신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장하거나 재미있게 하려다 실수할 수 있거든요.

책은 출판 전 단계에서 거를 수 있지만, TV는 그렇지 않죠. 미디어 환경의 특성상 ‘스타강사’들은 자신의 역량 그 이상의 것을 요구받거든요. 방송국에선 시청률을 생각해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역사의 영역에선 강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봐요. 요릿집에서 했다고 독립선언 그 현장을 술자리라고 하는 건 엄청난 왜곡이죠.

독립선언 33인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학계에서도 존재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역할 즉, 국내 3.1 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준비하고, 조직을 확장해 이 운동을 전국화한 공로는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33인의 ‘서명’은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상황에선 목숨 걸고 한 겁니다.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을 끌어 모두 적용하려고 했고요.

33인이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조선민족대표’라고 밝혔어요. 이를 이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을 ‘민족대표’라고, 즉 민족지도자 33인으로 과대평가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33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 조선 총독부, 각국 영사관에 알리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통고’를 한 것이죠. ‘자수’라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이고, 자신들의 표현대로 독립선언을 통고한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이 33인의 역할이었죠.

28일 최종회의에서 군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는데, 군중시위가 폭력화할 것에 대한 우려였어요.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독립선언의 경과를 주장하기로 한 것이죠. 애초 33인은 군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이것이 한계죠.

만약 33인 중 단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체포될 때까지 지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에 버금가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3.1 운동 주역 중 천도교, 기독교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는데요. 바로 학생이에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지요. 이들이 3.1, 3.5 서울시위를 실질적으로 지도했고 각 지방의 시위에서 활약했어요. 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45년 이후 4.19, 6월 항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죠. 전 학생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독립 운동사를 보면 무슨 단체니 계파니 하며 반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어떤 큰 줄기가 없이 오밀조밀하게 흩어져 분열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그런 것인지요? 당시 식민지 나라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는지요?

조한성: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다른 나라의 사례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다만, 우리 독립운동의 약점은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진짜 불행은 해방 시기가 바로 치열한 냉전의 시작 시기였다는 것이죠. 미소 대결이 첨예화된 곳이 한반도였어요.

“내부의 힘이 강대국의 ‘규정’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저서 『해방 후 3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규정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민족 내부의 통합된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이는 지금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일종의 경각심을 준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관점은 ‘역사에 대한 가정’,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분단의 길목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요?

조한성: 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보면 미·소의 규정력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미소 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소 공동위원회죠. 한반도를 미래를 다루는 회의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동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외부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부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것도 미소의 규정력만큼이나 크다는 것이죠. 그럼 분단이 되지 않으려면 어때야 했을까. 그것은 좌우가 하나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좌파의 역할입니다. 남쪽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좌우를 묶으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이런 세력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자연히 박헌영이나 김일성이 좌우합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의 영향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쪽이 훨씬 진지했어요. 여운형의 경우 수차례 북으로 가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단 한 차례도 내려오지 않았죠.

『해방 후 3년』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남로당의 단정 반대 투쟁이나 4.3 항쟁, 지하 총투표 조직이 진지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 좌경 모험주의로 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던.

조한성: 남로당의 모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헌영은 지하 선거를 위해 모든 조직을 동원해 투표용지를 옮기고 주민을 모아 투표를 시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이 노출되고 파괴돼요.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조직이 모두 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당시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투쟁이 얼마나 졸속이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죠. 김일성과의 경쟁을 의식한 박헌영의 야심이었다고 밖엔 해석이 안 돼요.

김구는 일관되게 ‘충칭 임정’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고, 미 군정을 엎기 위한 2차례의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좌우 합작 절호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칭 임정세력이 주요 내각을 구성하고 나머지 3석 정도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배타성’,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김구가 해방 이후 나라의 전면적인 개혁의 측면에서 좌익세력과도 진지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반공의식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제가 연구 하면서 가장 복잡한, 그러니까 어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달리 개인적 권력욕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임정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확실히 김구 선생은 반공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활동하면서 쌓인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은 20년 무렵 레닌자금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립을 암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께선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즉 ‘5년 신탁통치 후 통일 정부 수립방안’에 진정성이나, 현실성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가령 동아일보의 치명적 오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조한성: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국제적 합의였으니 결의안대로 되었다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반탁운동이 일어나면서 결의안대로 하는 것이 어렵게 돼버렸다는 겁니다.

당시 오보를 동아일보만 꼭 찍어서 얘기하면 동아일보측이 굉장히 섭섭할 거예요. 당시 다른 신문들도 대부분 똑같이 보도했으니까요. 당시 오보는 사실상 미 군정이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은 건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소련을 경직화시켰고, 이후 3상회의 원안 고수만 주장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미국이나 소련이나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 전쟁 막는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보는 지금의 한반도, 남북 상황.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대통령의 안보행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조한성: (한숨) 우선 답이 없어 보일 만큼 깜깜하죠. 북한은 당분간 핵무장의 완성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이고요. 그 후 북미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해방 후 3년의 경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상황에 끌려만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참혹한 실정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교력과 상관없이 48년도엔 누가 봐도 전쟁이 확실했어요. 이승만은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런 이승만이 불안했던 미국은 한국군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죠. 결국 전쟁에 이길 힘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쌍방 간의 도발을 이어가다 남침을 맞잖아요?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면 김일성이 그렇게 쉽게 남침을 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사인을 계속 주면서 북‧미간 협상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사자 아닙니까?

역사연구자로 살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한성: 제 관점으로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직 한국 학계에선 ‘논문’은 인정받지만, ‘대중저술’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들이 대중저술을 선호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오히려 역사 관련 책을 써요. 재미있죠.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엔 늘 ‘오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이런 오류 없이 대중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레지스탕스』 , 『해방 후 3년』,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저술인 『군함도 – 끝나지 않은 전쟁』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있는 문체가 당대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지금은 ‘3.1 운동’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에요. 자료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잘 정리가 안 되는 경우에요. 일반인들이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분들의 자료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심문 조서’같은 형식으로 많은 분의 자료가 남아있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쓰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거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며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잡는 방법이랄까요? 조언 해주신 다면요?

조한성: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실제 주인공으로 분해서 인터뷰 형식이든, 신문기사의 형식이든 자신의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이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으면 해요.

<2017-10-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막는 일 아닙니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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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승빈 기자

검찰이 직권으로 청구해 진행된 1970년대 간첩조작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재심에서 문학평론가 임헌영(필명, 본명 임준열)씨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7단독 홍기찬 부장판사는 21일 임씨의 재심 사건 선고공판을 열고 “과거 임씨의 혐의를 인정하는 취지 자백은 보안사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검찰은 이번 선고와 같은 취지로 임씨에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임씨는 1974년 이호철·김우종·장병희·정을병씨 등과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개헌지지 성명에 서명한 이후 간첩조작 사건에 휘말렸다.

임씨 등 피해자들은 당시 영장 없이 12일 동안 구금된 상태에서 잠 안재우기,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범죄 사실을 허위로 자백했다.

이에 따라 정씨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임씨 등 나머지 4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3년형을 받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지난 2009년 ‘문인간첩단 사건’이 간첩조작 사건이라고 확인하고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 조치를 권고한 바 있다.

이후 당시 무죄 판결을 받은 정씨 외에 다른 피해자들은 이미 2011년 12월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임씨도 재심 청구를 준비하던 가운데,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직권재심은 형사판결에 재심사유가 발견된 경우 검찰이 피고인을 대신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는 제도다.

이는 앞서 지난해 8월 문무일 검찰총장이 과거 반민주적, 인권침해적 수사로 실체가 왜곡됐던 시국사건들에 대해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 뒤 ‘직권재심 청구 TF를 구성해 재심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임씨는 이날 무죄 선고 직후 “재심 청구를 하려고 했는데 검찰 공안부에서 먼저 재심을 청구하고 법정에서 검사가 무죄를 구형했다. 세월이 바뀌니 이런 일도 있다”며 기쁘면서도 얼떨떨한 심경을 전했다.

임씨는 과거 그의 보안사에서의 가혹행위 등으로 어쩔 수 없이 했던 허위자백이 그대로 검찰의 기소장과 재판부의 판결문이 됐다며 억울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이번 검찰의 재심청구 및 무죄 선고에 대해 “문인간첩단 사건 이후 44년 동안 간첩으로 불리우며 정상적인 인생을 살지 못했다”며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박정희 정권의 간첩조작 사건이었음이 밝혀져 대단히 기쁘다. 앞으로 많은 재심을 통해 억울한 사람들이 누명을 벗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8-6-21>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문인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임헌영, 44년 만에 누명 벗어

금, 2018/06/2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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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언니한테 가끔 민족연구소라는 곳이 나라를 바르게 잡는 일에 앞장서는 단체라며 국내외에서 후원도 많이 한다하는 얘기를 듣곤했습니다.

그런데그런곳이 IDS김성훈과 연관되어 검색되어서 깜짝놀랐습니다검색어와 연관되었길래 당연히 뭔가 이 사기사건에 도움을 주시려고 하시나보다..했는데파산을 돕고있는 변호사라니요ㅜㅜ

혹시라도 이 사건을 모르시고 파산을 맡으신거라면….사건검색해보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파산이 채권자에게 공평하게 돈을 나누워지리라 진정보십니까? 사건을 자세히 알면 김성훈이 얼마나 꼼수를 부리고 있는지 아시게 되실겁니다. 그럼 이 파산이 김성훈에게 어떤의미인지도 아시게 될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양심이 전혀없는 사기꾼이 전적으로 파산을 돕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김성훈은 정말 머리좋은사기꾼입니다. 그런 사기꾼이 그토록 원하는 파산을 왜 도와주시려하십니까…?

만약 이 파산이 받아들여지면 사기꾼들의 좋은 본보기가 될것이며 너도 나도 서로서로 도와가며 파산을 순차적으로 해나갈것입니다..그런일을 돕다니요..ㅜㅜ

 

지금까지는 30여명이 운명을 달리했고파산이 되면억울해서아마도 더 많은 인원이 운명을 달리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정만순변호사님 이런 바람직한곳의 고문변호사님이시면 제발 이 사건을 잘 돌아보시고 파산을 할수없도록 오히려 도와주세여..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이 사기꾼에게 파산으로 끝을 가볍게 털게 하고싶지 않습니다. 제발 사건을 제대로 바라봐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화, 2017/12/0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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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피해자들 “재판 결과 기다리다 대부분 돌아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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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기자회견에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때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30 여 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기자회견을 해봤지만, 오늘처럼 참담하고 슬프고 분통터지는 기자회견은 처음이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참담하기만 하다.”

수 십년 간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해 왔으며, 자신 또한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75)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어디서든 기자회견을 하면, 항상 피해자 입장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은 제가 당당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장 벽면엔 미쓰비시중공업, 신일본제철 등 일본기업들을 대상으로 일제강제동원 소송을 진행해 온 피해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총 9명의 피해자 중 7명의 피해자 이름 앞에는 ‘故’(고)자가 붙어 있었다. 고인이 된 7명의 피해자들은 일본은 물론이고 모국에서도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다. 2분의 피해자 또한 현재 90세가 넘거나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데, 최근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에 이들의 재판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논란이다. 지난 26일엔 한 현직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시 대법원 측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관련 재판을 “재검토하라” 지시했다고 밝혀 논란이 더해지고 있다. “한일 외교관계에 큰 파국을 가져오는 사건”이라며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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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 벽에 걸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진. ⓒ민중의소리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
피해자들 위로해온 이희자 공동대표의 낙담

이희자 공동대표는 발언 내내 재판 결과를 기다리다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을 떠올리는 듯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재판 결과가 나오질 않자, 제가 그분들을 위로해드렸다. 포기하지 말라고, 오래 살아달라고, 그게 이기는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대법원 재판결과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라며 탄식했다.

앞서 일제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주금을 상대로 각각 부산지법(2000년)과 서울중앙지법(2005년)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이들은 1·2심에서 패소했으나, 2012년 5월 대법원이 처음으로 일본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희자 공동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일본에서 모든 재판을 지고 모국으로 돌아와 다시 재판을 시작하고, 처음 승소 소식을 접했을 때 할아버지들이 정말 많이 우셨다”라며 “식민지 시대에 잃어버린 민족과 청춘을 다 찾은 것처럼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원심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대로 피해자 한 사람당 1억원(서울 고법) 또는 8천만원(부산 고법)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다. 이런 상태로 해당 사건은 2013년 8월 대법원에 재상고 됐다. 하지만, 이후 5년이 다 되도록 법원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 시간 동안 원고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사법부를 믿고 “기다려보자”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위로했던 이 공동대표가 “당당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낙담한 이유다. 그는 “일본과의 문제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청와대가 거래했다는 말이 나오면서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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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제 강제동원피해 소송 둘러싼 외교부, 사법부, 김앤장의 유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민중의소리

사법부·외교부·김앤장 유착,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충격적”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도 사법부·외교부·김앤장의 유착에 절망감을 드러냈다. 김세은 변호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그동안 무엇을 신뢰하고 기대하며 기다려 왔는가 질문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탄식했다.

김 변호사는 “사법부는 다수의 힘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구제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라며 “그런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외교부, 청와대와 손을 잡고 우리 재판을 두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래했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사법부가 삼권분립 원칙까지 어겨가며 ‘민사소송규칙’까지 개정한 정황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민사소송규칙 상으로는) 원고와 피고 등의 의견은 1-2심에서 모두 제기가 되어야한다”며 “그런데 이 규칙을 대법원 판결 전에 바꿨다.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 단계에서 소송과 관련도 없는 외교부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2심에서 시민단체나 관계기관들이 의견을 법원에 제출하는 길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외교부가 일방적으로 일본기업 측에 유리한 내용의 의견서를 통해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이라며 “이는 삼권분립뿐만 아니라, 소송당사자에 대한 심각한 권리침해 소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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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외교부의 의견서 ⓒ민중의소리

당시 외교부가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외교부는 명확하게 입장을 드러내진 않지만 교묘하게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면 안 된다는 의견을 표한다.

해당 문서에는 ‘피해자들이 한국 내 일본 기업들 재산을 압류하는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되면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50년간 한일양자관계의 근간이 되어온 협정의 해석이 뒤흔들릴 경우 우리나라의 대외적인 신인도 손상을 불러올 것이며, 일본 기업들의 한국 투자와 비즈니스에 장애가 되고 한일 간 경제관계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음’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고, 사법의 근간과 국가주권마저 내던져버린 파렴치한 폭거를 마주하면서 우리는 국가와 정부, 외교부, 사법부의 존재 의의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총체적 부정의와 재판 거래라는 초유의 사태를 앞에 두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뜻을 모아 강력히 요구한다”라며 소송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부의 사죄, 새로운 재판부 구성을 통한 신속·공정한 심리, 외교부·사법부·김앤장이 결탁해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검찰의 철저한 수사 등을 촉구했다.

<2018-07-2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목숨 대가로 한 ‘사법부·외교부·김앤장’ 뒷거래”

※ 관련기사

☞프레시안: 외교부는 일본 지부, 대법원은 일본 민원 처리 기구?

☞한국일보: “강제동원 재판 지연은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유착”

☞민중의소리:외교부 ‘고리’로 더욱 선명해진 양승태 사법부의 ‘일제 강제징용’ 재판거래

※ 뉴스영상

금, 2018/07/27-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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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 /우철훈 선임기자

2018년 봄 서울 종로 네거리에는 작지만 의미 있는 동상이 하나 선다. 흔히 ‘장군’의 동상은 칼을 들고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드는 모습이 많지만 이 동상은 친근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는 ‘반란’의 수괴로 사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우리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된 이후 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인물의 동상이 시내 한복판(대학 구내에 민주화 열사 동상은 있다), 그것도 종로 한복판에 세워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는 전봉준이다. 동학농민전쟁의 주인공으로 녹두장군으로 불린 그 전봉준 장군이다. 123년 만에 명실상부한 복권이다.(법적으로 2010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복권됐다) 이 사업을 추진한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은 동상이 세워질 자리인 종로 영풍문고 앞 옛 전옥서 터를 둘러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사장은 “1895년 3월 29일 사형 판결을 받고 30일 새벽 2시 이곳에서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다섯 인사의 교수형이 집행됐다”며 “전 장군의 동상 제작은 완료됐지만 서울시 심사를 앞두고 있어 공개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3월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7월부터 기금 모금을 시작해 목표액 3억원의 반절을 모았다. 2018년 3월까지 모금한다. 정부의 예산도 기업체의 협찬도 아닌 순수 시민 개인모금이다.(후원계좌는 농협 301-0211-6928-21 사단법인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곳 종로1가 일대가 우포도청, 의금부, 전옥서 자리였다. 그 전까지 목을 베는 참수를 했는데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되면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 전봉준은 교수형으로 바뀐 제도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전봉준을 포함해 손화중, 성두한, 최경선, 김덕명 다섯 동학 지도자(그는 5명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는 판결이 끝나자마자 사형이 집행됐다. 마치 박정희가 인혁당 사건 처형하듯이. 왜 그렇게 서둘러 처형했느냐 하면 당시는 단심제였는데 2심제로 법이 바뀌어 4월 1일부터 시행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 주민들이 옥중의 전봉준을 구출한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전봉준이 들것에 실려 압송되는 유일한 사진은 일본 신문기자가 찍은 것인데, 일제 영사경찰서에 취조 받으러 가는 모습이다. 일제 영사경찰서는 지금 을지로 중부경찰서가 자리다. 이 이사장은 “전봉준 장군은 최후진술로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남 몰래 죽이느냐’는 최후진술과 <운명>이라는 유시를 남겼다”고 말했다. 그 유시의 내용은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백성 사랑하는 정의나 실수 없다/ 나라를 위하는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다.

종로에 자신의 피를 뿌려달라는 전봉준 장군의 유언은 123년 만에 그 자리에 동상이 서는 것으로 이뤄진다. 동상은 앉은 그가 최종 목표로 삼았던 한양 경복궁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전봉준의 유언 때문일까, 공교롭게 바로 동상 왼쪽 280여m 떨어진 종로구청 사거리는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곳이다. 동상의 오른쪽 종각 앞에는 그 백남기 농민 기념 부조가 이미 설치돼 있다. 그러니까 종로 네거리는 우리 농민운동 역사의 현장이자 상징이 되는 셈이다.

이 이사장은 30대부터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전쟁에 천착했으니 벌써 50년 가까이 됐다. 그는 “모든 역사교과서에 전봉준을 역적으로, 동학을 난(亂)이라고 표기했는데 나는 그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전봉준과 동학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민중운동사반’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답사도 다니며 연구했다.

이 이사장이 동학에 매료된 이유 중 하나는 부친의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이 이사장은 한학자로 <주역> 연구가인 야산(也山) 이달 선생의 넷째아들이다. 주역은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새로운 사상이 열린다는 후천사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부친의 변혁적인 주역사상은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과 외세에 맞선 자주정신인 동학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또 서자로 태어났다. 이 선생은 조선시대처럼 차별은 없었지만 동학의 서얼철폐 사상에도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근대 민주주의 정신의 기초다. 그 맥락에서 이 이사장은 인간 전봉준을 이렇게 정의한다.

“전봉준은 농촌지식인으로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자다. 그러나 단순히 공자·맹자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학정신에 입각해 개혁에 투철했다. 그가 행한 집강소는 조선말 모순을 철폐하는 농민자치기구로, 민주·평등운동에 바탕을 뒀고, 양반과 노비, 지주와 소작인의 차별을 모두 깼다. 또 끊임없이 지역(고창·정읍 일대)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 정치가일 수도 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차에 조병갑이 나타나 봉기를 한 것이다. 역사을 만드는 인물은 꼭 ‘계기’를 놓치지 않는다. 이한열·박종철·백남기 등은 그런 ‘계기’ 속에서 일어난 인물이다.”

1937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이 이사장은 부친이 한문만 가르쳐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정규교육을 받기 위해 일부러 가출해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미인가 학교만 맴돌았을 뿐 정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혼자 공부하던 그는 학원에 뒷돈을 주고 가짜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만들어 명문 광주고에 합격했다. 이 이사장은 “그때 정규 중학교를 나온 학생 9명은 모두 떨어지고 가짜였던 나만 합격했다”면서 웃는다. 서울에 올라와 서라벌예대(현 중앙대)를 다녔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성균관대도 6개월 정도 청강생으로 다니다 그만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정규교육은 단 4년(고등학교 3년, 대학교 1년)이 전부다.

이 이사장은 평소 주소가 일정치 않다 보니 입대영장을 받지 못해 군대 기피자가 됐다. 정상 취업을 할 수 없던 그는 아이스크림 장사, 빈대약 장사, 외판원, 웨이터 등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글을 잘 쓴 그는 <불교시보> 기자로 취직해 글을 쓰기 시작해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원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혼자 공부하면서 꾸준히 <창작과 비평> <뿌리깊은 나무> 등의 잡지에 글을 쓰면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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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 이사장이 종로1가 영풍문고 앞 옛 전옥서 터에 세워질 전봉준 장군 동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어떻게 역사학계에 입문했는가. 
“한국사연구회라는 학벌 안 따지는 진보적인 역사 연구단체가 있다. 내가 <창작과 비평> 등에 ‘허균’과 ‘북벌론의 허구’ 등 역사에 대한 글을 몇 번 쓴 것을 본 모양이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최창규 교수가 주자학이 조선의 정통성이라는 얘기를 했다. 강만길 회장이 나보고 반론을 써보라고 해서 내가 그 허구를 깨는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이 화제가 됐고, ‘이이화는 단순한 재야사학자가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즘 박사학위 없으면 정통이 아니라며 재야 사학자, 심지어 사이비 사학이라 비난한다. 그때도 그랬을 텐데. 
“그런 생각은 특히 서울대 연·고대 출신들이 가지고 있다. 요즘은 많이 깨졌는데 우리 때는 더 심했다. 정말 지들끼리 놀고 말도 못했다. 그래도 비교적 나는 인정을 받았다. 왜? 지들도 모르는 한문을 내가 대학원생들에게 가르쳤으니. 서울대 교수들이 ‘어떤 놈이 규장각 와서 한문 가르치냐’고 질투 많이 했다.”

-요즘은 학위를 가지고 교수직을 해야 역사학자 대접을 해주는 풍토다.
“그때도 강단에 서지 않으면 모두 재야사학자라고 했다. 단군 연구한 안호상도 재야사학자라고 했다. 틀린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이사장의 최고 역작은 1994년부터 10년간 쓴 22권의 <한국사 이야기>다. 역사에서 ‘민중사’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동학 100주년 기념행사를 1994년 모두 끝내고 근질근질하던 차에 한길사 김언호 사장에게 ‘한국통사를 제대로 한 번 쓰고 싶다’고 해 한 달 250만원 선인세로 받고 10년 동안 쓴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한길사는 정통 역사학자를 동원해 고급 장정으로 20권짜리 <한국사>를 냈다. 그런데 안 팔렸다. 상심이 컸던 김언호 사장이 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그와 ‘승부’한 것이다.

이 이사장의 <한국사 이야기>는 민족사·민중사·생활사 위주로 쓴 것이다. 그는 “역사학계의 오류를 다 바로잡았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으로, 병자호란을 ‘조청전쟁’으로 바꿔 표기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무려 50만권이나 팔렸다. 기성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한국사 이야기> 오류를 지적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단재학술상(2001년), 임창순 학술상(2006년)을 받으며 학술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후 그에게 씌워진 ‘재야사학자’라는 일종의 조롱은 사라졌다.

이어 이 책을 원작으로 삼성출판사에서 <만화 한국사>를 냈다. 보통 만화책은 화가의 이름을 따는데, 이 만화책은 최초로 원작자 이름을 땄다. 이 만화가 몇백만 권 팔렸다. 덕분에 그는 많은 인세 수입을 올렸다. 이 인세는 역사문제연구소는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적잖이 쓰였다. 이 이사장은 최근 시민역사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지난 촛불혁명에도 앞장섰다. 사실 촛불혁명은 역사전쟁이라 할 만큼 역사문제가 내재돼 있다. 최근 공개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문건 등을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교학사 교과서에 이어 국정교과서 도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재야역사학자와 일선 역사선생님들이 맞섰다.

“촛불은 역사학계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강만길·이만열·나와 역사문제연구소 사람들이 매일 거리에서 기자회견과 역사강의를 했다. 뉴라이트와 친한 이인호(전 서울대 교수), 홍일식(전 고려대 교수)이라는 사람이 원로랍시고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시대처럼 국정으로 가야 한다고 부추긴 거다. 코미디지 코미디. 오히려 잘된 거다. 박정희의 마지막 신화가 딸 때문에 깨졌으니. 그게 역사의 큰 교훈이다.”

이 이사장은 거의 매번 촛불집회에 나갔다. 에스컬레이터에 어깨가 끼어 한 달간 치료받으면서도 촛불집회에 나갔다고 한다. 그는 전농의 전봉준 투쟁단이 강원도에서 서울로 오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에서 간접적 계기와 직접적 계기가 있는데 촛불은 동학 이후 민주주의가 꾸준히 성장한 간접적 이유가 바탕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역사에 대한 정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과거를 들추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고 하는데 모두 헛소리다, 인류는 과거를 기억하고 잘못을 고치면서 미래로 발전했다”며 “6·25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경제가 파탄났나, 역사는 그것을 기억하고 앞으로 전쟁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일갈했다.

이 이사장은 여든이 넘었지만 아직 담배도 피우고, 대낮에 매운 낙지볶음에 소주 몇 잔도 거뜬하다. 10년 전 위암수술을 받았을 때 끊었지만 다시 한다고 한다. 그는 “평생 글쟁이로 살아 글을 안 쓰면 근질근질하다”면서 “평생 역사책만 썼지만 이번에 처음 에세이를 썼다”고 말했다. 쓴 글은 올 봄 <이이화 에세이집>으로 나올 것이라 한다. 이 이사장은 책에 대해 “이번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얘기도 있고, 문재인 대통령·박원순 서울시장 얘기도, 그리고 다음 대통령 누가 됐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원희복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7-12-24> 경향신문

☞기사원문: [원희복의 인물탐구]역사학자 이이화 “123년만에 전봉준 유언 이뤄진다”

화, 2017/12/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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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조야!    샘 희비 이달에는  세종사임당들이   농사꾼집에   드가 !

박선생!

얼굴안본지도  가물가물타,…………….. 이슬까이실까!

차선생은  달달이  내리오는데,

니얼굴 운제  보건노?   빚쟁이  호영드림.

금, 2018/02/02-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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