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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4] 정경유착의 원조이자 매판자본가 1호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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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4] 정경유착의 원조이자 매판자본가 1호 박흥식

익명 (미확인) | 월, 2017/09/25- 11:13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법정에 선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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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9일 횡령 및 포고령 위반 혐의에 대한 박흥식의 1차공판이 열렸다. <동아일보> 1946.3.20.>

1946년 2월 15일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인 박흥식은 신내영 검사가 지휘하는 검사국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있던 장택상의 농간으로 담임검사의 허락도 없이 풀려났다가 이튿날 다시 잡혀왔다. 그는 검사국에 구속된 지 열흘 만인 2월 26일 장물기장죄(贓物寄臧罪)·횡령·사기·포고령 위반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검사의 공소장에 의해 박흥식의 피의사실을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박흥식은 1945년 8월 27일 조선군사령관 고쓰기 요시오 중장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정리기금이란 명목으로 3,150만 원을 받아 식산은행의 차입금, 민규식 외 351명의 주주들에게 주식대금을 지불하고 남은 1,300만 원을 착복하였다.
둘째,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강제 징용되어 끌려온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퇴직금과 위로금 문제로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8월 27일 박흥식이 조선군사령관에게서 노자문제 해결기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2천만 원을 받았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주지 않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에 가족, 친척, 회사 임원 명의로 차명 예금하여 이를 은닉하였다.
셋째, 194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을 개업하면서부터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종업원에게 조선총독부가 배급해준 포목 등 생필품을 전부 매장으로 돌려 매입가의 최고 45배로 판매하여 1946년 2월까지 70만 원의 폭리를 취했다.

 

이 사건의 첫 공판은 3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대법정에서 이천상 판사의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방청석에는 박흥식 가족과 화신 관계자, 박흥식의 심리광경을 보고자 몰려온 군중들이, 변호사석에는 강병순, 배정현, 백붕제, 김광근이 앉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흥식은 고동색 두루마기에 회색 바지, 검정운동화, 귀를 덮은 머리에 용수를 쓰고 손목에 고랑을 차고 간수에게 끌리어 법정에 들어섰다.
이천상 재판장이 “피고는 어떠한 뜻으로 일본 군부가 관계하는 조선비행기회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는가”라고 묻자, “당시 총독부와 군사령부에서 강제적으로 시켜 피할 길이 없이 부득이 취임하였을 뿐이며 군부에서 받았다는 돈도 회사에서 당연히 받을 돈이며 이 돈 역시 나 개인을 위해 쓴 일은 없으며 앞으로 이것을 활용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대학도 세우고 큰 병원도 설립하고 이외 여러 가지 대사업을 하려고 설계를 세우는 도중에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유창하게 답변하였다.
제1회 공판에서 시작하여 7차 공판까지 열렸는데 그동안 박흥식이 복역하던 서울형무소 감방에는 전기히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감방이 아니라 별장이나 다름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호인단은 담당검사의 병환으로 공판이 연기되자 판사를 찾아가 공판 강행을 요청하거나 박흥식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병보석을 강청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일삼아 사회적인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3월 26일 제6회 공판으로 심리를 전부 마치고 신내영 검사는 “박흥식은 세상이 다 아는 민족반역자이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도 가할 것이나 그 법적 근거가 아직 없음이 유감이다. 그러나 장물기장, 폭리 등 죄상이 뚜렷하니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한다”고 준엄하게 논고하였다. 검사의 징역 3년 구형에 대해 사회적으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박흥식에게 실형 언도가 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 판사는 5월 3일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언도하였다. 그는 “미군정하에 있는 본 법정으로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운을 뗀 후 검사가 제시한 피의사실 세 가지에 대해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9년 반민특위 재판정에서도 박흥식은 전혀 반성함이 없이 모든 친일행위를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이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덕택으로 2천 명의 동포가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망가진 반민특위는 결국 적반하장의 매판자본가 1호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역사정의 실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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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 미곡상에서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박흥식은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 지역 토호였던 부친 박제현과 모친 이선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연상의 친형 박창식이 일찍 죽고 아버지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박흥식은 1915년에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며 한학을 배우다가 17세 때 진남포로 나와 진남포상공학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19년 2월 박흥식은 진남포 비석리에서 미곡상을 시작했다. 19세 때인 1920년 2월에 평안남도 용강에서 선광당인쇄소를 설립했으며, 1924년 3월 자본금 10만 원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10월부터 1928년 5월까지 면화와 미곡 등 지역물산 매매와 알선을 하는 서선흥산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미곡상을 시작으로 상업활동에 투신한 박흥식은 천부적인 상술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 용강 지역 최대 지주로 성장하였고 이후 인쇄업과 무역업을 통해 향후 지물업을 시작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흥식은 1926년 서울로 올라와 그해 6월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의 출판사와 인쇄소를 중심으로 영업하였는데, 인쇄용지를 다량 구입하는 고객에게 금강산 관광과 일본 유명 관광지 여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판매전략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아 전국 각지의 수백 군데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27년 지물업의 메이저 사업인 신문용지에 도전하였다. 박흥식은 신문용지를 공급받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굴지의 제지회사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수입선 다변화를 꾀해 스웨덴의 제지회사와 교섭하여 양질의 신문용지를 훨씬 싼 가격에 공급받았다. 더욱이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알선과 박리다매 전략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1929∼1932년 매년 150만 원을 초과하는 판매액에 2만 원 안팎의 당기순이익을 얻었다. 25만 원의 소자본으로 출발한 선일지물주식회사는 이후 2배로 증자하고 연간 판매고가 500만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초반은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차차 가라앉고 서구자본주의경제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상품시장 확대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만주 침략을 강행한 시기였다.
1920년대를 거치며 조선인들의 문화수준과 소비성향이 한껏 높아졌고, 이 무렵 호경기를 반영하듯이 서울에서도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타 등 4곳의 일본백화점이 경합을 벌이며 성황 중이었다. 박흥식은 오랜 기간 관심을 두고 있던 자본주의의 꽃인 백화점사업에 진출하였다. 1931년 신태화가 경영하던 금은 잡화의 화신상회를 인수하여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하였고, 1932년 5월 목조 2층 규모의 화신상회를 콘크리트 3층으로 증개축해 최신식 초대형 종합잡화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두 달 뒤 바로 옆에 들어선 최남이 경영하는 동아백화점과 2개월간 전쟁 같은 혈투를 치렀다. 박흥식은 혈투 직후 염가양품(廉價良品) 전략 즉, 질 좋은 상품을 싸게 판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일본 오사카에 3층 빌딩을 임대하여 그곳에 오사카 구매부를 설치하고 일본 제조업체로부터 각종 상품을 공장가격으로 직수입하였다. 그 덕택에 동아백화점은 물론 일본 백화점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내놓아승리할 수 있었다. 1932년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종로 상권을 평정하였고, 평양에 세워진 평안백화점까지 인수하여 조선인 유일의 백화점 사장이 되었다. 1935년 연초에 화신상회가 화재로 전소하자 화신백화점 신축공사를 추진해 1937년 11월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화신백화점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화신백화점은 서울의 명물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938년 6월에는 진남포에 3층짜리 화신백화점 진남포지점을 개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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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37년 11월 새로 신축된 화신백화점.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시설로서 당시 미쓰코시, 조지아 등 일본백화점의 규모를 능가했다. 옆의 도면은 1937년 개장시 화신백화점의 층별 매장 배치도.

 

1934년 박흥식이 백화점사업과 연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연쇄점 방식의 유통업 진출이었다. 당시 4대 일본백화점이 주요 지방도시에 지점을 설치해 현지 중소 상인의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흥식은 1934년 6월 연쇄점 모집 공고를 일간신문에 발표하였다.
조선 전역에 걸쳐 1천여 개소의 화신연쇄점을 개설하는 한편, 화신측이 이들 연쇄점에 자금과 상품을 공급하는 등 자금과 판매를 일원화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지방의 소상인들로 구성된 가맹점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자금 대신 부동산을 받아 이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았다. 이 자금으로 상품을 구입해 연쇄점에 공급하며 상품 결제도 현금이 아닌 장기 어음으로 하도록 하고 그 어음을 식산은행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려는 것이었다. 1934년 11월 제1기 계획으로 350개의 연쇄점이 개설되었고(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추가 모집을 중단함), 저가 상품 구매를 위해 일본 오사카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개별 연쇄점에 대한 원활한 상품공급을 위해 주요 5개 도시에 상품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연쇄점 사업이 확대되자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 원의 화신연쇄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독립시켰다.
1939년 시점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필두로 한 6개의 화신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본금 25만 원의 선일지물주식회사(용지도매업), 100만 원의 화신주식회사(화신백화점), 200만 원의 대동흥업주식회사(부동산), 200만 원의 화신연쇄업주식회사, 270만 원의 화신무역주식회사, 50만 원의 제주도흥업(부동산, 취체역 사장은 박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상경하여 자본금 25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을 13년이 채 되지 않아 총 850여 만 원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흥식은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불렸고 1938년 호별세 25,000원을 납부하여 서울 조선인 중 최대 납세자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그해 말 박흥식은 조선인 기업인 경성방직과 조선생명보험, 일본인 기업인 조선석유와 북선제지화학공업 등 8개 사의 중역도 겸직하였다.
조선비행기공업 설립 주도
1941년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으로 시작된 전시통제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1941년 ‘생활필수물자통제령’과 ‘물자통제령’ 1942년 식량관리법 등으로 철저한 가격통제와 생활필수품 배급통제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1941년 9월 박흥식은 화신무역주식회사, 화신연쇄점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합병해서 자본금 500만 원의 화신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처해나갔다. 이 무렵 주력기업인 화신백화점은 일본산 수입의존도가 50% 정도여서 경성의 4대 일본 백화점에 비해 유리하여 미나카이, 히라다 두 백화점을 앞지르고 미쓰코시, 조지아 두 백화점과 대등한 영업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수입품 비중이 80%를 차지한 화신연쇄점으로서는 총체적 위기였다. 앞서 말한 각종 경제통제령이 발동되고 물자공급이 중단되면서 1년 사이 350개의 연쇄점은 250개로 감축되었고 1943년에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흥식은 194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산업경제인 대표자대회에서 일본 천황을 ‘배알’한 후 비행기 제작에 뛰어들 결심을 하였다.1) 1944년 7월 12일 박흥식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을 위한 제1회 발기인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이하라 준지 참모장을 비롯해 군부 7명, 총독부 7명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설립 취의서를 확정하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고 7월 17일 조선총독에게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설립 취의서에서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 설립 이유, 예산 및 자금조달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는 조선군의 지도감독에 따라 군용비행기 제조를 목적으로 한다. 1차 사업년도에 제조에 필요한 건설 및 부품 가공설비를 시설하고 2차 사업년도부터 일관작업을 추진해 월 60기 이상 제작하고, 3차 사업년도부터 월 120기 이상 생산한다. 둘째 회사 설립 이유는 세계정세의 가열찬 전국(戰局)을 고려해서 비행기의 대량생산이 초미의 급무이며 국가적 요청이다. 셋째 자금은 자본금의 반액 납입과 일부를 전시금융금고 차입금으로 충당해서 시설하고 사업 확장에 따라 2회 자본금 납입을 통해 조달한다.”


  1. 흔히 반민특위 박흥식 공판자료에 의거해 박흥식이 비행기 제작에 참여한 이유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끈질긴 회유와 종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면도 작용했겠지만 극심한 전시통제기에 이르러 유통업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자 하는 박흥식의 야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다음은 7월 17일 조선비행기공업의 설립인가를 받은 후 박흥식 설립위원장이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 글인데, 비행기 제작 참여 계기와 그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재작년 12월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1인으로서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 배알의 분부를 받자옵는 파격의 광영을 입었는데 이때 나는 산업경제인으로서의 책무의 중대함을 깨닫고 국가를 위한 직접 봉공의 길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비행기 증산을 위하여 정신(挺身)하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의와 계획을 총독부 및 군부에 피력하였던바 파격적인 지원 아래 직간접으로 편달을 받고 또 재계 각위의 절대한 원조에 의하여 예의 본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매일신보> 1944.8.19. 2면)

 

1944년 9월 임시발기인총회를 열어 총 자본금 5천만 원 중 제1회 납입자본금 2,500만 원의 출자관계를 결정, 주식총수 100만주 가운데 85만주는 발기인에게 배당하고 나머지는 조선금융단에 의뢰해 전국에서 공모하기로 하였다.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공업이 정식 설립하여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12월에는 일본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았다. 설립 직후 조선비행기공업의 출자구성을 보면, 법인주주로는 전시금융금고(지분율 17%) 조선식산은행(17%) 동양척식(16%) 화신주식회사(15만주, 15%) 등이고 발기인 주주 중 조선인으로는 박흥식(2만주, 지분율 2%) 박중양(0.1%) 장직상(0.3%) 한상룡(0.3%) 민규식(0.3%) 김연수(0.5%) 박춘금(1%) 백낙승(2%)이다. 박흥식과 화신주식회사는 총 100만주 중에 17만주와 17%의 지분율이고 금액으로는 400만 원으로 조선인 주주 중에 압도적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비행기공업에서 만들고자 한 비행기는 ‘キ79丙’ 기종의 목철(木鐵)혼합기였다. ‘キ79丙’ 고등연습기는 만주비행기제조가 생산한 전투기 기종으로 1939년 노몬한 전투에 참가한 79식 전투기를 고등연습기로 개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지도하에 이 기종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비행기제조와 기술협약을 맺고 비행기 생산자재를 수입하였다. 이와 별도로 박흥식은 10월 하순 기술진을 초빙하고 공작기계를 마련하기 위해 도쿄와 상하이를 찾아갔다. 도쿄에서는 중앙당국과 선진 비행기공장 임원들과 교섭한 결과 군수성 칙임기사 하타에 외 60여 명의 기술진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주둔 노보리부대와 교섭하여 비행기 부품 제작에 필요한 공작기계류 550대를 입수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직물과 동양방적의 안양공장 및 인근 토지 10만 평을 매수해 정비와 조립공장, 격납고와 비행장을 순차적으로 건설토록 하였다. 또한 기술자 양성을 위해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전환해서 항공과와 기계과 두 학급 240명을 선발하여 기술교육에 힘썼다. 박흥식을 비롯한 조선비행기공업 임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5월 당시 1호기의 주익(主翼) 제작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이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3호기의 부분품 제작도 9월말에 완료할 예정으로 안양공장의 비행기 양산체제가 완성될 즈음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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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79’ 고등연습기의 하나. 만주비행기제조(주)가 97식 전투기를 디그레이드하여 고등 연습기로 제작한 것이다.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도 이와 동일한 기종의 비행기를 생산키로 하였다.

 

정경유착과 그 귀결로서의 전쟁협력

박흥식의 성공 신화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곧 제국주의 권력과의 추악한 정경유착이 자리한다.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리고 신문용지의 거래처를 확보할 때 조선총독부 관료의 개입으로 가능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설립자금과 운영자금을 국책은행이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받았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선총독이나 총독부 관리와의 비밀 회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1935년 연초 대목 때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전소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우가키 총독을 만나 구 종로경찰서 자리를 빌려 임시매장을 차리는 것을 허락받아 화신백화점의 영업 손실을 최소화했다는 일화는 총독부와의 유착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통제기에 들어서자 박흥식은 관변단체, 친일단체 간부로서 활동하고,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강연과 기고, 국방헌금 헌납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표적인 관변단체·친일단체 활동을 살펴보면 사상범의 전향업무를 담당한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1937), 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1938),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1939),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4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이사(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 겸 국민총력 경기도연맹 참여(1943) 그리고 패망 직전인 1945년 2월 미영격멸, 성전필승을 내건 대화동맹 심의원으로 활동했고 그해 6월 전쟁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목적으로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위원을 맡았다.
이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직접 국방헌금으로 헌납했을 뿐 아니라 국방헌금을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종로경찰서에 5,000원을 냈고, 9월에는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9년 종로경찰서 신축 기성회비로 5만 원을 기부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관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하여 일반인에게 국방채권을 강매하였다. 그해 12월 화신주식회사와 화신상사의 종업원에게 국방헌금 3만 원을 갹출하여 종로경찰서에 헌납하였다. 1943년 7월 민규식 김연수와 함께 청소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쓸 연성비 5만 원씩을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시통제시책에 순응하며, 징병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과 연설, 기고를 하였다.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광명의 천지를 향하여」(<조광> 1942.2), 미나미 총독의 이임에 즈음한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매일신보> 1942.5.30), 1942년 12월 일본산업경제간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천황을 만나고 그 감격을 피력한 「배알의 광명의 감읍」(<매일신보> 1942.12.16)과 「배알 1주년-지성으로 봉공」(<매일신보> 1943.12.17) 등 다수의 친일 논설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세 번의 구속, 그리고 사후의 역사적 심판

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1946년 12월 화신백화점, 흥한피복주식회사,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50년 화신산업주식회사 사장, 재판법인 흥한재단 이사장, 1953년 흥한방직주식회사 회장, 1959년 신선무역주식회사 회장을 지냈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1차년도 때 외자 도입을 통해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전력난과 불경기로 큰 적자를 보고 2년 만에 손을 뗐다. 1980년 10월 화신과 그 계열사들이 300억 원의 연쇄부도로 파산하면서 박흥식은 재계를 떠났다. 1994년 5월 10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방 후 박흥식은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등 각 시기에 걸쳐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나 구속되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빠져나왔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1946년 2월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서울지방법원에서 기소되어 징역 3년과 벌금 200만 원이 구형되었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번째는 1949년 1월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제1호로 체포되었으나 9월 26일 그는 ‘공민권 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세 번째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회의에 의해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7월 석방되었다.
여러 차례 구속과 무죄판결을 반복하며 정경유착과 친일의 죄를 무난히 넘겨온 그였지만 2009년은 절대 피할수 없는 역사적인 심판의 해였다.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황민화정책과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한” 죄목(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2조 11호 13호 14호 17호 18호 각호 위반)으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였고, 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소상히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최고의 성공신화로 포장되어온 화신기업의 성장은 제국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굴종의 대가였고 일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된 매판자본이었음이 역사자료에 의해 남김없이 드러났다.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경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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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었던 박흥식동상. 이 동상은 박흥식 사후인 1996년 광신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이 세운 것이다. 2001년 10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서울관악동작지부 회원들이 광신고등학교 정문에서 박흥식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그해 연말에 자진 철거되었다.

∷ 박광종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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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리 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과 관련해, 일본이 외교적 협의를 하자며 30일 안에 답변을 달라는 요구를 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외교적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시한까지 제시하며 협의를 빨리 하자는건데, 우리 정부는 신중하게 검토한다는 입장입니다.

한승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신일철주금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일본은 외교 협의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청구권 협정에 대한 양측의 분쟁이 명확하니 분쟁 해결 절차를 밟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답변을 한 달 안에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호사카 유지/세종대 교수 : “일본으로서는 그것(강제 집행)을 조금이라도 멈추기 위해서 빨리 일단 협상에 들어가면 모든 게 멈출 수가 있다, 이런 속셈이죠.”]

그런데 외교적 협의와 관련된 청구권협정 3조 1항엔 답변 시한이 규정돼 있지 않은 데다가, 갈등이 첨예한 사안에 시한을 정해 답을 달라는 건 외교적 결례에 해당합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요구한 시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방침입니다.

또 위안부 문제 등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같이 다루는 방안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는지에 대한 한일 양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외교 협의로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조시현/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청구권 협정은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물었어야 하는데 묻지 않은 채로 봉합을 한 상태에서 돈만 오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에 대한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가 국가간 협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침략국이었던 독일은 정부와 기업이 반반씩 부담해 강제 노동 피해자 166만 명에게 개별 배상했습니다.

KBS 뉴스 한승연입니다.

한승연 기자 ([email protected])

<2019-01-14> KBS 

☞기사원문: 日, 강제징용 협의 ‘30일 내 답변’ 요구…외교 결례 논란

월, 2019/01/1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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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5-1

▲ 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서울 용산구 청파동이나 남영동, 후암동, 원효로 일대를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나 적산(敵産)가옥을 자주 만난다. 용산고 건너편 후암동 언덕길에는 이곳이 마치 일본의 어느 마을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주변에 십여 채의 일식 주택이 늘어서 있다. 숙대입구역 동편 먹자골목에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과 50년의 전통을 지닌 부대찌개 집들이 여전히 공존한다. 주변에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던 일본군 사령부와 주한 미군이 남긴 이중 식민의 흔적이리라. 이제 한 해, 한 해가 다르다고 느낄 만큼 이런 적산가옥이 점점 사라져 간다.

숙명여대 올라가는 길의 청파동 골목 한 귀퉁이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서울에서도 전통적인 골목이 많기로 유명한 청파동 골목 안에 있는 이 박물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직 그다지 없는 듯하다. 지난해 여름 개관식을 한 신생 박물관이다. 이곳은 ‘기억과 성찰’을 주제로 식민의 상흔과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짚는다. 건물 2층 86평의 면적이 일제 침략사, 독립운동사를 아우르는 전시 공간으로 채워졌다.

한국 근대문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땅의 문학과 역사, 제도에 촘촘히 스며든 일본(문화)의 영향을 새삼 생생하게 절감한다. 어찌 문학 연구에 한정되는 일이겠는가. 정치, 경제, 건축, 교통, 법률, 교육, 더 나아가 이 땅의 근현대 자체가 일본의 그림자와 이식(移植)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 대한 극복과 저항 역시도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문제의식 아래 일본에서 배운 지식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그대로 수용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 땅의 역사, 식민의 모순과 질곡, 그 상처와 저항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일본에 관한 면밀한 공부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리라.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일본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일본을 잘 안다고 착각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소설가 최인훈, 비평가 김윤식 등 일본이 우리 문화와 현실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직접 체험하며 누구보다 일본 문화와 지성사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세대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제는 평택으로 이전한 주한 미군 용산기지 터에는 1200여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중 상당수는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이다. 이런 식민지 유산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파악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식민의 흔적을 상징하는 용산 미군기지 터의 옛 건물 한 곳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확대 이전하는 것도 식민의 기억을 응시하기 위한 뜻깊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단지 찬란한 전통에 대한 환기나 낙관적 역사 인식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 김수영이 읊었던바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는 그 슬픔과 분노의 미학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이 땅의 역사와 피에 새겨진 식민의 흔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식민을 넘어서는 전망을 얘기할 수 있으리라.

이즈음 위안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최악의 한·일 관계에 봉착해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일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식민의 기억에 대해 정직하게 응시하는 게 필요하겠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1억원이 넘는 성금이 답지했다. 그 마음이 단지 한·일 화해를 위한 움직임만은 아닐 것이다. 양국 간에 존재하는 역사적 상처와 업보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성금을 기꺼이 보내게 만들었으리라.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를 식민의 기억을 온전히 인식하기 위한 원년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용산 곳곳에 새겨진 식민의 흔적을 기억하고 보존하며 탐사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리라. 그러기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86평의 공간은 역시 너무 좁은 게 아닐까.


<2019-01-15> 서울신문

☞기사원문: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각

화, 2019/01/1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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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영 한신대 교수.

[짬]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65)의 친일행적은 10여년 전부터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가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어떨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산 소고기 투쟁,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정치학자로서 개입해온 이해영(사진)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이번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의 전력’을 파고들었다.

이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는 지난 8년 남짓 직접 발굴한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그동안 알려진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지난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 연구’ 출간
8년간 독연방문서보관서 등 자료 수집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 등

2차 대전 2년반 ‘나치독일 행적’ 추적
“유럽첩보 총책 에하라의 특수공작원” 

정부 나서 ‘안익태 파일’ 등 검증 필요
“국회에서 ‘새 국가 제정’ 공론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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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부상자와 가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가 지휘할 <일본 축전곡>에 대해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 삼인 제공

그 자신 안익태의 주 활동무대였던 독일에서 유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논쟁적 정치학자답게 안익태 문제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학문적 접근보다 주장이 선명하다.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한 여러 공연이 ‘독-일협회’의 주최와 기획으로 열렸다는 데 주목한다. 독일과 일본의 민간 친교·학술 교류단체였던 독-일협회는 나치의 제정 지원을 받는 당 외곽 조직이자 두 나라의 대외 선전도구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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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비가도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이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있다. 삼인 제공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이 교수는 안익태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는 미리 일본의 첩보를 입수한 듯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된 안익태는 파리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친나치 활동을 방증한다.

그동안 직접 독일 연방문서보관서를 드나들며 ‘안익태 파일’ 등 자료를 복사해왔던 이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추가로 기록과 자료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안익태 행적 관련 사실관계가 70%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 있는 안익태 파일을 복사해오고, 영상 자료도 사본을 확보해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있는지도 조회를 요청하는 등 정부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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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프랑스의 나치 부역 신문인 <르 마탕> 1944년 4월 19일치에 실린 사진. 전날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에키타이 안(오른쪽)은 유명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왼쪽)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협연했다. 삼인 제공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했었다. 즉,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문제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필요성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60년 넘게 안익태의 유럽 행적이 은폐된 상황에서 그나마 친일 문제가 터진 것도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지금도 서점에선 여러 종의 ‘안익태 위인전’이 유통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 나치 부역만으로도 프랑스에서는 사형감이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등에서도 비열한 부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부르는 상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교수는 새로운 ‘국가’ 제정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해볼 계획이다. “국가는 가장 중요한 나라의 상징체계 가운데 하나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제의적 절차다. 그런데 비애국적인 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런 문제를 과연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제는 답변해야 한다.”
김지훈 기자 [email protected]

<2019-01-14>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 넘어 친나치 ‘안익태의 애국가’ 이대로 둘 것인가”

※관련기사 

☞연합뉴스: “안익태는 일제와 나치 독일의 고급 나팔수였다” 

☞서울신문: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일제와 나치 독일의 나팔수였다” 

☞tbs교통방송: 이해영 “안익태,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즘에 협력하고 부역했던 인물” 

☞민중의소리: 안익태 친일파,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화, 2019/01/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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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위 징계, 경고…1·2심 “제재 적법”
상고 3년 5개월 만에 전원합의체서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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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 등을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가 정당한 것인지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한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은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민방송 RTV가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명령 취소소송의 상고심 재판을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고 15일 밝혔다. 전원합의체는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 12명과 대법원장으로 구성된다.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거나 기존 판례 등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전원합의체에 회부된다.

2012년 나온 백년전쟁은 진보성향의 역사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했다. 한국 근현대사 100년이 독립운동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전쟁으로 보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를 다뤘다. 당시 진보·보수 진영이 나뉘어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RTV는 위성방송 등을 통해 2013년 1~3월 두 편을 모두 55차례 방영했다. 그러자 방통위는 그해 8월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뤘다”며 프로그램 관계자를 징계·경고하고 이 사실을 방송으로 알리라고 명령했다.

1·2심은 방통위의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희화했을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혹 제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재구성해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RTV 쪽은 2015년 8월 대법원에 상고했다. 3년 5개월 만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본격 심리하게 됐다.

한편 지난해 8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지영 감독과 프로듀서 최아무개씨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최우리 기자 [email protected]

<2019-01-15>한겨레 

☞기사원문: 다큐 ‘백년전쟁’ 제재 정당성, 대법원 전원합의체 간다 

※관련기사

☞PD저널: 대법원, “‘백년전쟁’ 제재 정당” 판결 뒤집나 

☞뉴시스: 역사다큐 ‘백년전쟁’ 제재 취소, 대법 전합서 가려진다 

☞뉴스1: 이승만·박정희 다큐 ‘백년전쟁’ 사건, 대법 전원합의체 회부 

☞SBS: 대법, 이승만·박정희 역사다큐 ‘백년전쟁’ 사건 전합 회부 

☞KBS: 대법, 이승만·박정희 역사다큐 ‘백년전쟁’ 사건 전합 회부

화, 2019/01/1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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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李植盜問朝家

 

朝家多勢客(조가다세객)

孰虎孰狐狸(숙호숙호리)

巧語令民惑(교어령민혹)

迎新起大疑(영신기대의)

 

李植이 지은 ‘盜’라는 詩에 화답하여 朝廷에 묻는다

 

朝廷에 세력 있는 사람도 많으니

뉘라서 범이며 또한 뉘라서 狐狸

교묘한 말로 백성을 미혹케 하니

새해를 맞아 큰 의심을 일으킨다.

 

<時調로 改譯>

 

조정에 勢客 많으니 누가 범 누가 狐狸

교묘한 말재주로써 백성들을 미혹하니

오호라! 새해를 맞아 큰 의심 일으킨다.

 

*李植: 조선 仁祖 때 名臣(1584~1647). 字는 여고(汝固). 號는 택당(澤堂). 남궁

외사(南宮外史).  漢學  4대가의    사람으로  이조 판서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

척화파(斥和派)로  淸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다. ≪선조실록≫을  전담하여  수정

하였으며,  저서에 문집 ≪澤堂集≫이  있다  *朝家: 조정(朝廷). 조당(朝堂) *勢客:

세력을  가진 자.  勢力家 *狐狸: 여우와 살쾡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巧語: 巧言. 교묘하게 꾸며 댐. 또는 그 말

*迎新: 새해를  맞음.  새로운  것을  맞이함 *大疑: 크게  의심함. 큰 의심이나 의혹.

 

<2019.1.16, 이우식 지음>

수, 2019/01/16-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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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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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수, 2019/01/1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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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1)
– 나의 생애 첫 시민운동 단체 민족문제연구소

나는 지난 1993년 1월 16일 민족문제연구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당시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다.

울산의 현대조선 중공업에 파견근무할  무렵 우연히 신문인지 잡지의 하단에 조그만 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애타게 찾던 단체였기 때문에 눈에 확 들어온 것이리라.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만일 그런 단체가 없었다면 나는 그런 단체를 만들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유학중이던 1980년대 말경 우연한 기회에 문과성향인 내가 역사학이나 사회학 분야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적(?) 생각을 하면서, 해방후 친일청산이 되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만악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89년 어느때인가?  외국인 유학생 숙소 앞 주차장에서 만난 후배를 붙잡고 내가 두시간 가량이나 ‘친일 청산’ 관련 얘기를 하는데  고역이었다는..나는 그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내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걸 안 그 후배가 나에게 들려준 일화가 있다.

1994년 내가 근무하던 직장(연구소)이 대덕연구단지로 옮기면서 나도 대전으로 이사하게 됐는데, 대전 와서 수소문을 해보니 대전에도 회원이 있었다. 회원이 당시 6~7명 정도였는데, 외롭지만 뜻이 맞는 우리끼리는 매달 꾸준히 3~4 명씩, 많이 나오면 5~6 명씩 모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김OO 소장님이 월례모임에 내려오셔서 나에게 지부장을 맡아달라고 하시는 바람에 그냥 박수로 지부장이 되어버렸다.

당시만 해도 어디 가서 ‘반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라고 소개하면 일반 사람들 중엔 그게 뭐하는거냐는 질문부터 빨갱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민운동 한다는 사람들도 “반민족문제연구소” 회원/대전지부장이라고 하면 멀리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던 때였다.

더구나 대전지역은 그런 쪽에서는 더 불모지였다.  그래서 민문연 대전지부가 1990년 중후반 경 어느 해 현충일날 처음으로 대전 현충원 앞에서 “친일청산”, “친일군인 김창룡묘 대전 현충원에서 이장하라”라는 현수막을 들고 집회를 할 때는 아마 7~8 명 나온 걸로 기억한다.   그저 우리 월례모임 장소를 현충원 앞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은 정도였다.

그저 그렇게 몇 명이서 대전 현충원 앞 다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현수막 하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진 십여장 걸어놓고,  피켓 몇 개 들고 김창룡의 악행과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국립 현충원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바로보기시민연대(물총) 대전대표로도  있으면서 안티조선 집회를 어떤 해에는 거의 분기에 한번씩 할 정도로  왕성하게 언론개혁 운동을 했는데, 그렇게 친일청산 운동, 안티조선 운동, 통일연대 운동 등 찬바람 맞는 운동을 하며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 사람들과 교류를 하게 됐고, 그들도 점차 우리 민문연이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와 대전지부는 대전 시민사회에 자리잡게 되었고, 우리 대전지부의 친일청산-김창룡묘 이장촉구 집회에 다른 시민단체 사람들과 단체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전지역의 많은 시민단체가 함께 동참하는 상징적 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젠 민문연 대전지부의 위상도 대전지역에서 크게 올라가 있다고 알고 있다.

그후 2003년경부터 나는 개인 사정으로 현장에서 멀어져있다가, 2010년대 들어 다시 시민활동을 재개했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회원된지 22년만인 지난 2015년 3월, 9대 운영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운영위원장을 하던 2년 동안은 정말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민문연 일 뿐 아니라 장준하선생 관련 일과 평화협정 관련 일 등 다른 일들도 같이 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청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가며 대전과 서울을 오간 일은 뒤돌아보면 지금 같아서는 어림 없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생애 첫 시민활동을 민족문제연구소로 시작하여 오늘 26년을 맞은 나는 지금 민문연으로부터 제명된 상태다.

2019. 1. 16.
회원가입 26년째 되는 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전 운영위원장 여인철

목, 2019/01/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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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음해세력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입장문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와 관련된 논란으로 본의 아니게 여러 단체의 고유 업무에 지장을 주고 각종 대화방이 오염된 사태에 대해, 이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연구소 와해 기도에 앞장서고 있는 여 모씨는 2015∼2016년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던 자로서, 재임기간의 독선과 월권으로 역대 운영위원장이 모두 재추대되어 연임한 것과 달리 경선에서 큰 표 차이로 낙선하였습니다.

여 씨는 낙선을 자성의 계기로 삼기는커녕 이를 집행부의 음모로 돌리며 경선결과에 승복하지 않다, 작년 3월 총회를 계기로 어처구니없는 비방과 음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 지역과 직능 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여 씨의 제명을 이사회에 건의하였으며, 소명절차를 거쳐 2018. 5. 11. 제명처분되었습니다.

이후 여 씨는 동조세력을 규합하여 소위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을 조직하고 온오프라인 허위사실 유포, 회비불납운동 전개, 1인 시위, 기자회견, 민원제기 등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연구소의 업무를 방해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회원이 아니거나 오랜 기간 회비조차 납부하지 않은 무자격자들까지 동원하여 연구소를 공격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연구소를 불법 부정 비리 횡령이 만연한 문제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집행부 총사퇴와 ‘해산’까지 운운하고 있습니다. 정책 방향이나 사업성과에 잘못이 있다면 이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함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 연구소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하에서 국정원을 비롯한 권력기관의 노골적인 사찰과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 역경을 견뎌내고 나니 이제 연구소를 권력과 자산으로 이해하는 어이없는 무리들이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연구소가 저들의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은 까닭은 합리적인 문제 제기가 아니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적인 조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들이 노리는 바가 바로 이전투구식의 논란 확산이기에 상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들의 횡포는 상상을 뛰어넘는 경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의 공간을, 관계자들의 자제요청을 무시하면서, 허위사실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연예부까지 포함하여 모든 기자들의 공개메일에 가짜뉴스를 공급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도 없고 관용과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연구소는 사실무근의 비방과 음해에 단호히 대처해 반드시 책임을 묻기로 했습니다. 우선 여 씨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제소하기로 하고 현재 법적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중 1명은 이미 경찰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상태입니다. 진위를 가려보지도 않고 부화뇌동하는 이들에게도 엄중 경고합니다. 어이없는 선동에 현혹되어 허위사실을 전파하다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법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지만 작년 한 해 내내 저들에게 시달리며 일에 집중할 수 없었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3·1운동 100주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인 올해는 과업에만 전념하고 싶은 것이 저희들의 간곡한 바램입니다.

본의 아니게 시민사회에 폐를 끼친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리면서 신속한 조치와 정리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19. 1. 18.
민족문제연구소

* 제소가 1차 마무리된 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회의 공식 입장과 이 사태의 전후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따로 발표하겠습니다.

금, 2019/01/1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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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보기 :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l4kU/4

2019년 1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에 대하여 법적조치를 진행하고 있다는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요약하면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이 허위사실 유포, 사실무근의 비방과 음해, 업무방해, 명예훼손….
주동자를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제소키로하고 법적 절차 진행중….

입장문 전문 보기

2018년 3월 24일 정기총회는 목불인견의 민주주의 파괴의 현장이었습니다.
임헌영 소장은 발언 중인 회원에게 회원이 아니라며 퇴장을 요구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회원들은 분노했고 발원권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상근자와 일부 회원이 물리력을 동원해 마이크를 뺏고 발언을 못하게 했습니다.

현장 녹취 보기  (용량이 커서 녹음파일은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순간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믿음이 깨졌고, 그동안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의 믿음에 가려진 문제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승인 정관 소위 운영정관이라고 하는 가짜 정관, 소집절차를 지키지 않고 이사 선출 및 등기부 등재…

회원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 설립에 이르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문제는 봇물처럼 터져나왔습니다.

지난 12월 14일 서울시교육청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 ‘미승인 정관 사용’ ‘기부금 사용 부적정’을 이유로 행정처분했습니다.

○○○○○○

1만3천여 회원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인가? 아닌가?

민족문제연구소 정관 제6조(회원 자격)
① 이 법인의 회원은 본 회의 취지에 찬동하고 소정의 입회원서를 제출하여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매월 회비 명목으로  약정 금액을 인출하고 있습니다.
이사회에서 회원으로 승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가입한 회원이 (2017년 기준) 1만3천여 명이고, 회비 납부자는 9천8백여 명, 월 회비는 약 1억2~3천만원에 이릅니다.
지난해 역사관 개관식때 대통령, 서울시장, 서울시교육감이 축전을 보낼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단체가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입니다.
대한민국에 이러한 규모의 단체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위상과 달리 운영상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3년부터 임원을 포함한 고작 10명이 모여 총회를 열고 주요 사안을 의결했습니다.
수백, 수천의 회원에게는 철저히 숨겼습니다.
만약 의사록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다행히 민바행이 의사록의 존재를 알았고, 서울시교육청에 정보공개청구하여 입수했습니다
이때 민족문제연구소는 교육청에 정관과 의사록이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비공개 요청했습니다.
민바행은 회원에게 정관과 의사록을 비공개하라는 단체가 어디에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사록은 판도라의 상자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허위라고 주장하는 민바행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 1만3천여 회원에게 소집통지 하지 않은 10명의 총회에서 이사 선출 및 등기부 등재
● 10명이 개최한 총회는 민법과 정관에서 정한 소집절차의 중대한 하자로 모든 결의는 무효

● 정관, 의사록을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비공개
● 2003년부터 임원과 직원이 포함된 고작 10명이 총회 개최 주요 사안 의결
● 미승인 정관 이른바 가짜 정관을 사용하여 설립허가 취소가 될 수 있는 위험 자초
● 1년에 두 번 열리는 정기총회의 실체
● 2014년부터 2017년까지 10명이 처분한 기부금 58억8천여만원의 행방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기부해 참여해 매입한 청파동 5층짜리 빌딩이 민족문제연구소와 별개의 법인인 재단법인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의 단독소유로 등기
● 2016년 8월부터 매월 수천만원씩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의 수입이 된 기부금의 실체
● 서울시교육청에 허위로 신고한 총회 및 이사회 의사록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낸 회비로 민문연과 별도인 단체의 상근자에게 지급한 급여 및 운영비 문제
● 매월 납부되는 회비가 1억2~3천여만원에 이르지만, 보고서 마다 차이가 회비와 기부금 총액
● 본부에서 회원의 도장을 보관하고, 전화해서 찍는 의사록 문제
등….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법적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이상 진실은 법정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

그동안 민바행이 제기한 의혹 가운데 하나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고작 10명이 모여 기부금 58억 8천여만원을 기본재산에 편입하지 않고 용도를 변경했다.
사용 용도는 자료조사 및 연구비 지원인데 그 결과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 결과물이 무엇인가?
출처는 민문연이 서울시교육청에 신고한 의사록이다.
어디가 허위인가?
민족문제연구소는 답하라!!!

토, 2019/01/19-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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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돼지새끼가 일으킨 6.25전쟁의 세계 최

빈곤 전쟁거지나라였던 한국을…

 

1965년 일한협정 이후

 

수백억조의 무상 경제원조와 무상의 산업기술 원조

그리고 산업생산 공장을 지어줘…

 

북한 김일성 돼지새끼가 일으킨 6.25전쟁의 세계 최

빈곤 전쟁 거지나라였던 한국을 지금 세계 경제11위

의 경제대국으로 경제발전시켜 잘살게 해준 고마운

일본과 남한인 한국은 경제협력 및 군사협력을 하야

오래오래 잘살자.

 

국가보안법을 더더욱 강화하야…

 

6.25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쟁의 잿더미로 만들

고 수백만명의 전쟁 기아 및 전쟁 고아를 발생하게

만든 북한 김일성 돼지새끼의 북괴를 찬양하는 한총

련 똥진당 빨갱이놈년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인천 맥

아더 장군 동상 아래서 일렬로 무릎꿀쳐 니뽄도로 대

갈통 처참히 잘라 죽이는 그날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

나이다.

토, 2019/01/1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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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전주 이가네의 미개한 조선을 일본이 통치하

게 하여 미개한 조선을 근대화로 이끈 이완용 공작

각하야 말로 진정 존경 받아 마땅하다.

 

일본이 통치했기에 양반쌍놈의 신분제 철폐 그리고

양반쌍놈 남녀 할거 없이 공평하게 학교에서 서양의

근대화 교육을 받을수 있었던게다.

 

그리고 중국 청나라 짱깨새끼들한테 조공이나 바치

고 여자나 바치던 병신나라 조선을 중국 청나라 짱깨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던게다.

 

그런 고마운 일본과 조선 근대화에 이끈 친일파 분들

을 욕되게 하지말고 나라의 국토위협을 꿈꾸며 호시

탐탐 남조선인 한국의 안보를 노리는 북괴 빨갱이 척

결이 최우선인게다.

토, 2019/01/1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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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부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email protected]

준비 과정부터 18년 걸친 대장정
시민들 자발적 모금이 큰 원동력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기준 정하고
편찬위원들 지인까지 수록했는데
편파적이라는 비판에 동의 못해

특정한 사람 매도할 의도 없어
지도층 사람들이 행동을 할 때
훗날 받을 평가 신경쓰도록 영향

해외와 지방의 친일파 조사 미비
여건 좋지 않지만 개정판 준비 중

역사학자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71)은 2002년부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편찬작업이 한창이던 2005년 어느 날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을 비난하는 신문 형식의 전단이 대량 살포돼 있었던 것이다. 한 강연회에서 한·미 공조와 더불어 민족공조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 ‘친북적’이라는 억지 주장이었다. “거기에 도표가 나오는데 강만길 선생-한완상 전 부총리-나 이런 식으로 무슨 간첩단 사건처럼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당시는 편찬위원장을 맡아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일부 교회 사람들이 연세가 아흔이 넘은 장모님에게 ‘당신 사위 빨갱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은 멈출 수 없었다. “1949년 친일 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잇는 작업”이자 “역사정의를 위해 반드시 정리하고 가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의 음해와 소송전을 극복하고 2009년 11월8일 친일파 4389명이 담긴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발간기념식장 대관마저 취소되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효창원 애국선열 묘역으로 행사장을 옮겨 백범 김구 선생 영전에 사전을 헌정했다.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온 지 올해 10주년이 됐다. 윤 위원장을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났다.

– 사전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나.

“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출범한 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친일 문제를 꼭 한번은 다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계속해왔다. 준비 과정부터 따지자면 18년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사이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가 진전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오욕의 역사’를 제대로 성찰해야 한다는 국민적 지지와 성원이 밑바탕이 되었다.”

– 시민 참여가 가장 큰 원동력인 건가.

“한 예로 2005년쯤 기초조사 사업차 5억원 정도가 정부예산으로 편성됐는데 당시 한나라당의 반대로 전액 삭감됐다. 이를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7억원이 모였다.”

– 왜 ‘사전’이라는 형태이고 명칭은 ‘친일인명사전’이었나.

“사전은 가치중립적이다. 객관성을 확보하려면 사전이 적합하다고 봤다. ‘친일파’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공간을 거쳐 최근까지 널리 사용된 역사화된 용어다. 그대로 쓰자고 했다.”

–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했나.

“전문연구자 150명이 편찬위원을 맡았다. 180여명의 한국근대사 전공자들이 집필위원으로 참여했다. 1차 자료를 방대하게 조사했다.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정했다. 사전에 수록 예상자를 발표해 이의신청까지 받았다.”

– 주변의 우려도 많았을 것 같다.

“2002년부터 위원장을 맡았다. 2005년 한성대 총장 선거를 앞두고 보수적 교수사회에서 친일 청산에 앞장서는 게 총장이 되는 데 도움이 안된다는 우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총장이 안되더라도 이 일은 피할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공부하고 교수도 하고 총장도 했지만 역사학자로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것이 평생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 일부 보수세력은 편파성을 물고 늘어졌다.

“사전을 편찬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마음이 아팠던 적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우리 문중에 친일한 사람이 많았다. 평소 존경하고 가까이 지낸 목사님의 아버지도 들어갔다. 안타깝긴 하지만 역사화는 개인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스승인 백철, 지도위원인 강만길 선생의 지도교수였던 신석호, 연구소의 정신적 지주인 임종국 선생의 부친인 임문호까지 사전에 올랐다. 이게 편파적인가.”

– 가장 논란이 된 인물은 누구였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위원장인 내가 최종 결정을 해야 했다. 당시 쟁점 중 하나가 ‘혈서’였다. 일제에 충성하는 혈서를 썼다는 얘기는 많이 돌아다녀도 막상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그 근거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자에 실린 박정희의 낯 뜨거운 만주군관학교 지원 혈서 기사를 찾아냈다. 박정희를 뺄 수 없었다.”

– 의외의 친일파도 있었나.

“장지연이 대표적이다.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로 얼마나 애국자로 칭송받았나. 조사를 해보니 1910년 일제에 병합된 뒤 경남일보 주필 등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친일 시문을 기고했다.”

– 일부 보수세력은 색깔론, 공과론, 민족공범론으로 비난했다.

“자랑스러운 역사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역사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특정한 사람을 매도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역사가 엄중하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 발간 후 10년 동안 호응이 얼마나 있었나.

“최근까지 8쇄를 찍었고 1만1000질 정도가 나갔다. 처음에 출판 전문가들이 와서 사전은 어차피 많이 팔리는 종류가 아니니 초판 500질만 찍으라고 했다. 그런데 2000질이 순식간에 다 나갔다. 한 질이 30만원이다. 그런데도 초판 대부분을 개인 후원회원들이 구매했다. 집안의 가보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 사전이 10년간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나.

“ ‘무슨 행동을 하거나 발언할 때 훗날 어떻게 평가를 받을 것인가’하는 문제 인식이 커진 것 같다. 지도층 사람들이 앞으로 행동 하나, 발언 하나에 신경 쓰도록 만들게 된 것 같다.”

– 편찬 작업이 선생님에게 끼친 영향도 있는 건가.

“언제 한 인터뷰에서 좌우명을 묻길래 준비 없이 ‘역사학도로서 훗날 어떻게 내 행동과 발언이 평가받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행동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신 앞에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려 노력한다’고 답변했다. 이후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다. 민족과 역사 앞에 행위가 바르지 않으면 결국 심판을 받는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 작업은 지속되나.

“아직 미비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해외와 지방의 친일파 조사가 그렇다. 여기에는 다수의 전문인력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민간기구라 여건이 좋지 않지만 개정판 준비는 계속하고 있다.”

–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을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이 된 사건이다. 그 혁명을 ‘민’이 주도했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우리 근대사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갔던, 일제에 순응했던 사람들과 3·1운동으로 핍박받았던 사람들, 그 둘이 대비가 된다. 3·1운동에서 민이 들었던 횃불이 오늘날의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그 힘으로 <친일인명사전>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인터랙티브] 맹렬한 무장투쟁가, 아나키스트 역사가…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100년 전, 대한독립을 주창하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들었고 만세를 불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평범한 이들에게 3·1운동은 삶의 전환점이 됐다. 독립운동가가 된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지만, 택한 방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만주에 정착해 무장투쟁단체를 조직했고, 누군가는 머나먼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다. 이념과 노선도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여성해방 등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같은 독립운동 안에서도 누군가는 맹렬한 무장투쟁가로, 누군가는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대중운동가로 궤도를 달리했다. 만약 내가 독립운동가라면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 선택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는 누구였을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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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9/01/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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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의 항소심서 “피해자에 8천만∼1억원 배상” 1심 판결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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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선고가 끝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1940년대 일본 군수기업인 후지코시에 강제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2심에서도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을 받았다.

서울고법 민사12부(임성근 부장판사)는 18일 근로정신대·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27명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 1인당 8천만∼1억원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근로정신대원으로 지원한 원고들은 당시 대부분 10대 초반이었으나 위험한 작업에 종사했고, 70년이 넘도록 보상이나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후지코시와 일본이 나이 어린 원고 등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교사 등 연장자를 동원하거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등 기망·회유·협박 등 수단을 동원해 근로정신대에 지원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앞서 일본 법원이 후지코시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도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포기됐다”며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이 국내에서까지 기판력(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본 법원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 하에 당시 시행된 메이지헌법 등에 근거해 후지코시의 책임을 판단했다”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과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일청구권 협정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돼 있다는 후지코시 측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2003년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해 패소했다는 것만으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애사유가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며, 소멸시효도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1928년 설립된 후지코시는 태평양전쟁 당시 12∼18세 한국인 소녀 1천여명을 일본 도야마 공장에 끌고 가 혹독한 노동을 시켰다.

피해자들은 교육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지원해 군대식 훈련과 매일 10∼12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급여는 받지 못했고, 열악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외출이 제한되고 감시당했다.

피해자들은 2003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도야마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재판소는 한일청구권 협정을 근거로 패소 판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2011년 이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한국 대법원이 신일본제철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없고, 일본 법원 판결의 국내 효력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자 이후 국내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이와 같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에 따라 후지코시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어진 항소심은 앞선 신일본제철 상대 소송의 최종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을 거쳐 돌아온 재상고심의 결론을 대법원은 5년간 차일피일 미뤘다.

최근의 검찰 수사로 이렇게 결론이 미뤄진 배경에는 대법원과 박근혜 정부 청와대 사이에 ‘재판거래’ 의혹이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결국 지난해 10월에야 대법원은 최종 승소 판결을 했다.

년간 기다린 항소심 재판부는 이와 같은 대법원 판단에 따라 후지코시 측의 항소를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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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연합뉴스 

☞기사원문: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 2심도 승소…”일본이 기망·협박”(종합) 

※관련기사 

☞한국일보: 2심도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 배상해야” 

뉴시스: 日근로정신대 피해자 측 “법원, 아동노예 불법 인정” 

천지일보: 日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최대 1억 배상’

토, 2019/01/1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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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인적으로 그냥 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도움 요청합니다.

월, 2019/01/2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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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1/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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