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열전 친일파 14] 정경유착의 원조이자 매판자본가 1호 박흥식

지역

[열전 친일파 14] 정경유착의 원조이자 매판자본가 1호 박흥식

익명 (미확인) | 월, 2017/09/25- 11:13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법정에 선 박흥식

07

<1946년 3월 19일 횡령 및 포고령 위반 혐의에 대한 박흥식의 1차공판이 열렸다. <동아일보> 1946.3.20.>

1946년 2월 15일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인 박흥식은 신내영 검사가 지휘하는 검사국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있던 장택상의 농간으로 담임검사의 허락도 없이 풀려났다가 이튿날 다시 잡혀왔다. 그는 검사국에 구속된 지 열흘 만인 2월 26일 장물기장죄(贓物寄臧罪)·횡령·사기·포고령 위반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검사의 공소장에 의해 박흥식의 피의사실을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박흥식은 1945년 8월 27일 조선군사령관 고쓰기 요시오 중장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정리기금이란 명목으로 3,150만 원을 받아 식산은행의 차입금, 민규식 외 351명의 주주들에게 주식대금을 지불하고 남은 1,300만 원을 착복하였다.
둘째,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강제 징용되어 끌려온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퇴직금과 위로금 문제로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8월 27일 박흥식이 조선군사령관에게서 노자문제 해결기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2천만 원을 받았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주지 않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에 가족, 친척, 회사 임원 명의로 차명 예금하여 이를 은닉하였다.
셋째, 194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을 개업하면서부터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종업원에게 조선총독부가 배급해준 포목 등 생필품을 전부 매장으로 돌려 매입가의 최고 45배로 판매하여 1946년 2월까지 70만 원의 폭리를 취했다.

 

이 사건의 첫 공판은 3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대법정에서 이천상 판사의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방청석에는 박흥식 가족과 화신 관계자, 박흥식의 심리광경을 보고자 몰려온 군중들이, 변호사석에는 강병순, 배정현, 백붕제, 김광근이 앉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흥식은 고동색 두루마기에 회색 바지, 검정운동화, 귀를 덮은 머리에 용수를 쓰고 손목에 고랑을 차고 간수에게 끌리어 법정에 들어섰다.
이천상 재판장이 “피고는 어떠한 뜻으로 일본 군부가 관계하는 조선비행기회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는가”라고 묻자, “당시 총독부와 군사령부에서 강제적으로 시켜 피할 길이 없이 부득이 취임하였을 뿐이며 군부에서 받았다는 돈도 회사에서 당연히 받을 돈이며 이 돈 역시 나 개인을 위해 쓴 일은 없으며 앞으로 이것을 활용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대학도 세우고 큰 병원도 설립하고 이외 여러 가지 대사업을 하려고 설계를 세우는 도중에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유창하게 답변하였다.
제1회 공판에서 시작하여 7차 공판까지 열렸는데 그동안 박흥식이 복역하던 서울형무소 감방에는 전기히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감방이 아니라 별장이나 다름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호인단은 담당검사의 병환으로 공판이 연기되자 판사를 찾아가 공판 강행을 요청하거나 박흥식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병보석을 강청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일삼아 사회적인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3월 26일 제6회 공판으로 심리를 전부 마치고 신내영 검사는 “박흥식은 세상이 다 아는 민족반역자이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도 가할 것이나 그 법적 근거가 아직 없음이 유감이다. 그러나 장물기장, 폭리 등 죄상이 뚜렷하니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한다”고 준엄하게 논고하였다. 검사의 징역 3년 구형에 대해 사회적으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박흥식에게 실형 언도가 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 판사는 5월 3일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언도하였다. 그는 “미군정하에 있는 본 법정으로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운을 뗀 후 검사가 제시한 피의사실 세 가지에 대해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9년 반민특위 재판정에서도 박흥식은 전혀 반성함이 없이 모든 친일행위를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이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덕택으로 2천 명의 동포가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망가진 반민특위는 결국 적반하장의 매판자본가 1호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역사정의 실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08
진남포 미곡상에서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박흥식은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 지역 토호였던 부친 박제현과 모친 이선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연상의 친형 박창식이 일찍 죽고 아버지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박흥식은 1915년에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며 한학을 배우다가 17세 때 진남포로 나와 진남포상공학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19년 2월 박흥식은 진남포 비석리에서 미곡상을 시작했다. 19세 때인 1920년 2월에 평안남도 용강에서 선광당인쇄소를 설립했으며, 1924년 3월 자본금 10만 원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10월부터 1928년 5월까지 면화와 미곡 등 지역물산 매매와 알선을 하는 서선흥산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미곡상을 시작으로 상업활동에 투신한 박흥식은 천부적인 상술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 용강 지역 최대 지주로 성장하였고 이후 인쇄업과 무역업을 통해 향후 지물업을 시작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흥식은 1926년 서울로 올라와 그해 6월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의 출판사와 인쇄소를 중심으로 영업하였는데, 인쇄용지를 다량 구입하는 고객에게 금강산 관광과 일본 유명 관광지 여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판매전략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아 전국 각지의 수백 군데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27년 지물업의 메이저 사업인 신문용지에 도전하였다. 박흥식은 신문용지를 공급받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굴지의 제지회사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수입선 다변화를 꾀해 스웨덴의 제지회사와 교섭하여 양질의 신문용지를 훨씬 싼 가격에 공급받았다. 더욱이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알선과 박리다매 전략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1929∼1932년 매년 150만 원을 초과하는 판매액에 2만 원 안팎의 당기순이익을 얻었다. 25만 원의 소자본으로 출발한 선일지물주식회사는 이후 2배로 증자하고 연간 판매고가 500만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초반은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차차 가라앉고 서구자본주의경제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상품시장 확대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만주 침략을 강행한 시기였다.
1920년대를 거치며 조선인들의 문화수준과 소비성향이 한껏 높아졌고, 이 무렵 호경기를 반영하듯이 서울에서도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타 등 4곳의 일본백화점이 경합을 벌이며 성황 중이었다. 박흥식은 오랜 기간 관심을 두고 있던 자본주의의 꽃인 백화점사업에 진출하였다. 1931년 신태화가 경영하던 금은 잡화의 화신상회를 인수하여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하였고, 1932년 5월 목조 2층 규모의 화신상회를 콘크리트 3층으로 증개축해 최신식 초대형 종합잡화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두 달 뒤 바로 옆에 들어선 최남이 경영하는 동아백화점과 2개월간 전쟁 같은 혈투를 치렀다. 박흥식은 혈투 직후 염가양품(廉價良品) 전략 즉, 질 좋은 상품을 싸게 판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일본 오사카에 3층 빌딩을 임대하여 그곳에 오사카 구매부를 설치하고 일본 제조업체로부터 각종 상품을 공장가격으로 직수입하였다. 그 덕택에 동아백화점은 물론 일본 백화점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내놓아승리할 수 있었다. 1932년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종로 상권을 평정하였고, 평양에 세워진 평안백화점까지 인수하여 조선인 유일의 백화점 사장이 되었다. 1935년 연초에 화신상회가 화재로 전소하자 화신백화점 신축공사를 추진해 1937년 11월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화신백화점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화신백화점은 서울의 명물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938년 6월에는 진남포에 3층짜리 화신백화점 진남포지점을 개설하였다.

 

09

 

111937년 11월 새로 신축된 화신백화점.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시설로서 당시 미쓰코시, 조지아 등 일본백화점의 규모를 능가했다. 옆의 도면은 1937년 개장시 화신백화점의 층별 매장 배치도.

 

1934년 박흥식이 백화점사업과 연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연쇄점 방식의 유통업 진출이었다. 당시 4대 일본백화점이 주요 지방도시에 지점을 설치해 현지 중소 상인의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흥식은 1934년 6월 연쇄점 모집 공고를 일간신문에 발표하였다.
조선 전역에 걸쳐 1천여 개소의 화신연쇄점을 개설하는 한편, 화신측이 이들 연쇄점에 자금과 상품을 공급하는 등 자금과 판매를 일원화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지방의 소상인들로 구성된 가맹점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자금 대신 부동산을 받아 이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았다. 이 자금으로 상품을 구입해 연쇄점에 공급하며 상품 결제도 현금이 아닌 장기 어음으로 하도록 하고 그 어음을 식산은행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려는 것이었다. 1934년 11월 제1기 계획으로 350개의 연쇄점이 개설되었고(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추가 모집을 중단함), 저가 상품 구매를 위해 일본 오사카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개별 연쇄점에 대한 원활한 상품공급을 위해 주요 5개 도시에 상품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연쇄점 사업이 확대되자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 원의 화신연쇄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독립시켰다.
1939년 시점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필두로 한 6개의 화신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본금 25만 원의 선일지물주식회사(용지도매업), 100만 원의 화신주식회사(화신백화점), 200만 원의 대동흥업주식회사(부동산), 200만 원의 화신연쇄업주식회사, 270만 원의 화신무역주식회사, 50만 원의 제주도흥업(부동산, 취체역 사장은 박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상경하여 자본금 25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을 13년이 채 되지 않아 총 850여 만 원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흥식은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불렸고 1938년 호별세 25,000원을 납부하여 서울 조선인 중 최대 납세자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그해 말 박흥식은 조선인 기업인 경성방직과 조선생명보험, 일본인 기업인 조선석유와 북선제지화학공업 등 8개 사의 중역도 겸직하였다.
조선비행기공업 설립 주도
1941년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으로 시작된 전시통제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1941년 ‘생활필수물자통제령’과 ‘물자통제령’ 1942년 식량관리법 등으로 철저한 가격통제와 생활필수품 배급통제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1941년 9월 박흥식은 화신무역주식회사, 화신연쇄점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합병해서 자본금 500만 원의 화신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처해나갔다. 이 무렵 주력기업인 화신백화점은 일본산 수입의존도가 50% 정도여서 경성의 4대 일본 백화점에 비해 유리하여 미나카이, 히라다 두 백화점을 앞지르고 미쓰코시, 조지아 두 백화점과 대등한 영업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수입품 비중이 80%를 차지한 화신연쇄점으로서는 총체적 위기였다. 앞서 말한 각종 경제통제령이 발동되고 물자공급이 중단되면서 1년 사이 350개의 연쇄점은 250개로 감축되었고 1943년에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흥식은 194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산업경제인 대표자대회에서 일본 천황을 ‘배알’한 후 비행기 제작에 뛰어들 결심을 하였다.1) 1944년 7월 12일 박흥식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을 위한 제1회 발기인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이하라 준지 참모장을 비롯해 군부 7명, 총독부 7명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설립 취의서를 확정하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고 7월 17일 조선총독에게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설립 취의서에서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 설립 이유, 예산 및 자금조달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는 조선군의 지도감독에 따라 군용비행기 제조를 목적으로 한다. 1차 사업년도에 제조에 필요한 건설 및 부품 가공설비를 시설하고 2차 사업년도부터 일관작업을 추진해 월 60기 이상 제작하고, 3차 사업년도부터 월 120기 이상 생산한다. 둘째 회사 설립 이유는 세계정세의 가열찬 전국(戰局)을 고려해서 비행기의 대량생산이 초미의 급무이며 국가적 요청이다. 셋째 자금은 자본금의 반액 납입과 일부를 전시금융금고 차입금으로 충당해서 시설하고 사업 확장에 따라 2회 자본금 납입을 통해 조달한다.”


  1. 흔히 반민특위 박흥식 공판자료에 의거해 박흥식이 비행기 제작에 참여한 이유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끈질긴 회유와 종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면도 작용했겠지만 극심한 전시통제기에 이르러 유통업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자 하는 박흥식의 야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다음은 7월 17일 조선비행기공업의 설립인가를 받은 후 박흥식 설립위원장이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 글인데, 비행기 제작 참여 계기와 그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재작년 12월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1인으로서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 배알의 분부를 받자옵는 파격의 광영을 입었는데 이때 나는 산업경제인으로서의 책무의 중대함을 깨닫고 국가를 위한 직접 봉공의 길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비행기 증산을 위하여 정신(挺身)하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의와 계획을 총독부 및 군부에 피력하였던바 파격적인 지원 아래 직간접으로 편달을 받고 또 재계 각위의 절대한 원조에 의하여 예의 본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매일신보> 1944.8.19. 2면)

 

1944년 9월 임시발기인총회를 열어 총 자본금 5천만 원 중 제1회 납입자본금 2,500만 원의 출자관계를 결정, 주식총수 100만주 가운데 85만주는 발기인에게 배당하고 나머지는 조선금융단에 의뢰해 전국에서 공모하기로 하였다.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공업이 정식 설립하여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12월에는 일본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았다. 설립 직후 조선비행기공업의 출자구성을 보면, 법인주주로는 전시금융금고(지분율 17%) 조선식산은행(17%) 동양척식(16%) 화신주식회사(15만주, 15%) 등이고 발기인 주주 중 조선인으로는 박흥식(2만주, 지분율 2%) 박중양(0.1%) 장직상(0.3%) 한상룡(0.3%) 민규식(0.3%) 김연수(0.5%) 박춘금(1%) 백낙승(2%)이다. 박흥식과 화신주식회사는 총 100만주 중에 17만주와 17%의 지분율이고 금액으로는 400만 원으로 조선인 주주 중에 압도적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비행기공업에서 만들고자 한 비행기는 ‘キ79丙’ 기종의 목철(木鐵)혼합기였다. ‘キ79丙’ 고등연습기는 만주비행기제조가 생산한 전투기 기종으로 1939년 노몬한 전투에 참가한 79식 전투기를 고등연습기로 개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지도하에 이 기종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비행기제조와 기술협약을 맺고 비행기 생산자재를 수입하였다. 이와 별도로 박흥식은 10월 하순 기술진을 초빙하고 공작기계를 마련하기 위해 도쿄와 상하이를 찾아갔다. 도쿄에서는 중앙당국과 선진 비행기공장 임원들과 교섭한 결과 군수성 칙임기사 하타에 외 60여 명의 기술진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주둔 노보리부대와 교섭하여 비행기 부품 제작에 필요한 공작기계류 550대를 입수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직물과 동양방적의 안양공장 및 인근 토지 10만 평을 매수해 정비와 조립공장, 격납고와 비행장을 순차적으로 건설토록 하였다. 또한 기술자 양성을 위해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전환해서 항공과와 기계과 두 학급 240명을 선발하여 기술교육에 힘썼다. 박흥식을 비롯한 조선비행기공업 임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5월 당시 1호기의 주익(主翼) 제작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이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3호기의 부분품 제작도 9월말에 완료할 예정으로 안양공장의 비행기 양산체제가 완성될 즈음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12

‘キ79’ 고등연습기의 하나. 만주비행기제조(주)가 97식 전투기를 디그레이드하여 고등 연습기로 제작한 것이다.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도 이와 동일한 기종의 비행기를 생산키로 하였다.

 

정경유착과 그 귀결로서의 전쟁협력

박흥식의 성공 신화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곧 제국주의 권력과의 추악한 정경유착이 자리한다.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리고 신문용지의 거래처를 확보할 때 조선총독부 관료의 개입으로 가능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설립자금과 운영자금을 국책은행이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받았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선총독이나 총독부 관리와의 비밀 회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1935년 연초 대목 때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전소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우가키 총독을 만나 구 종로경찰서 자리를 빌려 임시매장을 차리는 것을 허락받아 화신백화점의 영업 손실을 최소화했다는 일화는 총독부와의 유착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통제기에 들어서자 박흥식은 관변단체, 친일단체 간부로서 활동하고,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강연과 기고, 국방헌금 헌납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표적인 관변단체·친일단체 활동을 살펴보면 사상범의 전향업무를 담당한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1937), 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1938),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1939),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4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이사(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 겸 국민총력 경기도연맹 참여(1943) 그리고 패망 직전인 1945년 2월 미영격멸, 성전필승을 내건 대화동맹 심의원으로 활동했고 그해 6월 전쟁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목적으로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위원을 맡았다.
이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직접 국방헌금으로 헌납했을 뿐 아니라 국방헌금을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종로경찰서에 5,000원을 냈고, 9월에는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9년 종로경찰서 신축 기성회비로 5만 원을 기부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관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하여 일반인에게 국방채권을 강매하였다. 그해 12월 화신주식회사와 화신상사의 종업원에게 국방헌금 3만 원을 갹출하여 종로경찰서에 헌납하였다. 1943년 7월 민규식 김연수와 함께 청소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쓸 연성비 5만 원씩을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시통제시책에 순응하며, 징병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과 연설, 기고를 하였다.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광명의 천지를 향하여」(<조광> 1942.2), 미나미 총독의 이임에 즈음한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매일신보> 1942.5.30), 1942년 12월 일본산업경제간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천황을 만나고 그 감격을 피력한 「배알의 광명의 감읍」(<매일신보> 1942.12.16)과 「배알 1주년-지성으로 봉공」(<매일신보> 1943.12.17) 등 다수의 친일 논설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세 번의 구속, 그리고 사후의 역사적 심판

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1946년 12월 화신백화점, 흥한피복주식회사,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50년 화신산업주식회사 사장, 재판법인 흥한재단 이사장, 1953년 흥한방직주식회사 회장, 1959년 신선무역주식회사 회장을 지냈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1차년도 때 외자 도입을 통해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전력난과 불경기로 큰 적자를 보고 2년 만에 손을 뗐다. 1980년 10월 화신과 그 계열사들이 300억 원의 연쇄부도로 파산하면서 박흥식은 재계를 떠났다. 1994년 5월 10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방 후 박흥식은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등 각 시기에 걸쳐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나 구속되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빠져나왔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1946년 2월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서울지방법원에서 기소되어 징역 3년과 벌금 200만 원이 구형되었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번째는 1949년 1월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제1호로 체포되었으나 9월 26일 그는 ‘공민권 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세 번째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회의에 의해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7월 석방되었다.
여러 차례 구속과 무죄판결을 반복하며 정경유착과 친일의 죄를 무난히 넘겨온 그였지만 2009년은 절대 피할수 없는 역사적인 심판의 해였다.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황민화정책과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한” 죄목(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2조 11호 13호 14호 17호 18호 각호 위반)으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였고, 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소상히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최고의 성공신화로 포장되어온 화신기업의 성장은 제국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굴종의 대가였고 일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된 매판자본이었음이 역사자료에 의해 남김없이 드러났다.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경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13

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었던 박흥식동상. 이 동상은 박흥식 사후인 1996년 광신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이 세운 것이다. 2001년 10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서울관악동작지부 회원들이 광신고등학교 정문에서 박흥식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그해 연말에 자진 철거되었다.

∷ 박광종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0912-10

▲ 저자: 내일을여는역사재단·민족문제연구소ㅣ출판사:민연ㅣ15,000원ㅣ295pageㅣ발행일: 2017.09.01.ㅣISSN 1228-8802ㅣ9771228880200-73

☞ [구매하기] 『내일을 여는 역사』2017년 가을 통권 68


<내일을 여는 역사>는 2000년 창간해 현재까지 17년 동안 역사대중화를 위해 힘써온 잡지입니다. 2016년부터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함께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친일·독재 비호세력들이 어줍지 않게 국민들의 일상과 정신세계마저 지배하려는 이때, 우리들은 힘을 합쳐 관제 역사의 전파를 막는 데 앞장서고자 합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면서,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한국의 평화적 민주혁명이 세계 평화의 징검다리가 되기 위해서는

작년 겨울의 전국적인 촛불의 열기는 2017년에 들어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평화적이며 민주적인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전 세계에서도 한반도를 주목하였고 드물게 한국 민주주의의 재탄생을 부러워하는 촛불혁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지난 몇 년간의 한국 정치의 암울했던 그림자를 생각하면 한결 숨통이 트일 것 같은 희망이 설레는 기대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점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현 정부에 대한 지지도의 고공행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금년 여름을 전후한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이러한 설레는 기대감에 찬물을 끼어 얻는 듯 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과 핵실험 도박은 언제라도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사드 배치에 근본적인 회의감을 표시했던 문재인 정부조차도 정권 수립 이후 증폭되고 있는 안보 위기 상황 속에서 사드 배치 반대라는 마지노선에서 한 발 물러난 듯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국제관계의 현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참 명제’는 20세기의 역사가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으며 그러한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우리 민족과 국가의 장래뿐만이 아니라 세계 평화의 파괴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2016년 겨울 한국의 기층 민중들의 함성에서부터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촛불의 에네르기와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혁명정신이 어떻게 하면 전쟁 없는 세상, 평화로운 세상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가을의 찬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선선함을 주는 요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나 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왜 지금 현시점에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관계의 현실이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면 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그 문제점이 무엇이고, 그 해법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의 도발은 도대체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며, 과연 북한의 도발에서만 한반도 위기감 조성의 이유와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북한에게만 책임을 전가해서는 현 상황에서의 한반도의 위기 상황의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을 것이며, 문제에 대한 해법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1953년부터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제법적으로도 준전시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전후 65년이 흘러가고 있는 작금의 한반도가 준전시지역으로 계속 남아있다는 현실은 사소한 문제점이 불거지더라도 바로 전시지역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즉 정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며, 북한에서도 전후 계속해서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에 이러한 요구에 대한 고개를 가로젓고만 있다. 그리고 미국의 아태지역에서의 파트너로서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을 보면 오히려 한반도의 안보위기를 일본 자민당 아베 보수정권의 정권연장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중국은 ‘대국굴기’의 표상으로 국제관계에서의 중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위해 유독에 한국에게만 압박을 가하는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가?

바로 이지점에서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 국제관계의 미래가 어떠한 모습을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예단할 수 없지만, 절대로 전쟁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대전제로 하여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남북갈등을 긴장해소로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 한국의 촛불혁명이 보여준 민주주의와 평화의 정신이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확대되어가는 시발점으로서의 한국의 역할과 행동을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이번 호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 두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김정인은 한국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근대 한국 민족주의 한계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이경구는 정조에 대한 평가와 그 시대의 세도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방적인 칭송이나 비판, 주관적인 폄하나 무조건적인 찬미보다는 그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는 다양한 이해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근대의 시선도 중요하지만, 당시의 시대정신에 비추어 역사를 고찰하자는 제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에서는 모두 네 편의 글을 모아 보았다. 먼저 박홍서의 글은 2017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위기감을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논하면서 약육강식의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현명한 중재자로서의 한국 정부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대근은 한국 보수 세력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가고 있는 작금의 한국의 정치 현실을 각각의 보수 정당별로 분석하면서 보수야말로 미래지향적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주역은 바로 국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정해구는 금년에 치러진 제19대 대통령선거의 결과와 그 의미에 주목하고 있다. 정해구는 이 글에서 한국의 정치 지평이 지역주의 정치에서 세대정치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한국정치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불가역적인 것으로 보이며 구태를 벗어난 새로운 정치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다. 또 서영표는 현재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필요한 바람직한 모습은 ‘불만-탈구-저항-연대’를 읽어낼 수 있는 상상력을 갖추기를 권고하고 있다.

이어서 <인물로 보는 역사>에서 먼저 김소남은 반독재민주화에 공헌했던 인물로서 생명협동운동을 주창했던 조한알 장일순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장일순의 생명운동이 한국 현재와 미래의 대안사회를 향한 주목할 만한 운동방향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정호훈은 조선시대 중종대의 학자 김정국에 주목하여 16세기 초 주자학 실천운동을 통해 조선의 규범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한 인물로 평가한다. 이어서 강성률은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에서 한국 근대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이경손과 전창근이라는 두 인물에 주목하고 있다. 같은 영화인이면서도 이경손이 일생동안 항일투쟁으로 일관했던 것에 비해 전창근은 도중에 전향하여 친일행각의 길을 걸어갔다는 역사적 사실과 해방 이후 이들의 행로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빛과 그림자는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체크>에서는 고대사로 눈을 돌려 세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신희권은 풍납토성의 발굴조사 과정을 통해 한성백제시대의 역사 되살리기와 더불어 삼국시대 초기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백승옥의 가야사에 대한 고찰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가야사 연구에 대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역사적 용어의 개념과 가야의 위치와 영역 등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연구를 망라하면서 잘 정리하고 있다. 이어서 박성현은 신라 왕국 월성 발굴과정의 의미와 그 성과에 대해 논하면서 역사의 공간을 복원하고 정비하는 것에 대한 의미와 바람직한 방향성에 대해 제언을 행하고 있다.

<내일을 여는 책> 코너에서는 클래식의 재해석이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중국 사서삼경의 하나인 ????맹자????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한국철학자인 유초하는 고전 ????맹자????에는 현실 개혁의 의지와 미래를 향한 제언이 담겨져 있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였다. 다시 한 번 고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이다.

이어서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고대사와 현대사에 대한 글을 각각 한편씩 실었다. 먼저 강진원은 광개토대왕비 연구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어 온 신묘년조 기사에 대해서, 그 동안의 연구의 흐름과 논쟁점에 대해서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 명언이 있지만, 근대의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질곡 속에서 역사가 어떻게 곡해되고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왔는지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상록은 국민교육헌장 다시 읽기라는 글을 통해 맹목적 애국주의와 일제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국민윤리강령’의 문제점 및 박정희 시대의 산물인 국민교육헌장의 확산과 폐기과정을 통해 맹목적 애국주의의 문제점에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있다.

<예인 열전>에서는 18세기 전반기에 활약했던 문사 화가 능호관 이인상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매호 ????내일을 여는 역사????를 펼쳐 볼 때마다 맛볼 수 있는 최열의 <예인 열전>은 누구에게나 필독을 권하고 싶다. 이 번 호에서도 역시 이인상이라는 인물의 인생역정과 예술적 탐미의 세계는 파노라마적인 병풍처럼 3차원의 영상으로 다가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생각이 든다. <체험과 증언>에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지원하는 시민운동 평화나비 네트워크에 대한 글을 실었다. 김샘의 글 평화나비 네트워크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문제에 대해 대학동아리 네트워크에서 출발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전 시민적인,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부각시키면서 전쟁과 평화를 되새겨보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의 시각과 입장을 잘 보여준 글이라고 하겠다.

이어서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서유리의 6월 항쟁 30주년을 기념하는 <이상호·전정호, 응답하라 1987>의 전시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은 1980년대의 민중미술의 흐름과 실천을 현재적인 시점에서 잘 농축한 글이라고 하겠다.

끝으로 <역사와 공간>에서는 공간으로서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 두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정요근은 전라남도의 해제반도와 망운반도를 직접 걸어 다니며 공간으로서의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의 흔적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정요근의 역사와 공간에 대한 연속적인 답사기는 늘 신선하고 재미있다. 김창회와 신동훈의 글은 조선 전기의 상주목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답사기행이다. 경상도의 이름의 유래의 한 공간이기도 한 상주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전근대의 번영의 공간이 근대에 들어와 위축되어 간 역사적 흐름을 다시 한 번 새겨볼 수 있는 글이라고 여겨진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성쇠가 부침을 거듭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역은 사람이며, 인간이 역사의 행로를 좌우한다는 것, 즉 역사는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서 유지, 발전하기도 했고 쇠퇴하고 멸망하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의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의 흐름과 방향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는 그것이 해당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선택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2017년 가을을 맞이하면서 전쟁 없는 세상, 평화로운 세상, 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국가의 모습이 우리 한국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로 확산되기를, 그리고 한국에서의 평화로운 민주주의혁명이 세계의 평화를 이어지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편집위원 서민교

목 차

1. 여는 글/서민교

2. 쟁점으로 보는 역사
-하나이되 여럿인 민족주의/김정인
-정조와 세도정치 이해를 위한 세 가지 고려/이경구

3. 지금 우리는?
-미중관계와 한반도, 어떻게 읽을 것인가?/박홍서
-보수는 어디로?/이대근
-19대 대통령선거 결과와 그 의미: 지역주의 정치에서 세대정치로/정해구
-2017년 한국의 진보정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서영표

4. 인물로 보는 역사
[반독재민주화열전] 조한알 장일순의 삶과 운동론/김소남
[조선의 사상가 열전] 김정국, 주자학의 규범으로 조선을 바꾸려 하다/정호훈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 이경손과 전창근 -동지에서 상반된 길로/강성률

5. 사실 체크
-풍납토성과 한성백제의 역사/신희권
-가야의 개념, 그리고 그 위치와 영역/백승옥
-경주 월성 발굴의 의미와 성과/박성현

6. 내일을 여는 책
-『맹자』, 현실개혁의 의지와 미래개척의 희망을 담아/ 유초하

7. 사료의 재발견
-광개토왕비 연구의 어제와 오늘 -신묘년조 문제를 중심으로- / 강진원(정호섭->여호규->강진원)
-‘조국과 민족에 너를 바치라’ : 국민교육헌장 다시 읽기/ 이상록(황병주->이상록)

8. 예인열전
-이인상, 기이한 별품의 사기화가(士氣畵家) 1/최열

9. 체험과 증언
-평화나비, 당신과 손잡기까지/김샘

10. 예술과 현실의 소통
-이탈과 변이의 미술: 6월 항쟁 30주년 기념 <이상호·전정호, 응답하라 1987> 전시에 대하여/서유리

11. 역사와 공간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땅, 해제반도와 망운반도/정요근
‘팔달지구(八達之衢)’, 그 과거의 영광 -답사 기행: 조선 전기 상주목을 찾아서- /김창회·신동훈

화, 2017/09/12- 22:09
186
0

[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201709-1

화, 2017/09/12- 21:19
193
0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 13화 – 2부 「이게 실화냐?」
“국정교과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팟빵에서 듣기
http://www.podbbang.com/ch/14024

수, 2017/09/13- 18:04
183
0

 ◎ 2부 [인터뷰 제 1 공장]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 이준식 관장 (근현대사기념관)

김어준 :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이죠. 그런데 이 날이 아니라 이번주 일요일 9월 17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대정부 질의에서도 국무총리 상대로 이 질문이 나왔었는데, 국군의 날 변경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 관장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준식 : 예, 안녕하세요.

김어준 : 9월 17일이 무슨 날입니까?

이준식 : 예, 임시정부 산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군된 날입니다.

김어준 : 광복군 창군날이다. 그러니까 국군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던 광복군이 처음 만들어진 날이 국군의날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네요, 한마디로. 그 말을 듣자마자 설득되려고 하는데 그게 그러면 언제입니까?

이준식 :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군되었습니다.

김어준 : 그런데 임시정부는 그 전부터 있었지 않습니까?

이준식 : 예, 임시정부는 1919년에 출범했는데요.

김어준 : 그래서 그걸 건국으로 봐야 된다. 뭐 이렇게.

이준식 : 요즘 그런 얘기도 나오고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건국이라는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마는, 1919년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는데 임시정부가 1920년에 바로 독립전쟁 원년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1920년에 우리가 일제에게 전쟁에서 져서 국권을 빼앗겼으니까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해야 된다. 그래서 독립전쟁이라고 하고 1920년이 독립전쟁 첫 해다. 전쟁을 하려면 군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임시정부 산하의 국군을 만들겠다는 구상에 착수를 하는데, 당시 중국이 남의 땅이니까요. 남의 땅에서 군대를 만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김어준 : 다른 나라, 그 나라가 인정해 줄 리가 없지요.

이준식 : 예, 인정해 줄 리가 없어요. 군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하고 연계해서 국군을 활용하겠다.

김어준 : 임시정부하고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독립군들을.

이준식 : 만주독립군을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켜서 국군을 만들겠다는 그런 구상을 갖기도 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국군을 만든다는 게 임시정부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꿈이었는데요, 그 꿈이 1940년에 실현이 된 겁니다. 그래서 임시정부 산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건하게 되죠. 정식으로 군대를 만듭니다.

김어준 : 사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모든 망명정부가, 그 나라에서 정부를 두지 못하고 망명하게 되는 망명정부가 결국은 자기들 원래 땅을 점령하고 있는 식민본국이든, 또는 그 순간 침략해 온 나라든 간에 상대해서 이런 군대를 만들려고 하죠. 군대가 없으면 싸워서 다시 되찾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1940년에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공식적으로 창군하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실제 그때 부대라고 할 만한 인원도 있었습니까?

이준식 : 처음에는 주로 사령부 중심의 군대였습니다. 장교가 더 많았던. 사병보다 장교가 더 많았던, 어쩔 수 없죠. 왜냐하면 당시 중국 안에 사병이 될 수 있는 우리 동포수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김어준 : 동포 수가 있다 하더라도 몰래 사병이 돼야 하는 거니까.

이준식 : 그리고 대개 독립운동하시는 분이 나이가 많으니까 사병은 상대적으로 적었죠. 그러면서도 한국광복군이 계속 사병을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요. 그래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그래도 꽤 많은 병사들을 확보하는 성공을 했고요.

김어준 : 그런데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땅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창군됐다고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실체가 적더라도 생겨버리기 시작하면 가만두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준식 : 많이 알려지기로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왜냐면 자기 땅에서 군대 만들겠다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엔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견제하는 방법이 한국광복군을 만들되 중국 국민당 군의 통제 아래에 두겠다. 요즘 말로 하면 통수권, 작전권이죠. 통수권을 중국 정부가 갖는다는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을 승인하려고 하니까.

김어준 : 굉장히 뭔가 서글픈데요. 왜냐하면 지금도 한국은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임시정부가 창군할 때부터 중국이 또 작전권을 행사하겠다고.

이준식 : 그래서 임시정부가 단안을 내립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 광복군을 창군하는 거죠. 근데 창군을 했다고 하더라도 활동을 하려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원하기는커녕 계속 견제를 하니까요, 방해를 하니까요. 할 수 없이 광복군의 통수권을 중국 국민당에게 넘겨줍니다. 굴욕적인거죠. 사실 따져보면.

김어준 : 이해갑니다, 저는. 그렇지 않을 방법이, 도리가 별로 없을 것 같으니까요.

이준식 : 그래서 한 2-3년에 걸쳐서 임시정부하고 광복군이 통수권을 되찾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많이 씁니다.

김어준 : 지금 역사의 복사판이네요.

이준식 : 네, 1944년에 드디어 통수권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1944년에 정말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되는 거죠.

김어준 : 선배들이 훨씬 낫네요, 4년 만에 찾았으면.

이준식 : 네, 4년 만에 찾았으니까 굉장한 성과죠.

김어준 : 저희는 지금 육십 몇 년 동안 못 찾고 있는데. 어쨌든 지금 우리 국군이 미군에게 작전통제권을 넘기고, 전작권을 넘기고 아직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는 오리지널 버전이 광복군 창군 때도 있었다.

이준식 : 한국광복군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임시정부 산하의 자주적인 군대가 되려고 굉장히 애를 많이 썼고, 또 그것을 실현했다는 겁니다.

김어준 : 그게 싫어서 일본의 소위 강점이 싫어서 거기까지 가서 군대를 만들어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또 중국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체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아요, 그 분들이. 어쨌든 4년 만에 또 되찾았다. 그러면 실제 중국군, 당시 인민군하고 같이 작전을 했다든가. 그러니까 중국이 당신들은 별개의 군대라고 인정을 해야 같이 작전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연대작전을 했다는 기록은 있습니까?

이준식 : 1944년에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군사협정을 맺고요.

김어준 : 군사협정을 맺었다. 확실하게 인정한 거네요. 협정을 맺었다면.

이준식 : 중국이 독자적인 군대로 인정을 한 거죠. 그리고 1943년, 1944년 무렵부터는 다른 연합국 군대인 영국군, 미국군과의 공동작전도 추진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는 유명한 한국광복군의 독수리작전이라는 게 미군과 공동으로 추진이 됩니다.

김어준 : 이건 뭐 부인할 수 없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군대가 확실한데, 그럼 지금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은 뭘 기념하기 위해서 된 겁니까?

이준식 :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1950년, 그러니까 6?25전쟁 와중이죠. 6?25 전쟁 때 육군 제 3사단이 38선을 처음 돌파해서 북진에 성공한 날이다. 그래서 그 날을 기리기 위해서 10월1일을, 1956년 이승만 정부 땝니다. 이승만 정부 때 10월 1일을 국군의날로 지정했다는 얘기가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1954년인가요, 1953년인가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데 이게 10월 1일입니다. 그래서 10월 1일이 어쨌거나 의미 있는 날이다. 그래서 1956년에 처음으로 국군의날로 지정을 했습니다.

김어준 : 38선 돌파한 것도 의미는 있지 않습니까?

이준식 : 38선돌파도 의미가 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것도 의미가 있긴 하죠. 그런데 그런 날이기 때문에 국군의날로 지정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김어준 : 사실 국군의날 하면. 보통 무슨 날, 한글 창제 했던 날을 한글날이라고 하는 거죠. 제헌절하면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이것도 국군의날 하면 당연히 막연히 국군이 창설된 날인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준식 : 국군이 창설되거나 아니면 국군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김어준 : 38선을 돌파한 날이군요, 이게.

이준식 : 그래서 국군이 역사가 시작된 날을 찾다보니까 그래도 광복군 창건일이 가장 어울린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김어준 : 당연히 그런 데 있어서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거든요? 애초에 광복군이 1940년에 창설이 되고 중국과 군사협정도 맺었고 미군과 당시 공동작전도 했다면 규모는 작더라도 국군의 뿌리가 확실하니까. 한글도 지금 한글하고 똑같지는 않거든요, 되돌아가면. 문자도 달라요. 어법도 다르고. 하지만 그 때 창설, 만들어진 게 확실하니까. 그런데 보수진영에서는 반대한다고 하는데 왜 반대하는 겁니까?

이준식 : 보수진영에서 반대하는 건 건국절 논란하고 직결이 되는데요, 보수진영에서는 대한민국 역사가 1948년 8월15일부터 시작됐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은 무관하다고 얘기하니까요. 그러니까 국군의 날도 광복군 창건일로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김어준 : 당연하네요. 그걸 인정하는 순간 48년이 아니라 40년대부터 군대가 있다고 해야 되니까요.

이준식 : 예. 거슬러 올라가면 광복군이 창건되기 이전에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인정을 해야 되고 그게 싫은 거죠.

김어준 :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인정하기 싫은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보수진영에서.

이준식 : 대한민국 건국은 독립운동과 무관하다고 보는 겁니다. 독립운동 때문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게 아니라, 흔히 말하는 건국세력이라고 그러죠. 건국세력에 의해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주장을 하고 싶은데 그 건국세력이라는 게 내용을 보면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친일파고 하나는 정치깡패입니다.

김어준 : 아, 그랬습니까? 정치깡패 얘기도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이준식 : 정치깡패가 이른바 건국과정의 반공반탁 운동을 주도한 세력 중에 하나거든요. 우리는 정치깡패라고 하지만 그쪽에서는 애국세력이라고 하겠죠. 애국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다.

김어준 : 지금 가스판 들고 아스팔트에 나오시는 분들이 가끔 있었잖아요? 프로판 가스통 들고. 그걸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한쪽에서는 그분들이 애국세력인 것이고 무관한 제삼자가 보기에는 정치깡패 아니냐. 그런 세력과 친일파가 소위 이승만 정권의 탄생에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 많이 하죠. 우리 보수진영의 뿌리가 친일파에 맞닿아있는 거 아니냐.

이준식 : 친일파라는 말을 하기 싫으니까 건국세력이라는 말로 미화하는 거죠.

김어준 : 실제 친일파라고 불릴만한 세력이 이승만 정권의 주축을 이뤘습니까?

이준식 : 예를 들어 군만 얘기하자면요, 이른바 국군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1960년까지 국군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육군참모총장을 보면 모두 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습니다. 60년까지 그랬습니다.

김어준 : 박정희 전 대통령도 뭐 일본 장교 출신 아닙니까.

이준식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지는 않았으니까. 육군참모총장 명단만 놓고 보면 십 몇 년 동안 만주군 내지 일본군 출신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결국 육군의 주류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얘기죠.

김어준 : 만주군이라는 게 독립군 때려잡던 군이거든요, 정반대로. 독립군이 아니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게 아니에요, 만주군은.

이준식 :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군의 국군이죠.

김어준 : 그 역할이 독립군 때려잡는 것 아니에요.

이준식 : 예, 독립군 때려 잡는. 항일세력 때려잡는 게 만주군이 하는 일이었죠.

김어준 : 다른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보통은 초기 건국세력들이 대부분 이런 역사를 거친, 터키도 그렇고. 대부분 독립운동하던 쪽에서 초기 대통령을 내놓거나.

이준식 : 군도 독립군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는 게 정상적인 거죠.

김어준 : 너무 당연한 건데 우리는 독립군을 때려잡던 쪽에서 군을 장악했었다, 초기에.

이준식 : 그러니까 국군의 뿌리로 독립군과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게 된 거죠.

김어준 :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신 걸로 저는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추천받았는데, 선생님을.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게 된 겁니까?

이준식 : 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도 하고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니까 당연히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요.

김어준 : 그리고 부모님한테 얘기를 들으셨겠군요, 쭉.

이준식 :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독립운동사를 공부를 했고요. 독립운동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김어준 : 그럼 혹시 부모님도 광복군 출신이셨나요?

이준식 : 어머니가 광복군 출신이셨습니다.

김어준 : 어머님이요? 아버님이 아니고요? 그럼 혹시 어머님의 아버님 외할아버지가 혹시.

이준식 : 외할아버지도 광복군이셨고요.

김어준 : 그쪽 핏줄이시군요. 우리는, 저도 어릴 때 독립군에 대해서 별로 안 배웠어요. 그냥 독립운동을 조금 했다. 그게 어마어마하게 긴 장이어야 할 것 같은데. 한 두 페이지 배웠던 것 같아요.

이준식 : 지금은 많이 가르치죠. 왜 그러냐 하면 1987년 헌법이 개정되지 않습니까? 우리 현행 헌법인데, 현행 헌법 전문에 뭐라고 되어 있냐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 후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서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완수해야 될 사명을 갖고 있다’고 적어놨거든요. 거기서 독립운동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헌법 전문에 나와 있으니까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후에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지금은 독립운동사를 많이 가르칩니다.

김어준 : 알겠습니다. 중간에 제가 잠깐 말씀드리면 만주군 출신 쪽의 반론권도 저희가 보장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런 얘기를 중간중간 많이 하는데 반론으로 연락 오는 적이 사실 거의 없어요. 거의 없긴 한데, 자, 이래서 10월1일이 국군의날이면 당연히 국군이 창설된 날이어야 하는 게 맞고, 논리적으로. 다른 날들은 다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따져보니 있다실제로, 광복군이 창건된 것이. 그리고 주변국에 의해서 독립된 군대로 인정도 받았고 협정을 맺은 기록도 있고 공동작전의 기록도 있다. 게다가 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날이 의미가 있으나 실제 그 국군이 소위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한 걸로 보여지는, 그런 국군의 구성이 일본군이었지 않느냐. 일본군 출신, 혹은 만주군 출신이었지 않느냐. 그러니 법통을 따지자면 당연히 9월 17일로 옮기는 게 맞다. 이 정도로 요약하면 되는 거죠?

이준식 : 예, 정확하게 요약하셨습니다.

김어준 : 제가 요약은 잘 해요. 깊이는 없는데. 그런데 이런 반론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게 왜 이렇게 연결되는지 논리적으로 머릿속에 구성은 안 되는데, 국군의날을 그렇게 바꾸면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사실이, 그 사실의 의미가 퇴색된다. 왜 퇴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준식 :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 주장을 하더라고요

김어준 : 그러면서 북한에 정통성을 주게 된다. 이것도 모르겠는데. 북한에 정통성을 주는 것은 오히려 지금 국군의날 아닌가요? 북한에서는 지금 독립운동을 자기들이 주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준식 : 예, 그건 사실이에요. 북한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게 지금 대한민국에서 강조하는 독립운동이거든요. 1919년에 대한민국이 출범했다고 하는 것보다 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김어준 : 인민군 창설되기 전에 무슨 소리냐 지금 광복군이 있었는데.

이준식 : 광복군이 창건됐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정통성 문제에서 유리한 거죠. 그런데 왜 스스로 불리한 쪽을 택하려고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김어준 : 지금 주장은 불리해요. 왜냐하면 친일파가 합참, 군을 통솔했던 군대를 가지고 정통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북한에서는 어쨌든 독립운동을 하던 쪽이, 북한 쪽 사이드에서는 군의 기본창설 단위가 됐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불리하죠. 바꿔야 되는 거였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의미를 퇴색시킨다. 이게 무슨 주장입니까? 어떻게 이해하셨어요?

이준식 : 보수세력에서 흔히 그렇게 얘기하는데요, 해방되고 난 다음에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유엔에서 결의를 합니다.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해라. 원래 유엔 결의안에서는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게 잘 안됩니다. 북쪽에서 선거를 거부하거든요. 그래서 다시 유엔에서 그러면 선거가 가능한 남쪽에서만 총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하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유엔 결의안에 보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 이렇게 돼 있습니다.

김어준 :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가 아니라.

이준식 :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가 아니라, 그런데 보수세력에서는 그걸 자꾸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해석을 하는 건데요. 정확하게 문구가 어떻게 되냐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 그리고 영어 표현에 주목을 하면요 정부입니다. government입니다. 국가가 아니라.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 이렇게 되는 거죠.

김어준 : 이해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이준식 관장님이었습니다.

이준식 : 예, 고맙습니다.■

<2017-09-13> tbs

☞기사원문: <김어준의 뉴스공장> 이준식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목, 2017/09/14- 13:34
204
0

법사회학 이 먼지,

어느경찰과 어느교도관 어느 강력방의 작년,

법사회학이  무언지,

징벌방이  무신지,

조직이  무어시간디,

작년! 쓴이는  고도소토영창원…………………..전   옥   서?

통영저녹서에서   징역팔월 (공무집행)…..

촛불집회를  쌂은방송으로

신문은  한겨레경향으로,

대무근 끄떡끄떡  다오고,,

방세는  밀리가 이꼬,,,

안들은  친청보네도라 사코,,,,

아(지세끼)는 우러사코,,,,,

 

 

목, 2017/09/14- 23:19
171
0

안녕하세요.

공무원들에게 강제로 청념연수를 듣도록 하고 있는데요.

그강좌 중에서 하나가 “[원격](청렴교육)독립 운동가를 통해 본 나라사랑과 국가관(개정)”입니다.

(중앙교육연수원 http://www.neti.go.kr/ )

“1948년 8월 건국의 주역 이승만”이라고 당당히 이승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를 탁월한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는 연수입니다.

1948년은 정부수립이고, 1919년 대한민국은 건국되었다는 현정권의 주장과도 배치되는 연수입니다.

이러한 연수를 공무원들에게 “청념연수”라는 명목으로 듣게하는 것은 정말 안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수가 꾀있는데, 이러한 연수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을까요?

 

 

금, 2017/09/15- 20:57
180
0

[보도자료] [참고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펴내

0919-1

▲민족문제연구소ㅣ 민연ㅣ100,000원ㅣ양장 824쪽ㅣ2017.8.29 ISBN: 978-89-93741-17-9

민족문제연구소가 5년여의 작업 끝에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을 펴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사전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두 번째 성과이다. 이 사전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위해 설치한 통치기구 중에서 우선 최고 권력기구인 통감부・조선총독부 본부와 소속관서들을 수록했다.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190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40년간에 걸쳐 존속했던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를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수록된 총 248개(통감부 26개, 조선총독부 222개)의 관서와 기구는 일제가 법령 공포를 통해 설치를 공식화한 것으로 모두 『관보』에서 관련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편제는 개별 통치기구를 각 1항목으로 설정하고,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로 대별한 뒤 다음으로 통감부 본부・소속관서, 조선총독부 본부・지방관서・학교・위원회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같은 범주 내에서는 설치년도 순으로 정리했다. 각 항목은 표제어(기구명)・존속기간・성격・연혁・조직과 기능・참고문헌 순으로 서술했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사료검증을 거쳐 확정적인 내용만 채택하였으며, 집필자의 주관적 해석은 최대한 배제하여 객관성 확보에 유의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이 학술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자평한다. 먼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 전체를 종합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이 사전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에 대해서는 본부를 비롯한 일부 부서만이 그 실체가 드러났을 뿐, 상당수의 기구는 극히 소략한 정보만을 알 수 있거나 아예 파악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이 사전을 통해 비로소 일제 식민통치 기구의 구체적인 전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특히 140여개에 달하는 각종 조선총독부 위원회를 정리한 것은 그동안 다수 위원회가 존재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분야 연구에 새로운 단서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위원회는 대부분 한시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심의・조사・자문・징계・조정 등의 기능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안 문제를 처리하거나 긴급한 정책・대책을 마련하고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주목해야 할 연구 대상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했던 ‘직업적’ 친일파들이 위원회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관변단체나 협력단체에 참여한 정도의 숫자는 아니지만, 이완용 박중양 박영효 박영철 송병준 한상룡 이범익 등 다수의 특급 친일파들이 관료기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수립 이후 각종 법령이나 정책 규제 용어 등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농촌진흥운동 심전개발운동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 등이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 기부금품모집규제법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그 일부 사례다.
또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각종 관청이나 인물 사진 등을 중심으로 다수의 희귀자료도 수록해 사료적 가치를 높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사전이 일제강점기 정책사・제도사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나아가 식민통치 구조나 식민지배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식민지 근대화론’의 본질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문제제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기구 설치와 운영은 외형적으로 근대의 법령 체계와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상당수의 기구는 해방 이후에도 그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통치기구의 근대적 체계와 운용은 식민지 지배의 억압성과 수탈성을 은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식민지배기구가 일본의 통치구조에 조응하여 구축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종속적이고 차별화된 조직체계와 운영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근대화보다는 식민지 경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근대의 외피’를 둘렀을 뿐 그 본질은 식민성에 있었다. 

이번 사전 발간은 1991년 설립 이래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을 병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집단적 작업의 결실이라는 측면에서도 평가가 필요하다. 정부기관의 지원이 아닌 오롯이 시민의 후원만으로 도전을 거듭하며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통감부・조선총독부 기구 전반에 대한 정리는 진즉에 이루어졌어야 할 기초적인 작업이지만 자료의 정보화 없이 개인 연구자들이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연구공동체가 자료의 집적과 집단 작업으로 이를 극복해 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시기이면서 근대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일제강점기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각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기초자료 조사와 정리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의 후속작업으로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일본군·국영기업·관변단체 편』도 이미 추진단계에 들어섰다고 밝히고, 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일련의 사전 편찬사업이 일제강점기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참고자료 (발간사, 서문, 일러두기, 차례)

■ 차례
 

2 발간사

8 일러두기

26 총론

45 통감부 편 (45 통감부 본부, 65 통감부 소속관서)

129 조선총독부 편 (129 조선총독부 본부, 221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441 조선총독부 지방관서, 481 조선총독부 학교, 521 조선총독부 위원회)

753 부록

화, 2017/09/19- 01:09
178
0

[민족문제연구소 일시 후원]

(주)경향신문사 28만6천원 (주)위드고 95만8천500원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29만7천360원 강병현 200만원 고현철 1만원 김종훈 5만원 김현정 1만원 신미숙 1만원 예병호 3만원 왈코믹 5만원 이성우 1만원 해피빈 40만3천300원 황원섭 1만원

●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명단에 누락되신 분은 사무국(02-2139-0406)으로 전화주시면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화, 2017/09/19- 20:12
203
0

이승만에겐 건국의 공이 있고 박정희에겐 산업화의 공이 있다고 말씀 하신 분이 계십니다

혹자는 이승만은 건국의 공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고요

어느 것이 맞는지 귀 연구소의 답변이 궁금합니다

 

수, 2017/09/20- 00:09
81
0
0920-1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옛 충주읍성) 중원루 옆에는 대한제국기 마지막과 일제강점기 초대 충주군수를 지낸 서회보의 애민선정비가 있지만 친일인명사전 등에 올라 있는 서회보 관련 설명을 적은 안내판이 없어 시민과 관광객이 비석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있다. 2017.09.19. [email protected]

충주 관아공원 서회보 애민선정비 등 안내판 설치 여론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일제강점기 친일세력을 칭송하는 공적비 등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19일 충북 충주시 성내동 옛 충주읍성인 관아공원 중원루 근처 은행나무 옆에는 가첨석(지붕돌)이 있는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行郡守徐候晦輔愛民善政碑(행군수서후회보애민선정비)’라고 새겨져 있다.

그럼 서회보(徐晦輔·1849~1919년)는 누구인가.

먼저 ‘디지털충주문화대전’에 보면, 서회보는 1849년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충주군 남변면 남부리-‘조선신사대동보’)에서 태어났다.

1907년(조선 순종1) 12월에 영동군수로 재임하다가 충주군수로 전임했다. 1908년 3월 공립충주보통학교 교장을 겸한 그는 충주군수로 있을 때 시설을 만들고 보수해 지역주민의 칭송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1966~1978년)에 따르면 대한제국기 마지막 충주군수였던 서회보는 일제강점기 초대 군수로 계승해 1917년 1월까지 재임했다.

 하지만 디지털충주문화대전 등에는 서회보가 친일파였음은 언급되지 않았다.

서회보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공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포함됐다.

0920-2

▲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옛 충주읍성) 중원루 옆에는 대한제국기 마지막과 일제강점기 초대 충주군수를 지낸 서회보의 애민선정비(점선 원안)가 있지만 친일인명사전 등에 올라 있는 서회보 관련 설명을 적은 안내판이 없어 시민과 관광객이 비석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있다. 2017.09.19. [email protected]

서회보는 1912년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7년에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됐다.

김희찬(비영리단체 충주아이들의하늘 간사)씨는 서회보가 중추원 부찬의가 된 것이 일제강점기 초대 충북도장관이었던 스즈키 다카시(領木隆·1910년 10월~1916년 3월 재임)의 신임이 두터워 가능했다고 봤다.

김씨는 “서회보와 관련해 꼭 기억할 것이 1913년 ‘시구개정(市區改正)’이라는 명분으로 충주군수 서회보의 책임 아래 충주읍성을 허물고 전국에서도 모범적으로 식민도시 충주 시가지를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관아공원 내 서회보 비석과 관련해서는 그의 친일 행적 등을 시민에게 알리도록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는 중론이다.

전홍식 한국교통대 한국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서회보의 ‘애민선정비’를 철거하는 게 최선은 아니다”며 “서회보 애민선정비 외에도 많이 남아 있는 친일파 공적비에 안내판을 세워 후손이 교훈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충북환경운동연대 박일선 대표도 “충주읍성이 없어지고 초창기 충주가 일제식 도시로 형성하는데 서회보가 일조를 한 만큼 그의 행적을 자세하게 표현해 잘 보이는 곳에 보존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호암지 주변 일제강점기에 세운 일본인 또는 ‘친일인사’의 기념비와 위령탑 등도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초창기 수리조합장은 친일 행위와 직간접으로 연계해 있다”며 “관련 문헌을 찾아서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 이들이 애향이나 애민한 것으로 시민이 잘못 알고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호암지 서북쪽 제방 위 산책로 옆(문화동 3887-1) 일대에는 과거 호암지 수리조합장 등의 공덕비 2기가, 그 뒤쪽에는 일본인 잠수부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0920-3

▲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충주시 호암지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충주수리조합장 일본인 스즈키 마사이치의 사업성공기념비가 세워져 있지만 안내판이 없어 일반인은 비석 내용과 스즈키의 인물을 알지 못한다. 2017.09.19. [email protected]

인근에는 스즈키 마사이치(領木政一) 수리조합장의 사업성공기념비가 있다.

이들 비석 주변에는 관련 안내판이 없어 이곳을 찾는 시민과 방문객이 비석의 내용과 비석에 적힌 인물의 행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시 관계자는 “비지정문화재라도 여론이 있으면 안내판은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인근 제천 박달재에는 고(故) 반야월(본명 박창오·1917~2012년) 작사가가 노랫말을 지은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와 관련해 ‘박달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옆에는 지난해 3월 제천의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제천단양지회가 친일행적을 알리는 ‘가수 반야월의 일제하 협력행위’ 단죄판을 세워 일제강점기 반야월 작가가의 친일행적을 일반인에게 알리고 있다.

이 단죄판은 반야월 작가가의 후손이 철거를 요구하며 갈등을 빚고 있다.

[email protected]

<2017-09-19> 뉴시스

☞기사원문: “이게 왜 여기에 서 있죠?”···일제잔재 제대로 알려야

※관련기사

☞충북일보: “‘충절의 고장 충주’ 친일 공적비 웬 말이냐”

수, 2017/09/20- 11:02
165
0

0920-5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전문가들은 현재 위안부 피해자 관련 심의위원회가 단순히 위안부 피해자 등록이나 사업의 적성성을 심의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더욱더 강력한 특별기구가 필요하다는데에 공통된 의견을 피력했다.

국회 여성가족위는 18일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와 관련한 공청회를 열고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다.

현재 발의된 위안부 피해자 관련 개정법안은 크게 △위안부 기림일을 법적 기념일로 지정하는 개정법안 △국가 예산 지원을 통해 추모공간이나 역사관 건립하는 개정법안 △소녀상 등 위안부 피해자 관련 시설물을 정부나 지자체가 보호·관리하는 개정법안 △현재 여가부 산하에서 대통령 소속으로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심의위원회를 두는 개정법안 등이다.

김동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부관장은 “심의위원회 자체가 위안부 피해자만 등록 가부를 결정하는데 한정돼 있다. ‘심의’를 뺀 위원회 이름을 제안했다”면서 “또한 위안부 문제는 여가부만으로 해결 가능하지 않다. 외교적인 문제, 지방자치단체적 문제가 다 포괄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기구로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또한 “기존에 과거사 위원회를 보면 위원회들이 결과보고서로 활동을 종료하면서 진상규명 현황이라든지 국가 해야할 일들을 공고하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법의 경우 심의위원회보다는 강력한 역할을 부여해야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소녀상 등에 대해서 정부·지자체가 직접 나서서 보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도 나왔다. 한혜인 성균관대 역사연구소 연구원은 “소녀상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 조형물이다”면서도 “하지만 국가가 관리했을 경우 시민사회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 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시민사회가 지켜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군 위안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조시현 연구위원은 “예컨대 호적부를 통한 강제동원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데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조사할 도리가 없었던 경우가 있다. 또 국내 조사 뿐만 아니라 해외조사도 어렵다”면서 “특히 위안부 한일 합의에 대한 국제 제소 문제와 관련해서도 일본에서 주장하는대로 청구권 협정이 끝난 것인지 한일 수교회담에 대한 역사적 검증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나 과제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7-09-18> 이데일리

☞기사원문: 여가위, 일본군 위안부 공청회..”심의위보다 강력한 특별기구 필요”

수, 2017/09/20- 11:07
50
0

《 지금, 이 순간 》

제 6회 아남 툽텐 린포체 방한 프로그램 공고

 

“모든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내면에 다이빙하는 시간”

자신에게 뛰어든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있는 그늘과 어둠, 삶에서 반복되고 있는 패턴들을 보게 됨을 뜻합니다.

아남 툽텐의 가르침은 솔직하며 특유의 유머가 넘치면서도 매우 심오합니다.

그는 우리의 참본성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유에 이르기 위해 ‘자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내려놓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종교를 넘어 철학과 인문학으로도 자리 잡은 이 방법은 우리들을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머무르도록 합니다.

◆ 아남 툽텐(Anam Thubten)

티베트에서 태어나 닝마파 불교수행을 하였으며, 9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다르마타재단(Dharmata Foundation)을 설립하여,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다니며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 서울 대중 강연 ●

2017. 10. 27(금) – 10.28(토) /2일 (부분 참가 가능)

@ 국제선센터 7층 금차선원 _서울 목동 오목교역 8번 출구

· 인원 : 170명(입금 선착순 마감)

· 신청하기 > https://goo.gl/8MWVNH

· 자세히 보기 > https://goo.gl/TigHmE

● 침묵 명상 집중수련 ●

2017. 10. 29(일) – 11.03(금) /5박6일 (전일 참가 필수)

@ 만해마을 문인의 집 _강원도 인제

· 인원 : 80명(입금 선착순 마감)

· 신청하기 > https://goo.gl/h58b4r

· 자세히 보기 > https://goo.gl/TigHmE

*장학 제도 : 학생 및 사회적 활동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에게 참가비 지원 (별도 문의)

*행복수업의 꽃, 자원봉사 및 스텝을 모집합니다.

자세히 보기 > https://goo.gl/WBCaa9

[ 문의 ] 010-4292-삼오78 / 070-7788-9808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 “행복수업”을 등록하시고 상담하세요.

(오전 9시-오후6시 상담 및 문자 가능)

 

수, 2017/09/20- 16:13
60
0

0920-11

수, 2017/09/20- 13:49
65
0

[신용카드, CMS (월분납 포함)]
강정인 2만원 김가형 10만원 김광훈 1만원 김도윤 1만원 김봉천 1만원 김영화 1만원 김영훈 1만원 김용범 3만원 김용성 10만원 김원석 1만원 김윤철 1만원 김윤희 10만원 김인규 1만원 김점구 1만원 김종철 10만원 김현수 10만원 류사영 1만원 박기석 1만원 박동비 10만원 박동진 5만원 박정우 1만원 박중열 1만원 박진아 10만원 방선희 2만원 방승옥 2만원 방창오 10만원 부선정 1만원 서하람 2만원 설광호 2만원 성명희 1만원 신국현 2만원 신동의 10만원 심경주 1만원 양경희 1만원 양창민 1만원 여양구 10만원 예신희 20만원 오혜림 1만원 우기동 1만원 원장묵 10만원 원종형 2만원 유수미 3만원 유정완 1만원 윤현지 1만원 이경민 3만원 이광능 1만원 이덕규 20만원 이미현 100만원 이성연 1만원 이은경 1만원 이진호 3만원 이창용 1만원 이태영 1만원 이효진 1만원 임승현 10만원 장혜주 1만원 정기용 1만원 정승윤 1만원 정윤숙 1만원 조규봉 5천원 조성민 3만원 조재광 2만원 조형래 1만원 채주병 1만원 최영규 10만원 최인주 1만원 현상진 1만원 현유진 1만원

[온라인, 계좌이체 등]
고경진 10만원 고민정 10만원 곽영신 10만원 군함도 15만6천원 군함도 십만2천원 군함도스토리펀딩 500만9천222원 권기안 30만원 권일창 10만원 김달범 10만원 김동훈 1만원 김수목 10만원 김영남 30만원 김영선 10만원 김창권 200만원 김태운 2만원 김학주 10만원 김현옥 10만원 남성수 1만원 내년8월기다립니다 2만원 류려영 50만원 문미양 10만원 민춘기+성찬순 200만원 박상임 20만원 박성준 10만원 박영태 백만원 박은주 10만원 박장성 2만원 박정식 2만원 박찬웅 11만9천원 박현윤 10만원 배재휘 10만원 서시우 1만원 서양수 10만원 서정숙 10만원 성정강 10만원 송중기팬연합 500만원 심미라 10만원 아오이사야코 10만원 안창영 10만원 양경희 10만원 여상화 10만원 염홍경 10만원 오은경 10만원 오학순 10만원 유동원 10만원 유연정 1만원 유정환 10만원 윤정옥 3만원 윤종일 100만원 은평주민아카데미 23만8천원 이광찬 국민 10만원 이명호 10만원 이상미 20만원 이석훈 10만원 이성전 10만원 이용술 2만원 이진경 1만5천원 이진희 3만원 이항증 10만원 이형철 10만원 이홍석 2만원 이황노+이은성 20만원 임김희정 국민 10만원 임영환 10만원 장묘천 10만원 장미정 2만원 장오민주 10만원 전찬용 20만원 정수연 10만원 정홍선 10만원 조광오 10만원 조성애 2만원 조은아 10만원 조해붕 10만원 지경섭 10만원 최리순 10만원 최무희 2만원 최선호 30만원 최수철 3만원 최영식 2만원 최의진 2만원 최재흔 10만원 최재흔 10만원 최지훈 3만원 하대현 10만원 한의열 100만원 홍서영 2만원 홍석경 12만3천원

●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명단에 누락되신 분은 사무국(02-2139-0406)으로 전화주시면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목, 2017/09/21- 13:27
9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