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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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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펴내

익명 (미확인) | 화, 2017/09/19- 01:09

[보도자료] [참고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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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ㅣ 민연ㅣ100,000원ㅣ양장 824쪽ㅣ2017.8.29 ISBN: 978-89-93741-17-9

민족문제연구소가 5년여의 작업 끝에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을 펴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사전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두 번째 성과이다. 이 사전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위해 설치한 통치기구 중에서 우선 최고 권력기구인 통감부・조선총독부 본부와 소속관서들을 수록했다.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190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40년간에 걸쳐 존속했던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를 모두 망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수록된 총 248개(통감부 26개, 조선총독부 222개)의 관서와 기구는 일제가 법령 공포를 통해 설치를 공식화한 것으로 모두 『관보』에서 관련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편제는 개별 통치기구를 각 1항목으로 설정하고,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로 대별한 뒤 다음으로 통감부 본부・소속관서, 조선총독부 본부・지방관서・학교・위원회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같은 범주 내에서는 설치년도 순으로 정리했다. 각 항목은 표제어(기구명)・존속기간・성격・연혁・조직과 기능・참고문헌 순으로 서술했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사료검증을 거쳐 확정적인 내용만 채택하였으며, 집필자의 주관적 해석은 최대한 배제하여 객관성 확보에 유의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이 학술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자평한다. 먼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 전체를 종합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이 사전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에 대해서는 본부를 비롯한 일부 부서만이 그 실체가 드러났을 뿐, 상당수의 기구는 극히 소략한 정보만을 알 수 있거나 아예 파악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이 사전을 통해 비로소 일제 식민통치 기구의 구체적인 전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특히 140여개에 달하는 각종 조선총독부 위원회를 정리한 것은 그동안 다수 위원회가 존재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분야 연구에 새로운 단서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위원회는 대부분 한시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심의・조사・자문・징계・조정 등의 기능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안 문제를 처리하거나 긴급한 정책・대책을 마련하고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 주목해야 할 연구 대상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했던 ‘직업적’ 친일파들이 위원회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관변단체나 협력단체에 참여한 정도의 숫자는 아니지만, 이완용 박중양 박영효 박영철 송병준 한상룡 이범익 등 다수의 특급 친일파들이 관료기구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수립 이후 각종 법령이나 정책 규제 용어 등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농촌진흥운동 심전개발운동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 등이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 기부금품모집규제법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그 일부 사례다.
또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한 각종 관청이나 인물 사진 등을 중심으로 다수의 희귀자료도 수록해 사료적 가치를 높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사전이 일제강점기 정책사・제도사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나아가 식민통치 구조나 식민지배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식민지 근대화론’의 본질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문제제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기구 설치와 운영은 외형적으로 근대의 법령 체계와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상당수의 기구는 해방 이후에도 그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통치기구의 근대적 체계와 운용은 식민지 지배의 억압성과 수탈성을 은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식민지배기구가 일본의 통치구조에 조응하여 구축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종속적이고 차별화된 조직체계와 운영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근대화보다는 식민지 경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근대의 외피’를 둘렀을 뿐 그 본질은 식민성에 있었다. 

이번 사전 발간은 1991년 설립 이래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을 병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집단적 작업의 결실이라는 측면에서도 평가가 필요하다. 정부기관의 지원이 아닌 오롯이 시민의 후원만으로 도전을 거듭하며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통감부・조선총독부 기구 전반에 대한 정리는 진즉에 이루어졌어야 할 기초적인 작업이지만 자료의 정보화 없이 개인 연구자들이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연구공동체가 자료의 집적과 집단 작업으로 이를 극복해 낸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시기이면서 근대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일제강점기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각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기초자료 조사와 정리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의 후속작업으로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 일본군·국영기업·관변단체 편』도 이미 추진단계에 들어섰다고 밝히고, 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일련의 사전 편찬사업이 일제강점기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참고자료 (발간사, 서문, 일러두기, 차례)

■ 차례
 

2 발간사

8 일러두기

26 총론

45 통감부 편 (45 통감부 본부, 65 통감부 소속관서)

129 조선총독부 편 (129 조선총독부 본부, 221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441 조선총독부 지방관서, 481 조선총독부 학교, 521 조선총독부 위원회)

753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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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ion id="attachment_154354" align="aligncenter" width="640"]목포 유달산 이등봉 퍼포먼스 목포 유달산 이등봉 퍼포먼스 Copyright ⓒ환경운동연합[/caption] 19일, 유달산 노적봉에서 유달산 케이블카 반대 기자회견 및 퍼포먼스가 열렸습니다. 이번 기자회견 및 퍼포먼스는 목포해상케이블카저지범시민대책위원회와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 국민행동‘케이블카 공화국 저지 전국 행동단’이 함께했습니다. 박홍률 목포시장은 해상케이블카 설치로 관광수요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후 약 10개월 동안 형식적인 공청회와 타당성 조사를 진행하며 일사천리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30년 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고 목포 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케이블카 사업을 시민들과 충분한 공론화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154357" align="aligncenter" width="640"]Copyright ⓒ환경운동연합 이등봉에서 바라본 케이블카 노선(소요정과 일등봉 측면 고화도) Copyright ⓒ환경운동연합[/caption]   목포해상케이블은 유달산 소요정(신안비치호텔 뒤편 왼쪽 산자락)과 목포 앞바다 고하도 사이 2.98㎞ 구간에 설치됩니다. 해상케이블카는 최근 민자사업으로 추진을 결정하고 곧 사업자 공모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러나 목포시가 민간 케이블카 사업자를 위해 시민의 혈세 197억원을 들여 주차장을 건설해주겠다는 것은 분명 특혜일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재정상태가 심각한 목포시가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문제는 이 방식대로 케이블카가 설치 운영된다면, 그 이익이 고스란히 개발업자, 운영자, 사업예정지 등 소수의 소유자에게만 돌아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케이블카 정류장 560평에 10~20평(평균) 규모의 30개~40개의 점포 임대가 이뤄지면역경제 활기로 특수를 누릴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입니다. 이처럼 지역경제 활성화의 확실한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케이블카 추진으로 야기되는 모든 문제와 실패에 대한 책임은 박홍률 목포시장에게 있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목포시민이 받게 될 것입니다. 이날 기자회견에 이어‘케이블카 공화국 저지 전국 행동단’의 케이블카 설치 예정지 조사도 병행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54359" align="aligncenter" width="640"]목포 해상케이블카 저지 기자회견 Copyright ⓒ환경운동연합 목포 해상케이블카 저지 기자회견 Copyright ⓒ환경운동연합[/caption]   염형철 환경연합 사무총장은 현장조사를 통해서, “해발 약 300m에 불과하고 걷기 좋은 유달산을 굳이 케이블카로 올라갈 시민이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막상 유달산 정상인 일등봉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벌써 간척으로 천혜의 바다 풍경이 망가져버린 상태다. 케이블카가 해상케이블카라도 바다 풍경이 아름답지 않은 이상 전혀 관광객을 모으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 [caption id="attachment_154353" align="aligncenter" width="640"]목포 유달산 일등봉 퍼포먼스 Copyright ⓒ환경운동연합 목포 유달산 일등봉 퍼포먼스 Copyright ⓒ환경운동연합[/caption] 박기철 대책위 집행위원장은 “전국이 케이블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는 산으로 간 4대강 사업이라고 할 만하다. 4대강 사업이 불도저식 사업 추진으로 현재 생태계 파괴 및 예산 낭비의 실패로 평가되듯이, 케이블 카 사업도 마찬가지”라고 우려했습니다. 이어서 대책위 위원들과 케이블카 저지 전국 행동단은 일등봉과 이등봉에 올라 ‘유달산 케이블카 반대’현수막을 펼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19일 목포 유달산 일정을 소화한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 국민행동 전국 캠페인은 20일 진안 마이산, 21일 무주 덕유산, 22일 영주 소백산, 23-24일 설악산에서 진행됩니다.
화, 2015/10/2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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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

민변의 당찬 신인, 이주희 변호사 인터뷰

 

이주희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과거 학생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현재는 변호사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온몸으로 실현하는 이주희 변호사가 2019년 첫 회원 인터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제 막 변호사 경력을 시작하게 된 이주희 변호사를 많이 응원해주세요.

 

자원활동가(이하 자활):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주희: 안녕하세요, 저는 1978년생이고, 변호사시험 7회에 합격했습니다. 민변은 2018년에 가입했습니다. 현재는 법무법인 다산에서 소속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신입이 이런 귀한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괜찮을지 저어되었지만 미래의 민변회원님들과 즐겁게 담소 나눈다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왔어요.

 

자활: 민변 가입 시 관심 분야를 체크하는 란에 전 영역을 표시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모든 분야에 걸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이주희: 16개 다 가입이 되어있는 것은 맞습니다. 4월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민변 가입서에 있는 위원회들을 쭉 보는데 정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 없더라고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많고, 개선되어야 할 영역들이 아주 많다는 방증이겠죠? 이러한 문제점이나 개선점들에 대해서 분야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신입으로서 각 위원회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데 섣불리 선택하기도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배우자는 생각으로 다 체크를 하고 간사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메일을 드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답이 없으셨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민변 내부에서 회의하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지금은 전부 다 가입하기를 아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월례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안에 맞는 이슈들이 제기될 때 또는 관심 있는 주제로 세미나나 강연들이 열릴 때 참석하고 있는데요, 각 위원회가 정말 다 특색이 있고 회원 분들이 다들 열심히 활동하고 계셔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민변 위원회들의 활동과 살림살이를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외 특정사안에 대한 TF들에도 참여중입니다. 신입이라 아직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합니다.

 

자활: 어떤 위원회가 제일 기억에 남나요?

이주희: 모든 위원회가 다 기억에 남아요. <노동위원회>가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분들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활동하면 할수록, 손오공의 분신술로 모든 위원회와 계속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9년에는 아마 조금 더 주력할 위원회를 선택해서 활동하게 될 것 같습니다.

2018년 7월 3일 대한문 앞 분향소에 대한 범죄행위 관련 고소ㆍ고발 및 경찰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이주희 변호사

 

자활: 학생운동을 언급해주셨는데요, 변호사님의 과거가 궁금합니다!

이주희: 저의 20대 이후의 삶을 나눈다면, 학생 신분으로 사회 참여 운동을 했던 시기, 정당 활동을 했던 시기,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졸업 등 준비를 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까지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회 참여 운동과 정당 활동을 하면서 정부나 타정당 관계자들, 국회의원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자주 만나면서 제 시각도 약간 균형점을 찾았던 것 같아요. 대립하는 쌍방 모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나름의 선의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방식과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요. 이전까지 저는 일방의 편에 있었던 사람이었잖아요? 중요한 것은 해당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우리의 주장을 그대로 관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갈등하는 당사자들이 있을 때 과연 이 갈등을 어떻게 타협하고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이때의 중재는 과연 누가 어떻게 담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좀 새롭게 들었고요. 법과 제도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들을 조정하고 이왕이면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복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하는 데 법을 다루는 법률가가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각 시기마다 계기가 있었고, 부족함은 있었을지언정 제 선택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처음 사회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 순간에 가졌던 마음이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어요.

 

자활: 사회 참여 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주희: 제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청소년기의 치기였을 수도 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인생의 허무함이랄까, 인간은 이 거대한 우주에 사는 찰나 같은 존재라는 자각이 오랜 시간 저를 지배했어요. 세속적인 부나 명예 이런 것은 일찌감치 저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해서 역사, 철학 등 공부를 많이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든 후에 히말라야에 수행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었죠.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제가 몰랐던 사회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어요. 산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내가 가야 할 진리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기본적인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삶을 다 걸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 외에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참여적 삶이 제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길이었습니다.

 

2018년 9월 4일 사법농단 영장기각 규탄 릴레이 1인시위 4일차에 참가중인 이주희 변호사

 

자활: 사회 참여 운동을 하실 때, 가장 기억에 남는 투쟁 현장은 어디였나요?

이주희: 제가 진짜 데모 열심히 했거든요.(웃음) 모든 경험이 하나같이 소중했는데, 그중에서 정말 인상 깊었던 건 99년도 대우 자동차 총파업이었습니다. 96,97년에 노동악법들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이후에 노동계에서 노동자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정말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투쟁을 벌였던 시기가 있었고요.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즈음이 그 투쟁이 한창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저도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적극적으로 결합을 했던 것 같아요. 특히 99년 대우차 총파업 당시에 부평에서 한 일주일 이상 살다시피 했었어요. 그때 투쟁하시는 조합원들의 가족 분들과 간담회 자리가 있었는데 어떤 조합원의 부인분이 “우리는 그냥 성실하게 나라의 의무를 다하면서 산 것밖에 없는데,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 똑똑한 대학생들이 그 답 좀 알려 달라.”라고 하면서, 제 손을 잡고 펑펑 우시더라고요.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거든요. 내가, 우리가, 이 사회가, 도대체 그분들에게 어떤 답을 드릴 수 있을지… 참 많이 고민이 됐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자활: 그러면, 이번엔 정당 활동에 대해 여쭈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웃음)

이주희: 네 그럼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자활: 저희가 리서치를 해보니, 2004년 총선에서 한국 사회 최초로 대학생 청년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셨었습니다. 혹시 그때의 경험이 어떤 의미를 변호사님께 남겼을까요?

이주희: 우선 청년 비례대표가 제가 출마한 이후에 한국정치에 활성화되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보수정당에서도 형식적이나마 청년을 정치의 주체로 상정하고 청년후보들을 내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죠. 우리가 처음으로 청년 이슈를 새롭게 제기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측면에서는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와 당 정책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처음으로 “등록금 상한제”를 정책적으로 주장을 했었거든요. 당시 전국 대학을 많이 다녔는데 다른 학교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서 고액 등록금 때문에 대학생들이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어요. 특히 사립대는 등록금이 굉장히 높잖아요. 또 예술대학 학생들은 살인적인 등록금으로 인해 계속 아르바이트로, 휴학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고요. 그런 대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어느 정치인도 누구도 해결해 주지 않았고,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해서 한국 사회 최초로 “반값 등록금, 등록금 상한제” 이슈를 던졌고요. 처음 등록금 이슈를 제기했을 때는 정말 택도 없는 소리,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어요. 지금은 심지어는 보수정당에서도 선거 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이제는 그런 대중적 의제로 자리매김한 거죠.

 

자활: 그렇군요,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그 당시 당선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낙선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이주희: 맞아요. 다음날 조간 스포츠 신문 헤드라인이 “아깝다, 이주희!”였어요.(웃음) 제가 비례대표 9번이었는데 0.7% 정도 부족해 8번이었던 故 노회찬 의원까지 당선되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대학생후보의 선거운동은 우리가 꿈꾸는 정치를,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인 진보정치를 알리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았기 때문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어요.

개표 날, 이라크파병 반대집회에 갔다가 당사에 돌아와서 결과를 쭉 지켜보고 있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해요. 민주노동당이 무려 13퍼센트 이상을 획득해서 비례 8석, 지역구 2석 총10석으로 진보정당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게 된, 굉장히 한국 사회에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그 기쁨이 제 낙선보다 훨씬 컸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돌아봤을 때 그때 당선이 안 되었던 것이 그 이후에 더 많은 배움의 시간이 있었으니까 더 나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자활: 그렇군요, 이주희 변호사님은 정말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혹시 변호사가 되시고 나셔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이 있으신가요?

이주희: 일단 제가 다른 선배 변호사님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너무나도 경험이 일천하여 변호사가 무엇이라고 가치평가를 내리기에는 정말 부족하다는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다만 얼마 전 제가 맡았던 사건 하나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시장정비사업추진계획승인처분무효확인소송이었는데, 전통시장을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기존의 시장상인을 내쫓고 최대한의 개발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려는 조합과 구청에 맞서 싸우시는 시장상인 분들을 대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정말 이기고 싶었고,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합과 지자체, 법원, 심지어는 상대편 대리인들에게도 이 사안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본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낡고 허름한 재래시장이지만, 그분들에게 그 시장은 떡과 야채, 순댓국을 팔아 자식들 교육하고 대학까지 보내게 해준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동안 도시의 많은 재개발사업이 실제로는 원주민의 삶과 지역적 관계를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천편일률적으로 개발이익만을 획득하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들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죠. 서울시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도시재생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문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형태로 가야 한다는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따라서 시장재개발도 시장 분들과 지역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형태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이 사건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현재 서울시가 수립하고 있는 도시발전 방향에 명백히 역행하는 사업이었던 것이죠. 많이 울고 분노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생생한 목소리를 법정 안에서 법리로써 전달할 수 있을지, 법률가로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참고로 승소했습니다. (웃음)

 

자활: 소중한 경험이었겠네요. 다음 질문으로 이어 가볼까 합니다. 위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싶어 민변에 가입하셨다고 했는데요, 혹시 꼭 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법이 있으신가요? 

이주희: 아시다시피 개정되어야 할 법들은 정말 많습니다. 가령 미비한 노동관계법으로 인해 고 김용균님 사건처럼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고, 고공철탑농성 같은 목숨을 건 행동을 통해서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그 목소리들을 반영하는 법안개정에 무심하거나 통과도 더딘 상황입니다. 노동관련 법령들이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네요.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에 제정되었으니 올해(인터뷰당시) 제정 70년이 된 의미 있는 해입니다. 제가 대중적으로 처음 삭발을 한 것이 국가보안법 투쟁이었는데, 70년이 지난 올해를 맞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는 남북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면서 평화통일의 분기점이 된 역사적인 해이기도 한데, 여전히 이적표현물 소지, 찬양 고무 등의 이유로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탄압받고 있고, 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미 박물관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법이다고 말씀했으나 실행하지 못했고 노무현 정부의 정신을 일정 계승하고 한반도의 평화협력을 통해 통일의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조차 이러한 평화적 시대 흐름 속에서도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화도 없는 그런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겁니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되거나 기소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상징적인 차원에서 오늘 인터뷰에서는 국가보안법, 그리고 그것을 무기삼아 지배 권력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해온 국정원, 국정원법이 개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활: 빨리 개정되어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현재 법무법인 ‘다산’에 소속해 계시는데, 다산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다산에 들어가게 된 계기를 알 수 있을까요?

이주희: 일단 다산은 전 변호사님들이 민변 회원이시고, 창립된 지 30년이 된 법무법인입니다. 다산인권센터라고 우리 사회 인권 신장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센터를 만든 곳이 다산입니다. 원래는 두 조직이 분화되지 않고 다산 안에 함께 존재하였는데, 이제는 독립되었습니다. 다산은 뿌리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진보, 인권의 신장을 위해 탄생한 곳이었습니다.

 

자활: 다산콜센터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웃음)

이주희: (웃음) 그것은 아닙니다. 다산콜센터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산의 김칠준 대표님은 올해부터 민변 공익변론센터의 대표를 맡고 계시고 경찰청인권위원회 위원장이시기도 합니다. 민변 디지털정보위원회 위원장이신 조지훈 변호사님께서도 다산에 계십니다. 민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인 인권운동과 뗄 수 없는 곳이 다산입니다. 그런 다산의 일원이 된 것이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민변 회의 때에도 다산 변호사님과 함께 참여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고요, 회사에서 민변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십니다. 직원 분들도 더없이 뛰어나시구요. 개별 변호사님들도 인격적으로도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세요. 선하고 열정이 가득하시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시는 그런 분들이셔서 제가 우리 사무실에 있는 유일한 어쏘(고용변호사)이지만 평등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활: 좋은 분위기 속에서 좋은 일들을 수행하고 계신 것 같아 정말 부럽습니다. 지금까지는 ‘변호사’ 이주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번엔 ‘인간’ 이주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이주희: 그럼요. (웃음)

 

자활: 제가 간사님께 들은 바로는 요가 자격증이 있으시다고?

이주희: 부끄럽지만, 네 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11월에 민변에서 강사 분을 초빙하여 명상 강좌도 열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변호사님들, 동료변호사님들, 그리고 외부 참가자분들까지 함께하셨고, 아주 뜻깊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제 삶의 가치관 자체가 명상과 요가와 잘 맞는 것 같아요. 요가는 아사나, 호흡,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의 합일을 찾는 과정이거든요. 저는 사회변화는 결국 인간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변화와 인간의 성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나 할까요. 제도의 변화가 사람을 바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도를 바꾸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 자체가 성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20대 때부터 계속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의 내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 마음자리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 또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삶이 어떤지, 이런 것들이 관심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인 실천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참 많이 일찍 아프십니다. 사회운동이 힘들고 어떻게 보면 메아리 없는 외침을 평생 계속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인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삶을 던져서 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지 못해서 쓰러지고 아프신 것을 참 많이 봤어요. 민변 회원 분들도 마찬가지죠. 더욱이 이런 활동하시는 분들께는 명상이든 요가든 그 무엇이라도 쉼과 휴식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활: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회원분들의 건강도 책임지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습니다. (엄지 척) 평소에 드라마, 영화도 즐겨보신다고 들었는데, 회원 분들에게 추천해주시고 싶은 영화가 있으신가요?

이주희: 최근 영화 중에서는 ‘컨택트’요. 예전에 개봉한 것 말고 2017년에 새로 개봉한 영화인데, 어떤 이는 인터스텔라가 우주에 대한 이과적 해석이라면, 컨택트는 문과적 표현, 즉 인문학적 해석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법률가는 늘 사실관계와 현실에만 천착하게 되는데요, 이 영화는 현실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상상력을 제공해줍니다. 제가 SF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우주인과의 조화가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조금은 현실에서 벗어나 풍부한 상상력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더불어 이 영화의 원작인 테드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도요.

그리고 ‘사일런스’, 일본에서 순교한 서양신부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양심의 자유의 숭고함을 읽었습니다. 혼자보기 좋은 영화입니다.

 

자활: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웃음). 벌써 시간이 2시간이나 지나갔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긴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이주희: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아름답게, 정의롭게 사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2019년에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여기 계신 자활 세 분도 그 길에서 곧 반가운 동료로 만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활: 정말 감사드립니다.

The post [20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민변의 당찬 신인, 이주희 변호사 인터뷰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금, 2019/01/1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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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음악-표지-앞

▲ 양장, 724쪽. 75,000원 / 노동은 편저. 민족문제연구소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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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2▲ 노동은(1946~2016)

목원대학교 교수·음악대학장, 중앙대학교 교수·국악대학장, 한국음악학회 회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음악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6년 12월 2일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한국 근현대 음악 관련 30여 권의 단행본과 400여 편의 논문을 남겼으며 항일음악과 친일음악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업적을 쌓았다. 1996년 단재학술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으로 선정되었고, 2005년 정율성국제음악제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음악기학」·「가정성과 직관성」·「만주음악연구」·「제국의 음악가 현제명」 등을 발표했고, 『한국근대음악사』, 『경기음악』(京畿音樂)1·2, 『지영희평전』등의 저서를 펴냈다.

♦ 330곡의 연대별수록 곡 수
⓵ 1860∼1900년대 : 83곡
⓶ 1910년대 : 68곡
⓷ 1920년대 : 72곡
⓸ 1930년대 : 63곡
⓹ 1940년대 : 44곡

1. 『항일음악 330곡집』 발간의 의의

항일의 현장에는 국내외 어느 곳이든 항일음악이 있었고, 우리 민족은 항일노래를 함께 부르며 굳건하게 단결했다. 항일음악은 일제침략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노래를 가리키며, 시기적으로는 일제의 한반도 침탈 야욕이 노골화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음악이다. 항일음악의 장르는 가요뿐만 아니라 가곡 동요 가극(한유한의 ????아리랑???? 등) 무용(유희 등) 등에 걸쳐 있으며, 군가 혁명가 투쟁가 애국가 계몽가 망향가 추도가 등 여러 형태로 보급됐다.

『항일음악 330곡집』일제침략기 국내와 만주 및 중국 관내, 러시아의 원동, 하와이와 미국 본토, 멕시코 지역 등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노래(악보)를 집대성하고, 연대별로 구분한 최초의 항일노래집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또, 국내외에서 부른 항일가 100여 곡을 새로이 발굴해 수록하였으며, 기존에 알려진 노래를 망라하여 총 330곡을 악보로 복원했다. 작사자와 작곡자의 실명 여부, 가사 원문과 출전, 원곡과 출전, 노래의 성격과 유래, 원곡과의 관계, 보급된 지역, 그 밖의 음악적인 특성 등을 밝힌 점도 특기할 만하다.

 

2. 세계적인 명곡을 활용

항일음악은 국내외 항일 현장에서 가사와 곡조를 창작하여 부른 노래도 있지만 다수는 기존 악곡을 개사하거나 편곡해 활용했다. 기존 악곡은 국내 창가나 민요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들을 많이 선택했다.

국내의 민요를 차용한 노래로는 「광복군 아리랑」 1(아리랑), 「미나리타령」(도라지), 「광복군 석탄가」(사발가), 「광복군 아리랑」 2(밀양아리랑) 등이 있으며, 창작 민요곡으로는 「기쁨의 아리랑」을 보기로 들 수 있다.

서양 곡조로는 하이든의 「황제찬가」, 베토벤의 「이 어두운 무덤에」(In Questa Tombao Squra), 도니젯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의 아리아,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중 「로만체」(Romanze), 미국의 스티븐 포스터의 「스와니강」, 「켄터키 옛집」, 미국에서 포스터와 쌍벽을 이룬 작곡가 헨리 워크의 「조지아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 「파수꾼이여! 종을 울려라」(Ring the Bell, Watchman) 등을 항일가로 개사하여 불렀다. 특히 진취적이고 용맹한 느낌을 주는 조지아행진곡의 곡조는 경성2, 국문창립기념, 만세가, 구주전장 한인군가, 나라보전, 독립군가1, 보국, 신흥무관학교 교가, 작대, 어린이날 노래, 조선의 자랑등 다수의 항일가와 계몽가로 개사되어 널리 불렸다.

「조지아행진곡」 못지않게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많이 부른 외국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오랜 옛날부터 old long since)이다. 해방 직후까지 “동해물과∼”로 부르는 대표적인 애국가 곡조로 사용되었으며 우리 근현대사에서 민족의 애환을 함께 한 노래라 할 수 있다. 독립을 희원하는 「애국가」로,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찬송가로도, 때로는 ‘졸업가’, ‘망년가’ 등 이별을 노래하는 송가로 불린 감상적인 노래였다. 1900년대 전후로 부른 무궁화가」·애국가」·전씨 애국가, 1910년대의 앞 뫼의 칡같이, 1920년대의 신년축하가조선소년군 단가, 1930년대의 주일학교 교가이 모두 「올드 랭 사인」의 곡조를 쓰고 있다.

또 많이 차용된 곡조는 아일랜드 민요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The Last Rose of Summer), 「아! 목동아」(대니 보이 Danny Boy), 독일 민요 「전나무」(O Tanenbaum), 중국 민요 「모리화」 등이다. 특히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나의 사랑 한반도, 도산선생 추도가, 사랑하는 자유등으로 개사되어 불렸다.

심지어 적국인 일본의 창가와 군가도 이용했다. 오오노 우메와카(多梅稚) 작곡의 철도창가용진가1, 용진가3, 운동1, 운동2, 전쟁과 우리, 조상을 위해, 학도권면가, 혁명군행진곡으로, 나가이 켄시(永井建子)의 소남공(小楠公)메데가1로, 코야마 사쿠노스케(小山作之助)의 일본해군소년군가로, 세토구찌 토오키찌(瀬戸口藤吉)의 군함행진곡조선물산장려가2, 카미나가 료오게쯔(神長瞭月)하이카라 부시(ハイカラ)용진가2, 조국산수가, 승전가, 대감자 혁명가, 유격대행진곡으로 개사해 사용했다.

 

3. 항일가를 창작한 작사가와 작곡가

『항일음악 330곡집』에 두 편 이상의 작품이 실린 작사가는 안창호(安昌浩), 김인식(金仁湜), 이범석(李範奭), 김여제(金與濟), 이정호(李正浩), 이두산(李斗山), 이용준(李容俊), 김창만(金昌滿), 김학규(金學奎), 신덕영(申悳泳), 이해평(李海平) 이다. 특히 안창호거국행, 격검가, 만나생각, 모란봉가, 소년남자가, 심주가, 애국가1, 학도가2, 한반도, 혈성대1 다수의 항일가를 작사해 계몽가로서 음악의 효용성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두 편 이상의 작품이 실린 작곡가는 이상준(李尙俊), 이성식(李聖植), 김인식(金仁湜), 이정호(李正浩), 이두산(李斗山), 정율성(鄭律成), 한유한(韓悠韓, 한형석韓亨錫) 으로 이들은 초창기 한국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소속의 한유한은 광복군이 가장 많이 불렀던 광복군 제2지대가」·국기가압록강행진곡」·여명의 노래」·우리나라 어머니」·조국행진곡등을 비롯하여 오페라 ????아리랑????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정율성은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루쉰(魯迅)예술학원 음악학부를 다녔으며, 연안송·연수요를 비롯하여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는 한편 루쉰예술학원에서 성악을 가르쳤다. 1942년 옌안(延安)을 떠나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을 맡고 조국 향해 나가자」 「혁명가등을 창작했다.

 

4. 참고  

1) 국내 작곡가의 창작곡

작곡가 대표곡 (괄호안의 번호는 『곡집』의 연번)
이성식 「격검가」(4), 「학도가」 2(75), 「복수회포」(108, 학도가 편곡), 「독립가」 3(99), 「소년건국가」(110), 「체육」(138), 「창검가」(323)
이상준 「거국행」(1), 「소년남자가」(38), 「의무」(61), 「해」(79), 「깊이 생각」(90), 「우리의 옛 역사」(122), 「제국역사」(129), 「결사전가」 1(154), 「광복군가」 2(289)
이두산 「선봉대」(247), 「광복군가」 1(288)
이정호 「혁명가」 2(277),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321)
한유한 「광복군 제2지대가」(293), 「국기가」 2(294), 「신출발」(303), 「압록강행진곡」(305), 「여명의 노래」(307), 「우리나라 어머니」(309), 「조국행진곡」(315), 「황하강변의 달」(329), 「흘러가는 저 구름」(330)


2)
항일가를 작사하고 독창한 성악가

성악가 대표곡(괄호안의 번호는 『곡집』의 연번)
이용준 「나라 찾으려면」(298) : 베를리오즈, Opera 벤베누토 첼리니, 1막 로만체
「이동녕선생 추도가」(311) : 베토벤,「이 어두운 무덤에」


3)
연대별 대표적인 항일가

연대 대표곡(괄호안의 번호는 『곡집』의 연번)
1860~1910 「거국행」(1), 「격검가」(4), 「대한혼가」(19), 「무궁화가」 2(29)=「애국가」 4(48), 「새야새야 파랑새야」(36), 「소년남자가」(38), 「애국가」 2(46), 「정신가」(70), 「한반도」 2(77), 「혈성대」 1(81)
1910년대 「국민」 1(86), 「국치일노래」(88), 「내 고향을 이별하고」(93), *독립가4(100), 「신흥무관학교 교가」(112), 「연해주빨찌산가」(117), 「작대」(128), 「피묻은 옷」(140), 「혁명가의 노래」(145), 「효순」(151)
1920년대 「단심가」(169), 「독립군가」 2(170), 「두만강」(172), 「부여의 민족아!」(184), 「31 소년가」(187), 「십진가」(191), 「전기가」(204), 「추도가」 1(214), *태평양가(216), 「혼을 위로하노라」(220)
1930년대 「도산선생 추도가」(235), 「민족해방가」(240), 「선봉대」(247), 「우리 영광 끝 없네」(254), 「자유의 기」(257), 「조선의 노래」 3(264), 「최후의 결전」 1(268), 「혁명가」 2(277), 「혁명객의 아리랑타령」(281), 「혁명군가」 1(282)
1940년대 「광복군가」 1(288), 「광복군 아리랑」 2(292), *기쁨의 아리랑(297), 「압록강행진곡」(305), 「조국행진곡」(315), 「조선의용군 추도가」(320),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321), 「진군가」(322), 「창검가」(323), 「혁명군가」 2(326)


4)
최초공개 항일가 104

곡번호 곡명 작사자 작곡자
  1860~1900년대
4 격검가 안창호 이성식
37 생욕사영가 정재홍 스코틀랜드민요(올드 랭 사인)
59 우덕순의노래 우덕순 요한 B. 크래머
65 전씨 애국가 전명운 스코틀랜드민요(올드 랭 사인)
75 학도가 2 안창호 이성식
  1910년대
84 개천절가 (미상) 헨리 S. 톰슨
85 구주전장 한인군가 (미상) 헨리 C. 워크
86 국민 1 (미상) 카를 빌헬름
88 국치일노래 (미상) 스티븐 C. 포스터
91 나라보전 (미상) 헨리 C. 워크
92 나라의 한 아버지들 (미상) 독일민요(전나무)
94 다시 산 태극기 (미상) 윌리암 H. 돈
98 독립가 2 (미상) 퍼시 몬트로즈
99 독립가 3 이성식 찰스 록하르트
100 독립가 4 (미상) 헨리 C. 워크
102 동반도 옛집 곽임대 스티븐 C. 포스터
104 만주들 장백산인 지암피에트로 토놀리
109 3·1절가 (미상) 로버트 로우리
114 앞 뫼의 칡같이 (미상) 스코틀랜드민요(올드 랭 사인)
115 어천절가 (미상) (미상)
116 역행가 강영소 루이스 하트소우
120 옥야삼천리 (미상) 요한 C. 린크
122 우리의 옛 역사 (미상) 이상준 원곡
126 자유로 죽고 살아라 기산 아서 F. M. 커스턴스
139 태극기가 창해소년 필립 필립스
140 피묻은 옷 어느 배우 스티븐 C. 포스터
142 학도권면가 (미상) 오오노 우메와카
145 혁명가의 노래 (미상) (미상)
147 협사가 (미상) (미상)
149 환영가 1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에드워드 F. 림볼트
150 환영가 2 (미상) 조지 F. 루트
  1920년대  
153 거기 정순이 쉬는데 동해수부 헤르만 뢰어
157 경성감옥가 (미상) (미상)
158 경축가 2 (미상) 존 B. 다익스
159 고대 은암 시므온 B. 마쉬
160 고향 동원 제임스 L. 몰로이
161 고향 떠나는 길 (미상) (미상)
162 고향생각 (미상) (미상)
168 내 나라 동해수부 토머스 à 베킷
170 독립군가 2  (미상)  (미상)
172 두만강 동원 제임스 I. 러셀
182 반도가(꽃동산반도) 김태연 윌리엄 스테프
184 부여의 민족아! 김창만 루제 드 릴
185 불속에 김창만 빅터 허버트
186 산지조종 태백산 문양목 한국민요(산염불)
192 애국의 피 (미상) 로버트 로우리
194 어머님 생각 (미상) (미상)
198 을지문덕 (미상) (미상)
201 자유의 노래 1 이정대 정사인
204 전기가 (미상) (미상)
205 조선독립가 (미상) (미상)
208 조선반도 (미상) (미상)
209 조선산수가 (미상) 카미나가 료오게쯔
211 조선의 노래 1 (미상) (미상)
213 천도교 청년당가 이광수 (미상)
216 태평양가 동원농부 아브라함 F. 프랑켄슈타인
220 혼을 위로 하노라 김창만 조지 F. 루트
221 흥사단 나아가 이광수 로버트 로우리
222 흥사단 너도나도 김여제 (미상)
223 흥사단 단가 김여제 헨델
  1930년대  
225 고향이별가 (미상) (미상)
226 국민회가 성우 헨리 C. 워크
227 국치가 이화용 토머스 헤이스팅스
228 근화낙원 (미상) 다이엘 D. 에밋
230 기러기 (미상) (미상)
231 나의 사랑 한반도 (미상) 아일랜드민요(여름날의 마지막 장미)
233 대감자 혁명가 (미상) <카미나가 료오게쯔
234 대장간 박세영 맹오영
235 도산선생 추도가 주요한 아일랜드민요(여름날의 마지막 장미)
239 묵경 한인청년가 황보영주 조지 F. 루트
240 민족해방가 (미상) (미상)
243 사랑하는 자유 (미상) 아일랜드민요(여름날의 마지막 장미)
244 3‧1기념가 1 이세창 에드워드 F. 림볼트
245 3‧1기념가 2 (미상) 아더 S. 설리반
248 선현추도가 (미상) 아일랜드민요(아 목동아)
249 송구영신 대암생 찰스 H. 가브리엘
253 우리나라 한석원 (미상)
256 응원가 (미상) 헨리 C. 워크
257 자유의 기 (미상) (미상)
258 전쟁과 우리 김준 오오노 우메와카
259 정숙추도가 죽혈 (미상)
270 추도가 3 유진태 헨리 W. 베이커
271 충의열사 추도가 대암생 조셉 P. 웹스터
274 한양감옥 (미상) 태인수
276 혁명가 1 (미상) (미상)
278 혁명가 3 (미상) (미상)
280 혁명가 5 (미상) (미상)
282 혁명군가 1 (미상) (미상)
283 혁명군의 노래 (미상) (미상)
  1940년대
289 광복군가 2 (미상) 이상준 원곡
295 군도를 높이 들고 (미상) (미상)
296 군민도라지 (미상) 한국민요(도라지타령)
297 기쁨의 아리랑 (미상) (미상)
298 나라 찾으려면 이용준 H. 베를리오즈
299 무궁화 (미상) (미상)
302 승리의 깃발 배항진 장춘성
310 우리는 조선의 전사 (미상) (미상)
311 이동녕선생 추도가 이용준 루드비히 판 베토벤
313 전가 (미상) (미상)
321 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 이정호 이정호
322 진군가 (미상) (미상)
323 창검가 (미상) 이성식
324 처의 명상 (미상) (미상)
326 혁명군가 2 안정송 로버트 로우리

 

※ 참조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항일음악 중 5곡의 공연영상을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영상보기 클릭). 이 5곡은 지난 2011년 11월 열린 ‘항일음악회’(주최: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 주관: 항일음악회조직위원회·민족문제연구소, 후원: 국가보훈처)에서 공연한 20여 곡 중 선별한 노래입니다. 당시 노동은 교수가 항일음악회조직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지휘하였습니다.

▶ 항일음악회 연주 노래

048-애국가 4, 작사 한국인 공동, 작곡 스코틀랜드 민요, 1900년대
048_애국가4

305-압록강행진곡, 작사 박영만, 작곡 한유한, 1940년대

305_압록강행진곡

목, 2017/08/1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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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역사교과서공익감사청구_모집

국정교과서 국민감사청구 청구인단 참여하기 http://bit.ly/2fl5lTO

월, 2017/08/0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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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대에게 안정적 소득이란?

“얼마를 벌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다 다를 테지만 ‘사회 초년생 때는 적게 벌 수 있다’는 데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5년 10년을 일해도 소득이 높아지지 않는 사회 구조라면 어떨까?

20년 이상 한 직장에 다닌 사람은 678만 원을, 대기업(300인 이상) 직원은 432만 원, 금융 및 보험업 종사자는 578만
원을 평균적으로 매달 받는다고 한다(2016, 통계청). 그런데, 그런 일자리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지금 20~30대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다면 어떨까?

창의적인 일, 고정성을 탈피한 일, 가치 있는 일을 찾아내려고 노력한 결과로 예술, 비영리,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하거나 프리랜서, 스타트업 구성원이 됐는데 월세와 식비도 감당할 수 없는 처지라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자비 없네 잡이 없어-2030세대 노동 이야기’의 네 번째 주제는 ‘안정적 소득’이다. ‘고용안정’, ‘충분한 휴식’ 편에 이은 세 번째 ‘주제 별 토크’로, 지난 12월 2일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DO 카페’에서 진행됐다.

연구자 네트워크 중에서 김정민 씨가 진행을 맡았고, 최태섭 씨가 참여했다. ‘알바노조’ 위원장 이가현 씨가 ‘플러스 1인’으로 함께 했다. (연구자 네트워크 소개 보기)

001

김정민 : 얼마를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지난 자리에서도 얘기했지만 고교 때부터 예술을 전공하다보니 셀 수 없이 다양한 아르바이트, 프리랜서 경험을 했어요. 인디 뮤지션으로 활동한 시절도 있고요. 공익재단과 공공 부분의 안정적인 조직에서 일한 경험도 있지요. 양쪽을 경험해 보니 큰 차이가 보여요. 일단 매달 고정적으로 돈이 통장에 들어온다는 자체가 삶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최태섭 : 저는 직장생활은 그리 오래 하지 않았어요. 다 합쳐서 2년이 채 안 되네요. 연구를 하고 글을 쓰는 ‘저술노동’을 10년 넘게 해 왔어요. 글을 써서 받는 원고료와 강연료 수입으로 살죠. 당연히 ‘안정적 소득’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정도예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고민들

이가현 : ‘안정적 소득’이라는 기준을 저는 실제 삶의 형태로 말하고 싶어요. 제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했을 때예요.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주 3~4일 하면서 월 40만 원을 벌었어요. 세 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친구들이랑 살았는데도 월세로 10만원 가까이 냈고요. 밥 한 끼 먹을 때도 망설여졌어요. ‘6,000원짜리 순대국밥 먹을 것이냐, 2,000원 밥버거 먹을 것이냐’ 하면서요. 그런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게 ‘안정적 소득’이라고 생각합니다.

002

최태섭 : 그거 참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고민이잖아요? 가만히 보면 제가 사는 물건은 거의가 ‘원 플러스 원’이에요. 음료 하나를 그냥 마시고 싶어서 선택할 수가 없는 거죠. 가끔은 “이 돈 모아서 집 살 것도 아닌데…” 싶기도 해요. 사실, 예전에는 임금이란 생활비 빼고 저축해서 집도 사고 그런 거였어요. 지금은 설사 억대 연봉을 받아도 서울에 아파트 사기 어렵잖아요? 심지어 중위소득도 안 되는 돈을 번다면 ‘돈 모아 집 산다’는 생각은 아예 지우고 살죠. 최소한의 생활비, 보험을 들거나 약간의 저축 할 정도를 원하는 건데 주위를 보면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김정민 : 최근 통계(2016, 통계청)를 보면 우리나라 중위소득은 월 209만 원이래요. 가장 큰 소득부터 적은 소득까지 한 줄로 놓았을 때 정 가운데가 월 209만 원이라는 거죠. 20대만 보면 중위소득이 172만 원으로 확 떨어져요. 15~35세가 가장 많이 종사하는 업종은 숙박음식점업, 그 중에서도 서비스업이고요. 사실상 ‘알바’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인 거죠. 통계보다 현실은 훨씬 더 열악할 거예요.

003

이가현 : ‘알바’가 학생 때 잠깐 하는 일이 아니라 20~30대, 그 이후로도 이어지는 노동이 되고 있는데 그 노동환경이 극도로 열악하니까 점점 힘든 사람이 많아지는 거예요. 알바노조에서 상담을 받아보면 사실 근로조건만 가지고 진정까지 가지는 않아요. 인격적 모독을 당했는데 마침 불법적인 근로조건까지 있다면 겨우 용기내서 진정 하는 정도죠. 그런데도 그 중 처벌이 되는 건은 1%도 안 돼요.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다른 법은 지키라고 할까, 이해가 안 돼요.

김정민 : 우리는 자라면서 노동교육을 거의 받지 못 했잖아요. ‘돈’의 가치가 이렇게 절대적으로 큰 사회인데 실제로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임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채로 사회에 나오고요.

학자금 대출에 눌린 첫 세대

최태섭 : 요즘 ‘영 포티’라는 말이 유행하기에 ‘그럼 지금의 2030세대는 더 나이 들면 뭐가 되나?’ 하고 생각해 봤어요. ‘뭐긴 뭐야, 계속 88만 원 세대지.’라는 답이 나오더라고요. 나이가 들어도 자연히 임금이 오르거나 고용이 안정적으로 바뀌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딱 그 경우예요. 거기다 쓸데없이 ‘가방끈’은 길어졌는데, 덕분에 빚도 많이 지게 되었죠.

004

김정민 : 저는 20대 때, 은행에 가서 “학자금 대출을 갚기 어려우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물어봤더니, “개인 파산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이게 20대에게 할 말인가?” 싶더라고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어느 날 돈이 생겨서 갚았어요. 인디뮤지션으로 활동할 때 만든 곡이 갑자기 팔려서요. 그런데도 기쁘기보다는 허탈했어요. 그렇게까지 나를 짜증나게 하던,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던 금액이 어떤 관점에서는 별로 큰돈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최태섭 : 저는 지금도 갚고 있어요. 이제는 좀 무디어졌지만 한 때는 장학재단에서 오는 독촉 문자 받다가 미쳐버릴 것 같기도 했어요. 친구가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라는 책을 썼는데, 딱 제가 그렇죠. 공부할수록 빚이 많아지고 가난해져왔으니까요. 물론 안했다고 부자가 되진 못했겠지만요.

이가현 : 제 주변에는 ‘취업후 상환’, 그러니까 취업한 이후부터 원금을 갚기 시작하는 조건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았는데 취업을 못 해서 10년이 넘게 이자만 내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동안 낸 돈은 엄청난데 원금은 그대로 있는 거죠.

005

김정민 : 그거 아세요? 지금 40대 이상 세대는 대학 학자금 대출 부담이 우리처럼 크지 않아요. 90년대까지만 해도 등록금이 그렇게 비싸지 않았거든요. 문과 쪽은 학기당 200만 원이 안 되는 곳이 많았어요. 지금 2030세대가 소득의 상당 부분을 학자금 대출 갚는 데 쓰면서 산다는 자체를 모르는 분들도 많다니까요.

최태섭 : 그런 부분들이 결국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게 무서워요. 생활에 여유가 없으면 경험의 폭도 제한되고, 성취에도 영향을 주죠. 예를 들어, 책을 쓰기 위해서 다른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 책 값 때문에 필요한 것을 다 못사는 일이 많아요. 그런 영향은 제가 내놓는 성과물에도 영향을 줄 수 있잖아요? 그렇게 효과들이 쌓여가는 거죠.

경조사비 내고 계세요?

김정민 : 받을 돈을 제 때 못 받아서 수입이 불안정해지는 경우도 있죠. 뮤지션으로 일할 때 그런 점이 화가 났었어요. 헬스 트레이너 하는 분에게도 들었는데, 제 때 돈이 안 들어오니까 계속 현금서비스를 받게 된다는 거예요. 현금서비스는 이자도 비싸지만, 신용에도 악영향을 주잖아요? 우리 사회는 그렇게 신용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왜 다른 사람의 신용을 지켜주는 데 무감각할까요?

006

이가현 : ‘최저임금’에 대한 반응에도 모순을 느껴요. 일본 노동조합 활동가에게 들었는데, 거기서는 우리처럼 최저임금에 딱 맞춰서 임금을 주는 사업장은 거의 없다는 거예요.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생활에 맞는 임금 수준을 만들어 간다고 해요. 사실 최저임금은 그야말로 국가가 정한 ‘최저’ 선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언젠가부터 모든 사업장이 일제히 최저임금에 맞춰서 임금을 줘요.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고, 얼마 안 가서 ‘정부가 정해준 임금’으로 통할 지경이죠.

김정민 : 우리 사회에서는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학생에서 노동자로, 준비도 없이 내던져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갑자기 ‘어른의 도리’를 하라는 압박까지 받고요. 결혼식, 장례식 때 경조사비 내는 일이 대표적이죠. 저는 30대에 접어드니까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인가?’하는 생각이 심각하게 들더라고요. 두 분은 어떠세요?

이가현 : 종종 있어요. 사실 3만원만 해도 알바 시절 월급의 10% 수준이니까 부담이 되죠. 그 용도로 매달 얼마씩 떼서 모아 놓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최태섭 : 사실 저는 경조사에 많이 못 가요. 정말 친한 친구의 경우를 빼고는요. 가서 축하하거나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은 들어도 경조사비 때문에 포기하는 거죠.

김정민 : 인간의 도리를 못 하는 것도 문제지만 또 다른 측면도 있어요. 국민연금을 안내면 미래소득의 차이가 커지는 것처럼, 지금 경조사비를 못 내면 큰일을 당했을 때 함께 해 줄 사람이 적어지는 거니까요. 금전적 도움을 떠나서 심정적으로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 자체도 정말 힘든 일인데, 사실은 미래의 안정성도 침해되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많은 부분이 유실된 채로 살아간다는 걸 윗세대들은 모를 거예요.

노동을 보호 받은 경험이 없다

007

최태섭 : 저는 “얼마를 벌어야 적정하게 살 수 있을까?”는 생각을 평소에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월 150만 원만 안정적으로 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행도 한 번씩 가고 필요한 물건 사고 부모님 아프실 때에 대한 대비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액수는 중위소득에도 못미쳐요. 평균 소득에는 더더욱 못 미치고요. 적정한 소득에 대한 감을 잡는 게 어려운거죠.

이가현 : 저는 지금 그보다 못 벌지만, 부모님과 같이 살아서 주거비가 안 들기 때문에 아직은 괜찮아요. 월세를 내는 친구들은 저보다 많이 벌어도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알바노조가 ‘최저임금 1만 원’을 몇 년째 주장해 왔는데, 물가와 주거비가 이렇게 계속 오르다보면 그 주장이 관철돼도 생활수준이 얼마나 나아질지 모르겠어요.

김정민 : 저는 그래도 서울에서 살려면 월 200만 원 소득은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조직에 속해서 200만 원을 받는 것과 프리랜서로 200만 원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르거든요. 4대 보험료의 직장 부담분과 퇴직금 때문에도 그렇지만 조직에 속해 있으면 은행 대출 이자도 상대적으로 낮고, 소득공제도 받잖아요. 제가 얼마 전부터 대학원에 다니는데, 학비도 소득공제가 되더라고요. ‘아, 소득이 많고 비싼 학교에 다니면 받는 혜택이 더 크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최태섭 : 지금 2030세대 중에는 자기 노동에 대해서 보호를 받아 본 경험 자체가 없는 사람이 많아요. 조직에 들어갈 때 환대를 받고, 신분 보장을 받고, 동질적인 혜택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거죠.

이가현 : 맞아요. 편의점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유통기한이 지나서 폐기할 음식들을 먹게 해 주는 걸 혜택으로 알아요. 어딜 가도 식대 주는 곳이 없으니까 그나마 낫다는 거죠. 기껏 경험하는 복지가 폐기 음식이라니, 다른 상상을 해 볼 수 없다는 점이 슬퍼요. 그런 점에서 저는 요즘 논의되는 ‘기본소득’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이 많이 불안해해요. 자동 주문 기계들을 도입하면서 인력을 줄이고 있거든요. 남은 직원들의 노동강도는 강해지고요.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임금을 보전해 주는 역할도 하지만,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고, 문제제기 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도 할 거라고 봐요.

008

‘잠재력 대신 잠과 재력을’

최태섭 : 예전에 1980년대에 대학 다닌 세대인 학자에게서 “왜 너희는 그렇게 나라 걱정을 하니?”라는 말을 들었는데, “다른 비빌 언덕이 없으니까 그렇죠.”라고 답했어요. 최소한의 권리라도 지키기 위해서 의지할 곳이 국가밖에 없는 거죠. 사실, 우리 대화의 처음 질문인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내지 못 했는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살 수 수준이 적정 소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수준을 사회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요.

이가현 : ‘최저임금 1만 원’ 슬로건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잠재력 대신 잠과 재력을’이라는 거예요.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고, 최소한의 소비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정도가 안정적인 소득이 아닐까요?

김정민 : 멋진 말이네요. 언젠가 나중에 하려고 미루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의 안정성과 인간적인 삶을 누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돼요. 저는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노동과 실질적인 경제 교육의 부재’가 정말 큰 문제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 발언권을 우리가 획득하는 수밖에는 없잖아요? 일 하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해야 하는 거죠. 알바노조가 만들어진 것처럼 더 다양한 대변자들이 있어야 하겠고요.

009

이날의 대화는 지금까지의 연재 토크 중에서 이 날의 주제와 분위기가 가장 무거운 편이었다. 각자가 말한 ‘안정적 소득’의 수준이 결코 높지 않음에도 그랬다는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최저임금 1만 원, 노동교육 등 해법이 가장 다양하게 제시된 대화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미 문제의식이 깊어져 있고, 더 많은 논의를 할 준비가 돼 있는 주제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다음 편은 5회 ‘조직 노동이란?-월급쟁이와 머슴의 차이는 뭔가요?’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해피빈 공감펀딩(후원) 금액은 전액 프로젝트 진행 및 출판 비용으로 활용되며, 추가 수익이 발생할 경우 재단법인 희망제작소의 공익사업에 전액 사용된다.

* 이 시리즈는 2030세대의 새로운 노동에 대한 고민을 담은 공간에서 진행됩니다. 4회는 서울 동대분구에 위치한 코워킹스페이스 DO카페에서 진행됐습니다.

– 정리 : 황세원 | 시민상상센터 선임연구원 · [email protected]
– 사진 : 이우기 사진작가

월, 2017/12/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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