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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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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익명 (미확인) | 목, 2017/09/14- 13:34

 ◎ 2부 [인터뷰 제 1 공장]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 이준식 관장 (근현대사기념관)

김어준 :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이죠. 그런데 이 날이 아니라 이번주 일요일 9월 17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대정부 질의에서도 국무총리 상대로 이 질문이 나왔었는데, 국군의 날 변경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 관장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준식 : 예, 안녕하세요.

김어준 : 9월 17일이 무슨 날입니까?

이준식 : 예, 임시정부 산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군된 날입니다.

김어준 : 광복군 창군날이다. 그러니까 국군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던 광복군이 처음 만들어진 날이 국군의날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네요, 한마디로. 그 말을 듣자마자 설득되려고 하는데 그게 그러면 언제입니까?

이준식 :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군되었습니다.

김어준 : 그런데 임시정부는 그 전부터 있었지 않습니까?

이준식 : 예, 임시정부는 1919년에 출범했는데요.

김어준 : 그래서 그걸 건국으로 봐야 된다. 뭐 이렇게.

이준식 : 요즘 그런 얘기도 나오고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건국이라는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마는, 1919년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는데 임시정부가 1920년에 바로 독립전쟁 원년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1920년에 우리가 일제에게 전쟁에서 져서 국권을 빼앗겼으니까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해야 된다. 그래서 독립전쟁이라고 하고 1920년이 독립전쟁 첫 해다. 전쟁을 하려면 군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임시정부 산하의 국군을 만들겠다는 구상에 착수를 하는데, 당시 중국이 남의 땅이니까요. 남의 땅에서 군대를 만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김어준 : 다른 나라, 그 나라가 인정해 줄 리가 없지요.

이준식 : 예, 인정해 줄 리가 없어요. 군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하고 연계해서 국군을 활용하겠다.

김어준 : 임시정부하고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독립군들을.

이준식 : 만주독립군을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켜서 국군을 만들겠다는 그런 구상을 갖기도 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국군을 만든다는 게 임시정부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꿈이었는데요, 그 꿈이 1940년에 실현이 된 겁니다. 그래서 임시정부 산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건하게 되죠. 정식으로 군대를 만듭니다.

김어준 : 사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모든 망명정부가, 그 나라에서 정부를 두지 못하고 망명하게 되는 망명정부가 결국은 자기들 원래 땅을 점령하고 있는 식민본국이든, 또는 그 순간 침략해 온 나라든 간에 상대해서 이런 군대를 만들려고 하죠. 군대가 없으면 싸워서 다시 되찾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1940년에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공식적으로 창군하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실제 그때 부대라고 할 만한 인원도 있었습니까?

이준식 : 처음에는 주로 사령부 중심의 군대였습니다. 장교가 더 많았던. 사병보다 장교가 더 많았던, 어쩔 수 없죠. 왜냐하면 당시 중국 안에 사병이 될 수 있는 우리 동포수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김어준 : 동포 수가 있다 하더라도 몰래 사병이 돼야 하는 거니까.

이준식 : 그리고 대개 독립운동하시는 분이 나이가 많으니까 사병은 상대적으로 적었죠. 그러면서도 한국광복군이 계속 사병을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요. 그래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그래도 꽤 많은 병사들을 확보하는 성공을 했고요.

김어준 : 그런데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땅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창군됐다고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실체가 적더라도 생겨버리기 시작하면 가만두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준식 : 많이 알려지기로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왜냐면 자기 땅에서 군대 만들겠다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엔 견제를 많이 했습니다. 견제하는 방법이 한국광복군을 만들되 중국 국민당 군의 통제 아래에 두겠다. 요즘 말로 하면 통수권, 작전권이죠. 통수권을 중국 정부가 갖는다는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을 승인하려고 하니까.

김어준 : 굉장히 뭔가 서글픈데요. 왜냐하면 지금도 한국은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임시정부가 창군할 때부터 중국이 또 작전권을 행사하겠다고.

이준식 : 그래서 임시정부가 단안을 내립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 광복군을 창군하는 거죠. 근데 창군을 했다고 하더라도 활동을 하려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원하기는커녕 계속 견제를 하니까요, 방해를 하니까요. 할 수 없이 광복군의 통수권을 중국 국민당에게 넘겨줍니다. 굴욕적인거죠. 사실 따져보면.

김어준 : 이해갑니다, 저는. 그렇지 않을 방법이, 도리가 별로 없을 것 같으니까요.

이준식 : 그래서 한 2-3년에 걸쳐서 임시정부하고 광복군이 통수권을 되찾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많이 씁니다.

김어준 : 지금 역사의 복사판이네요.

이준식 : 네, 1944년에 드디어 통수권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1944년에 정말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되는 거죠.

김어준 : 선배들이 훨씬 낫네요, 4년 만에 찾았으면.

이준식 : 네, 4년 만에 찾았으니까 굉장한 성과죠.

김어준 : 저희는 지금 육십 몇 년 동안 못 찾고 있는데. 어쨌든 지금 우리 국군이 미군에게 작전통제권을 넘기고, 전작권을 넘기고 아직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는 오리지널 버전이 광복군 창군 때도 있었다.

이준식 : 한국광복군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임시정부 산하의 자주적인 군대가 되려고 굉장히 애를 많이 썼고, 또 그것을 실현했다는 겁니다.

김어준 : 그게 싫어서 일본의 소위 강점이 싫어서 거기까지 가서 군대를 만들어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또 중국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체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아요, 그 분들이. 어쨌든 4년 만에 또 되찾았다. 그러면 실제 중국군, 당시 인민군하고 같이 작전을 했다든가. 그러니까 중국이 당신들은 별개의 군대라고 인정을 해야 같이 작전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연대작전을 했다는 기록은 있습니까?

이준식 : 1944년에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군사협정을 맺고요.

김어준 : 군사협정을 맺었다. 확실하게 인정한 거네요. 협정을 맺었다면.

이준식 : 중국이 독자적인 군대로 인정을 한 거죠. 그리고 1943년, 1944년 무렵부터는 다른 연합국 군대인 영국군, 미국군과의 공동작전도 추진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는 유명한 한국광복군의 독수리작전이라는 게 미군과 공동으로 추진이 됩니다.

김어준 : 이건 뭐 부인할 수 없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군대가 확실한데, 그럼 지금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은 뭘 기념하기 위해서 된 겁니까?

이준식 :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1950년, 그러니까 6?25전쟁 와중이죠. 6?25 전쟁 때 육군 제 3사단이 38선을 처음 돌파해서 북진에 성공한 날이다. 그래서 그 날을 기리기 위해서 10월1일을, 1956년 이승만 정부 땝니다. 이승만 정부 때 10월 1일을 국군의날로 지정했다는 얘기가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1954년인가요, 1953년인가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데 이게 10월 1일입니다. 그래서 10월 1일이 어쨌거나 의미 있는 날이다. 그래서 1956년에 처음으로 국군의날로 지정을 했습니다.

김어준 : 38선 돌파한 것도 의미는 있지 않습니까?

이준식 : 38선돌파도 의미가 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것도 의미가 있긴 하죠. 그런데 그런 날이기 때문에 국군의날로 지정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김어준 : 사실 국군의날 하면. 보통 무슨 날, 한글 창제 했던 날을 한글날이라고 하는 거죠. 제헌절하면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이것도 국군의날 하면 당연히 막연히 국군이 창설된 날인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준식 : 국군이 창설되거나 아니면 국군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김어준 : 38선을 돌파한 날이군요, 이게.

이준식 : 그래서 국군이 역사가 시작된 날을 찾다보니까 그래도 광복군 창건일이 가장 어울린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김어준 : 당연히 그런 데 있어서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거든요? 애초에 광복군이 1940년에 창설이 되고 중국과 군사협정도 맺었고 미군과 당시 공동작전도 했다면 규모는 작더라도 국군의 뿌리가 확실하니까. 한글도 지금 한글하고 똑같지는 않거든요, 되돌아가면. 문자도 달라요. 어법도 다르고. 하지만 그 때 창설, 만들어진 게 확실하니까. 그런데 보수진영에서는 반대한다고 하는데 왜 반대하는 겁니까?

이준식 : 보수진영에서 반대하는 건 건국절 논란하고 직결이 되는데요, 보수진영에서는 대한민국 역사가 1948년 8월15일부터 시작됐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은 무관하다고 얘기하니까요. 그러니까 국군의 날도 광복군 창건일로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김어준 : 당연하네요. 그걸 인정하는 순간 48년이 아니라 40년대부터 군대가 있다고 해야 되니까요.

이준식 : 예. 거슬러 올라가면 광복군이 창건되기 이전에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인정을 해야 되고 그게 싫은 거죠.

김어준 :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인정하기 싫은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보수진영에서.

이준식 : 대한민국 건국은 독립운동과 무관하다고 보는 겁니다. 독립운동 때문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게 아니라, 흔히 말하는 건국세력이라고 그러죠. 건국세력에 의해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주장을 하고 싶은데 그 건국세력이라는 게 내용을 보면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친일파고 하나는 정치깡패입니다.

김어준 : 아, 그랬습니까? 정치깡패 얘기도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이준식 : 정치깡패가 이른바 건국과정의 반공반탁 운동을 주도한 세력 중에 하나거든요. 우리는 정치깡패라고 하지만 그쪽에서는 애국세력이라고 하겠죠. 애국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다.

김어준 : 지금 가스판 들고 아스팔트에 나오시는 분들이 가끔 있었잖아요? 프로판 가스통 들고. 그걸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한쪽에서는 그분들이 애국세력인 것이고 무관한 제삼자가 보기에는 정치깡패 아니냐. 그런 세력과 친일파가 소위 이승만 정권의 탄생에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 많이 하죠. 우리 보수진영의 뿌리가 친일파에 맞닿아있는 거 아니냐.

이준식 : 친일파라는 말을 하기 싫으니까 건국세력이라는 말로 미화하는 거죠.

김어준 : 실제 친일파라고 불릴만한 세력이 이승만 정권의 주축을 이뤘습니까?

이준식 : 예를 들어 군만 얘기하자면요, 이른바 국군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1960년까지 국군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육군참모총장을 보면 모두 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습니다. 60년까지 그랬습니다.

김어준 : 박정희 전 대통령도 뭐 일본 장교 출신 아닙니까.

이준식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지는 않았으니까. 육군참모총장 명단만 놓고 보면 십 몇 년 동안 만주군 내지 일본군 출신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결국 육군의 주류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얘기죠.

김어준 : 만주군이라는 게 독립군 때려잡던 군이거든요, 정반대로. 독립군이 아니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게 아니에요, 만주군은.

이준식 :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군의 국군이죠.

김어준 : 그 역할이 독립군 때려잡는 것 아니에요.

이준식 : 예, 독립군 때려 잡는. 항일세력 때려잡는 게 만주군이 하는 일이었죠.

김어준 : 다른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보통은 초기 건국세력들이 대부분 이런 역사를 거친, 터키도 그렇고. 대부분 독립운동하던 쪽에서 초기 대통령을 내놓거나.

이준식 : 군도 독립군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는 게 정상적인 거죠.

김어준 : 너무 당연한 건데 우리는 독립군을 때려잡던 쪽에서 군을 장악했었다, 초기에.

이준식 : 그러니까 국군의 뿌리로 독립군과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게 된 거죠.

김어준 :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신 걸로 저는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추천받았는데, 선생님을.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게 된 겁니까?

이준식 : 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도 하고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니까 당연히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요.

김어준 : 그리고 부모님한테 얘기를 들으셨겠군요, 쭉.

이준식 :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독립운동사를 공부를 했고요. 독립운동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김어준 : 그럼 혹시 부모님도 광복군 출신이셨나요?

이준식 : 어머니가 광복군 출신이셨습니다.

김어준 : 어머님이요? 아버님이 아니고요? 그럼 혹시 어머님의 아버님 외할아버지가 혹시.

이준식 : 외할아버지도 광복군이셨고요.

김어준 : 그쪽 핏줄이시군요. 우리는, 저도 어릴 때 독립군에 대해서 별로 안 배웠어요. 그냥 독립운동을 조금 했다. 그게 어마어마하게 긴 장이어야 할 것 같은데. 한 두 페이지 배웠던 것 같아요.

이준식 : 지금은 많이 가르치죠. 왜 그러냐 하면 1987년 헌법이 개정되지 않습니까? 우리 현행 헌법인데, 현행 헌법 전문에 뭐라고 되어 있냐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 후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서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완수해야 될 사명을 갖고 있다’고 적어놨거든요. 거기서 독립운동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헌법 전문에 나와 있으니까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후에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지금은 독립운동사를 많이 가르칩니다.

김어준 : 알겠습니다. 중간에 제가 잠깐 말씀드리면 만주군 출신 쪽의 반론권도 저희가 보장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런 얘기를 중간중간 많이 하는데 반론으로 연락 오는 적이 사실 거의 없어요. 거의 없긴 한데, 자, 이래서 10월1일이 국군의날이면 당연히 국군이 창설된 날이어야 하는 게 맞고, 논리적으로. 다른 날들은 다 그러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따져보니 있다실제로, 광복군이 창건된 것이. 그리고 주변국에 의해서 독립된 군대로 인정도 받았고 협정을 맺은 기록도 있고 공동작전의 기록도 있다. 게다가 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날이 의미가 있으나 실제 그 국군이 소위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한 걸로 보여지는, 그런 국군의 구성이 일본군이었지 않느냐. 일본군 출신, 혹은 만주군 출신이었지 않느냐. 그러니 법통을 따지자면 당연히 9월 17일로 옮기는 게 맞다. 이 정도로 요약하면 되는 거죠?

이준식 : 예, 정확하게 요약하셨습니다.

김어준 : 제가 요약은 잘 해요. 깊이는 없는데. 그런데 이런 반론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게 왜 이렇게 연결되는지 논리적으로 머릿속에 구성은 안 되는데, 국군의날을 그렇게 바꾸면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사실이, 그 사실의 의미가 퇴색된다. 왜 퇴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준식 :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 주장을 하더라고요

김어준 : 그러면서 북한에 정통성을 주게 된다. 이것도 모르겠는데. 북한에 정통성을 주는 것은 오히려 지금 국군의날 아닌가요? 북한에서는 지금 독립운동을 자기들이 주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준식 : 예, 그건 사실이에요. 북한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게 지금 대한민국에서 강조하는 독립운동이거든요. 1919년에 대한민국이 출범했다고 하는 것보다 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김어준 : 인민군 창설되기 전에 무슨 소리냐 지금 광복군이 있었는데.

이준식 : 광복군이 창건됐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정통성 문제에서 유리한 거죠. 그런데 왜 스스로 불리한 쪽을 택하려고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김어준 : 지금 주장은 불리해요. 왜냐하면 친일파가 합참, 군을 통솔했던 군대를 가지고 정통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북한에서는 어쨌든 독립운동을 하던 쪽이, 북한 쪽 사이드에서는 군의 기본창설 단위가 됐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불리하죠. 바꿔야 되는 거였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의미를 퇴색시킨다. 이게 무슨 주장입니까? 어떻게 이해하셨어요?

이준식 : 보수세력에서 흔히 그렇게 얘기하는데요, 해방되고 난 다음에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유엔에서 결의를 합니다.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해라. 원래 유엔 결의안에서는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게 잘 안됩니다. 북쪽에서 선거를 거부하거든요. 그래서 다시 유엔에서 그러면 선거가 가능한 남쪽에서만 총선거를 해서 정부를 구성하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유엔 결의안에 보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 이렇게 돼 있습니다.

김어준 :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가 아니라.

이준식 :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가 아니라, 그런데 보수세력에서는 그걸 자꾸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해석을 하는 건데요. 정확하게 문구가 어떻게 되냐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 그리고 영어 표현에 주목을 하면요 정부입니다. government입니다. 국가가 아니라.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 이렇게 되는 거죠.

김어준 : 이해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이준식 관장님이었습니다.

이준식 : 예, 고맙습니다.■

<2017-09-13> tbs

☞기사원문: <김어준의 뉴스공장> 이준식 “‘광복군 창설일’이 국군의날이 되어야…”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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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 사진 52점 전시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 독립운동 사적지 담겨…온라인 또는 전화로 사전 예약 후 관람 가능

[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강북구(구청장 박겸수)가 8월18일까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최한다.

근현대사기념관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사진전은 쿠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으며 김동우 작가가 촬영한 52점의 사진이 준비됐다.

김 작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해 왔다.

독립운동가들은 먼 타국의 땅에서 굶주림, 차별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한인교회, 한글학교 등을 세워 정체성을 유지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자금 모집 등 활동을 해 왔다.

전시회에서는 쿠바 마나티 항구와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등 한인 이주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와 3·1운동 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던 미국의 타운홀,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의 묘적지 등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쿠바와 멕시코,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관람 희망자는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예약하거나 전화신청 후 이용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이번 전시회가 세계 곳곳에서 광복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했던 숨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고 기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관심 있는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람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2021-05-21> 아시아경제

☞기사원문: 강북구 ‘쿠바 이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개최

화, 2021/05/2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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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종교를 중광해 독립운동가들의 스승으로 불렸던 홍암 나철의 일대기인 <나철평전>을 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조현 기자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역사가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국무령 이상룡, 작사가 이은상, 최초 비행사 안창남, 마라토너 손기정, 이동휘, 정인보, 안희제, 지청천, 이범석, 지석영, 이동녕, 김규식, 신익희…. 독립운동사의 주역인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종교인으로,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1863~1916)의 대의를 따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종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철의 삶을 조명한 <나철평전>(꽃자리 펴냄)을 낸 김삼웅(78)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부역자 5천명 가운데 종교인이 200여명인데, 대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청산리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종사 등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소가 아직도 간도 들판에 방치돼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대종교 부활시킨 스승 ‘나철평전’ 펴내
김좌진·홍범도·이회영·신채호 등등
수많은 항일지사들 대부분 ‘대종교인’
“친일부역자 종교인 중엔 한명도 없어”

박정희때 고문 후유증으로 집필 힘들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전율 느끼며 써”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 <한겨레> 자료사진

“2·8독립선언과 3·1혁명을 촉발한 대한(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주도했다. 또 3·1혁명 이후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정원 35인 중 28인이 대종교인이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항일투쟁의 주력도 대종교인들이었고, 국학·역사·한글운동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그 뿌리가 나철 대종사다. 독립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첫번째 인물로 꼽힐 만한 나철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김 전 관장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온몸을 민족의 재단에 바쳐 신자 10여만명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종단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대종교와 나철을 언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최제우, 황현,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안창호, 김성숙, 한용운, 안중근, 김창숙, 여운형, 함석헌, 장준하, 장일순, 송건호, 김대중, 노무현, 신영복 등 줄잡아 40여명의 평전을 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타자를 칠 줄 모른다. 오직 손글씨로만 써왔다. 근래 들어서는 손이 많이 떨려 원고 작업이 더욱 어렵다.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전선>을 발간하면서 끌려가 고문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떨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나철평전>에는 ‘한 놀라운 인간’에 대한 필자의 전율이 스며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석학 왕석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살에 과거 급제해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을 맡았다. 33살 때 징세국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기초로 입산수도한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비밀결사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했다가 1907년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외딴섬인 전남 신안 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민심을 두려워한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나철은 일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라성 같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는 국권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 20여만권을 압수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밀반출하며 1918년까지 민족말살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철은 이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망명해 백두산 인근 청파호로 본부를 옮겼다. 대종교 신자가 수십만명으로 늘자 일제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유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리해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감시하게 했다. 더 이상 포교가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6년 일왕과 총독, 신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순명을 택했다. 그의 죽음 뒤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김 전 관장은 “일제 때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나철은 종교적 위세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주검도 상여가 아닌 지게로 옮겨 화장하고, 부고도 돌리지 말고, 제사에도 밥 한그릇 찬 하나만 놓으라고 유언했다”며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최근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육이념에서 단군사상의 핵심인 ‘홍익인간’을 빼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역사 공부를 안한 것인지, 역사의식이 없는 것인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목사인 규암 김약연의 용정 명동학교는 기독교학교임에도 교가에 ‘한배검 단군의 자손의 긍지’를 담았고, 교실 뒤엔 예수 사진과 함께 단군 영정을 걸었다.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단군 집회를 개최했다. 이승만도 1921년 <독립신문>에 ‘한배검은 인류의 스승이셨다’고 썼고, 기독교인 백범 김구도 조선인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며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인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로 번역해 교육기본이념으로 삼게 한 것도 기독교인 백낙준 박사였다”고 설명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화, 2021/06/1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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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mail protected]

<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관련기사 

☞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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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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