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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지역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익명 (미확인) | 월, 2017/08/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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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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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용산’ 종점과 ‘신용산’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경성번창기 』,1915)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용산정거장’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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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 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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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특별호)』,1916년11월

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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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소화8년조선요람』,1932)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

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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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출정’과 ‘귀환’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장차 ‘용산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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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한강’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삼각지(三角地)’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연병정(練兵町)’은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

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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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 “사장 몰아내고 피해자들 KBS에 모셔야”… 박성제 MBC 해직기자 “세월호, MBC는 정권과 공범”

성재호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장이 공영방송 KBS·MBC 피해자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공영방송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못했다는 책임과 함께 노동조합 대표자로서 내부에서 발버둥 쳐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느낀 자괴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 213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발족한 ‘KBS·MBC 정상화 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은 지난 27일 오후 국회에서 ‘KBS·MBC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지난 9년 양대 공영방송의 왜곡·편파보도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자신의 사례를 증언했다.

유경근 416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증언한 세월호 보도를 포함해 △MB 정부의 4대강 사업(참석자 염형철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친일 독재 미화 및 역사 왜곡(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백남기 농민 국가 폭력 사망(최석환 백남기투쟁본부 사무국장) △사드 성주 배치(조은숙 원불교성주성지수호 비상대책위원회 교육팀장) △성과 연봉제 및 철도 노조 파업(최은철 철도노조 조직국장) 등의 이슈에서 공영방송 보도가 ‘정권 편향’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보도다. MBC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실종자를 수색하던 민간 잠수사의 죽음에 대해 ‘일부 가족의 조급증과 압박’을 원인으로 꼽는 뉴스데스크 리포트를 내보내 논란을 불렀다.

리포트 주인공은 박상후 당시 MBC 전국부장이다. 그는 목포 MBC에서 올라온 ‘구조자 숫자 중복 집계 가능성’ 보고를 무시해 전원 구조 오보의 책임자로 꼽힌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 탄핵 국면에선 친박·극우 집회에 참여하는 등 사내에서도 극단적 보수 편향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인물이다.

2012년 MBC 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박성제 MBC 해직 기자는 “유경근 위원장이 세월호 참사에서 ‘공영방송이 정권과 공범이었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100% 동감한다”며 “MBC 내 극우 인사들이 MBC를 장악했고 경영진은 이를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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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213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발족한 ‘KBS·MBC 정상화 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은 지난 27일 오후 국회에서 ‘KBS·MBC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왼쪽)과 박성제 언론노조 MBC본부장의 모습. 사진=언론노조 이기범 기자

각 이슈별 관계자들의 증언이 이어진 뒤 마이크를 쥔 성 본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2008년 8월8일 정연주 전 KBS 사장이 경찰 공권력 속에 쫓겨난 뒤 KBS가 나쁜 짓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사건이 너무 많이 스쳐가서…. 2009년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 귀족 노조로 몰아세웠던 유성기업 노동자 분들, 쌍용차 노동자 분들이 많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성 본부장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남긴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새로 시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촛불 시민 혁명을 통해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공영방송의 왜곡 보도는 계속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성 본부장은 지난 26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를 둘러싼 마약 투약 의혹과 검찰 수사 축소를 보도해 주목받은 ‘추적60분’을 언급하며 “3년 전에 나갔어야 할 프로그램”이라며 “여전히 탈핵, 최저임금 보도는 편파적이다. 안에서 구성원들이 보도 투쟁을 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들과 함께 하루빨리 적폐 사장들을 몰아낸 뒤 지난 9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공영방송 피해자 분들을 KBS 프로그램 안으로 모셔야 한다”며 “KBS 사장이 공식적으로 보도 피해자들에 사과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연 기자 [email protected]

<2017-07-28>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공영방송 피해자 앞에서 KBS 기자가 ‘눈물’ 보인 사연

금, 2017/07/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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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답사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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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대학살기념관 화평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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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12월 난징대학살 80년을 맞아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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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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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외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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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리지항위안소 옛터 진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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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위안소유적진열관 내부에 전시된 민족문제연구소 발행도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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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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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열사공묘 내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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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열사공묘에서 항일전에 참전한 조선인 전상국, 김원영 열사의 이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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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열사공묘 야외에 전시된 당시 중국군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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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 김원봉 주도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현재 천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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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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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간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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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혁명당 거점(현재 난징 호가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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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경으로 유명한 부자묘(공자 사당) 입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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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고속철도 난징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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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에서 광저우로 가는 아침 첫 고속열사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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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설립된 황포군관학교는 현재도 항일역사공간으로 활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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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벌 타도, 국민혁명 완성을 목표로 한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입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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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청년들이 많이 다녔던 대학이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중산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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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군관학교 입구에 있는 쑨원의 유언(革命尙未成功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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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반국민당 정부 무장봉기(광저우꼬뮌)에 참여했다 희생된 조선 청년들을 기려 세워진 광주기의열사능원의 ‘중조인민혈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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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공사 중인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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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기의열사능원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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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이항증 선생(석주 이상룡 증손자)에게 ‘항일’ 구호로 격려하는 학생 답사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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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의정 비문에 의하면 광저우꼬뮌 당시 희생된 조선인 혁명가들이 약 15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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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 신해혁명기념관에는 당시 주요 혁명가들의 동상이 역동적으로 제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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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당시 시국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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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놓고 열강들의 각축을 보여주는 시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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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혁명기념관 등 대부분의 역사기념관은 국민들의 역사교육을 위해 입장료가 무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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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헤혁명기념관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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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는 주강 강변의 야경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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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아시안게임이 열린 주경기장 주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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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형색색 조명이 변하는 주강 강변의 광저우탑

월, 2017/08/2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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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親朋末子

 

孰敢言多産(숙감언다산)

人波若蟻軍(인파약의군)

如何無子息(여하무자식)

老後必歡欣(노후필환흔)

 

친한 벗의 막내아들에게 지어 주다

 

뉘라서 감히 多産을 언급하는가

사람 물결일랑 개미떼와 같구나

자식이 없음은 또한 어떻겠는가

늙은 후에는 반드시 기뻐하리라.

 

<時調로 改譯>

 

그 누구라서 감히 多産을 언급하는가

사람의 물결일랑 마치 개미떼 같구나

無子息 어떻겠는가, 老後에 기쁘리라.

 

*親朋: 친우(親友). 가까이하여 친한 사람 *末子: 막내아들 *多産: 아이나

새끼를  많이  낳음 *蟻軍: 개미떼  *無子息: 아들도  딸도 없음. 무자(無子)

*歡欣: 기뻐함.

 

<2017.7.13, 이우식 지음>

목, 2017/07/13-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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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온라인 역사강좌

제10강 불굴의 저항 – 한국독립운동혈사 ③

강사 :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금, 2017/09/0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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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人君言我邦無力乃上疏

 

大韓衰弱國(대한쇠약국)

上疏我心欣(상소아심흔)

美日爲親父(미일위친부)

中俄事若君(중아사약군)

 

나라님이 우리나라는 힘이 없다고 말함을 듣고 上疏함

 

대한민국은 매우 쇠약한 나라이오니

上疏하는 저의 마음일랑 기쁘답니다

미국과 일본을 친아버지로 삼으시고

중국과 러시아를 임금같이 섬기소서.

 

<時調로 改譯>

 

우리나라 쇠약하니 제 마음 기쁘답니다

저 미국과 일본일랑 親父로 삼으시옵고

중국과 또 러시아를 임금같이 섬기소서.

 

*人君: 임금. 나라님 *我邦: 우리나라 *無力: 힘이 없음 *上疏: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또는 그 글 *衰弱: 힘이 쇠하고 약함 *弱國: 힘 약한 나라 *親父:

친아버지 *俄: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의 약칭(略稱).

 

<2017.7.11, 이우식 지음>

화, 2017/07/1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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