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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지역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익명 (미확인) | 월, 2017/08/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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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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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용산’ 종점과 ‘신용산’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경성번창기 』,1915)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용산정거장’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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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 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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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특별호)』,1916년11월

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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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소화8년조선요람』,1932)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

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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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출정’과 ‘귀환’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장차 ‘용산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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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한강’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삼각지(三角地)’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연병정(練兵町)’은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

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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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월혁명 60주년을 맞아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의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좌는 해방 이후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문화예술인들이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켜 혁명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강좌는 9월 5일에서 9월 2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 수강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방침에 따라 온라인 수강으로 변경되었다. 실제 강의를 촬영한 뒤 영상 편집을 마친 결과물을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게 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문화예술계의 대응-한국문학에서 본 4·19혁명>의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해방 전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함께 혁명문학 소개를 통해서 세계혁명문학의 특징과 문학에서의 4월혁명의 성과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껍데기는 가라! 시인의 절규-4·19혁명과 한국문학>은 한양대학교 유성호 교수가 강의하였다. 이 강의를 통해서 신동엽, 김수영 등의 시인들의 작품에 4월혁명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3강 <혁명의 기록-사월의 노래>는 성공회대학교 이준희 교수가, 4강 <잘 돼 갑니다-우상의 시대>는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 소장이 맡았다. 대중문화 속에 4월혁명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이 외에도 5강 서울대학교 방민호 교수의 <피의 행진-대열 속에서>, 6강 숙명여자대학교 권성우 교수의 <성찰, 자유, 배신의 미학-4·19가 문학에 미친 영향과 파장> 강의도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다.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의 홈페이지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의 홈페이지에서 2020년 10월 18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양질
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목, 2020/09/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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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학교현장을 다시 떠나며

이민우 운영위원장

 

1981년 5월 21일 오후 8시경 인천제일교회에서 한완상 교수의 강연회가 끝나고 청년학생 5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광주민중항쟁 진실규명하라’ 외치며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인천 인성여고 교사이며 인천기독청년협의회 회장이었다. 1981년 5월 18일에 이미 5.18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전두환정권의 사죄 등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 때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인천 중부경찰서에 잡혀갔다. 당시 동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광야서점에 내 이름 앞으로 와 있던 유인물 300여 장의 출처를 대라며 경찰은 같이 연행되었던 다른 후배들과 나를 엄청 두들겨 고문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결국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만기 출소하고 인성여고에서 해직되어 교단을 떠났다. 내가 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때에 나중에 출소한 후에 알았지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학생은 학교 교무실의 내 자리를 지키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참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당시 탄압받던 민주노조였던 콘트롤 데이터 노동조합 탄압저지대책위 간사로 또 원풍모방대책위 간사로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결국 생산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직접 함께 투쟁하자고 하여 가방공장에서, 트랜스 공장에서 1년여를 일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들어가 10년을 노동현장에 대한 상담과 투쟁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였다. 1980년대 노동현장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도 그 한복판에서 3개월여를 집에도 못가고 치열하게 현장과 함께하였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이 변혁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으로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인천에 선인학원 재단이 있었다. 당시 부패사학의 대명사였다. 이 재단을 실제로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그 유명한 백인엽이었다. 조그만 사립재단을 인수하여 선인재단으로 바꾸고 그 산하에 유치원 1곳, 초등학교 1곳, 중고등학교 10곳, 전문대학 1곳, 대학교 1곳 도합 14개의 학교를 거느린 거대 사학재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아 그야말로 사학재벌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여 인천교육계의 암덩어리가 되었다. 졸업장을 팔아먹고, 그야말로 학교 부지를 헐값에 사기 위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데도 학생의 교육환경은 최악으로 9층 건물에 화장실은 1층에 달랑 한 개뿐이었다.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의 교육환경에 학생들을 수용하고 학생들에게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교사를 옛날의 하인을 부리 듯 하니 최악의 교육조건에 내몰린 학생들과 교사, 교수 들이 학원민주화를 외치며, 학원 부패척결을 외치며 들고 일어나자 지역사회에서 선인학원 정상화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의 싸움을 지원하였다. 나도 여기에 함께하여 결국에는 선인학원이 해체되어 14개의 학교가 공립화되고 인천대학교는 부패사학의 대학에서 국립대학교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천대학교의 정상화를 위하여 나는 이때에 교직원으로 들어가 5년여를 일하고 1999년 김대중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교사 복직 때에 마지막으로 복직하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을 학교현장에서 평교사로 복무하고 정년을 맞이하여 다시 학교현장을 떠나게 되니 참으로 인생은 길고도 짧은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 몇 권 쓸 정도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간다. 정년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니 참으로 사연과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한 삶이어서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앞으로 우리 민족적 과제인 평화와 통일, 아직도 미완인 친일 청산을 위해 씨름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금, 2020/09/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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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익태의 표절과 변절

 

김정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1

1. 들어가며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작곡인 교향환상곡 <만주국>을 직접 지휘하였다.

 

안익태 애국가2의 표절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에 의해서이다.
그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불가리아 태생의 작곡가이자 UCLA 교수 보리스 크레만리에프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악보를 보내오면서 표절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중앙대 이유선 교수는 저서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이를 한 번 더 언급하며 새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애국가〉의 표절에 관한 시비는 <코리아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와 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공석준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그 뒤에도 전 중앙대학교 교수 노동은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유사성에 대해 선율형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표절 사실을 확인할 것이며, 〈애국가〉 작곡 이후 안익태가 전개한 자기표절의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1 국가만들기시민모임 사무총장 겸 연구위원장
2 이하 <애국가>로 약칭함.

 

 

 

안익태의 대한국애국가(大韓國愛國歌) 자필악보. 1949년 4월 18일 사보(寫譜)

 

2. 안익태의 표절

애국가의 작곡시점은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이며, 같은 해 12월 28일 초연되었다. 즉 불가리아 방문 전에 〈애국가〉가 작곡된 점은 사실일 것이나, 공석준 스스로가 독보(讀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꼭 불가리아를 직접 방문해야만 불가리아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을 위해 40여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을 모아 기초자료로 삼았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접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두곡의 선율을 상세히 비교하여 표절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래 악보의 윗단은 〈애국가〉이고, 아랫단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이다. 굵은 선은 선율의 흐름이고, 위아래를 연결한 가는 선 중 초록색은 일치하는 음, 노란색 선과 원은 변주된 음이다.

 

 

셋째 단 이외의 부분에서 선율의 흐름이 유사하다는 점이 한눈에 드러난다.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58%)이며,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모두 41개(72%)이다. 즉 선율의 맥락과 음정의 일치도를 기준으로 하면 두 곡의 유사도는 58~72%이다. 이처럼 높은 유사도를 표절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애국가〉에서 노랫말과 선율이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 또한 표절로 인한 결과로 추정된다. 예컨대 아래 악보 첫마디 ‘동해물과’에서 ‘해’가 악구의 정점에 있으며, 음가도 가장 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음절에 악센트가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동’과 ‘해’는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동/해물과’로 들리며, 결과적으로 노랫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제2마디의 ‘백두산이’는 더 심각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높으며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의 형상이 아래로 거꾸러진, 계곡과 같은 선율형으로 되어있다.

곡풍(曲風)에 있어서도 대체로 처량하여 기백을 느끼기 어렵고, 장엄하고 활기찬 면이 부족하며, 애국적 감격이 표현되지 못하였으며,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어왔다. 이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에 기존에 있던 〈애국가〉의 노랫말을 붙이면서 초래된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원래 약박인 선율을 강박으로 시작함으로써 ‘동/해물과’가 되었고, 원 선율을 변주하면서 백두산이 거꾸러진 형상이 되었으며, 원래 활기찬 행진곡 풍의 곡을 보통 빠르기보다 느리게 바꾸면서 활기와 기백이 감소된 것이다. 서양의 노래가 원곡이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결국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상당 부분 차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3. 안익태의 자기표절

안익태가 자신의 작품을 연주한 일시와 장소를 정리한 것3


3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37-38쪽의 표 참조.

 

 

안익태의 일본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 TAI AHN)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8년 7월, 헝가리의 외트뵈쉬(Eötvös) 기숙학원 서류이다. 그는 이를 한국식 이름과 혼용했으며, 해방 이후인 1952년까지도 스페인에서 일본식 이름을 썼음이 확인된다.
〈에텐라쿠〉는 에키타이 안이 1938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럽에서 가장 많이 연주한 레퍼토리로, 일본의 아악 〈에텐라쿠(越天樂)〉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활용한 곡이다. 이 곡은 1940년에는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이름으로, 1960년 6월 15일에는 〈강천성악(降天聲樂)〉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된다. 1962년 1월 한국 초연시 언론에는 세종대왕이 지은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40년에 작곡했다고 보도된다. 〈에텐라쿠〉의 원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으나, 1941년 헝가리 월드 뉴스에 등장하는 1분 정도의 편집 영상을 KBS 음원의 6분 01초 이후와 비교하면 동일곡이라는 점이 이해영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즉 〈에텐라쿠〉는 〈강천성악〉으로 자기표절되었다.
1938년에 초연된 〈코리아 판타지〉는 1940년 10월 19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교쿠토(極東)〉가 연주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교쿠토〉에는 〈애국가〉가 포함된 4악장의 합창 부분이 생략되고, 몽고여행의 기억을 담은 ‘음악이야기’로 대체된다. 그것은 불가리아 노래를 반 이상 닮은 〈애국가> 선율을 듣는다면 불가리아 청중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지 않았겠는가.
1943년 1월 3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된 〈토아〉(Toa) 역시 〈교쿠토〉의 다른 이름으로, 일본어이며 ‘동아’(東亞)를 뜻한다. 이는 다시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만주국〉이라는 곡명으로 연주되며, 마지막 악장에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합창이 들어간다.
바로 이 4악장 합창 부분 대본을 에하라 고이치가 썼는데, 그는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특별시 부시장을 역임하고, 독일이 만주국을 승인한 1938년부터 주 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며, 주독 일본 첩보기관(IS)의 총책이다. 에키타이 안은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서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 초까지 기거하며 그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으며, 그 대가로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에 선전 활동 용역을 제공하였다.
〈만주국〉은 1944년판 〈한국 환상곡〉으로 다시 재구성되어서, 1946년 3월 15일 바르셀로나 리세오 극장에서 연주된다. 이때 마지막 악장에는 다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사용하였다. 즉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교쿠토〉, 〈토아〉, 〈만주국〉은 대동소이한 곡이며, 최초에 합창으로 표현된 ‘애국’의 자리는 ‘몽고’로, 또 ‘만주’로 바뀌었다가 다시 ‘애국’으로 돌아왔다.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 3국의 동맹을 다짐하던 그 선율로 다시 ‘애국’을 노래한 것이다. 결국 안익태의 대표작들은 모두 자기표절의 결과로 생성된 이명동곡(異名同曲)이었다.

 

4. 나가며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애국가로 부르는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작곡한 〈애국가〉가 어찌하여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노래를 차용한 ‘표절’이 되었을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독자적이면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선율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애국가〉가 과연 ‘애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에키타이 안에게 있어 표절과 자기표절은 일신의 영달을 위한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표절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만일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노래와 이처럼 닮은 선율을 〈애국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낯 뜨거운 일이다.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불러왔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라면 적어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 철학, 역사, 자부심, 비전 등이 담기고, 모두가 함께 부르면서 정서적 공감대 형성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평화와 평등까지 고취시킬 수있는 좀 더 진취적이고 기상이 있는 선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담긴 전통장단과 악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주제, 또는 자신이 특정 작품에서 썼던 주제를 다시 활용하여 창작하는 것은 여러 작곡가들이 즐겨 쓰는 창작기법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선율을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주제로 활용한다든가, 전반적으로 동일한 곡을 이름만 바꾸어 다시 발표하는 행위는 표절과 자기표절에 해당한다. 표절과 자기표절은 ‘창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금기시되는 행위이며, 가장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이며,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다.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오래 전에 만들어져서 저작권 관련 법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과적 표절임을 확인한 이상 공식적 행사에서 이를 부르기를 강요하거나 권장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우리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모두 반영한, 정통성과 품격을 갖춘, 대한민국의 법정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여야 할 때이다.

목, 2020/09/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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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개막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이 9월 25일 개막하였다. 올해는 역사적인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번 전시는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상황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장기적으로 휴관하여 오랜기간 미루어졌지만 민주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1960년 4월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을의 시작과 함께 전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특별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4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4월혁명의 진행과정, 5·16군사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우상의 시대-‘국부’가 된 독재자〉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여 1948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어떻게 이승만을 ‘국부’로 우상화 하였는지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 우상화의 도구가 된 〈대한뉴스〉 영상들과 다양한 사료들은 독재정권을 노골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2·28대구학생의거와 “3·15선거는 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던 1차 마산의거를 지나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정권타도 구호와 함께 4월혁명의 반독재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 사회변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연표의 시대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4월혁명 당시의 현장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사월 그날, 이후〉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승리의 화요일’로 바뀐 이후 민중들의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한 변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4월혁명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대두한 혁명세력의 저항과 변혁운동 등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4월혁명 이후 만들어진 많은 단체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려하였는지 보여주는 격문이 실물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에서는 4월혁명이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4월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혁명정신이 퇴색하는 상황에서 자기반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지훈, 김수영, 신동엽 등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와 대중가요에서 4월혁명 전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당시의 음반과 출판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의 4월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북한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시는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1월 15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 중이어서 10월 말부터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전을 통해 60년 전 앞선 세대가 피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새겨보는 뜻깊은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1/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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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개발자들

인터뷰 김수빈 회원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의 개발자인 고용진(왼쪽)과 안겨레(오른쪽)

 

100년 전, 독립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목표도 가족을 지켜 내겠다는 책임감도 제국주의와 반민족행위자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명감도 봉건적 속박에서 억압받는 성을 해방하겠다는 처절함도 있었겠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저마다 ‘가슴 뜨거워지는 한 순간’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가슴엔 과연 어떤 ‘한순간’이자리 잡고 있을까? 그 뜨거움의 원천은 각기 다르겠지만, 그 한순간을 만났고, 이에 두려움도 무릅쓰고 한 발짝 내디딘 청년들이 있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을 개발한 고용성 개발자와 안겨레 개발자가 바로 그들이다. 10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난세의 영웅’ 개발자 두 분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문: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겨레 : 안녕하세요, 한림대 법학과 재학 중인 안겨레입니다. 한림대학교 내 창업교육센터에서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게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고용성 : 안녕하세요, 한림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고용성입니다. ‘난세의 영웅’ 개발과 저희 회사 경영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은 어떤 게임인가요?
안겨레 : ‘난세의 영웅’은 선사시대부터 건국 이후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사 RPG입니다. 주인공은 3명이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저희 게임의 주요 콘텐츠 중에 하나가 캐릭터가 돌아다니며 NPC에게 말을 거는 방식인데요, NPC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사에 관한 정보와 게임 진행에 관한 정보를 고루 얻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임 안에 담긴 한국사 정보는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입니다. 수능은 물론, 한국사능력검정 1급, 국가직 공무원, 지방직 공무원 등의 시험 출제율 최상위에 뽑힌 것만을 골라서 게임에 넣었습니다. 또한 역사를 다루다 보니 철학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명분이 왜 필요한가? 등등의 요소가 단순히 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를 통해 더 발전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합니다. 철학적 접근이 어렵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접근성이 높은 게임매체를 통해 조금 더 생생하게 흐름을 잡아주는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문 : 원래부터 게임 개발에 흥미가 많았나요?
고용성 : 저희는 중학교 동창인데요, 그때 같이 재밌게 만들던 게임 제작 프로그램이 군대제대 후 최신화로 업데이트된 걸 알고 다시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때 당시엔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단 게임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겨레 : 저도 처음에 게임 개발보다 게임 자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수학을 포기하고 문과에 진학한 상태라 그 생각을 접고 공부에만 매진했죠.

문 :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로 한국사 게임을 만들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저는 중국의 ‘삼국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삼국지 게임을 하다 흥미가 생겨 <삼국지>를 읽었고, 나중엔 책을 줄줄 외울 정도로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사를 삼국지보다 늦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제대 후에 노량진에서 검찰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흥미가 생기고, 제일 자신 있는 전략과목이 되었습니다. 공부가 정말 힘들었던 어느 날, 예전에 즐겁게 했던 삼국지 게임이 떠올라 ‘한국사 게임도 있겠지’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는데,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 매우 의아했어요. ‘삼국지 게임도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게임은 왜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삼국지 게임에 빠져 삼국지를 섭렵하게 됐듯이, 한국사 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한국사에 빠지는 세상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검찰직 시험을 포기하고, 게임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죠. 

문 : 대전환이 일어났네요. 진로를 변경했을 때, 고민이 많이 되지 않았나요?
안겨레 : 저는 법학과, 용성이는 경영학과다 보니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은 뛰어나지 못했어요. 옛날 중학교 때 장난스레 가지고 놀던 게임 툴만으로는 전문적인 게임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진로를 변경해도 괜찮을까’란 고민과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문과생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시대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았고, 제 마음은 마른 낙엽에 옮겨 붙은 불씨처럼 계속 커져만 갔어요. 제가 좋아했던 게임 속 영웅들, 역사 속 위인들은 도전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제가 이 일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제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족한 건 배우면 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는 생각으로 짐을 챙겨 노량진에서 나왔습니다.

문 : 고용성 님은 어떤 계기로 안겨레 님과 함께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나요?
고용성 : 겨레가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저는 창원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어요.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 그 음식점 대표여서 제대 후에 음식을 배우고, 그쪽 계열로 창업하려 했는데 겨레가 함께 게임을 개발하자는 연락이 와서 그걸 접고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음식점을 하면서 2년간 번 돈을 ‘난세의 영웅’ 초기 창업 자금에 보탰습니다.

문 : 창업 자금이 꽤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금과 관련된 계획은 어떻게 세웠나요?
고용성 : 원래 개발 자금으로 1년 반 정도는 지출하리라 예상했지만, 하다 보니 너무 어려운 점도 많고, 처음이라 익숙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림대 학교 창업지원센터에서 심사를 거쳐 창업 지원금을 받아 충당해 나갔습니다.

문 : 게임은 두 분이서 만드신 건가요?
안겨레 : 처음 출시했을 때는 저희 둘이서만 만들었고, 후에 리메이크할 때는 전문 프로그래머한테 외주를 맡기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래머도 저희 게임팬이었는데,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돕겠다는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외주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희만의 엔진이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서 자체적인 개발이 가능한 정도까지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문 : 한국사가 워낙 방대해서 게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텐데요.
안겨레 : 네, 사실 시나리오라는 걸 처음 써봤는데 다행히 옛날에 책을 읽은 경험이 많아서 초반에는 잘 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창작의 고통이 심하게 와서 글이 안 써지면 개발업무를 하고, 그러다가 스토리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글을 쓰는 패턴으로 조절하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료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있었나요?
안겨레 : 한국사 내용은 주로 시험 출제 빈도가 높은 것들로만 구성했습니다. 게임 안에서도 캐릭터들이 대화할 때 나오는 붉은 자막은 한국사 시험 관련, 푸른 자막은 게임 진행 관련정보로 구분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기 싫어도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오고, 반대로 한국사가 좋아서 왔는데 시험에도 도움이 되니까 한국사 자격증을 따게 되는 등 좋은 영향을 끼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 게임 스토리는 어느 시대까지 진행되나요?
안겨레 : 현재 선사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이미 나온 상태고, 올해 12월에 조선 후기편이 나옵니다. 앞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편까지 더 나올 예정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2021년까지 완성될 것 같습니다. 한국사 시험 범위 내에서 다루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를 끝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한국사 시험에 높은 출제 빈도수 위주로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게임 팬카페의 팬들이 빨리 다음 장을 달라고 하셔서 (웃음) ‘7장’인 조선 후기까지를 후딱 내고,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1기’, 개화기부터는 ‘2기’로 나누어 약간의 기간을 두고 출시하려 합니다. 일단 전체를 다 만들고, 구글 스토어 말고도 다른 플랫폼에 출시해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문 : 난세의 영웅 팬카페의 연령 분포는 어떤가요?
안겨레 : 10대부터 60대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그중 20대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0대, 10대 순입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난세의 영웅’ 팬들이 함께 답사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30대가 가장 많다는 것이 참 다행이네요. 게임 홍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안겨레 : 사실 저희가 조선 후기편 개발로 인해 지금은 홍보를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편이 완성된 후에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데요, 현재 성남시에서 진행하는 ‘인디크래프트’에 저희가 선정되어서 그쪽에서 저희 홍보를 전담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구글피처드’에서도 홍보가 이루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한림대에서도 홍보 지원을 해주기로 하였고요.

문 : 게임 타이틀을 왜 ‘난세의 영웅’으로 정하게 됐나요?
안겨레 : 제 개인적인 역사인식인데요, 평범한 사람도 난세를 만나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숨지 않고 뛰쳐나온 경험이 많죠. 그런 위기 순간에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영웅’이란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지 영웅이 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난세’란 개념은 더 포괄적이죠. 그래서 더 다양한 방면에서영웅이 등장할 수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게임 타이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문 : 게임이 다 완성되고 나면, 본인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계획들이 있나요?
안겨레 : 다 완성되고 나면, 일단 게임을 깔끔하게 한 번 더 다듬고 홍보 쪽으로 매진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후엔 계속 게임업계에 종사하게 될지, 아니면 공부를 좀 더 해서 애플리케이션 등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나갈지 고민 중입니다.
고용성 : 저는 ‘난세의 영웅’이 완성되고 나면 외전 버전까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램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습니다.

문 : 처음에 두 분께서 한국사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는, 우리 역사콘텐츠의 부재를 절감해서 두 팔 걷어붙였지만, 일이 진행되어갈수록 부담감과 무게감이 가중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난관들을 어떻게 버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사실 한국사 게임이 없습니다. 국내 내수시장이 작아 돈이 안됩니다. 중견기업 정도 되면 이런 게임은 안 한다고 해요. 수지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요, 또 두 명만으로 만들기엔 엄청 버거운 내용이라서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앞으로도 이런 게임이 나오기는 힘들 거라 예상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독점한 상태가 되어버린 거죠. 게임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은 ‘미래형 교과서다’라고 할 만큼 저희 게임이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어서 학원가에서도 원장님들이 저희 게임을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정말 많이 힘들던 때가 있었는데, 이건 유일하게 저희가 누릴 수 있는 ‘빈집’이고, 그 생각으로 계속해 오다 보니 지금은 조금 숨통이 트인 상황입니다. 큰 난관들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보란 듯이 멋진 한국사 게임을 출시해 주신 고용성 님, 안겨레 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장 존경하는 위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회영 선생’이라 말씀하신 안겨레 님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회영 형제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안겨레 님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데 ‘그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나에게 이 두 분이 바로 ‘난세의 영웅’이다. 더불어 한국사 게임 콘텐츠의 부재에 의문을 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하며 정면 돌파한 두 분의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난세 속에 온 국민이 잠재적 위인’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게임 ‘난세의 영웅’을 통해 우리역사를 기억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 2020/11/1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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