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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지역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익명 (미확인) | 월, 2017/08/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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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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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용산’ 종점과 ‘신용산’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경성번창기 』,1915)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용산정거장’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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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 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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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특별호)』,1916년11월

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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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소화8년조선요람』,1932)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

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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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출정’과 ‘귀환’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장차 ‘용산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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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한강’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삼각지(三角地)’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연병정(練兵町)’은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

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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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문기 선생 12주기 추모식 거행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2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박해룡 대전지부장, 이순옥 부위원장과 대전지부 후원회원 그리고 방학실 기획실장을 비롯한 본부 상근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타계하고 말았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 편집부

목, 2020/02/2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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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오다 치요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 이사, 박물관 후원금과 감상문 보내와

 

작년 3월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이사 오다 치요코(織田千代子) 님이 최근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동생에게 받은 유산 중 일부인 100만 원을 작년 12월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소감을 바다 건너 편지로 보내오셨다. 그 전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정리


저는 201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쿠사노이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
로 회원 12명과 함께 ‘한국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쿠사노이에에서 활동했던 김영환 씨가 있는 식민
지역사박물관을 김영환 씨의 안내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로 세워졌는데, 훌륭한 5층 건물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식민지역사박
물관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의 자료를 수집, 전시, 소개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
현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전시되어있는 유물을 보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국병합’의
이름으로 침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친일파’라고 불린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말은 들어본 적
은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비로소 ‘친일파’에 대해 그들이 독립 후 한
국의 입법, 사법, 산업,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견학한 감상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일
본의 올바른 과거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자신
이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파 우울해졌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 정
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인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슬펐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알고 싶습니다.


 

금, 2020/02/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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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일본 정부에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을 촉구하는 요청서 전달 및 협의 열려

 

1월 21일 일본국회의원회관에서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추협)가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일제의 침략전쟁에 군인, 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의 유골봉환을 하루 속히 실현하도록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일본 정부 당국자와 유골문제에 관한 협의를 가졌다. 이날 협의에는 보추협의 이희자 대표와 유족 박남순 씨,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참가했다.
연구소와 보추협은 일본의 연대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에 연락회’와 오키나와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는 ‘가마후야’와 함께 2014년부터 매년 일본 정부에게 한국인 전사자의 조속한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협의를 벌여왔다.
30여 사가 넘는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였으며, 곤도 쇼이치(近藤昭一), 아카미네 세켄(赤嶺政賢) 등 7명의 국회의원도 이날 협의에 함께 참가하여 이 문제에 대한 뜨 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요청서 전달 뒤에 이루어진 일본 정부(후생성, 외무성) 당국자와의 협의에서는 후생성 당국자로부터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전사자 700위의 유골에 대해 3월말까지 DNA 검사를 위한 검체의 채취가 이루어지고 4월부터 DNA 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후생성 실무자가 DNA 검체를 채취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은 DNA 감정의 성패가 달려있는 검체의 채취가 비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며 전문가의 참여를 요구했다.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한국인 유족 163명은 한국 정부를 통해 DNA 검사를 요청했다.
또한 참가자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유골조사에 대해 DNA 감정의 대상이 되는 유골이 너무 적은 상황을 지적하며, 현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유골의 화장을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후생성의 회의 자료에 ‘유족들이 화장을 원한다’는 내용이 현지에서의 화장을 하는 명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로부터 거짓으로 유족감정을 들먹인다는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20/02/2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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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민족문학연구회, <겨레의 큰 별들> 출간

민족문학연구회(회장 맹문재)는 지난해 광복절에 펴낸 독립운동가 기림시선 1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올 3월에 기림시선 2집 〈겨레의 큰 별들〉을 민연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민족문학연구회 소속 작가 45인이 쓴 가네코 후미코와 그 남편 박열, 김구, 민영환, 유관 순, 유일한, 이동녕, 장준하, 차리석, 한용운 등 45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 45편이 실렸다.
‘책을 펴내며’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
림시선의 편찬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45편의 기림시뿐 아니라 45인의 독립운동가 약력을 수록했고 김성동 작가의 발문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다」를 실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기림시선을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01년 전 3·1운동의 함성 소리가 귀에 맴도는 요즘,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목, 2020/03/2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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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항일운동 유적지 취재기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
해간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가다

이은지 YTN 라디오 PD

 

과거 역사를 더듬어보고 미래로 이어주는 중간지점이 한·러수교 30주년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데에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러시아가 소련의 많은 레거시(전통)를 부정했는데 현대까지 계속 유지되는 것 중 하나가 ‘꺼지지 않는 불꽃’ 이라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들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겠다, 그들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는 거죠.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독립운동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잊힌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새롭게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지켜나가고,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오성환 총영사 인터뷰에서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다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서간도를 답사한 후 제작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무명씨의 꿈〉(연출 : 이은지, 구성 : 홍기희)에 담았던 문장입니다.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도 이런 ‘투쟁’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필수적인 과정은 시간을 다툽니다.
기억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 양과 선명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대부라고 불렸던 ‘페치카 최’ 최재형의 손자인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이 지난 2월 14일 별세했습니다.
“이제라도 찾고, 우선 기억하는 것부터 기록해놓아야 한다”던 그의 한마디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에 저는 지난해 11월 해간도 항일독립운동 본거지라고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를 답사하고 온 기억들을 이곳에 기록합니다.
연해주(沿海州)는 해간도(海間島)로 불리며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3대 거점이라고 하죠.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의 동의회, 안중근의 단지동맹, 헤이그 특사 출발지,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와 1919년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등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한인들과 해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 되었던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① 한글 주소가 있는 곳,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당시 춘원 이광수는 신한촌을 두고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서울거리 집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7번지 일대― 한민학교와 이동휘 선생 집 추정 터

 

구글맵을 켜고 신한촌이 있었다던 산등성이를 올라가봤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춘원이 묘사했던 당시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립문이 있었다던 곳은 듬성듬성한 겨울나무로 채워져 있어, 추정만 가능할 뿐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바로브스크 울리짜 7번지에 살고 있는 김치보와 서울스카야 9번지에 살고 있는 채성하”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신한촌 일대에 서울 거리가 존재했다는 기록인데, 실제 ‘서울거리 A2’ 주소판이 부착된 집 한 채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가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구글맵을 켜고 영하 10도의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 폐가들로 둘러싸인 곳, 앞으로는 철로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언덕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대신 한 러시아인과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이 집을 알고 있나요?”
“네.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살았었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옵니까?”
“한국에서 방문객이 많이들 찾아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죠.”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로 나와 ‘얀덱스’를 켜보니, 이런!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하바로보스크 22번지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바로 그 주소였습니다. 역시나 이곳도 상점이 세워져있었습니다.

 

② 한인들의 터전 신한촌과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26A 신한촌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으로 향했습니다.
묵념을 하고 참배객을 기다리는 사이 30여 분간 한국인 관광객 2팀과 러시아인 부부 한 쌍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제 어머니는 어릴 적 한인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때 이곳에 거주하다가 탄압당한 한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저희는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이 기념비가 세워져서 선조들을 기릴 수 있어 기쁩니다”.
– 신한촌 기념비에서 만난 러시아인 부부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잘 사는 나라가 됐고 이렇게 행복하게 됐는데, 부디 이 얼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짐을 해봅니다. 굳이 여기를 한번와서 찾아 뵙고 싶더라구요”
– 신한촌 기념비에 참배하러 온 한국인 관광객 모녀

 

허술한 철조망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3개의 탑과 주변의 8개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념비를 세운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설명으로는 일제강점기 3개의 임시정부와 강제이주 당한 8개 지역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념비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을까? 같이 갔던 가이드는 당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라고 말했습니다. 기념비는 고려인 자원봉사자 부부가 관리하고 있다는데, 남편 되는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기념비 아래쪽과 위쪽의 색깔이 다릅니다. 러시아인들이 낙서를 하거나 오물을 버린 흔적이라고 합니다.

 

킹크랩을 먹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로 향했습니다. 맛집과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핫플레이스랍니다. 거리의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사진도 찍고 킹크랩과 독도새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이 과거에는 ‘개척기’로 불렸던 까리에스키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거리 344호에 해조신문사가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를 했다는 대동공보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우리 관광객들 중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걸었던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③ 블라디보스토크 역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시베리아횡단열차

출발점을 가리키고 있는 필자 이은지 PD

 

“어떤 역인지 알고 오셨어요?” “아니요, 여기가 무슨 역이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요. 이곳에서 누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어요.”

“전혀 못 들어봤는데.”

“몰라요.”

“가이드가 설명 안해주던데요.”

2019년 11월 25일 아침. 총길이 9,288킬로미터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이 철길에도 우리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고 하죠.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열사가 출발한 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각보다 조용히 역사를 들어오던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역사 안은 아담했습니다. 다만 입출구가 여러 개인데다 각각 거리가 상당하고 드나들 때마다 짐 검사를 받아야 해서, 탑승할 열차와 개찰구를 잘 확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저도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전속력 달리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우수리스크로 향하기 전, 오성환 총영사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와 우리 영사관이 협력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사탐방 지도를 제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에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적지를 찾아서 안내판 같은 것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러시아 시정부한테 제안해왔습니다. 신한촌, 구한촌… 여러 역사 유적지를 엮어서 하나의 관광지도로 만들면 블라디보스토크가 단순히 킹크랩 먹고 바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 거죠. 한러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영사관이 지도를 제작할 용의가 있다’고 하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 측에서도 사적지 지도 앱을 만들겠다고 이야기가 됐습니다.”
항일유적지 지도앱을 보면서 답사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④ 고려인 이주의 피눈물이 서린 철길, 라즈돌노예 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 우수리스크.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는데,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어 3시간 30분 가량 걸려 도착했습니다. 처음 정차한 곳은 라즈돌노예 역이었습니다.

 

기차가 아주 가끔 멈췄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그냥 천으로 덮어 기차역 플래폼에 남겼습니다. 역 객차에서 아이가 숨져 창문 밖으로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급히 볼 일을 보다 깔려죽기도 했어. 특히 위생상태가 불량해 많은 사람들이 앓았는데 병자가 생기면 그 즉시 실어 내갔고 모두 실종자가 되었지. 식량도 물도 받지 못했기에 오는 동안 풀과 뿌리를 모야 으깨어 먹었어. 아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지 – 김 블라지미르 회고록에서 기차역이 이토록 슬프게 보일 수 있을까. 눈 쌓인 철도가 이토록 서럽게 차가울 수 있을까.
눈발이 매섭게 날리던 날 라즈돌노예 역의 전경은 비통하다 못해 아팠습니다.

 

⑤ 강물소리에 묻힌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초입 수이푼강 근처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고종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허비는 왜 강가에 있을까요?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입니다. 이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 화장해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합니다. 수이푼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으로 흘러 동해에 다다른다고 하니, 그 위치 선정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유허비를 둘러싸고 물길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 말에 따르면, 2017년 김정숙 여사 방문 시에 자갈길을 깔았으나 그해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려갔고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큰 도로까지 물이 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이 빠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겨울이 와 얼어붙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러시아에서 9년을 살았다는 현지 가이드는 “관리가 정말 안 된다. 한국인들이 관리 안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라며 우수리스크 지역 내 독립운동 유적지 관리 문제를 지적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유허비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고 묵념을 했습니다.

⑥ 작은 간판 하나, 전로한족중앙총회 개최지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됩니다. 그 전신으로 1918년 6월 열렸던 제2회 전로한족중앙총회 자리가 현재 학교 운동장으로 변해 남아있습니다. 주소는 우수리스크시 막심고리끼거리 20번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안내문 하나를 설치해 건물 입구에 달아두었다고 하니, 타 유적지에 비해 다행인 일입니다. 문이 잠겨있어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였던 학교 건물과 안내문

 

⑦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있는 페치카 최재형의 집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태어날 당시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당시 탄압 대상자였습니다. 탄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최재형 선생의 DNA 덕분이 아닌가…….
우리의 가장 큰 역할은 기억하는 일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록해놓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 뒷일을 감당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재형 후손 최 발렌틴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모스크바 어느 한식당에서 최재형의 후손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그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 14일 별세했습니다. ‘조국은 최재형 선생은 잊은 적이 없다’ 라는데, 그는 사고 후 병원비 5만 유로가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은 당시의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한 벽돌집. 한쪽 창문이 깨진 상태 그대롭니다.

 

최재형의 집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라고 적혀있는 이곳이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집입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 선원생활을 하며 재력을 쌓았고, 그 돈으로 한인들의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의회, 대동공보, 권업회의 중추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구요. 안중근 의사의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택 안에는 최재형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미디어 교육실에서는 관광객들에게 최재형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다른 유적지의 황량함, 황무지에 내버려둔 듯한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최재형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료마다 QR코드가 부착돼있었는데, 현지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QR코드 연결은 힘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잡혀갔던 4월참변을 추도하는 기념비는 코마로바거리 1번지에 세워져있습니다. 러시아정부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올해는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잃어버린 해간도 항일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간 선조들의 해간도 투쟁 이야기.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 주축이된 이범윤 부대, 그리고 성명회와 최재형과 홍범도의 권업회·권업신문,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던 이동휘,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 정통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강제이주의 역사까지, 수많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곳.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성명회)의 역사를 이제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요. 1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가 기록해놓는다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이 기록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니까요.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긴 이야기를 마칩니다.

 

(경천아일록을 보며) 김경천 장군이 일기를 썼을 당시는 하나의 민족으로 살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남북으로 나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조국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평화를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그런 메시지를 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하 20도, 30도 그런 추운 기후에서 활동하셨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먹을 것도 없었던 그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어쩌면 그 모두가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기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잊혔거든요. 잊혔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바로 이 일기장에서 후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 김경천 장군 손녀 일레나와 갈리나

목, 2020/03/2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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