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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지역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익명 (미확인) | 월, 2017/08/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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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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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용산’ 종점과 ‘신용산’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경성번창기 』,1915)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용산정거장’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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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 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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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특별호)』,1916년11월

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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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소화8년조선요람』,1932)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

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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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출정’과 ‘귀환’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장차 ‘용산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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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한강’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삼각지(三角地)’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연병정(練兵町)’은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

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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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

 

오종렬 한국진보 연대 총회의장이 12월 7일 별세했다. 고인은 교사 생활을 하던 지난 198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참여를 시작으로 민중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 대회 의장을 맡았고, 전교조 초대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고 해직되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으면서 민중운동 지도자 반열에 올랐고, 이후 통일연대 상임대표,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맡으며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한미FTA 저지 투쟁, 광우병 소고기 투쟁 등의 중심에 서서 수배와 구속, 수감 생활을 반복했다. 지난 2014년 2월 간경화와 급성신부전증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6년여 투병하다 향년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민족통일장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11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함세웅 이사장과 임헌영 소장은 고인의 장례위원회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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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친일청산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좀 더 미래지향적・공익적 차원의 과거사 청산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문제 전반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과거 몇몇 언론들이 부분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광범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친일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행됐다. 조사는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실시됐으며,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한 전국의 만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는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방식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처벌은 물론이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으며, 사회지도층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18.1%) 개인의 안위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72.2%)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더 엄격히 따져야 하며(82.7%), 이들
에 대한 기념사업 중단(81.3%),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 이장(74.4%), 서훈을 취소(65.6%)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저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데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지나치다고 답한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이번 설문조사 항목은 친일문제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뉴라이트 인식, 과거사 청산 방향,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등 총 40여 문항에 달한다. 자세한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2020년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이다.

 

금, 2019/12/2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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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 19일 한반도 평화기원 백두대간 사진전 ‘일맥상통一脈相通 백두대간白頭大幹’ 기획전을 개막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한반도의 평화와 대화의 진전을 갈망하는 민족의 염원을 담아 남녁과 북녘의 산하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사진전이다.
뉴질랜드 산악인 로저 셰퍼드는 2007년부터 남쪽의 백두대간을 먼저 탐사한 데 이어 ‘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의 협조로 북측 구간을 종주하면서 남북 백두대간 풍광을 사진에 담았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수많은 사진 중 5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한다.
개막식은 11월 19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 건너편 통일교육원 제1교육관에서 백준기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김정륙 광복회 사무총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개막식 직후 로저 셰퍼드가 관람객을 대상으로 ‘백두대간 종주기–북한의 산하 그리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기념관 앞뜰에서 진행된 개막 테이프 커팅식에 강북구 박겸수 구청장, 천준호 민주당 지역위원장 등도 함께 하였다.
이번 전시는 2020년 2월 28일까지 2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다.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에서 개마고원, 태백준령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비경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시민과 학생들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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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정의와 평화공존을 기원합니다

 

경자(更子)년 새해 민족문제연구소 모든 회원 가족 그리고 남북 8천만 겨레에게 은총 충만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해는 다른 해보다 더 힘들고 소란했습니다. 십인십색이니 서로 다르고 나아가 갈등도 생겨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 나오는 글귀로 “시시비비위지지(是是非非謂之知)라 하고 비시시비위지우(非是是非謂之愚)”라. 즉 옳은 것을 옳다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틀린 것을 옳다하고 옳은 것을 틀렸다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도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시시비비를 가르는 법률적 판단은 법원과 검찰 등 사법 당국이, 일상의 삶에서는 정치가 잘 작동해 대안을 만들어 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하고 통합하여 합의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한 해는 법과 정치 모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저도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반성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시시비비를 가르고 조정해야 할 법과 정치를 담당한 사람들이 많은 경우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이에 올해에는 정치인은 물론 우리 모두 시시비비의 기준을 새롭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설정해 진실과 지혜에 기초한 삶을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부유하고 오만한 재벌들, 전관으로 수억, 수십억을 받아드는 고위 공직자들, 반공과 거짓 자유를 기초로 역사와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분들의 회심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함께 모여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때 서로 편을 가르고 적대했고 우리 겨레는 결국 분단되었고 전쟁을 겪었습니다.
경자년 새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를 만들고 남북 8천만 겨레가 한 어머니의 자손임을 확인하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연구소 가족들과 연구소를 사랑하는 모든 은인, 동지들의 꿈과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1. 함세웅 이사장

화, 2020/01/2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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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연구소 여론조사 결과,

시민들의 친일청산 문제 인식

박수현 사무처장 정리

 

일반 시민들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구소는 지난해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주요 결과를 <민족사랑> 경자년 새해 1월호 특집기사로 싣는다.
이 조사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한국사회의 친일청산운동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시대정신에 맞는 공익적・미래지향적인 친일청산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친일청산 문제가 핵심이지만, 이슈가 되는 다른 과거사문제도 설문조사에 포함했다.
설문조사는 전국의 만 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조사방법은 웹조사 방식이다. 응답자는 성별・연령별・지역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했다.

설문 문항은 40여 항목이며, 이를 주제별로 나누면 크게 4가지다. (1)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2)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3)<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4)기타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등이다. 다음은 주제별 주요 설문결과와 분석 내용이다.

 

친일청산 체감도 및 친일파 인식

시민 10명 중 8명, 한국사회의 친일청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 가장 미흡한 분야는 정치, 경제, 교육 순

시민 대다수는 해방 후 지금까지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8명 이상이 친일파 처벌은 물론 일제잔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도 미흡하다고 답했다. 민주화 이후 친일청산운동이 꾸준하게 전개되었음에도 그조차도 대다수 시민들은 체감하지 못했거나 미흡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친일청산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친일청산이 가장 미흡하다고 생각한 분야(중복 허용)는 정치 75.8%, 경제 53.9%, 교육 47.4%, 언론 44.7%, 사법 43.7%, 군경찰 43.4% 순이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일파를 과거의 역사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 현실 정치와 연계해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주관식)에 ‘자유한국당・’ ‘아베’ ‘나경원’ 등의 답변이 높은 빈도수를 차지했고, ‘친일파’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주관식)에 대해서도 ‘나경원’ ‘이명박’ ‘박근혜’ 등 최근의 정치인이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

시민 10명 중 7~8명,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 … 더욱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7명(72.2%)이 개인의 안위와 성공을 위한 적극적인 친일로 평가했으며, 지금까지 친일파를 옹호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18.1%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시민 10명 중 8명(82.7%)이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을 더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에 대한 기념사업에 대해서도 10명 중 8명(81.3%)이 중단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된 지도층 친일인물에 대해서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아무리 국가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있더라도 친일행위를 했다면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10명 중 6명(65.6%)으로, 서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24.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회지도층의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화예술계 친일인물에 대해서는 그들의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하는 것에 과반이 약간 넘는 사람만이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58.2%)을 보여, 다른 분야의 친일 지도층에 비해 비판의 강도가 낮았다. 이는 문화예술계 인물과 작품에 대한 오랜 기간의 학습효과와 고정관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친일인명사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일조 …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지도층 인사의 수록은 적절.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인지도, 젊은 층일수록 낮아

<친일인명사전>에 대해서는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사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당수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 중 사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29.7%였지만, 여기에 <친일인명사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78.8%였다. 내용과 상관없이 <친일인명사전>의 인지도는 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사전 평가에 대해서는 시민 10명 중 6명 이상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사전이 친일문제를 공론화하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의견에 62.3%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일조했다는 의견에 62.1%가, 민족과 국가에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의견에 62.7%가 동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전의 내용과는 별개로 인지도만으로 사전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사전에 대한 사회적 평판,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와 희망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김활란・이광수・최남선・장면・유치진・홍난파・현제명 등 유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에 대해서도 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그동안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은 이들이 사전에 수록된데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보수층도 사전 수록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거나 찬반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박정희의 경우는 사전 수록에 대한 보수층의 의견이 찬성 32.4%, 반대 50.1%, 모름 17.5%로, 다른 인물들에 비해 반대가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 보수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우상화 현상까지 나타났던 것에 비하면, 이 조사 결과는 박정희 평판에 대한 보수층의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서는 시민 27.6%가 알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름만 들어봤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지도는 65.5%였다. 주목되는 것은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의 이념성향별 분포다. 진보층 40.4%, 보수층 25.5%, 중도층 22.1% 순으로 진보층이 가장 많았지만 예상과 달리 과반을 넘지 못했다. 반면 보수층은 중도층보다 연구소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연구소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일수록 연구소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연구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 가운데 60세 이상이 34.4%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33.1%, 40대가 26.6%, 30대가 25.8%, 그리고 19~29세가 13.8%로 가장 적었다. 특히 19~29세의 인지도는 다른 연령대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구소의 장기적인 활동 방향이나 전망과 관련해 반드시 참고 해야 할 내용이다.
연구소를 알게 된 계기 및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이어 친일인물 훈장 취소, 교과서 왜곡 및 국정화 반대운동, 친일인물 기념사업 반대 등의 순이었다.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에 대한 생각

과거사문제 해결이 사회통합과 발전에 도움. 뉴라이트의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아, 과거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행위는 법으로 처벌해야

과거사문제 해결 방향 및 뉴라이트의 역사왜곡에 관해서도 설문조사를 했다. 우선 과거사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65.8%가 도움이 된다고 응답해, 상당수 시민들이 과거사 문제 해결이 한국사회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왜곡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52.7%),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해 정부차원에서 과거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51%)이 그 다음이었다. 또한 시민 사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1,2순위를 합해 일본의 역사 왜곡(위안부,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64.1%)이 가장 많았으며, 친일 진상 규명(35.1%), 시민 홍보(29.3%), 역사교육 강화(26.3%)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최근 논란이 된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서는 38.2%가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11.1%만이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나 뉴라이트의 영향력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시민 10명 중 7명(70%)은 과거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폄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유럽의 경우처럼 법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해, 과거사 왜곡과 폄하에 대해서는 대다수 시민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 2020/01/2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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